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기술
유시민 지음, 정훈이 그림 / 생각의길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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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엘이 말한 글을 쓰는 네 가지 이유는 하도 여러 책에서 자주 접하다보니 이제 저절로 암기가 되고 말았다.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 유시민은 정치적 목적을 가장 중요시한다. 정치적 목적이란 세상을 더 좋게 바꾸는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를 뜻한다. 정치적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작가는 조지 오웰일 것이다.  조지 오웰은 심지어 이렇게 말했다.

 

내 작업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 소리에 현혹됐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


-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유시민 역시 글쓰기에서 정치적 목적을 가장 중요시 한다. 나는 주로 순전한 이기심으로 글을 쓰곤 하지만, 점점 더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는 글을 쓰고 싶긴 하다. 그러기 위해선 더 배워야 하겠지.

 

유시민은 이런 질문을 자주 접한다고 한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왜 만날 싸우나요?” 정말 멍청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어떤 남자든 자신의 눈앞에서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강간범에게 강간당할 위기라면 강간범이랑 안 싸우겠는가


 "저기.....외람된 말씀이오나 제 여자 친구인데. .....강간은 쫌..."하면서 예의를 갖춰야 할까?  국회에서 정부여당은 재벌과 기득권을 위해 99%의 수 천만 명의 국민들을 강간하려는 정책들을 입안하려고 한다. 그럼 오늘날의 야당처럼 먼 산 쳐다보듯 가만히 있어야 한단 말인가

 

유시민의 말처럼 여당과 야당이 안 싸우면 이상한 거다. 흔한 말로 야합이라 한다. 제발 둘 다 싸우니까 똑같은 놈이라고 하지 말자. 절대로 똑같은 게 아니다. 강간범이랑 강간을 막으려는 사람이 어떻게 똑같은 범죄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독자가 감정 이입을 하기 좋게 글을 쓰는 유시민 만의 노하우

 

1. 텍스트 자체만 읽어도 뜻을 알 수 있도록 쓴다.

2. 텍스트를 정확하게 해석하는 데 필요한 콘텍스트를 텍스트 안에 심어둔다.

 

유시민은 안도현 시를 예로 든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유시민에 따르면 위 시는 의사소통의 도구로는 폭망이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써야 한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더러워진 골목길 네가 치울 거냐

 

, 논리적으로 소통하고 싶은 글을 쓸 때에는 독자에게 정확하게 전할 수 있게 써야 한다고.

 

 


전두환은 멋져라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정신나간 정훈이를 제 정신으로 돌려놓은 책은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였다. 이 책을 계기로 정훈이는 현대사를 공부했고, ‘김대중은 빨갱이라고 믿었던 경상도 청년의 왜곡된 상식이 무너지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직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숱한 국민들을 고문하고 살인하고 강간한 독재자를 멋지다고 외치는 정신 나간 것들이 있다. 누군가 저런 것들을 붙잡아다 책을 읽히면 어떨까


우매함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p48.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에서 두 가지 도덕법을 밝혔는데, 다들 아시는 정언명령 1번과 2번입니다. 정언명령 1번은 스스로 세운 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고 2번은 자기 자신이든 타인이든 사람을 수단으로 삼지 말고 언제나 목적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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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05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정치인들의 행보, 특히 여당에 불만이 많지만, 여당 정치인을 강간범으로 비유한 문장은 과도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강간은 폭행으로 상대방을 위협하고 억압하는 행위입니다. 옛날 남산 안기부 시절이라면 국가의 폭력을 강간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여당과 야당은 각자 자신들의 밥그릇이 걸린 정책 문제 앞에서는 욕설과 주먹을 주고받으면서 싸웁니다. 소속 정당이 다를 뿐 개인의 이익을 사수하려는 정치인들은 도긴개긴입니다.

시이소오 2016-08-05 12:23   좋아요 2 | URL
기득권들은 국민드이 도긴개긴이라고 생각하길 바라죠.

국가보안법 통과시키려는 당과 몸싸움으로 막으려는 당이 어째서 똑같나요? 절대로 똑같지 않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같 다고 차선이 아니라 최악을 선택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리고 꼭 육체적인 폭력만을 강간이라 한정지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자기들 멋대로 사드 배치 결정하는건 폭력이 아닌가요?

강간은 한 사람의 피해겠지만 잘못된 정치는 수천명을 지옥에 몰아넣을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위험하기도 하구요.

