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행 야간열차 1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책이 마치 자신만을 위해 씌여졌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가? 몽테뉴의 수상록이 자신만을 위해 씌여진 것 같았다고 말한 이는 누구였더라. 나는 20대 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니체의 책들을 읽었을 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다소 재수없게 들리겠지만 저는 철학과 였답니다.^^물론 지금은 다 까먹었어요. ) 그렇다고 해서 삶이 완전히 뒤바뀐 건 아니었는데, 이 소설속의 주인공은 책 한 권 때문에 그가 쌓아왔던 몇 십년간의 삶을 내던지고 새로운 모험을 시작한다.

 

별명이 문두스(Mundus, 세계, 우주, 하늘)인 라틴어 선생인 그레고리우스는 어느 날 다리 위에서 뛰어내릴 듯한 여자와 마주친다. 여자는 싸인펜으로 그레고리우스의 이마에 전화번호를 적는다. 잊어버릴까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처음보는 남자 이마에??)

 

모국어가 뭐나는 물음에 그녀는 포르투게스라고 말한다. 여자는 그레고리우스를 따라 교실로 들어가 그의 강의를 듣다 조용히 사라진다. 그리고 그날 그레고리우스는 30년간 몸담았던 학교를 떠난다. 그는 그녀를 만난 다리로 가보지만 그녀를 또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에스파냐 책방으로 가 아마데우 이나시오 드 알메이다 프라두가 쓴 <웅 오루리베스 다스 팔라브라스>,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에 매료된다. 서점 주인이 포르투칼어 책을 번역해서 읽어주자 그레고리우스는 그 글이 오직 자신만을 위해 씌여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의 글은 몽테뉴의 <수상록>이나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혹은, 파스칼의 <팡세>를 연상시키는 철학적 에세이다.)

 

그는 포르투칼어를 공부해 책을 해석해 읽고, 작가를 만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포르투칼로 훌쩍 떠난다. 작가는 이미 죽었으나 그레고리우스는 작가의 지인들을 만나 그의 삶을 재구성해 나간다. 아마데우 프라두의 삶은 두 단어로 요약된다. 혁명과 사랑.

(‘혁명과 사랑소설의 원형은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이 아닐까.)

 

그의 삶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딜레마. 프라두는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독재정권하에 침묵하는 아버지를 증오한다. 그는 신을 경외하지만 한편으론 잔인한 신을 증오한다. 그는 어릴 적 지기인 조르주의 애인인 에스테파니아 에스피노자를 사랑한다. 그러나, 조르주는 그녀의 비상한 기억력 때문에 그녀를 죽이고자 한다. 프라두에게 우정이란 의지결정이며 영혼의 견해표명이다. 프라두는 에스피노자를 다른 나라로 도피시킨다. 만일 그녀가 독재 정권에 붙잡혀 고문에 의해 저항 운동의 동료들을 고발한다면? 프라두는 의사라는 직업에 충실하고자 인간백정 멩지스의 목숨을 구한다. 그를 살리는 게 수 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직업적 윤리에 입각한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행동이 더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아닐까.

프라두는 의사로서 루이스 멩지스의 목숨을 구한 이후로 삶의 커다란 변화를 맞는다.

사람들은 그를 피했고, 그는 상처받았고 그는 저항운동에 참여한다.

 

호기심을 끄는 도입부, 추리소설과도 같은 전개, 그러면서도 삶에 관한 깊은 사유를 담아내다니! 도대체 어떤 작가인가 싶어 검색해봤더니 독일 철학자였다. 페터 비에리.

 

페터 비에리는 자기 결정의 삶이란 철학을 제시한다. 모든 삶의 변곡점에서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삶만이 행복할 수 있다고. 그러기위해서는 냉철한 자기인식이 필수적이다.

과연 지금의 나의 삶은 내 스스로 결정한 삶일까.

아직도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내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는지. (책 읽는 건 잘하는 건 같은데, 돈이 안 되니.)

못하는 건 알겠다. (몸 쓰는 건 정말 못한다. 그렇다고 머리 쓰는 일을 잘 하지도 못하니,

나 같은 한량을 어디에 쓸 것인가)

 

와신상담과 용사지칩의 고사를 마음에 새기고 생계를 위해 굴욕을 감수하고 버텨왔는데

과연 그게 최선이었을까? 오랜 꿈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계획해야 할까?

 

모르겠다.

그처럼 야간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

이 책과 함께여도 좋겠다.

 

오랜만에 별 다섯 개로도 부족한 작품을 만났다.

 

밑줄 친 문장들

 

우린 모두 여러 가지 색깔로 이루어진 누더기, 헐겁고 느슨하게 연결되어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펄럭인다. 그러므로 우리와 우리 자신 사이에도,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만큼이나 많은 다양성이 존재한다.

 

-몽테뉴, <수상록>2

 

우린 모두, 여럿, 자기 자신의 과잉. 그러므로 주변을 경멸할 때의 어떤 사람은 주변과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거나 주변 때문에 괴로워할 때의 그와 동일한 인물이 아니다. 우리 존재라는 넓은 식민지 안에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p31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리가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이 보물로 눈을 돌리면, 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게 된다. 관찰의 대상은 그 자리에 서 있지 않고, 말은 경험한 것에서 미끄러져 결국 종이 위에는 모순만 가득하게 남는다. 나는 이것을 극복해야 할 단점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혼란스러움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익숙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경험들을 이해하기 위한 왕도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 이상하고 묘하게 들린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서야 깨어 있다는 느낌, 정말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p51. “ 우리 둘 모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존경하지요. 그의 <명상록>가운데 한 부분을 기억하실 겁니다. “내 영혼아, 죄를 범하라. 스스로에게 죄를 범하고 폭력을 가하라. 그러나 네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나중에 너 자신을 존중하고 존경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이생은 한 번, 단 한번뿐이므로. 네 인생은 이제 거의 끝나 가는데 너는 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았고, 행복할 때도 마치 다른 사람의 영혼인 듯 취급했다......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p65. 소리 없는 우아함.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 이런 생각은 술 취한 저널리스트와 요란하게 눈길을 끌려는 영화제작자, 혹은 머리에 황색 기사 정도만 들어 있는 작가들이 만들어낸 유치한 동화일 뿐이다. 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의 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 이런 경험은 폭음이나 불꽃이나 화산 폭발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경험을 하는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인생에 완전히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운 무음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p76 그리고 자기 이름은 주제 안토니우 다 실우베이라이며 비아리츠에 도자기를 파는 사업가라고 소개했다. 비행공포증이 있어 기차를 이용한다는 말도 했다.

자기가 지닌 공포의 진짜 이유를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p79. 헤브라이어를 담당했던 교사가 1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친 다음, 바로 욥기를 읽게 한 것이 일의 발단이었다. 글을 이해할 수 있게 되자 그레고리우스는 동양으로 향하는 길이 열리는, 무아지경과도 같은 경험을 하게 됐다. 칼 마이의 글은 동양을 너무 독일인의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다 뒤에서부터 아픙로 읽어간 이 책에서의 동양은 동양다웠다. 욥의 세 친구인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 몽롱하게 만드는 이 이국적인 이름부터 벌써 먼 바다 건너편에서 온 듯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꿈같은 세상인가!

 

p83. 여기서 얻는 결론이 뭘까? 그와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적용할 수 있는 이 사람들의 반응은? 속으로 그의 행동에 동의하거나 한걸음 더 나아가 그를 부러워할까? 그레고리우스는 몸을 일으키고 앉아 은빛으로 동이 터오는 올리브 숲을 내다보았다. 그가 지난 세월 내내 동료들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던 이 익숙함은 착각에 가득한 습관이요, 새어버린 무지임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에 대해 뭐라고 생각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한, 정말 중요한 일인가?

