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5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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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일 이승만을 총재로 모시고 이기붕을 부총재로 모시는 대한반공청년단이 발족한다. 초대 단장은 김용우였으나, 812일부터 신도환이 단장으로 취임하여 대한멸공단, 반공통일청년회, 계몽회 등 기존 9개 청년단체를 해체시키고 대한반공청년단으로 통합한다. 대한반공청년단은 200만 당원과 그 가족 약 400만 명을 선거운동에 총동원시켰다


전국 89개 시, 군 단부 조직, 서울시 종로구 단장에는 임화수, 동대문 특별단부는 이정재가 맡았다. 반공예술인단을 조직한 임화수는 여배우 성상납을 통해 경무대 경무관 곽영주와 내통하며 세를 불린다. 임화수가 지휘한 반공예술인단의 활동은 4.19 혁명 후 많은 연예인들에게 큰 고통을 안긴다. 예를 들어 자유당 지지 연설을 했던 배우 김승호의 집은 시위대에 의해 불태워졌다.

 

반공청년단과 반공예술인단 못지않은 이승만의 친위부대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대한노총이었다. 이승만은 591년 동안에 90여 개의 노조를 해산시켰다. 58년 조선방직에서 어용 노조에 반대해 새로운 노조를 결성하기 위한 투쟁이 벌어졌고, 그 결과 598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구성되었다.

 

북한은 57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는데 있어 노동력 부족이라는 난관에 직면한다. 이에 일본에 재일교포 북송을 제안한다. 213일 일본 정부가 북송 추진을 결정하자 이승만 정권은 그제서야 관제 시위에 나섰다. 대대적인 반대 시위에도 불구, 아무런 변화가 없자 이승만은 615일 대일 경제단교 및 일본왕래금지 성명을 발표한다. 아놔, 외교가 애들 장난도 아니구. 이승만의 반일 운동에 대해 서중석은 이렇게 말했다.

 

“1950년대가 특히 더 심하였지만, 민중들이 지니고 있는 강렬한 반일 감정을 이용하여 자산의 권력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그 권력을 강화하려는 동원정책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반공은 이승만의 정치 활동에서 뗄 수 없는 것으로, 이승만은 반공을 통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분단을 공고히 하였다. 이승만이 반공운동과 결합된 반일운동을 집요하게 일으킨 중요한 이유는 북진통일운동과 마찬가지로 반공체제와 자신의 독재 유지 또는 강화를 위해서였는데, 이승만한테 반공운동을 떠난 반일 운동은 그다지 유용한 것이 아니었다. ”

 

430일 자유당 정권의 몰락을 자초한 <경향신문> 폐간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경향신문>20만부를 발행하는 발행부수 2위의 신문이었다. (동아일보 35만부, 한국일보 16만부, 조선일보 10만 부) 자유당이 <경향신문> 폐간을 위해 적용한 법률은 미군정 법령 88였다. <경향신문>효력정치가처분신청을 냈고 서울고법 특별1부 재판장 홍일원은 <경향신문>에 승소판정을 내렸다.

 

곧장 자유당 정권은 홍일원에 대한 보복에 들어갔다. 자유당 정권은 승소 판결 이후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 “ 법원의 결정에 따라 발행허가취소처분을 철회하는 대신 동 신문의 발행을 무기정지 처분한다.”는 기상천외한 대응책을 발표한다. 경향신문은 불복, 또 한 차례 효력정지가처분신청을 내지만 다른 재판부에 의해 기각된다.

 

227일 대법원은 조봉함에게 사형 판정을 내린다. 재판장, 김세원, 주심 김갑수, 간여 검사 대검의 오제도였다. 김갑수는 730일 재심청구를 기각했다. 다음날 731일 오전 11시 조봉암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조봉암은 이런 유언을 남겼다.

 

이 박사는 소수가 잘 살기 위한 정치를 했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살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 없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이승만은 조문객들의 상가집 출입마저 통제했다. 연시중은 조봉암을 제거한 이승만의 음모는 매우 비열했다. 구속된 진보당 간부들에게 모진 고문을 자행하면서 살려줄 테니 조봉암이 간첩이었다는 사실만을 진술하라고 강요하면서 사건 조작을 위해 파렴치한 짓을 일삼았다고 말한다. 진보당 사건 수사관이었던 한승격은 당시 상부로부터 진보당은 없애고 죽산을 죽일 수 있을 만큼 사건을 엮지 않으면 네가 죽을 것이라는 협박도 받았다고 말했다. 미국과 민주당 역시 조봉암을 외면했다.

 

죽산 조봉암, 한국 진보 정치의 큰 별이 이승만이 거느리던 사법 살인마들에 의해 결국 목숨을 잃었다. 알라딘 7월 캘린더에는 19일에 이승만 사망이 표기되어 있다. 반면 731일 운명한 죽산 조봉암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한민족 500만 명을 살해한 국제적인 전범, 이승만은 국부가 되어 있고,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조봉암은 외면 받고 있는 현실이라니! 후손인 우리는 죽산 조봉암의 희생을 개죽음으로 만들고 말았다. 너무 늦었으나, 죽산 조봉암 선생님의 명복을 기원한다. (오늘은 죽산 조봉암 선생님의 기일입니다. ) 




자유당은 제 4대 대통령 선거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국회의장 이기붕을 지명한다. 반면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가 갈려 조병옥과 장면의 갈등이 심화된다. 친일파 앞잡이들끼리 서로 친일파라 욕했다니. 결국 대통령 후보에 조병옥, 부통령 후보에 장면이 지명된다. 조병옥은 60129일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으로 위장 수술을 받으러 떠났다. 자유당은 5월 예정된 선거를 농번기를 피한다는 핑계로 315일 실시한다고 발효한다. 215일 밤, 조병옥은 병원에서 사망한다. 지난번 대통령 후보 신익희에 이어 두 번째로 일어난 돌연사였다.

 

 

시설은 귀속업체의 불하로부터, 원료는 원조 원면으로부터, 그리고 기업자금은 대충자금으로부터확보할 수 있었던 기업들은 권력과 선이 닿아 있으면 하루아침에 재벌이 되는 시대였다. 50년대는 미국으로부터의 원조에 의탁하던 시대였다. 일명 만가 융자의 시대. 이승만은 결재서류에 자기 이름의 끝 글자인 을 따오고 오케이라는 뜻의 를 붙여 만가라는 한문 사인을 하여 통과시키곤 했는데, 그야말로 완전 엿장수 마음대로였다.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수입대체 산업화의 최대 수혜자는 삼성 이병철이었다.


