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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삶을 더 유의미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죽음을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완전히 유의미한 삶을 위해서는 양뿐 아니라 질이 필요하다. 진화의 개념들은 삶이 유의미하다거나 유의미해지는 중이라거나 점점 더 유의미해진다는 주장을 뒷받침 할 수 있을까? 다윈에 따르면 최근의 생물들은 과거의 생물들보다 더 고등할 수밖에 없다. 다른 종들보다 어떤 식으로든 유리했기 때문에 최근의 생물은 생존투쟁에서 살아남은 것이 아닌가.



 

스티븐 제이 굴드는 생물학적 진보에 대해 격렬히 비판한다. 진화는 무작위적 운동이다. 생물들이 더 복잡해진다고 더 우월해지는 것은 아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진보에 대해 긍정적이다. 다윈의 견해는 오히려 중립적이다. 다윈에 따르면 생물들이 복잡해짐에 따라, 생물들은 자신의 복잡성을 증가시키는 새로운 수단들을 개발했다. 그러나, 단순한 동물들이 복잡해지는 필연적 경향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보적 진화에 대한 최고의 권위자는 마이클 루즈다. 루즈에 따르면 진화와 진보는 서로 얽혀있고 거의 뗄 수 없는 관계다.

 

월 듀런트 : 문화적 진보에 대한 한 역사가의 견해

 

듀런트는 문화적 진보를 옹호한다. 그는 니콜라 드 콩도르세의 예를 든다.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이 최후의 희망으로 버티는 지경에 몰리고, 개인적으로 귀족의 특권과 재산을 모두 허무하게 잃고, 온 유럽의 젊음이 더 나은 세계에 대한 희망을 걸었던 그 대혁명이 무차별적 의심과 공포를 양산하는 상황에서 낙담과 침울의 서사시를 쓰는 대신에 하필이면 진보의 찬가를 썼다는 사실은 나를 늘 새삼 경탄하게 한다. 사람이 인류를 그토록 믿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어쩌면 그 후로 영영 다시는 없을 것이다. ”

 

장 피아제 : 지식은 진보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피아제는 동화와 조절을 평형화라고 부른다. 평형화란 유기체와 물리적 인지적 환경 사이에서 최적의 평형 상태가 산출되는 과정이다. 생물학적 진화에서 평형화의 결과는 유기체가 물리적 환경에 더 잘 적응하는 것, 곧 유기체와 물리적 환경 사이의 평형화가 더 잘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지적 진화에서 평형화의 결과는 유기체가 인지적 환경에 더 잘 적응하는 것, 곧 유기체와 인지적 환경 사이의 평형화가 더 잘 이루어지는 것이다.

 

로버트 라이트 : 게임이론, 진화, 삶의 의미

 

 

라이트는 생물학적 문화적 진화를 이끌고 좌우하는 주요 원리는 넌제로섬이라고 주장한다. 넌제로섬이란 게임이론에서 양쪽 참가자가 모두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개체들은 점점 더 복잡한 정보를 처리하면서 서로 더 기꺼이 협력하게 된다. 사회의 복잡성이 증가함에따라 협력을 통해 성과를 거두는 능력도 증가한다. 라이트는 샤르댕과 유사하게 지구적 의식의 출현이 임박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스티븐 핑커 : 라이트의 진보주의에 대한 비판



 

핑커는 문화적, 도덕적 진보가 일어났다는 라이트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러나 진화에 목적이나 목표, 운명을 가졌다는 의견에 반대한다. 모종의 진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진보가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대니얼 데닛 : 만능 산()으로서의 진화

 

데닛은 진화를 모든 것을 갉아먹는 만능 산에 비유했다. 세포로부터 의식과 우주까지의 만물은 진화적 관점에서 가장 잘 설명된다는 뜻이다. 형이상학, 인식론, 종교, 삶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데닛은 위대한 우주적 피라미드라고 표현한다. 맨 위의 신에서부터 아래로 정신, 설계, 질서, 카오스를 거쳐 무에 이르는 위계. 신은 궁극의 스카이훅”(아래쪽의 구조물을 위에서 잡아당겨 유지시키는 갈고리)이다. 기적적인 설계의 원천. 반면 진화는 피라미드의 방향을 뒤집어서 설계를 상향식으로, 테닛이 크레인이라고 부르는 것들에 의해 설명한다.

 

진화는 삶의 의미를 도출하기 위해 신적인 스카이 훅따위는 필요치 않는다. 삶의 의미는 바닥에서부터 창조되어야 한다. 과거에는 생명도 없고, 정신이나 의미도 없었다. 의미는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정신이 발전함에 따라서 의미는 아래로부터 번져 올라온다. 의미는 완성된 의미가 아니지만, 그 의미는 정신이 발전함에 따라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마이클 셔머 : 삶의 의미는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다.

 

잡지 <스켑틱>의 편집장

 

셔머는 우리는 이 삶이 유일한 삶인 것처럼 살면서 타인들과 매 순간을 가장 중요한 대상으로 대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스티브 스튜어트 윌리엄스 : 다윈과 삶의 의미

 

생물학에는 목적론적 대답이 없고, 역사적 대답만 있다. 진화론에 따르면,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우리가 진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목적을 위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삶에 궁극의 목적이 없더라도, 삶을 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더라도 삶은 여전히 좋을 수 있다. 삶의 의미가 외부에서 부여되는 것이 아니어도, 우리는 삶에 의미를 부여할 자유가 있다. 만일 우리가 목적들을 가진다면 우주의 일부도 목적을 가진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우주를 숙고할 때, 우주의 일부는 의식이 있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우주가 점차 자기의식을 획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 스튜어트 : 진화하는 우주 안에서 삶의 의미

 

진화는 협력을 선호한다. 또한 규모가 큰 조직일수록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더 뛰어나다. 방해가 없다면, 지구적 조직과 은하적 조직이 발생할 것이다. 더불어 지능도 향상되어 물질과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경지에 다다를 것이다.

 

스튜어트에 따르면 진화는 대체로 자발적으로 진행해왔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우리가 지휘하거나 조정해야만 계속된다. 스튜어트는 이를 의도적 진화라고 부른다. 수동적 수용자에서 능동적 참여자로의 이 같은 이행은 진화의 지속을 위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인류가 이 위대한 진화적 이행의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산출하는 역할을 떠맡은 셈일 것이다.”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 : 보편적 진보적 진화

 

샤르댕에 따르면 진화는 의식의 복잡성을 증가시키고, 의식 없는 지권을 반쯤 의식있는 생물권으로, 결국엔 의식 있는 정신권noosphere”으로 변모시킨다. 정신권이란 지구를 둘러싼 생각의 층이며 인류의 집단적 의식을 포함한다. (오늘날 몇몇 논평자들은 인터넷을 테야르가 예언한 정신권의 부분적 실현으로 간주한다.)

 

진화는 이론일까, 시스템일까, 또는 가설일까? 진화는 이것들을 훨씬 능가한다. 진화는 모든 이론, 모든 가설, 모든 시스템이 존중해야 하는 조건이며 향후 그것들이 생각 가능하고 참되려면 반드시 충족해야 하는 조건이다. 진화는 모든 사실들을 비추는 빛이며 모든 선들이 따라야 하는 궤적이다. ”

 

정신권 또는 정신세계의 힘과 영향이 계속 증가한다면 언젠가 오메가 포인트에 이를 것이다. 오메가 포인트란 지고의 의식, 곧 신을 의미한다. 오메가 포인트가 진화의 숭고할 만큼 적합한 결과이려면 반드시 사랑의 연합이어야 한다.

 

오직 사랑만이 살아있는 존재들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그것들을 통일할 수 있다. 사랑만이 살아있는 존재들 속의 가장 깊은 것으로 그것들을 사로잡고 연합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일 경험하는 사실이다. 연인들이 상대방 안에서 자신을 상실했다고 말할 때가 아니라면, 연인들은 언제 서로를 가장 완벽하게 소유한 상태에 이르겠는가? 실제로 사랑은 매순간 우리 주변의 모든 곳에서, 두 사람 사이나 여러 사람 사이에서, 전체화함으로써 개인화하는 마법같은 위업을, 모순적이라고 하는 그 위업을 성취하지 않는가? 사랑이 매일 작은 규모에서 그 위업을 성취할 수 있다면, 언젠가 세계 규모에서 그 위업을 성취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우주의 통일성의 기반은 물질이나 에너지가 아니라 영 혹은 정신이다. 영과 정신은 진화를 추진하는 힘이다. 테야르는 우주의 진화에 관한 이 같은 포괄적인 서사시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했다. 그 서사시에서 모든 진화의 종착점은 최고의 좋음이다.

 

자크 모노 : 우주적 의미를 추방하기

 

샤르댕에 대한 반론을 담은 책은 유명한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이다.

