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세 엄마, 내가 조만간 세상을 뜰 것 같지는 않지만, 만약 그렇게 되면 부디 이 어린 것을 라세 엄마가 데려가서 직접 키웠으면 해요. 부디 라세를 덴마크에 홀로 남겨 두지 마요. 만일 라세가 홀로 남겨지면 내가 헛살았다는 느낌이 들 거예요." (116)


 "그 집에 도착해서 모든 것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라세는 의자에 배를 깔고 엎드려 소리 없이 울었다. 어차피 어른들 마음대로 할 테니까 울어 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알아챈 듯 전혀 소리 내지 않고 울다니! 그 눈물은 지금까지도 내 가슴에 흐르고 있다. 아마 내 생의 마지막 날까지 계속 흐르겠지. 어쩌면 내가 어떤 상황에서든 어린이 편을 드는 것도, 옹졸하고 잰 체하는 공무원들이 어린이를 별 생각 없이 이리저리 보내는 모습에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도 그 눈물 때문일지 모른다. 그들은 어린이가 어디서나 금세 적응한다고 생각하지!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어린이는 새로운 환경에 쉽사리 적응할 수 없다.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힘에 떠밀려 그저 체념할 따름이다." (117)


 "나는 대단히 존경받는 가정에서 자랐어요. 우리 부모님은 신앙심이 매우 깊답니다. 우리 가족이나 친척 누구도 명예에 흠이 갈 만한 행동을 한 사람은 없었어요. 라세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 어머니가 소위 사생아를 낳은 젊은 여인들을 바라보던 경악과 분노에 찬 눈빛을 나는 아직까지도 기억합니다. 그런데 내가 바로 사생아의 엄마가 된 거예요. 나 때문에 부모님이 화병으로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도 나는 라세를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처음에는 두 분의 허락을 받지 못해서 스톡홀름으로 데려왔지만,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빔메르뷔로 데려갔지요." (129)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힘에 떠밀려 그저 체념할 따름이다.' 


 천안 계모 사건이 계속 머릿속에서 가시지 않는다. 열여덟 나이에 미혼모가 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외딴 곳에서 아들을 낳아 그 아이를 위탁모에게 보내고 주말마다 아이를 보러 기차를 탄다. 나이가 많고 부유한 남자의 아내가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남자의 다른 아이들까지 맡아 기를 자신은 도저히 없다. 사랑했지만 그 사랑이 자신의 인생까지 통째로 던져도 충분할 정도의 사랑은 아니었다. 열여덟 나이에 불 같은 사랑에 잠깐 몸을 던졌는데 임신을 할 줄이야. 사생아를 낳게 될 줄이야! 아이의 아빠는 결혼을 하자고 하지만 법적으로는 아직 유부남이다. 이혼을 하고 결혼을 한다손 치자. 결혼을 해서 어린 자신을 좁은 인생의 틀 안으로 집어넣는 것도 싫고 자신의 아이들도 아닌데 낯선 아이들을 온전하게 키워낼 자신도 없다. 그래서 도망친다. 낯선 곳에서 자립해서 살아가야하는 어린 여자의 고단함과 외로움과 비탄을 서술한 대목에서는 내 이야기도 아닌데 '어린 여자의 고단함과 외로움과 비탄'이 오롯이 느껴져서 몸을 잠시 떨었다. 가진 거 하나 없이 맨땅에 헤딩해야 하는 그 느낌, 그 절박함을 다시는 느끼고싶지 않기에. 젊음이 가진 보석들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녔는지 안다. 그러나 젊음이 주는 그 불안이 어느 정도의 터널을 만들 수 있는지 또한 지나쳐왔기에 안다. 솔직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딸아이가 읽고 한없이 울면서 만나는 이들 모두에게 이 책을 한 번 읽어보세요, 꼭 읽어보셔야 해요. 나는 아직 읽어보겠노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아마도 이 책을 읽는 동안 함께 읽어볼듯. 눈을 반짝거리면서 내가 사랑하는 동화책을 쓰신 위대한 작가님의 전기네! 이 책은 나랑 같이 읽어야 해! 엄마! 눈을 말똥말똥 커다랗게 뜨고서 우와우와 책표지를 쓰다듬는다. 엄마는 이 책을 읽으면서 [사자왕 형제의 모험]도 읽어야해! 그렇지 않고서는 이 작가님 전기를 읽을 자격이 없어! 그래서 다시 책장에서 [사자왕 형제의 모험]도 빼왔다. 이번에 알았다. 제일 사랑하는 캐릭터인 말괄량이 삐삐를 창조하신 이가 바로 이 언니였다는 것도 창피하지만 이번에야 알게 되었다.  아침, 커피를 내려놓고 열어놓은 창문 아래 들어오는 바람을 향해 인사했다. 오늘을 내게 안겨줘서 고마워, 바람아. 쑥스럽지만 인사도 해본다. 곧이어 이 바람을 더 이상 마주하지 못할 아이를 떠올린다.