 

이승만은 이병철한테 제일제당과 제일모직과 같은 이전의 일본 기업들을 두드러지게 유리한 구매가격으로 내어주었다. 삼성은 이런 호의를 기억해두었다가 선거철에 보답하는 것이었다.....주한 미군의 존재 역시 군대식의 수입대체화를 가능하게 한 요인이었다. 이승만 정권과 미 제8군의 젖줄을 차지하는 경쟁에서 역대의 승리자는 나중에 대한항공까지 거느리게 된 한진기업의 사장인 조중훈이었다. 1950년대 내내 그는 주한 미군과 운송계약을 맺었는데, 그 금액은 1960년에 이르러서는 연간 228만 달러에 이르렀다. 그는 또한 미군으로부터 잉여의 버스도 얻어 서울과 인천 사이의 버스노선을 개설할 수 있었다.”

 

- 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578월부터 본격적으로 재벌 중심으로 은행 민영화가 시작되었다. 삼성은 4개 시중은행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어 한국 최초로 완전한 재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삼호그룹이 저축은행(제일은행), 대한제분이 상업은행, 개풍그룹이 서울은행을 소유,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을 지배하게 된다. 재벌의 금융자본 지배는 기업의 마구잡이 인수라고 하는 문어발 작전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원동력은 삼성그룹이 4개 시중은행의 최대 주주가 됨으로써 은행의 자금을 활용하여 다각화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그 결과 1950년대 말 삼성그룹은 상업, 조흥은행 등 4대 시중은행의 최대 주주로서 산하에 16개 계열기업군을 거느린 국내 최대의 금융콘체른을 형성한다.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으로 전환하면서 보다 용이하게 다수의 기업들을 수중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

 

 

6.25이후 군인들 사이에 가장 널리 불린 애창곡 중 하나는 성냥공장 아가씨라는 구전가요였다. 성냥공장 아가씨는 빈곤을 견디지 못해 농촌을 탈출한 젊은 여성을 상징했다.

 

금성사 구인회에 의해 1115일 국산 라디오가 처음으로 출고됐다. 415일 한국 최초의 민간상업 라디오 방송인 부산문화방송(HLKU)이 개국한다. 부산에서는 KBS를 압도하는 인기를 누렸다.

 

베스트셀러라는 말이 국내 신문에 처음 등장한 해도 1959년이었다. 1957년 한국 최초의 컬러 영화 <선화공주>가 개봉하였고, 58년 이강천의 <생명>은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였다.

 

19603. 15선거를 앞두고 반공청년단, 반공예술인단, 대한노총 뿐만 아니라 가계에서 만송족이 동원되었다. ‘만송 찬송의 지휘자는 <서울신문>이었다. <서울 신문>419일 국민들에 의해 불태워진다. 소설가 김동리와 박종화도 만송족이었다. <사상계> 4월호 <권두언>에서 장준하는 문화 예술계와 학계의 추태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부정과 불의에 항쟁은 못할망정 오히려 야합하여 춤춘 일부 종교가, 작가, 예술가, 교육가, 학자들의 추태다. 선거통에 한몫보자고 교우의 수를 팔아가면서 쪽지를 들고 돌아다니는 목사 장로 따위의 축복을 바라고 그가 높이 든 팔 아래 머리를 숙이고 ~으로 기도하는 신도들에게 신의 저주가 임할 것이다


지조없는 예술가들이여 너의 연기를 불사르라. 너의 연기는 독부의 미소 섞인 술잔이다. 부정에 반항할 줄 모르는 작가들이여 너의 붓을 꺽으라. 너희들에게 더 바랄 것이 없노라. 양의 가죽을 쓴 이리떼 같은 교육자들이여 토필을 던지고 관헌의 제복으로 갈아입거나 정당인의 탈을 쓰고 나서라. 너희들에게는 일제시의 노예근성이 부리깊이 서리어 있느니라. 지식을 팔아 영달을 꿈꾸는 학자들이여 진리의 곡성은 너희들에게 반역자란 낙인을 찍으리라.”

 

60227일 대구에서는 자유당 유세가 이었다. 이날 자유당은 이발소, 목욕탕, 음식점 등 당국의 허가를 요하는 모든 영업체들에게 휴업 명령을 내렸다. 유세장에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이튿날 역시 대구에서는 장면의 유세가 있었다.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당은 교육감과 학교장들에게 지시해 학생들을 등교케 하였다. 경북고는 학기말시험, 대구고는 토끼사냥, 경북사대부고는 임시수업, 대구상고는 졸업생 송별회, 대구여고는 무용발표회 등, 이유도 가지각색이었다. 일요일 강제 등교령은 장면 유세장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28일 유세장에는 대구 유권자 29만 가운데 20만 명이 모여들었다.

 

경북 고등학교 학생들은 학교를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가두 시위에 나섰다. 이른바 대구 학생 사건. 이후로 38일 대전, 310일 수원, 충주, 12일 부산, 청주, 13일 서울, 투표 전날인 14일 밤에는 서울, 부산, 포항, 인천, 원주, 문경 등지에서 대대적인 학생 시위가 벌어졌다.


 

315일 마산시의 민주당 간부들은 경찰의 제지를 뚫고 투표소 안으로 들어가 40% 사전투표와 3인조 공개 투표를 비롯한 자유당의 부정 선거 현장을 확인하고 1030분 선거 포기를 선언, 시위를 준비한다.

 

시위대는 수천명의 군중으로 불어나 밤 9시경에는 만 명이 넘을 정도였다. 파출소가 습격당하자 경찰이 발포 7명 사망하고 870명이 부상을 당했다. 마산 사건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이기붕은 이렇게 말했다.


총은 쏘라고 준 것 아닙니까?”

 

411일 정오경 마산 앞바다에서 교복차림의 10대 소년의 시체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발견된다. 소년은 315일 밤 실종된 마산상고 1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주열이었다. 마산 시민들은 분노했다. 시위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시위 군중은 15만 명에 이르렀다. 자유당 정권은 이 시위를 공산분자들의 배후 조종에 의한 것이라 주장했다. 이에 <동아일보>14일자 사설 <마산 시민을 공산당으로 몰지 말라>를 통해 이승만 정권을 규탄하고 마산시민을 옹호하였다. 강준만은 이렇게 말한다.