 

 

진화가 이룩한 거대한 체계의 뿌리에 있는, 철저히 자유롭지만 맹목적인 순수 우연, 현대생물학의 이 핵심 개념은 더 이상 가능하거나 심지어 상상 가능한 가설들 중 하나가 아니다. 오늘날 그 개념은 관찰되고 검증된 사실에 부합하는 유일한 가설이다. 이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언젠가 바뀔 것이라고 추측할 또는 희망할 근거는 없다. ”

 

모노가 보기에 진화 과정은 명백히 비목적적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운명이 아니다. 우리는 우연한 사건이다. 앎의 윤리는 자기부과적이다. 앎의 윤리는 어쩌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다.

 

고대의 약속은 산산조각났다. 마침내 인간은 우주의 으스스한 광활함 속에서 자신이 외톨이임을 안다. 자신이 그저 우연히 발생했음을 안다. 인간의 운명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인간의 의무도 마찬가지다. 위쪽의 왕국, 또는 아래쪽의 어둠. 선택은 인간의 몫이다.”

 

줄리언 헉슬리 : 진화를 지휘하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얻는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헉슬리 가의 일원. 올더스 헉슬리가 형이다.

 

헉슬리에 따르면 현대 세계에서 의미를 깨닫는 최선의 길을 제공하는 것은 과학이다. 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미래가 과거보다 더 좋을 것이라고 희망할 근거가 있다. 진화생물학은 인간의 운명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들을 실현하는 쪽으로 진화를 이끌 수 있는 행위자다. 이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다.

 

진화과정은 무기적/우주적 진화에서 출발하여 유기적/생물학적 진화를 거쳐 이제 심리사회적/문화적 진화에 이르렀다.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헉슬리의 삶에 의미를 제공했다.

 

진화론적 인본주의 덕분에 나는 우리가 태어난 이 낯선 우주를 외경심과 궁금증을 동반한 살아있는 대상이자 지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볼 수 있었다. 또한 나의 경이감과 궁금증이 이 우주에서 중요하고 가치 있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경험하는 세속적 기쁨과 만족, 공포와 비참을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실현의 개념과 연결할 수 있었다. 가능성들의 점진적인 실현이라는 진화론적 인본주의의 개념은 개인적 윤리의 발전으로부터 대규모 진화까지 모든 유형의 지향성 과정들을 평가하는 공통의 잣대이며, 긍정적 태도와 신념을 유지하고 음흉한 적과 같은 부정과 절망의 정신에 맞서기 위한 탄탄한 기반을 제공한다.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노력과 창조적 활동과 즐거움의 긍정적 의미를 승인한다.

 

어떤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인데,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한때 내가 보기에 추상적이며 고립된 구역들에 머물렀던 지적인 사변과 영적인 열망을 구체적 현실 속의 유의미한 자리로 복귀시켰다. 또한 그럼으로써 내가 자연과 하나라는 느낌을 회복시켰다.“

 

 

에드워드 윌슨 : 종교로서의 진화

 

 

윌슨은 종교적 신화와 관행을 해부한 끝에 종교적 믿음을 품는 성향은 인간 정신 속의 가장 복잡하고 강력한 힘이며 십중팔구 인간 본성의 근절할 수 없는 한 부분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종교는 과학과 결합할 것이다. 진화는 새롭고 더 나은 종교적 신화의 토대일 수 있다.

 

저자는 테야르, 헉슬리, 윌슨등의 관점을 받아들여 삶은 진화하기 때문에 유의미하며, 우리는 이 의미의 진화에서 핵심역할을 하기 때문에 유의미한 삶을 산다는 결론짓는다. 그러나 진화가 야기한 세상의 온갖 고통과 참상 앞에서 마냥 미래를 긍정할 수 있을까.

 

저자는 자신이 낙관론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미국영어 유산사전>은 낙관론을 가능한 최선의 결과를 예상하거나 한 상황의 가장 희망적인 측면들에 시선을 고정하는 경향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희망은? <미국영어 유산사전>희망하다를 이렇게 정의한다. “실현을 기대하면서 무언가를 바라다. 확신 혹은 기대를 품고 미래를 내다보다.” 저자는 희망도 거부한다.

 

낙관론도 아니고 희망도 아니라면? 삶이 유의미하기를 바라는 것은 삶이 유의미하다고 희망하는 것이 아니다. 바람과 열망은 기대를 함축하지 않는다.

 

알프레드 테니슨 : 오디세우스의 몸부림

 

어쩌면 이것은 몸부림일까.

 

나는 내가 만난 모든 것의 한 부분

그러나 모든 경험은 아치이며

여행해보지 못한 세계가 그 아치를 통해 번득이네.

내가 움직이면, 그 세계의 변방은 영원히 영원히 멀어지지

멈춘다는 것은 얼마나 따분한가, 종결한다는 것,

불타오르지 못하고 녹슨다는 것, 쓸모 있게 빛나지 못한다는 것!

삶이란 단지 숨쉬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

한결같던 영웅적 심성들은

시간과 운명에 의해 약해졌지만, 우리는 강하다네.

힘쓰고, 추구하고, 발견하고, 포기하지 않을 의지가 있으므로. “

 

저자에 따르면, 율리시스에게 의미란 몸부림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 희망을 거부함


 

 

카잔차키스는 니체와 베르그손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카잔차키스는 보편적인 엔트로피에 맞서 싸움으로써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고 선언하고 이 생각을 신과 연결했다. 그에게 신이란 기본 물질을 시스템으로 조직하여 점점 더 미묘하고 발전된 형태의 존재들과 의식들을 표출할 수 있게 해주는 반엔트로피적 생명력을 의미했다.

 

언제가 목표에 도달하거나 닻을 내리거나 집에 도착하리라는 기대나 희망없이 정직하고 용감하게 분투하기. 율리시스와 마찬가지로 카잔차키스의 유일한 안식처는 추구 그 자체에 있었다. 삶의 의미는 추구와 몸부림에서 발견된다.

 

우리는 희망과 절망을 모두 넘어설 필요가 있다. 낙원에 대한 기대와 지옥에 대한 공포는 모두 우리가 마주한 것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한다. 우리 마음의 참된 고향은 의미 추구 그 자체다. 우리는 어떤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의미를 창조하기 위해 용감히 싸우는 전사가 되어야 한다. 심연을 두려워하지 말고 용감히 응시하면서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삶을 온전히 책임지는 것에서 기쁨을 발견한다. 비극앞에서도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삶은 본질적으로 몸부림치는 싸움이다. ”

 

 

앙드레 모루아 : 삶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기

 

모루아는 삶의 의미란 우리의 생동하는 싸움에서, 삶의 경험과 활동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모루아의 통찰은 카뮈의 원조격이다. 카뮈는 추상적 관념들이 우리를 세계로부터 멀리 떼어놓는다고 본다. 의미를 얻기 위해서는 평범한 장소로, 우리 주변으로, 과거에 우리가 일상이라고 불렀던 특별한 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 하늘과 하늘을 향한 이 얼굴들 사이에는, 신화, 문학, 윤리, 종교를 매달 고리가 없다. 다만 돌들과 살과 별들, 그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진실들만 있다.”

 

윌 듀런트 : 모든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기


 

듀런트는 우리가 더 큰 삶을 위해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묻는다. 만일 우리가 개인들이 아니라 생명체 속 세포들이라면, 생명체를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죽는다. 죽음은 쓰레기를 제거하고, 새로운 생명이 창조됨으로써 죽음을 극복한다. 이 같은 생명의 유구화는 삶에 의미를 제공한다. 개체는 죽어도 삶은 끝없이 계속된다.

 

요컨대 삶의 가장 단순한 의미는 즐거움이다. 경험 그 자체의 유쾌함, 건강의 유쾌함, 근육과 감각, 혀와 귀와 눈의 순수한 만족이다. 만일 아이가 어른보다 더 행복하다면, 그것은 아이가 몸을 더 많이 가지고 영혼은 더 적게 가졌으며 철학보다 자연이 더 먼저임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팔다리를 풍부하게 놀릴 뿐, 팔다리의 의미를 묻지 않는다. ....설령 아름다운 순간들 외에는 삶에 의미가 없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렇게 빗속을 터벅터벅 걷거나, 바람에 맞서거나, 순백의 설원에 발자국을 남기거나, 노을이 밤으로 바뀌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삶을 사랑할 이유로 너무나 충분하다.”

 

사랑은 개인을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와 연결한다.

 

나는 전체의 한 부분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낙담하지 않는 것을 본다. 많은 동료들과 공놀이를 하는 천한 무지렁이가 삶의 놀이에서 물러나 격리된 채 시들어가는 이 고립된 사상가들보다 더 행복하다.....우리가 자신을 살아있는 집단의 부분으로 여기면, 우리는 삶을 조금 더 충만하게 느낄 것이다.....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면 당사자 자신보다 더 크고 영속적인 목적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사물이 더 큰 전체의 부분으로서의 관계를 통해서만 중요성을 가진다면, 비록 모든 삶 일반에 형이상학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를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어떤 특수한 삶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 삶의 의미는 그것이 더 큰 무언가와 맺은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들 딸을 둔 아버지에게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라.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이라는 아주 간단한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

 

듀런트도 사랑, 관계, 활동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최후의 국면에 나의 보물은 어디에 있을까? - 모든 것에.”

