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덕이 미덕에 바치는 오마쥬


요나스 요나손 성석제 이기호

 

의아했다. 피에르 르메트르가 공쿠르 상을 받았다고?! 공쿠르상이 일본 나오키 상처럼 말랑말랑한 상이 아닌데?! 르메트르 소설 중 몇 권은 재미없어 읽다 말았고 그나마 끝까지 읽은 소설은 <알렉스>였다.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저 그런 미스테리? ‘끝에 가서 삑사리를 내서 그렇지 르메트르 보다는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가 훨 낫지 않나?’

 

읽으면서 연신 놀라움에 휩싸였다. 이게 같은 사람이 쓴 거라고? 정말, 리얼리?!

이 정도면 가히 비상, 도약이라 할 만하다. 미스테리 소설만 쓰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마르케스 혹은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같은 소설을 쓸 줄이야!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가 있을까. 어쩌면 읽기때문일까.

 

이 텍스트를 써가면서 나는 몇몇 작가들을 차용했다. 에밀 아자르, 루이 아라공, 제랄드 오베르, 미셸 오디아르, 호메로스, 오노레 드 발자크, 잉마르 베리만, 조르주 베르나노스, 조르주 브라상, 스티븐 크레인, 장루이 퀴르티스, 드니 디드로, 장루이 에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박토르 위고, 가즈오 이시구로, 카슨 매컬러스, 쥘 미슐레, 안토니오 무뇨스 물리나, 앙투안 프랑수아 프레보, 마르셀 프루스트, 파티리크 랑보, 라로슈푸코 등등

 

p669. <오르부아르>

 

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는 전사자 국립 묘지를 만들기로 한다. 이 사업에 악마의 화신 같은 도니프라델 중위가 뛰어든다. 정부 고위 인사에게 온갖 뇌물을 먹여 사업권을 취득한 도니프라델은 오늘날 탐욕스런 자본주의, 대기업의 상징같은 존재다.

 

관은 170cm에서 130cm까지 줄어든다. 전사자들 뼈를 부러뜨리지 않고서는 관에 집어넣을 수가 없다. 전사자들 시체와 무덤 명패도 맞지 않는다. (유족들이 무덤을 파볼 것 같아!) 심지어 프랑스 군인의 묘지에 독일 군 시체를 집어넣는다. 이후엔 아예 시체없이 무덤을 흙으로 채워 넣기까지!

 

전쟁 중 도니프라델의 부하였던 미야르 알베르와 에두아르는 생계고에 시달리다 전사자 추모 기념비를 만들어 준다며 전국적인 사기를 친다. 과연 누가 더 사악한가?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과 풍자적인 문체 때문에 요나스 요나손이 떠올랐다.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의 노인> 보다는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한국 작가들 중에도 <오르부아르>나 요나스 요나손에 비견할 만한 작가들이 있다. 성석제와 이기호. 한국의 웃픈 현실을 이 두 작가만큼 제대로 보여주는 작가들이 있던가? 성석제로 치자면 아무래도 <투명인간>이 아닐까. 짐승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에 혹사당하는 만수는 <오르부아르>의 알베르를 떠올리게 한다









<오르부아르><투명인간>보다 더 가혹한 소재를 다루면서 웃음을 잃지 않는 작품은 단연 이기호의 <차남들의 세계사>. 이 소설에서 알베르, 만수에 비견될만한 인물은 나복만이다. 더 바보같고 그가 당하는 고통은 더 처절하다.


최근에 이기호의 신작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가 출간되었다.

부디 <오르부아르>만큼 대박 나시길.

 

(20대 때 불문과 다니는 친구는 테레사 수녀, 테레사 수녀라는 말을 못 견뎌했다.

“‘떼레쥐라고 해 줄래?”

 

어찌나 때리고 싶던지. 내가 불문과 가고 나서야 그 친구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제목 <오르부아르>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은건지 모르겠다.

의역을 한 것도 아니고 원제를 다 살린 것도 아니고.

근데, 이 바보 같은 제목이 왠지 소설과 잘 어울린다.