 

언론의 자유가 살아 있었다는 것, 바로 이 점이 이승만 시대와 훗날에 나타날 독재정권 시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만약 당시의 언론이 이후 탄생한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처럼 엄격한 통제하에 있었다면 4.19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신문에 실린 김주열의 한 장의 사진이 역사를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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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31 08: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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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31 22: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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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5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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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4대 민의원 총선거를 4개월 남겨둔 시점에서 조봉암, 박기출, 김달호, 윤길중 등 진보당 주요 간부 10여 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된다. 정부는 재판도 열리기 전인 225일 진보당의 등록을 취소시킨다. 왜 조봉암 이하 진보당원들은 체포되야 했을까? 조봉암이 주장한 평화통일론때문이었다. 북한괴뢰가 사용하는 문구이니 국가보안법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재판이 점점 진보당 측에 유리하게 돌아가자 검찰은 뒤집기를 시도한다. ‘간첩 양명산카드. 조봉암이 간첩 양명산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것. 훗날 검찰의 조작으로 밝혀졌다.



 

512, 4대 민의원 총선거는 진보당 죽이기이후에 치러졌다. 자유당의 정치자금 조달 방식은 이제 폭력 조직과의 유착 형태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박태순과 김동춘은 이를 관료 폭력 독점자본의 유착이라고 부른다.

 

“‘폭력 주식회사’ - 이것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소설가가 착안한 소설 제목이 아니라 50년대 남한 사회에 실제로 존재했던 막강한 이득 창출의 사업 조직체였다. 연희전문 출신의 홍영철이 이끌었던 이 회사는 문자 그대로 폭력을 자원으로 삼고 있었던 바, 미군의 불하물자를 주먹의 힘으로 독점 입찰하여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하지만 그 수익의 8할 이상은 자유당의 정치자금과 안 되는 일이 없고 못하는 일이 없다던 막강한 삼권부인 경찰, 특무대, 헌병대 그리고 그 외곽에 군웅 할거하는 각종 정치 폭력집단들에게 분배됨으로써 나름대로 관료 폭력 독점자본의 유착이라 할 수 있는 것을 형성시켜 나갔다.”

 

조봉암은 721심 재판에서 간첩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은 가운데 징역 5년을 언도받는다. 판결뒤 이기붕 수하의 반공청년단 수백 명이 법원청사로 들어와 난동을 부린다. 이승만은 1심 판결이 내려지자 국무회의 석상에서 이러한 판사들을 처리하는 방법은 없는가라고 분노하였다. 겁을 먹은 검사 조인구는 2t심 재판에서 조봉암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대한민국 법대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가인 김병로는 조봉암 1심 판결 뒤 벌어진 폭력배들의 난동에 대해 정치깡패들과 그 배후자들을 통렬히 비난했다. “법관을 가리켜 용공 판사운운한 것은 법관 모욕죄 가운데서도 가장 악질에 속하며 그들 행동은 살인 강도에 비할 바가 아니다라며 분노했다. 김병로는 이승만에 대해 옛날 군주와도 달리 법에 대한 관념이 결여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함석헌은 <사상계> 8월호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88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된다. 이 글 가운데 다음과 같은 부분이 문제가 되었다.

 

우리가 일본에서는 해방이 됐다 할 수 있으나 참 해방은 조금도 된 것 없다. 도리어 전보다 더 참혹한 것은 전에 상전이 하나였던 대신 지금은 둘 셋이다. 남한은 북한을 쏘련 중공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니 있는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6.25는 꼭두각시의 노름이었다. 민중의 시대에 민중이 살았어야 할 터인데 민중이 죽었으니 남의 꼭두각시밖에 될 것 없지 않은가. 잘못이 애당초 전주 이씨에서 시작됐다. ”

 

사상계는 이 필화사건으로 인해 더욱 인기가 치솟아 59년에 이르러선 판매 부수가 5~ 8만으로 뛰어오른다. 당시 최대 신문의 발행 부수가 20만 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놀라운 기록이었다.



 

1118, 자유당은 간첩 색출을 명분으로 하는 전문 340조 부칙 2조로 구성된 신 국가보안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인권 탄압의 위법 조항 때문에 야당과 언론인, 법조인들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당은 1219일 법사위에서 10명만 참석한 채, 신국가보안법을 날치기 통과시킨다. 

 

야당의원들이 무기한 농성에 들어가자 자유당은 전국의 무술 경찰관 300명을 임시국회 무술 경위로 특채해 급조, 농성중인 야당의원들을 끌어내 지하실에 감금한다. 1224일 벌어진 일이라 해서 이를 ‘2.4 국가보안법 파동이라 부르게 된다. 자유당은 야당의 저지로 통과시킬 수 없었던 27개 의안을 무더기 통과시킨다. 지방자체단체의 장을 선거제에서 임명제로 개정, 이후 도지사, 시장, 군수, 면장, 동장 등 말단까지 모두 자유당원만을 임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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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30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31 0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6-07-30 14: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치검찰의 역사는 참 뿌리깊네요.... 우리 사회의 많은 병폐가 일본제국주의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시이소오 2016-07-30 18:41   좋아요 2 | URL
독재정귄에서 견찰들은 신변에 위협을 느껴 거짓판결을 내렸다면 오늘날 견찰은 돈에 눈이 뒤집혀 스스로 개새키가 됐다는 차이점이. ^^;


 
시드니!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9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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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 장석주의 시드니 체제기를 읽은 김에 하루키의 <시드니>까지 집어 들었다. 그래, 언젠가 시드니에 갈 수도 있으니. 여행기겠지 예상했으나 오산이었다. 하루키의 시드니 올림픽 취재기였다. 정말 작가들은 부럽구나. 올해는 브라질에서 올림픽이 열린다지. 경기장은 아직 다 지어지지도 않았고, 경찰들은 파업중이라던데. (한국 경찰들은 파업 안 하나. 국민은 경찰의 정액 받이거나, 실적의 대상이 아니다. 짖을거면 위를 향해 짖어라.) 재미없으면 안 읽으려고 했건만, 프롤로그 격인 일본 여자 마라토너 아리모리 유코의 이야기에 낚이고 말았다. 마라톤은 역시나 삶에 대한 은유인걸까. 선수들에게도

 

"내리막에서 힘껏 내달린 뒤의 오르막은 엄청나게 힘들다. 이것만큼 힘든 게 없다. 그러나 견딜 수밖에 없다. 견디고 견뎌서 오르막을 다 올라갔다. 순조로우면 그대로 골까지 갈 수 있다. 순조로우면.


