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희 선생님의 유년의 뜰을 다 읽고 가만히 엎드려서 삼배도 아니고 백팔배도 아닌 애매모호한 몸짓을 취했다. 산다는 게 내가 주체가 되어야하는데 항상 내 인생의 내가 이방인 꼴로 왔다갔다 어정쩡하게 주체가 되는 모양새를 취하다가 퍼뜩 놀라서 뒷걸음질치는 경우가 자주인데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을 읽으면서도 선생님의 유년의 뜰을 다 읽고난 후에도 그렇고 나는 지금 내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이번 인생이 정말 어색하고 갑갑하기만 하다. 그래서인가 제인 에어의 그녀도 그렇고 유년의 뜰의 부네도 그렇고 모두 다 저 하고싶은대로 하다가 제일 가까운 이에게 질질 끌려가 방 안에 갇혀 미친 여자로 아무 표현도 하지 못하고 벽만 긁어대다가 스스로 죽음을 불러들이는데 그런 이들을 마주할 적마다 박하사탕을 입에 물고 와그작 깨물어먹은 것처럼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리는 걸 보면 아마 내 안에도 그런 성향이 짙게 배어있는듯 하다. 여기는 나만의 동굴인데 친절하게도 좋아요를 눌러주시고 가끔 말도 걸어주시는 이들이 있어서 평화롭기만 하다. 그들과 내가 얼마나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의 목소리를 들었는가 보면 별로 그런 경우는 없다. 어쩌면 간혹 그런 기회가 있었는데 가면을 쓴 것처럼 과하게 웃거나 있는 척 없는 척 갖은 똥폼을 잡기도 했다. 세상은 눈 꿈벅꿈벅할 때 코마저 싸악 베어가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확실한 건 알라딘을 통해서 안 이들은 내게 모두 든든하기만 해서 하염없이 안기고싶다는 생각만 들게 한다. 알라딘에 머무는 동안 책읽기를 멈추었다가 다시 시작했다가 그렇게 곡선을 그리는 경우가 잦았는데 새해에는 계속 읽고 기록하고 생각하면 좋겠다. 깊이 있는 인간이 되고싶다는 바람은 이번 생에는 아무래도 힘들 거 같으니 대신 읽고 멈추고 쓰고 멈추고 책 읽는 사진도 책 사진도 많이 찍고 그러면 좋겠다. 새해에도 여전히 동굴에서 칩거하겠지만 조금 더 가열차게 독일어를 공부하고 조금 열심히 영어책을 읽고 조금 더 가열차게 페이지들을 뒤적거리면 괜찮지 않을까. 술은 줄이고 말도 줄이고 대신 내년에는 조금 더 다정하게 조금 더 착하게 마음을 그렇게 먹어본다. 내 발가락이 내 혀에 닿을 정도로 유연한 사람이 되면 좋겠다. 어느덧 사춘기에 접어들어 내 인내심을 매일매일 테스트하는 저 아가처럼. 


 노트북 앞 2020년 새해 1월 빨간머리 앤 달력에서 앤이 다소곳이 앉아 이런 말을 중얼거린다. 


 "저 이제 예뻐지려는 노력은 그만하고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할 거예요." 


 


 

변소의 창으로 거위처럼 두 팔을 휘저으며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언니의 모습이 보였다. 사내애들은 손가락 사이에 면도날을 끼워 계집애들이 팽팽하게 마주 잡고 있는 고무줄을 끊고 계집애들은 욕설을 퍼부으며 흙을 집어 뿌렸다. 그 애들을 헤치며 언니는 달려가고 있었다. 교문 밖에서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탱자나무 울타리 위로 솜사탕이 구름송이처럼 둥실 떠올랐다.
나는 이러한 광경을 보며 주머니 속의 케이크를 꺼내 베어 물었다. 그것을 다 먹고 났을 때 갑자기 욕지기가 치밀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꾸역꾸역 토해냈다. 단 케이크는 한없이 한없이 목을 타고 넘어왔다. 까닭 모를 서러움으로 눈물이 자꾸 흘러내렸다.
나는 다리 사이에 머리를 박고 구역질을 하며 똥통 속을 들여다보았다.
어두운 똥통 속으로 어디선가 한 줄기 햇빛이 스며들고 눈물이 어려 어룽어룽 퍼져 보이는 눈길에 부옇게 끓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무엇인가 빛 속에서 소리치며 일제히 끓어오르고 있었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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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9-12-31 13: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술은 줄이고 말도 줄이고 에서 저도요 하고 손들어봅니다; 수연님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한 해 수고많으셨습니다. 사진의 아가가 참 예쁘네요^^