루쉰P 2016-08-05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의 표현의 기술은 너무나 좋죠 ㅋㅋ

시이소오 2016-08-05 13:22   좋아요 0 | URL
저는 표현의 기술이 없죠 ㅋㅋ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6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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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은 장면 내각 출범시 장면에게 육군참모총장으로 군의 정치적 중립을 몸소 실천했던 이종찬을 강격 권고했지만 장면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훗날 박정희는 사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존경하는 선배인 이종찬 장군이 만일 장면 정권의 국방장관으로 계속 앉아 있었더라면, 우리가 과연 5.16 궐기를 감행할 수 있었을까?”

 

장면은 미군의 지시에 따라 장도영을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앉힌다. 미군 지원설은 포함, 장도영이 육군참모총장에 오른 이유에 대해 적어도 7가지 설이 난무한다. 장도영 장인 로비설, 정치자금설, 뇌물설, 어머니설, 박정희 로비설, 지연설 등등.

 

614월 초순, 박정희의 예편은 기정 사실화 되었으며, 예편 일자는 5월 하순경으로 돼 있었다. 박정희는 4.19 1주년에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면 폭동진압작전을 명분으로 내세워 쿠데타를 감행하기로 한다. 그렇다고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대규모 시위를 만들어 내야 했다. 김종필은 박종규에게 ‘4. 19 데모 유발 공작총책을 맡긴다.

 

한편 해병대 김동하 역시 해병대 창설 기념일인 415일 쿠데타를 계획하다 박정희와 손을 잡는다. 드디어 4.19일 박정희는 목을 빼고 기다렸으나 오후 내내 시위 소식은 없었다. 저녁 8시 경 드디어 데모가 일어났다. 그러나 창녀들과 포주들 30명이 서울역 앞에서 매춘 합법화를 외치며 데모를 벌였을 뿐이었다.

 

23일 혁신계 신문 <민족일보>가 창간된다. <민족일보>는 통일문제에 가장 큰 신경을 썼다. 장면 정권의 악랄하고 교활한 탄압을 맹비난하던 <민족일보>는 쿠데타를 지지한다. 그러나, 불과 몇 일만에 박정희에 의해 폐간될 뿐만 아니라 발행인 조용수는 사형 당한다.

 

장면은 총리 재임기간 동안 10여 차례나 쿠데타 정보를 보고 받았었다. 그럴 때마다 장면은 미군이 있는데 어떻게 쿠데타를 하겠소라는 말로 응대했다. 56일에도 민주당 의원 윤병한, CIA 한국지부장 피어드 실바가 쿠데타가 일어날 거라고, 박정희 이름까지 알려주며 경고했지만 장면은 미국이 있는데 설마라는 주기도문만 암송했다.

 

516일 새벽 330분 제 6군단 포병단은 육본을 점령한다. 장면은 330분 경 혜화동 칼멜 수녀원으로 도망친다. 쿠데타 군은 415분 경 KBS를 접수한다. 혁명공약이 장도영의 이름으로 방송된다.

 

오전 10시 육군 중장 이한림은 고민하고 있었다. 휘하에 5개 군단을 거느린 그는 쿠데타를 저지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위치에 있었다. 이한림은 장면에게 출동 명령을 요청하는 밀서를 전달하나, 장면의 행방을 아무도 몰랐다.

 

11시경, 매그루더와 그린이 윤보선을 방문해, 무력진압에 동의해 달라고 요청하나 윤보선은 거절한다. 그린은 윤보선에게 각하의 이번 결정으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군부통치가 계속될 것이라는 경고를 남기고 돌아간다.

 

330, 장면의 운전기사를 추궁했으나 운전기사는 끝까지 모르다고 부인한다.

6시 경, 장면의 경호관 조인호에게 장면의 행방을 추궁하나 역시나 모른다고 부인한다. 이영신에 따르면

 

이 시간까지는 아직도 희망은 있었다. 그러므로 조인호가 장면의 은신처를 노영균에게 밝히기만 했어도 역사의 궤도를 제자리로 수정해 놓을 충분한 시간적 이유가 있었다. 그것을 조인호는 모른다고 딱 잡아뗐던 것이다. 곤두박질하려는 역사를 바로잡을 절호의 기회가 조인호의 고지식함으로 해서 또 다시 그 기회가 잃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

 

장면은 도망가고 윤보선은 쿠데타 세력에 계속 협력했다. 미국은 과연 쿠데타를 저지하려 했던 것일까. 이완범은 이렇게 말했다.

 

장면과의 연락이 두절되어 쿠데타를 진압할 수 없었다는 미국의 사후 변명은 사실과 다른 책임회피였음이 판명된다. 또한 윤보선이 쿠데타를 지지해서 할 수 없었다는 미국의 사후 변명도 자신들의 고차원적 정치 개입을 호도하고 윤보선을 중심으로 한 한국 정치지도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책임회피였을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장면에 대한 대안을 일찍부터 고려하고 있었고 박정희가 거사하자 이 대안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면서 장면에 대한 고려를 끊어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7일 오후 7시 육군 첩보부대 중령 최영택이 쿠데타 군의 사기를 위해 혁명군 완장을 차게 해주자고 제안한다. 완장을 찬 군인들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검문 태도가 건방지다고 신문 기자에게까지 집단 구타를 가한다. 완장시대의 개막이었다.