 

듀런트의 글은 감동적이다. 조르바처럼 웃고, 놀고, 사랑한다면 삶의 의미에 대해 물을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웃고 놀고 사랑하고 나면 또 다시 생각은 돌아온다. (조르바는 안 돌아오겠지. 끊임없이 웃고 놀고 사랑하다 죽겠지. 모든 사람이 조르바처럼 살면 어떻게 될까? 천국일까? 아마 지옥이 되지 않을까. 모두가 조르바처럼 자신의 욕망만을 추구한다면 인간들 사이에서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환타지 소설이다. , 순진한 카잔차키스!)

 

작가는 아래와 같은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삶이 제공하는 제한된 즐거움과 의미를 누리면서 인간의 한계들을 제거하기 위해 애쓰고 부정적인 생각들을 최선을 다해 억눌러야 한다. 러셀은 95세의 나이에 제목이 없는 한 장 짜리 원고를 남겼다. 러셀의 마지막 원고였다.

 

내 삶 전체를 돌아보면서 그 삶이 어떤 유용한 목적에 기여했는지 혹은 온통 부질없는 짓에 매달렸는지 물을 때가 왔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미래를 모르는 사람은 대답할 수 없다

 

답할 수 없다고 했음에도 러셀은 펜을 계속 놀렸다.

 

우리의 행성이 무엇이고 무엇일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라. 현재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고통과 굶주림, 지속적인 위험, 사랑보다 더 많은 증오가 있다. 행복한 세상이 존재할 수 있다. 경쟁보다 협동이 더 많이 눈에 띄는 곳, 지루한 일은 기계들이 하는 곳, 하는 일이라고는 죽이는 것밖에 없는 흉측한 기계들이 들어설 자리를 위해 사랑스러운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 곳, 시체들의 산더미를 생산하는 것보다 즐거움을 촉진하는 것이 더 존중받는 곳.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마라. 불가능하지 않다. 다만 그런 세상은 고문을 가하기를 바라기보다 그런 세상을 더 많이 바라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 각자 안에 갇힌 예술가가 있다. 그를 풀어주어 만방에 즐거움을 퍼뜨리게 하자. “

 

 

이 글을 쓰고 하늘을 봤다.

이토록 푸르를 수가.

그 순간 나는 삶의 의미를 감각했다.

 

삶은 고통의 바다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있음을 망각하지 않고,

일상에서 소소한 기쁨들을 발견할 때

삶은 무의미하지 않다.

 

아모르 파티!

내 운명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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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01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팔공산에 있는 예비군 훈련장 하늘이 푸른 게 좋았습니다. 바람이 많이 불고, 훈련이 귀찮은 것만 빼면 괜찮은 오후를 보냈습니다. ^^

스티븐 제이 굴드이 언급되는 글 위에 사진은 누구입니까? 수염이 없어서 스티븐 제이 굴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시이소오 2016-09-01 13:44   좋아요 0 | URL
아, 스티븐 제이굴드와 앙숙인 리처드 도킨스죠 ^^

cyrus 2016-09-01 13:57   좋아요 0 | URL
다시 보니까 그렇네요. ㅎㅎㅎ

시이소오 2016-09-01 14:06   좋아요 0 | URL
이제 좀 늙으셨죠.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이미 죽었으니 그래도 진화하신 건 아닐지 ㅋㅋ

초란공 2016-10-04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크 모노를 읽은 기억이 있는데 제목 외에는 기억이 안나네요. 이해가 좀 간다면 상당히 인상적인 책일 것 같다`라는 생각만 했던 것 같군요. ㅋㅋ

시이소오 2016-10-04 22:50   좋아요 0 | URL
우연과 필연이겠죠 ? ㅎㅎ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을 성찰할 때 슬픈 점은, 많은 이들이 고요히 길을 잃은 상태로 삶을 일관한다는 것이다.....그들은 말하자면 자신을 멀리 떠나서 살고 그림자처럼 사라진다. 그들의 비도덕적 영혼은 바람에 날려가고, 그들은 영혼의 불멸에 관한 질문들에 동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기도 전에 이미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

 

빈센트 배리 : 죽음이 삶의 의미를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킬까?

 

톨스토이와 쇼펜하우어는 죽음이 삶을 무의미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반대자들은 오히려 죽음이 삶을 유의미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죽음이 삶을 유의미하게 만든다는 논증들

 

삶을 위해 죽음이 필요하다 ; 죽음이 없으면 삶 속에서 발전이 없다.

죽음은 삶의 주기의 한 부분이다 ; 죽음은 삶이라는 연속체의 일부다.

죽음은 궁극적 긍정이다 ; 죽음과 마주할 때 우리는 삶의 궁극적 가치를 깨닫는다.

죽음은 헌신과 참여의 동기다 : 삶의 유한성이 없다면, 우리가 가치있는 일을 할 동기는 약해질 것이다. 게다가 불멸은 지루할 수도 있다.

죽음은 창조성을 북돋는 자극이다 :

죽음은 사회적으로 유용하다

 

배리에 따르면 죽음이 좋은지 나쁜지는 불확실하다. 오직 삶이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철학적 생각을 포함할 때만, 삶은 가치 있을 수 있다.

 

스티븐 로젠바움 : 죽음은 나쁘지 않다 에피쿠로스를 위한 변론

 

우리는 죽어있음을 경험할 수 없다. 살아 있을 때는 죽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로 죽어있음은 죽은 사람에게 나쁘지 않다.

 

오스왈드 핸플링 : 삶의 의미와 죽음에 대한 불가지론

 

죽음은 전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다.

 

조지 피처 : 죽어 있음은 불행이다.

 

피처에 따르면 죽은 사람은 죽은 뒤에도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죽음에 의해 해를 입는다.

 

스티븐 루퍼 : 소멸은 끔찍한 불행이다

 

죽음은 우리의 욕망을 좌절시키므로 불행이다. 죽음을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열정적으로 살고 현실적 목표들을 성취하는 편이 낫다.

 

데이비드 베네타 : 아예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은 이유

 

베네타에 따르면 출생은 항상 해악이다. 따라서 태어나지 않는 편이 더 낫다.

 

내 견해의 함의 하나는 우리 종에게는 멸종이 더 선호할 만하다는 것이다.”

 

존 레슬리 : 우리는 삶의 소멸을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인류의 멸종은 슬프거나 가여운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1) 슬퍼할 사람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또는 2) 삶이 워낙 나빠서 소멸을 더 선호할 만하기 때문이다.

 

레슬리는 멈춰서 숙고하라고 말한다. 삶은 본래 좋기 때문에 인류 멸종의 논증은 배척해도 된다.

 

제임스 렌먼 : 불멸은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불멸하게 되면 불멸이 우리를 다른 유형의 존재로 바꿔놓아 인간성을 잠식할 수도 있다. 또한 불멸의 삶은 지루할 가능성이 있다.

 

닉 보스트롬 : 폭군의 우화

 

 

보스트롬은 <폭군의 우화>를 통해 용에 의해 황폐화된 행성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성직자들은 사후의 또 다른 삶, 용의 괴롭힘이 없는 삶을 약속함으로써 용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려 애썼다. 다른 연설가들은 용이 자연 질서 속에서 고유한 자리와 먹이를 얻을 도덕적 권리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용의 뱃속에서 종말을 맞는 것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의 한 부분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심지어 용은 인구를 소수로 유지하기 때문에 인간 종에게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주장들이 근심에 찬 영혼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을 발휘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대다수 사람들은 다가오는 참혹한 종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방식으로 대응하려 했다. ”

 

용이 끊임없이 공물을 먹어치우는 동안, 대다수 사람들은 싸우지 않고 불가피한 운명을 받아들였다. 용에게 잡아먹히는 과정을 연구하고 지연시키는 작업이 어엿한 산업으로 성장했고, 사회의 부의 큰 부분이 그 산업에 쓰였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일부 사람들은 언젠가는 비행 기계를 제작하고 원거리 무선 통신을 하고 심지어 용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다수는 이 주장을 무시했다. .....마침내 12년의 연구 끝에 왕은 용 살해용 미사일을 성공적으로 발사했다. 사람들은 행복해했지만, 왕은 그 연구를 더 일찍 시작하지 못한 것 때문에 우울했다. 수백만 명이 헛되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문명의 미래와 관련해서 왕은 이렇게 선포했다.

 

오늘 우리는 다시 아이와 같아졌다. 미래는 우리 앞에 열려 있다. 우리는 미래로 나아갈 것이며 과거보다 더 잘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제 때가 되었다. 세상을 바르게 하고 우리가 성장하고 우리의 실수에서 교훈을 얻을 때가, 더 나은 세상을 천천히 건설할 때가 되었다. ”

 

우리는 기술을 통해 죽음의 폭정을 극복하려 애써야 한다.