 

p92. 이렇게 계속 학교로 다시 찾아오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과거는 우리에게서 떨어져나갔으나 미래는 아직 시작되기 전이었던, 그 순간의 학교 운동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시간은 머뭇거리며 숨을 멈추고 있었다. 그 뒤로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일...... 마리아 주앙의 갈색 무릎, 그녀의 밝은 옷에서 나는 비누 냄새로 돌아가고 싶은건가. 아니면 지금의 내가 아닌,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었던 그 시절로 다시 가고 싶은 꿈과 같이 격정적인 갈망인가.

이 갈망은 약간 이상하고 역설의 냄새가 나며, 논리적으로 독특하다. 아직 미래를 경험하지 않은, 생의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은 이런 갈망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지나온, 그래서 과거가 되어버린 미래를 겪은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돌이키기 위해 옛날로 돌아가길 원한다. 지나온 시간이 괴롭지 않은 살마도 돌아가려고 할까?

 

p96. 낯선 사람의 삶을 산다는 게 어떤 것일까 생각하며 남의 뒤를 밟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금 전 그의 마음속에서 터져 나온 감정은 아주 새로운 호기심이었다. 그 호기심은 기차를 타고 오면서 경험했고, 파리 리용 역에 내리면서도 어제였든 아니면 언제였든 느꼈던 새로운 종류의 각성과 어울릴 만한 것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가끔 멈추어 서서 앞을 바라보았다. 그가 사랑하는 고전들은 각자의 삶을 산 인물들로 가득했고, 그 책들을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언제나 이런 삶을 읽고 이해한다는 뜻이었다.

 

p106. <대지진>. 그레고리우스는 대지진이 1755년에 일어났고, 리스본을 폐허로 만들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일로 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었다.

 

p107. 그게 그렇게 대단했던가? 묘사된 들판은 원래의 초록빛보다 더 푸르다. 페소아가 쓴 이 문장은, 플로렌스와 그가 결혼생활을 하며 겪은 일 가운데 가장 예리한 기억을 남겼다. 그때 플로렌스는 동료들과 거실에 있었다. 웃음소리와 컵들이 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레고리우스는 필요한 책 때문에 할 수 없이 거실로 건너갔다. 그가 막 들어섰을 때, 누군가 이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정말 엄청난 문장이지?” 플로렌스의 동료 가운데 한 남자가 예술가다운 긴 머리를 흔들며 목소리를 높였고, 소매가 없는 옷을 입은 플로렌스의 맨 팔에 손을 얹었다. 그 문장을 이해할 사람은 몇 명 되지 않겠군요. 그레고리우스가 말했다. 갑자기 거실이 침묵에 휩싸였다. “그래서 당신이 그런 선택 받은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라는 건가요?” 플로렌스가 신랄한 말투로 물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책장에서 책을 꺼냈다. “이 굉장한 책이 저한테 어떤 느낌을 주는지 아세요?” 시몽이스가 책의 가격을 계산기에 찍으며 말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몽테뉴의 <수상록>을 썼다는 느낌이지요.”

 

p112. 다시 한 번 묘비를 훑어보던 그레고리우스는 억센 담쟁이 넝쿨에 반쯤 가려진 기단의 비문을 발견했다. 독재가 하나의 현실이라면, 혁명은 하나의 의무다. 그렇다면 여기 프라두의 죽음은 정치적인 것이었을까? 독재를 종식시킨 카네이션 혁명은 1974년 봄에 일어났다.

 

p122. 그러면 무엇 때문인가. 새어버리는 시간과 죽음에 대한 생각? 원하는 게 무엇인지 갑자기 모른다는 것? 자기 소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 자기 의지가 지녔던 지극히 당연한 익숙함을 잃은 것? 그래서 이런 식으로 스스로에게 낯설어지고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

.....그레고리우스는 뭘 해야 좋을지 모를 때마다 독서를 하곤 했다.

 

p127. 담배를 입에 문 남자는 가로등에 몸을 기대고 나와 골목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는 자존심으로 가득하고 오만하기까지 한 내 몸짓과는 도무지 맞지 않는, 나에게서 스스로를 부정하는 연약함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그의 시선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내 안에 그의 시선을 만들고, 그 시선에서 나온 나의 모습을 내 안에 받아들였다. 그렇게 보이는 나는 중등학교와 대학교에 다닐 때든, 병원에서 일을 할 때든 결코 내가 아니었다.

 

평생 단 일 분도.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외모에서 스스로를 알아채지 못할까? 그들에게도 자신의 영상이 천박한 왜곡으로 가득 차 있는 무대처럼 생각될까? 그들도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서 받는 인상과 그들 스스로 경험하는 방식 사이의 엄청난 괴리를 느낄까? 그들에게도 내면의 익숙함과 외부의 익숙함이 서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동일한 사람의 익숙함이라고는 생각될 수 없을 정도일까?

 

이런 의식이 불러오는 다른 사람들과의 거리는, 스스로의 눈에 비치는 우리의 바깥 모습이 다른 사람들이 보는 모습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더욱 커진다. 사람들이 타인을 보는 방식은 집이나 나무, 벼을 볼 때와 사뭇 다르다. 이들을 특정한 형식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자기 내부의 한 부분으로 만들려는 기대를 가지고 보는 것이다.......우리의 시선은 다른 사람들에게로 향하는 도중에 이미 딴 곳으로 돌아가고, 우리를 우리라는 사람으로 만드는 특별하고 특이한 온갖 소원과 환상으로 흐려진다. 내면세계의 외부세계조차도 우리 내면세계의 한 부분이다.

 

이런 낯섬과 거리감은 해악인가? 화가가 우리를 그린다면 서로를 향해 멀리서 팔을 뻐디고 있는 모습으로, 상대방에게 도달하기 위해 헛된 몸짓을 하는 사람들로 그려야 할까? 아니면 보호벽이 되기도 하는 이중 장애물의 존재에 안심하는 모습을 표현해야 할까? 서로를 낯설게 하는 이 보호벽에, 그리고 이 생소함이 가능케 하는 자유에 감사해야 할까? 해석된 몸이 주는 이중 굴절이라는 보호벽이 없이 우리가 마주선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 사이를 분리하거나 조작하는 것이 없어 서로 보는 즉시 와락 달려든다면?

 

p131. 모든 사람이 똑같은 그를 보았지만, 프라두가 말하듯 사람들이 보는 외부세계의 한 부분은 내면세계의 한 부분이기도 하므로 모두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프라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 그대로였던 때는 자기 인생에서 단 일 분도 없다고 확신했다. 그는 자신의 외양에서 익숙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알아보지 못했고, 이런 생소함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p140. 새 안경으로 세상은 더 넓어졌고, 공간은 실제로 3차원이 되어 사물들이 마음껏 몸을 펼 수 있었다. 전혀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타호 강은 더 이상 흐릿한 갈색 평면이 아니라 그야말로 강이었고, 상 조르지 성은 하늘을 향해 세 방향으로 솟아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세상은 피곤했다. 콧잔등에 놓인 가벼운 테가 편하기는 했지만, 그에게 익숙한 무거운 걸음걸이는 가벼워진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세상은 더 가까워지고 강제적이 되었으며, 뭔가 확실치는 않았지만 그에게서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보이지 않는 이 요구가 너무 커지면 모든 것과 거리를 유지하게 하고 단어와 글 저편에 과연 외부세계가 있기나 할까라는 의심 이 의심은 즐겁고 소중했다. 이런 의심이 없는 삶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을 가능하게 했던 옛날 안경을 다시 썼다. 그러나 새로 얻은 세상도 이제 잊을 수는 없었다.