 

육사 교장 강영훈은 쿠데타에 반대한다. 반면 이상훈과 전두환 등 육사 11기 동기들은 쿠데타를 지지하는 육사생도들의 가두행진을 주도한다.

 

18일 낮 1230분 경, 잠적 55시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장면은 내각 총사퇴를 발표한다.

 

20일 전 미8군 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는 군사정권은 한국의 반만년 역사를 통해 가장 훌륭한 정부라고 찬양한다. “한국에는 민주정치가 시기상조라는 사족을 달아.



 

5. 16 쿠데타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많은 학자들이 의문을 품었다. 한국군의 0.5% 정도 밖에 안 되는 병력, 게다가 민주당 정권 수뇌부, 총리, 육군 참모총장, 유엔군사령관 까지 다들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가장 그럴듯한 이론은 미국의 배후조정설이다. 이미 미국은 미 정보기관 대령인 크레페가 장면 정권을 전복하고 장도영 집권을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었다. 김종필의 중정에 의해 밝혀져 미국 공작원들이 추방당한 일명 크래퍼 사건5.16 이전에 있었다.

 

당시 CIA 국장이었던 앨렌 덜레스는 영국 BBC에 출연 내가 재직 중에 CIA의 대외활동으로서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이 혁명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일본 주간지는 이렇게 보도했다.

 

“CIA는 약하고 무능한 장면 내각을 무너뜨리고 강력한 반공정부로 교체하기 위하여 군부에게 쿠데타를 감행하도록 교사하였고, 그 후 그런 전략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미 국무성을 배후에서 조종하여.....장면 지지성명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3세계에서 쿠데타 사주는 미국의 상습적인 수법이었다. 과연 한국이라고 예외였을까.

 

5.16 쿠데타가 벌어지자 북한은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알고서 환호했다. 쿠데타 이후 미국은 박정희의 사상을 캐고 다녔다. 미국 측 눈에 들기 위해 기회주의자 박정희는 보도연맹 관련자, 진보정당 관련자, 좌파 지식인, 사회단체 지도자, 노조 지도자 등 4천 명에 이르는 좌익활동 경력자들을 체포, 수감한다.

 

미국에게 자신이 더 이상 빨갱이가 아니라는 걸 입증하려는 박정희의 강박은 계속된다. 심지어 빨갱이 아닌 사람도 빨갱이로 몰아 때려잡았다. 억울한 죽음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는 빨갱이로 몰려 사형 당했다. 박정희는 심지어 민족일보의 자산은 물론 조용수 가족의 전 재산을 몰수한다. 재산몰수는 박정희의 특기일까 취미일까?

 

박정희는 사무라이 정신이 골수에 박힌 친일파여서 반미기질이 강했지만 쿠데타 성공 이후에는 미국에 점점 더 비굴하게 굴었다. 미국에 비굴하면 비굴할수록 박정희는 자신이 만들어낸 빨갱이들에겐 더욱 더 가혹하게 굴었다. 한 전향자의 좌익 콤플렉스로 인해 무고한 국민들이 빨갱이로 몰려 숱한 피눈물을 흘려야 했으니

 

 

군사정권은 민심의 호응을 얻기 위해 포퓰리즘 수법을 동원한다. 21일 오후, 군사 정권은 자유당 시절 정치깡패 두목 이정재를 비롯하여 200여 명의 깡패들에게 깡패 생활 청산하고 바른 생활 하겠읍니다와 같은 플랭카드를 들고 시내 중심가를 행진하게 만들었다.

 

박정희는 깡패들뿐만 아니라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인간 개조 운동을 펼친다. 박정희가 꿈꾼 이상적 인간은 군사적 인간이었다. 교원들에게 국민복을 입히고, 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머리를 삭발해야 했다. 고급 요정도 부패와 사치의 온상으로 지목돼 탄압당했으나, 고작 1년도 못 가서 요정 앞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연쇄강간범 박정희가 요정을 탄압하다니?



 

빨갱이로 몰려 사형당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말로를 의식해서였을까? 5. 16 쿠데타 이후 신문들은 알아서 기었다. 쿠데타 세력에 대학교수들은 적극 협조한다. 박정희는 또한 문인들과 자주 어울린다. 김팔봉, 장덕조, 이은상, 모윤숙(안 끼는데가 없다), 최정희, 박종화, 구상 등. 장준하 역시 쿠데타를 지지했다. <사상계>7월호에 가서야 쿠데타를 비판하는 함석헌의 글을 실었다.