 

마이클리스 마이클, 피터 콜드웰 : 낙관론이 합리적이다

 

마이클리스 마이클과 피터 콜드웰은 낙관론을 지지하며 스토아철학을 예로 든다. 스토아주의는 바꿀 수 없는 것에 맞서 싸우기보다 그것을 끌어 안으라고 조언한다. 스토아죽의 적 태도는 불쾌한 것들에 무관심하거나 마음을 쓰지 않음을 뜻하지 않는다. 다만, 스토아주의자는 자신의 마음 씀에 한탄을 덧붙이지 않을 뿐이다. 스토아주의자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므로 아픔과 고통이 존재함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런 악들을 분개하지 않고 수용한다. 낙관론은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치명적인 병에 걸린 이후 흄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늘 사물의 나쁜 면보다 좋은 면을 보는 편이었다. 이런 정신적 성향을 소유한 사람은 연간 1만 파운드의 소작료를 받는 농장주의 자식으로 태어난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지금의 나 보다 더 많이 삶으로부터 초연하기는 어렵다. ”

 

나는 죽음에 맞서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죽음을 물리쳐야 할 용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죽음을 정복할 수 있을까.

 

과학

 

닉 보스트룸에 따르면, 발전한 문명들이 인공지능을 가진 개체들을 포함한 시뮬레이션을 창조했을 가능성이 있고, 만일 창조했다면, 그 시뮬레이션 속의 개체들이 바로 우리일지도 모른다.

 

만일 인류가 시뮬레이션 기술을 개발하고 사용할 수 있다면, 인류의 과거를 연구하기 위해 조상 시뮬레이션들을 가동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그 시뮬레이션 속의 조상들이 발전하여 다시 그들 나름의 시뮬레이션을 제작하여 가동할테고, 따라서 하위 시뮬레이션들이 무한정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원본 우주에 사는지, 아니면 무수한 시뮬레이션들 중 하나에서 사는지 알 길이 없으므로, 확률을 따졌을 때 우리는 시뮬레이션 속에 살고 있을 확률이 더 높다.

 

레이 커즈와일 : 우리의 정신을 컴퓨터에 업로드하기



 

커즈와일의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이른바 시간과 카오스의 법칙이다. 왜 일부 과정들은 빠르게 시작해 느려지는 반면, 다른 사건들은 느리게 시작한 다음에 빨라질까. 시스템 안에 카오스, 곧 무질서가 많으면, 두드러진 사건들 사이의 시간이 길다. 카오스가 감소하고 질서가 증가하면, 두드러진 사건들 사이의 시간이 짧아진다. “수확 가속의 법칙은 두 번째 현상을 서술하며 커즈와일의 논증에서 핵심적인 구실을 한다.

 

커즈와일은 나노기술을 써서 세계를 원자 수준에서 재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나노 기술의 최대 목표는 지능과 자기복제능력과 나노 규모의 대상들을 조작하는 능력들을 갖춘 나노 기계들일 것이다. 오늘날 주요 이론가들은 자기복제 능력을 지닌 나노봇의 실현 가능성을 증명했다.

 

커즈와일은 수확 가속의 법칙이 우주 전체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주의 다른 곳들에도 다양한 단계까지 진화한 생명이 존재한다고 추측한다.

 

존 설 : 커즈와일에 대한 비판

 

설 에 따르면 딥 블루는 체스를 이해하지 못한다. 설은 커즈와일이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컴퓨터와 실제로 의식이 있는 컴퓨터를 혼동했다고 비판한다. 의식을 모방한 컴퓨터에는 의식이 없다. 의식이 없는 컴퓨터에 우리 자신을 다운로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대니얼 데닛 : 로봇 의식을 위한 변론

 

데닛은 설에 반대하여 로봇이 의식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스 모라벡 : 로봇이 되기

 

모라벡에 따르면, 로봇은 의식을 가질뿐더러 감정을 가질 수도 있다. 로봇 시대가 도래하겠지만, 모라벡은 로봇의 노동이 인간의 삶을 더 쾌적하게 만들것이라 낙관한다. 우리의 로봇 후손들은 상상을 초월한 세계들에서 살 것이다.

 

찰스 루빈 : 기술적 멸종론에 대한 반론

 

루빈은 멸종론자들이 미래학자들에 반대하여 기계들을 파괴하자고 주장한다. 커즈와일과 모라벡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의 정신을 기술적 장치 속에 업로드한다는 건 인간의 진화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루빈은 컴퓨터에 우리 정신을 업로든 한 이후 우리 자신이 존속하는지 묻는다. 탈인간적 삶이 악몽일 수도 있지 않을까. 루빈은 기술적 발전을 제한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진화는 우리의 멸종을 재촉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의 멸종을 추구할 이유는 없다.

 

마셜 브레인 : 우리는 몸을 버리게 될 것이다.

 

비교적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는 몸을 버리고 훨씬 더 나은 가상현실 속에서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가상현실 속에서 우리는 비행기를 타지 않고 여행할 수 있고, 2천 년 전의 로마나 그리스를 방문할 수도 있고, 찰스 다윈과 대화하고 슈퍼맨의 삶을 사는 것도 가능하다. 어떤 시대, 어떤 장소라도 갈 수 있고, 황홀한 섹스도 가능하다.

 

미치오 카쿠 : 미래의 전반적인 비전



 

원자, 유전자, 컴퓨터에 대한 지식은 물질, 생명, 정신에 대한 통제력의 획득으로 이어질 것이다. 커즈와일, 모라벡과 마찬가지로 카쿠는 우리의 기술이 우리의 뇌를 대체하게 될 때, 새로운 기술적 뇌가 로봇 신체나 가상현실 속에서 존속하게 될 때, 우리는 일종의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변화는 인류가 다른 종으로 대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런 래니어 : 사이버네틱스 전체주의에 반대함

 

사이버네틱스 전체주의는 인간들에게 해를 끼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부유한 극소수가 거의 신에 가깝게 되고, 나머지 우리는 상대적으로 과거와 똑같이 머무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가 훨씬 더 발전하지 않는 한, 영생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할 금액이 매우 클 것이다. 견제없는 사이버네틱 전체주의는 다수의 인류에게 고통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

 

그레고리 폴, 얼 콕스 : 인간성을 넘어서기

 

사람들은 과학기술이 삶을 향상시키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수백만 명의 죽음에 기여해왔다. 뇌속에 나노컴퓨터를 이식하게 된다면 우리는 영생하게 될 것이다. 사이버 몸과 사이버 뇌를 제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결국 인간은 신이 된다. 과학이 죽음을 정복한다면 종교는 사멸할 것이다.

 

빌 조이 : 우리는 이 기술들을 포기해야 한다

 

기계들이 모든 일을 하게 되는 미래가 오면 우리는 1) 기계들에게 모든 결정을 맡기거나 2) 기계들에 대한 인간의 통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카진스키는 주장했다. 우리가 첫 번째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기계들의 명령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될 가능성이 있다. 2두번째를 선택한다면, 엘리트가 통제권을 쥐게 되고, 대중은 불필요하게 된다. 엘리트들은 대중을 몰살하거나 멸종시키거나 노예로 만들 것이다.

 

조이 역시 우리 자신을 로봇에 다운로드 후에도 인간일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또한 나노 기술은 그레이 구문제에 직면한다. 자기 복제 나노봇들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자멸의 문턱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유전학, 나노기술, 로봇공학은 너무 위험하다. 이 기술들을 포기해야 한다.

 

저자는 초인간주의 철학을 지지한다. 죽음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저자는 왜 사상가들이 인간의 본성을 신성시하는 지 묻는다. 그것은 오만일 수 있다고. 그렇다고 로봇을 신성시해야 한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인간이 로봇이 되는 게 진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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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 : 객관적 의미

 

 

조지프 엘린: 도덕이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엘린에 따르면 삶의 의미는 지식이 아니며 행복도 아니고 죽음에 의해 제거되지도 않는다. 반복적인 부질없음, 궁극적인 하찮음, 부조리에 바탕을 둔 논증들도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의미의 출처가 될 큰 그림이 존재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엘린은 삶 전체는 의미가 없더라도 개인들의 삶은 유의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주는 우리에게 의미를 줄 수 없다. 우리가 삶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세계에 유용하게 기여하지 않는 삶 역시 무의미하다. 아동 학대자나 박정희와 이승만과 같은 범죄자들은 살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비도덕적인 삶은 무의미하다.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이란 그 삶이 있었음을 기뻐할 이유를 과반수의 사람들이 발견하는 그런 삶이다. ”

 

도덕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사랑, 우정, 성실, 신뢰성이라는 객관적 가치들에 이르는 수단이다.

 

개럿 톰슨 : 삶의 의미는 초월적 가치들에서 발견된다.

 

삶의 의미를 생각할 때 범하는 아홉가지 오류

 

삶의 의미가 신의 존재, 신과 우리의 관계에 달려있다고 전제하는 것. 톰슨의 반론에 따르면 신이 인간의 삶의 목적을 설정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목적을 존중하지 않을 수 있다.