 

p149. 사람들의 만남이란 한밤중에 아무런 생각 없이 달려가는 두 기차가 서로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우리는 뿌연 창문 저편의 흐릿한 불빛 속에 앉아 있는 살마들에게, 우리 시야에서 바로 사라져서 알아볼 시간도 없는 사람들에게 빠르고 덧없는 시선을 던진다. 무에서 나와 아무런 의미나 목적 없이 텅 빈 어둠 속에서 조각처럼 빛나던 찯틀, 그 창틀에 들어 있는 유령들처럼 스쳐간 것이 정말 한 남자와 여자였던가?

 

.....스쳐 지나가는 덧없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속성과 신뢰감과 친밀한 이해심을 보이는 이 모든 것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속임수는 아닐까? 매순간 견딜 수 없으므로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이 덧없음을 은폐하고 없애려는 시도.....

 

다른 사람을 향한 눈빛이나 시선 교환은, 모든 것을 흔들고 덜컹거리게 만드는 엄청난 속도와 기압에 마비된 기차 승객들이 서로 스쳐 지나가며 던지는 지극히 짧은 시선의 만남과 같은 게 아닐까.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은 스치며 지나가는 밤의 만남처럼 언제나 서로에게서 벗어나고, 추측과 생각의 단상과 날조된 특성들만 우리에게 남겨두는 건 아닌지. 만나는 게 사실은 사람들이 아니라, 상상이 던지는 그림자들은 아닌지.

 

p154. 자기 삶과는 완전히 달랐고 자기와는 다른 논리를 지녔던 어떤 한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일까. 이게 가능할까. 자기 시간이 새어나가고 있다는 자각과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호기심은 서로 어떻게 조화를 이룰까.

 

p180. “체스를 가장 잘 두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은 타르타코버는 체스가 전투라면 라스커가, 학무이라면 카파 블랑카가, 그러나 예술이라면 알제친이 최고다라고 대답했소. ”

 

p196. 마리아 주앙이 저를 못 본 척하는 것이 왜 대단한 게 아니었나요? 제가 그 일 때문에 다른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었는데도.....아버지의 고통과 그 고통이 준 명철함이 왜 모든 일의 척도가 되어야 했나요?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제가 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럼 도대체 뭘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죠?

영원이라는 관점요? 그런 건 없습니다.”

 

p214. 신은 자신이 들 수 없는 돌덩이를 창조할 수 있을까? 만들 수 없다면 신은 전능하지 않다. 만들 수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제 들 수 없는 돌덩이가 생겼으니까.

 

p222. 영혼의 그림자. 사람들이 어떤 한 사람에 대해 하는 말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 가운데 어떤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다른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이 스스로에 대해 하는 말처럼 확실한가? 스스로의 말이라는 것이 맞기는 할까? 자기 자신에 대해 사람들은 신빙성이 있을까? 그러나 내가 고민하는 진짜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정말 고민스러운 문제는 이런 이야기에 도대체 진실과 거짓의 차이가 있기나 할까라는 것. 외모에 관한 이야기에는 물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는? 이 여행이 언젠가 끝이 나기는 할까?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드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p235. “어떤 선생이 이렇게 말하더군. ‘아마데우가 책을 읽고 나면 그 책에는 더 이상 글씨가 들어 있지 않은 것 같아요. 아마데우는 책의 의미만 삼키는 게 아니라 잉크까지 먹는다니까요.”

 

p245. 그때의 분위기는 아마데우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 그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것 이상이었어요. 우리는 그의 부재를 보았던 거요. 그의 부재는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었소. 그가 없다는 사실이 마치 사진에서 예리한 가위로 오려내어 뚜렷하게 비어버린 윤곽, 그래서 다른 것들보다 더 중요하고 더 눈길을 끄는 빈 공간처럼 다가왔소. 그래요, 아마데우는 그랬소. 예리한 부재.....

 

p263. 신의 말씀에 대한 경외와 혐오

 

난 대성당이 없는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이 세상의 범속함에 맞설 대성당의 아름다움과 고상함이 필요하니까. 반짝이는 교회의 유리창을 올려다보며 그 천상의 색에 눈이 부시고 싶다. 더러운 제복의 단조로운 색깔에 맞설 광채가 필요하니까. 교회의 혹독한 냉기로 내 몸을 감싸고 싶다. 병영의 단조로운 고함 소리와 들러리 정치인의 재기 넘치는 수다에 맞설, 명령을 내리는 듯한 그 정적이 필요하니까. 행진곡의 새된 천박함에 대항할 물 흐르는 듯한 오르간의 울림이, 흘러넘치는 그 숭고한 음색이 듣고 싶다. 난 기도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천박함과 경솔함이라는 치명적인 독에 대항하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필요하니까. 난 성서의 강력한 말씀을 읽고 싶다. 언어의 황폐함과 구호의 독재에 맞설, 그 시가 지닌 비현실적인 힘이 필요하니까. 이런 것들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내가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이 또 하나 있다. 우리 몸과 독자적인 생각에 악마의 낙인을 찍고 우리의 경험 가운데 최고의 것들을 죄로 낙인찍는 세상, 우리에게 독재자와 압제자와 자객을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세상. 마비시킬듯한 그들의 잔혹한 군화 소리가 골목에서 울려도, 그들이 고양이나 비겁한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거리로 숨어들어 번쩍이는 칼날로 등 뒤에서 희생자의 가슴까지 꿰뚫어도......설교단에서 이런 무뢰한을 용서하고 더구나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일 가운데 하나다.

 

난 신의 말씀을 경외한다. 시적인 그 힘을 사랑하므로. 난 신의 말씀을 혐오한다. 그 잔인함을 증오하므로. 이 사랑은 아주 힘든 사랑이다. 말씀의 광채와 자만하는 신이 만드는 엄청난 예속을 끝없이 구분해야 하니까. 이 증오도 아주 힘든 증오다.

 

우리는 죄를 짊어져 꼬부라지고, 품위를 잃게 하는 예속과 고해성사로 위축되어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긋고, 그의 품 안에서 더 나은 인생을 누리기 위해 수천 가지 희망을 거부한 채 무덤을 향해 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서 모든 기쁨과 자유를 빼앗은 그의 품 안에서 어떻게 인생이 더 나아진다는 말인가?

 

영원히 죽지 않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이 과연 있으랴? 누가 영원히 살고 싶어할까? 말 그대로 끝없이 많은 날과 달과 해가 앞으로 오므로, 오늘롸 이 달과 올해에 일어나는 일이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지루하고 공허한가? 정말 영원히 산다면, 의미가 있는 일이 하나라도 있을까? 우리는 시간을 계산하지 않아도 되고, 놓치는 것도 없으며, 서두를 필요도 없다.

 

현재에 아름다움과 두려움을 부여하는 것은 죽음이다. 시간은 죽음을 통해서만 살아있는 시간이 된다. 모든 것을 안다는 신이 왜 이것은 모르는가? 견딜 수 없는 단조로움을 의미하는 무한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난 대성당이 없는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유리창의 반짝임과 서늘한 고요함과 명령을 내리는 듯한 정적이, 오르간의 물결과 기도하는 사람들의 성스러운 미사가, 말씀의 신성함과 위대한 시의 숭고함이 필요하니까. 나는 이 모든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자유와 모든 잔혹함에 대항할 적대감도 필요하다. 한쪽이 없으면 다른 쪽도 무의미하다. 아무도 나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지 말기를.

 

p300. 오빠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가차 없이 솔직했던지! 자기기만과의 싸움에 그렇게 사로잡혀 있다니! ‘사람은 스스로에게 진실할 수 있어.’ 늘 이렇게 말했어요. 그건 종교적인 고백과 비슷했어요. 조르지와 자기를 묶었던 맹세이기도 했고, 결국은 그 철석같은 우정을 깬 신조이기도 했어요.