 

610, 중앙정보부가 창설된다. ‘한국 위의 한국온갖 조작질과 부정부패의 산실. 쿠데타가 완수되었으니, 남은 일은 토사구팽. 장도영은 반혁명 사건으로 구속된다.

 

517, 쿠데타 다음 날 주요 기업인 17명이 체포되었다. 이병철은 일본으로 도피중이었다 26일 귀국, 다음날 박정희와 회동을 갖는다. 감옥에서 풀려난 기업인들을 중심으로 717일 경제재건촉진회가 조직, 이후 68년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으로 명칭을 바꾼다.

 

군사정권은 말로는 부정축재 처벌이었지만 실제로는 부정축재 이용으로 돌아섰을뿐만 아니라 부정부패의 수렁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간다.

 

박정희는 미국에 가기 전 동경에 들러 일본 수상 이케다 하야토와 회담을 갖는다. 박정희는 만주군관 시절 교장 나구모 쥬이치를 초청해 달라고 요청해, 공식 만찬 자리에서 나구모 쥬이치에게 큰 절을 올리고 술을 따른다.

 

케네디를 만난 박정희는 미국에게 베트남 파병을 제의한다.

 

61년 봄에 이범선 원작,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이 상영된다. 쿠데타 후 군사정권은 <오발탄>을 상영중지 시킨다. 61년 영화계 가장 큰 화제는 김지미와 최은희의 대결이었다. 영화감독 홍성기와 신상옥의 대결이기도 했다. 홍성기는 아내인 톱스타 김지미를 춘향으로 하여 컬러영화 <춘향전>을 만들었고, 신상옥 역시 아내인 톱스타 최은희를 춘향으로 내세워 <성춘향>만들어 설날 맞대결을 벌였다. 신상옥과 최은희의 <성춘향>의 완승이었다. <성춘향>75일간 36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60년대는 가히 신상옥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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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0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4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르그 2016-08-04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훌륭한 요약입니다
여러 사람에게 읽히고 싶은 글입니다
그런 시절입니다

시이소오 2016-08-04 10:11   좋아요 0 | URL
ㅋ 감사합니다 ^^

겨울호랑이 2016-08-04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범죄와의 전쟁`은 정통성이 없는 정부의 민심회유 정책 1번 매뉴얼인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8-04 12:24   좋아요 1 | URL
겨울 호랑이님, 제가 감사하죠 ^^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작가수업 1
김형수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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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정말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만 읽어야 할 것 같다. 대개 미쳐야 미친다(다다른다)’라고 말한다. 저자인 김형수에 따르면 문학은 미쳐도 안 된다.  가정을 버려도 안 되는 사람은 안 된단다. 그래도 하겠는가? 어휴, 어디 겁나서 하겠는가? 사실 어느 분야든 기저율을 고려해 봐야한다. 문학에서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은 어느 정도일까? 1000명 중에 한 명? 혹은 만 명중에 한 명? 등단했다고 해서 전업 작가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을까? 그런 작가는 고작 몇 백명 정도가 아닐까?

 

그래도 난 하고 말겠어라고 한다고 해서 또 이게 그리 간단치가 않다. 김형수에 따르면, 문학은 평생을 공부해도 알까 말까할 정도로 공부할 게 많다. 문학론, 시론, 소설론, 운율론, 문체론 등, 비평도 공부해야 한다. 게다가 세계관의 한계, 창작방법의 한계, 창작조건의 한계도 극복해야 한다. 그래서 작가들 중에는 공부만 하다 글은 못 쓰는 사례도 빈번했다고. 박영희 시인이 그랬다지.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김형수가 제시하는 대안은 이렇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죽은 고래는 아무리 커도 물살이 흐르는 대로 따라 흐르지만 살아있는 송사리는 아무리 작아도 물살을 거슬러서 오를 줄 안다입니다.......모두 이론의 대가가 되고 문학사의 대가가 되고 비평의 대가가 되려고 할 것이 아니라 글을 쓰면서 세계관의 한계 창작조건의 한계 창작방법의 한계를 끝없이 극복해 가는 것, 한 마디로 말해서 문학을 배우는 게 아니라 문학을 사는 것, 이것이 문학수업의 왕도가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일단은 글을 쓰면서 공부를 병행하라는 것이다. 두 가지를 병행한다고 해서 다가 아니다. 고독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적한 시골길에 혼자 켜 있는 고독한 가로등처럼 존재하는 것, 이렇게 존재하는 자가 어법이 서툴거나 표현이 약하거나 인기가 없다고 해서 이 자의 입을 통해 명명되는 어둠 속의 것들의 가치가 작아질까요? 사실은 이것들이 인간의 세상을 만들어갑니다. 이것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문학입니다. 이렇게 혼자 제자리에서 빛날 줄 알면 이제 그 사람의 생을 통해서 문학이 흘러나오기 시작할 겁니다. (43)

 

고독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불충분하다. 끝까지 가기 위해서는 함께 가야 한다. 영적 배움에도 도반이 있듯 문반이 필요하다. 끊임없이 창작적 에너지가 증폭되는 관계망을 형성해야 한다.