삶의 의미가 일종의 목표나 목적이라는 생각. 목적은 신이나 진화가 우리 안에 주입한 것일 수도 있다.

삶의 의미가 쾌락이나 욕망과 같다는 것.

삶의 의미가 발명되어야 한다거나 주관적이라 것

유물론을 전제하면 삶의 의미가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

가치 판단은 행동의 이유를 제시하는 문장일 뿐이라는 것.

삶의 의미가 우리의 경험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언어적 항목들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

스스로 정한 계획에 따라 사는 것이 곧 삶의 의미라는 것

 

이 모든 오류를 반면교사 삼아 톰슨은 삶의 의미가 일상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유의미한 삶은 일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유의미한 행동들로 이루어진다. 또한 우리는 세계와 우리의 삶을 개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욕망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익에 부합하게 행동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삶의 의미는, 바깥에서 부과한 신적인 계획이나 목적에 부합하거나 개인적으로 발명한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근본적인 이익에 부합하는 발전 과정에 있어야 한다. 우리의 관심과 행동으로 우리 자신을 넘어선 가치들에 도달하는 과정을 삶의 의미의 일부로 간주해야 한다. ”

 

칼 브리튼 : 삶이 유의미하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참이다

 

 

개인의 삶이 그 자신과 타인들 모두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세계의 사실들에서 확인할 수 있으므로, 삶은 유의미하다.

 

삶은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는 모든 현실에 깃든 가능성에서 나온다. 내 말은 일부 사람들의 삶이 유의미하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의 삶이라도 유의미하다는 것이다.”

 

테리 이글턴 ; 아가페적 사랑이 답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축구에서 삶의 의미를 얻는다고 인정하기를 꺼리겠지만, 수백년 동안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지키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고귀한 대의들 종교적 신앙, 국가의 주권, 개인의 명예, 민족의 정체성 을 스포츠가 대신한다. 오늘날 민중의 아편은 종교가 아니라 스포츠다.”

 

이글턴에 따르면 삶의 의미는 어떤 문제의 해답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와 관련이 있다. 삶의 의미는 형이상학적이지 않고 윤리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열쇠는 행복을 이기심에서 떼어내어 인류에 대한 사랑과 연결하는 것이다. 유의미한 삶의 핵심 요소는 아가페적 사랑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마따라 행복이 우리 능력들의 자유로운 번창이라면, 행복과 사랑 사이에 최종적인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불평등이 심한 사회는 궁극적으로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

 

모리츠 슐리크 : 삶의 의미는 놀이에서 발견된다

 

삶의 의미는 즐거운 놀이에서,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에서 발견된다.

 

수전 울프 : 객관적 가치들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기

 

울프에 따르면 유의미한 삶이란 가치 있는 기획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삶이다.

 

스티브 칸 : 울프의 견해에 대한 주관주의자의 대응

 

유의미한 삶이란 타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행복을 발견하는 삶이다.

 

수전 울프 : 객관적 가치들의 중요성

 

울프는 만족 견해와 자신보다 더 큰 것 견해를 구분한다. 만족 견해란 무엇이든지 만족을 얻는 것에서 삶의 의미가 발견된다는 견해를 뜻한다. 자신보다 더 큰 것 견해는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에 헌신하는 것에 삶의 의미가 있다는 견해다.

 

울프는 비록 객관적 가치가 구체적으로 정의되어 있지 않더라도 주관적 가치에 의존하지 않는 가치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제임스 레이철스 : 좋은 것들이 삶을 가치 있게 만든다

 

제임스 레이철스에 따르면, 삶이 무의미하더라도 특정한 삶들은 유의미할 수 있다. 개인마다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삶의 목표로 삼을 가치가 있다고 동의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좋은 개인적 관계, 성취, 지식, 즐거운 활동, 미적 향유, 신체적 쾌락, 타인들을 돕기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이 결국 헛되고 삶은 무의미할 수 있지 않을까? 유일한 해답은 우리가 작성한 좋은 것들의 목록이 왜 실제로 좋은지 설명하는 것뿐이다.


오언 플래너건 : 자기 표현이 삶에 의미를 준다

 

한 개인의 의미는 타인들과의 관계나 일, 또는 자연 이 삶에서 우리와 관계 맺을 수 있는 것들 에서 나올 것이다.

 

빅토르 프랑클 : 의미 탐구



 

프랑클의 철학적 논의는 니체를 인용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진 사람은 거의 모든 것을 견뎌낸다.” 프랑클이 의미를 향한 의지라고 부르는 이 살려는 욕망은 인간적인 삶의 일차적인 동기다. 이 생각들을 종합하면, 살아남고, 존재하고 의미를 발견하려는 욕망이 우리를 이끈다.

 

의미의 객관적 원천은 세 가지다.

 

1. 좋음이나 아름다움의 경험, 또는 타인들에 대한 사랑

2. 창조적인 행동이나 일

3. 불가피한 고통을 대하는 태도.

 

우리가 사랑하는 타인들이 우리에게 의존하면, 또는 우리에게 완성해야 할 고귀한 일이 있다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갖게 된다. 프랑클은 불가피한 고통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의 내면적 자유가 드러난다고 말한다.

 

크리스토퍼 벨쇼 : 관계들과 기획들

 

벨쇼에 따르면 주관적 접근법은 유효하지 않다. 마약중독자로서 행복하다고 해서 그 삶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중요한 것들은 관계, 기획, 도덕적으로 좋은 삶이다. 우리가 타인들을 정말로 사랑하면, 타인들의 기쁨과 고통, 희망과 열정을 공유하면, 우리의 삶이 중요하지 않다고 믿기 어려워진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유의미한 기획들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품기 어려워진다. 또한 우리가 타인들을 돕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고 애쓴다면, 우리의 삶은 무의미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일하고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작은 재미를 즐기는 평범한 개인의 삶을 살펴보면, 그 삶은 특별히 유의미하지 않지만 무의미하지도 않다. 그런 개인은 그다지 도덕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또는 만족스러운 관계나 일을 가지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삶을 살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면, 거기에서 논의를 종결해야 마땅하다.

 

레이먼드 벨리오티 : 유산 남기기

 

우주적 관점을 채택하면, 우주와 우리의 삶에 의미가 결여되어 있으며 우리는 유한하고 중요하지 않으며 일시적인 존재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응하는 여러 전략이 있다. 하나는 단지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의 중요성만 요구한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또 다른 전략은 우주적 관점을 활용하여 시야를 넓히고 우리 자신을 덜 진지하게 대하고 우리의 고통을 덜 심각하게 보는 것이다. 우주로 사다리를 걸쳐 관점들 사이를 오르락 내리락 한다면 우리는 행복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극소화 할 수 있다.

 

삶이 가치를 지니려면 도덕적, 지적, 미적 또는 종교적 가치를 산출해야 한다. 피카소는 우리에게 미술적 유산을 남겼기에 가치 있다.

 

우리는 이 세계의 사람들 및 객관적 가치들과 관계 맺고 가능할 경우 유산을 남기는 것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폴 새가드 : 뇌 과학과 삶의 의미

 

신경생리학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긍정적 감정들과 연결하는 대상들에 가치를 부여한다. 사랑, 일 놀이. 스포츠, 독서, 유머, 운동, 음악은 모두 뇌를 긍정적인 방식으로 자극하고 삶의 의미를 제공한다. 사랑, , 놀이는 우리의 뇌가 유능함, 자율, 관계를 향한 기본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방편이다. 우리는 이런 활동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새디어스 메츠 : 좋음, 참됨, 아름다움

 

메츠에 따르면 특정한 성취들로 이어지는 윤리적, 지적, 미적 활동들은 내재적 가치를 지닌다. 왜냐하면 그런 활동들은 개인이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실패하는 자기 초월 이론 일곱 가지

 

자기 초월을 대상에 사로잡히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 비디오 게임에 아무리 몰입하더라도 도덕적 성취는 나오지 않는다.

현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배꼽에 몰두한다고 삶의 의미를 얻을 수 없다.

유기적 통일체와 연결되는 것. 참됨에는 잘 적용되지 않는다. 쿼크에 관한 이론이 개발되었다고 삶에 의미가 제공되는 것은 아니다.

가치 있고 끝없는 목표들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 목표들이 왜 유의미한지 설명할 수 없다.

이성을 사용하여 탁월함의 기준들을 충족시키는 것. 이성을 악한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다.

창조적인 방식으로 이성을 사용하기. 창조적 범죄자도 있을 수 있다.

보편적인 관점에 따라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 발톱 깍는 도구를 나눠주는 것도 위대할 수 있을까.