 

아무튼 에두와르와 알베르가 부디 다시,

천국에서 만나길

오흐부아, 라 오

 

 

밑줄 그은 문장

 

p264. 앙리가 보기에 세상은 두 종류로 구분되었다. 하나는 죽을 때까지 뼈 빠지게, 그리고 맹목적으로 일하면서 그날그날을 불쌍하게 연명해 가는 마소 같은 존재들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가질 자격이 있는 엘리트들이다. 그들의 <개인적 요소들> 때문에 말이다.

p277. 그녀는 별로 질색하지 않았다. 어머니 쪽으로는 리무진적인 면을 물려받았지만, 평범한 편이었던 아버지 쪽으로는 수레적인 면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p294. 꼭 그녀의 아버지처럼, 정말로 한 켤레의 양말처럼 닮은 부녀였다.

 

p521. 라부르댕은 문장을 만들 때 오로지 음절을 고려하지, 그 안에 담기는 생각을 고려하는 적은 거의 없으니까.... 라부르댕은 일테면 원구형의 천치라고 할 수 있었다.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항상 멍청한 모습만 보이니까 말이다. 그에게선 아무것도 이해할 게 없고, 기대할 것도 없었다.

 

p550. 난 왜 갈보집들이 그렇게나 기독교적인 이름을 가진 거리들에 그토록 많이 자리 잡고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네요.......아마도 악덕이 미덕에 바치는 오마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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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3-17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떼레쥐...ㅎㅎㅎㅎㅎ

시이소오 2016-03-17 10:13   좋아요 1 | URL
다시 생각해도 `떼레쥐`고 싶네요 ^^

깊이에의강요 2016-03-17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시이소오님 댓글보고 빵~
ㅋㅋㅋ

시이소오 2016-03-17 15:21   좋아요 0 | URL
웃으셨다니 좋네요
아주 웃긴 글을 쓰고 싶어요^^

깊이에의강요 2016-03-17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잘 쓰실것 같아요^^

시이소오 2016-03-17 18:31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오르부와르 ~~흐흐^^

서니데이 2016-03-17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좋은 저녁 시간 되세요.
오늘도 제 서재에서 퀴즈 준비합니다.^^

시이소오 2016-03-17 19:22   좋아요 0 | URL
서니데이님도요. 퀴즈 보러갈께요^^

eL 2016-03-18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오르부와르가 Au revoir 였군요. 상상도 못했네요 ㅎ 저도 떼레쥐에서 빵 터짐 ㅋ

시이소오 2016-03-18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르부와르가 Au revoir 였어요. 이엘님, 오르부아르~~
 

P6. 그리고 다음 원숭이의 말을 머리에 채워 넣기 위해 서둘러 다른 강의실로 떠난다. 이런 공부의 과정은 삶의 무능력자들만 체계적으로 양산하고 있다. 똑똑하되 멍청하며, 언변은 좋되 무능하다. 시험 문제는 잘 풀되 삶의 문제를 대처하는 능력은 형편없으며, 남을 품평하는 데는 날카로운 날을 세우되 자신을 성찰하는 데는 무디기 짝이 없다.

 

하나를 배워 다른 하나에 적용할 줄 아는 게 아니라 다른 하나가 내가 배운 하나와 다르면 멘붕하고 열폭한다. 그건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배울수록 무능력해지고, 배울수록 화만 내는 처지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P8. 내가 아는 공부는 반대였다. 어떤 지식 권력의 정당성과 주도권을 확인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도전하는 것이 공부였다. 삶은 언제나 지식보다 풍부한 것이고, 언어에 도전하는 것이었다......삶이 공부의 식민지가 아니라 공부가 삶의 도구였다.

 

P9. 공부의 기쁨은 보편성의 발견이다. 내가 처한 현실이나 난처함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이 시대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두 겪는 일이라는 걸 깨달아가는 과정이 공부의 과정이다. 동시대성을 발견하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라는 말이다. 시대의 암흑이라는 동시대성을 발견하고 그 문제를 공동의 노력으로 해결해가려고 하는 과정에서 동시대인이 형성된다. 이 동시대인을 형성해가는 것, 그것이 공부가 무능력한 개체들이 아니라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를 형성해가는 과정이며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P19. 미국식 표현으로 잔디깍기 맘이라는 말이 있어요. 부모가 먼저 잔디까기 기계로 풀을 깍아줘서 아이가 갈 길을 먼저 열어준다는 뜻이에요.

 

지금의 486 부모들은 공부를 잘하면 잘살 수 있다는 생각이 자기 몸으로 체득된 세대예요. 그러니까 부모들이 자신이 성공했던 방법을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거죠. 그런데 사실 거시적으로 보면 운이 좋은 세대였던 겁니다. 80년대 초반엔 졸업 정원제가 있어서 그전에 비해 어렵지 않게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들이 취업할 무렵인 87,88년도는 우리나라가 한창 경기가 좋을 때라 대기업 취업이 상대적으로 쉬웠습니다. 좋은 일자리 수에 비해 대졸자가 모자랄 정도였죠.