순조롭지 않은 경우의 일은 생각하지 않도록 하자. 순조로울 때만 생각하자. 뭐니 뭐니 해도 내게는 견뎌낼 능력이 있다. .....

 

이것이 끝이 아니다. 무언가 다른 곳의 새로운 시작이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나는 이기고 동시에 진다. 그 세계에서는 누구나 무섭도록 고독하다. 그리고 고통은 언제나 그곳에 있을 것이다. 점점 괴롭거나, 혹은 몹시 괴롭거나. 그러나 나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 걸 두려워할 수는 없다.....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이렇다. 나는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삶을, 고통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고통이 오면, 견디면 그만이다. 하루키의 에세이와 소설의 결정적 차이는 아마도 유머가 아닐까. 하루키는 소설을 쓸 때, 웃기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 에세이에 쏟아 붓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철인 3종 경기 선수인 니시우치 군의 인터뷰에 관한 글을 하루키 소설에선 절대로 만날 수가 없다.

 

보도 자료에는 취미는 명상과 쇼핑이라고 쓰여 있는데, 정말로 선을 하나요?”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러데 보시다시피 머리가 이래서 (하고 빡빡 깍은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렇게 말하면 멋있을까 해서요. 하하하” (이상한 녀석이다) “그런데 쇼핑은 좋아합니다. 쇼핑이라고 해도 거의 슈퍼마켓입니다만. 하하하.” (정말 이상한 녀석이다.)


 

올림픽 취재기라고 하지만 중간 중간 여행기로 변신하기도 한다. 하루키의 여행의 원칙은 남들 가는 곳에 가지 말고 남들 하는 것을 하지 말라이다. 그래서 유명하다는 서퍼스 파라다이스를 제치고 아무도 가지 않는 이름도 괴상한 노스스트라드브로크 섬을 다녀온다. 볼 거라곤 모래뿐인.

 

시드니에서 두 명의 죄수가 탈옥했다. 마침 지나가던 밴을 세워서, 타고 있던 사람들을 끌어 내리고 차를 빼앗아 도망갔다는데,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한국 올림픽 팀 스태프였다니! 몰랐다.

 

하루키는 마라톤 경기도 좋아하지만 1만 미터도 재밌다고 한다. 마라톤이 장어덮밥이라면 1만 미터는 가키아게 소바 같은 것이라고.... , 무슨 뜻일까? 시드니 올림픽 여자 마라톤은 일본의 다카하시 나오코가 우승을 했다고. 일본이 마라톤을 그렇게 잘했던가.

 

이 해 올림픽 가장 큰 이슈의 경기는 캐시 프리먼이 출전하는 여자 400미터 결승전이었다. 캐시 프리먼은 원주민 출신으로 호주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노메달 경력의 캐시 프리먼의 성화 봉송, 원주민들의 반대 시위 등, 캐시 프리먼에겐 몇 가지 스트레스 요소들이 있었다. 캐시 프리먼은 예상대로 우승을 거머쥔다. 하루키는 캐시 프리먼의 경기를 본 것 만으로도 시드니 올림픽을 관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사람의 마음속에 딱딱하게 굳은 무언가가 녹아내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걸 가까이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이번 올림픽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매력적인 순간이었다. 경기장에 있는 십일만 명의 관중들도 나와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모두가 똑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그처럼 거대하고 따뜻한 공감의 가스 속에 있었다. 한 여성이 400미터를 달린 것만으로 그런 감동적인 거대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니. ”

 

그러고보니 16년 전이 기억나는 것 같기도.

 

시드니 올림픽에서 한국과 일본은 동메달을 두고 다투었다. 기억나시는지. 일본 선발 투수는 마쓰자카. 한국 선발은 구대성이었다. 격렬한 투수전. 노랑머리 4번 타자 김동주의 회심의 2루타로 한국이 일본에 이겼다고. 기억이 가물가물.

 

하루키의 말대로 올림픽은 상업주의에 매몰되어 있고, 국가주의적이고 너무도 권위주의적이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그 모든 인위적인 환경과는 상관없이 감동적이라는 것 역시도 부정할 수가 없다.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지만 우리는 이 일상 속에서 땅에 달라붙어 살아가야만 한다. 내일, 내일, 그리고 또 내일. 우리는 투쟁을 계속 하고 때로는 갈 곳을 몰라 당황한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만약 선수가 투쟁심을 잃는다면 그건 싸움을 포기하는 것이다.”

 

조만간 브라질 올림픽이 열릴 것이다. 또 다시 승부가 펼쳐지겠지. 승자도 있고 패자도 있을 것이다. 하루키 말대로 이기고 지는 것 보다 중요한 건 우리가 계속 살아야 한다는 게 아닐까.

 

선수들 모두에게 행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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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9 0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7-29 09:21   좋아요 1 | URL
올림픽이 평화와 화합의 장이어야 할텐데 시장으로 전락한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어떤 선수들에겐 삶의 목표이기도 하겠죠. ^^;

cyrus 2016-07-29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림픽 기간은 드라마 본방 사수하는 어머님들이 싫어해요. 이번 올림픽에는 어떤 선수가 화제의 인물이 될지 기대됩니다. ^^

시이소오 2016-07-29 12:02   좋아요 0 | URL
ㅋ ㅋ 어머님들은 싫어하시는군요. 유난히 올해는 더 조용한 기분이 드네요. 세계적인 이슈들이 너무 많아서인지,., ^^;

곰곰생각하는발 2016-07-29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하루키와 더불어 스티븐 킹 두 사람은 ˝ 쓰는 - 기계 ˝ 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이소오 2016-07-29 18:42   좋아요 0 | URL
ㅋ ㅋ 대단들 하시죠. 조이스 캐롤 오츠도요. ㅎ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5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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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은 585.12 총선에 대비해 장경근을 내무부장관에 앉힌다. 장경근에게 떨어진 임무는 국민반조직이었다. 대통령 선거 대 국민 대책반. 이승만은 국민들을 서로 감시시키지 않고 이대로 방치해 두면 야당 사람들에게 농간을 당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국민반을 조직, 막대한 예산을 지원한다.