 

좋음, 참됨, 아름다움은, 우리가 이성적 본성을 긍정적이며 중요한 방식으로 사용하여 인류의 처지를 크게 좌우하는 조건들을 지향함으로써 동물적 본성을 초월하는 한에서, 삶에 위대한 의미를 제공한다. ”

 

싸구려 소설 읽기는 삶에 의미를 줄 수 있을까메츠에 따르면 자신의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선 상당한 노력이 필수적인데 싸구려 소설 읽기는 그런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삶의 의미를 얻으려면 단지 기존의 것을 하거나 알거나 제작하는 것을 넘어서 새로움을 산출해야 한다.

 

객관적 의미에 대한 논평

 

우리는 칸의 견해와 울프의 견해을 종합하여, 유의미한 삶이란 해를 끼치지 않는 기획들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울프는 해를 끼치지 않음을 최소한의 조건으로 승인하면서, 타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가치 있는 기획에 참여하는 삶이 더 유의미하다고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좋음, 참됨, 아름다움에 관여하고 참여하고 연결됨으로써 삶 속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그렇다면 이게 전부일까? 항상 우리를 따라다니는 유령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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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 : 주관적 의미

 

장 폴 사르트르: 주관적 의미에 대한 고전적 전술


 

사르트르에 따르면 실존주의는 존재(실존)가 본질에 선행한다는 원칙을 기초로 삼는다. 우리는 선택할 자유가 있다. 홀로 선택하고 또한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 즉 인간은 가치와 의미가 있는 삶을 위하여 자기 나름의 가치와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

 

쿠르트 바이어 : 신을 배제한 주관적 의미

 

과학은 존재를 종교보다 더 잘 설명한다. 종교는 존재에 목적을 부여하지만, 도덕적으로 반대할 만한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삶에 객관적 의미는 없지만, 우리는 삶에 주관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종교적 세계관은 이상화된 사후의 삶을 강조하면서 현재 삶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깍아내림으로써 우리의 주관적 의미 부여를 방해한다.

 

폴 에드워즈 : 세속적 의미로 충분하다

 

이 지치고 늙은 세계를 아비로 삼아서 태어나 삶과 죽음이 계속된다...그리고 그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맹목적이다. ....삶은 바다 위에서 모든 물결과 바람에 흔들리는 배와 같다. 어떤 항구, 어떤 피난처로도 향하지 않는, 노도 나침반도 조타수도 없이 그저 한동안 떠돌다가 파도 속으로 실종되는 배......”

 

- 클래런스 대로

 

인간의 삶은 주관적 지상적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의미와 가치의 기준을 너무 높게 설정하지 않는다면, 일부 사람들의 삶은 가치 있다. 그러나 비관론을 최종적으로 반박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의 존재가 비존재보다 더 나음을 증명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인간의 삶이 존재하는 것이 부재하는 것보다 더 나은지 여부를 우리는 알 수 없다.

 

카이 닐슨 : 죽음 앞에서의 의미

 

닐슨에 따르면 신과 사후의 삶이 없다 하더라도 삶이 허망하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삶은 무의미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삶에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현세에서 추구하는 목표와 목적들은 우리의 삶과 환경에서 실행하거나 소유하거나 경험할 가치가 있는 것들, 우리 자신이나 타인에게 기쁨, , 활기, 만족을 주는 것들이 있다는 의미에서 삶을 유의미하게 만들기에충분하다. 그런 것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이 그런 것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진 못한다.

 

헤이즐 반스 : 우리가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

 

삶은 무의미하지만, 우리의 몫은 삶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 메를르 퐁티

 

 

우리가 가치를 발명한다는 말은 단지 삶이 선험적 의미를 가지지 않음을 뜻할 뿐이다. 당신이 살기 전에,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당신의 몫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가치란 다름 아니라 당신이 선택하는 의미다.”

 

- 사르트르

 

우리는 성장해야 하고 우리 나름의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 어떤 외부의 행위자가 이 일을 대신해줄 수 있다고 상상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기획들을 통해서 우리는 제한된 불멸을 얻는다.

 

레이먼드 마틴 : 빠른 자동차와 멋진 여자

 

마틴은 삶이 가장 좋았을 때를 떠올려보라고 말한다. 그때 우리는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했는가? 대답은 대부분 아니다’. 마틴에 따르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때, 삶은 유의미하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한 만족을 얻는 다는 게 가능할까?

 

존 케커스 : 비도덕적 삶도 유의미할수 있다

 

주관적 의미관을 배척하고 객관적 의미관을 수용할 이유가 세 가지 있다.

 

1. 의미가 주관적이라면, 우리가 세뇌당하거나 조작당해서 어떤 기획의 실행을 원하는 것과 숙고 끝에 정말로 그 기획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해서 원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없다.

 

2. 우리가 조작당하지 않았고, 우리에게 중요한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한다 하더라도, 의미는 보증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품은 욕망의 가치에 대한 질문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3. 우리는 어떤 기획이 우리의 삶을 개선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 기획을 추구하지만, 그 기획은 그런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수도 있다.

 

유의미한 삶은 목적 없거나 부질없거나 하찮거나 부조리하지 않으며, 당사자가 흥미롭고 삶을 개선해준다고 여기는 활동들을 실행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 활동들은 자연 세계에서 이루어지므로, 종교적 대답은 배제된다. 또 이 활동들은 비도덕적 일 수 있으므로, 도덕적 대답도 배제된다. 개인이 어떤 활동 혹은 기획을 흥미롭고 보람 있다고 여길지에 대한 보편적인 대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비드 슈미츠 : 사소한 것들에 몰두하기

 

슈미츠에 따르면, 우리의 삶은 천천히 쌓이는 삶의 작은 조각들 때문에 유의미할 수 있다. 설령 그 조각들이 끝내 완성된 예술 작품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삶의 의미는 삶에 몰두하는 것에서 나온다. 삶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조금은 있지만, 우리는 그 의미를 결코 명확하게 진술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가 몰두하는 일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로버트 솔로몬 : 당신의 비전에 맞게 살아라

 

삶이 게임이라면, 삶을 너무 진지하게 대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승리를 원하거나 훌륭한 선수가 되기를 원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이 이야기라면, 자신을 진행 중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여기면서 그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에 따라 스스로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이 비극이라면, 불가피한 죽음을 직시하면서 용감하게 사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지도 몰느다. 삶이 농담이라면, 우리는 삶을 덜 진지하게 바라보면 웃어넘길 수 있을 것이다.

 

삶이 사명이라면, 당신은 타인들을 변화시키거나, 혁명을 일으키거나, 아이들을 양육하거나, 과학을 발전시키거나, 도덕을 향상시킬 것이다. 삶이 예술이라면, 우리는 아름다움이나 개성, 혹은 품위가 있는 삶을 창작하기를 원할 것이다. 삶이 모험이라면,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한계에 도전하기를 즐길 것이다. 삶이 질병이라면, 모든 것은 죽음으로 마감될 것이다. 삶이 욕망이라면, 욕망의 충족이 의미를 산출할 것이다. 삶이 수행이라면, 삶의 목표는 욕망을 제거하고 평정에 이르는 것이다.

 

삶이 이타적 활동이라면, 우리는 보답이 없더라도 타인들을 위해 살 것이다. 삶이 명예라면, 우리는 타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우리의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 삶이 학습이라면, 우리는 배움에서, 우리의 역량을 키우고 발전시키는 것에서 만족을 얻을 것이다. 삶이 고통이라면,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명상이나 자기 부정을 통해 삶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일 터이다. 삶이 투자라면, 우리는 삶의 시간을 돈이나 명성 같은 보상을 얻기 위해 투자할 자본으로 여길 것이다. 삶이 관계라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과 우정일 것이다.

 

데이비드 런드 : 우리의 의미 탐구는 유의미하다

 

진리와 의미의 추구는 끝내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추구 자체가 존재하는 의미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줄리언 바지니 :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바지니는 삶에 의미를 제공할 만한 여섯 가지 길을 고찰한다. 타인들을 돕기, 인류에 공헌하기, 행복하기, 성공하기, 하루하루를 즐기기, 정신을 자유롭게 하기. 모든 길이 다 유의미한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 삶의 의미는 파악할 수 있다. 유의미한 삶을 살 길이 많이 있다. 어쩌면 사랑이 행동을 이끌어 내는 가장 강력한 동기일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 ;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숭배하기

 

인간의 삶은 짧고 무력하다. 삶의 당사자와 인류 전체에게 느리고 확실한 죽음이 어둡고 무자비하게 떨어진다. 선악을 모르고 파괴를 주저하지 않으며 전능한 물질은 중단 없이 자신의 길을 굴러간다. 오늘은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내일은 본인이 어둠의 관문을 통과할 운명인 인간에게는......자신의 보잘것없는 삶을 고귀하게 만드는 드높은 생각들을 간직하는 것만 남는다. 운명의 노예의 소심한 공포를 경멸하고, 스스로 제작한 관을 참배하는 것만 남는다.

