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연인들>을 읽고 있어요.

차갑다 못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냉기가 서려 있는 그녀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연인들'의 관계라는 게, 세상에서 흔히 펼쳐지는 그 광경들, 사랑해 어쩔 줄 몰라 하며 함께 하는 

그 낯익은 광경들이 새삼 낯설게 느껴지더군요. 

 

어제는 잠깐 여유로운 시간이 생겼습니다. 

뭘 할까 오랜만에 헌책방에 갈까 오랜만에 영화를 볼까 잠깐 신촌 어느 길목에서 갈등을 하다가 

영화관에 들어갔어요. 공지영의 어떤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볼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았는데 맞는 타이밍에 들어맞는 영화는 그것뿐. 

물론 울면서 봤습니다. 울면서 봐야 하는 영화라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눈물샘 어딘가를 

자극하길래 울면서 봤어요. 영화를 보는 내내 너희들이 말하는 사랑이라는게 뭔가? 

그렇게 펑펑 울 수 있다면 그게 그런 식의 관계를 만드는 데 보다 쉬운 길을 만드는가? 

혼자서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속으로 하면서 봤어요. 

나와보니 고등학생 연인들과 20대 초중반의 연인들, 

여성들이 울더군요. 펑펑펑. 눈이 쏟아지듯 펑펑펑 눈물을 쏟고 있더군요.

여유로운 남성들은 미소를 한가득 지으면서 여성들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고 있었어요. 

일상, 평이하기만 해라, 괜히 시니컬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들을 관찰했어요. 

순간, 혼자 있는 여유라는 게 겨우 이런 식으로 흘러가버리고 말다니. 

 

꿈을 꿨어요.

편지를 부치기 위해서 강 건너편으로 가려고 하는데 밑에서는 불길이 넘실거리고 다리는 부실하게 보이

더군요. 어쩔까나 잠깐 갈등, 불꽃이 정말 꽃처럼 보여서, 너울거리는 불의 춤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정

말 불밭이 꽃밭처럼 느껴졌어요. 저 안으로 들어가면 정말 따뜻하겠구나 싶었죠. 당신 품 안에 있던 것

처럼. 깜박 넋을 잃고 불을 바라보다가 이상하게 힘이 하나도 없어서 편지를 쥔 왼손을 바라보니 늙어 

있었어요. 꽃다운 내 젊음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어요. 노파가 되어 있더군요. 바라보는 동안 그 불

길이 내 젊음을 앗아갔나 보다 싶었죠. 후들후들 다리를 떨면서 강 건너편을 바라봤습니다. 여전히 젊은 

당신이 건너편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어요. 이 편지를 전해야지 내 사랑을 전해야지 그러면서 

힘이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편지를 쥔 왼손에 힘을 꼬옥 넣었어요. 여전히 젊은 당신과 이제는 늙은 

내가 마주보고 웃고 있었습니다. 

 

꿈에서 깨고 제일 먼저 느낀 건 갈증, 냉장고 문을 열고 차가운 보리차를 컵에 담지도 않고 다급하게 마

셨어요. 당신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리고 퍼뜩 생각나 얼른 왼손을 펼쳐 보았죠. 아무 것도 없었습

니다. 손등을 펼쳤죠. 하루 동안 뭔 일을 겪었는지 열 손가락과 두 손바닥과 두 손등이 백 년은 늙어보이

더군요. 죽기 전에 당신에게 이 말을 해야지, 난데없이 중얼거렸고 잠깐 아주 잠깐 당신이 하도 보고 싶

어 주저 앉아서 당신 이름을 불렀어요. 

 

일요일에는 강원도 영월에 갑니다. 

그곳에서 또 당신 이름을 부르겠지요. 

나는 이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연인들>을 통해서 물어봤어요. 자신에게.

내가 내게 들려준 그 대답을 언젠가 당신에게 할 날도 오겠죠. 

우리는 젊어요. 우리는 곧 늙을 거예요. 비참하게 가슴 쥐어뜯는 일은 종이 인형으로 대체하려고 합니

다. 씩씩하게 말할래요.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내가 얼마나 씩씩한 사람인지.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당신 귀에 대고 속삭이고 있어요. 

커다란 웃음은 당신 두 눈동자 안에만 존재할 겁니다. 

건강해요,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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