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붙일 수 없는 자 사뮈엘 베케트 선집
사뮈엘 베케트 지음, 전승화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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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사가 없는 소설을 싫어한다. 그런데 왜 베케트를 읽었던 걸까? 나탈리 레제의 베케트 전기 <사뮈엘 베케트의 말없는 삶>을 읽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것이다. 베케트의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는 서사도 없고 묘사도 없다. 오로지 목소리()의 헛소리만이 가득하다. 이 소설은 애초에 이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해할 수 없는 소설을 왜 읽었는가

재밌기 때문이다.

 

너무도 많은 것들이 떠올라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카프카, 프랜시스 베이컨의 회화, 들뢰즈, 바르트, 조로 아스터교, 수메르 신화, 데모크리토스, 원자, 기하학, 물리학, 신학, 특히나 모리스 블랑쇼. 쓰고 싶은 말들이 흘러 넘치는데, 이걸 다 쓰려면 독후감이 아니라 아예 논문을 써야 할 지경이다.

 

베케트는 1934년에서 35년 사이에 250회에 걸쳐 비온 박사에게 정신분석 치료를 받았었다.

 

우리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귀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에 대해 자기 살갗의 구멍들에서 흘러나오는 땀에 대한 것과 동일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 이 대목을 상기시키는 베케트의 말은 몇 년 후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에 등장한다. “내 눈물이 가슴 위에서, 옆구리에서, 혹은 등을 타고 내리며 나를 놀리는 게 느껴진다.” 이 둘은 모두 동일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말들 사이에서 자기 자신의 눈물을 찾고자 하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찾음으로써 암흑으로부터 헤어나고자 하는 거대하고 이산된 몸이 그것이다.

 

- 나탈리 레제, <사뮈엘 베케트의 말없는 삶>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에는 오로지 자아의 무한한 분열밖에는 없다. 소설에서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는 마후드 일 수 있고, 웜일 수도 있으며, 신일 수도 있고, 오물 덩어리일 수 도 있다. 혹은 그 모든 것이다. 역설적으로 가장 베케트적인 영화라면 아마도 <존 말코비치 되기>가 아닐는지. 이런 소설에서 논리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베케트는 왜 이런 정신분열증 환자의 헛소리로 이루어진 소설을 썼을까.

 

언어활동이란 모두 분절되어 있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밤하늘의 별을 보며 별자리를 정하는 것처럼 비정형적이고, 성운 모양을 한 세계를 쪼개는 작업 그 자체입니다. 어떤 관념이 먼저 존재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이름이 붙으면서 어떤 관념이 우리의 사고 속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말을 하고 있을 때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내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득한 언어 규칙이고, 내가 몸에 익힌 어휘이며, 내가 듣고 익숙해진 표현, 내가 아까 읽었던 책의 일부입니다.

 

이와 반대로 갓 만들어진 따끈따끈하고 때 묻지 않은 나의 의견은 대개의 경우 비슷한 이야기가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맴돌고 앞뒤가 모순되며 주어가 도중에 바뀌는, 그래서 자기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난감한 문장이 됩니다.

 

따라서 내가 말하고 있을 때 내 속에서 말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타인의 말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 우치다 타츠루,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베케트는 자기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문장을 통해서 진정한 자아가 도출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윗 문장에서 방점은 잘 모르는에 찍혀져야 한다. 제임스 조이스였다면 에피퍼니의 순간이라 했을 것이다. 조이스가 여러 개의 에피퍼니를 수집했다면 베케트에겐 인생에 단 한 번의 에피퍼니의 순간이 있었다. 베케트는 계시라고 표현했다. 어머니를 간호하던 밤, 바람이 불고 폭우가 쏟아지고 번개가 친다. 그것이 지나고 그는 안다.

 

사물들에 관한 일반 지식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얻은 그것은 자기 자신에 관한 아주 비좁은 지식이다. 이제 자신이 해서는 안 될 것이 무엇인지 자꾸 곱씹는 일(조이스처럼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않는다....)이 끝난다. 대신, 죽어가는 어머니의 방에서 둥글고도 단단한, 마치 한 개의 돌멩이 같은 말이 떠오른다. 받아들이다(consentir). 자신의 취약함을, 어리석음을, 한계를 받아들이자. 찰나의 계시.

 

- 나탈리 레제, <사뮈엘 베케트의 말없는 삶>

 

베케트는 이후 자신의 모국어 안에서만 진실을 말할 수 있다는 파울 첼란의 가르침을 버리고, 비코의 말을 따른다.

 

무릇 뛰어난 시인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 자기 고향의 말을 잊어버리고 말들의 최초의 불행 상태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베케트는 이후 영어를 버리고 프랑스어로 작품을 쓴다. 최초의 불행 상태, 결핍의 언어. 그 결핍의 언어를 가지고 베케트는 침묵과 말 사이를 오간다. 계속.

 

.....계속해야만 하잖아, 나는 계속할 수가 없어, 계속해야만 해, 그렇다면 내가 계속해야지, 단어들을 말해야만 해, ......그 단어들이 어쩌면 내 이야기의 문턱까지, 내 이야기로 통하는 문 앞까지 나를 데려갔을 수도 있고, 에이 설마, 만일 문이 열리면, 내가 있을 거야, 침묵이 있겠지, 내가 있는 그 곳에, 나는 모르겠다, 나는 그걸 영원히 모를 거야, 침묵 속에서는 누구도 알지 못해, 계속해야만 해, 나는 곧 계속할 거야 (p119)

 

윗 문장이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의 마지막 구절이다. 왜 그는 끊임없이 계속 말해야 할까?

베케트는 언어에 구멍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 언어에 구멍을 내기 위해선 계속 말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이 채워지지 않는 기분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분석가가 말없이 있기 때문일까? 그러나 피분석자의 내용 없는 이야기에 분석가가 응답을 하면, 그것도 긍정적인 응답을 하면 침묵 이상으로 피분석자의 채워지지 않는 기분이 증진된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피분석자가 말하는 언어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일종의 채워지지 않음이 아닐까? 즉 피분석자라는 주체는 말하면 말할수록 자기의 존재감이 희박해지는 듯한 기분을 맛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중략) 결국 피분석자는 자기의 존재가 상상의 세계 속에서 그가 만들어낸 작품 속에서만 존재하고 이 작품이 지금 그의 자기확신과 어긋난 것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이 아닐까? <정신분석에서 말하기와 언어의 기능과 영역>에서

 

 

분석가와 피분석자의 주고받기는 하나의 이야기 세계를 구축합니다. 이 이야기가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악곡이 어떤 의미에서든 현실의 재현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재현도 상기도, 진실의 개시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화 작용에 다름 아닙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창조행위이지요.

 

라캉이 자아moi’je’주체sujet’라는 동의어를 마술사처럼 교묘한 손놀림으로 나누어 사용하는 이유도 이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자아는 주체가 아무리 말을 해도 언어로 거기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체를 통해 계속 말을 걸어야 하는 근원적인 채워지지 않음입니다. ....그때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말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 해도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그곳에 있다는 것만은 말할 수가 있습니다. 라캉의 자아는 그 말로는 할 수 없지만 그것이 말을 불러오는일종의 자기장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프로이트는 자아를 언어의 핵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주체가 로서 말을 하고 있을 때 늘 구조적으로 주체에 의한 자기 규정, 자기정위의 말로부터 도망치는 것, 그리고 그 때문에 더욱 말을 하도록 동기 부여를 하는 것이 바로 자아입니다. 따라서 대화의 목적은 이 자아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아있는 곳을 찾고 그 작용을 끝까지 지켜보는 일입니다. 그것이 정신분석의 일입니다.

 

- 우치다 타츠루,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주체가 아무리 말을 하더라도 자아에 도달할 수 없다. 베케트는 도달할 수 없다는 한계를 받아들이지만 어쩌면 그것만이 창조행위가 아닐까.

 

만일 베케트가 오늘날 활동했다면 그는 연극, 영화 연출가보다 힙합 프로듀서나 힙합 아티스트가 되지 않았을까. 요즘 <언프리티 랩스타>를 즐겨 본 영향 탓일까. 책을 묵독하면서 랩을 하듯이 읽었다. 이런 식으로 읽은 책은 이 책이 유일하다. 읽다보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

 

이 책을 다 읽고 한참이나 정신이 나가 있었다. 아직 안타깝게도 마약 경험이 없는데 뽕 맞은 느낌이 이런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경험해보지 못했던 방식의 책인지라 뇌가 그것을 소화하기 위해 뉴런과 시냅스의 새로운 연결을 모색해서였을까. 그게 아니라면 랩처럼 읽히는 운율을 타는 문장 탓이었을까. 마치 테크노 음악에 취한 것처럼?

한마디로 약 빤 느낌이었다.

 

베케트를 통해 처음으로 워크룸 프레스 출판사 책과 접했다.

이웃님들이 왜 워크룸 프레스 책을 사 모으는지 절절이 느꼈다.

최고의 편집이다. 편집에 감동을 먹다니!!

 

나탈리 레제의 <사뮈엘 베케트의 말없는 삶>을 손에 잡을 땐 마치 여인의 가녀린 허리를 잡는 듯하여 놓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책이 이렇게 손에 쏘옥 안길 수 있지? 놓았다 하더라도 다시 손에 쥐었다. 반납일 지났는데 아직 반납 못하고 있다. , 이 책 진짜 반납하기 싫다

 

워크룸 프레스 출판사에서 출간된 사뮈엘 베케트 책을 계속 읽어야겠다.

 

계속 읽어야 하잖아, 계속 읽을 거야, 계속 읽어야만 해,

나는, , 계속 할, 거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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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9-07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내용은 왠지 어려울 것 같은데 편집이 좋다니 또 혹하네요.

근데 이거 원 허리 굵은 사람은 서러워 살겠습니까?
평생 좋아하는 사람 품에 안 겨 보지도 못하고..
왜 남자들은 허리 가녀린 여자만 좋아할까요?ㅠㅠ
허리가 굵던 가녀리던 여자는 똑같은데...
그럴 땐 남자가 팔이 짧은 것을 안타까워해 줄 수는 없는 건가요?ㅠㅠㅋㅋ

시이소오 2016-09-07 14:33   좋아요 0 | URL
굵은 허리도 좋아합니다. ㅋ

안 안기는 책도 좋아하구요 ㅋ ^^

cyrus 2016-09-07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오히려 서사 없는 소설이 재미있어요. 굳이 줄거리를 파악할 필요 없이 그냥 어떤 상황이 전개되는지 보기만 하면 되잖아요. 계속 보다 보면 지루하지만, 일반 소설과는 다른 특별한 매력이 있어요. 재미없어서 읽고 싶지 않은데도 결말이 궁금해서 끝까지 보고 싶은 느낌이 들어요. ^^

워크룸프레스 사드 전집을 모으고 싶은데, 출간 소식이 뜸하네요.

시이소오 2016-09-07 17:42   좋아요 0 | URL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베케트 소설이 맞으실듯

사드전집을 기획하다니 대단한 출판사에요 ^^

나뭇잎처럼 2016-09-08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반가운 이름. 베케트. 베케트 하면 저는 자동반사적으로 크누트 함순이 떠올라요. 베케트가 좋으셨다면 크누트 함순도 좋아하실 듯!