 

p322. “난 지금 내 인생이 완전해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경험을 하지 못했다고 후회하는 게 아니야. 현재 완성되지 못한 자기 인생에 대한 의식 자체가 불행이라면 누구나 평생 필연적으로 불행할 수밖에 없지. 반대로 완전하지 못하다는 자각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인생을 위한 조건이야. 그러나 불행을 만드는 요소는 분명히 이와는 다른 그 무엇이지. 그건 바로, 완성되고 완전한 경험을 하는 건 앞으로도 불가능하다는 인식이야. ”

 

p325. “공포는 새로운 인식 때문이 아니야. 무엇에 대한 인식인지가 문제야. 미래의 것이긴 하지만 현재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내 인생의 불완전함, 지금 이미 결핍이라고 느끼는 이 불완전함이지. 이 결핍이 너무 커서 늘 알고 있었던 사실이 내 안에서 공포로 변해.”

 

삶이 완전하지 못할 거라고 미리 생각만 해도 이마에 땀이 솟는다. 완전한 삶, 그건 과연 뭘까? 단편적이고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변하기 쉬운 우리 인생을 생각해볼 때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완전한 삶을 구성하는 건 과연 무엇인가?

 

지금 내 삶이 이미 상에 상응하도록 생각을 바꾸면 죽음에 대한 공포도 사라지지 않을까. 그래도 여전히 공포가 남아 있다면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스스로 상을 만들긴 했지만, 그 상이 변덕스러운 기분에서 나왔다거나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뿌리를 내리고 나를 나로 만드는 감각과 사유의 놀이에서 자라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p340.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p341. ‘상상력은 우리의 마지막 성소다.’ 아마데우가 늘 하던 말이오.

 

p347. 그는 신의란 감정이 아니고 의지요 결정이며, 영혼의 견해표명이라고 말했소. 우연한 만남과 감정을 필연으로 바꾸는 그 무엇이라고, 영혼의 숨결이라고 했지. ‘그저 낮은 숨결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영혼의 한 부분이지라며.

 

p356. 실망이라는 향유. 실망은 불행이라고 간주되지만, 이는 분별없는 선입견일 뿐이다. 실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원했는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으랴? 또한 이런 발견 없이 자기 인식의 근본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자신에 대해 정말 알고 싶은 사람은, 쉬지 말고 광신적으로 실망을 수집해야 한다. 실망스러운 경험의 수집이란 그에게 중독과도 같을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중독. 그에게는 실망이 뜨겁게 파괴하는 독이 아니라 서늘하게 긴장을 풀어주는 향유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의 진정한 윤곽이 무엇인지 눈을 뜨게 해주는 향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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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요리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스탠리 엘린 지음, 김민수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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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인 <특별요리>를 포함한 스탠리 엘린의 10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단편들 마다 언뜻언뜻 다른 영화나 소설들이 떠오르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손발의 몫>은 카프카를, <성탄 전야의 죽음>은 애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연상시킨다. <최상의 것>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재능있는 리플리 씨>, <배반자들>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 <하우스 파티>는 영화 <버드맨>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나 <버드맨><하우스 파티>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차용한 게 아닐까.

 

20세기 단편 추리 소설의 거장으로 불리우는 스탠리 엘린은 흔히 로알드 달과 비교되었다고 해서 의아했다. (로알드 달도 미스테리 작품으로 에드가 상을 수상했는지 몰랐다.) 로알드 달에 비견될만한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 <애플비 씨의 질서정연한 세계>가 아닐까. 10편의 단편 중 가장 재밌게 읽었다. 배꼽을 잡고 방바닥을 굴렀다고 말하면 과장이겠지만 허리가 온전한 상태였더라면 굴렀을지도. 이 단편을 읽으면서 애플비씨와 조니 뎁의 얼굴이 자꾸만 겹쳤는데, 이 작품을 영화화한다면 나라면 단연코 조니 뎁을 캐스팅했을 것이다.

 

애플비씨는 골동품 가게 주인이다. 그는 법의학 서적을 통해 자신이 찾던 사례를 발견한다. 사례의 부인은 조잡한 소형 깔개 위에 넘어져 사망했고 사고사로 추정되었다. 변호사는 남편에게 살인죄를 물었고 검시를 통해 혐의를 증명하려던 차 남편이 심장마비로 사망해 사건은 종결된다.

 

애플비는 이 사례를 이용해 여섯 명의 아내를 갈아치운다. 또 다시 빚에 쪼들린 애플비는 보자마자 혐오감이 들었으나은행 잔고가 여섯 자리 수인 마사 스터지스에게 구애한다.

 

애플비씨는 결혼 일주일도 안 돼 마사에게 깔개를 쓰기로 작정한다. 물을 청한 뒤 깔개 위로 오면 한 어깨에 한 손을 얹고 다른 한손을 들어..... 애플비 부인이 말한다.

다른 사람들 한테도 이랬어요?”

 

애플비 부인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어머니를 똑같은 방식으로 죽였다고. 아버지는 체포되지 않았고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렇다. 애플비씨가 법의학 서적에서 읽은 바로 그 사례였던 것!!

 

애플비 부인은 9시 이전에 그녀의 변호사에게 전화로 매일매일 보고하기로 돼 있었다. 만일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그녀의 변호사는 즉각 조치를 취할 것이다. 애플비씨가 변호사에게 온 전화를 애플비 부인에게 건네려 하는 순간, 애플비 부인은 물잔을 내려놓기 몸을 틀었는데......깔개가 살짝 미끄러지고.....

 

, 정말 웃겨 죽겠다. 스탠리 엘린은 미스터리 소설보단 유머 소설을

썼더라면 더 유명해지지 않았을까. 그는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메모한 문장들.

 

 

 

p127. 아내들을 구별하는 유일한 기준은 은행 계좌 총액의 자릿수였다. 처음 두 명의 부인은 네 자릿수짜리. 세 번째 부인은 세 자릿수(깜짝 놀랐다. 실로 불쾌했다)’ 짜리였다.마지막 세 명은 다섯 자릿수짜리였다. 여섯 부인의 유산을 합친다면 누구의 기준으로도 상당한 액수였지만 만족을 모르는 애플비의 골동품과 진귀품이 유산이 들어오는 족족 바로 낚아채갔기 때문에(마치 허기진 도마뱀이 파리를 낚아채듯) 애플비 씨는 여섯 번째 부인을 묻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때보다도 심각한 경제적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상황이 너무나 절망적이라 여느 때라면 다섯자릿수짜리를 꿈꾸었을 애플비 씨가 네 자릿수짜리로 타협할 생각까지 했다. 이 순간 마사 스터지스가 등장했으니 삶이 실로 기가 막히다 할 것이다. 십오 분의 대화 끝에 그는 네 자릿수와 다섯 자릿수를 머릿속에서 말끔히 지워버렸다.

마사 스터지스는 여섯 자릿수짜리였던 것이다.

 

p140. 특히 견디기 힘들었던 또 다른 어느 날 마사 스터지스가 말했다. “어디선가 들은 건데요, 흡족한 결혼은 여자의 수명을 연장해준대요. 결혼이 긍정적인 것이라는 훌륭한 증거예요. 그렇죠?” “물론입니다.” 애플비씨가 말했다.

 

한 달의 평가 기간 동안 그는 다양한 억양을 곁들인 물론입니다.”라는 한 가지 문장에 철저히 의존하며 대화를 했는데 그 전술은 맞아떨어졌다. 마의 한 달이 저물었을 때 그는 공식처럼 읊던 표현을 게인즈버러와 게인즈버러, 골딩이 유일한 하객으로 참석한 결혼식에서 결혼 선서로 바꿔 읊을 수 있었다.