 

자유당은 국민반 운영과 함께 선거법 개정을 추진한다. 야당 선거운동을 탄압을 목적으로 한 선거법 개정에 반발, 야당은 국민주권옹호투쟁위원회를 구성한다. 520일 장충단 공원에서 개최한 시국강연회에 20여만 명의 시민이 참석한다. 조병옥의 연설이 시작되고 불과 5분도 안 돼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나타나 앰프에 휘발유를 뿌리는 등 횡포를 부렸으나, 경찰들은 본체만체였다. 괴한들은 이정재의 부하 유지광 일파였다. 자유당의 지시로 이날 동원된 깡패들은 700여명이었고 이들에게는 모두 일당이 지급되었다.

 

326, 이승만의 83세 생일에 맞춰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이 이승만 양자로 입적되었다. 이후 이기붕을 2의 이승만으로 모시는 어용지식인들, 이른바 만송족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다. 이승만과 이기붕 의 조상은 이씨 왕조 양녕대군으로 시작된다. 이승만은 17, 이기붕은 18대 후손이었다. 이승만은 이씨 이강석을 양자로 삼아 이씨 왕조를 재현하려 했던 게 아닐까. 이강석의 위세는 실로 대단했다고 한다. 이강석은 백주에 헌병을 구타하고 파출소 기물을 부수고 다녔다. 서울 법대에 부정으로 입학하기도 한다.

 

821, 무직자 강성병이 경북 동해 일대에 출현, 이강석을 사칭하고 다닌, 이른바 가짜 이강석 사건이 벌어진다. 가짜 이강석은 경찰서장, 시장, 군수등으로부터 금품 465천 환을 탈취한다. 이강석은 법정에서 내가 시국적 악질범이면 나에게 아첨한 서장, 군수 등은 시국적 간신도배이다라고 말해 방청석의 열띤 박수를 받았다. 리영희는 가짜 이강석 사건이 해방 후 백성들의 13년 묵은 체증을 내려주었다고 말했다.

 

영국이 대북한 수출금지령을 해제하자 이승만은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 선언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당시의 군대는 폭력과 병역부정이 횡행했다. 51년부터 56년까지 유학 간 3769명 중 입대한 자는 57년까지 한 명도 없었다. 국방부 모 고관실에는 인사청탁 처리부가 놓여 있었고, 청탁자는 거의 전부가 저명인사로 국회의원이 반 이상이었다.

 

519, 인천 만국 공원엔 맥아더 동상이 제막되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나 위인들 동상은 없었다. 8월 소련은 대륙간 탄도탄 발사 실험에 성공한 이후, 104일 인류 역사상 최초로 무인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했다. 이후 미국은 미사일 부대, 핵포병대 펜토믹 사단’, 팬텀기 편대를 배치하는 등 한국의 군사기지화를 강화한다. 59년부터 한국군과 공동으로 전술핵무기 사용을 포함하는 전술 훈련이 시작된다.

 

한국 전 이후 얌생이 몬다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얌생이 몬다라는 말은 계획적으로 다른 일을 빙자해 무언가를 훔쳐내는 일을 의미한다. 4양주 열차강도 사건이 발생한다. 한국인들이 미군 상사 윌슨과 공모해 벌인 일이지만 모든 책임은 한국인이 뒤집어쓴다. 김정자는 이렇게 말했다.

 

철로 속으로 철조망을 뚫고 들어가, 열차가 멎었을 때 미군의 군수품을 훔치는 바라크촌의 떠돌이들. 그들은 미군의 보초병에게 들키면 총살당하고 만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목숨을 담보하는 한계상황에서 그들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도둑질을 감행한다. 그러나 도둑질을 하는 것은 비단 한국인 부랑민들만이 아니다. ‘미국인들은 술과 계집을 사기 위해서 도둑질을 하고 한국인은 먹고 살기 위해서 도둑질을 한다.’(오상원, <난영>)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둑으로 몰리는 것은 오직 한국인뿐이다. 미군은 그 한국인을 슬래키 보이(slacky boy)’라고 일컫고 깡그리 도둑으로 몰아붙인다.”

 

5771일 극동 유엔사령부 서울 이전 이후 주한 미군 범죄가 급증한다. 오연호는 1957소년소녀 사냥의 해로 불렀다.

 

76일 인천에서 미군의 송유관에 올라앉아 있던 세 살 먹은 아기 김용호가 미군 총격을 받고 사망한다. 미군은 오발이었다며 이등병 도널드 파세트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725일 인천에서 송유관 근처 저수지에서 수영을 하던 소년들을 향해 미군이 총격을 가해 1명이 사망한다.

 

915일 전북 옥구권에서 풀을 베던 소녀들에게 미군이 총격을 가해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중상을 입는다. 소녀들이 철조망을 뚫고 들어와 풀을 베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103, 경북 김천에서 금지 명령을 어기고 학생들이 걸어갔단 이유로 미군이 발포, 중학생 송원준 군이 사망한다. 동아일보 1013자는 이렇게 보도한다.



지난 1년 중으로는 122명이 그리고 지난 한 달 중으로는 3명의 한국인이 미군의 총에 맞아 즉사함으로써 한국측은 미군에 대한 재판권까지 요구하게 되었다.”

 

6012일에는 두 여자가 전부터 알던 미군을 만나기 위해 철조망 구멍을 통해 영내로 들어왔다는 이유로 미군은 두 여자의 머리를 삭박하고 희롱한다. 미군은 이에 대해 논평할 것이 없다고 답변한다. 이승만의 측근들이 미군 범죄에 대해 보고하자 이승만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우리가 어려울 때 도와준 친구야. 우리가 위급할 때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미군뿐이야. 미국 군인의 비행이 신문에 나면 대미감정이 좋지 못해지니 되도록 신문에 보도되지 않고 처리하도록 해야 해.”

 


(미2사단에 근무하는 미군 병사 케네스 리 마클 이병이 윤금이 씨의 머리를 콜라병으로 난타하고 피 흘리며 죽어가는 윤금이 씨의 자궁에 콜라병을 박고 항문에 우산대를 꽂은 현장 사진)    


50년 대 중반 천 여개의 건설업체들이 난무해 과다경쟁을 벌일 정도로 건설업은 호황을 구가하였다.

