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자 연예인이 이혼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는 도저히 못 살겠더라, 남편을 버리든가 아이들을 버리든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데 아이들을 버릴 수는 없지 않는가 그래서 남편을 버렸다, 라는 말이 오늘 아줌마들 사이에서 꽤 회자되었다. 조금 더 선을 넘는다면 다른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선을 넘는 거니까 가만히 있으려다가 루이제 린저 언니 소설 속 나오는 그 언니는 모두 버리고 떠나는 걸로 나오더라_는 이야기까지만.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고 떠도는 여성들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이 어떤지는 입 아프게 떠들 필요 없지만 떠도는 인생은 좀 괜찮아보인다. 결혼이란 제도에 맞지 않아 울분을 참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인생들보다는 문을 열고 나가는 것도 꽤 괜찮지 않나 하고 애인이랑 이야기를 오늘 아침 했다. 자 어서 문을 열어줄게, 나가_ 라고 애인은 농담을 했다. (근데 뭐지 진담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와야하는데 그냥 주저앉아 커피를 더 내리고 뜨거운 보리차를 주전자째 담아놓고 점심을 굶고 쿠키와 사과를 접시 위에 한가득 담아놓고 읽기. 나도 농담조로 (하지만 진담 백퍼센트) 그냥 다 관두고 이거 보증금 빼서 우리 세계여행 다녀오면 어떨까? 더도덜도말고 딱 2년만. 같이 문을 열고 나가자 이참에. 아직 사십대 초반이니까 다녀와서 새롭게 인생을 살 수도 있어 했더니 아 인간아 언제 클래 라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아니 왜 어째서 그렇게 간단한 짓을 못한단 말인가. 인생은 어차피 한 번뿐인데. 


아는 선배가 있다. 형부와 함께 세계여행을 떠났다. 정말 보증금 빼서. 세상에 더할나위없을 정도로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한다. 운명은 하지만 그들을 다른 길로 이끌고 갔다. 형부는 어느 날 어리고 아름다운 비행기 승무원에게 반해서 선배를 버리고 승무원에게로 가버렸다. 이혼을 원해서 여행 말미 한국으로 돌아와 이혼을 했다. 언니 후회하지 않아? 물어보았다. 응, 후회하지 않아, 그 사람과 함께 한 마지막 여행이었지만 여행은 나를 꽤 근사하게 만들어줬어. 운명에 이끌리듯 다른 사람에게로 끌린 걸 내가 뭔 수로 말리겠어. 그 사람과 내 인연이 거기까지였던 거겠지. 여행을 해서 나는 나를 찾았으니까 그걸로 만족해. 아 이건 무슨 다니엘 슈틸 언니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로구나 하고 뒤늦게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공부 잘하고 얼굴 예쁘고 예의바른 사람이었던 선배는 세계 곳곳을 다니며 카메라 앵글을 여기저기 들이밀며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 허리까지 머리를 기르고 담배도 여전히 끊지 못하고 있지만 선배는 날이 갈수록 얼굴에서 빛이 난다. 생긴대로 산다는 말, 그러니까 본래 자신으로 돌아가면 그렇게 모두 얼굴에서 빛이 나지 않을까 선배를 보며 그런 생각도. 마치 한 마리 사자처럼. 그들은 정말 세상 쿨한 사람들이라 여전히 연락을 하며 지낸다고 한다. 내가 그 정도로 쿨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 그냥 여행을 못 가니 책 읽고 독일어 단어나 외워야겠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무시로 찾아오는 혼란과 죄책감, 위화감과 억울함을 주변에 털어놓아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다들 그렇게 살아. 예민하게 굴지 마." 나는 번번이 할 말을 잃었고, 점차 그런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그만두게 되었다. 이렇게 아무에게도 이해받지도 인정받지도 못하다가 어느 순간 미쳐버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들을 보니 세상에 나같이 ‘여성‘의 자리가 버거워 괴로운 사람들이 많은 게 아닌가? 게다가 그 문제의식이 지금의 나와 크게 다르지도 않다니! - P24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의 미국 중산층 백인 여성, 20년 전의 일본 연예인, 지금 여기 대한민국 서울에 있는 나. 모두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비슷한 상황을 반복하며 비슷하게 괴로워하고 있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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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지 2019-12-19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네요

수연 2019-12-20 07:4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베로니카님, 선배 인생도 멋지고 민혜영님 책도 멋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