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책도 있었고 읽지 않고 보관해둔 책도 있었는데 그렇게 해서 모은 범우사가 대략 100여권 정도였던 거 같다. 결혼하면서 친정에 그대로 놓고 왔었고 엄마는 이사를 하면서 살림살이를 대폭 줄여야했기 때문에 창고 안에 있는 건 거의 다 버렸다. 우리집에서 유일하게 책 읽는 아이였던 내가 그동안 애지중지 모았던 책도 그때 다 거의 다 버렸다. 마음 다잡고 정리해서 가져오려면 가져올 수도 있었겠지만 언제 다시 그걸 다 정리하고 다시 읽겠는가 싶어서 버리라고 흔쾌히 끄덕끄덕했다. 괜히 버렸네 괜히 버렸어, 이런 마음은 옛 애인을 버리고 다시 그가 그리워질 무렵 느꼈던 마음이랑 비슷해서 술을 마시면서 아 괜히 버렸어, 그를 괜히 버렸어, 그렇게 괜찮은 사람인 줄 모르고 말이야. 원하지 않게 저녁을 굶고 아침 배가 고파 사과즙을 마시고 물을 마시고 커피를 내리고 바나나를 베어물면서 아침 루이제 린저를 읽었다. 어제 읽던 문장들도 좋았고 오늘 읽은 문장들도 역시. 정세랑의 소설을 잠깐 읽다가 급피곤해졌다. 문장 자체는 나쁘지 않았는데 이런 데서 내가 나이듦을 느낄 줄이야 하고 잠깐 절망했다. 요즘 연애 시작한다는 대딩 조카에게 선물로 주면 되겠다 싶어서 읽다가 관뒀다. 범우사 한 권에 이천원 하던 시절에는 얼마나 꿈이 많았더라, 얼마나 타인들에게 관심을 가졌더라, 얼마나 세상에 흥미를 느꼈더라 기억해보려고 애쓰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인도로 날아가서 이 지겨운 땅 다시는 안 올 거야! 막 흥분하던 기억만 난다. 결론적으로 저는 아직까지 인도에 못 갔습니다. 헌책방에서 언젠가 거의 새 것과 다를 바 없는 범우사 문고판을 잔뜩 손에 들고 급흥분해서 돌아온 기억만 살포시 난다. 그때 막 연애를 시작해서 그때 산 책은 거의 읽지 않았던 거 같다. 책을 읽는 연인과 책을 읽지 않는 연인 중 어느 편이 더 낫다라는 의견은 없다. 자기만의 세계관이 모두 투철하니까. 하지만 뒤돌아보니 확실히 책을 읽는 연인들이 더 나았다. 고집불통인 건 모두 다 마찬가지였지만 훨씬 너그러웠다. 오리지널 찰떡쿠키 냠냠 씹으면서 오늘은 루이제 린저 언니와 연애를 해야지. 나이든 티가 이런 데서 드러난다. 드러나. 어젯밤에는 이 책을 읽은 분들의 흔적을 알라딘에서 찾아 읽었다. 그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좀 살아보아야 이해될 구절들이 많다는 문장이었다. 정확히 이 문장은 아니었는데;; 내 못난 기억력. 좀 살아보니까 루이제 린저 언니 말씀은 다 진주알들이다. 제목 자체가 벌써 [고독한 당신을 위하여]이다. 십대 후반부터 느꼈던 고독과는 좀 다른데 사십대의 고독은 더 웅숭깊다. 고독에 찌들어도 쉽게 표정에서 몸짓에서 드러내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고독. 이것도 허영일까 싶긴 하지만 사춘기의 고독과는 좀 다르다. 일단 어딘가로 막 돌진하고 싶어지는 그런 마음은 사라졌다. 사춘기 고독이 나는 삼십대까지 지속되었던듯. 그래서 타인의 사랑에 그렇게 목을 매달았는지도. 그래서 지난 밤 많이 반성했고 절망했으며 다시 살아야지 철저하게 반성하고 집중하고 몰두하면서 하고 아침에는 상쾌하게 발딱 일어났다. 주홍빛 컬러보다는 새로 나온 판본이 훨씬 깔끔해서 좋다. 소장욕을 불러 일으키지만 참을 일이다. 그때 못 읽고 그냥 버려진 아이들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다. 한 권씩 읽자. 차곡차곡. 아 지금 범우사 문고판 한 권에 4900원. 커피 한 잔 가격. 아메리카나를 주문했고 다음 주에는 범우사 문고판들과 아메리카나를 읽으면서 중간중간 휴식 시간을 채울 계획이다. 공부를 안 하고 계속 책을 읽으니 책만 읽고싶어진다. 안돼, 그러면 안돼, 인생을 또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야, 안돼, 그러면 안돼, 하고 내 마음대로 편곡을 해서 흥얼거린다. 비가 그쳤다. 나가 놀고싶어지잖아, 이러면. 이제까지 정확히 오타를 네 개 찾아냈습니다. 그래도 꽤 오랜 세월 내고 있으니 오타 정도는 좀 고쳐주어도 좋지 않을까 싶은 불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 성질 나쁜 아줌마 같겠네, 이제 이 정도 세월이면 이 정도 오타는 좀 고쳐놓아야하는 거 아닙니까. 하고 말하면. 하지만 이제 오타를 긋고 올바른 글자로 고쳐놓는 일은 하지 않는다. 문장의 흐름만을 따라갈 뿐이다. 성당에 가서 고개를 살짝 숙이고 마음 속 일을 고해하는 행동을 좋아한다. 딸아이는 그 몸짓이 좋아 그 시간이 좋아 성당에 가고싶어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는 불성실한 신자인지라 날라리 행동을 한다. 성모님 앞에서 살짝 고개를 숙이고 마음 속 일을 되뇌이며 반성을 하고 용서를 구하고 다시 새로운 시간을 바라는 마음으로. 곁에 사랑하는 영혼들이 함께 있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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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크다스 2019-08-01 1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따뜻하고 좋네요. 고맙단 인사를 남기고파 올해 첨으로 로그인 했어요^^