시이소오 2016-09-09 18:15   좋아요 0 | URL
베케트에 비하면 함순은 친절하지 않나요? 굶주림 을 읽다 말았는데 다시 읽어야겠어요 ^^
 


리뷰가 안 써지네요. 흑.......  


구조주의 이전의 역사;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마르크스는 사회집단이 역사적으로 변화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인으로서 계급에 주목했습니다. 그가 지적한 것은 인간이 어느 계급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사고방식이 달라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렇듯 계급에 따라 달라지는 사고방식을 계급의식이라고 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주어진 상황 속에 그저 멈춰 있는 것으로, 자연적이고 사물적인 존재라는 입장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타락하는 길, 짐승이 되는 길이나 다름없습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입장을 헤겔로부터 배웠습니다.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에 만족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도약해서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헤겔의 인간학을 거칠게 표현한 것입니다.

 

헤겔이 말하는 자기의식이란 한마디로 일단 자기가 서 있는 위치에서 떨어져 그 자리를 되돌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어진 틀에서 벗어나 상상을 통해 마련된 전망 좋은 자리에서 땅 위의 자신과 주변의 사태를 조망하는 것입니다. .......상상으로 확보된 나와의 거리, 그것이 자기인식의 정확함을 보증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창조한 세계 속에서 자기를 직관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은 바로 이런 의미겠지요.

 

헤겔이나 마르크스 모두 자기로부터의 괴리=조감적 시야의 확보는 단순한 관상이 아니라, ‘생산=노동에 몸을 던짐으로써 타자와의 관계속으로 들어갈 때에만 달성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주체성의 기원은 주체의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행동에 있다. 이것이 구조주의의 가장 근본이 되는 개념이며 모든 구조주의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생각입니다.

 

관계망 중심에 주관적이고 자기결정적인 주체가 있고 그것이 내가 의사를 결정하는 데 기본이 되어 전체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관계의 매듭 안에서 주체가 누구인가가 결정된다는 생각을 탈 중심화또는 비 중추화라고도 합니다.

 

중추에 고정적이고 정지적인 주체가 있어 그것이 상황을 판단하고 결정하고 표현하는 천동설적인 인간관에서, 중심을 갖지 않는 관계망을 형성하려는 운동이 있고 그 연결의 얽힘으로서 주체가 상정된다는 지동설적인 인간관으로의 이행, 그것이 20세기 사상의 근본적인 추세였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계급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생각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채로 생각한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그너라 그 도덕률은 어디까지나 사유재산의 보전, 개인의 자기보존, 자기실현’, 그러니까 자연권의 최대의 행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선악의 규범 그 자체에 대해 어떤 보편적인 의미나 인간적인 가치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기추의를 철저하게 추구하면 언젠가 이타주의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공리주의의 도덕관입니다.

 

짐승의 무리가 지닌 단 하나의 행동 준칙은 타인과 동일하게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짐승의 무리는 누군가 특별하거나 탁월한 것을 싫어합니다. 짐승의 무리가 지닌 이상은 모두 동일하게입니다. 그것이 짐승의 무리가 지닌 도덕이 됩니다. 니체가 비판한 것은 이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짐승의 무리를 위한 도착적인 도덕이 탄생합니다. 도착적이라는 말을 썼는가 하면 짐승의 무리는 어떤 행위가 도덕적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을 그 행위에 내재하는 가치나 그 행위가 그에게 가져다줄 이익이 아니라 단순히 다른 사람과 동일한지 아닌지를 기준으로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상호참조하며 이웃 사람을 모방하고 집단 전체가 한없이 균질화되어 가는 것에 깊은 희열을 느끼는 인간들에게 니체는 노예Sklave’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보다시피 니체는 초인이란 이런 것이다가 아니라 이런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어쩌면 초인은 구체적인 존재자가 아니라 인간의 초극이라는 운동성 그 자체인 듯합니다. 다시 말해 초인이란 인간을 뛰어넘은 그 무엇이라기보다는 짐승의 무리와 같은 존재자=노예라는 것에 고통을 느끼고 부끄러워하는 감수성,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니체는 무엇인가를 격렬하게 혐오한 나머지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열망한 것을 거리의 파토스Pathos der Distanz’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혐오감이 바로 자기초극의 열정을 제공해줍니다.

 

2. 창시자 소쉬르

 

소쉬르의 언어학이 구조주의에 안겨준 가장 중요한 견해를 하나만 든다면 언어는 사물의 이름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소쉬르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이름이 생기고 비로소 사물이 그 의미를 확정하는 것이라면 명명되기 이전의 이름을 갖지 못한 것은 실재하지 않는 다는 게 그의 생각입니다.

 

이처럼 말에 포함되어 있는 의미의 두께와 깊이를 소쉬르는 가치valeur’라고 불렀습니다.

 

언어활동이란 모두 분절되어 있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밤하늘의 별을 보며 별자리를 정하는 것처럼 비정형적이고, 성운 모양을 한 세계를 쪼개는 작업 그 자체입니다. 어떤 관념이 먼저 존재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이름이 붙으면서 어떤 관념이 우리의 사고 속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시인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시의 신이나 소크라테스의 다이몬말을 하고 있을 때 내 속에서 말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라는 언어 운용의 본질을 직관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내가 말을 하고 있을 때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내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습득한 언어 규칙이고, 내가 몸에 익힌 어휘이며, 내가 듣고 익숙해진 표현, 내가 아까 읽었던 책의 일부입니다.

 

이와 반대로 갓 만들어진 따끈따끈하고 때 묻지 않은 나의 의견은 대개의 경우 비슷한 이야기가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맴돌고 앞뒤가 모순되며 주어가 도중에 바뀌는, 그래서 자기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난감한 문장이 됩니다.

 

따라서 내가 말하고 있을 때 내 속에서 말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타인의 말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이 자아중심주의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무기임이 분명해졌습니다.

 

3장 푸코와 계보학적 사고

 

감옥이 되었건 광기가 되었건 또한 학술이 되었건, 우리는 그것이 시대나 지역과 관계없이 언제 어디서든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사회제도는 과거의 어느 지점에,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의 복합적인 효과로서 탄생한 것으로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지적하고 그 제도나 의미가 생성된 현장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는 것, 그것이 바로 푸코의 사회사작업입니다.

 

어떤 제도가 생성된 순간의 현장, 즉 역사적인 가치판단이 개입해서 그것을 더럽히기 전의 가공 전 상태를 훗날 롤랑 바르트는 영도degré zéro’라는 학술 용어로 부르게 됩니다. 구조주의란 한마디로 다양한 인간적 여러 제도 (언어, 문학, 신화, 친족, 무의식 등)에서의 영도의 탐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여기, 를 역사의 진화에서 최고 도달점, 필연적인 귀착점으로 간주하는 생각을 푸코는 인간주의humanisme’라고 부릅니다. (자아중심주의의 일종입니다.)

 

푸코는 지금, 여기, 를 근원적인 사고의 원점으로 간주하고 거기에 편안하게 앉아서 그 시각으로 삼라만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며 판단하는 지의 자세를 인간주의라고 부른 것입니다.

 

푸코는 그때까지의 역사가가 결코 제기하지 않았던 문제에서 출발합니다. 그것은 이들 사건은 어떻게 말해져왔는가?’가 아니라 이들 사건은 어떻게 말해지지 않았는가?’입니다. 왜 어떤 사건은 선택적으로 억압되고 비밀에 부쳐지고 은폐되었는가? 왜 어떤 사건은 기술되고 어떤 사건은 기술되지 않았는가?

 

광인은 사법관에 의한 수감의 대상이 아니라 의사에 의한 치료의 대상이 됩니다. 얼핏 광인의 처우 방법이 보다 합리적이고 인도적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단단한 격리로부터 부드러운 격리로의 이행 과정에서 어떤 공범관계가 암묵적으로 생겨납니다. 그것은 바로 의료와 정치의 결탁, 지와 권력의 결탁입니다.

 

권력은 감촉이 부드러운 이성적인 대리인학술적인 지를 통해서 오히려 철저하게 행사됩니다. 이것이 푸코의 생각입니다.

 

근대 국가는 예외없이 국민의 신체를 통제하고 표준화하며 조작 가능한 관리하기 쉬운 형태로 두는 것, 순종적인 신체를 조형하는 것을 정치적 과제 가운데 최우선으로 내걸었습니다.

 

신체의 지배를 통해서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 이 정치기술의 최종 목적입니다. 이 기술의 요체는 강제 지배가 아닙니다. 통제되고 있는 사람이 통제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 의지를 토대로, 자기의 내발적인 욕망에 의해 순종적인 신민이 되어 권력의 그물코 속에 자기를 등록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의 온갖 성적 행위를 망라한 목록을 만드는 것, 그것을 공공화하는 것, ‘기호를 공유하는 마니아들을 조직화하는 것, 매춘부나 포르노그래피를 다루는 성 상품 시장을 세우는 것, 의학이나 정신병리학, 사회학 등을 성에 대한 학문적 지식으로 편성하는 것 등 이런 무수한 흐름이 성의 담론화라는 담담한 거대 강의 흐름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성에 대한 검열? 그렇지 않다. 거기에 설치되어 있는 것은 성과 관계된 담론을 생산하는 장치, 많은 담론을 만들어 내는 장치인 것이다


- 푸코 <성의 역사에서>

 

푸코가 지적한 것은 모든 지의 영위가 그것이 세계의 성립이나 인간의 모습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서 축적하려고 하는 욕망에 의해 구동되는 한 반드시 권력적으로 기능한다는 점입니다.

 

4. 바르트와 <글쓰기의 영도>

 

상징과 기호는 닮았지만 다른 것입니다. ‘상징은 그것이 지시하는 것과 크든 작은 어떤 현실적인 연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기호라는 것은 어느 사회집단이 인위적으로 약속한 표시와 의미의 결합입니다. 기호는 표시의미하나가 되어 비로소 진정한 의미가 생깁니다.

 

소쉬르는 귤껍질과 같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표시를 의미하는 것signifiant(시니피앙)으로 장기의 졸의 작용의미되는 것signifié(시니피에)라고 불렀습니다. 기호란 의미하는 것과 의미되는 것의 세트이며, 이 둘을 합친 것이 기호입니다.

 

바르트는 이 보이지 않는 규칙에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랑그스틸입니다. 랑그라는 것은 우선 국어입니다. 바르트의 정의를 빌리면 어느 시대의 글을 쓰는 사람 전원에 의해 공유되는 규칙과 습관의 집합체입니다.

 

랑그가 외부로부터의규제라고 한다면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가 무엇인가 말을 할 때 우리의 언어 운용을 내부에서규제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언어 감각이라고 할 만한 것들입니다. ......바르트는 쓰는 사람의 영광, 뇌옥, 고독인 이 개인적이고 생래적인 언어 감각을 스틸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르트는 이들 외에 제3의 규제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에크리튀르écriture입니다.