 

우연의 지배에 당황하지 말고, 자신의 외적인 삶을 지배하는 부당한 독재로부터 정신을 자유롭게 보존하는 것만 남는다. 거스를 수 없는, 즉 그 자신의 지식과 저주를 잠시 관용하는 힘들에 자랑스럽게 반항하면서, 지쳤지만 포기하지 않는 아틀라스처럼, 무의식적 힘의 난폭한 행진엥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이상들이 빚어낸 세계를 홀로 떠받치는 것만 남는다. ”

 

삶에 객관적인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를 체념하며 받아들이고, 단지 위로를 준다는 이유로 다른 믿음을 품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객관적 무의미성에도 불구하고 능동적으로 아름다움, 진리, 완벽함을 창조하려 애써야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를 파괴할 영원한 힘들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을 성취할 수 있다.

 

리처드 테일러 : 우리의 의지를 투입하기

 

테일러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활동에 투입하는 것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R. M 헤어 :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우리 모두는 일반적으로 무언가에 마음을 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무언가가 중요하다. 이런 중요성을 우리는 세계에서 발견하지 않는다. ‘중요성이란 우리가 사물과 사람에 부여하는 속성이다. 우리는 정말로 관심을 기울일만한 것들에서 가치(혹은 의미)를 발견한다고 헤어는 주장한다.

 

어빙 싱어 : 가치 창조

 

싱어에 따르면 삶의 의미에 대해서 세 가지 입장을 제시한다. 전통적 종교적 대답, 허무주의적 대답, 우리 나름의 가치를 창조하라는 대답. 싱어는 종교적 대답이 많은 이들에게 삶의 의미를 제공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대답을 배척한다.

 

이런 패턴의 믿음은 사건과 평범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선 검증불가능한 전제들에 기초를 둔다. 여러 세기에 걸친 비판에 의해 이제 흔들거리는 초월적 버팀목들을 치워버리면, 그 거대한 구조물은 무너질 것이다. 우리 시대의 과제는 우리의 앎의 한계를 넘어서는 의심스러운 상상 없이 의미를 획득하는 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싱어는 우리의 삶을 유의미하게 만들기 위해선 창조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싱어는 버나드 쇼의 말을 인용한다.

 

삶에서 참된 기쁨이란 당신 자신이 위대하다고 인정하는 목적에 쓰이는 것, 쓰레기 더미에 던져지기 전에 완전히 소진되는 것, 세상이 당신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탓하며 안달하는 조막만한 이기적 원망과 불평의 덩어리가 아니라 자연의 힘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삶에서 유일한 진짜 비극은 개인적인 의도를 품은 사람들에 의해, 당신이 저급하다고 여기는 목적에 쓰이는 것이다. 나머지 모든 것은 최악의 경우에도 기껏해야 불운이거나 죽음이다. 유일한 비참함, 지상의 지옥은 노예가 되는 것이며, 이에 맞선 반란은 가난한 예술가에게 인간의 일을 제공하는 유일한 힘이다. 개인적인 의도를 품은 부유한 사람들은 그 예술가를 매우 기꺼이 포주, 광대, 아름다움을 파는 장사꾼, 감상 유발자 따위로 고용하려 들겠지만 말이다.”

 

싱어에 따르면 만물에 깃든 좋음을 사랑함으로써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만물에 깃든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들, 이 선물에 마음을 쓰고 헌신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삶의 사랑을 경험한다. 그것은 독특한 유형의 행복과 많은 기쁨의 기회를 제공하는 사랑이다. 자연이나 실재에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 수 있을까

 

클렘케 : 구원에 호소하지 않고 살기

 

클렘케는 자신이 다루려는 문제의 핵심이 다음과 같은 카뮈의 문장에 담겨 있다고 말한다.구원에 호소하지 않고 살 수 있는지 여부를 아는 것이 나의 관심사의 전부다.”

 

클렘케는 신이 없이도 지식, 예술, 사랑, 일 등을 통해 주관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객관적 의미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식을 통해서 사물들에 의미를 부여할 가능성을 얻는다.

 

 

주관주의를 주장하는 입장들은 대개 감동적이다. 우리는 아름다움, 완벽함, , 예술, 사랑등을 통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아이들을 강간하는 것으로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주관주의를 받아들인다면 강간범의 삶은 과연 의미있는 삶일까? 우리는 그의 삶에 반박할 수 있을까? 주관주의가 지닌 함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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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29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의 글에 소개된 저자 이름 중에 제가 아는 이름은 사르트르, 퐁티, 러셀 뿐이에요.

시이소오 2016-08-29 13:11   좋아요 0 | URL
오늘날 학자들이 많아서인지 대부분 번역도 안됐네요 ^^;
 


불가지론

 

폴 에드워즈 : 질문의 무의성

 

미국의 도덕 철학자. 20세기 철학의 기념비적 업적으로 불리는 <맥밀런 철학백과사전>의 책임 편집자다.

 

어떻게질문과 질문은 때때로 유사하지만, 다른 질문일 때도 있다. 신학적 왜 질문들은 유의미하다. 그러나 그 질문들에 대한 신학적 대답들이 참이라는 뜻은 아니다. 더 나아가 신학적 대답들은 초궁극의 왜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는다. 초궁극의 왜 질문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만물 바깥에서 만물을 설명해주는 무언가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에이어 : 무의미한 질문과 주관적인 가치



 

20세기 가장 중요한 철학자들 중 하나.

 

삶 전체의 의미나 목적이 있을까? 에이어에 따르면 그런 건 없다. 모든 삶에 적용되는 목적이나 최종 목표가 존재한다고 생각할 근거는 없다. 또 설령 그런 목적이나 목표가 존재하더라도, 이를테면 신이 품은 목적을 완수하는 것이 모든 삶의 목적이라 하더라도, 신의 목적은 우리의 목적이 아닐 터이므로, 이것은 우리의 탐구와 무관한 이야기다. 신의 계획과 관련해서 우리는 그 계획에 참여할 수밖에 없든지 아니면 참여 여부를 선택해야 한다. 후자는 삶의 의미가 우리 자신의 선택과 가치관에 달려있음을 뜻한다. 게다가 전자와 후자 모두 신의 계획의 목적 혹은 의미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불러온다. 또 이 질문의 대답은 또 다른 왜 질문들을 무한정 불러오기 마련이다. 요컨대 궁극의 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으로 환원된다.

 

카이 닐슨 : 무의미한 질문과 가치 있는 삶

 

왜 어떤 것이 객관적으로 가치 있느냐라는 질문에 우리는 대답할 수 없다.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무엇이 가치 있느냐는 물음 그 이상이다. 이 질문은 가치 있는 것, 또는 중요한 것이 과연 존재할까라고 묻는다. 닐슨에 따르면 객관적 대답은 불가능하다. 변화를 일으키려는 우리의 노력은 효과가 미미하므로,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미미한 일에서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요컨대 삶의 의미는 우리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주관적 목표들로 환원된다.

 

존 위즈덤 : 유의미하지만 거의 대답 불가능한 질문

 

 

만물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유의미하다. 정의상 만물의 바깥에서 만물에 의미를 주는 무언가는 있을 수 없다. 만물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만물은 무슨 의미일까?”라고 유의미하게 물을 수 있다. 이 질문은 대답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많이 배움으로써 대답에 접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대답이 존재한다면 그 대답은 삶의 내부에서 나올 것이다.

 

헵번 : 대답 불가능한 질문과 가치 있는 기획들

 

헵번은 우리가 스스로 가치가 있으며 만족스럽고 흥미로운 기획들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마 우리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능한한 잘 살려고 노력할 수 있다.

 

중간 점검

 

에드워즈, 에이어, 닐슨은 모두 궁극의 왜 질문이 대답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에드워즈가 거기서 멈췄다면, 에이어와 닐슨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것인지를 물었다. 에이어는 오직 주관적으로만 대답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닐슨은 도덕적 사안들에 대해 객관적으로 추론하는 우리의 능력을 더 낙관적으로 펴가했다. 위즈덤은 궁극의 왜 질문이 유의미하고 이해 가능하지만 대답 불가능할 것이라 주장했다. 헵번은 그 질문이 유의미하고 대답 불가능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헵번 역시 의미는 우리의 주관적 목적에서 가장 잘 발견된다고 덧붙인다.

 

로버트 노직 : 어떻게 무언가가 의미를 발산할 수 있을까?



 

신의 목적은 삶의 의미를 보장하지 않는다. 무의미성을 받아들이거나 의미를 발견하려 애쓰는 대신에 의미를 창조하라고 노직은 조언한다. 그러나 과연 무언가가 의미를 발산 할 수 있을까? 노직의 대답은 회의적이다.

 

윌리엄 조스케 : 유의미한 질문과 무의미한 삶

 

조스케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다의적이라고 주장한다. 의미란 1) 모든 삶의 의미 2) 인간의 삶의 의미 3) 개인의 삶의 의미일 수 있다. 조스케는 2)만을 다룬다.