 

주거도 마찬가지입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신도시가 만들어질 때 손쉽게 집을 살 수 있었어요. 이른바 굉장히 좋은 라인업을 탄 것입니다. ...일종의 프리라이딩, 운이 좋은 세대죠. .....그런데도 본인들이 잘해서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자기가 했던 방식을 그대로 복제해서 자기 아이들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P43. 그런데 요즘 이십대 친구들을 보면 대인관계에서 아주 기본적인 부분들조차 안 돼 있는 친구들을 왕왕 봐요. 머리는 똑똑한데. 그걸 <아프지 않다는 거짓말>이란 책을 쓴 가이 윈치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 관계의 근육이 쇠퇴한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어요.

 

P48. 심리 발달을 어떤 식으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중 하나의 틀이 자아 중심성egocentrism’에서 자아의 탈중심성egodecentrism’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얘기해요.

 

p56. 아즈마 히로키라는 일본 문화비평가의 표현 중에 게임화된 현실이라는 말이 있어요. 그 말을 응용하면 모든 일을 정말 게임처럼 생각하면서 내가 시뮬레이션한 대로 통제가 되고 일이 굴러갈 거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시뮬레이션한 데에서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니 아이템이 주어지듯 뭔가가 주어질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61. 자아 중심성이 굉장히 강하니까 자의식은 무척 높은데, 자기 의견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은 없고, 그러다보니까 한편으로는 굉장히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면서 어떤 결정을 할 때는 남 얘기에 쉽게 넘어가는 거죠. 자기 의견이 없게 돼요.

 

 

p63. 세상에 적응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보는데, 하나는 나를 구겨 넣는 방법, 맞추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환경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방법이에요. 이 두 개를 적절히 조화롭게 사용하면서 우리는 적응을 해나가는 거겠죠. 그런데 일부 친구들의 자아 중심성의 세계에서는 나를 구겨 넣을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환경을 바꾸고 싶지도 않아요. 환경이 알아서 바뀌어줬으면 좋겠는 거죠.

 

p64. 미디어가 점점 더 대다수의 시민들을 관전평, 품평을 하는 사람들로 만들고 있어요. 댓글을 달고, 시민들을 관전평, 품평을 하는 사람들로 만들고 있어요. 댓글을 달고, ARS를 돌리고, 시청자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하는 등등이 마치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저 품평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거든요. 의견을 말하는 것이 참여자의 입장이라면 품평은 구경꾼의 언어예요.

 

p68. 엄기호. 공부를 하는doing’게 아니라 구경하는 거예요. 교재에 형광펜이 다 칠혀져 있다니, 세상에 그런 공부가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계속 구경하는 형태예요, 존 듀이가 말한 대로라면 언더고잉undergoing;’, 즉 겪는 게 있어야 하는데 그게 사라져버리는 거죠. 공부 중독이라고 하는데 중독될 실재는 없어요.

 

p76. 특히 정신과가 각광받으면서 최근 7,8년 동안 똑똑한 친구들이 정신과에 많이 지원했어요. 그런데 이 친구들이 정신과 의사가 어울릴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정말 똑똑하고, 공손하고, 예쁘고, 잘생기고, 영어도 제2외국어도 너무 잘 하고.....그런데 정신과 의사가 가져야 할 파이팅이 없어요. 아울러 자기가 살아온 세계가 너무 좁으니까 연민이나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도 좁고, 마치 요즘 교사들이 공부 못하는 애들을 이해 못하는 것과 비슷해요. “왜 학교를 안 가니?” 이런 식, “이 정도면 가난한 건가?” 이런 식....머릿속에 상식이 만들어져 있어요.

 

p79. 엄기호. 그들에게는 세상이 안 공정한 거예요. 나는 죽을 둥 살 둥 공부해서 서울대 왔는데, 그리고 또 죽을 둥 살 둥 공부해서 정규직이 됐는데 비정규직으로 온 사람들이 갑자기 데모하면서 정규직화 해 달라 그러면 너는 지금까지 뭘 하고 살아왔는데 그런 요구를 하느냐, 생각하죠. 우리는 차별이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하잖아요. 이들 경험 세계에서는 차별을 정의롭지 않다고 보는 게 공정하지 않은 거예요. 이 이야기는 오찬호 씨가 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 잘 나와 있죠.