건설업계에는 정부 발주 공사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는 자유당 5인조가 있었다. 대동공업, 조흥토건, 극동건설, 현대건설, 삼부토건.

 

자유당의 정치자금원 중 비중이 가장 큰 것이 바로 건설업이었다. 대형 정부 발주 공사를 수주할 경우 공사 가격의 30%는 미리 공제되어 자유당 정치자금으로 납부되는 게 원칙으로 통용되었다.

 

564월 당시 결석 아동은 70만 명이었다. 575월 경기도 안성군 백성국민학교에서 배고픔을 견디다 못한 아이들이 교정에 있는 등나무를 칡뿌리로 잘못 알고 벗겨 먹다 27명이 중독된 사건이 발생한다. 죽산국민학교에선 학생 922명 중 210명이 하루에 한끼를, 135명이 하루 두끼를 굶고 있었는데, 이 학교 교장은 결식아동용으로 배급된 분유를 자기 집 돼지 사료로 먹였다.

 

농촌에서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젊은 처녀들은 대거 도시로 이주하여 식모가 되었다. 이재오는 농촌에서 먹을 것이 없어 도시로 나오고, 공장에서 먹을 것이 없어 거리로 나오고, 사회 전반에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농촌에서는 보릿고개를 못 넘어 소나무 껍질, 칡뿌리, 산나물, 향토흙으로 배를 채워야 했고 견디다 못한 열아홉 순이는 실패 감던 손을 놓고 미군의 품안에 안겨 맥주를 마시는 에레나가 되어야 했다고 말했다. 고은은 <에레나>에서 이렇게 적었다.

 

1956년 여름

저녁 야학당에서 돌아오는 길

지프차 미군 두 놈에게 강간당했습니다

죽고 싶었습니다

죽고 싶었습니다

하늘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고향은 감싸주는 곳이 아니라

손가락질하는 곳이었습니다

울며 집 떠나

팔자대로 경기도 송탄 미군부대 밖 양공주가 되어버렸습니다

순자가 에레나가 되었습니다

 

- 고은, <만인보 16>

 

111일 중견 언론인들의 모임인 관훈클럽이 결성된다. 관훈클럽은 풀브라이트 동창생들이 조직한 단체였다. 애초에 태생이 친미적이었다. 당시 언론인들의 부정부패는 말세였다. 리영희는 이렇게 말했다.

 

전국의 자가용 승용차가 5801대밖에 없었던 그 시기에, 모여 앉으면 자가용으로 즐긴 주말 드라이브의 화제로 꽃을 피우는 취재기자들도 적지 않았다. ......권력과 돈과 언론기관은 한통속이 되어 뼈밖에 안 남은 민중에게서 고혈을 짜내고 있었다. 민중은 원성은 천지간에 가득 차 있었다. 타락한 신문인, 기자들의 부패는 내가 방금 풀려나온 군대의 장교들의 부패를 뺨칠 정도였다. 장교들의 부패는 뻔뻔스럽고 신문인들의 부패는 지능적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

 

562월에는 만화 전문 어린이 월간잡지인 <만화 세계>가 창간된다. 이후 <만화 소년>, <만화 학생>, <칠천국>, <만화왕>, <샛별>, <만화왕국>등의 어린이 만화잡지가 쏟아져 나온다.

 

57<문학예술>지 신인문학상 당선작인 동시에 그 해 제2 회 동인 문학상 수상작으로 뽑힌 화제의 작품은 선우휘의 <불꽃>이었다. 반공이념 강화에 기여한 선우휘는 이후 <조선일보>를 통해 군사독재정권을 비호하는 개새끼로 맹활약한다.

 

이 해의 히트곡은 김진경 작사, 이재현 작곡, 윤일로 노래의 <기타부기>였다.

 

519, <한국일보>의 주관아래 미스코리아 대회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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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07-28 08: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현재 우리는 평화를 선택할 수도 없고, 전쟁을 선택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자신의 무기를 자신이 사용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넘겨주고 안심하고 있는 상황이 안타깝습니다. 더구나 그 타인이 사용할 무기를 거금들여 사오고 있고 때문에 많은 국민들의 복지 비용이 부족한 현실이 답답해집니다... 시이소오님 안타깝지만 좋은 글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7-28 08:45   좋아요 3 | URL
싸드가 배치된다면 한반도에서 전쟁 확률은 그 이전보다 급속도로 치솟겠죠.

IS 까지 설치고 있으니, 세계 정세는 도무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질 않네요.

한국인들은 언제쯤 미국이 `대악마`라는 사실을 깨달을런지요?
미국 대중문화의 무분별한 소비가 계속되는 한,
미국이 악마임을 깨닫지 못하겠지요.

저 역시도 겨울 호랑이님의 격려에 매번 감사드립니다. ^^


겨울호랑이 2016-07-28 08: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만일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서 대통령이 된다면, 시이소오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악의 축`이 누구인지 모든 사람이 알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다만, 아주 비싼 수업료를 지불해야겠지요..ㅜㅜ

시이소오 2016-07-28 08:54   좋아요 3 | URL
힐러리든 트럼프든 도긴개긴아닐카요?

그리고 안타깝게도,혹은어이없게도 이미 트럼프로 대세가 기울었네요. 정말 황당하네요. 전세계 정신병자들이 죄다 정권을 잡고 있으니 ㅠ ㅠ

겨울호랑이 2016-07-28 08: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네.. 그렇습니다. 예전에 Trump의 「Apprentice 」시리즈의 유행어 ˝You`re fired!˝가 이제는 해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시이소오 2016-07-28 09:03   좋아요 2 | URL
말씀을 들으니 그러네요. 섬찟합니다. ㅠㅠ

2016-07-28 0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7-28 09:25   좋아요 1 | URL
언제쯤 고쳐질까요?
답답할 노릇입니다 ㅠ

얌생아 2017-10-14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얌생이는 계획 운운이 아니라 김치새끼들이 미군만을 대상으로 물건을 훔친 걸 말합니다. ‘얌생이 친다‘는 미군 부대 옆에서 염소를 치는 영감이 창고 밖에는 풀이 적고 창고 안에는 풀이 많아서, 보초의 허락을 받아 안으로 들어가 염소에게 풀을 먹이는 척 하면서 물건을 훔치는 한국남자들이 전형적으로 즐겼던 수법이죠. 처음에는 웃으면서 봐주던 미군도 너무 자주하니까 짜증나서 한국남자만 보이면 그냥 난사할 정도가 돼 지금은 타깃이 미군에서 여성으로 옮겨갔지만 말입니다.그리고 강간은 한국남자가 훨씬 더 많이 저지르는데도 덤탱이 쓰는 건 언제나 서양남성입니다. 그 때 중국남자들이 부산 점령당해서 김치새끼들 전부 죽이도록 내버려뒀어야 하는데 말이죠.

