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염없이 남편만 바라보면서 인생을 보내는 건 통째로 내 삶을 내다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야." 



 이민 이야기를 농담조로 했다. 한국이 망할지 지구가 망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리 낙관적인 나도 때때로 이렇게 나날들을 보내는 게 언제까지 가능할지 의문에 사로잡힐 때 있다. 넓지 않은 텃밭을 가꾸며 살아가지만 두 분 드시기 넉넉하게 밭을 일구신다. 날씨가 이래서 아이들이 모두 다 시들시들하다. 해를 받아 쨍쨍하게 자라줘야 하는데 걱정이구나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굵은 소금에서 후라이팬까지 이야기를 여기저기로 나누어 하다가 농담조로 이민 이야기를 꺼내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얼른 능력 키워 대한민국을 떠나 더 좋은 나라로 떠나라 모두 데리고 라고 농담조로 말씀하시다가 문득 진지하게 하염없이 남편만 바라보면서 인생을 보내는 건 통째로 내 삶을 내다버리는 짓과 마찬가지라는 말씀. 순간 우리 엄마랑 통화하는 줄 알았다. 어머님도 우리 엄마도 모두 한 남자만을 바라보며 인생을 통으로 흘려보냈다. 자식들에게 헌신적이었고 불완전한 사랑에 절망을 하면서도 단 한 번도 바닥에 쓰러진 적 없다. 전화통화를 끝내고 며칠 동안 소설을 읽느라 엉망인 집 안을 휘휘 둘러보다가 오늘은 좀 치워야겠군 하고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켰다. 보봐르의 좋아하는 사진을 컬러프린터기로 커다랗게 뽑아서 냉장고 앞에 한 장, 책상 앞에 한 장, 공부하는 투명파일 앞에 한 장 끼워놓았다.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알았다. 우리 엄마와 시엄마의 얼굴이 보봐르 얼굴 사이로 겹쳐 보였다. 아 그렇군. 릴라와 레누 얼굴도 그 사이로 겹쳤다. 엄마는 내게 수시로 하는 이야기니 그러려니 했는데 결혼한 이래로 처음 어머님은 내게 자신의 생각을 말씀하셨다. 그 짧은 한 마디에 너는 그렇게 살지 말아라, 너는 꼿꼿하게 네 길을 가라. 그렇다고 자식 새끼랑 남편을 버리라는 말은 아니고. 여성 대 여성으로 서로를 마주한 찰나. 주체로서의 삶을 한평생 계속 살아왔고 현재도 그러하지만 나보다 덩치가 크고 나보다 더 목소리가 큰 사람의 등이나 옆에서 자그마하게 어깨를 움츠리고 목소리를 가만가만 내는 일이 여성의 삶이라고 배워온 나의 엄마들. 그들이 새하얀 머리카락을 짧게 치고 등이 굽고 어깨가 굽고 허리가 굽은 몸으로 세월의 나이테가 그어진 얼굴로 내게 하는 말,말,말들. 그것이 아니었더라. 그렇게 사는 게 아니었더라. 너는 아직 머리에 새하얀 눈발이 내린 것도 아니고 온몸의 뼈에서 아구구구 소리가 나지도 않고 얼굴에 나이테도 몇 개 지니지 않고 있으니 시작을 말하기 너무 딱 좋구나. 갈등은 끝없으니 그건 인간의 어쩔 수 없는 길이 아닌가 하고. 그러니 너는 커다랗고 드넓은 남자의 등만 바라보고 살지 말아라. 그런 말,말,말. 길고긴 소설을 완독하고난 후 허무할까봐 약간 쫄보 마음을 품었다가 무사히 완독했다. 마침 6월이다. 새로운 시작을 뜻하는 새소리도 흐린 구름들 사이에서 끝없다. 


 나폴리 4부작은 내 욕망을 명확히 거울처럼 보여주는 소설이다. 닮고싶은 인물들. 꿈속에서나 꾸어보는 욕망들. 유약하고 저질 체력이지만 그럼에도 이번 인생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어떤 사람들과 사랑을 하며 살아가고 싶은가. 그들과 시간을 보내며 함께 하고싶은 이야기가 무엇인가 그런 것들을 세세하게 보여주어서 저 머나먼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일어났던 일이라고 상상하기 힘들다. 레누와 릴라가 내 친구와 나 같았고 내 이모와 내 엄마 같았다. 인간에 대해서 여성에 대해서 엄마에 대해서 딸에 대해서 그 모든 조건들을 헤아리면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져들며 읽어나갔다. 결국 나는 어떤 인간이 되고싶은가. 기나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물어보았다. 