 

p81. 하지현. 바칼로레아와 논술시험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칼로레아는 어떻게 보면 답이 없어요. 구술하는 논리 전개를 보는 거잖아요? 철학적 담론이나 재미있는 주제를 던제주죠. 그런데 우리나라 수리 논술시험은 독특해요. 수학 문제, 통계, 확률 문제가 나오는데, 여기서 최적의 솔루션을 도출하는 방법과 그것이 왜 그런지를 써라. 전 처음에 이게 무슨 논술시험이야’,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논술시험을 볼 때는 철학 문제나 윤리적 딜레마, 이런 문제들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생각을 좀 해보니, 이래야 논란의 여지가 없이 채점이 가능한 거예요.

 

p86. 엄기호. 지금 대학은 논문을 쓰는 교수, 강의를 잘하는 교수, 책을 쓰는 교수, 프로젝트를 잘 하는 교수 등등 더 다양한 형태의 교수가 필요한데, 학교랑 똑같아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논문 기계들만 임용되게 되는 거죠. 결국은 이 공정함이라는 게 어떤 공정함인가, 누구를 위한 공정함인가, 라고 질문 할 수밖에 없어요.

 

p99. 하지현. 우리나라는 2천 년대 초반 이후, 특히 IMF 이후에 성장 곡선이 정점을 찍고 이후에는 아마 멈추지 않았나, 5천 만 인구의 내수 시장을 봤을 때 이미 꽉 차지 않았나 싶어요. 70년대에서 90년대 초까지의 팽창은 이제 불가능하죠. 그런데 박해천의 <아파트 게임>에 나오는 것처럼 486들이 부를 축적한 방식이 대학을 졸업하고 분당이나 일산의 아파트 분양권을 당첨 받아서 그걸 두세 번 갈아타니 어느새 서울이나 소도시에 꽤 괜찮은 아파트를 갖게 되었고, 그걸 통해서 먹고살 길이 생긴 거죠. 이런 라인업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건 사회가 팽창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이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P100. 공부를 통해서 고학력을 얻고 고학력을 통해서 나름의 기본 위치를 갖는 것은 여전히 안전한 길입니다. 하지만 확률로 따지면 성공 확률이 높다기보다 상대적으로 실패 확률이 낮은 방법일 뿐이에요.

 

실제 자료를 봐도 그래요. 사회학자인 신광영 중앙대 교수가 2000년부터 2014년까지의 한국노동패널 자료를 분석해서 중간계급 세대 간 이동 경로를 추적했어요. 놀랍게도 부모와 자녀 세대가 모두 중간 계급을 유지한 확률은 10.5 퍼센트에 불과했어요. 10명에 9명은 지위가 달라진 거예요. 이렇게 애를 써서 자기 중간 계급을 물려주려고 부모 세대는 무진장 애를 쓰지만 10명에 9명은 실패했다는 것. 이건 이 전략이 개인의 능력 문제로 실패한 것이 아니라 전략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증거 아닐까요?

 

P105. 엄기호. 공부라고 했을 때, 경험을 통해서 뭔가를 얻는 건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버렸어요. 그러다 보니 굉장히 위계화되고 학벌화된 시스템의 자격증만이 유의미하게 됐죠. 이반 일리치의 개념을 가져와서 쓰면 한국사회가 스쿨링화된 사회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회 전체가 학교가 되었다는 거죠. .....그런데 한국 사회는 스쿨 자체가 굉장히 위계화된 학벌사회라서, 어디를 나왔는지가 그 사람의 능력과 그 밖의 모든 것을 검증해주고 보여준다고 보는 사회죠. 그래서 좁은 의미의 공부에 대한 집착 같은 게 생겼죠. 그런데 이게 사회적으로 보면 정말 비극이거든요.

 

요즘 강남 대치동의 학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주는 약 중에 하나가 오력탕이라고 하던데, 총명하게 하고, 뭐 그렇게 하면서 다섯 가지 힘을 준대요. 그런데 그 약의 핵심적인 기능이 잠 안 오게 하는 거래요. 잠자지 말고 공부하라는 거죠.