 

그 외 인식의 도구들, 장르의 구분, 문예사조 등은 부수적인 가르침이다. 하루살이에 관한 구절이 기억에 남는다.

 

하루살이는 태양이 사라지면 몸이 기울어져서 균형을 잡을 수 없답니다. 그래서 작은 빛이라도 발견되면 정신을 잃고 다가가요. 가까이 가면 균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빛에 접근하는데 끝내 균형을 얻지 못하고 타죽고 마는 것입니다. 멈출 수 없어요. 왜냐하면 존재가 기울어졌기 때문에, 목숨을 바쳐서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끌려가는 셈인 거죠.


상상을 하면 왜 이리 웃긴지. 하루살이는 이미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작은 빛에도 속절없이 끌려가 죽음에 이른다니! 웃다가 섬찟해진다. 혹시 나도 하루살이는 아닐까?

 

태양이 없을지라도

균형을 잡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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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8-03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좋은가 봐요. 많이 읽던데...
근데 제목이 처음엔 좋은 것 같았는데 다시 보면 좀 으시시해요.
한적한 시골길에 드문드문 있는 가로등 보면 얼마나 무서운데요.
거기서 살인의 추억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 가로등은 뭔 죕니까?ㅋㅋ3=33=3

시이소오 2016-08-03 13:32   좋아요 0 | URL
ㅋ 듣고보니 그러네요 ㅎㅎ

2016-08-03 1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4 07: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뭇잎처럼 2016-09-06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고민하던 걸 한방에 시원하게 날려주는 글이네요. 글 잘 쓰고 싶을 때 공부가 부족해서 그런거야,라고 자책했던 마음도 홀가분해지는 기분^^

시이소오 2016-09-06 21:37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그 자체로 빛나시길. 나뭇잎처럼요^^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6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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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5 부정선거 이후 시위 주체는 대학생이 아닌 고등학생들이었다. 대학가에서는 418일 고대생들이 처음으로 시위에 참가했다. 오후 720분 경 유지광이 지휘하는 반공청년단과 조폭 100여명이 쇠파이프, 쇠갈고리, 몽둥이, 벽돌, 삽 등을 휘두르며 고대 학생들을 습격한다. 고대 학생 수십 명이 부상을 입고 길바닥에 쓰러졌으며, 그 일대는 피바다로 변한다

 

이튿날 시위대 군중의 수는 10만 명으로 불어난다. 경무대로 향하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발포한다.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부상을 입는 참사가 벌어진다. 시위대에 박수를 치던 시민들이 시위대에 합류한다. 총성이 요란한 가운데 시위대는 20만 명으로 불어난다. 오후 3시를 기해 서울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된다. 15사단이 서울로 진주한다. 19일 하루, 사망자 수는 민간인 111, 경찰 4명이었고 부상자 수는 민간인 558, 경찰 169명이었다.



 

420일 계엄령 하에서 서울에서는 시위가 중단되었지만, 대구, 인천, 전주, 이리, 수원에서 학생 데모가 계속된다. 425일 대학 교수들마저 시위에 동참한다. 교수데모를 주도한 교수들 대부분은 철학과 역사학에 몸담고 있는 사립대학의 노교수들이었다. 다음날 426일 아침부터 쏟아져 나온 시위 군중은 10시 경 10만을 넘어선다. 경찰의 발포로 학우 전한승을 잃은 수송초등학교 학생들까지 국군 아저씨들, 부모 형제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선다. 오전 1030분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발표된다.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나오자 10대 청소년들은 파고다공원으로 달려가 이승만 동상을 파괴하고 새끼줄을 동상에 묶어 길거리로 끌고 다녔다. 4. 19 이후 희생자는 사망 186, 부상 6259명이었다. 이기붕과 박마리아 이강석은 28일 새벽 540분 경 일가 전원이 자살한다. (세상에, 몰랐는데 2011년에 이승만 동상을 다시 올렸군요) 



 

427일 허정 과도 정부가 들어선다. 615일 내각제 개헌안을 통해 양원제가 채택된다. 7. 29 총선은 민주당의 대승으로 끝났다. 민주당은 민의원 재적의원 233명 중 175(75.1%), 참의원 재적 57명 중 31(53.4%)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둔다. 민주당은 81개 선거구에선 신구파가 동시에 출마할 정도로 신파와 구파로 갈려 무한 내분 상태였다.