 에피소드 하나, 


 "격정적_인 이게 무슨 뜻이야?" 책을 읽고 있던 내 뒤로 살그머니 다가와 딸아이가 물었다. 응? 읽는 책에 그런 단어가 나오니? 놀라서 물었더니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내가 읽고 있던 책의 한 구절을 가리킨다. 나폴리 4부작 4권을 읽던 중이었고 딸아이가 가리킨 문장에 '격정적인 섹스'가 있었다. 순간 당황해서 아빠한테 물어봐 했다. 아이 아빠는 격정적인_ 한자 뜻을 알려주며 설명해주다가 그런데 이런 단어가 나오는 어려운 책을 읽니? 책 제목이 뭐니? 물어봐서 아이는 내가 읽고 있던 책을 냉큼 가져가며 엄마 잠깐만! 서재에 있는 제 아빠에게 달려가 그 구절을 보여주었다. 둘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문 너머 들렸다. 빨리 내 책 가져와! 소리를 지르니 아이가 책을 가져와 주면서 어제 선생님이랑 이야기하면서 안나 카레니나가 그런 막장 내용이라면서요? 선생님 하니까 선생님이 막장 중의 아주 최고 막장입니다. 라고 답했어. 안나 카레니나가 너희 선생님이 제일 좋아하는 소설이라고 하셨지? 응 엄마. 그래서? 그리고 선생님이 곧바로 무슨 말씀을 덧붙이시든? 물어보니 막장 중의 최고 막장인데 거기에 인생이 모두 담겨 있어서 그래서 배울 것들이 아주 많다고 하셨어. 그래서 추천해주신 거래. 응, 좋지. 읽어볼 만하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근데 엄마, 엄마 안나 카레니나 보니까 뒷부분 깨끗하던데. 다 안 읽은 거지? 그래서 얼굴이 붉어졌다. 올해 꼭 완독하고 말 테다.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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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6-01 15:2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안나 카레니나>는 막장이 맞는거 같아요. 재미있고 배울게 많은 막장 ㅎㅎ 딸의 센스가 대단한거 같아요 ^^

Vita 2021-06-01 15:36   좋아요 5 | URL
담임선생님이 센스가 있으신 거 같아요, 그래도 초딩이 읽기에는 아직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

붕붕툐툐 2021-06-01 20: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저는 안나 카레니나 시작도 안했는데, 같이 읽으면 좋겠당~(심지어 안나 카레리나인 줄 알았다는...ㅋㅋ)

단발머리 2021-06-01 21:51   좋아요 1 | URL
전 항상 카레리나로 쓰고 나서 나중에 카레니나로 고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Vita 2021-06-02 09:28   좋아요 1 | URL
저는 가을쯤 시작하려구요 툐툐님 ^^ 먼저 시작하셔도 좋아요 저는 느림보니까 천천히 뒤쫓아갈게요 :)

단발머리 2021-06-01 21: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린 레누가 새벽에 일어나서 공부하는 대목에 줄을 안 긋고 (그 때 어려서.... 책에 줄을 안 긋고 그랬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북마크 붙였던 기억이 나네요. 새벽에 일어나서 공부하던 레누, 성공해서 좋았어요.

Vita 2021-06-02 09:29   좋아요 1 | URL
새벽에 일어나서 그것도 자기가 알아서 공부하는 레누 예뻤어요. 하지만 새벽에 일어나기 너무 힘들어 오늘도 실패한 아줌마는 새벽 기상이 힘든지라 웁니다 ㅋㅋㅋ

단발머리 2021-06-02 09:30   좋아요 1 | URL
비결 공개합니다! 새벽 기상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10시 이전에 취침해야 합니다!!🤭🤭🤭

Vita 2021-06-02 10:59   좋아요 1 | URL
11시 취침해서 7시 50분 일어났습니다 ㅠㅠ

꼬마요정 2021-06-01 2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안나랑 브론스키보다 레빈이랑 키티가 더 좋았어요^^ 근데 진짜 선생님 멋진 듯 해요. 저도 배우고 갑니다. 나폴리 4부작 읽어야 하는데 사놓고 쳐다만 보네요ㅜㅜ

Vita 2021-06-02 09:30   좋아요 1 | URL
레빈과 키티! 기억하도록 할게요 꼬마요정님_ 모두 다 새까맣게 까먹었습니다 ㅋㅋㅋ 네, 선생님 엄청 멋있어요. 외모도 아름다우십니다 더구나 ㅋㅋㅋㅋ 나폴리 4부작 펼치시면 후루루룩 읽으실 거예요 꼬마요정님, 재독 곧 들어갈 예정인데 함께 읽어요 :)

공쟝쟝 2021-06-02 10: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시엄마 덕질의 가능성을 여기서 만나다니요^^ 저는 수연님의 글을 읽을 때 점점더 긍정적이어집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균형적일지도 모르는 공존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해져야하는 당위를. 가자 가자 나폴리로😍

Vita 2021-06-02 11:01   좋아요 2 | URL
긍정의 대마왕입니다, 근데 또 이게 독이 될 때도 있어서. 읽으면 읽을수록 저는 그대가 긍정의 대대마마왕이 아닌가 하고 느끼는데_ 나폴리는 살러 가기는 싫어 ㅋㅋㅋ 그냥 놀러 갑시다 살러 가는 건 다른 지역으로 ㅎㅎ

공쟝쟝 2021-06-02 12:54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아 저의 긍정은 페미니즘의 긍정……. 여자가 여자를 돕는 가능성과 세계에 대한 긍정 ㅋㅋㅋㅋ 푸하하하 (_-_) 백래시에 맞서는 나는야 페미니즘 과몰입녀!! 어흥~!!! 누가 페미니즘을 불만쟁이의 사상이라 하였나? 누구인가? 여기 긍정의 대대대대대대마왕들이 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