 

스틸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선호이지만 에크리튀르는 집단적으로 선택되고 실천되는 선호입니다.

 

깡패는 깡패의 에크리튀르로 말하고 비즈니스맨은 비즈니스맨의 에크리튀르로 말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에크리튀르의 죄수입니다.

 

여기서 바르트가 경고하고 있는 것은 특히 어떤 집단 고유의 에크리튀르라고 특정하기 어려운, 지나치게 넓은 범위를 지닌 어법이 지닌 위험성입니다. ‘징후가 없는 언어 사용이 바로 패권을 쥔 어법입니다. 그 사회의 객관적인 언어 사용입니다. 즉 어떤 주관적인 의견이나 개인적인 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이 개인의 감정이 들어가 있지 않은 가치중립적인 의미에서 사용하는 언어 사용을 말합니다. 바르트는 이처럼 가치중립적으로 보이는 어법이 포함한 예단편견을 주의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가치중립적인 어법 속에 그 사회집단 전원이 무의식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깃들어 있다는 바르트의 생각을 보다 교묘하게 활용한 것이 페미니즘 비평의 이론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읽으면서 첫 번째 읽을 때 알아채지 못했던 의미를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처음 읽을 때 놓친 의미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 책을 한번 끝까지 읽은 덕분에 우리의 견해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즉 그 책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읽어내는 읽을 수 있는 주체로 우리를 형성한 것은 텍스트를 읽은 경험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텍스트texte’직조된 것tissu’입니다. 직조물은 다양한 곳으로부터 모인 다양한 요소로 채워져 있습니다. 한편의 텍스트가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주제나 문체, 원고 매수, 동시대적인 사건, 다른 텍스테에 대한 의식과 경합 등 이런 각각의 것들은 고유의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얽혀 어느새 텍스쳐texture’가 직조됩니다.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에서 온 복합적인 글쓰기들로 이루어져 서로 대화하고 풍자하고 반박한다. 그러나 이런 다양성이 집결되는 한 장소가 있는데 그 장소는 지금까지 말해온 것처럼 저자가 아닌 바로 독자이다. 독자는 글쓰기를 이루는 모든 인용들이 하나도 상실됨 없이 기재되는 공간이다. 텍스트의 통일성은 그 기원이 아닌 목적지에 있다. 그러나 이 목적지는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일 수는 없다. (중략)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중에서

 

바르트는 독특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이()’에 대한 편애입니다. ...바르트는 온갖 사상에 근거이유역사를 갖다 대는 것도 나름대로 소중하지만 그것이 유럽적 정신이 지닌 질병의 징후는 아닐지 의심했습니다. 그는 공은 공으로서기능하며 무의미에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책무가 있고 사물과 사물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거리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할까?라고 물었습니다.

 

에크르튀르의 영도, 순수한 에크리튀르란 희망, 금지, 명령 판단 등 말하는 사람의 주관적인 개입이 전혀 없는 순백의에크리튀르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바르트가 평생에 걸쳐 추구한 언어의 꿈이었습니다.

 

 

바르트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의 에크리튀르를 이상적인 문체라고 극찬했습니다. .....<이방인>의 에크리튀르는 순수한 에크리튀르의 훌륭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쿠를 읽는 다는 것은 언어에 대해 욕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중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호의 제국>에서

 

5. 레비스트로스와 끝나지 않는 증여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하이데거, 야스퍼스, 키르케고르 등의 실존 철학에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이론을 접합한 것입니다.

 

실존한다ex-sistere’라는 동사는 말의 뜻만 보면 바깥에 선다라는 의미입니다. 자기존립의 근거가 되는 발판을 자기의 내부가 아니라 자기의 외부에 두는 것이 실존주의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말은 사르트르의 유명한 말로서,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결단을 내리는가에 따라 그 인간이 본질적으로 누구인가가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양자가 대립하는 것은 논쟁이 주체역사와 관계될 때입니다.

 

이것이 참여engagement’(원래의 뜻은 구속되는 것’)라는 사태입니다. 내가 처해 있는 역사적인 상황은 중립적이지 않고 기다려주지 않으며 결단을 요구합니다.

 

사르트르의 참여하는 주체는 주어진 상황에서 과감하게 몸을 던지고 주관적인 판단을 토대로 자기가 내린 판단의 책임을 숙연하게 받아들이며, 그 수용을 통해서 그러한 결단을 내리고 있는 어떤 것으로서 자기의 본질을 구축해가는 것입니다.

 

역사적 상황의 변동을 확인하고 그때마다 적절한 계급적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지식인의 사명임에도 불구하고 카뮈는 자기변혁의 노력을 게을리했고 지식인으로서의 역사적 책무를 수행하지 않았다, 레지스탕스를 이끌던 때의 카뮈는 역사적으로 옳았지만 동일한 입장에 머물러 제3세계의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전면적인 참가를 주저하는 카뮈는 역사적으로 틀렸다.

 

실존주의는 이렇게 한번 배제했던 신의 관점역사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뒷문으로 끌어들인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레비스트로스가 비난한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주체는 주어진 상황의 결단을 통해서 자기형성을 한다는 점에서 실존주의와 구조조의의 차이는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상황 속에서 주체는 늘 정치적으로 옳은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정치적 올바름은 마르크스주의적인 역사 인식을 전제해야 한다는 단계에 이르러 구조주의는 실존주의와 결별하게 됩니다.

 

방대한 현지 조사를 기초로 한 레비스트로스의 결론은 미개인의 사고문명인의 사고의 차이는 발전 단계의 차이가 아니라 애초부터 다른 사고이며 비교해서 우열을 가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추상적인 언어의 사용은 그것이 지적 능력의 수준을 나타내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민족사회 속의 특정집단이 지니고 있는 관심의 차이에서 온다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모든 문명은 각자가 지닌 사고의 객관적 측면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준엄하게 충고합니다. 즉 우리는 모두 자기가 보고 있는 세계만이 객관적으로 리얼한 세계이며 다른 사람이 보고 있는 세계는 주관적으로 왜곡된 세계라고 생각하며 타인을 깔봅니다.

 

음운론phonology음소론phonemics’이라고도 불립니다. 그것은 언어로서 내뱉어진 음성은 어떤 랑그 속에서 어떻게 다른 언어의 소리와 식별되는가, 그 언어 소리의 차별화가 지닌 메커니즘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어떤 말소리에 대해 그것이 모음인지 자음인지’, ‘비음인지 비음이 아닌지’, ‘집약적인지 확산적인지’, ‘끊기는지 연속성이 있는지등 열두 종류의 음향적, 발성적인 물음을 제기하면 세계의 모든 언어에 포함된 음소를 목록화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어떤 음소 체계라도 12개의 이항대립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12비트, 12번의 0/1 선택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음소를 특정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구조는 4개의 항(형제, 자매, 아버지, 아들)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것을 친족의 기본구조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친족구조라는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인간사회에 있어서 언제나 존재하는 세 종류의 가족 관계, 즉 공통의 아버지를 갖는다는 관계, 결혼에 따른 관계, 낳은 자와 태어난 자와의 관계 바꿔 말하자면 형제자매, 남편과 아내, 어버이와 아들의 관계- 가 거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레비스트로스, <구조 인류학>에서

 

세계의 모든 언어 소리를 12비트로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세계 어디서나 친족의 기본 구조는 2비트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레비스트로스의 가설입니다.

 

인간이 사회구조를 만든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가 인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인간적 감정이나 합리적 판단을 바탕으로 사회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구조는 우리의 인간적 감정이나 인간적 이론에 앞서서 이미 그곳에 있고, 오히려 그것이 우리가 지닌 감정의 형태나 논리의 문법을 차후에 구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득적인 자연스러움이나 합리성에 기초해서 사회구조의 기원이나 의미를 찾으려고 해도 결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친족 구조는 단적으로 근친상간을 금지하기 위해존재하는 것입니다.

 

근친상간이 금지된 것은 여자의 커뮤니케이션을 추진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레비스트로스가 제시한 답입니다.

 

근친상간의 금지란 인간사회에 있어 사내가 계집을 획득하려면 이를 다른 사내로부터 얻을 수밖에 없고 후자는 계집을 딸이건 자매건 전자에게 양도한다고 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 <구조인류학>에서

 

남자는 다른 남자로부터 그 딸 또는 자매를 양도받는 형식 외에 여자를 손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것이 레비스트로스의 대발견입니다.

 

친족관계에는 오직 한 가지의 존재 이유가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계속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친족이 존재하는 것은 친족이 계속 존재하기때문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사회 시스템의 변화를 끊임없이 새로운 상태가 되는역사적인 모습을 바탕으로 구상하는 사회를 뜨거운 사회, 역사적인 변화를 배제하고 신석기 시대와 다르지 않은 무시간적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사회, 야생의 사고가 지배하는 사회를 차가운 사회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그것은(증여와 답례)은 인간에게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타인으로부터 받는 방식으로만 손에 넣을 수 있다라는 진리를 되풀이해서 새겨넣은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손에 넣고 싶다면 타인으로부터 증여를 받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증여와 답례의 운동을 일으키려면 먼저 자기가 그와 동일한 것을 타인에게 주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증여의 기본 규칙입니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인간은 세 가지 수준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개합니다. 재화, 서비스의 교환(경제활동), 메시지의 교환(언어활동), 그리고 여자의 교환(친족제도)이 그것입니다.

 

이들 커뮤니케이션은 최초에 누군가가 증여를 하고 그에 따라 준 사람이 무엇인가를 잃고 받은 사람이 그에 대해 반대급부의 책무를 진다는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불균형을 재생산하는 시스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 결코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되며 유통되는 시스템입니다.

 

이 일반적인 호혜 형식이 밝혀지지 않고 있었던 것은 각각의 그룹이 직접적으로 상대편과 주고받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줄 상대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며 얻은 자에게 돌려주는 것도 아니다. AB에게 주고 다른 C로부터 받는다는 식으로 전체는 하나의 방향으로만 기능하는 호혜의 순환을 이루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 <구조인류학>에서

 

인간이 타자와 공생하기 위해서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모든 집단에 적용되는 규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사회는 동일한 상태로 계속 있을 수가 없다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먼저 타자에게 주어야 한다는 두 가지 규칙입니다.

 

6장 라캉과 분석적 대화

 

거울 단계란 유아가 생후 6개월이 되면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 흥미를 가지게 되고 마침내 강렬한 희열을 경험하게 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아이는 를 손에 넣은 것입니다.

거울 단계는 일종의 자기동일화로서, 즉 주체가 어떤 상을 받아들일 때 주체의 내부에 일어나는 변용으로 이해됩니다.

 

아이가 시각적 이미지로서의 를 처음 조우한 경험. 그것이 거울 단계입니다. ....거울에 비친 이미지는 어쨌든 본래의 나는 아닙니다.

