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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의 노래
백성민 지음 / 세미콜론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코믹스 / 전 1 권
기억을 더듬어보면, 난 백성민의 작품 중 <토끼>를 볼 기회가 있었다. 지금은, 아니.. 꽤 오래 전 이야기구나. 문을 닫은 도서대여점인 열린X방에서 작품의 단행본을 봤기 때문이다. 위치가 대X N스쿨과 (구) 비디오 안방극X의 맞은편 들어가는 길이며 열린X방의 오른쪽엔 그 책방이 문 닫기 전에 영업을 막 시작했던 남성전용미용실이 위치해 있는 (포항시 북구 장성동에 살고 있거나 살았었던 주민들이여! 이 블로그에 들어오시거들랑 기억하라!) 곳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성인만화의 세계가 궁금했다. 표현의 제한이 적었기에 오히려 예술에서 저질이 되고 마는 딜레마가 있다만, 사실 내가 궁금했던 건 그 화풍이었다. 96 ~ 97년, 혹은 90년대 초부터 라이센스화 되어 발매되기 시작한 일본만화들의 영향으로 어느샌가 수면 밑에서 행해지던 그림체 따라하기가 거의 한국만화계에 점유되던 상황이었다. 비록 대본소처럼 출판된 성인만화들 대부분이 커버와 본편의 그림체 차이가 꽤나 많이 난다는 것도 알게됐지만.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어떤 성인만화의 커버는 게리 마샬 감독의 <귀여운 여인>의 오리지날 포스터에서 얼굴만 바꾼 거였는데 그림 하나는 그럴듯하게 그려놨길래 대단하다 느꼈었다. 근데 정작 본편은 거의 김성모 공장장의 그림체와 맞먹고 섹스만 줄기차게 해대는 이야기를 가진 작품이었다. ...그래도 내 궁금증을 풀어줄 화풍들이 모두 거기 있었다. 박수동의, 한희작의, 고우영의, <머털도사>가 아닌 <바람소리>의 이두호의, 양영순의, <떠돌이 까치>가 아닌 <천국의 신화>의 이현세의, 허영만의, 그리고 백성민의...

*- 이런 그림체를 가지고 있는데 어찌 보지 않고 배기겠는가! -*
정확히 <토끼>가 왜 '19세 미만 구독불가' 판정을 바았는지는 솔직히 지금도 의문인데 어찌됐건 <광대의 노래>, 2007년에 책으로 묶인 이 작품은 참으로 오랜만에 보게 되는 그의 작품일 뿐더러 이전과는 너무나도 달라진 화풍으로 독자들을 놀라게 한다. 힘 있고 동시에 우아하며 세밀하기까지 한 그의 이전 그림체와 달리 이 작품은 정말 간단한 단선과 약간의 원색들로 이뤄져 있다. 이는 작품의 머리말에 이전의 화풍에 대해 '혼자서 해내기엔 정말 중노동' 이라 표현했고, 또 그로 인해 쉬어간다는 마음으로 그림체를 바꾼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다. 그런데 그 외에도 사실상 많은게 다르다. 일단은 칸과 말풍선, 효과음이 존재하지 않아 코믹스의 영역에 있다고도 볼 수 없고 (근데 내 블로그는 만화의 경계에서 또 분류해야 할 정도로 세밀하지는 않아서 일단은 코믹스라고 적어놨다.) 그렇다고 한 컷에 모든 이야기가 설명되지 않기에 카툰이라 볼 수도 없다. 실질적으로 <광대의 노래>는 '우화'에 가깝다. 주 독자층인 어린이들이 읽어도 좋겠지;만 어른들이 읽으면 더 좋을 그런 우화 말이다. 실을 이용한 제본 덕에 쫙 펴지는 이 화집으로, 우리는 오래된 고서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도 동시에 이 작품이 뭔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책 마저도 종이가 아닌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글자 한 자 한 자를 읽으며 종이의 질감을 느끼고 내용을 상상하며 공유하는지 아니면 글자를 흉내내어 똑같이 만들어내는 화면을, 읽는게 아니라 '그냥 보면서' ...그저 뭉뚱그려 이해하고 작품을 마음이 아닌 머리로 이해하는지 모를 시대에, (막상 이렇게 써놓고 보니 표현이 조금 에로틱한 감이 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그러니까 꼭 지금이라기 보다는 시대 중 하나에 포함되는 2007년에 왜 이 작품이 출간되었는지. 놀랍다는 표현으로도 이 작품에 대한 감흥을 충분히 느끼게 할 순 없지만...어찌됐건! 의문이 생겼다. 