 

체스의 고수

p167. 수를 둘 때마다 보드 자체를 돌리는 건 어떨까? 아니 어차피 체스는 철저하게 정신적인 게임이니 충분히 단련한다면 실제로 보드를 돌릴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조지는 점점 흥분에 휩싸였다. 상대의 차례가 되면 그저 상대방이 되어버리는 것’, 이것이 비결일지도 몰랐다. 이제는 백의 자례. 조지는 당면한 과제에 착수했다. 그는 백의 편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기에 백이 해야 할 것을 해야했다. 그뿐 아니라 백이 느끼는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집중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목표는 더욱 멀어져갔다. 그가 손을 뻗으려는 그 순간, 거듭 또 거듭 흑이 의도한 수의 생각이, 흑이 둘 것이 분명한 수의 생각이 머릿속으로 수은 방출처럼 떼구르르 굴러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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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 열화당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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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도 글이지만 삶이 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다. 미술평론으로 시작해 소설가이기도 하지만 내게 존 버거는 혁명가로 다가온다.

 

이 글은 1984년에 씌여진 버거의 에세이다. 영국 출생이지만 버거는 중년 이후 알프스 시골 마을에서 글쓰기와 농사일을 병행하고 있다고 한다.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들이 시간과 공간으로 엮였다. 시간과 공간을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문학, 예술, 정치, 기타등등 - 버거의 사유들을 음미해볼 수 있다. 마치 갤러리에서 그림을 둘러보는 관람객이 된 듯한 기분이다. 이곳은 버거의 방.

 

그림과 시에 대한 감상을 담은 글이 단연 눈에 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는 고호와 카라바조다.

버거 역시. 그의 책은 평생 읽어야 한다. 마치 집처럼 돌아가야 할 곳.

 

p 19.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옛 유럽의 모든 세력들이 이 유령을 몰아내기 위해 성스러운 동맹 관계에 들어갔다.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의 과격파와 독일 경찰의 첩자들 모두가.”라고 마르크스가 1872년 썼을 때, 그는 이중의 선언을 한 셈이 된다. 오늘도 그렇듯이 부자들이 혁명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 그 하나이다. 다음으로 그는 새로운 경향성에 대해 말한다. 모든 현대적 사회는 스스로의 덧없음을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p25. 19809월 쿠데타 이후, 이들 다섯이 속해 있는 좌파 노동조합연합인 DISK는 다른 여러 정당과 함께 불법 단체로 규정되었다. 적어도 오만 명이 체포되었다. 검찰은 수백 명에게 사형을 구형했는데, 특히 전투적인 노동조합원들에 대해 그랬다. 더 많은 이름들을 불게 하고 관련자들을 색출하기 위한 고문과 인간 사냥이 조직적으로 자행되고 있다....... 수 천의 사람들이 소식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 지금까지 최소 팔십 명이 고문으로 죽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이 다섯 사람 가운데 적어도 한 사람은 아마 이 시간 고문당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P29. 시의 한때.

 

시는, 비록 해설적인 경우에라도 소설과는 다르다. 소설은 승리와 패배로 끝나는 모든 종류의 싸움에 대한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모든 것이 결과가 분명히 드러나게 되는 끝을 향해 진행해간다. 시는 그런 승리와 패배에는 관심이 없다. 시는 부상당한 이를 돌보면서, 또 승자의 환희와 두려움에 떠는 패자의 낮은 독백에 귀를 기울이면서, 싸움터를 가로질러 간다. 시는 일종의 평화를 가져다준다. 값싼 안심이나 마취에 의해서가 아닌, 일단 한번 경험된 것은 어떤 것이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질 수 없다는 약속과 인식에 따른 평화이다.

 

시는 소설보다는 기도 쪽에 더 가깝다. 하지만 시에는 그 언어 이면에, 기구의 대상이 되는 어떤 존재도 없다. 언어 그 자체가 듣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종교적 시인에게 말은 신의 첫째 속성이었다. 모든 시에서, 낱말들은 소통의 수단이기 이전에 하나의 현존이다.

 

P31. 암스테르담에서의 한 때.

 

렘브란트만큼 나이가 들어가는 과정을 그려내는 데 달인이었던 화가가 없었고, 렘브란트만큼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을 친근하게 그려 우리에게 남겨 준 사람도 없다. 여러 가지 추측을 담고 있는 기록들이 있지만, 헨드리키에와의 사랑은, 화가가 죽기 육년 전 헨드리키에가 죽을 때까지, 이십 년 간 이어졌다는 것이 그림들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루브르 박물관의 <밧세바>와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목욕하는 여인> 앞에서 나는 말을 잃는다. 그림들이 보여주는 천재성 때문이 아니다. 그 그림들이 연유되는 그리고 그림들이 표현하고자 한 삶의 경험들 세상의 역사만큼 끈질기게 스스로 드러나는 욕망, 세상의 끝 같은 미묘함, 낯익은 몸에 대한 사랑을 마치 처음처럼 끝없이 재발견해 가는 눈 이 모든 것들은 말 이전에 다가와 말의 영역 너머로 옮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그림들도 그토록 능숙하게 또 강력하게 침묵을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베개에서 일어나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그녀는 손등으로 커튼을 들어올리고 있다. 손바닥과 얼굴은 이제 사랑할 준비가 다 되어 있다는 제스처를 보이면서 사랑의 행위를 환영하고 있다. 그녀는 아직 잠들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다가오는 남자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 그녀의 얼굴에서 둘은 하나로 합쳐져 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침대 속 그녀의 이미지와, 그녀 얼굴 속에 나타나 있는 침대로 다가오는 그의 이미지. 이제 이 두 이미지를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밤인 것이다.

 

P35. 그림의 한때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는 때는 언제인가? 그것은 그림이 이미 있는 어떤 사물에 꼭 들어맞을 때가 아니다. 화가가 그리 되어야 한다고 느끼고 의도한 대로 그림이 보이는, 예측했던 이상적 순간이 이루어지는 때를 말한다. 하나의 그림을 그리는 길고 짧은 과정은 그런 순간을 구성해가는 과정이다. 물론 그림이 보이는 순간에 대한 완벽한 예측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그 순간을 회화로 완벽히 성취하는 것 역시 가능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회화는 본질상 그 순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음악을 작곡할 경우, 시간을 사용하기 때문에 시작과 끝을 가질 수밖에 없다. 회화는 물리적 대상으로 볼 경우에 한해 그 시작과 끝이 있다. 이미지의 차원에서는 시작과 끝도 없다.

 

회화이미지의 부동성이 영원성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과거, 현재, 미래는 영원성이라는 공통의 토대 위에 존재한다. 이 사실이 중요하다.

 

회화가 정적이기 때문에, 회화 예술의 언어는 이런 영원성의 언어이다. 그러나, 그 언어는 기하학과 달라서 심미적이고 개별적이며 덧없는 것에 대해 얘기한다.

 

p40. 렌즈를 통해 본 한때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하나의 렌즈를 통해 보듯, 모든 것을 본다. 이 렌즈야말로 소설 작법의 비밀이다. 렌즈는 덧없음과 영원 사이에서 매소설마다 새롭게 연마된다.

우리 작가들이 죽음의 서기들인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짧은 삶 속에서 이 렌즈들을 연마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P47 지나간 어느 한때

 

전후의 이어짐과 상관없이 어느 한 시기에 일어난 역사적 내용만을 담아내는 것이 시간이라고, 단테는 생각했다. 역사의 목적은, 이와는 반대로 모든 이가 시간의 의미를 탐구하고 정복하는 데 있어 형제요 동료가 되도록, 시간을 한데 아우르는 것이다. ” -오시프 만델슈탐.

 

P51. 엔트로피의 개념은 죽음의 신의 모습을 과학적 원리로 풀어낸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삶의 한 상태로 생각되어 왔던 것과는 달리, 엔트로피는 지금 살아 있는 것들뿐 아니라 생명 그 자체를 소진시키고 절멸시킨다고 주장되고 있다. 에딩턴이 말한대로 엔트로피는 시간의 화살이다.

