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단단한 이에게도 한없이 무른 이에게도 인생이 공정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건 태어남과 죽음 그 사이에도 존재하는듯 싶다. 유신론자와 무신론자 사이에서 어정쩡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어떤 존재가 나를 만들어 이 세상에 내놓은 나름의 까닭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신'이라는 단어를 처음 배운 유치원 시절부터 했다. 기독교 유치원에 다닌 영향도 무시하지는 못하겠지만. 노오란 원복을 입고 샛노란 베레모를 쓰고 종종거리며 집앞 대문을 열 무렵 소낙비가 갑자기 쏟아지면 새카만 하늘을 올려다보며 오, 하나님이 소낙비를 갑자기 내리시게 한 까닭은 무엇일까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하고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앞마당에 있는 나무들을 보고 아하! 나무들 목 말라서 물 주시려고 그런 거구나 깨닫고 앞집 새로 짓는 빌라 공사장 아저씨들이 나란히 앉아 하늘 바라보며 담배 태우시는 장면 보고 아하! 공사장 아저씨들 힘드시니까 잠깐 쉬면서 담배 태우라고 소낙비를 내리신 거로구나 깨닫고 나를 키워주시던 할머니가 따르르릉 따르르릉 울리는 전화 수화기를 냉큼 낚아채고 응응 수연이 잘 도착했다 응응 막 들어오는데 소낙비가 오더라 그래서 조금 젖었다 비 맞은 병아리새끼 같다 응응 걱정마라 얼른 옷 벗겨서 따뜻한 물로 목욕시킬거니까 응응 걱정말고 일 잘하고 들어와라 응응 수연이 바꿔주마 수연아 엄마 전화 받아라 종종거리며 전화기 앞으로 가면서도 아하! 내게 일하는 우리 엄마 목소리 한번 더 들려주시려고 소낙비를 내리신 거로구나 깨닫고 센스쟁이 하나님! 나 혼자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악몽을 꾸고 꿈속에서도 어이가 없어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땅이 꺼져라 하늘이 무너져라 통곡을 하다가 베개가 푹신 젖어 퉁퉁 부은 눈으로 일어나 아 꿈이로구나 알았는데도 한동안 꿈속 감정이 그대로 느껴져 변기에 앉아 한참을 울었다. 다 지나간다, 괜찮다. 다 잊혀진다, 괜찮다. 그런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요가 매트 위에 앉아서 감정 다스리기. 생각 다스리기. 오늘 아침. 오늘 내일은 잇 프레이 러브를 다 읽고난 후 생각 정리를 좀 해볼 예정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 언니의 제2의 성 2권은 일단 빌려왔다. 아직 펼치기 전이지만;;; 오늘은 딸아이와 낙엽 판화 미술작업을 하러 근처 미술관에 가야하고 며칠 전부터 딸아이가 먹고싶다던 허니버터브레드를 먹으러 가야하고 다 먹고난 후에는 동네 도서관에 미처 반납하지 못한 책을 다 읽지도 못하고 반납해야하고 오랜만에 보는 조카들과 동생네와 저녁을 먹어야하고 때마침 동네에서 약속이 있다며 전해줄 책이 있다는 철수와 번개를 해야하고 잇 프레이 러브를 얼추 읽어야하는데 이 모든 걸 다 하려면 또 엉망인 집 청소를 못하겠구나 싶으니 암담하다. 그러니 그만 왜 그런 때가 있지 않은가 라는 감상 구구절절한 쪽글은 제대로 마무리도 하지 못하고 도망쳐야겠다. 제대로 집 꼴은 얼추 갖추고 외출을 하려면. 가을이다. 오늘 아침 우연히 만난 문장들에 그런 말이 있더라. 네 몸을 쓰레기통 취급하지 말고 네 몸을 절, 성당, 교회처럼 신전 취급하며 살아야 하느니_ 이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회오리를 치고 있으니 아무래도 조만간 끊었던 요가원 다시 등록하러 갈듯. 아 이게 엘리자베스 길버트 언니 글 계속 읽어서 그런건가?!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yo 2019-11-02 16: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글이네요.. 수연님이 수연하셨네요^0^

수연 2019-11-03 22:14   좋아요 0 | URL
syo님은 맨날 예쁜 말만 해주세요. 그래서 좋아하는건가 후훗, 따뜻한 밤.

cyrus 2019-11-02 17: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기 시절의 지민이 모습, 정말 오랜만에 보네요. 제가 누님을 처음 만났을 때 지민이가 저 모습이었어요. ^^

수연 2019-11-03 22:15   좋아요 0 | URL
민이 지금은 완전 소녀야. 좀 있으면 나보다 키도 더 금방 클듯해. 민이 보고싶지? 우리 사이러스는 얼마나 변했으려나.

붕붕툐툐 2019-11-03 0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뭉클해요~(글썽글썽~~)

수연 2019-11-03 22:15   좋아요 0 | URL
울지 말아요 힝 토닥토닥_ 따뜻한 밤 보내자요 붕붕툐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