 

인간은 내가 아닌 것라고 가정하는것에 의해 를 형성한다는 외상을 깔고 인생을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의 기원은 내가 될 수 없는 것에 의해 담보되어 있고 의 원점은 나의 내부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외부에 있는 것을 자기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매달려야만 간신히 자기동일성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울 단계를 통과하는방법에 의해 인간은 의 탄생과 동시에 일종의 광기에 시달리게 됩니다.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볼 때, ‘라는 (‘주체의 외부에 있는)것을 구조적으로 본래의 주체로 착각하고 인정하며 살고 있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그것은 어느 정도 미쳐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따라서 정신분석에서 자아는 치료의 거점이 될 수 없습니다. 정신분석이 치료의 발단으로 선택한 것은 언어의 수준입니다.

 

정신분석에는 단 하나의 매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피분석자가 말하는 언어이다. 이를 증명하는 사실들이 있다. 그런데 말해지는 언어는 반드시 응답을 요구한다. 우리가 이제부터 보려고 하는 것은 응답이 없는 말 걸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 말 걸기에 침묵으로 응한다고 해도 듣는 사람이 있는 한 이 주고받기 속에 정신분석의 핵심이 존재한다


-라캉, <정신분석에서 말하기와 언어의 기능과 영역>에서

 

 

 

우리가 자기 과거의 기억을 생생하게 기억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진지하고 주의 깊게 들어주는 듣는 사람이 있어야만 합니다. ‘과거를 생각해내는 것은 나와 듣는 사람사이에 과거의 회상을 통해서 친밀한 커뮤니케이션을 나눌 수 있다는 기대가 형성된 경우라야만 합니다.

 

 

이 채워지지 않는 기분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분석가가 말없이 있기 때문일까? 그러나 피분석자의 내용 없는 이야기에 분석가가 응답을 하면, 그것도 긍정적인 응답을 하면 침묵 이상으로 피분석자의 채워지지 않는 기분이 증진된다는 것이 아려져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피분석자가 말하는 언어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일종의 채워지지 않음이 아닐까? 즉 피분석자라는 주체는 말하면 말할수록 자기의 존재감이 희박해지는 듯한 기분을 맛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중략) 결국 피분석자는 자기의 존재가 상상의 세계 속에서 그가 만들어낸 작품 속에서만 존재하고 이 작품이 지금 그의 자기확신과 어긋난 것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이 아닐까


- 라캉, <정신분석에서 말하기와 언어의 기능과 영역>에서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으로 옮기는 과정을 통해 억압을 해제하고 증후 형식을 위한 여러 조건을 제거하며 병의 원인이  되는 갈등을 어떤 형태로 해결할 수 있는 정상적인 갈등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 프로이트, <정신분석입문>에서


프로이트는 그것이야말로 정신분석의 일이라고 단언합니다. 그 본질적인 몸짓인 다른 것을 드러내는’, ‘번역하는’, ‘이전하는’, ‘대체하는것은 독일어 übertragen이라는 동사로 모두 표현 할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의 일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위버트라켄 하는 일입니다.

 

라캉은 여기에 음악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악보 위 음악 소리의 작용에서 중요한 것은 음표끼리의 연결 방법이나 다른 음표와의 화음입니다. 그것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악보에서 떨어져 나와 단독으로 제시된 소리는 음악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분석적 대화에서 환자가 말하는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단독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경험적인 사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음표처럼 전체 악보 위에서 다른 음표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가치를 결정할 수 있는 기호가 될 뿐입니다.

 

분석가와 피분석자의 주고받기는 하나의 이야기 세계를 구축합니다. 이 이야기가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악곡이 어떤 의미에서든 현실의 재현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재현도 상기도, 진실의 개시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화 작용에 다름 아닙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창조행위이지요.

 

라캉이 자아moi’je’주체sujet’라는 동의어를 마술사처럼 교묘한 손놀림으로 나누어 사용하는 이유도 이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자아는 주체가 아무리 말을 해도 언어로 거기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체를 통해 계속 말을 걸어야 하는 근원적인 채워지지 않음입니다. ....그때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말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 해도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그곳에 있다는 것만은 말할 수가 있습니다. 라캉의 자아는 그 말로는 할 수 없지만 그것이 말을 불러오는일종의 자기장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프로이트는 자아를 언어의 핵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주체가 로서 말을 하고 있을 때 늘 구조적으로 주체에 의한 자기 규정, 자기정위의 말로부터 도망치는 것, 그리고 그 때문에 더욱 말을 하도록 동기 부여를 하는 것이 바로 자아입니다. 따라서 대화의 목적은 이 자아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아있는 곳을 찾고 그 작용을 끝까지 지켜보는 일입니다. 그것이 정신분석의 일입니다.

 

즉 자아와 나는 주체의 두 극을 이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주체는 이 양극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자아의 거리를 가능한 좁히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그리고 분석가의 작업은 그것을 지원하는 일입니다.

 

오이디푸스는 도식적으로 말하면 아이가 언어를 사용하게 되는 것, 어머니와의 유착이 아버지에 의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부성의 위협적인 개입의 두 가지 형태입니다. 라캉은 이것을 아버지의 부(Non du père)=아버지의 이름(Nom du père)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아이와 어머니의 유착에 Non’을 알리고 (근친상간을 금지), 동시에 아이에게 사물에는 이름’Nom’이 있다는 것을(또는 인간의 세계에는 이름을 가진 것만 존재하고 이름을 갖지 못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고 언어 기호와 싱징의 취급 방법을 가르칩니다.

 

자르는 것, 이름을 붙이는 것. 이것은 소쉬르의 설명에서 보았듯이 사실 동일한 몸짓입니다. 아날로그적인 세계를 디지털로 자르는 것, 그것은 언어학적으로 말하면 기호에 의한 세계의 분절이 되고, 인류학적으로 말하면 근친상간의 금지입니다.

 

아이가 자라는 과정은 언어를 습득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세계는 분절되어 있는데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라는 절대적으로 수동적인 위치에 자기가 처음부터놓여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는 무능력하다라는 사실을 맛보게 될 때 반사적으로 그 사태의 원인이 나의 외부에 있으며, 나보다 강력한 것이 나의 온전한 자기인식이나 자기실현을 방해하고 있다는 이야기 형태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몸에 지니는 것, 다른 말로 하면 무서운 것에 굴복하는 능력을 몸에 지니는 것이 오이디푸스라는 과정의 교육적 효과입니다.

 

나의 온전한 자기인식과 자기실현을 억제하는 강력한 것을 정신분석에서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의 약함을 포함해서 를 통째로 설명하고 근거를 제시해주는 신화적인 기능의 다른 이름입니다.

 

 

아버지의 간섭에 의해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것이 설명되었다는 기분이 들 수 있도록 심리구조를 주입하는 것을 우리 세계에서는 성숙이라고 부릅니다.

 

라캉의 생각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인생에서 두 번 큰 사기술을 경험하고서 정상적인 어른이 됩니다. 그 첫 번째는 거울 단계에서 내가 아닌 것라고 생각하는 것에 의해 의 토대를 얻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오이디푸스 단계를 통해 자기의 무력함과 무능함을 아버지에 의한 위협적 개입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정상적인 어른또는 인간이란 이 두 번의 자기기만을 제대로 완수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앞의 레비스트로스의 해설에서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말한 것을 거의 그대로 정신분석적 대화에 적용할 수가 있습니다. 타자와의 언어적 교류는 이해 가능한 진술의 주고받기가 아니라 말의 증여와 답례의 형태가 되고 내용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언어 자체에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의 증여에 대한 언어의 답례를 하는 이 증여와 답례의 왕복운동을 계속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대화를 통해서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타자(분석가)를 경유해야만 한다는 인류학적인 진리를 학습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언어의 관계망 속 어딘가에 위치시키는 것입니다.

 

요컨대 레비스트로스는 우리 모두 사이좋게 살아요라고 한 것이며, 바르트는 언어 사용이 사람을 결정한다라고 한 것이고, 라캉은 어른이 되어라라고 한 것이며, 푸코는 나는 바보가 싫다라고 했음을 알게 된 것이지요.

뭐야, 이런 말이 하고 싶었던 거야?”

 

개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개체 간의 관계를 우선 연구하는 바로 그것이 구조주의 방법인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고대방식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고 다만 구조주의라는 용어가 과거에 없었을 뿐이지 구조주의적 사고방식은 오늘날보다 고대에 훨씬 많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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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9-06 18: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안써지는 것치고는 아주 길었어요 ㅎㅎㅎ

시이소오 2016-09-06 18:12   좋아요 2 | URL
이 내용을 한장으로 퉁치려고 하다보니 안 써지네요 ㅋ

AgalmA 2016-09-06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자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걸 깨닫게 해주는 것도 있지만 `타자(분석가)`의 필요성도 깨닫게 해 주는 것도 있죠. 정신분석이 신뢰를 바탕으로 한 상담자와 환자라는 1:1 구도가 된 것도 상통할 테고요. 많은 사람과의 대화 구도에서는 내면 깊숙한 얘기를 나눌 수 없으니 말입니다. 요즘의 소셜네트워크 커뮤니케이션의 공황 상태도 그런 부분에서 살펴 볼 부분이 있겠습니다.
프로이트가 최면 상태보다 이성적인 상태에서 환자와 면담하는 걸 중요시 했으니 그가 자아를 `언어의 핵`이라 말한 게 연결되네요.

막스 피카르트가 언어의 `초월적 선험성`과 `내재적 선험성`을 이야기 할 때 `내재적 선험성`의 위험을 강조한 게 생각납니다. 오랜 시간 사건과 역사를 겪으며 언어가 오래될 때 인간적 요인에 의해 언어의 내재적 선험성이 커지게 되고, 인간의 사고는 그만큼 좌지우지 되겠죠.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 민족성이라든지 종교의 교리가 그런 예가 되려나요. 계보를 형성해 온 철학 또한 거기에서 비껴갈 수는 없을 겁니다.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났는데, 읽다가 질문들이 상당수 날아갔어요;;
시이소오님 글 읽을 땐 메모를 해야겠다는! ㅎㅎ

시이소오 2016-09-06 21:42   좋아요 0 | URL
저도 읽으면서 여러 생각들이 미친말처럼 이리저리 날뛰는통에 아직 다스리질 못했네요. 말씀하신대로 언어가 무의식적으로 사유를 조장하는게 아닌지 숙고해봐야 겠습니다^^
 


정말 이것만 읽고 돈을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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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6-09-06 14: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일 같지 않습니다.......

시이소오 2016-09-06 14:14   좋아요 1 | URL
ㅋㅋ syo님도 돈을.....?

syo 2016-09-06 14:35   좋아요 1 | URL
벌어야 되는데.......ㅋㅋ

시이소오 2016-09-06 14:38   좋아요 1 | URL
같이 벌어요 ㅋ

syo 2016-09-06 15:04   좋아요 1 | URL
그럴까요? ㅋ

시이소오 2016-09-06 16:04   좋아요 1 | URL
파이팅입니다^^

stella.K 2016-09-06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이것만 읽고 돈을 벌........ㅋㅋㅋㅋㅋ
책이 저리 좋으실까...?
시이소오님 책 맛있어 하시는 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ㅎㅎ

시이소오 2016-09-06 14:16   좋아요 0 | URL
책 좋아하는 건
스텔라님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 싶습니다. ^^

stella.K 2016-09-06 14:24   좋아요 0 | URL
아유, 그 무슨 무시무시한 말씀을...ㅠ

시이소오 2016-09-06 14:29   좋아요 0 | URL
저자분과 온라인상이라도 대화할수 있다니, 가문의영광 입니다^^

stella.K 2016-09-06 14:3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이 약발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ㅋㅋㅋㅋ

시이소오 2016-09-06 14:38   좋아요 0 | URL
계속 다음책 쓰셔야죵 ^^

:Dora 2016-09-06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쓰실 때가 된 건가요?!

