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여성 첫 세계 일주기
나혜석 지음 / 가갸날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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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개월 동안 길 위에서 살았던 나혜석의 문장들. 시대를 앞서간 불운한 여인. 그대로 차라리 파리에 남았더라면 어땠을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환한 빛 아래 서서 배웅을 받으며 한국을 떠나 세계여행을 떠났다. 다녀와서 더 늙고 더 커다랗게 변한 나혜석은 가감없이 모든 것들을 솔직하게 쏟아내었다. 조선 여성으로 태어나 세 아이를 두고 남편과 세계로 유랑을 떠난다. 만일 그 인생에 20개월의 보고듣는 시간이 없었더라면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살았을까. 가지 않았던 길을 잠시 헤아려본다. 끝없이 사람들 틈바구니에 있다가 길 위에서 홀로 죽어갔을 때 그 심정이 어땠을지. 자아를 찾아서 행복한 여성이었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불행한 삶을 살다간 비극의 여인이라고 해야할까. 파편적으로만 주워들은 것들이 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나혜석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할 것. 코즈모폴리탄의 인생을 산 스가 아쓰코와 겹쳤다. 시대도 달랐고 공간적 배경도 달랐지만 어쩌면 조금만 더 늦게 태어났더라면 혜석이 언니 다른 인생을 살다 갔을지도 모르는데. 읽을수록 안타깝고 가슴 아팠다. 자신의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오리무중 암담함 와중에는 희망이 더 컸을 텐데.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에서《삼천리》 1932.1

구미 만유 1년 8개월 동안의 나의 생활은 이러하였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서양 옷을 입고, 빵이나 차를 먹고, 침대에서 자고, 스케치 박스를 들고 연구소를 다니고(아카데미), 책상에서 프랑스어 단어를 외우고, 때로는 사랑의 꿈도 꾸어보고, 장차 그림 대가가 될 공상도 해보았다. 흥나면 춤도 추어보고, 시간 있으면 연극장에도 갔다. 이왕 전하와 각국 대신의 연회석상에도 참가해 보고, 혁명가도 찾아보고, 여성 참정권론자도 만나보았다. 프랑스 가정의 가족도 되어보았다. 그 기분은 여성이요, 학생이요, 처녀로서였다. 실상 조선 여성으로서는 누리지 못할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장애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P87

고국에 돌아오다. 12일 오전 8시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친척들과노모, 세 아이가 마중 나왔다. 나는 꿈인지 생시인지눈물도 아니 나오고, 감상이 이상스럽다. 자동차로 동래에 돌아왔다. 1년 8개월 전에 보던 버섯과 같은 집, 먼지 나는 길 원시 그대로 있다. 다만 사람이 늙고 컸을 뿐이다. 무엇보다 노모의 기운이 좋고, 삼남매가 건강한 것은 다행한 일이다. 아, 아, 동경하던 구미 만유도 지나간 과거가 되고, 그리워하던 고향에도 돌아왔다. 이로부터 우리의 앞길은 어떻게 전개되려는고.- P225

〈신생활에 들면서〉에서《삼천리》 1935. 2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 가서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가 텅 빈 나는 미래로 나가자. …4남매 아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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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6 1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26 1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26 1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20-08-26 1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었던 책들에서 나혜석이란 인물이 많이 나왔었어요. 그래서 알게 되었죠.

수연 2020-08-27 07:54   좋아요 1 | URL
화가로만 알고 있었지 문장들은 읽은 게 처음인지라 뒤늦게나마 찾아보려고 해요. 그 시대에 이런 말을 과감하게 하는 이가 있었다는 것도 놀랍구요.

han22598 2020-08-27 0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도기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라고 본인이 고백할 만큼 주어진 그 시대에서의 업악과 핍박이 얼마나 심했을지 가히 상상히 되지 않네요. 나혜석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되었을때가 20대 초였는데, 물론 본인의 인생을 놓고 봤을때는 평탄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없었겠지만, 우리나라에도 이런 여성이 과거에 계셨구나 하는 생각에 희망의 씨앗을 보았던 기억이 나네요.

수연 2020-08-27 07:58   좋아요 1 | URL
시대가 시대여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운이 따라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싶어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것과 같은 이유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지는 않았을까 과감한 문장들을 보면서 느껴졌어요. 이때나 저때나 혜석이 언니 성격이었으면 평탄하게 살기는 힘들 것도 같구요. 읽으면서 좋았습니다. 더 오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_ 그 생각이 계속 이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