 

812일 민, 참의원 합동회의는 윤보선을 제 4대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윤보선은 장면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한다. 신구파의 갈등이 첨예화되자 구파는 신당 발기를 결의, 이후 신민당으로 발족한다.

 

장면은 미군측과 군대와의 사전 협의를 거치지 않고 ‘10만 감군 계획을 발표한다. 미국이 즉각 반발하자 감군 계획은 폐기된다. 910일 김종필과 김형욱 등 육사 8기생 중령 11명은 국방장관 현석호를 방문해 정군을 단행할 것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이들은 이날 저녁 충무장이라는 음식점에서 쿠데타를 결의한다. 5.16 쿠데타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른바 충무장 결의였다.

 

미국의 대한 정책에 대한 권고를 담은 콜론 보고서59111일 미국 상원 외교분과위원회에 제출된다.

 

젊은 사람들은 희망을 잃고, 부자는 점점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가난해지고, 또 양심이란 것을 지키는 사람은 전부 소외되거나 배척되고,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만이 출세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불원 한국 사회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나는 어째서 오늘날 한국에 대한 보고서라고 착각했을까. 콜론 보고서는 또한 군사 쿠데타를 기대하는 미국 정계 일각의 기류를 반영하기도 했다. 일본 주재 미국 대사 라이샤워는 한국을 계승할 사람은 전쟁 마당에서 자라온 새로운 젊은 군인이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군 역시 부정부패가 극성을 부렸다. “별은 짚차 도둑, 말똥은 부식 도둑이란 말이 나돌 정도였고, 죽어나가는 건 사병들이었다. 휴가 나온 사병들이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유는 배가 고파서였다. 군의 부정부패는 정부 정책의 문제기도 했다. 심지어 준장 월급만으로도 생계 유지가 어려웠다.

 

박정희 다카키 마사오 오카모토 미노루

 

박정희는 19171114일 오전 11시경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의 금오산 자락에서 아버지 박성빈과 어머니 백남의의 5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백남의는 박정희를 낙태시키려고 온갖 민간요법을 총동원하였다고 한다. 간장 한 사발 마시기, 밀기울 끓여서 마시기, 섬돌에서 뛰어내리기, 자작더미 위에서 곤두박질치기, 수양버들강아지 뿌리 달여 먹기, 디딜방아의 머리를 배에 대고 뒤로 자빠지기, 뒷동산에 올라가 밑으로 뒹굴기 등등 해보지 않은 방법이 없을 정도였다고. , 한 가지 방법이라도 통했더라면.

 

박정희는 긴 칼 차고 싶어서만주군관학교에 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는 혈서를 보내, 404월 만주군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한다. 박정희는 444월엔 일본 육사까지 졸업한다. 박정희는 일본 육사 시절 이름을 다카키 마사오에서 오카모토 미노루로 개명한다. 박정희는 447월 일본 만주군 소위로 부임해 칼 차는 기쁨을 누린 것도 잠시, 곧이어 해방을 맞는다. 박정희는 465월 중순 거지꼴로 고향에 돌아온다. 4개월간 무위도식하던 박정희는 94일 조선경비사관학교 제 2기생으로 입학한다. 이후 박정희의 군대생활은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4881일 소령으로 승진한 박정희는 10월 여순사건이 터지자 우습게도 토벌사령부에 작전장교로 차출된다. 당시 박정희는 군부 내 남로당 우두머리였다. 숙군작업의 와중 1111일 체포된다. 해방정국에선 공산주의가 우세였다. 최상천은 이렇게 말한다.

 

박정희는 절대 대세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일생을 통해 단 한 번도 정의로운 소수에 참여하거나 동조한 적이 없었다. 사회적 약자의 편을 든 적도 없다. 대세에 편승하더라도 그냥 끼어드는 정도가 아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핵심부에 들어갔다......얼마 후 그는 좌익의 사회적 주도권을 정확하게 읽어냈다. 조선국방경비대까지 좌익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눈에는 사회주의 승리가 요지부동의 대세로 보였다.”