시이소오 2016-09-06 16:47   좋아요 1 | URL
아구, 제 주제에 무슨 책을요! 밥벌이 글이라도 쓰려구요 ㅋ

blanca 2016-09-06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읽고 또 좋은 일들이 생겼으면 좋겠네요..

시이소오 2016-09-06 23:58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왠지 예언처럼 들리네요 ㅋ 그랬으면 좋겠어요. 격려 감사합니다 ^^
 

8. 대화

 

 

1960년대 미국 문학계에 등장한 뉴저널리즘은 내러티브 논픽션에 일대 전기를 가져왔다. 조앤 디디언, 게이 탈리스, 트루먼 커포티, 노먼 메일러를 필두로 한 뉴저널리즘 작가는 소설에서 사용하는 세련된 장치들을 거침없이 가져다 썼다.

 

내적 독백

 

내러티브에 모티브(동기)가 결합해야만 플롯이 된다. 따라서 인물의 심리 상태는 플롯을 진전시킨다.


 

9. 주제

 

 

그리고 그 1년 반 동안 나는 톰과 정기적으로 만나 내러티브 논픽션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모든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톰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철학자 조지 허버트 미드의 반사경 자아looking glass self가 떠올랐다. 반사경 자아란 다른 사람에게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인식한다는 개념이다.

 

주제문

 

완성된 스토리에서 사건의 동선은 주제를 위해 존재한다. 독자에게 시간을 투자해 보길 잘했다는 만족감을 주는 것도 결국은 이 주제다.

 

문을 나서면서 불을 끄는 게리. 집 안에는 이제 포스트잇이 없다. 문 앞에 붙어 있는 딱 한 장만 빼고.

 

거기엔 믿어라. 의심하지 마라고 적혀 있었다.

 

주제는 작가의 특징

 

레이조스 에그리는 드라마 전체를 떠받치는 기초가 된다고 해서 주제를 전제라고 불렀다. 에그리의 시각으로 보면 전제는 외부 세계 어딘가에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그가 전제를 찾겠다고 돌아다니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제란 자신의 신념에서 나온다.

 

우리의 대화는 결국 세상에 대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느냐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더듬고 파헤치는 것이었다.

 

진정한 환원주의자인 윌라 캐더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세상에 스토리는 두세 가지가 전부다. 이 두세 가지가 마치 처음 있는 이야기인 양 치열하게 되풀이될 뿐이다.”

  

 

존 프랭클린의 말을 빌리면, 상투성은 문장에서 발휘되면 민망하지만 주제가 되면 핵심 요소로 변화한다. “신기하게도 상투성은 개념으로 다뤄지면 항구불변의 진실로 탈바꿈한다.”

 

변함없는 단골주제들

 

단골로 등장하는 전형적인 주제로는 염원, 수색, 여정, 추구, 포획, 구조, 탈출, 사랑, 금지된 사랑, 짝사랑, 모험, 수수께끼, 미스터리, 희생, 발견, 유혹, 정체성의 상실 혹은 회복, 변질, 변신, 괴물 물리치기, 명계로의 추락, 환생, 속죄 등이 있다.”

 

토마 톰린슨은 가장 보편적인 교훈을 이끌어 내고자 했다. “그는 이제 거대한 수체의 미스터리를 푸는 일이 일상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안다. 간혹 문제가 안 풀릴 땐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다. 한참 후에 다시 보면 새로운 점이 보인다. 그리고 주로 자신의 본능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폴라 라로크도 스토리의 교훈적 성격을 언급한 바 있다. “동화에서 <이솝 우화>, <보바리 부인>에 이르기까지 전형적인 이야기들의 알맹이를 들여다보면 그곳엔 경고를 던지는 도덕적인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현대 예술의 보편적 패턴을 세련되고 교묘하게 연장 해석한 것들로서 대의, 결과, 이유, 질서를 추구한다.”

 

사실 내러티브 논픽션은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거나 대중의 갈채를 받는 사람의 이야기다. 이것이 바로 내러티브 논픽션과 정통 저널리즘을 가르는 중요한 차이점 중 하나다.

 

문명이란 둑이 있는 강이다. 강에서는 사람을 죽이고, 훔치고, 소리 지르고, 역사학자가 주로 기록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피가 넘실댄다. 한편 둑에서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가정을 꾸리고, 사랑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노래를 부르고, 시를 쓰고, 조각상을 만든다. 문명은 이 둑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둑을 보지 않고 강을 바라보는 역사가는 염세주의자이다.

 

- 윌 듀란트.

 

 

주제 찾기

 

나는 아무리 소설이라 하더라도 주제는 결국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먼저 흥미로운 인물을 내세우고, 그럴싸한 시련을 던져 평온함을 뒤흔들면 이야기가 굴러가기 시작한다. 이때 인물이 시련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세상 이치에 대한 작가의 생각에서 나온다.

 

논픽션 작가는 주제를 반드시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톰 프렌치는 제목을 짓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때면 주제에 집중한다고 말한다. 나는 늘 장 제목, 소제목은 물론 전체 제목을 뽑으려고 고민한다. 그렇게 하면 스토리의 요지가 무엇인지, 구조와 힘이 무엇인지로 모든 생각이 수렴된다.”

 

맥키는 진정한 주제는 낱말이 아니라 문장이라고 말했다. “스토리의 의미가 담겨 있는, 더는 줄여지지 않는 명쾌하고 정돈된 한 문장이다.”

 

문장이니 당연히 동사가 들어가야 한다. 동사는 효과적인 주제문을 쓰는 열쇠다. 프랭클린은 어떻게든 능동사를 찾으려 한다. 나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목적어를 필요로 하는 타동사를 찾는다. 목적어가 무엇에 대한 대답이므로 문장을 타동사를 기준으로 짜면 인과관계가 확연해진다.

 

좋은 전제는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각 요소는 좋은 희곡에 필수 불가결하다. 가령 검약은 낭비를 부른다를 살펴보자. 이 전제의 첫 번째 단어는 인물(검약하는 인물)을 드러낸다. 두 번째 단어 낭비는 극의 결말을 암시하고, 세 번째 단어 부른다는 갈등을 나타낸다.”

 

 

따라서 어떤 원고가 됐든 나는 늘 똑같은 낱말을 가장 먼저 적는다. 컴퓨터 화면에 새 문서를 열고 주제라고 입력한다. 그 뒤에 쌍점을 찍고, 그대로 잠시 앉아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적확하게 담아낼 명사 동사 명사의 문장구조를 고민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라면 주제 : 스토리는 삶에서 의미를 짜낸다를 첫 문장으로 쓸 것이다.

 

10. 취재

 

몰입

 

현장에서 지켜보기, 귀담아듣기, 냄새 맡고 피부로 느끼기. 이것이 몰입 취재다.

 

그들이 마시는 공기를 마신다

묵묵히 지켜보며, 그들의 주변을 맴돈다

그들의 일상적인 업무 리듬을 파악한다.

그들만의 언어를 익힌다

그들이 주로 보는 책자, 지침서, 전문 출판물을 읽는다.

그들이 믿고 따르는 그 분야의 권위자를 찾아본다.

 

 

어떤 하위 문화에 몰입해 보내는 시간이 조금도 아깝지 않은 이유는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된 담벼락 안의 세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 낯선 사람을 만나면 경계하고 방어벽을 세운다. 하지만 눈에 익으면 신뢰 내지는 무관심이 생겨난다. 벽에 붙은 파리기법은 이런 이치를 바탕으로 한다. 일단 충분히 친숙해지면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 배경의 일부가 된다. 그러면 몰입 취재 대상은 비로소 긴장을 풀고 평소 모습으로 돌아간다.

 

접근

 

 

나는 이럴 경우 생존자들에게 다가가 지금 당신의 말 한마디가 올바른 역사를 알릴 중대한 역할을 한다라는 일종의 책무감을 심어 주라고 조언한다.

 

관찰 및 재구성 내러티브

 

인터뷰 하기

 

첫째, 취재원에게 내가 무엇을 하려 하는지를 명확하게 알리는 것이 좋다. .....전형적인 기사를 쓰려는 게 아니라고,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느껴지는 것을 모두 실제 있었던 그대로 되살려 내려 한다고 분명히 밝힌다.

 

‘’앞으로 15분 동안 우리의 대화는 힘든 노동이 될 것입니다. 외람되지만 우리 둘 다 목수라고 생각해 주세요. 함께 일한다는 생각으로 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는 지금 분해된 조각들을 하나로 조립해야 하거든요

 

 

구체적인 사실을 떠올릴 땐 한 가지 기억이 도 다른 기억을 불러내기도 한다. 그래서 취재원에게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어디에 있었고,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상키시켜 주는 게 꽤 도움이 된다.

 

리처드 벤 크레이머는 거실에서 하는 인터뷰를 좋아하지 않는다. “거실에 앉으면 꼭 팔짱을 끼게 된다는 것이 그 이유다. 대신 부엌 식탁으로 자리를 옮겨도 되겠느냐고 묻는다. 좋은 생각이다. 내 경험상 이럴 때 맥주 한 잔을 곁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인물, 장면, 액션, 주제

 

 

내러티브, 하다못해 피처기사를 쓰는 기자의 취재 노트라면 모름지기 시각적인 디테일, 일화, 액션의 흐름은 물론 냄새까지 담겨 있어야 한다. 취재하는 자신에 대한 기록(어떤 질문을 던졌고 그때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관찰하는 동안 자기 내면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났는지 등)이 담겨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 원고를 작성할 때 모두 필요한 재료다.

 

인물이 스토리의 동력인 만큼 취재 노트에는 신체적 특징, 얼굴 표정, 제스처, 목소리 톤, 그 밖의 모든 직접적 인물 묘사가 넘쳐 나야 한다. 이런 것은 대화를 나눌 때 관찰해 기록하는 것이 좋다. 의미를 전달하는데 비언어적 신호가 언어보다 더 효과적일 때가 많다. 인터뷰할 때 기자들이 사용하는 전형적인 방법은 별로 궁금하지 않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취재원이 열심히 대답하는 동안 외모와 옷차림 등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을 적는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스토리는 누군가가 무언가를 욕망할 때 시작된다. 따라서 스토리 내러티브를 위한 취재는 동기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존 프랭클린은 스토리의 스케일이 큰 경우 몇 시간씩 이어지는 심리 인터뷰를 진행한다. 처음에는 유년기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유전적, 행동적 동기를 찾아본다. 그런 다음 주인공의 인생을 더듬어 올라가며 중대 결정을 내린 순간, 그런 선택을 했던 요인들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디테일은 가설을 만들고, 가설은 다시 더 많은 디테일 수집의 단서가 된다. ....이렇게 가설을 세우고 관찰하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떤 시각적 디테일 혹은 액션을 골라잡아야 할지 방향이 잡힌다.