수연 2019-08-01 14:4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쿠크다스님, 따뜻하시다 하니까 좋아요 저도. 습한 여름 건강하게 보내요 함께 :)

stella.K 2019-08-01 16: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범우사를 아시니 괜히 반갑네요.
요즘 범우사를 읽는 사람이 있나 싶어요.
여전히 책은 파는가 본데 새책은 더 이상 안 나오는 것 같더군요.
한때 사장이 출판상도 받고 그랬나 본데 명맥이 끊어질 것 같아요.
전 삼중당은 안 읽었어도 범우사는 많이 읽었습니다.
루이제 린저 유명했죠. 그러고 보니 연배가 저랑 비슷한 것도 같습니다.
이사 오실 때 버리고 오신 거 전 잘한 일인 것 같은데요.
넓은 곳으로 가서 책을 다시 풀어놓을 것이 아니라면 그냥 박스째로
세월아, 네월아 하게 되더군요. 벌써 20년째.
올해는 기필코 버리리라 다짐했는데 몸이 안 좋은 관계로 일단 여름은 지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
초면에 얘기가 길었습니다. 죄송요.ㅠㅋ

수연 2019-08-01 17:56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ㅋㅋㅋ 우리 초면 아닌데 ㅠㅠ 전 삼중당이랑 범우사랑 번갈아가면서 잘 읽지는 않고 구입만 했어요. 마흔 중반이니 제가 어쩐지 더 나이들었을 거 같은데요^^;; 그리고 초면 아니니까 자주 와주세요.

stella.K 2019-08-01 18:23   좋아요 1 | URL
헉, 그런가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그럼 우리 별로 안 친했었나 봐요. 알았어요. 자주 올게요.ㅎㅎ
글구 제가 연배가 좀 위네요. 전 어느새 50대여요.ㅠㅠ

수연 2019-08-01 18:28   좋아요 1 | URL
크크크 맞아요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어요. 저도 이제 자주 갈게요!

stella.K 2019-08-01 18: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얼마 전까지 카페 운영하지 않았나요? 생각 나네요.ㅎㅎ
그때 닉넴이 수연님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도 저 가끔 수연님 생각했었어요. 반갑네요.
근데 기억력이 예전 같지가 않더라구요. 이렇게라도 기억한다는 게
어디에요?ㅋㅋ

수연 2019-08-01 19:02   좋아요 1 | URL
2년 전이에요 벌써 ㅋㅋㅋ 맞아요 닉네임이 야나문_ ㅋㅋ 창피하네요. 그래도 기억해주시니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