 

- 최상천, <알몸 박정희>

 

만주군에서 광복군으로 변신했던 박정희는 좌익으로 변신했다가 사형을 당할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된다. 박정희는 숙군 내 남로당원의 명단을 모두 털어놓고 만주군 선배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박정희의 배신으로 사관하교 중대장 시절 동료들과 생도들이 주로 처형된다. 김영수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어떤 인간으로 하여금 단순히 생존을 위해 열 번씩 자신의 신념을 버리도록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영혼을 파괴할 것이다. 특히 김창룡의 조건은 박정희가 어떤 인물을 목전에서 지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때 동지거나 친구였던 누군가에게 죽음을 선고하라는 의미였다.....그것은 이념과 친구를 함께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더 큰 대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어떤 상황에서는 최악의 생존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이었다. ”

 

김종필은 사병으로 지원 입대했다가, 탈영했다가, 몇 개월 후 교도대 졸병으로 들어갔다가 육사 8기로 들어간 별난 케이스였다. 박정희가 근무하던 육본 정보국 전투정보과에 육사 8기로 졸업한 15명의 신임 소위들이 배속된다. 이들 중 한 명이 김종필이었다.

 

김종필은 8기생 중심으로 대한음주당을 만들고 박정희를 당수로 삼아 거의 매일 막걸리를 마셨다.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의 큰 딸 영옥은 51, 김종필과 결혼한다. 박정희에게 현역 복귀의 절호의 기회가 왔다. 6.25가 터진 것. 박정희는 장도영에게 눈물로 호소해 육군 소령으로 복직한다. 박정희는 진급을 거듭, 55년 강원도 인제 5사단장으로 발령 받는다. 당시의 직속 상관은 3군단장 송요찬이었다. 박정희는 52, 59년 쿠데타를 기도했지만 여의치 않아 다음 기회를 노린다. 박정희는 60년 초부터 4월까지 20여회에 걸쳐 쿠데타를 위한 모임을 갖는다. 박정희는 58일을 기해 또 다시 쿠데타를 획책하지만 4. 19 혁명으로 유예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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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2 0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2 0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개와 웃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고재운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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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과소설가가 있고 고양이 과소설가가 있다. 하루키는 고양이 과소설가다. 그러고보니 생긴 것도 고양이 닮았다. 전생에 고양이 였으려나. 사람이라도 구한 것일까. 인간으로 환생해 고양이 같은 글로 부와 명성을 얻었으니! (개의 시대가 가고 고양이의 시대가 도래했다. 최근에 가장 인기 있는 동영상은 고양이 동영상이라지.) 




마루야마 겐지는 개 과소설가다. 마루야마 겐지는 도베르만을 닮았다. 글도 그렇지만 하는 짓도 영락없이 사냥개다. 마루야마 겐지는 어릴 때 개에 물린 적이 있다고 한다. ‘개 트라우마로 인해 개를 무서워할 법도 한데, 마루야마 겐지는 오히려 개에 복수할 기회만을 기다려왔다고 한다. 어느 여름 밤, 뜻밖의 기회가 왔다. 개 한 마리가 마루야마 겐지를 향해 짖으며 다가온 것. 눈치 없는 개 같으니라고. 하필 고른 인간이 마루야마 겐지라니.


 

단숨에 옆구리를 구두 끝으로 걷어차 버렸다. 개는 금세 기가 꺽이고 말았다. 그런데도 나는 목줄을 잡고 세게 끌어당겨서는 맨주먹으로 머리를 마구 두들겨 패 주었다. 전신주에 내동댕이치려고 한 순간, 개 주인집 불이 켜져 쏜살같이 도망쳐 왔다. ” 

 


뭔가 마루야마 겐지 답다. 개에 대한 복수심을 키워온 사람이 개를 키워도 되는 것일까. 마루야마 겐지는 수십 마리의 개를 키워온 일화를 이 책에 담았다. 몇 달전, 옌도 슈사쿠의 에세이를 보며 데굴데굴 굴렀는데, 그 이후로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웃었던 것 같다.

 

고양이한테도 허구헌날 공격당하는 온순한 셰퍼드 맥, 어느날 시바이누 종의 사스케가 겐지 집으로 오게 된다

맥과 사스케의 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사스케는 비굴한 자세까지 취하지 않았지만, 선배에 대한 예의는 제대로 알고 있어 꼬리를 흔들어 인사를 했다. 맥도 조용히 꼬리를 흔들고 온화한 눈빛으로 후배를 바라보았다. 둘은 오랫동안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윽고 맥이 마당 구석으로 천천히 걸어가더니 내가 던져 둔 야구공을 물고 왔다. 그러고는 공을 사스케 앞에 놓고 앞발로 슬며시 밀어주었다. ”이 공 가지고 놀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아내도 놀랐고, 그리고 감동했다.” 

 

겐지의 첫 개, 셰퍼드 조로, 디스템퍼로 사망


고양이한테 공격당하는 개 , 셰퍼드 맥.



형으로부터 받은 시바이누 사스케.