하지만 그런 의문이 생겼고 2008년 초에 초판을 구매한 난 이 작품에 대한 의문을 푸는 걸 주저해왔다. 왜 그래왔었는지는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일단은, 개인적인 컴플렉스 였는지도 모르겠는데 내게는 이런 일이 있었다. 경북 흥해에 부모님이 알고 지내시는 스님이 한 분 계시는데 한 번은 그 스님의 방에서 아버지가 누군가의 지방 (紙榜) 을 흰 봉투에 적어주게 되었다. 그 때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의 붓글씨를 높이 평가하고 써 달라고 부탁도 많이 했었다고 한다. 스님도 아버지의 붓글씨를 높게 평가하신 분 중 한 분이었고. 근데 자식인 내 글씨도 궁금하셨나 보다. 나도 흰 봉투에 글씨를 적어 내보았다. 스님은 그리 길지 않게 말씀하셨다.
"잘 쓰네. 잘 써. 근데 돈으로 치면 지 아비의 절반 값 정도구만. 글씨를 '그리고 있어'. 고것만 고치고 나이 먹으면 되겠다."
글씨를 쓰는 것이지, 그리는 건 아니기 때문에 그 때나 지금이나 내 글씨는 결국 쓰는 걸 '흉내내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절반의 값... 절반을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이 시작됐지만 그건 단순히 몇 년 간의 생각으로 정리되는 건 아닌 듯 싶었다.
마지막 장인 '희망조각'이 블로그 이웃인 '두리하나' 님의 글을 각색했다는 걸 알려주는 부분을 제외하면 화백은 자신의 이야기 보따리를 '장'이란 표현 대신에 '마당'이란 이름으로 풀어놓으며 참으로 간단하고 친절하게 독자들을 앉혀놓고 듣게 만든다. 어째 이전 작품들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지만 의문 이전에 들었던 낯설음은 곧 풀렸다. 이전의 자신을 철저히 파괴함으로 인해 부정의 부정을 거친 결과였을테니까. 불가로 치면 그런 부정의 과정을 거치면 본성을 깨닫게 되면서 득도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는데, 그게 이 작품이 되는 것일까?

첫번째와 두번째 마당인 '웃는 개'와 '1920년대식 사랑이야기'는 정말, 소위 말하는 '보다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걸 노리고 만든 치유계' 만화 장르에서나 써먹을 법한 흔한 소재다. 물론 그 흔한 듯 보이는 만화, 혹은 아침 라디오 방송 사연 feel의 '좋?생각' 류의 책자에서 읽거나 들을 법한 이야기가 식상하게 다가오지 않고 여전히 훈훈하게 다가오는 힘이 있으니 오히려 작품의 완성도를 지켜내고 있다만, 어떻게 보면 이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함 이전에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니까. 독자들로 하여금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배치한 전략이다. 이상은의 14집 앨범과 유사한 전략인 셈인데, 앞의 두 마당을 허허거리며 본 뒤 넘긴 세번째 마당, '니 몸에 싹 났다' 에서 불현듯 어떤 거대한 느낌이 다가왔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疏處可以走馬
密處不使透風
(성겨야 할 곳은 말이 질주할 정도로, 빽빽해야 한다면 바람 한 자락 통하지 못할 듯 하게)




청나라 시대의 인물인 등석여의 말이다. 세번째 마당과 여섯번째 마당인 '너와 나' 는 문득 저 등석여의 말을 떠오르게 하고 고민하고 있었던 화제와 다시 마주치게 만든다. 대지 위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마치 자연의 일부인 듯 촉촉히 젖어 새 삶을 얻는 것과 동물들을 비교하듯 그려내는 것은 사실 마음만 먹는다면 극사실주의 화법으로도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헌데 이 작품은 에드몽 보두앵의 <여행>보다도 더 담박하기 그지 없는 게 아닌가! 이 부분이 작품의 가장 놀라운 점이다. '1920년대식 사랑이야기' 가 다시 생각나 또 보다가 문득 노부부가 서로에 대한 마음을 키워나가던 주위의 공간에 푸른 잎이 우거진 나무가 머물고 있는 걸 보게 됐다. '웃는 개' 에서 붓 끝의 힘과 화선지가 만들어내는 '번짐'으로 그려진 개, '1920년대 사랑이야기' 에서의 나무 한 그루... 