그나마 미국남자는 주 살해 대상이 창녀지만 한국남자는 빈집이라고 하면 무조건 들어가서 아무 잘못도 없는 무고한 여자를 강간하니 한국여자들은 한국남자한테 절대로 혼자 산다는 말을 안 할 정도입니다. 저런 사진을 자랑스럽게 올려놓고 이용하는데서 김치새끼 인성 수준을 알 수 있죠. 미국인은 피해자의 인권을 고려해서 저런 처참한 나체 사진을 올리거나 하지 않습니다.

박동희 2023-07-31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잔인하네요.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5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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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이승만의 빨갱이 사냥개김창룡이 암살당한다. 김해진은 김창룡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공산당과 연관이 있다고만 하면 부모 형제, 백년지기 할 것 없이 즉각 체포, 구속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그의 이와 같은 생활은 붉은 고추만 보아도 즉각 처넣고 싶고, 여성들의 붉은 치마만 보아도 온 신경을 곤두세워 공산당과 연관시켜 볼 정도로 되게 하였다. 붉은 빛에 대한 노이로제 기미라고나 할까.”

 

암살범은 특무대 대령 허태영의 부하인 송용고와 신초식인 것으로 밝혀졌다. 허태영은 왜 김창룡을 암살해야만 했을까.

 

김창룡은 일제 강점기 북만주에서 악질 일본 헌병으로 일하면서 수많은 애국독립투사를 투옥했으며, 중지 방면의 연합국 포로수용소의 감시원으로 일할 때는 포로를 학대한 친일 전범이다. ....그는 옥석을 가리지 않고 무분별하게 숙청을 뒤풀이하여 공산당원 1에 대해서 양민 10의 비율로 무고한 사람들을 괴롭혔다. 그 대표적 사건으로는 관 사건, 조선방직 사건, 조병창 화재 사건, 김종평 장군 사건, 김도영 대령 사건, 삼각산 사건 등 20여 건을 꼽을 수 있다. 한편 뒤켠에선 살인, 약탈, 협박, 공갈, 항명, 군수품 부정처분, 밀수 등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20억 원의 재산을 끌어모았다.”

 

허태영은 법정에서 나의 행동은 이등박문을 암살한 안중근 의사의 거사와 같은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신초식은 김구 선생을 살해한 안두희가 백주에 명동거리를 활보하도록 허용하고 있는 이 나라의 법률이 도대체 어떻게 나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항변하였다.

 

이승만은 35일 대통령 후보 불출마를 선언한다. 이에 이승만이 조직한 대한노총은 우마차 800대를 이끌고 이승만 대선 출마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우의마의시위. 시위에는 학생들, 다방마담, 창녀들까지 강제로 동원되었다. 이승만은 시치미를 떼고 자신의 출마를 원하면 글로 써서 보내달라고 호소한다. 이에 수많은 혈서들이 난립한다. 이승만은 할 수 없이대통령 후보로 나선다. 조선조 왕들이 툭하면 해대는 쇼였거늘, 이승만은 자신을 왕으로 여겼던 게 아닐까.



 

328, 민주당은 전국대회를 열어 신익희를 대통령 후보로,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선거구호로 못살겠다 갈아보자를 내걸었다. 53, 신익희의 한강 백사장 연설에는 30만 인파가 몰렸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신익희를 친일분자로 비난하고 평화통일을 외치는 조봉암을 용공세력으로 몰아붙였다. 지방에선 이 동리에서 만약에 야당계 표가 나온다면 이 동네는 몰살을 해버린다. 만약에 우리가 북진할 때는 너희들부터 전부 다 죽이고 가버린다라고 주민들을 위협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미 한국전쟁을 전후로 수 백만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지방에 사는 서민들에게 그저 공허한 협박으로만 들렸을까.

 

신익희는 55일 새벽 5시경, 장면과 함께 전북 이리로 향하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졸도한다. 장면의 경호책임자인 시라소니 일행이 신익희를 호남병원으로 옮겼지만 신익희는 사망한다.

 

5. 15 선거 개표결과 이승만이 총 유효표의 52%5046437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다. 조봉암은 2163808표를 얻는다. 강원도 정선에서는 이승만 표가 25천 표가 나왔는데 조봉암 표는 34표에 그쳤다. 강원도 유권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군인들의 70%가 조봉암에게 투표했지만 투표 결과는 거꾸로 뒤집혀졌다. 엄청난 개표 조작이 이루어졌다. 이승만은 8.8 지방선거를 앞두고 치안국장에 김종원을 임명한다. 김종원은 여순, 거창사건에서 익히 악명을 떨치던 인물이었다.

 

조봉암은 유세를 통해 피해대중론평화통일론을 주장하였다. 조봉암은 이념을 내세우지 않고 현실에 대한 분석을 강조했다.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은 지극히 당연한 주장이었음에도 북진통일론을 주장한 이승만은 조봉암을 빨갱이로 몰아붙였다. 민주당 역시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을 거부하고 신익희가 죽자 오히려 이승만을 지지한다.

 

이승만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 대통령이었다. 한국 기독교는 이승만의 온갖 패악질에도 이승만을 지지한다. 함석헌은 기독교 신자였음에도 한국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글을 멈추지 않았다. <함석헌 평전>을 쓴 김성수는 이렇게 말했다.

 

월남하여 전쟁을 겪는 동안 함석헌은 이승만 정권의 횡포를 질리도록 목격할 수 있었고, 자유당을 등에 업은 기독교인들의 오만 역시 거듭 체험한 바 있었다. 이를테면 자유당 간부들이 기독교인들을 우선적으로 선별해서 미군 구호품을 분배해 주는 것 따위가 그랬다. 사회가 처한 어려움이나 문제점에는 냉담하고 교회의 일과 이익에만 관심을 쏟는 복음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한국 교회에 대해 그가 강한 비판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선거 때마다 그래왔듯 개신교는 장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 권사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추대한다.

