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것이 도착했을 때 우리는 어떤 영향을 받게 될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도착한 배는 비어 있을 수도 있고, 무언가로 가득 차있을 수도 있다. 비어 있는지 아니면 가득 차있는지는 도착 전까지 알 수 없다. 따라서 핵심은, 우리의 감정이 향하는 지점이 우리 대의명분의 대상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내일호나 라틴어 이름의 배[<아일랜드>에 나오는 레노바티오Renovatio] 같은 행복의 배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도착하는 배는 미래에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리라 기대되는 그 배다. [그러나] 우리는 배를 잠재력 가득한 것으로 봄으로써 우리의 행복을 배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행복에 방향[의미]이 없음을 받아들이고 배의 도착을 기다리는 게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배는 도착할 수도 있고 도착하지 않을 수도 있다. 배가 도착하든 말든, 우리는 그 도착 지점에 가기 위해 노력한다. 배가 도착했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가 희망하는 바를 줄지 안 줄지는 알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할 경우] 배는 더 이상 행복 대상으로서의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배가 가득 차있으리라는 전망이 우리 여정의 핵심은 아니게 되는 것이다.

방향성 없는 감정이라 해서 무의미하거나 헛된 것은 아니다. 그건 단지 그 감정을 일으키는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향해 있지 않을 뿐이다. 어쩌면 배가 자유롭게 표류하도록 한다면 혁명적 행복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 행복은 우연에, 우연의 도착에, 어쩌면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에 열려 있을 것이다. 우리는 뭔가가 발생하기를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기다린다는 건 우연발생이 제거된 유산을 받아들임으로써 우연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런 유산을 거부한다는 것은 일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게 할 때, 우리는 우연히 일어나게도 하고 일을 만들기도 한다. 우연한 일은 마주침, 마주침의 우연, 우연 마주침이다. 그런 마주침들은 일이 발생하는 토대를 재창조한다. 토대를 재창조한다는 것은 아직 포기하지 않은 과거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길을 잃으면, 다른 길이 보일 수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을 것이다. 자크 데리다의 생각처럼, "앞으로 발생할 것은, 어쩌면, 단지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다. 그것은 마침내 어쩌면perhaps에 대한 생각, 어쩌면 그 자체일 것이다"(Derrida1997/2005:29)

"어쩌면" 안에 들어 있는 "우연"hap이 "행복"happiness에도 들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자. 행복한 미래란 어쩌면의 미래다. (357-358)

사라 아메드의 [행복의 약속]을 읽는다. 날이 날이기도 해서 이번달 여성주의 읽기를 시작할까 하다가 휴식 삼아 잠깐 펼쳤는데 이 언니 말빨에 그만 넘어가서 두 시간 넘게 읽기. 속독해서 정리는 힘들듯. 허나 사라 아메드의 말하는 방식이 마음에 꽤 와닿는 지점들 한가득. 특히 영화 [디 아워스]에 대한 평은 이제까지 읽은 평 중 압도적. 다시 영화를 보고싶은 마음도. 행복에 대한 정의가 얼마나 일괄적인지는 세세하게 말할 필요도 없지만 얼마 전 읽은 소설에서 산을 너무 사랑해서 산에서 살고자 하는 한 여인 이야기, 말도 거의 없고 하는 일도 거의 없지만 산에서 살고자 해서 산 사람과 결혼을 했으나 그 남자는 도시에서 살아가고자 한다. 아이를 낳고 기르며 계속 산에서 살기를 원하지만 남편은 내려가자고 한다. 여자는 그 후로 강한 거절의 뜻으로 입을 닫는다. 침묵과 고독이 좋아 산에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여자를 두고 사람들은 마녀라고 부른다. 행복이 꼭 같은 모양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고 아들은 자신의 친구에게 그 이야기. 이 책을 읽는 동안에 겹쳤다. 하지만 이런 어마무시한 책을 이렇게 파스텔톤 표지로 낸 후마니타스의 의도는 아 모르겠다. 원서 커버가 훨씬 마음에 듭니다. 그럼에도 좋은 책 번역해주셨으니 칭찬하겠다, 후마니타스. 5월에 말과 활에서 줌으로 사라 아메드 언니 특강 열린다고 한다. 영어 실력이 비루한지라 패스한다. 책의 제목인 [행복의 약속]은 마치 하나의 행복론을 연상시키는데 더 정확한 책 내용을 압축한 것은 부제이다. 불행한 자들을 위한 문화비평. 부제가 오히려 제목이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살짝 있지만 그건 너무 다이렉트인가 싶기도. 사라 아메드의 첫 책을 읽었으니 이후로 하나씩 찾아 읽을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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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3-08 2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제가 더 멋지다는데 동의합니다. 제목만 보면 자기계발서같아요. ㅎㅎ

Vita 2021-03-09 12:07   좋아요 0 | URL
네 원제 그대로 가기는 했는데 한국어번역본 제목을 바꾸었어도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

후마니타스 2021-03-24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후마니타스 편집부입니다. 행복의 약속 재밌게 읽어 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2, 3장의 영화비평과 문학비평 부분 특히 재밌게 읽었습니다. 제목은 저 역시 비슷한 생각이어서 (솔직히 원저작권사인 듀크를 원망.. 왜 저런 제목에 부제도 없이 ㅠㅠ) 부제를 달아 본 것입니다. 제목을 아예 바까볼까도 생각했지만.. 또 한편으로 ‘행복이 약속으로서 작동하는 방식’을 다룬 게 전체 책을 포괄하는 내용이기도 해서 그러기는 좀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표지는 사실 몇 가지 안이 더 있었고.. 퀴어 러브 컨셉이 저희 출판사가 내세운 표지였으나.. 역자선생님들이 전체 책을 포괄하지 못한다고 동의하지 않으셔서 저 표지로 결정되었습니다. 추상적으로는 행복 이데올로기적인 느낌을 나타낸다는 생각도 ㅎㅎㅎㅎ 여튼 좋은 서평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Vita 2021-03-24 12:4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매번 좋은 책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제는 진짜 최고였어요. 표지만 보고 저도 행복론 이야기인 줄 알고 구입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펼쳐보았더니 행복론이 아니더라구요. 표지 이야기는 투덜거려본 건데 이렇게 구체적으로 답변 주시니까 넘 좋아요. 투덜거릴 때는 마구 투덜거려야 하는구나 하고 새삼 깨달았습니다. 좋은 책이니 많은 이들이 읽는다면 좋겠습니다. 제대로 된 서평은 아닌데 글까지 달아주시니 민망하고 감사합니다. 후마니타스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