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처음 그런 걸 읽었더라. 어디에서 들었더라.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남성은 짐승을 때려잡고 여성은 채집을 했다. 딱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남자들은 우루루루루 몰려 몽둥이를 꺼내들고 거대한 짐승을 때려잡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여자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나무 위의 열매들을 따서 바구니에 담고 나물을 캐는 모양새가 저절로 그려지면서 아 그래서 우리들은 보잘 것 없다 하는건가. 그게 전부는 아닐 거 같은데. 어린 마음에도 그게 전부는 아닐 거 같은데 하기는 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자꾸 삐딱선을 타고싶은 마음을 어떻게 제어하기는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딱 보기에도 단백질 섭취가 더 중요할 거 같긴 하고 살아있는 짐승을 잡아 그 피와 그 뼈와 그 살을 해체하는 광경은 상상만으로도 압도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던 거다. 그러니까 이게 제대로 된 첫 '잉여 생산'이었던 거야! 벌떡 일어나서 오! 열매들이었어! 그러니까 선악과가 그냥 선악과가 아니었던 거야! 소리를 버럭 지르니 인절미를 먹던 여동생과 엄마와 딸아이는 나를 보고 저 똘아이...... 란 무표정을 잠깐 지었다가 다시 인절미로 돌아갔다. 오! 열매들이었던 것이야! 열매들!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바로 우리가 우리 언니들이 첫 생산자들이었던 거야! 



 인절미를 다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계속 읽고 있는데_ 마침 선생님이 너 왜 자꾸 독일어 숙제 안 내는거야, 앙! 이런 말씀은 안 하셨지만 톡을 까똑 보내주셨기에 선생님, 독일에서 여성학은 어떤가요?_ 공부는 하지 않고 저 이런 책을 읽고 있어요_ 라고 구구절절 이야기하면서. 코로나에 관련된 일상사를 서로 묻고 답하고난 후에 물어보았다. 선생님은 답하셨다. 음, 독일은 말이죠, 아주 그냥 공부하려고만 하면 천국입니다, 천국. 여성학은 잘 모르겠지만 독일어로 된 여성학 자료가 한국어 자료보다 압도적이라는 점은 확실하죠. 독일은 학문의 천국이죠. 공부하고 연구하기 좋아하는 민족이니. 오! 그런 건가요? 선생님! 저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독일어 한 시간 공부하고 잘게요! 버럭버럭 느낌표를 미친듯 찍었다. 그리고 다시 책으로 돌아와보았다. 오 마리아 미즈 언니는 독일 언닌데 영어로 막 썼어, 이 책을! 오! 영어 자료도 겁나 많겠네! 오! 혼자서 계속 막 오! 오! 열매! 열매들! 몽둥이가 아니라 바구니, 바구니가 처음이었던 거야, 그걸 모르고 몽둥이를 들고 우루루루루 짐승을 때려잡는 그들의 뒷모습이 멋지다고 그게 바로 제대로 된 인생이라고 그렇게 가르침을 받았던 거야, 나도 모르게. 근데 그게 배경이었다. 바구니 같지도 않은 바구니를 들고 열매를 따고 나물을 캐던 그 뒷모습들이 첫 '잉여 생산'자들, 그들이 주인공들이었던 거란 말인가. 갑자기 그림이 확 달리 보이는 순간들. 독일어 공부 아직도 안 하고 계속 마리아 미즈 언니를 읽고 있습니다. 선생님, 오늘은 그냥 언니 책 조금 더 읽고 그냥 잘게요. 대신 내일 독일어 공부 두 시간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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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03-19 0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부하려고만 하면 천국인 곳. 그렇게 단언할 수 있다니 멋지네요. 나도 독일 가서 공부만 열심히 하고 싶다. 라는 꿈(만-_-;) 꾸어 봅니다.♡

수연 2020-03-19 12:39   좋아요 0 | URL
달밤님, 오랜만인데요! 반가워요. 일단 공부하는데 있어서 목돈이 들지 않는다는 건 대단한 메리트 같아요. 한국에서는 대학 가고 대학원 가는 데 등록금이 어마무시하니까 그게 정말 무서운 거 같아요. 물론 길을 찾으려면 또 길이 열리겠지만요. 저도 지금은 꿈만 꾸어요 ^^;;

블랙겟타 2020-03-19 0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독일은 학문의 천국이군요
제가 좋아했던 학자나 교수님들이 독일 출신인거에요. 그래서 한때 독일에서 공부해봤으면하고.. 생각만(?) 해본 적이 있었죠 ㅎㅎㅎ

수연 2020-03-19 12:43   좋아요 1 | URL
블랙겟타님, 마리아 미즈 언니는 정말 읽으면 읽을수록 감탄만 하게 됩니다. 막 가슴이 먹먹해지다가 막 좋아서 날뛰었다가 지금 그러고 있어요. 1월 2월 책은 제대로 읽지 않고 억지로 읽었는데 그래서 집중도 있게 읽지 못해서 아 3월 책만 읽고 그냥 포기해야겠다 여성주의 읽기 하고 있었는데 마리아 미즈를 만나고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입니다. 독일어 선생님 말씀으로는_ 독일에 있는 대학교에서 공부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해도 독일어 자료가 어마어마하니 읽는 것만 해도 다른 세상이 열릴 거라고 하시더라구요. 독일어 공부해보세요! 저도 이제 막 아장아장 공부하는 입장이니 뭐라 덧붙이기가 창피하지만 괜히 독일에 똑똑한 이들이 많은 게 아니로구나 그런 느낌입니다. :)

단발머리 2020-03-19 14: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위의 말씀하신 부분 인상깊었어요. 도구가 무기로 변신하고 그것의 폭력적 효과를 확인한 순간, 남성 지배 체제가 강화되었다는 거요. 전 그렇게 생각했었더랬죠. 고기가 맛있어서? 고기를 먹으면 힘이 생겨서? 고기를 구하기 어려워서? 고기를 구하려면 남자의 힘이 필요해서? 아니었다는 거죠. 고기를 얻기 위해 만든 도구를 인간에게 휘둘렀다는 거죠. 하악....

오늘도 내일도 열공모드 좋아요.
전 요즘 나태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헤헤.

수연 2020-03-19 17:11   좋아요 0 | URL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정확히 내 이야기이기도 한 걸까 계속 그 의구심에 사로잡혔던 거 같아요. 좀 더 솔직히 이야기하면 내가 읽고 뭔가를 메모하고 이런 걸 해도 가능한 지점에 있는가 싶기도 했고_ 열혈 공부 입장은 아니지만 읽는 동안 단발머리님 생각 많이 했죠. 고맙고 감사하고_ 짐 정리는 천천히 하시고 따뜻한 날 만나요. 다락방님이랑 소주 마셔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