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삶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누구에게도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 것. 애당초 인간에게 선택권이 없는 것. 그리고 언젠가 마침내 사라지는 것. 인생에는 되감기도, 일시 정지도 없다. 당연한 것도, 영원한 것도 없다. 어느 때는 내가 나의 삶을 선택하고 이끌고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를 제어하고 움직이고 소유하는 듯하다. 나는 이제야 사람이 삶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사람을 선택한다는 말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허버트 바담 Herbert Badham도 이런 마음에서 이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52-53) 



 동네 영풍문고에서 또 책을 사왔다. 이전의 나였다면 사오지 않았을 책들을 잔뜩. 누군가가 보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런 자격지심은 지금 내 형편에 무리다. 난 부단히 살려고 밧줄을 꽈악 쥐고 있으니까, 안간힘을 다해서.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고 처음 들어보는 책이었으나 여인 혼자 신문을 읽고 있는 그림에 넋이 앗겨 덥석 집어들었다. 한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고 다시 리와인드가 된다면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야 할지조차 판단이 불가능하니까. 사람들은 내게 와서 비밀을 알려준다고 한다. 궁금하지도 않은 비밀을 보따리째 들고 와서 하나씩 푼다. 누구를 위한 비밀이고 누구를 위해 밝히는건지 궁금하지도 않지만. 된장찌개에 두부를 넣고 오리고기에 파채를 썰어올려놓고 딸아이를 위한 허니머스터드소스를 귀퉁이에 뿌린다. 나사가 풀려있는지 아니면 너무 꽉 조여있는지 그조차 판가름 되지 않지만 두 눈을 뜨고 두 눈을 감고 누군가는 궁금해할 그런 비밀을 수첩 한쪽에 빼곡하게 적고싶다. 중얼거린다. 개심사에 다녀왔다. 새끼냥이들이 죽어가는 매미 한 마리를 갖고 쉴새없이 장난을 쳤다. 어미인지 아비인지 모를 고양이가 그들의 한쪽 켠에서 뿌듯하게 그 모습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아마도 저기에서 어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죽어가는 매미인가 거칠 것 없는 새끼냥이인가, 새초롬한 표정을 짓고 그늘에서 새끼들을 바라보다 이방인을 흘기는 어미인가, 오백 년도 더 지난 쩍 벌어진 나무귀퉁이 한쪽에 두 손을 가만히 올려놓고 눈을 감았다. 저를 이리 버리지 마세요, 부디. 심장에 번개가 치고 살이 너덜거릴 적마다 혈관에서 자디잔 얼음부스러기가 동동 떠다닐 적마다 동네에서 제일 커다란 나무에게 다가가 항상 되뇌인 그 말, 저를 이리 놓아버리지 마세요,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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