타임머신을 작동한다. 철커덕, 탁, 윙, 애인의 코 고는 소리가 살짝 들렸던 것도 같다. 수많은 아이스크림들이 그득한데 순간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고 얼그레이를 골랐다. 철커덕, 탁, 윙윙윙,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단골 손님들이 미친듯 몰려 들었다. 담배 태우는 연기들이 테이블마다 그득했고 나는 정신 없이 커피를 내리고 칵테일을 만들고 재떨이를 비우면서 혹시 담뱃불이 붙어 있지는 않은가 하고 확인하며 쓰레기통에 쓸모없는 정신의 환락거리들을 내버렸다. 휴대폰 진동음이 울렸다. 잠깐 한숨 돌릴 틈이 있는가 홀을 둘러보니 한숨을 돌릴만 하다. 함께 일하는 언니에게 손짓으로 전화 좀 받고 오겠다는 모션을 취하고 테라스로 나갔다. 애인이 공부를 하다가 심심하다며 전화를 했다. 나 지금 바쁜데. 그럼 우리는 언제 사랑을 속삭여? 다른 사람들이 더 중요해? 나보다 더 그들이 더 중요해? 그들을 더 사랑해? 웃음이 터져나오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심심해하지 말고 공부해. 모레 만나면 그때 많이 놀자. 아니 싫어. 지금, 지금 나는 네가 필요해. 살짝 골이 난 애인에게 사랑을 속삭여줄 틈이 없었다. 언니가 테라스 문을 열고 얼른 들어와, 바빠. 나 들어가야 해. 내일 모레 만나. 이따 집에 들어가면서 전화할게. 황급하게 전화를 끊으려고 하니 네 인생에 나는 쉼표 같은 존재도 될 수 없어. 차라리 내가 없는 편이 네게는 더 나아. 너는 항상 바쁘고 항상 사람들 틈바구니에 있으려고 해. 나 같은 건 필요 없는 거지! 소리를 빼액 내지르지는 않았지만 거의 고함을 지르듯 툴툴거리며 전화를 탁 끊는 소리. 귀찮아 사랑 따위.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겠다는 인사도 하지 않고 탁 전화를 끊는 폼이 완전 왕자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했다. 귀찮아 사랑 따위. 


고뇌가 사람 얼굴을 비참하게 형상화시킬 수 있다는 걸 처음 겪고 나는 그를 이 정도로 사랑하지 않는데 대체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가 하고 곰곰 생각해보았다. 생각을 한다고 해서 나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지라 그렇다면 그 정도로 사랑한 건가 하고 자문도 해보았지만 온전하게 가질 수 없어 화가 날 때는 있어도 서로가 서로를 찾을 때 서로를 필요로 할 때 곁에 있을 수 없어 서서히 어긋나는 타이밍 사이로 미끈거리는 사랑의 껍데기만 서걱서걱 만져질 뿐. 온전하게 사랑할 틈도 만들어내지 못한 것에도 화가 났지만 얼마나 바쁘고 바쁘고 바빴는지 모른다. 탁, 윙, 철커덕. 윙윙윙. 정신을 차렸다. 다시 돌아왔다. 2021년 6월 10일로. 너를 사랑한 걸까. 너를 사랑하지 않았는데. 너를 아끼기는 했다. 너를 사랑했던 것도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다. 아가 같이 사랑해달라고 투정부리던 모습. 익숙해지지 않아 빠져나오려고 해도 매번 잡히던 손목에 무슨 마법의 주문이라도 새겨져 있었던가. 확신이 없는 사랑이라고 여겼고 확신이 있던 사랑조차 스스로 놓아버린 적 있고 확신이 있던 사랑이라 여겼던 사랑에 배신을 당했고 이따위 이런 게 사랑이라면 다시는 하지 않겠노라고 매번 악다구니를 내지르면서도 사랑이 좋았던 건지 낯선 살결에 매혹되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책이 도착했다. 룰루랄라. 연약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순간이 언제였을까. 잔인하게 마법의 술수를 부리면서까지 본모습을 내보이고 싶지 않았던 순간이 언제였을까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엘레나 페란테 뭐가 그렇게 좋았던 건가 잘 설명할 수 없었는데 백수린 소설 이야기 나누다가 알았다. 아주 살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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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6-11 14: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어린 시절의 사랑은 대부분 상대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내가 더 중요하죠. 그런 주제에 각자가 그렇다는걸 인정하기라도 하면 되는데 심지어 상대는 그 자신보다 나를 더 생각해주기를 바라고..... 그래서 대부분의 연애가 깨진답니다.
나이들어서 사이좋게 사는 부부나 연인들은 상대를 더 배려하고 자신보다 더 사랑해서 사는게 아니에요. 각자가 다른 존재가 각가에겐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는걸 인정해주는 것이랄까? 그게 되면 같이 사이좋게 사는거고,아니면 못사는거고요. ㅎㅎ 그냥 수연님 이야기 읽다보니 저 어릴 때 연애하던거 생각나서 주절주절하게 되네요. ㅎㅎ

수연 2021-06-14 11:49   좋아요 0 | URL
저는 못 사는 커플들을 너무 많이 보아서 사랑에 대해서는 좀 비관주의 견해가 강한 편입니다 후후후후 그래서 사랑을 잘 못하는 건가 싶기도 해요. 주변에서 잘 못 지내는 커플들을 보면 이런저런 사랑 기울기 견해차가 확실히 강한 거 같아요. 오랜만에 친구 만나서 옛날 남자친구 까다가 기억이 떠올라서 적어보았어요 저도 크크. 연애 사랑 이런 거 너무 머나먼 이야기인지라 ^^;;; 일상을 살아가는 게 너무 바쁜 하루하루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