시간을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힘으로 인식하는 근대적 변환은 헤겔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헤겔은 역사의 힘에 대해 낙관적이었다......그 뒤, 마르크스는 이 역사의 힘이 인간의 행동과 선택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P72. 원래 집이란 말은 세상의 중심을 의미했다. 지리적이 아닌 존재론적 의미에서 그랬다.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집이 어떻게 세상의 기초가 되는가를 보여주었다. 그는 집이 실재의 중심에 세워져 있다고 말했다. 전통 사회에서는 세상의 의미있는 모든 것들은 다 실재였고, 그 세상의 밖에는 위협적인 혼돈이 존재했다. 그것들이 위협적이었던 이유는 비실재적이기 때문이다.

 

집이 세상의 중심인 까닭은 그곳에서 수직과 수평의 선이 교차하기 때문이다. 수지교선은 위로는 하늘로 아래로는 땅으로 향하는 하나의 길이다. 수평선은 다른 곳을 향해 가로질러 가는 땅 위의 모든 길을 말한다. 따라서 집은 하늘의 신과 또 땅 속의 죽은 이들과 가장 가까운 장소이다......또한 집은 지상에서의 모든 여행이 시작되는 곳임과 동시에 희망을 가지고 되돌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두 선의 교차, 그리고 그 교차가 약속하는 확신은 유목민의 생각과 믿음 속에 아마도 이미 자리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천막 기둥을 가지고 다닌 것처럼, 수직선을 지니고 다녔다.

 

이주는 무언가를 뒤에 두고 떠나는 것, 바다를 건너는 것, 낯선 사람들 가운데 사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의 의미 자체를 해체하고, 최악의 경우 어리석은 허구에 자신을 방기하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이주는 총구에 의해 강제되지 않은 경우엔, 절망뿐 아니라 희망에 의해서도 촉발된다.

 

그러나 이주는 항상 세상의 중심을 뒤엎는다. 또한 인간들을 방향 잃고 상실된 파편들로 바꾸어 놓는다.

 

 

P92. 동물에게 자연환경과 서식지는 그저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경험주의자들의 믿음과 달리, 인간에게는 그에게 필요한 실재가 그저 주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추구되어야만 한다. 나느 그런 인간의 실재에 대해 구원받는다라는 말을 쓰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실재는 늘 저 너머에 놓여있다. 이런 사실은 유심론자들에게처럼 유물론자들에게도 맞는 말이다. 플라톤과 마르크스 둘 다에게 말이다. 실재는 어떻게 해석하든 간에 진부한 상투성의 장막 저편에 가려져 있다. 모든 문화는 스스로의 수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스스로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그런 장막을 만든다. 실재는 권력을 지닌 자들에게 적대적이다.

 

P93. 그러나 많은 예술가들은 정작 장막 너머 그들이 발견한 것들을 스스로의 재능과 예술가로서의 사회적 지위에 유리하도록 왜곡시켜왔다. 그들은 예술은 위한 예술의 갖은 이론들을 동원하여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그들은 말한다. 예술이 실재라고. 그들은 실재로부터 예술적 소득을 짜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다. 반 고흐야말로 이런 부류들에게서 가장 멀리 있었던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편지를 통해 그가 상투성의 장막을 얼마나 명확히 의식하고 있었던지를 알 수 있다. 그의 전 생애는 실재에 대한 끝없는 갈망이었다. 색깔, 지중해의 기후, 태양 들은 그에게 실재에 이르게 하는 도구들이었다. 그것들은 그것 자체로서 동경의 대상이 되어 본 적이 없었다. 이런 갈망은, 그가 어떤 실재도 전혀 찾지 못했다고 느꼈을 때 겪게 되는 위기감에 의해 더욱 깊어지기도 한다.

 

 

의자, 침대, 구두 한 쌍. 그것들을 그린 그의 행위는 목수나 구두공이 그 물건들을 만드는 행위에 다른 어떤 화가들보다 더 가까이 가 있다. 그는 제품의 부품들 다리, 가로목, 등받이, 앉음판 또는 구두창, 앞가죽, 구두혀, -을 모아, 마치 실제로 물건을 만들 듯이 그것들을 결합시켰는데, 결합이야말로 그 물건들의 실재를 드러내는 듯 했다.

 

그는 미친 듯이 강박적으로 그렸다. 다른 어느 화가도 그와 비견될 만큼 강박적이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의 강박증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작품에서의 두 동작 캔버스에 나타난 그리는 동작과 그 동작이 그려내고 있는 실재-을 보다 가깝게 근접시키는 것이었다. 이 강박증은 예술에 대한 생각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라 어떤 강렬하고 압도적인 공감으로부터 연유된 것이다.

나는 황소, 독수리, 이런 것들을 존경한다. 그리고 내 야망을 무색케 할 만큼 강렬한 열망을 가진 사람을 존경한다.”

더욱 강박적으로 가까이 다가가고 또 다가갔다. 극단적인 경우, 그는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밤하늘의 별은 빛의 소용돌이가 되었고, 사이프러스 나무는 바람과 햇빛의 에너지에 반응하는 살아 있는 신경덩어리가 되었다.

 

P99. 이별은 작은 죽음이다. (Partir est mourir un peu).....그것은 내가 이미 깨닫고 있던 진실을 표현하고 있었다. 생각하건대, 이 세상이 마치 내가 결코 얼굴을 맞대고 당신을 만날 수 없는, 하나의 형체 없는 마을처럼 여겨지는 경험, 그런 당신 안에서 살아가는 경험- 이 경험은 죽은 자의 기억과 함께 살아가는 경험과 약간 비슷한데 때문에 나는 지금 이 문구를 기억한다. 아주 어렸을 때 내가 몰랐던 것은, 그 어떤 과거를 완전히 앗아가지는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p100. 언젠가 침대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가 누구냐고 당신은 물었다. 나는 정직한 답을 하기 위해 내가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화가들을 떠올리며 길게 머뭇거린 후, 카라바조라고 대답했다. 내 스스로 내 대답에 놀랐다. 더 고상한 화가들도 많았고 더 폭넓은 안목의 화가도 많았다. 내가 더 존경하는 화가도, 더 존경받을 만한 화가도 많았다.....내가 더 가깝게 느낀 화가는 그 말고는 없었다.

 

그의 어둠에서는 초와 농익은 멜론의 냄새, 다음날 내어 널리기를 기다리는 축축한 빨랫감들의 냄새가 난다. 그것은 층계참과 구석진 노름판의 어둠, 싸구려 여인숙의 어둠과 황급한 마주침이 있는 어둠 등이었다. 그리고 희망은 그 어둠을 사르는 불꽃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어둠 자체에 있다. 명함 대조법이라는 기법 자체가 폭력과 수난, 동경과 죽음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그림에 제시되어 있는 피난처가 상대적이긴 하다.

 

 

<마태의 부름>에서는 일상적인 테이블에 둘러앉아 수군거리면서 장차 해야 할 일에 대해 자랑하고 돈을 헤아려 보고 있는 다섯 남자가 그려져 있다. 방은 희미한 불빛으로 밝혀져 있다.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린다. 문으로 들어온 두 사람과 함께 거친 소음과 밝은 빛이 화면 속으로 침입하고 있다. 마태의 동료 두 사람은 침입자들을 쳐다보기를 거부하고, 다른 두 젊은 사람은 낯선 그들을 호기심과 겸양을 섞어 대한다. 왜 그토록 무모한 제의를 하는 것일까. 저 깡마른 두 사람은 누구를 믿고 모든 얘기를 혼자 다 하고 있는 것일까. 떳떳지 못한 양심 때문에 함께 있는 동료들보다 더욱 이성을 잃는 마태는 스스로를 가리키며 묻는다. 정말 내가 가야 한단 말인가 하고. 진정으로 당신을 따라가야 할 사람이 나인가 하고. 얼마나 많은 떠남에의 선택이 여기서의 그리스도의 손과 닮아 있는가! 그 손은 결단해야만 하는 사람을 향해 함께 떠나기를 제안하지만 너무 부드럽고 불확실한 손이라 붙잡기가 힘들다. 가야 할 방향을 명령하지만 직접적으로 도와주지 않는다. 마태는 일어난다. 그는 낯설고 야윈 이를 따라 방을 나오고 좁은 길을 내려와 그 지역을 벗어날 것이다. 그는 그의 복음서를 쓸 것이고 에티오피아와 카스피 바다 남쪽과 페르시아를 돌아다닐 것이다. 그리하여 아마도 살해될 것이다.