익숙한 이야기 속에 슬쩍슬쩍 그려놓은 놀라운 그림들을 낯설어하지 않게끔 끼워넣고 기다린 셈인데 보다보면 놀랍다. 일필휘지의 선이지만 자세하게 그리지 않아도 어떤 대상인지 전달되면서 이해도 가능하며,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이 단순한 형상만으로 모든 게 성립되기 때문이다. 대상을 극도로 단순화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일단 대상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고 있어야 하며 자칫하며 무미건조해 질 수 있는, 또 어느 것이나 그렇다지만 특히 함축적인 의미를 담아내는 점에서, 끊임없이 정신적으로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는 경계심을 놓치지 않아야 해서다. 맞다. 붓을 이용한 다듬기가 절정에 이르게 되면 되려 모든 군더더기가 제거되어 극도의 절제된 상태에 이르는 법이다. 개, 나무, 노부부, 아이들, 새싹, 장승, 달마 스님의 얼굴, 소와 사슴... 마지막으로 붓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여백의 공간까지, 붓이 이뤄낸 다양한 곡선과 직선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의미의 현란함이다. 모든 것들이 달라보여도 그 생동감만큼은 같은 법, 왜 코끼리를 이렇게 그려놨냐고 불평할 수 있지만 코끼리 그림을 구성하는 한 획 한 획을 살피면 우리가 그것을 흉내낸다 쳐도 절대 획의 힘까지 끌어올 수는 없음을 깨닫게 한다. <광대의 노래>는 백성민의 가장 화려한 작품이다. 거기다 철학적이기까지 하고.



*- '미켈란젤로' 편을 보다가 또 깜짝 놀랐던 것은 '천지창조'나 '피에타' 등의, 너무나도 세밀한 그림과 조각을 백성민 화백은 붓으로 윤곽만 그린 것 같은데도 작품의 핵심을 너무나도 잘 간파하여 표현해 냈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은 합성으로 '피에타'에다 <야인시대>의 세계를 끌고 들어오기도 할 정도가 됐지만..) 하지만 그는 그런 능력으로 자만하지 않는다. 미켈란젤로가 자연의 창조물을 보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일화를 이야기의 끝에 배치한 건 예술에 대한 백성민 화백의 생각을 잘 표현하는 것과 같다. 예술이란 어쩌다 한 번 삐직 새어나온 방귀소리가 될 수 있는 것도 예술이다. 예술을 예술이라 받아들이지 못하면 바로 쓰레기가 될 수 있는 것도 예술이다. 그래서 예술가는 항상 겸손해야 한다. -*
음, 그래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중노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절제의 끝은 자연이 만들어낸 대상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자체로 '자연'을 살아내는 것 말이다. 여기에 도달한 '인간 예술가'는 아직 없다. 사실 본인이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여덟번째 마당인 '미켈란젤로' 에서 작가는 세기의 예술가인 미켈란젤로의 일화를 다루고 있다. 성스럽기 그지없는 '피에타'를 만들고 자기 자신마저 도취되어 나르시즘과 자만심에 직접 이름을 새겨넣은 그는, 자랑할라고 작업실 문을 박차며 밖으로 나갔다가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잎을 보게 된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고 바람에 살랑대는 나뭇잎의 모습에 압도된 그는 곧 자신의 하찮음을 알고 다시는 자기 작품에 이름을 새겨 넣지 않았더라는 결론으로 이 마당은 마무리된다. 미켈란젤로의 일화는 어쩌면 백성민 화백과 <광대의 노래>란 작품이 가진 일정 부분의 세계일 듯 싶다. 세세하게 그리면 정말 복잡하지만 단순하게 보면 한없이 단순하고 별 것 아닐 법한 자연에서 예술, 혹은 인생의 진리를 볼 것인지 아니면 그냥 나뭇잎의 흔들림으로 보고 신경쓰지 않을 것인지 말이다. 