 

조스케는 또한 무의미성의 네 가지 요소를 열거한. 가치없음, 요점없음, 하찮음, 부질없음이 그것이다. 1)가치가 없다는 것은 보람이 없다는 뜻이며 2) 요점이 없다는 것은 목표가 없다는 뜻이고 3) 하찮다는 것은 목표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며 4) 부질없다는 것은 목표를 성취할 수 없다는 뜻이다.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유의미하며 또한 위험하다. 생물학, 도덕적 주관주의, 우연적 비합리적 무신론적 형이상학과 결부된 견해들 때문에, 삶이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견해를 떨쳐내기는 어렵다. 우리는 삶을 소중히 여기고 노력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부질없고 무의미할지도 모르는 삶에 우리가 불만을 품는 것은 정당하다.

 

오스왈드 핸플링 : 해롭지 않은 자기기만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무의미하고 보편적인 대답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를 해롭지 않게 속이면서 삶에 의미가 있는 것처럼 역할 놀이를 한다면, 우리의 삶은 더 나아질 것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무의미한 질문, 또는 말할 수 없는 대답?



 

삶의 문제의 해답은 그 문제의 사라짐에서 보인다. (오랜 의심 끝에 삶의 의미를 명확히 깨달은 사람들이 그 의미가 무엇인지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표현 불가능한 것이 정말로 존재한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것은 신비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불가지론은 허무주의를 암시한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답이 없다는 게 아니라 답은 있고 그 답이 삶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닐까.

 

허무주의 : 삶은 무의미하다.

 

쇼펜하우어 : <세상의 고통에 대하여>



 

사는 동안 당신을 이끌 신뢰할 만한 나침반을 원한다면, 삶을 바라보는 옳은 방법에 관한 모든 의심을 없애고 싶다면, 이 세계를 감옥으로, 일종의 유배지로 보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세계가 우리 모두가 고통을 겪는 고난의 장소라는 생각은 이웃에 대한 관용, 인내, 존중, 사랑을일깨운다. “모든 사람이 관용, 인내, 존중, 사랑을 필요로 하므로, 우리는 이것들을 동료 인간들에게 베풀 의무가 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삶은 무의미하다. 삶은 고해다. 아무것도 없는 편이 더 나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함께 고통 받는 동료 인간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쇼펜하우어, <존재의 허무에 대하여>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무언가를 추구할 때와, 순수하게 지적인 활동에 빠져 있을 때만 빼면 존재하는 것에서 쾌락을 느끼지 않는다. 심지어 감각적 쾌락도 끊임없는 추구가 그 정체다. 목표에 도달하자마자 감각적 쾌락은 끝난다. 언급한 두 상황에서 벗어나 존재 자체를 되돌아볼 때, 우리는 언제나 존재의 무가치성과 허무성에 압도된다. 이 감각을 일컬어 지루함이라고 한다. ”

 

존재의 유한성, 현재의 덧없음, 삶의 우연성, 과거의 비존재, 욕구의 지속성, 지루함의 경험,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죽음의 불가피성 이 모든 것들에서 삶미 무의미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알베르 카뮈 : 허무주의에 맞선 반항

 


운명은 우리의 삶에 목적이 없다고 비난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반응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운명이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도록 말이다.

 

그때부터 주인이 없는 이 우주는 그에게 황량하지도 않고 허무하지도 않게 느껴진다. 그 바위의 원자 각각, 어둠이 충만한 그 산의 광물 각각이 그 자체로 세계를 이룬다. 높이를 향한 몸부림 그 자체만 해도 사람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시포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

 

 

삶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고 부조리하지만, 우리는 그런 삶에 반항할 수 있고 우리 나름의 행복을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다. 사실상 카뮈가 던지는 질문은, 삶의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것과 (희망을 주는 형이상학적 명제들을 받아들임으로써) 부인하는 것 사이에 세 번째 대안이 있는 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삶이 유의미 하다는 희망 없이, 그러나 자살을 부르는 절망도 없이 살 수 있을까? 대안이 있는 듯하다. 우리는 반항하면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신앙없이, 희망 없이, 의지할 곳 없이 살 수 있다. 그러면서 행복할 수 있다.

 

토머스 네이글 : 허무주의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아이러니

 

네이글에 따르면, 우리의 삶을 반성해보면, 삶이 정말로 중요한 다른 것들과 비교할 때 하찮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삶은 정말로 중요한 다른 것들과 관련해서만 중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네이글은 카뮈처럼 부조리에 반항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부조리를 알아채는 것은 우리의 가장 고등하고 흥미로운 특징의 발현이다. 부조리의 인식은 오직 사유가 자기 자신을 초월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삶은 객관적 의미가 없고, 우리가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할 근거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살면서 반항이나 절망이 아니라 아이러니한 미소로 대응해야 한다. 삶은 사람들이 한때 짐작했던 만큼 중요하고 유의미하지 않지만, 이것은 슬퍼할 일이 아니다. 왜 사냐건 웃지요. 낄낄거리면서.

 

웨스트팔과 체리 : 네이글에 대한 비판

 

눈앞의 일에 몰두할 때, 우리는 영원한 관점이 우리와 무관하여 그 관점을 무시할 수 있다.

 

월터 스테이스 : 허무주의에 만족으로 대응하기

 

진정으로 문명화한다는 것은 이제껏 우리를 지탱해온 이런저런 유치한 꿈들에 의지하지 않아도 똑바로 걷고 명예롭게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어쩔 수 없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불가능한 것을 기대하지 않으며, 작은 행운에 감사하며 사는 그 삶은 꽤 만족스러울 수 있다.”

 

객관적 의미는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만족하면서 고귀하게 살 수 있다.

 

조엘 파인버그 : 허무주의를 거의 끌어안기

 

 

 

테일러에 따르면, 삶은 무의미하다(부조리).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든지, 아니면 성취한 뒤에 지루함을 느끼든지 둘 중 하나다. 모든 삶은 부조리하다.

 

부조리에 대한 카뮈의 대응은 반란, 반항, 그리고 최선을 다해 살기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이 원하는 바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미한 것 사이에는 항상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카뮈는 자기 충족을 자신의 부조리를 끊임없이 절실하게 의식하기로 이해할지도 모른다.

 

네이글이 보기에 부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는 진지한 관점과 우리를 사소하게 보는 보편적 관점 사이의 불일치에서 유래한다. 생쥐의 삶도 생쥐 자신에게는 부조라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부조리하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내면에서 보면 중요한 듯하지만 외부에서 보면 부조리할 수 있다.

 

자기충족의 모형은 최소 네 개가 있다.

 

1.자신의 희망이나 욕망을 충족시키기

2.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3. 일을 마무리하기

4. 본성에 따라 행동하기, 또는 잠재력을 실현하기.

 

시시포스는 바위굴리기를 통해 자신의 본성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

시시포스는

 

바위 굴리기에 취미가 있었을 수 있다.

특별한 재능이 있었을 수 있다.

바위를 굴리려는 본능이 있었을 수 있따.

바위를 굴리려는 욕구가 있었을 수 있다.

바위를 굴리려는 강박적 충동이 있었을 수 있다.

 

파인버그에 따르면 시시포스의 본성을 어떻게 설정하든 간에, 시시포스는 자신의 삶을 충족시킬수 없다. 왜냐하면 신들은 시시포스의 삶을 확정하고 그에게 재량권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객관적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본성에 맞게 행동함으로써 주관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자기충족적인 동시에 부조리할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허무주의적 사태를 아이러니한 미소를 띠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파인버그는 네이글보다 조금 더 나아가서 허무주의를 거의 끌어안는다.

 

 

사이먼 크리츨리 : 허무주의를 긍정하기

 

우리는 무의미성을 겅취로, 과업이나 추구할 목표로....어떤 구원 이야기의 장밋빛 안경도 끼지 않은 평범함이나 일상의 성취로 단언해야 한다. 베케트의 작품은 이 구원 이야기들의 근본적 파괴창조, 평범함의 성취로서의 무의미성을 향한 접근, 구원으로부터의 구원을 제공한다. 평범함은 가장 비범한 것이다.

 

밀란 쿤데라 : 참을 수 없는 허무주의



 

크니츨리가 옹호하는 것은 삶을 가볍게 대하는 태도다. 쿤데라가 보기에 단 한 번 사는 삶은 일종의 가벼움, 하찮음, 또는 중요하지 않음을 속성으로 가진다. 반대로 만일 모든 것이 무한정 반복된다면, 우리의 삶과 선택에 엄청난 무게가 부여될 것이다.

 

가장 무거운 짐은 우리를 짓누른다. 우리는 아래로 가라앉고, 짐은 우리를 바닥에 고정한다. 그러나...짐이 무거울수록, 우리의 삶은 땅에 더 접근한다. 더 실재적이고 진실하게 된다. 거꾸로 짐의 절대적 부재는 사람을 공기보다 더 가볍게 만든다. 사람이 높은 곳으로 치솟고, 땅과 자신의 현세적 존재를 떠나고, 반만 실재하게 되는 결과, 사람의 행동이 자유로운 만큼 하찮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

 

무거운 삶은 가식적이며 우리를 짓누른다. 가벼운 삶은 참을 수 없다. 허무주의외에 다른 대안이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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