 

맨 위층 다락방에서 있었던 이 결단의 드라마에는 바깥 세상으로 이어지는 창문이 하나 보인다. 전통적으로로 회화에서 창문은 빛의 공급원으로, 또 자연이나 바깥일들을 본보기로 보여주는 하나의 틀로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이 창문은 그렇지 않다. 창문은 불투명하여 들어오는 빛도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밖을 보지 못한다. 바깥은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최악의 소식들만이 창을 통해 전해진다.

 

p106 그의 인물들은 주어진 제재 속에서 모호한 성적 몸짓을 드러낸다. 여섯 살 먹은 아이가 마돈나의 몸을 만진다. 마돈나의 그의 셔츠 아래로 손을 넣어 보이지 않게 허벅지를 어루만진다. 한 천사는 마치 창녀가 늙은 손님을 대하듯이 성 마태의 손등을 두드리고 있다. 어린 세례 요한은 양의 앞발을 자신의 다리 사이에서 마치 성기처럼 쥐고 있다. 카라바조 그림의 거의 모든 붓질에는 성적인 부하가 걸려 있다. 아주 다른 두 물질 (모피와 피부, 옷과 머리칼, 금속과 피)이 서로 접촉하더라도 그 접촉은 만지는 행위로 변해 버린다. ......나는 그리스의 빼어난 시인 카파비를 떠올린다.

 

한 달여간 우린 서로 사랑했네.

그런 후 그는 떠났다네. 아마도 스미르나로,

일자리를 찾아. 우리는 다신 만날 수 없었네.

 

살아 있다 해도, 이제 그 회색 눈동자에는 아름다움 지워지고,

그 빛나던 얼굴 또한 많이 상해 있겠지.

 

, 기억이여, 그것들이 있던 그대로 보존해 주렴.

기억이여, 그대가 나의 이 사랑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지나간 것들을 오늘 밤 내게 되돌려 주는 것이라네. 그것들이 그 어떤 것이든.

 

 

 

 

p107. 오직 카라바조의 그림에만 있는 특이한 얼굴 표정이 있다.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에서의 유디트의 얼굴, <도마뱀에 물린 소년>에서의 소년의 얼굴, 물 속을 바라보고 있는 나르시스의 얼굴, 골리앗의 머리채를 쥐고 있는 다윗의 얼굴 등에서 나타나는 표정이다. 그것은 전심을 기울이는 데 따르는 폐쇄성과 개방성, 취약성과 힘, 동정과 결단력의 표정이다. 그러나 이 단어들에는 너무 윤리적인 냄새가 난다. 나는 짝짓기 전과 죽음을 당하기 직전의 동물의 얼굴에서 이와 유사한 표정을 보아왔다.

 

욕망의 대상 안에서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것. 카라바조는 사람의 몸을 그리면서 어떻게 그것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욕망의 대상이 되는 육체는 낮의 어둠이진 밤의 어둠인지가 중요치 않은, 이 행성에서의 삶 그것 자체가 어둠 속에 드러나 있다. 마치 유령처럼 타오르는 이 욕망의 대상은 어떤 도발적인 몸짓에서가 아니라, 숨김없는 직관 그 자체에 의해 표피 저편에 숨어 있는 우주를 약속하면서 그곳을 향해 떠날 것을 유혹한다. 그 얼굴에서는 단순한 제안보다 훨씬 더 나아간 표정이 드러나 있다. 그것은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세상의 잔혹성을 받아들이며, 하나의 선물로서의 함께하는 잠자리를 받아들인다. 여기서. 지금.

 

p120 모든 제대로 된 시는 시의 노동에 공헌한다. 그리고 간단없는 이 노동의 임무는 삶이 나누어 놓은 것, 폭력이 찢어 놓은 것을 다시 이어주는 것이다......시는 상실을 회복시킬 수는 없지만 인간을 분리하는 공간에 대해 반항한다. 시는 흩어진 것을 다시 모으는 지속적인 노동을 통해 이런 일을 행한다. 삼천오백년 전 한 이집트 시인은 이렇게 썼다.

 

, 내 사랑,

당신의 눈앞에서

연못으로 내려가

멱을 감는 것은

얼마나 달콤한지요.

물에 젖은 나의 무명옷이

내 아름다운 몸에 감긴 것을

당신에게 보여주는 것은

얼마나 달콤한지요.

오세요, 나를 보세요.

 

p121. 시는 이러한 은유의 방법 외에도 시가 이를 수 있는 넓고 높은 경지를 통해 나뉜 것들을 다시 모은다. 시는 감정이 미치는 범위와 우주의 범위를 동등하게 다룬다. 일정한 극한의 경지에 이르면, 그것이 어떤 종류인가는 문제가 되지 않고, 다만 그 경지의 정도만이 중요하다. 그런 경지에 의해서 여러 다른 극점들은 서로 하나가 된다. 안나 아흐마토마는 이렇게 쓴다.

 

당신과 꼭 마찬가지로 나는

영원한 검은 이별을 견딥니다.

왜 울고 있나요? 차라리 당신 손을 주세요.

꿈속에 다시 오마고 약속하세요.

당신과 나는 슬픔의 산맥이어요.

이승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어요.

밤의 한가운데,

별들을 통해 내게 인사를 보내 주세요.

 

p122, 시는 언어로 하여금 배려하게 한다. 모든 것을 친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시가 행하는 노동의 결과로 이 친밀함은 태어난다. 모든 행위와 단어와 사건을, 그리고 시가 나타내는 관점을 가깝게 한데 모은 결과인 것이다. 이런 배려보다 더 본질적으로 세계의 잔혹함과 무관심에 맞서는 것은 없다.

 

어디로부터 고통은 우리에게 왔는가?

어디로부터 그것은 왔는가?

고통은, 까마득한 먼 옛날로부터

통찰의 형제였고,

시의 길잡이였다.

 

시인 나지크 알 말라이카는 이렇게 쓰고 있다.

사건들 속에 침묵을 깬다는 것, 아무리 가혹한 경험이라 해도 그것을 말로 옮기고 단어들로 바꾼다는 것은, 그 단어들이 이윽고 들릴 때 그 원래의 사건들이 심판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발견하는 행위다. 이 희망은 기도의 근원이 되고, 기도는 노동과 함께 말 그 자체의 근원에 자리한다. 언어의 모든 쓰임새 중에서 이 근원에 대한 기억을 가장 순수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이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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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매화
미치오 슈스케 지음, 한성례 옮김 / 씨엘북스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달과 게>, <랫맨>에 이어 세 번째로 접한 미치오 슈스케.

그의 소설은 한마디로 뜨뜻미지근하다. 내치자니 미안하고 좋다고 하기엔 미흡한?

단편 소설집인 <광매화>엔 총 6편의 연작 단편이 실려 있다. 앞부분 3장까지 숨바꼭질, 벌레쫒기, 겨울나비는 어둡지만 재밌다. 뒷부분 봄나비, 풍매화, 아득한 빛은 밝지만 재미없다.

6편의 작품 중 <숨바꼭질>이 가장 인상에 남는다.