 

트루먼 커포티는 논픽션을 쓰는 데는 시각 디테일을 보는 좋은 식견이 필요한데 이런 면에서 작가는 일종의 텍스트 사진가’, 그것도 아주 까다롭게 이미지를 고르는 사진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펌프에 마중물을 부어 물을 끌어올리는 원리처럼 먼저 자기 자신이든 주인공에 대해서든 이야기한 뒤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하나 들려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디테일은 아무리 사소하고, 특별할 것 없는 개인적인 이야기라 해도 신중하게 선별하면 강력한 효력을 낸다. 톰 프렌치는 작고 소소한 순간의 힘과 중요성을 믿지 않으면 안 된다고 조언한다. “신문기자란 중대한 순간에 강해지게끔 훈련 받는다. 그런데 이 일을 오래 하면 할수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보이는 순간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정말 중요한 일은 바로 내 앞에서 일어나고 있다.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기만 하면 된다. ”

 

보석의 질 자체보다 세팅의 질이 중요하다. 세팅의 질은 취재 과정 동안 작가가 하는 생각의 질을 반영한다.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끊임없이 자문한다. ‘그녀는 왜 그랬을까?’,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이 난관이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일까?’


계속 질문하다보면 자꾸 발견하게 된다.

 

스토리를 보는 안목

 

모든 시련이 해결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해결은 모두 시련에서 나온다. 그래서 존 프랭클린은 거꾸로 해결에서 스토리를 찾아보라고 제안한다. 우리 앞에 놓인 신문이나 뉴스 웹사이트를 보면 해결이 널려 있다. “뉴스기사는 대부분 시작이 빠진 결말이다.

 

11. 스토리 내러티브

 

스토리는 모두 똑같은 것 같지만 저마다 다르다는 점에서 눈송이를 닮았다

 

- 존 프랭클린

 

12. 해설 내러티브

 

나는 리치에게 해설 내러티브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면 단지 경로만 밝아선 안 된다고 말했다. 사람이나 사물의 자취를 따라가야 한다. 해설 내러티브는 즉물적인 구체성을 요구한다. 독자가 구체적인 시간, 구체적인 장소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액션을 쭉 따라가며 설명을 하고 싶은 거잖아. 그러려면 우선 밀착해서 관찰해야 해. 사실에 충실한, 구체적인 디테일과 액션이 많아야 하니까. 일반적으로는 한 명의 사람을 따라가겠지. 하지만 그게 무생물이 되지 말란 법은 없어. ...단 그게 멈춰 있으면 안 돼. 계속 움직여야 해. 그러면 반드시 이런저런 인물들을 스치게 돼 있어. 이렇게 해서 이야기에 사람 냄새를 불어넣는 거지.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액션이야. 내러티브를 구축하는 스토리 라인을 만드는 게 액션이니까. 프런체프라이의 여러 면면을 끄집어내 보여 주기에 적절한 장소로 자넬 이끄는 것도 이거야.”

 

 

해설 내러티브의 이 두 가지 임무(액션과 설명)을 돕는 구조적인 요소가 두 가지 있다. 우선 액션 줄기, 즉 스토리 라인은 전체 형태를 잡아 주고 시간과 공간에 따라 내러티브를 이동시킨다.

 

여담은 체계적인 혹은 실용적인 설명을 제공함으로써 더욱 커다란 맥락안에서 액션을 바라보게 한다. 액션은 추상화 사다리의 아래쪽 칸에서 일어난다. 이곳은 감정이 지배한다. 설명은 사다리의 위쪽 칸에서 일어나며 이곳은 의미가 지배한다.

 

 

마크 크레이머의 말처럼 여담을 할 절호의 타이밍은 액션이 한창 일어나고 있을 때지 액션과 액션 사이가 아니다. ”

 

눈에 잘 보이는 뚜렷한 구조는 내러티브를 어떤 방향으로 밀고 나아간다. 존 프랭클린이 구조를 기계에 깃든 영혼이라고 부른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하는가?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어디로 가는가?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것은 어쩌다 이토록 난장판이 되었나?

그 사람이 된다면 어떨까?

 

나는 이 형식을 3+2 해설 내러티브라고 부른다. 내러티브 장면이 세 개, 사이사이에 들어갈 여담이 두 개.

 

13. 그 밖의 내러티브

 

 

비네트

 

비네트는 한 장면으로 완결된다. 비네트는 장면 하나로 끝나기 때문에 이 삶의 한 조각에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같은 주제 의식을 담아내야 한다. 현대 내러티브 논픽션의 큰 스승인 월트 해링턴비네트를 저널리즘의 하이쿠라고 말했다. 기자와 편집자들은 비네트를 교향시라고 부른다.

 

북엔드 내러티브

 

장면이 있는 액션이 긴 설명을 샌드위치처럼 앞뒤로 받치고 있는 구조다. 내러티브로 시작하고 내러티브로 마무리함으로써 중간에 자리 잡은 길고 지루한 내용을 지탱한다.

 

경수필

 

최초의 경수필 대가를 꼽으라고 한다면 16세기 프랑스 지성을 대표하는 몽테뉴가 아닐까.

 

보통 5분 정도면 독파하는 짧은 경수필 (1000자 이내)은 신문 칼럼이나 잡지의 주된 형식이다. 모든 경수필은 몽테뉴의 수필처럼 내러티브, 방향 전환, 결론으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귀납적이다. 구체적인 예에서 추상화 사다리를 오르고, 우주적인 진리를 결론으로 이끌어낸다.

 

파트1 : 내러티브, 650단어 (매우 구체적으로)

파트2 : 전환, 150단어 (구체적인 것에서 일반론으로)

파트3 : 결론 200단어 (요약 정리)

 

짧은 경수필 구조는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내러티브를 쪼개서 그 사이사이에 중간 결론을 넣을 수도 있다. 내러티브를 짧게 줄이고 주제에 대한 추상적인 논지를 길게 이어갈 수도 있고, 반대로 내러티브를 길게 가져감으로써 문학적 단서들을 통해 보편적인 결론이 은근히 드러나도록 할 수도 있다. 미국의 몽테뉴라 불리는 E.B 화이트는 <다시 호수로>에서 마지막 방식을 취했다.

 

칼럼

 

칼럼은 신문, 잡지, 온라인을 막론하고 길이가 800단어 내외로 거의 정해져 있다. 800단어라고 해도 짤막한 내러비트를 넣을 여지는 충분하다

 

1인칭 내러티브 이슈에세이

 

에세이는 상념과 산책이라고도 불린다. <애틀랜틱>의 수석 특파원 제임스 팰로스는 1인칭 내러티브 이슈에세이를 주로 썼다. 때로는 15,000단어를 넘기도 했고, 때로는 주제를 상당히 깊이 있게 파고들기도 했는데 그 중 <51번째 주>는 그의 이름을 널린 알린 기사다.

 

마이클 폴란은 잡지기사나 책을 쓸 때 모두 이 형식을 사용한다. 폴란은 물리적 공간을 이리저리 돌아볼 때도 내러티브를 쓸 수 있지만 어떤 시스템을 샅샅이 돌아볼 때도 내러티브를 쓸 수 있다고 말한다. 미국의 식품 생산 시스템을 파헤친 그의 베스트셀러 <잡식동물의 딜레마>가 아주 좋은 예다.

 

14 윤리의식

 

1980<워싱턴포스트>의 재닛 쿡은 퓰리처상을 받은 <지미의 세계> 속 아동 마약중독자가 꾸며 낸 인물임을 시인했다. 1998<뉴리퍼블릭>의 스티븐 글래스는 있지도 않은 출처를 만들어내고, 지금까지 쓴 27편의 스토리 중 일부를 지어냈음이 들통났다. 같은 해 <보스턴 글로브>의 생활면 칼럼니스트 퍼트리샤 스미스는 인용문과 등장인물을 허위로 만들어 냈다고 시인하고 신문사를 떠났다.

 

프랭크 매코트는 영국에서 막 독립한 아일랜드에서 궁핍한 유년기를 보냈다. 당시의 이야기를 쓴 <안젤라의 재>1996년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진입했다. 평단에서 호평이 쏟아졌고 퓰리처상을 비롯해 권위 있는 문학상을 모두 휩쓸었다. 여러 군데가 조작이었지만 <안젤라의 재>는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 상을 수상했다.

 

창조적 논픽션은 철저한 진실성 준수에 달려 있다. 구체적 사실에 의존해 정직하게 현실 세계를 쓰고, 기억과 상상에 의존해 이 세상을 총천연색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더 멋진 스토리를 쓰겠다고 사실을 왜곡하거나 없는 사실을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픽션이다.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로 풀기 위해 존재하는 사실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창조적 논픽션이다.

 

손드라 펄, 미미 슈워츠, <사실적 글쓰기 : 창조적 논픽션 작법과 요령>

 

감정적 진실은 창조적 논픽션에서 정확성을 논할 때 종종 튀어나오는 개념이다. 모든 디테일을 일일이 정확하게 묘사할 수는 없지만 본질적으로 사실인 커다란 의미를 잡아낼 수는 있다는 주장이다.

 

이 논쟁은 2003년 제임스 프레이의 <100만 개의 작은 조각>이 출간되면서 전면 부각되었다. 책은 알코올 중독, 마약중독을 극복하기 위해 힘겨운 시간으 보낸 프레이의 삶이 담긴 전형적인 회고록이다. 2006년 오프라 윈프리의 토크쇼에 소개되며 300만 부가 팔려 나갔다. 그 뒤 스모킹 건이라는 진실 추적 웹사이트에서 이 책이 날조됐다고 폭로했다.

 

논픽션 <선악의 정원>을 쓴 존 베런트는 몇가지 사실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자 사실적인 기록이 아니다라고 인정했음에도 무려 216주 동안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스틸은 몰입 취재의 윤리적 책임에 대해 한마디 했다. “사람마다 각자 주어진 임무가 있죠. 기자의 임무 역시 아주 특수하고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임무에는 네 가지 윤리적 책임이 수반된다고 덧붙였다. 첫째, 진실을 말할 것, 둘째, 독립적일 것, 셋째, 피해를 최소화할 것, 넷째, 책임을 질 것

 

 

논픽션 스토리 텔러를 위한 질문

 

내가 정말로 있었다고 주장하는 일이 내가 표현한 그대로 일어났는지 어떻게 알았는가?

그건 사실인가? 누가 사실이라고 이야기하는가?

나는 사실을 옳게 알고 있는가? 또한 옳은 사실을 알고 있는가?

나는 장면을 얼마나 완벽하게 재현해 놓았는가? 재현에 바탕이 된 정보제공자는 하나인가, 둘인가, 그 이상인가?

당시 현장에 있던 다른 목격자의 기억과 대조해 보았는가?

사료나 공식 기록 등의 문건을 통해 독립적 검증을 거쳤는가? 예를 들어 정보제공자가 비바람이 부는 칠흑 같은 밤이라고 말했을 때 기상청에 전화를 걸어 그날의 날씨를 확인했는가?

