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시선
이승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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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살 수 없는 세상, 혼자 태어날 수 없는 수동적인 출생, 탄생의 과정 역시 마찬가지. 만일 스스로 만들어지고 스스로 태어날 수 있다면 태어나자마자 혼자 벌떡 일어서고 사냥을 하러 나갈 수 있다면 이 세상의 기원은 어떤 식으로 기록되었을까.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리라. 
 
아버지 이름을 모르는 한 남자가 있다. 한명재. 폐결핵에 걸린 젊은 대학원생. 엄마의 품에 안겨서 부서질세라 흠이 갈라 조심스러워하는 어머니의 애정이 벅차지도 않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역할까지 온전히 해냈기에 그에게는 아버지의 부재가 남다르게 다가오지도 않았다. 요양을 위해서 경기도 근교에 공기 좋은 곳에서 한없이 책을 읽으며 쉬는 그에게 이웃이란 남자가 다가온다. 아버지의 부재를 철저하게 일깨워주는 그. 악몽을 꾸고 왜 나는 여태 아버지의 이름조차 모르지 갑자기 존재의 지진을 경험하게 된다. 외삼촌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하는 명재. 아버지를 찾아서 무얼 얻고자 하는지 묻지만 그에게는 아직 대답을 할 여력이 없다. 다만 아버지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이제까지 만 삼십 년 동안 잊고 살아왔던 아버지의 존재. 아버지가 살고있다는 그 도시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탄다.
 
버스 안에는 불안정한 침묵이 감돌았다. 지친 낙타의 신음 같은 엔진 소리만 침묵의 표면을 휘저었다. 오르막길을 오를 때 버스가 내뿜는 배기가스가 간혹 차내로 들어왔다. 공기 속에 이미 가득 차 있는 악취에 스며든, 연소가 덜 된 일산화탄소와 질소가 속을 뒤집어 메슥거리게 했다. 먹은 것이 없다고는 해도 차멀미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신물을 삼키며 어질어질한 머리를 손가락으로 누르는데, 무슨 불길한 조짐처럼 [말테의 수기]의 첫 문장이 떠올랐다. 도대체 나는 그곳에 살려고 가는 것일까, 즉으려고 가는 것일까.  (9) 
 
도시에서 마주치는 군상들을 묘사하는 모습은 정말 릴케의 [말테의 수기]를 떠올린다. 마주치는 그들 안에서 내 자신을 찾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시선을 피하고 묵묵히 제 갈길을 가고자 하는 유혹에 쉬이 굴복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처음 보는 아버지의 얼굴은 사진. 나의 얼굴을 그 얼굴에서 발견할 수 있기를 한편으로 바라면서 낯선 눈, 코, 입을 바라본다. 낯섦 속에서 익숙함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와 마주한다면, 그 역시 내 얼굴에서 자신의 젊은 얼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회의적이다. 동화적인 광경을 바라지도 않는다. 나는 아버지라는 낯선 사내에게 그의 이름을 묻는 대신 (이미 외삼촌을 통해서 아버지의 이름을 알고 있으니) 내 이름과 어머니의 이름을 알려준다. 당신이 버린 사람들의 이름을 아직 기억하고 있느냐?면서. 
 
나바하족의 쌍둥이 전사 이야기, 그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자신이 될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는데 지금 그는 나바하족의 쌍둥이 전사 중 한명으로 전락하고 만다. 인정받고자 믿음을 얻기 위해서 내가 당신의 아들이고 당신이 바로 나의 아버지라는 진실을 알려주고자 목숨을 걸고 머나먼 여행을 했다. 명재는 섭생과 요양을 해야 하는 폐결핵 환자이다. 자칫 조금만 잘못해도 그는 목숨을 잃을 지경이다. 그런 점에서 쌍둥이 전사와 마찬가지다. 하지만 결말은 같다.
 
아버지는 자기를 찾아온 아들들을 왜 그렇게 죽이려 했을까. 왜 그렇게 인정하지 않으려 했을까. 아들들은 의문을 가졌지만 묻지 못했다. 그 모든 시험을 통과한 쌍둥이들에게 아버지 태양이 물었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느냐? 왜 나를 찾아왔느냐?" 아버지를 찾아 바위산과 갈대숲과 선인장 밭과 끓는 사막, 그 죽음의 길을 헤쳐 온 아들에게 아버지가 묻는다. 왜 나를 찾아왔느냐?  (중략) 사랑 때문이라고 말하지 말자. 그처럼 모호하고 지시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내용이 텅 빈 단어가 어디 있는가. 이 세상의 아버지들이 아들들을 사랑한다는 말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본성이 아니다. 아버지들은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한다. 사랑은 아버지들의 권리이거나 의무이다. (131-132)
아버지와의 만남은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무얼 기대하고 찾아온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식의 만남과 과정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아버지에게 감금당하고 아버지를 위협하는 철부지 아들로 사람들에게 보였을 테지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아버지는 전혀 반기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나를 만들고 이 세상에 내놓은 사람들, 부모와 자식, 그 제일 친근한 관계에서 사람들은 때때로 제일 크나큰 상처를 받고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한다. 주인공은 운이 좋았다. 어머니는 부재한 아버지의 역할까지 무사히 맡은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온전히 어머니로서만이 할 수 있는 본분 그 사랑을 명재에게 준 것이 아니었던가. 넘치고 넘쳐흘러 명재에게는 부담스럽지만 그 넘치는 사랑이 없었더라면 명재는 온전한 명재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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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모자 2021-04-24 0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 이 소설 오랜만에 보네요. 비평 과제 작품으로 이 소설을 골랐다가 후회한 기억이 나네요 ㅜ 그당시 처음 읽은 이승우 소설이었는데 너무 모호했습니다... 지금은 이승우 소설 많이 읽어서 익숙합니다ㅋ 이 소설이랑 비슷한 느낌은 특히 소설집 <모르는 사람들>을 꼽을 수 있을 거 같네요. 이 책도 꼭 읽어보세요~

수연 2021-04-24 11:28   좋아요 2 | URL
모르는 사람들은 아직 읽기 전입니다. 후훗, 저도 읽고 허공 바라보고 한숨 쉬던 기억 나네요. 옛날 읽고 기록한 거라서 솔직히 가물가물합니다. 이 책부터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2021-04-24 1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24 2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딩 2021-05-08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이승우님 작품이네요!!!

서니데이 2021-05-08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