 아이들은 금세 눈치챈다. 눈치빠른 아이들. 이해할 수 없으리라고 여기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놓치지 않는다. 동물의 감각으로. 살릴 수 있었는데 이름 모를 아이가 비좁고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몸을 구기고 일곱 시간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지 차마 알 수 없다. 자신을 때린 친부와 계모를 감싸면서 제가 잘못해서 맞은 거예요, 저는 아빠와 새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라고 말한 아이를 때리고 여행용 트렁크 안으로 억지로 밀어넣었을 노란 원피스를 입은 여자를 떠올린다. 자식들도 있었다면서 그 아이들이 모두 다 지켜보고 있었을 텐데 새엄마와 누나와 형이 지켜보는 동안 몸을 구기고 트렁크 안으로 들어갔을 아이를 떠올린다. 그 누구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사실.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하는데 그마저 체념하고 도망치지 않고 몸을 떨며 트렁크 안으로 스스로 들어갔을 아이를 떠올린다. 제발 저를 구하러 와주세요. 누군가 저를 이 무서운 곳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아이가 트렁크에 갇힌 시간 동안 무엇을 기도하고 무엇을 저주했을지 짐작해본다. 


 어른들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난 후에 어른이 되었다. 그 시행착오들이 없었다면 한 사람의 온전한 성인으로서 이 사회에서 구성원 역할을 할 수 없었으리라고 본다. 어른이 되고난 후에도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는다. 인생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들은 자로 잰 것처럼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실수를 하고 잘못을 저지르고 반성을 한다. 때때로 반성을 하면서도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우를 범하기도 하지만. 어른들은 항상 아이들에게 자로 잰 것처럼 살아가가기를 바란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균형잡힌 식단을 차려줬는데 기껏 당근을 먹지 않겠노라고 당근 조각을 빼내는 모습을 보면서 속에서 끓는 화를 삭히며 국영수 모든 과목을 잘하기를 원하는 모범생이 되기를 원한다. 언제나 곧은 자세를 유지해 모델과 같은 체형을 갖추었으면 좋겠고 멍하니 테레비를 바라보면서 입술을 벌리지 않고 입술을 꼬옥 다물기를 원한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던가 뒤돌아본다. 나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에게 이렇게 살아간다면 저렇게 살아간다면 자로 인생의 구획을 경계지어놓고 네가 이렇게 살아간다면 저렇게 살아간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희망하는 걸 수도 있다. 정말로 더 나은 인생을 살아가게 될까.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을까. 내가 내 아이에게 바라는 그 모든 걸 아이가 완수했다손 치자. 그렇다면 그건 누구의 인생일까. 어느 기준에서 완벽한 삶일까. 아이는 완벽하게 재단된 인생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행복할까. 게임기를 부수지 않았다고 진실을 말했거나 혹은 거짓말을 한 아이가 꼴보기 싫어 훈육을 한다고 트렁크 안으로 아이를 집어넣은 한 어른을 바라본다.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두드리면서 무섭고 괴로워 몸을 계속 움직이는 아이를 향해 소리를 내지르는 한 어른을 바라본다. 그 어른의 마음 속에는 대체 어떤 아이가 살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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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0-08-25 0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읽고 싶은 책이라 들어왔더니, 수연님이 이미 읽고 좋은 글을 올려두셨네요~

Vita 2020-08-25 17:33   좋아요 0 | URL
민이가 최애하는 책이 사자왕 형제의 모험이에요 비연님, 근데 저는 아휴 저 언니처럼은 못 살 거 같아요, 속이 밴댕이 같아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