나는 정보제공자를 신뢰하는가? 정보제공자의 기억이 부정확하거나 그가 다른 속셈을 갖고 있어 내가 그에게 속아 넘어갔을 가능성은 없는가?

내 목적은 떳떳한가? 나는 독자에게 실체를 전달하려 노력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필력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거나 감동시키려 할 뿐인가?

재현의 신빙성을 보증하는 것이 출처 명기다. 이것이 없어서 신뢰성을 떨어뜨리는가? 어떤 장면을 재현할 때 어떻게 취재했고 어떤 출처에서 나왔는지 독자의 이해를 도울 편집자 주석이 있어야 하는가?

어떤 방식을 써서 취재했는지 편집자에게 숨김없이 공개하고 설명할 수 있으며, 그럴 의향이 있는가? 독자에게도 그럴 수 있고, 그럴 의향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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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마음이 2016-09-05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시이소오 2016-09-05 11:47   좋아요 0 | URL
^^
 

 

캐릭터

 

레이조스 에그리는 각각의 부분 부분을 하나로 모아 줄 힘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줄기에서 곁가지가 뻗어 나오듯 이 힘에서 여러 요소가 자라난다. 그 힘은 무한대의 파장을 일으키고, 힘의 원천은 변증법적 자기 모순에 사로잡힌 인간 캐릭터다.”

 

우리가 진짜 알고 싶은 것은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왜 하느냐이다. 마크 크레이머는 사람이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내러티브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존 캐릭터의 부상 

 

사람은 가치관, 믿음, 행위, 가지고 있는 물건의 총합이다. 모습, 말하는 방식, 걷는 모양 등으로 타인과 구별된다.

 

욕망

 

인물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스토리를 움직이는 그의 욕망이다.

 

욕망이 클수록 스토리의 규모도 커진다. .....커다란 욕망 속에는 스토리의 극적 효과를 증폭시키는 위험 요인이 감추어져 있다. “핵심 인물은 단지 무언가를 갈망하기만 해선 안 된다.” “너무나 지독하게 원한 나머지 그 목표를 이루려는 치열한 싸움에서 주인공이 파괴하거나 파괴당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

 

피터 루비는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가는 상당 부분 그를 저지하는 힘(반동 인물)에 의해 정의된다.”고 말한다. “이상적인 상황은 주인공을 저지하는 힘이 너무나 막강해 누가 이 싸움에서 이길지 책을 덮기 전까지 한시도 마음을 놓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스토리가 길수록 인물의 성장 폭이 커진다......장편소설에서는 인물이 스토리를 이끌고, 단편소설에서는 사건이 스토리를 이끈다는 말이 된다.

 

입체적인 인물, 단편적인 인물

 

 

존 프랭클린은 훌륭한 스토리들을 보면 시련에서 결말에 이르는 우여곡적을 거치는 동안 인물이 근본적으로 변화한다고 말한다. 이런 식의 근본적인 변화를 그려낼 수 있는 것은 내러티브뿐이다. .......입체감 있는 인물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뉴욕타임스> 기자 이저벨 윌커슨이 2001년 니먼내러티브저널리즘회의에서 독자에게 우리가 만들어 낸 인물을 완전체로 보여 주는 것, 그 인물을 통해 자신을 보고 그래서 그에게 일어나는 일을 걱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는 것이 우리 글 쓰는 사람들의 사명이다.”라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직접적인 혹은 간접적인 묘사

 

재닛 버로웨이는 <픽션 쓰기>에서 인물 묘사 기법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먼저 헨리 제임스나 그 외의 19세기 작가들처럼 작가가 직접 인물을 설명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작품 속에 진하게 드러내는 간접적인 인물 묘사 기법이다. 버로웨이는 헨리 제임스가 <여인의 초상>에서 터쳇 양을 묘사한 대목을 인용한다. “이 아기씨에게는 자기만의 방식이 있었고, 그 덕분에 부드러운 인상을 주겠다는 노력은 늘 수포로 돌아갔다.”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오늘날 최고의 작가들은 인물이 자신의 성격을 스스로 드러내게끔 한다. 버로웨이는 이것을 직접적인 인물 묘사라고 부른다.

 

신체적 특징

 

독자를 스토리에 젖어들게 하려면 인물이 내러티브 포물선을 따라가는 동안 그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을만한 시각적 디테일을 줘야 한다. ...묘사가 너무 자세하면 오히려 이 과정을 방해한다. 울프는 세세한 묘사는 본래의 목적을 해치기 쉽다. 이미지를 만들기보다 흩어 버리기 때문이다. 만화 정도의 윤곽을 제시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동작, 표현, 버릇

 

핵심은 어떤 단어도 허투루 쓰여선 안 되며 디테일 하나 하나가 이야기를 발전시키고 인물을 형성하는 데 일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표식들

 

논픽션 작가를 통틀어 톰 울프만큼 인물의 특성을 드러내는데 소유물을 잘 활용하는 작가는 없으리라. 그는 마돈나의 노래 가사처럼 우리는 물질적인 세상에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일대학교에서 미국학 박사학위를 받은 울프는 신분이나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들을 동시대 문화를 이해하는 열쇠라고 주장한 바 있다.

 

<뉴저널리즘>서문에서 그는 현대 논픽션의 저력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 또는 자신이 생각하는 위치, 희망하는 위치를 표현하는 행동 패턴과 소유물에 대한 기록에 있다고 단언했다.

 

 

누군가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어떤 식으로 말하느냐도 말의 내용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정확하게 그 사람을 드러낸다. .....말은 그 자체가 하나의 신분 표식이다. 입을 여는 순간 자신을 특정 사회계층에 연관 짓는 것과 같다. 말투, 억양, 발음 등 어떻게 말하는가는 단연 우리를 가장 잘 드러내는 디테일이다.

 

인물 묘사의 목적

 

인물의 사명은 이야기를 추진시키는 것이다. 생김새든, 짤막한 일화든, 지니고 있는 물건이든 이야기를 추진시키지 못하면 그것은 아무리 흥미로운들 사족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따지고 보면 스토리의 목적은 우리에게 성공적인 삶의 비밀을 알려 주는 것이다. 어떤 가치관이 실패에 이르게 하는지, 어떤 습관과 시각이 성공 가능성을 높여 주는지, 넘어야할 시련이 높고 크면 때로 참신한 접근이 필요하기도 하고, 성공과 실패에 대한 정의 자체를 다시 내려야 할 마큼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기도 한다.


 

장면

 

일례로 뉴저널리즘의 기수 톰 울프는 1970년대에 장면별 구성을 논픽션의 주요 특징으로 꼽았다.

 

논픽션에서도 이야기를 펼쳐 놓은 무대를 만들어야 한다. 논픽션을 쓸 때 자신을 극작가라고 생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야기를 풀어낼 공간이 생기면 이곳에 등장인물을 데려다 놓는다. 그런 다음 하고 손가락을 퉁기면 그들이 살아나 숨을 쉬고 무대를 돌아다닌다. 여기에 플롯이 더해지면 캐릭터, 사건, 장면이라는 스토리텔링의 3박자가 완성된다.

 

장면 자체는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스토리의 핵심은 사건이다. 사건을 일으키는 인물의 열망과 욕구가 플롯을 이 장면에서 저 장면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댈러스 모닝 뉴스>에서 오랫동안 글쓰기 코치를 해온 폴라 라로크는 장면 설정은 선물의 포장지일 뿐 그 속에 든 선물은 스토리다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달리말하면 각 장면은 사건이 펼쳐지는 동안 관객과 독자를 붙잡아 두는 일종의 그릇인 셈이다.

 

안으로부터 장면 찾기

 

데이비드 린은 영화감독 인생에서 커다란 전기가 되었던 사건은 자신의 일이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을 일종의 꿈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을 때라고 말했다.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존 가드너 역시 가공의 꿈을 창조하는 스토리텔러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내러티브가 일종의 꿈이라는 생각은 전반적인 스토리텔링에 대한, 특히 무대 설정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작가의 임무는 복잡한 세상사를 그대로 자세하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몇 가지 디테일을 신중하게 취사선택해 독자의 머릿속에 이미 들어 있는 기억을 건드리는 것이다.

 

장면 선정하기

 

해설 성격의 내러티브라면 매 장면에 글쓴이가 얘기하고 싶은 주제에 대한 다소 포괄적이고, 이상적인 요점이 담긴다.

 

스토리 내러티브로 가면 장면 선택은 더욱 복잡해진다. 내러티브 곡선에 따라 펼쳐지는 각 장면은 스토리의 단계를 거치며 사건을 추진시켜야 한다. 스토리 내러티브는 자세한 설명, 즉 주인공을 소개하고, 사건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배경을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스토리텔링>의 저자이자 문학 에이전트인 피터 루비는 주인공과 그의 시련에 초점이 맞춰진 장면을 골라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좋은 장면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춘다.

 

다음 장면과 인과관계를 이룬다

주인공의 열망과 욕구가 장면을 이끈다

주인공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스토리의 결말에 따라 인물의 상황이 변함을 보여준다.

 

 

훌륭한 스토리텔링이라면 그 중심에 갈등이 있고, 따라서 좋은 장면 선택 역시 갈등이 중심에 있다. 가령 피터 루비는 장면에 반대급부가 있느냐?”고 묻는다. 그는 반대급부를 극복하는 데서 스토리 전개에 가속도가 붙는다. 어떤 장면을 넣고 싶은데, 갈등과 감정이 부족하다면 미련없이 버려라라고 말한다.

 

장면을 살리는 묘사

 

빌 블런델이 강조했듯 묘사의 요지는 스토리 전개다. 이말인즉 디테일은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디테일 드러내기

 

모든 디테일이 장면 만들기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고의 디테일은 사건을 품은 무대를 만들 뿐 아니라 메시지도 전달한다.

 

그룹을 특징짓는 디테일

 

트레이시 키더처럼 노련한 논픽션 작가들은 피사체를 바짝 당겨 잡았다가 다시 뒤로 빠지는 거리 조절에 능숙하다. 그는 그룹을 포괄하는 디테일, 즉 그들이 사회에서 어떤 부류에 속하는 가를 나타내는 표시들을 이용해 그룹의 특징을 잡는다.

 

공간

 

마크 크레이머는 독자가 얼마나 넓고 크고, 높은지 등의 공간감을 잡을 수 있도록 무대를 그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감각으로 그곳에 있음을 느낀다.”

 

트레이시 키더가 폴 파머의 아이티 진료소를 맨 처음 묘사할 때 썼던 수법처럼 원경에서 근경, 즉 무대로 이동하는 것은 내러티브에 동적인 감각을 준다.

 

설정 숏


질감

 

카본은 수업 시간에 우리를 밖으로 불러내 눈에 보이는 장면을 질감으로 표현해 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전에 서로 대조되는 것을 찾아보라고 주문했다. 똑같은 것보다는 어긋나는 것이 독자에게 더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분위기

 

요령 좋은 작가는 질감이 살아 있는 공간으로 독자를 둘러쌀 뿐 아니라 분위기도 생생하게 전달한다. 매우 생생해서 숨을 들이마시면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다. 픽션에서는 토마스 만이 분위기의 명수다. 논픽션에서는 <뉴욕 타임스>기자 앤서니 샤디드가 필적할 만하다.