아프간하운드 바롱


세인트버나드 조르바


검은 차우차우 구마


아이리시 울프하운드 장고


도사견 류


검은 래브라도레트리버 구로


검은 차우차우 돈구리


 

숱한 개들을 기르면서 마루야마 겐지는 개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개를 기르지 않았다면 어떤 인간이 되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유감스럽게도 그렇다고 해서 내가 훌륭한 애견가였던 것은 아니다. 개를 이해해 주는 마음은 부족했다. 이상적인 개를 찾는 일에만 열중해 정작 자신이 이상적인 주인이 되는 일을 잊고 있었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

 

이상적인 주인이 되고자 했기 때문일까. 마루야마 겐지는 자신이 키웠던 개에 관한 꿈을 자주 꾼다고 한다

이상하게도 꿈속에서 만나는 그의 개들은 웃는다고.

 

내 꿈에 나타난 그 개들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웃고 있었다.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은, 다른 뜻이 없이 충실하고 한없이 밝고 활기 넘치는 웃음이었다. 이런 꿈을 꾼 다음날은 기분이 좋다. 기운이 막 생긴다. 일을 척척 해 나가고, 자전거를 탈 때도 평소와 달리 몸 상태가 좋다. 무엇보다 나 또한 하루 종일 속으로 웃고 있다.”

 

웃는 개가 상상 되어 나도 자꾸 웃음이 터진다.

마루야마 겐지 덕에 개와 함께 실컷 웃었다.


, 개 키우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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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1 09: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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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1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1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1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1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1 09: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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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vis 2016-08-01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침묵을 쓴 그 과묵하고 진지한 작가가 배꼽빠지게 웃겨주는 그 에세이의 제목을 저에게도 좀..

시이소오 2016-08-01 09:33   좋아요 0 | URL
<인생에 화를 내 봤자>네요.

아, 숨을 못 쉴 정도로 웃었어요. ^^

clavis 2016-08-01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웃었다는 얘기만 들었는데도 웃기네요ㅋㅋㅋ

시이소오 2016-08-01 09:36   좋아요 0 | URL
이렇게 쉽게 웃기는 방법이 있었군요. ㅎㅎ

clavis 2016-08-01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일상이 건조해서요

시이소오 2016-08-01 09:40   좋아요 1 | URL
제가 윤택하게 해드렸습니다.

기억하세요 ㅋ ^^

stella.K 2016-08-01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집도 3년 정도만 빼고 개와 함께 하지 않았던 적이 없는데
개에 관한 책을 써 본 일이 없어요. 그런데 겐지는 썼단 말이죠. 음..
사람도 개 과가 있고 고양이 과가 있다고 하던데
참고로 저는 개 같이 생겼습니다. 뭐 별로 알고 싶지 않으시겠지만...ㅋㅋ

시이소오 2016-08-01 11:31   좋아요 0 | URL
알고시포요. 달마시안 닮으셨을까요?

저도 개 과입니다.
박그네스런 것들만 보면 짖습니다. ㅋ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1 12:54   좋아요 0 | URL
마르치스 ?

깊이에의강요 2016-08-01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 2016-08-01 19:35   좋아요 0 | URL
강요님, 오랜만에 오셔서 ㅋ 한 마디만 남기고 가버리시다니 야속해요. 그래도 반갑네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6-08-01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묘한 비유입니다.ㅁ ㅏ자요. 갠지는 개죠(이거 나쁜 의미가 아니라 ). 하루키는 고양이, 갠지`는 개지`요.

시이소오 2016-08-01 19:32   좋아요 0 | URL
갠지는 개지요 ㅋ ㅋ ㅋ ㅋ ㅋ ㅋ ㅋ

cyrus 2016-08-01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인트버나드를 보면 정준하의 얼굴이 먼저 떠올려요. ㅎㅎㅎ

시이소오 2016-08-01 19:33   좋아요 0 | URL
ㅋ ㅋ ㅋ ㅋ ㅋ ㅋ
닮았네요 ^^

깊이에의강요 2016-08-01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좀 오랜만이죠ㅎㅎ
시이소님 여전하셔서 넘 좋고 반가워요^^

시이소오 2016-08-01 20:41   좋아요 0 | URL
강요님, 다시 오실날을 손꼽아 기다렸어요,,
엉 ~~~~
기쁨의 눈물^^

깊이에의강요 2016-08-01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를 기다려 주셨다니~~
영광인데요~^^

시이소오 2016-08-01 21:24   좋아요 0 | URL
아, 어떻게 제가 기다리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이토록 잔인하시다니ㅋ ㅋ

2016-08-02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8-02 11:01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오랜만에 뵙네요. ^^ 겐지 옹 재밌는 분이죠 ㅎ ㅎ

더위에 몸 잘 챙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