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정희진, 2005년에는 정희진을 만나기 위해서 읽었고 - 저자와의 만남- 당시 결혼 전이었다. 연인도 없었고 자유로웠다. 그때 독후감은 사라졌지만 그때의 내가 읽은 것들이 나를 뒤흔들기만 했을 뿐 변화는 없었던 걸로 기억. 2021년 개정판을 읽으면서 지금 내 위치, 결혼한 여성, 아이가 있는 엄마, 나이들어가는 고령의 엄마 곁에서 독립된 생활을 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딸의 역할까지. 그때와는 현격하게 다른 위치에 서서 동일한 책을 다시 읽기.

마지막으로 여성학에 대한 편견 두 가지. "여성학은 편협하고 깊이가 없으며 공부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이 아니다."라는 주장과 "여성의 현실과 상관없이 너무 어려운 이야기만 한다."는 견해는, 사실 같은 이야기다. 이것은 모두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학문 개념에서 나온 편견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중에 여성학은 학문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므로, 여성학이 여성 현실과 거리가 있어서 여성운동에 도움이 안 된다 라는 비판에 대해서만 말하겠다. 법학이나 물리학의 ‘어려움‘은, 그학문을 비판하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언제나 여성학이 어려운 것만 문제가 된다. 나는 여성학은 어려워야 하고,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학문이 어렵고 고급스러워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한 기존 학문은 지배 계급의 도구였다. 만일 여성학이 어렵다면, 그것은 여성학자가 현학적이어서가 아니라 여성주의가 익숙하지 않은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여성학의 내용이, 여성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면, 새로운 세계를 향한 상상력과 용기를 주지 않는다면 존재할 필요가 없다. 여성학은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여성학이 쉽다면, 이는 우리 - P65

사회의 통념에 도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고, 그런 여성학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 P66

아들은 아버지의 질서를 따르기 위해 어머니를 죽이고 버린다.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이는 성별화(性別化, gendered)된구호이다. 아들은 어머니에 대해서도 아버지에 대해서도 이런 다김이 필요 없다. 현대 교육을 받고 ‘아버지의 사회‘에서 살아남아야하는 딸도 어머니를 죽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버리지는 못한다. 버리지 못한 어머니의 시체를 껴안고 울며불며 사막을 헤매는 것, 이것이 딸들의 인생이다. 몇 년 전 내가 쓴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묻기보다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싶다. 그러나 어머니를 만난 순간 나는 길을 잃었다."
두 번째 이유는 어머니 존재의 다중성·복합성이다. 나 역시 어머니인데, 이 ‘어머니 정체성‘, ‘어머니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내가 거부감과 동일시를 동시에 겪기 때문이다. 나는 어머니이면서 어머니가 아니어서 방황한다. 어머니 문제의 복잡성은 기존의 사고방식으로는 정의하기 어렵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는 ‘어머니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어머니는 특권화된 주체·노동·존재 · 경험·역할이며 동시에 탈특권화된(특권을 박탈당한) 장소이다. - P68

‘남자는 씨, 여자는 밭‘이라는 일상적 언설은 여성의 난자도 씨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지만, 이러한 과학적‘ 사실은 성별 제도의 위력 앞에선 아무런 효력을 내지 못한다. 남성이 씨라는 주장은 남성만이 인간 형성의 기원이며 인류의 본질(‘imanikind)이며 생산의 주체라는 것을 은유한다. 그러나 이러한 담론을 통해 가부장제 사회가 진정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행위자로서 남성의 이동성, 자유, 초월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씨는 싹이 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 변화를 거듭한다. 씨는 변태(變態)한다. 씨의 기원성, 유동·변화·발전성에 비해 밭 혹은 땅, ‘어머니 대지‘의 본질은 정박성과 불변성이다.
움직이지 않는, 움직일 수 없는 여성은 언제 어디서나 어머니로 환원되고 동질화된다. 여성은 역사와 정치의 질서 밖에 존재하는 자연(고향, 향수, 집……)이라는 의미다. 역사와 문화, 정치는 인간의힘으로 변화·역동하는 것이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다. 자연은 운명으로 간주된다. 인간(남성)에게 개척되거나 그들이 만들어내는 역사의 질료가 될 때에야 비로소 가시화(‘발견‘)된다(물론 자연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되는 것이다). 밭은 씨에 의해서만 의미를 획득한다. 그래서 개척지는 ‘처녀지‘ 이고, 원시림은 ‘처녀림‘이다. 식민시대 미국 지명이 여성 명사화된 것도 이 때문이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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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1-06-04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이라는 글자가 붙은이상 여성학도 당당한 학문이죠

Vita 2021-06-04 08:35   좋아요 0 | URL
그런데 아직 학문이라고 인정 안 하시는 분들이 꽤 많아서 가야할 길이 더 많이 남아있는듯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