수연 2019-12-31 20:56   좋아요 0 | URL
술은 줄이고 말도 줄이고_ 근데 이건 바람인지라 잘 지켜낼지 모르겠어요. 몸이 좀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싶으면 어김없이 한 잔 가볍게 하고싶다는 마음이 들더라구요. 하지만 오래 한 잔 하려면 좀 줄이긴 해야겠다 하는데 새해 얼마나 자제가 될지는...... 문나잇님도 새해 건강하시고 행복한 일 많이 만들면 좋겠어요. 사진의 아가는 이제 열둘이 되는데 징하게 말을 안 듣네요 ^^;;; 언제나 매번 감사드려요.

빵굽는건축가 2019-12-31 14: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연님 새해에도 글 많이 보여주세요. 그리고 새해는 독일어 공부 화이팅.

수연 2019-12-31 20:57   좋아요 1 | URL
알라딘에 오셔서 가벼운 마음으로 말을 건네고 주고받고 그런 이들이 저는 참 적은데 빵굽는건축가님과 새로 말문을 터서 좋았어요. 새해 더 자주 교류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어요 새해 독일어 공부 아자아자!! 포기하지 않을게요 ^^

얄라알라북사랑 2019-12-31 15: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만의 동굴이셨어요?^^
따뜻하고 밝은 동굴인걸요^^

수연 2019-12-31 20:58   좋아요 0 | URL
앗 이런 아름다운 말씀을 해주시다닛!! 얄라얄라북사랑님 새해 건강하시고 행복한 일 많이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

단발머리 2019-12-31 15: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연님 알라딘에서 만나게 해준것만으로도... 내가 알라딘에게 상 줘야합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올 한 해 고마웠어요.
맘 속 이야기를 나눌수 있어서, 수연님 덕분에 숨쉬기가 좀 쉬워졌어요.
내년에도 잘 부탁해요.
고마워요, 수연님... 좋은 사람....

수연 2019-12-31 20:59   좋아요 0 | URL
마음이 한없이 딱딱해져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싶을 때 그대가 여기 있어주어서 돌아올 마음을 품었지 싶습니다. 물론 몇몇 분들도. 웃을 때 반짝거리는 눈빛도 볼우물도 모두 좋아요. 건강하게 계속 함께 웃고 울고 다시 웃도록 해요, 우리.

블랙겟타 2020-01-01 1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년 수연님의 글을 통해 많이 느끼고 배웠습니다. 그에 비해 저는 뜨문뜨문 글을 올리는 관계로 저를 많이는 못 보여드린 것 같네요. 올해는 글로도 댓글로도 더 자주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
수연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V•̀ᴗ-)✰

수연 2020-01-01 20:35   좋아요 1 | URL
저런 상콤한 아이콘이라니_ 심쿵했어요. 단발머리님을 통해서지만 그래도 페미니즘 책읽기 하시는 분들은 보지 않았지만 이미 다 아는 분들 같아요. 저는 너무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알라딘에 올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아줌마 주책을 너그러이 봐주셨다고 하니 기분은 좋아요. 블랙겟타님과 새해 조금 더 친해지기를 바랍니다. 새해 더 많이 글 올려주세요! 기다립니다! 2020년 건강하시고 새해 좋은 일 많이 만드시고 생겨나고 그러면 좋겠어요. 해피 뉴 이어! :)

무식쟁이 2020-01-18 0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수연님 글에 조용히 기립박수를 보냅니다. 알라딘에는 정말 대단한 분들이 많으신것 같아요. 아름다운 동굴입니다.

수연 2020-01-20 11:10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무식쟁이님, 얼마 전 올리신 부암동 글 잘 읽었어요. 부암동에 살고 있어서 눈이 번쩍 뜨이면서 ㅎㅎ 앞으로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