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제일 좋다, 이 말을 계속 들어서 나는 그냥 투덜거렸을 뿐인데 나도 모르게 설득당하고 있었다. 네가 가진 모든 것들을 보아라, 이 이상 더 좋은 것들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런 속삭임도 계속. 그래서 책도 읽지 못하고 있었다. (실은 놀러 다니느라......) 그러다가 어젯밤에 에이드리언 리치의 산문을 읽었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를 처음 읽었을 때가 민이 낳고 한창 뛰어다니기 시작했을 때였다. 거침없이 뛰어다니는 모습이 너무 위태로워보여서 나는 때때로 달려가서 아이를 덥석 안아 들어올렸다. 계속 그렇게 뛰어가다가 다시는 내 눈이 닿지 않는 곳까지 다다를까봐 두려웠던 마음.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과 샴쌍둥이처럼 끊임없이 닿아있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항상 시소를 타던 때, 그때에서 지금까지 달라진 게 있다면 무엇일까. 며칠 동안 심하게 유혹에 시달리다가 아직은 아닌 거 같은데 일단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서 딱 100권은 채워야 돼, 라고 대꾸하니 유혹에 실패한 자는 살짝 삐쳤다. 유혹을 거부해서 삐친건가.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집은 사라져버렸다. 아마도 다른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고 유학을 계획할 때 친구들에게 나눠준 책더미 속에 있었을 수도. 에이드리언 리치 시집은 7월의 책쇼핑 목록으로. 민이 에밀리를 꺼내어 다시 읽는 동안 나도 딱 에밀리 디킨슨 챕터 읽고 있어서 책 안에 있는 시 몇 편 읽어 줬더니 좋아한다. 나는 엄마 나중에 이런 얼굴을 가진 할머니가 되면 좋겠어, 용감하고 자상해보여. 실은 요 멘트 하나로 안주하기를 멈추자, 유혹을 벗어나도록 하자_ 라고 다짐했다. (가부장의 틀을 벗어나) 자기 하고싶은대로 한평생 살다보면 모두 마녀가 되거나 괴물처럼 요상한 얼굴이 되어서 몸은 망가지고 그러다보면 인생을 망가뜨리게 되어있어_ 이건 아주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엄마와 이모들과 나를 키워준 할머니들이 줄곧 하시던 이야기. 진짜 시도때도 없이 들었다, 다양한 형태로 그 말의 변주들. 여자는 여자의 적이야, 이 말 대학교 다니면서 계속 했는데_ 어느 순간부터 여자는 여자의 적이란 말 더 이상 하지 않는데 심정적으로는 이 말에 아직도 고개 끄덕일 때 있다. 


 에이드리언 리치는 이렇게 멀쩡하게 용감하고 자상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일단은 내가 나를 살려봐야하는 거니까 유혹에 살짝 넘어가는 척 하다가 아직은 아닌 거 같은데 라고 구슬렸다. 무얼 기다리는지는 시간 살아봐야 아는 거니까. 커피 다 마셨고 쿠키 다 먹었다. 이제 샌드위치를 만들고 수프를 끓이자. 어제 늦게까지 숙제한 딸아이를 깨울 시간이다. 






 

  El cambio es inevitable pero el crecimiento es opcional. - John Maxwell 

  변화는 피할 수 없지만 성장은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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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7-17 1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성장은 선택. 양철북 오스카가 생각나 버림 ㅋㅋ

수연 2020-07-17 16:20   좋아요 1 | URL
오스카 아직 안 읽은 1인 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07-17 17:28   좋아요 1 | URL
아 저는 양철북 영화랑 소설이랑 다 너무너무 좋아했어요 라고 해봤자 벌써 본 지가...육 년 됐나... 좀 징글징글한 거 좋아함....

수연 2020-07-17 20:35   좋아요 1 | URL
양철북 동생 방에 고이 있던 거 기억나는데 나는 펼쳐볼 생각도 안했어요 글고보니. 나 이제 좀 정신 차림. 근데 쿤데라 읽다가 내던져버렸어요. 악 몰라 못 읽겠다!!!

페크(pek0501) 2020-07-17 1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오래전에 읽은 인형의 집. 그 당시 충격적이었죠.

수연 2020-07-17 20:36   좋아요 1 | URL
저는 내일 읽어요~ 내용은 대충 아는데 그러고보니 제대로 읽은 적은 없더라구요. 고전의 아우라에 가려져서 나 분명 어렸을 때 읽었을 거야 했는데 안 읽었더라구요. 페크님 책 언제 나올까 계속 기다리고 있어요~ :)

2020-07-17 2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18 0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