화백은 자연이란 대상을 만들어낸 신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더라도 그 경지에 이르는 비밀의 끝자락을 약간이라도 들춰 볼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쌓여왔던 연륜이 있었기 때문일거다. 몸이라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노화의 과정을 시작하게 되지만 정신은 더욱 깊어지고, 깊음은 자신의 작품에서 겸손을 동반한 새로운 힘으로 승화된다. 화백은 그걸 알기에 마당을 열어 사람들을 초대하여 자신이 깨달아왔던 것들을 참 친근하게 풀어놓는다. 그리고 거기엔 많은 말이 필요없다.
앞에서 개인적으로 생각했던 것이 21세기에 이 작품이 존재하게 됐고, 왜 존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였다. 이미 위에서 의문형으로 써 놨으니 이 끄적거림을 읽을 분들도 다 알고 계실 것이다. 이제는 미니홈피와 블로그가 존재하는 걸 넘어서 트위터와 페이스북까지 존재하고 있는 시대다. 인터넷으로 스스로의 생각을 밝히는 풍경은 오래 전부터 시작되어 왔지만, 사실 상대적으로 글을 길게 쓸 수 있는 미니홈피와 블로그에서 더이상 디테일한 글을 쓰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으며 페이스북, 그리고 140자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 트위터는 우리가 만든 인터넷 세앙이 짧고 굵은 문장으로 치명적인 칼을 만들어 세상의 썩은 부분을 베어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굳이 썩은 부분이 아니더라도 의식이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 예리한 칼이 되어야 한다.
작품의 도입부에 있는 추천사에 적혀져 있듯이 만화는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매체다. 백성민은 타블렛도 아닌, 펜과 잉크도 아닌 붓과 먹으로 작품을 그렸고 블로그에다 업로드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찾았다. 복잡해질 필요 없이 이것 역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훌륭하고 행복한 결합의 예라고 볼 수 있겠는데 <광대의 노래>는 함축적이고 예리하기까지 하다. 네번째 마당, '네게도 날개가 있음을' 과 깨진 물독을 들고 다니는 할머니의 이야기, 전자는 작가가 이전에 그렸던 <싸울아비>나 <토끼>를 보는 듯한 역동적인 그림체를 붓으로 옮겨온 듯 하고 후자는 마치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책을 보는 듯한 그림체로 구성됐다. 가장 극단적인 외형의 대비일 것이다.
이야기의 정서나 구성 역시 그렇다. '내게도 날개가 있음을' 은 강한 새끼만을 키우기 위해서 자식을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리는 매의 이야기이며 '미련 곰탱이 할매'는 이미 깨져버린 물독인데 시집올 때 들고 온 거라 물 새는 걸 알면서도 그냥 들고 다니는 할머니의 이야기다. 전자가 '니 몸에 싹 났다' 만큼 설명이 없이 그림만으로 대부분의 이야기를 설명하고 후자는 참 친절한 설명들을 곁들이고 있는데, 전형적인 약육강식의 일례와 전혀 효율적이지 못한 행동을 반복하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작가가 찾아내는 핵심은 독자들을 전율하게 만든다. 단순히 강함과 약함을 논해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논리를 벗어나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 는 논리로 치환될 때 그 힘찬 붓선에서 작가가 찾아내는 것은 다름 아닌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절박함이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전율은 마침내 살아남은 매들이 백두산과 만주벌판을 넘어 태양을 향해 힘찬 날갯짓을 하고 있을 때의 그림과 더불어 그리 길지 않은 문장에서 나온다.