 

배경 설정

 

배경 설정은 내러티브가 펼쳐지는 장소의 비중이 큰 장르에서 특히나 중요하다. 장소가 아주 중요할 경우 배경 설명이 주야장천 이어지기도 하고, 심지어 배경이 등장인물이라도 되는 양 무대 앞으로 나서기도 한다.

 

장면 생생하게 살리기

 

생생한 디테일은 살아 있는 장면을 만드느 가장 중요한 요소다. 공간감, 질감, 분위기도 중요하지만 장면을 완성하는 것은 내러티브 속 인물들의 눈을 통해 독자가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는 환상을 주는 것이다. 톰 울프는 현대 논픽션은 시점인물들을 통해 스토리를 풀어야 하며, 이것은 무대 설정을 비롯한 다른 요소에도 해당된다고 강조한다.

 

장면 구축

 

톰 울프가 뉴저널리즘의 가장 기본기라고 꼽았던 장면별 구축기법은 내러티브가 있는 논픽션인가, 없는 논픽션인가를 구분 짓는 가장 큰 차이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스토리와 리포트를 구분 짓는 특징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내러티브기사 중 하나는 민물잡이낚시를 취해한 배리 뉴먼의 <낚시꾼>이다.

 

스토리를 장면별 에피스도가 연속된 시리즈라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지면 자연히 장면을 구성하는 일이 내러티브 기획의 첫 단계가 된다. 이것만큼 작가에게 스토리에 대한 명확한 그림을 주는 것은 없다. 스토리가 머릿속에 명확하게 잡혀 있으면 취재하고 집필하는 일 역시 간단해진다.

 

액션

 

내러티브 오프닝

 

레이조스 에그리는 극은 첫 대사를 내뱉는 것과 동시에 시작된다며 가장 이상적인 공격 개심점으로 아래의 경우를 꼽았다.

 

정확히 갈등이 위기로 치닫는다.

최소한 한 명의 인물이 자신의 인생에서 중대한 전환을 맞는다.

갈등을 초래하는 결정이 내려진다.

 

두 이야기 모두 주인공의 시점에서 시작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핵심 인물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 장면 속으로 들어가 주인공에게 닥친 난관들을 마치 자신이 직접 경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액션과 시점의 중요성을 염두에 둘 때 내러티브 오프닝으로 가장 일반적인 형식은 아무개가 무엇을 했다이다.

 

모든 내러티브를 요란하고 격렬한 액션으로 시작할 필요는 없다. 잔잔한 스토리에는 잔잔한 오프닝이 적절하다. 다만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액션은 반드시 필요하다.

 

2001년 톰 홀먼에게 특집기사 부문 퓰리처상을 안겨 준 3부작 내러티브의 첫 장면은 조용히 주인공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소년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창백한 손으로 멍하니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지속적 운동성

 

스토리는 심장박동처럼 끊임없는 운동성을 띠어야 한다. 내러티브는 시간이라는 줄에 에피소드를 알알이 꿰는 닐이기 때문이다. ,....이전에 기자들이 배꼽 들여다보기라고 비꼬았던 철학적 의미 파헤치기를 인내심 있게 들어줄 독자는 많지 않다. 일단 이야기가 시작됐다면 계속 굴러가야 한다.

 

액션의 언어

 

지미 브레슬린은 뉴스는 동사다라고 말했다.

 

타동사는 무엇을?‘이라는 질문에 답한다. ...따라서 액션을 정말 액션답게 표현하고 싶다면 연결 동사는 물론 자동사도 피해야 한다.

 

동기는 플롯에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존 프랭클린은 문학적 액션에는 대개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움직임이 결합돼 있다고 말한다.

 

능동태.

 

수동태로 문장을 바꾸면 동사의 동적인 기운이 현저히 줄어든다. 예를 들면 비명이 대기를 갈랐다대기가 비명에 의해 갈라졌다로 바꾸는 것이다.

 

수동태의 문제는 인물이 인과관계에 어떤 식으로 개입했는지를 문장에서 사라지게 만든다는 점이다.

 

타동사와 마찬가지로 능동태 또한 인물이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어떤 식으로, 무엇 때문에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 줌으로써 내러티브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하나의 액션은 다른 액션을 낳고, 이것은 또 다른 액션을 낳는다. 이것이 스토리의 핵심이다.

 

시발점 뛰어넘기

 

어떤 동작이 시작되는 순간은 지극히 짧다. .....스토리를 채우는 것은 액션 이미지다. 동작의 시발점을 건너뛰고 바로 동작을 언급하는 것이 더 낫다.

 

얀 볼즈는 차가 한쪽으로 가울더니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라고 썼지만 차가 한쪽으로 기울더니 데굴데굴 굴렀다도 안 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시간 표시 장치

 

대개는 은근슬쩍 시간을 알린다. 가령 여름에서 가을로 훌쩍 넘어가 장면이 새로 시작될 때 나무의 색깔을 언급하는 것이다. 혹은 등장인물이 건물에서 걸어 나올 때 하늘에 해가 어디쯤 떠 있는지 살짝 언급해 시간을 알리기도 한다.

 

속도

 

피터 루비는 각 장면은 클라이맥스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속도라는 것은 내러티브가 이 클라이맥스에서 다음 클라이맥스로 얼마나 빨리 이동하느냐는 뜻이기도 하다

 

일단 정점에 다다르면 속도를 줄여야 한다.

 

존 프랭클린의 말에 따르면, “감정이 얼마나 진하게 배어 있느냐는 곧 스톨리텔러가 인물과 배경에 내러티브 카메라를 얼마나 가까이 들이대고 있느냐를 말해준다.

 

속도 조절은 스토리텔러의 가장 강력한 내러티브 테크닉 중 하나다.

 

<세인트 피터즈버그 타임스>기자 시절 퓰리처상을 받은 톰 프렌치는 스토리를 쓸 때 이런 현실의 속도감을 정반대로 뒤집으려 노력한다고 말한다. “역설적이게도 지루한 부분일수록 속도를 높여야 하고,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듯 느껴지는 재밌는 부분에서는 속도를 떨어뜨려야 한다. 그래야 독자가 그 장면을 제대로 느끼고, 이해하고, 그 속에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장면 내러티브로의 전환을 줌인이라 부르곤 한다.


그렇다면 속도는 어떻게 늦추는 걸까? 톰은 지면을 더 많이 할애한다고 말한다. 문장의 수를 늘리되, 그 길이는 짧아야 한다. 문단도 더 짧게 나누어 여백을 이용한다. 평소라면 그냥 건너뛰었겠지만 장면 속에 자연스럽게 여백이 생기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톰은 장면 내러티브에 힘을 싣는 방법 중 하나로 중요한 대목이 임박했을 때 질질 끌면서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 할 때의 감질맛을 주는 것이라고 귀띔한다.

 

해설

 

해설은 내러티브의 적이다.

 

첫째, 꼭 필요한 것 외에는 넣지 않는다. “모든 설명은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는 것이 블런델의 원칙이다. “몇 시냐고 묻는 사람에게 시계 만드는 법을 이야기하진 않는다......설령 필요하다 하더라도 빨리 해치우고 본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스토리를 계속 진행시키는 것이다.”

 

 

드라마적 목적을 띠는 설명이 꼭 필요한 설명이다.

 

스토리의 흐름에서 굳이 벗어날 필요가 없을 때도 있다. 액션을 서술하는 문장 사이에 종속적이나 수식어구, 동격어구 등을 통해 설명을 끼워 넣는 것이다. 주절은 액션을 묘사하는 용도로 남겨둔다.

 

노련한 작가는 독자가 알아채지 못하게 은근슬쩍 주절 사이에 배경 설명을 집어넣는다.

 

여자들은 데이크론 소재의 정장을 입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미시시피의 햇볕에 얼룩덜룩해진 팔에는 에나멜가죽 가방이 들려있었다.


- 레타 그림슬리 존슨 <멤피스 커머셜 어필>

  

메리 로치의 글로 다시 돌아가 그녀가 액션이 가득한 장면 안에 어떻게 설명을 삽입했는지 살펴보자. 그녀는 칼을 위로 들어 올려 던질 자세를 취한다. 그 순간 교관이 그녀를 제지한다. 이때 약간의 스릴이 조성된다. 메리는 하던 이야기를 잠시 내려놓고 독자에게 대놓고 투검술의 성공 비법을 알려준다. 그리고 교관의 액션이 재개된다. 교관은 칼날을 던져 과녁에 꽂는다. 빌 블런델은 이것을 샌드위치 기법이라고 부른다. 액션은 빵에 해당하고, 설명은 속에 해당한다. 이 두가지가 함께 어우러져 완전한 맛을 내는 것이다.

 

1인칭 시점 액션

 

 

자신이 무언가를 봤다고 인정하진 않지만 무언가가 보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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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9-03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만큼 쓰기는 또 얼마나 걸리셨습니까? 1박2일?ㅋ

근데 논픽션 쓰기가 소설이나 시나리오 쓰기와는 다를 줄 알았는데
그 차이점을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런 책 읽을 때마다 과연 작가들이 메뉴얼대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있나 싶기도 해요.
그냥 뭐 하나에 꽂혀서 자유롭게 써 나갈 것 같은데...ㅠ

시이소오 2016-09-03 17:19   좋아요 1 | URL
실제로 소설은 하루키처럼 ` 오늘은 뭘 써볼까 `하고 펜이 가는대로 써도 되지않나요?

제 생각에 시나료는 그렇게쓸수 없는 장르같아요. 어느 정도는 설계 과정이 필요하잖아요.

논픽션도 설계작업이 필요할것 같네요 ㅎㅎ


AgalmA 2016-09-04 1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결국 픽션이냐 논픽션이냐의 차이가 아니라 사람이 어떤 것에서 흥미를 느끼고 지루해 하는가를 감안한 스토리텔링의 근본 전략 문제가 되겠죠.
전문가-작가는 위 전략들을 지침으로 보고 쓰는 게 아니라 이미 체득하고 있을 정도로 훈련이 되어야 한다는 게 관건이겠고요. 얼개들이 독자들의 이해를 받지 못해 비난받는 것보다 더 나쁜 상황은 얼개들이 보여 폭망하는 것;;
정리를 잘 하셔서 재밌게 봤습니다^^

시이소오 2016-09-04 19:19   좋아요 0 | URL
천의무봉이란 사자성어가 떠오르네요. 아갈마님 재밌게 읽으셨다니 정리한 보람이 있네요 ^^

고양이라디오 2016-09-05 16:33   좋아요 0 | URL
저도 이 글을 보면서 Agalma 님과 같은 생각을 했어요. 작가들은 이미 많은 작품을 보고 많이 씀으로 인해서 이런 작법들이 체화되어 있을 것 같아요ㅎ

시이소오 2016-09-05 16:37   좋아요 0 | URL
체화될 정도로 읽고 써야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