 

P111. 현재 교육 시스템에서 근대 교육의 기본 정책을 재고해봐야 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평균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을 일으키고, 그리고 주로 제가 만나는 아이들, 하위 50퍼센트 친구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탈락하는 10퍼센트를 5퍼센트로 줄일 방법은 무엇인가,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에요. 결국 이 친구들도 사회에 나갈 거니까, 사회에서 자기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술과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단 말이죠. 그리고 상위 5퍼센트 친구들은 알아서 가는 거지 학교가 힘쓸 일은 아니라는 거예요.

 

어느 순간부터 고등학교 정문 플래카드에 어느 대학 몇 명, 어느 대학 몇 명 합격했다는 게 그 학교의 성적표가 되어버렸는데,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거거든요. 학교는 학원이 아니거든요. 우수한 몇 명을 위한 학교가 아니라 중간인 아이들을 위한 학교가 되는 게 원래 학교의 취지에 더 맞죠. 그러니 플래카드를 붙인다면 졸업 10년 후 80퍼센트의 졸업생이 독립적으로 잘 살고 있습니다.”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P114. 엄기호. 학부모고 학생들이고 실제로는 최상인데 그것을 마치 중간값이고 평균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어요. 한윤형 씨가 썼던 표현대로 하면 평균압입니다. 평균에 대한 압력이죠. 한국은 적어도 평균이 되어야 한다는 압력이 매우 높은 사회라는 뜻입니다. 평균이 되지 못하면 탈락이고 낙오이며 패배한 인생이라는 말이 돼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균이라는 건 절대 평균이 아니라는 거예요. 너무 높다는 거죠.

 

.....중간쯤 되는 아이들도 소위 10개 대학 있잖아요,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라고 하는, 그 정도까지는 가줘야 평균이라고 생각하죠. 이건 정말 말이 안 되는 거거든요.

 

하지현. 10개 대학 정원을 대략 계산해보면 3만 명 정도 되거든요. 현재 수능 수험생을 65만 명 정도로 보면...대략 4.5퍼센트. 그런데 이걸 평균값으로 생각한다는 거잖아요.

 

P.124. 하지현. 얼마 전에 연애연구소를 운영하는 분과 이야기를 나눠 볼 기회가 있었어요. 기업 교육을 나가서 연애란 어떻헤 하는 것인가를 가르치는 분이에요. 제일 반응이 좋은 직업군이 판검사, 의사라고 하더군요. ‘이럴 땐 이렇게 하고, 저럴 땐 저렇게 해라라고 이야기해주는 것에 열렬한 반응을 보인대요...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분이 저한테 가장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데가 어딘지 아세요?” 그러더라고요. 어디일 것 같으세요

이마트 직원 분들이래요. 이분들은 늘 사람을 대하고 있으니 도리어 연애 기술이라고 하면서 사람 대하는 기술 같은 것을 가르치는 게 조금 웃기는 거예요.

 

P129. 엄기호. , 여기에서 재미있는 현상이 있어요. 틀 밖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성공을 하고 나면 그것으로 죽 살아가면 되잖아요? 그것이 다른 사람들한테 훨씬 더 영감을 주거든요. 그런데 꼭 책을 씁니다. 꼭 학원을 해요. 결국 자신의 성공 방식을 매뉴얼화하는 거예요. 본인이 그러고자 하는 욕망이 있고 또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죠. 결국 한국에서 블루오션은 공부밖에 없어요. 출판계도 레드오션이잖아요. 그런데 출판학교는 잘되고 있어요. 출판계는 망해가고 있는데 말예요.

 

P132. 엄기호. 공부 중독의 비극적 역설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삶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데 공부와 삶을 분리시키고 공부에 올인하다 보니 삶이 더욱더 빈약하고 허약해지고 있다는 것. 그 빈약함과 허약함을 채우기 위해서 가르칠 수 없는 것을 또 가르칠 수 있는 것처럼 만들면서 삶은 공부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고요.

 

P139. 엄기호.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들이 돈을 꽤 많이 벌거든요. 노동 계급의 대표는 아니고 중산층화된 노동 계급이죠. 이 사람들은 이제는 대학 가 봤자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알아요.

 

P144. 하지현. 마루야마 겐지 식으로 얘기하면 자식도 엄밀하게 말하면 남이다, 아들러 식으로 말하면, 아무리 자식이라도 자식의 삶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마라.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게 참 안되죠. 자식을 자아의 확장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식이 잘되는 것이 내가 잘되는 것이라고 여기죠.