 

<숨바꼭질>

 

의 아버지는 30년 전 자살했다. 나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모시며 도장 파는 일로 생계를 유지한다. 어느날 어머니는 연두색 색연필로 조릿대꽃을 그린다. 조릿대꽃은 30년 만에 한 번 꽃을 피운다. 나는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조릿대꽃을 보았다. 나는 초등학교때 부터 아버지의 별장에서 지내는 생활을 좋아했고 중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 목공예 가게를 운영하는 30대의 여자를 만나 관계를 갖는다. 고등학생이 된 나는 별장에서 또 다시 그녀를 만나지만 그녀는 왠지 무뚝뚝하게 나를 대한다. 나는 그녀의 목공예 가게를 찾아간다. 그러다가 그녀와 함께 있는 남자를 보게 된다. 아버지였다. 나는 그녀와 아버지의 정사장면을 훔쳐본다.

 

다음날 그녀의 시체가 발견되고 아버지는 자살한다.

엄마는 조릿대꽃 옆에 한 남자와 한 여자를 그린다. 엄마가 어떻게 알았을까?

그러나, 엄마는 칠월칠석날의 견우와 직녀를 그렸던 것.

 

<광매화>라고 해서 미칠 자 일거라 짐작했건만 빛날 자 였다. ‘빛으로 꽃가루를 운반하는 꽃’ .그러니까 작가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빛이 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겠지?

 

메모한 문장들.

 

조릿대의 개화는 30년에 한 번으로 매우 드물고 꽃은 무리지어 일제히 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조릿대 열매를 먹은 야생 쥐가 이상 번식을 하기도 해서 옛날에는 조릿대꽃을 불길하게 여기기도 했다고. 개화 요인은 조릿대의 영양 상태에 기인한다는 설도 있고 유전자 조합에 의한다는 설도 있지만 아직 정확한 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조릿대는 꽃을 피운 뒤에 어떻게 될까? 마침내 어느 책에서 해답을 찾았다.

꽃을 피우고 나면 조릿대는 전부 시들어버린다.

 

p210.

풍매화니까 화려하지 않아도 돼.”

풍매화요?”

풍매라는 한자를 풀면 바람 풍에다가 중매할 때의 매를 쓰거든. 바람으로 꽃가루를 운반하는 꽃이야. 풍매화는 화려한 외관을 가질 필요가 없어. 왜냐하면 일부러 자신을 꾸며서 곤충을 불러 모으지 않아도 되니까. 바람이 회려한 색깔이나 눈에 띄는 모습에 이끌려서 불지는 않잖니.”

 

p301 사실 그 빛은 사라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니까. 변한 것은 아마도 나 자신이리라. 변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다. 누구도 자동차 보닛 위에 알을 낳은 고추잠자리를 비웃지 못한다. 추억으로만 남은 빛 위에서 갈팡질팡 흔들릴 뿐이다. 사람은 현실이 더욱 밝게 빛난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

 

p303 때로는 눈부시게 빛나고 때로는 그늘을 드리우기도 하는 이 세상을 나도 나비처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싶다. 모든 것이 한곳으로 흘러 모이면서도 언제나 새로운 이 세상을. 어떤 풍경이 보일까? 우는 사람. 웃는 사람. 입술을 깨무는 사람. 큰 소리로 외치는 사람. 누군가의 손을 꼭 잡는다. 무언가를 품에 소중히 안는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땅을 내려다본다.

갑자기 눈물이 솟구쳤다. 울지 말자. 울 이유가 없다. 당황해서 눈을 감으려던 그때였다.

시야 가득히 가로등 불빛이 번졌다. 하얗고 눈부시게.

그 빛이 정겨워서 나는 눈을 감는 것마저 잊어버렸다.

솟구쳐 오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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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당신이 다른 곳에 존재한다면
티에리 코엔 지음, 임호경 옮김 / 밝은세상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노암은 어릴 적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는다. 엄마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한 노암은 좀처럼 사고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로랑스 박사는 약 십년 동안의 정신 상담을 통해 노암을 치료했음을 자신한다.

 

노암은 문학세미나에서 쥘리아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2개월의 만남 이후 쥘리아는 뉴욕의 아버지 곁으로 떠나면서 노암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다시 볼 수 없냐는 노암의 투정에 쥘리아는 대답한다.

 

노암, 난 삶을 믿어, 삶은 신묘한 것이거든.”

 

그러나, 쥘리아와의 헤어짐 이후 노암의 삶은 망가져가기만 한다. 불안발작, 애정없는 하룻밤의 만남. 그는 회사동료인 사미와 누나 엘리자 조카인 안나가 관계의 전부다. 어느날 안나가 노암에게 말한다.

 

너는 다섯 사람과 함께 같은 날 심장으로 죽을 것이다.”

 

노암은 안나에게 뭐라 말했는지 재차 추궁하지만 안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잘못들은 걸까? 노암은 자신이 존경하던 로랑스 박사를 수십 년 만에 다시 찾아간다. 이미 은퇴한 로랑스 박사는 노암에게 리네트 마르퀴스 박사를 소개해준다. 리네트는 정통적인 의미의 심리학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심리학 뿐만 아니라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신비주의 이론도 받아들이는 심리 치료사다.

 

노암은 리네트의 주선으로 예언자 아이인 예루살렘의 사라를 찾아간다. 사라는 노암이 죽는 날을 가르쳐 줄 순 없다고 말한다. ‘촉진소통법을 통해 사라는 노암과 같은 날 사망할 다섯 사람의 이름을 말해 주기로 약속한다.

 

노암은 사라가 알려주는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그들과 자신의 공통점을 찾기 위해. (같은 날 죽는다고 해서 공통점이 있어야 할까?)

 

첫 번째 인물은 텔아비브의 아담 와인스타인(부모로부터 사랑받는 아이) 두번째 인물은 로마의 필리포 루차토(의미로 충만한 삶을 제시하는 철학자), 세 번째 인물은 부다페스트의 크리스티안 너지(사랑으로 가득한 삶), 네 번째 인물은 암스테르담의 쥘리아(유일한 사랑) 그렇다. 노암의 유일한 사랑이었던 쥘리아. 두 사람은 또 다시 사랑에 빠진다.

 

리네르 박사는 연락 두절. 노암은 로랑스 박사를 찾아가고 이 모든 게 계획적인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사라의 메일은 계속된다. 마지막 인물은 리네르 마르퀴스.

 

노암은 리네르를 만나 그동안 숨겨져 왔던 마지막 진실과 대면하게 된다.

 

티에리 코엔의 네 번째 소설이라고 하는데 아직 문장이나 이야기를 엮어가는 힘이 다른 작가들에 비하면 허술해 보인다. (껄끄러운 번역과 오자도 한몫 한듯하다.) 파울로 코엘료를 따라 하려 한 것 같은데 자아를 찾기 위해 굳이 전 세계를 여행할 필요가 있었나 싶기도 하고.(자아찾기 007?) 기욤 뮈소처럼 뻔뻔하게 환타지로 쭉 밀고 나갔더라면 어땠을까?

 

 

메모한 문장들

 

p52.

이럴때면 의식은 항상 세 개의 질문을 던져왔다.

노암, 넌 누구야?’

넌 어떻게 살아왔어?’

넌 누구에게 쓸모가 있지?’

 

p189. “당신을 충분히 이해해. 그때 당신은 세계에서 가장 마법적인 분위기의 도시에 있었으니까. 혹시 알아? 예루살렘을 방문한 관광객 중 매년 수십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성을 잃고 크파르 사울 정신병원으로 실려 간다는 사실을? 평소 완전히 정상적이던 사람들은 그들이 살던 환경과 전혀 다른 환경에 처한데다 역사와 신화가 가득한 도시 한 가운데 있게 되어 기준점을 잃고 공황상태에 빠지고 심지어 자신을 새로운 메시아로 착각하는 일까지 일어나. 이른바 예루살렘 증후군이라고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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