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인지라 아침식사를 배불리 먹고 방학숙제를 조금 하고 침대 위에 누워 책을 읽다가 다시 잠든 딸아이에게 홑이불을 덮어주고 읽히지 않는 알랭 어록을 대강 읽고 아침에 내린 커피를 마저 마시고 어제 포기한 스페인어 문장들은 계속 버려두고 독일어 문장들 암기하기 전에 어제 읽다가 만 울프 언니 문장들 소리내어 읽기. 방학이 왜 그렇게 좋았던가 뒤돌아보니 마음껏 시간을 조절할 수 있었다는 게 좋았던듯 하다. 계획표라는 건 개에게나 줘버려_라는 마음으로. 나는 방학도 아닌데 내 계획표가 엉망으로 조정되어가고 있다. 계획표라는 건 개에게나 줘버려_ 태도로. 아가가 뱃속에 있을 때 제일 많이 들었던 건 바흐. 라디오 스피커에서 바흐가 흘러나오자마자 딸아이는 작정한듯 몸을 웅크리고 낮잠. 인간의 시스템이라는 거, 인생의 시스템이라는 거. 에스프레소 캡슐을 100개 주문하고 다 읽은 책들을 중고서점에 팔려고 상자 안에 넣어놓고 마음에 드는 패턴이 있어서 유치한 거 알면서도 내가 이 유치한 게 좋다는데 누가 말려 라는 태도로 과감하게 지르고 식탁이자 테이블이자 책상인 네모 판때기 박박 닦고 한숨 쉬면서 놀아야지 하는데 엄마 전화, 다음주에 같이 종합병원에 가기로 스케줄을 조정하고 엄마가 죽으면 나는 못 사는데 하고 불길한 생각을 잠깐 하다가 멈추고 괜찮을 거야, 모두 괜찮을 거야 자기암시를 하고 답답한 가슴에 바람 넣어주고자 창문 열고 부는 바람과 구름과 산 바라보기. 









그 모든 것 가운데서 캔버스 위에 아무렇게나 극적거려놓은 몇 개의 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남에게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어디에 걸지도 않을 것이었다. 탠슬리 씨가 그녀의 귓전에서 ˝여자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어, 여자는 책을 쓸 수 없어......˝라고 작은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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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ssbaum 2019-08-11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름방학이 끝나가네요.

2019 여름읽기, 어제 나의 일기장에 2019 여름에 대해 간단히 적었는데 때로는 제가 너무 뭔가에 의미를 많이 부여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좀 대충 살아야 할텐데.. 하는 반성도 합니다.

수연 2019-08-11 19:59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누스바움님 글, 사진, 음악 모두 깊은 의미를 갖고 있어서 좋아요. 아마 저와 같은 이웃들이 더 많을리라고 여겨요. 대충 살아가는 건 이 몸이 하겠습니다, 그러니 남은 방학 충분히 에너지 보충하시기를 바랄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