'너 잃어버린 날개를 찾았는가
저 매처럼 벼랑 끝에서 뛰어내려 본 자 만이
자신에게도 날개가 있음을 알게 된다
잊고 있던 날개를 다시 찾게 된다'
이것은 다른 누군가를 밀어내고 살아남는 경쟁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날기 위해 자기 자신의 고민과 끊임없이 싸운 결과다. 작가는 그것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은 채 57자로 설명한다. (140자도 아니네.) 동시에 그것은 살아남기, 혹은 경쟁에 대한 단면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한 대가의 재밌지만 뼈가 있는 충고이기도 하다. 치열하게 스스로에 대해 고민한 적 있는가? 그렇게 고민한 자만이 스스로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어 흔들림 없이 하고자 하는 일을 행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좋은 방향으로의 작용을 일으킨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장담컨대, 이 이야기는 당신의 심금을 울릴 것이다.

'미련 곰탱이 할매'는 할머니가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붙인 별명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이 새 독이면 물이 새지 않아 우물에 한 번만 길러오면 되는데 깨진 걸 들고 다녀서 두 번 왔다갔다하니 미련하다고 붙여준 별명이다. 아니, 말이 별명이지 이건 완전히 비하하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기분 나빠도 생각해보면 효율성을 따질 경우엔 새 물독으로 바꾸는 게 일리가 있고 사실상 대부분의 개인은 집단의 시선에 위축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꿋꿋하고 또 여유롭다. 그녀의 가치는 효율성에 있는게 아니라 지금 자신의 행위를, 하루를, 인생을 구성하는 데 잇어서 더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려 깨지고 오래된 독을 선택한 것이며, 타인의 시선과 말들에 흔들리지 않았다. 표현의 방식과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정서는 다를지라도 핵심적인 건 같다. 할머니에겐 '날개'가 있다. 작가는 그녀를 격려할 수 있다. 거기엔 그닥 긴 말이 필요없다. 깨진 독에서 떨어진 물들이 흙에 스며드니 새싹이 돋기 시작하고 시간이 지나니 아름다운 꽃길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조금 모자란다고 부를 수 있겠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결국 그런 사람들이다. 평생을 살아도 자기 자신을 바꿀 수 있을까 말까인데 누군가는 훨씬 거대한 무언가를 바꿔가고 있으니 말이다. 작가는 재미있게 얘기한다. 말수는 적고 그림 역시 많지 않다. 근데 예리하고 화려하다. 딱인가? 작가의 서문에서 그림그리기는 참 재미있는 것이라며 어떤 놀이처럼 표현하지만, 작가의 즐거운 놀이마당은 고요한 강물 밑에서 격렬하게 몰아치는 물살처럼 독자를 느끼게 한다. 언제나 서민들을 웃기고 즐겁게 하는 말과 행동들을 해 왔지만, 그 속에는 부패한 권력층을 향한 치명적 비수를 숨겼던 세상의 왕, 광대들처럼. <광대의 노래> 속에 숨겨진 비수는 지금도 유효하다.
추천 서평대로 백성민은 붓으로 만화의 영역을 초월해가고 있다. 그리고 난 길기만 할 뿐인 연필의 끄적거림으로 그의 작품을 다루고 있다. 아마 난 그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베어내지 못할 것이다. 현재까지는. 뭐, 노력해 봐야겠지!
p.s.1 - 참고로 위에서 언급한 '피에타'에 스며들어온 <야인시대>의 세계란.. DC 인사이드에서 만든 이것..

p.s.2 - 백성민 화백은 2005년부터 네이버 블로그에 자신의 그림들을 올리고 있습니다. '광대 가'란 닉네임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