 

88일로 예정된 제 2대 지방의회 선거를 앞두고 여권이 바빠졌다. 점차 선거일이 다가오자 치안국장 김종원은 새로운 수법의 여당 탄압을 선보였다. 온갖 경범죄 죄를 동원해 야당 후보 등록을 가로막은 것. 당시에는 경범죄로 11~25일간 구류처분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후보자로 등록할 수 없었다.

 

야밤에 집 앞에다가 쓰레기를 버려놓고 새벽같이 찾아와서는 청소 불결이라는 죄목으로 구류처분하지 않나, 밤 사이에 단단히 붙여놓은 문떼를 떼어보리고는 문패가 없으니 구류처분이라고 집어넣지를 않나, 형사들이 술을 사달라고 졸라서 술을 사주었더니 밤 12시가 되도록 나가지를 못하게 해놓고 12시가 지나 집으로 가려고 한즉 틍금위반이라고 집어넣지를 않나....”

 

심지어 괴한들이 몰려와 입후보 서류를 탈취해가는 일도 있었다. 입후보 사퇴 공작까지 가세해 지방 선거에서 사퇴한 후보는 3800여명에 이르렀다.

 

선거 결과 자유당의 압승이었다. 전북 정읍 소성지서에서 근무하던 순경 박재표는 소성면 투표함 2개를 수송 도중 바꿔치기한 경찰관들의 선거 부정을 <동아일보>를 찾아가 폭로하였다. 경찰은 박재표에게 현상금 30만환에 일 계급 특진을 내걸었다. 박재표는 체포되어 10개월 간 옥살이를 하는 등, 숱한 수난과 고초를 당한다. 과연 전북 정읍에서만 개표 부정이 있었을까.

 

928, 민주당 제 2차 전당대회에서 장면이 저격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장면을 쏜 김상붕은 조병옥 박사 만세!”를 외쳤다. 사건 후, 김상붕의 형 김상봉이 배후를 <경향신문>에 제보했다. 배후는 자유당 비밀당원 최훈이었다. 4.19 이후 밝혀진 바로는 이기붕, 이익흥, 김종원이 사건의 배후였다. 4. 19 혁명 후 이기붕, 이익흥, 김종원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박정희의 5.16 쿠데타 이후 특사로 석방되었다


 

짜장면은 1905년 인천시 중구 북성동 소재 공화춘에서 최초로 판매되었지만, 56년 이후로 대중화된다.

 

입도선매로 빚을 질 수 밖에 없는 농민들은 할 수 없이 서울로 이농을 하게 된다. 이농한다고 해서 딱히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약관 22살의 나이로 혜성과 같이 나타난 문단의 무서운 테러리스트가 있었으니 이어령이었다. 이어령은 <우상의 파괴>에서 김동리를 미몽의 우상’, 모더니즘의 기수를 자처한 조향을 사기사의 우상’, 이무영을 우매의 우상’, 최일수를 영아의 우상으로, 황순원, 조연현, 염상섭, 서정주를 현대의 신라인들로 묶어 신랄한 비평을 가했다.

 

김일성은 모택동의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를 모방한 듯한 좌수우수론을 제시하였다.

 

밥을 먹는데 왼손으로 먹으면 어떻고, 오른손으로 먹으면 어떠한가? 숟가락으로 먹으면 어떻고, 젓가락으로 먹으면 어떤가? 밥이 입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마찬가지로 조선에서 혁명을 하는데 꼭 소련식이어야만 하겠고, 꼭 중국식이어야만 하겠는가?”

 

616, 한국 최초의 tv 방송이 시작되었다. HLKZ TV 방송이었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에서 17번째, 아시아권에서는 일본, 필리핀, 태국에 이어 네 번째로 TV 방송을 실시한 나라가 되었다. 9월에는 <사형수>는 드라마를 방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수상기는 300여대. 경영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황태영 사장은 이듬해에 HLKZ-TV를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에게 양도한다. 장기영은 방송국을 대한방송주식회사(DBC)로 개편하고 초대 사장으로 취임하지만, DBC5922일 화재로 사라지고 만다. AFKN TV50년 이후 라디오 방송으로 출범, 5795일부터 TV 방송을 시작한다.

 

56년 영화가 최대의 화제작은 15만 명을 동원한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이었다. 영화 <자유부인>이 남긴 유행어는 최고급품으로 주십시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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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6 1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26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 2016-07-26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영민의 한국현대문학사에서는 이어령의 저 평론을 참여문학의 신호탄으로 봅니다. 실천적 참여가 아닌 창작을 통한 참여를 강조해 순수문학을 옹호한다고 비판받아 나중에 김수영과 논쟁하기도 했지만..

시이소오 2016-07-26 15:00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50년대, 60년대의 이어령은 본받을만 하네요. 특히나 남정현의 <분지> 사건때였나요?
지식인의 표상, 이라 할만합니다. ^^

겨울호랑이 2016-07-26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일파들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광신적인 탄압은 항일투쟁에 보다 적극적이었던 공산주의자들의 투쟁노선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전에 말씀하신 북한에서의 친일청산 때문에 더욱 광기어린 것 같네요. 1950년대에 이미 현재의 문제 뿌리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입니다. 시이소오님 좋은좋은 글에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7-26 17:22   좋아요 2 | URL
기득권 세력이에게 반공은 이데올로기보다는 명분일 뿐이었던것 같아요. 거기에 세뇌된 국민들의 반공의식이 더 끔찍해 보이기도하네요.

매번 격려에 격하게 감사 드립니다 ^^

겨울호랑이 2016-07-26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어렸을 때 반공 포스터 및 표어 작성했던 기억이 납니다. 여름방학에는「붉은 청년 근위대」등을 읽고 무찌르자 공산당을 외쳤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는 거대한 병영사회 안에 있었던 것 같아요.. 좋은 저녁 되세요^^

시이소오 2016-07-26 17:28   좋아요 1 | URL
ㅋ 저희 어릴때 반공 포스터, 표어 정말 많이 그렸죠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