 

자신의 삶의 성적표가 자신의 성취에 의해 매겨지는 게 아니라 애가 대학갈 때, 취업할 때, 결혼할 때, 이렇게 세 번, 자신의 인생 성적표를 받는다고 생각해요. 자기 인생에서 내가 뭘 얻었고, 내가 뭘 재미있게 생각했고, 내가 그동안 살면서 사회에 어떤 공헌을 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 자식이 어느 대학에 갔고, 어디에 취직했고, 어떤 직업을 가졌고, 어떤 집안과 결혼해서 어느 동네에 살고 있는가를 가지고 자기 인생의 성적표를 받고 있다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이라는 거죠.

 

P145. 엄기호. 방금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 메시지를 매우 강력하게 던지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학교 안에서도 그렇고, 사회에서도 그렇고 공부 중독이 차별과 혐오를 굉장히 광범위하게 양산해내고 있거든요. 그 핵심에 지나친 과잉 투자와 보잘것없는 아웃풋이 있다 보니까, ‘내가 이 개고생을 해서 어떻게 얻었는데 내가 왜 쟤랑 이걸 나눠야 하지’, ‘왜 내가 쟤랑 동등해져야 하지’, 이런 생각에 용서가 안 되는 거죠. 그리고 이게 안 되면 안 될수록 중산층들은 교육을 더욱 더 특권화하려고 해요.

 

P147. 엄기호. 여전히 의미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그런 지식인들이 자식에게 내가 소위 공부를 통해서 여기까지 와봤지만 정말 별것 아니더라하고 말하기도 하잖아요. 내가 어느 정도 재산을 물려줄 수 있으니까 그 돈을 발판으로 농부가 돼든 목수가 돼든, 조금 벌고 조금 쓰는 삶을 살아라, 이건 굉장히 훌륭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P149. 부지불식간에 자기 자식을 신빈곤층으로 만든 거예요. 부모님이 아파트 팔아가지고 사교육 시켜줬으니 부자인 줄 알고 살다가, 대학 와서 자기가 신빈곤층이 되었음을 절감할 때, 이것보다 더 비참한 것이 있을까요? .....그런 학생들 말고 완전히 무기력해지는 학생들이 있어요. 가난에 대해서 조금의 면역 체계도 없는 학생들이 완전히 멘붕이 되는 거죠.

 

P151. 엄기호. 의사나 변호사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죽을 때까지 갈 수 있는데, 대기업 부장은 다 허깨비예요. 해고되면 끝이잖아요.

 

엄기호. 제가 아는 친구 중에서는 그 돈으로 온 집안 식구가 1년 동안 세계 여행을 한 집이 있어요. 그렇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불안감에 묻죠. “그러고 난 다음에 먹고사는 건 어떻게 할 거냐”, “직업은 어떻게 할 거냐”. 이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건 두 가지죠. 하나는 내가 무슨 직업을 구하더라도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서는 감수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것이고, 또 하나는 제가 사회학자니까, 뭘 하든 굶어죽지 않는 시스템을 사회에서 만들어줘야 하는 거예요. 시민 수당이든 어떤 형태든지 간에요.

 

P153. 하지현. 부모고 아이고 리스트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커요. 그런데 그 두려움을 넘어서야 돼요. “이리로 한번 가봐. 그 대신 6개월은 해봐. 그럼 대충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돼. 그런데 그게 길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는다면 그동안 시간 낭비한 게 아니라 최소한 네 인생에서 이 길은 아니라는 것은 알게 되잖아.” 이십대 초반에 얻어야 하는 것은 하고 싶다도 있지만, ‘해보니까 이건 아니다인 것을 찾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P156. 하지현. 우리나라 사람들의 3퍼센트에서 5퍼센트에 드는 수입일 텐데, 이들이 허덕허덕한다는 것은.....

 

엄기호. 강남 대치동에 사는 제 친구는 그곳을 늪이라고 표현해요. 안 시키려야 안 시킬 수가 없대요.

 

하지현 : 제가 이런 얘기를 강연에서 하면 나오는 특징적인 피드백이 있습니다.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사회 시스템이 변하지 않는 한 결국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은 나 개인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 말은 맞으면서도 현실에 맞지 않는 허황된 얘기로 들린다라는 것입니다. 사교육 안 시키고 그래서 좋은 대학 못 가고 그래서 취업이 안 되면 사회에서 듣보잡취급 받으면서 살 텐데 어떡하느냐는 거죠. 저는 그래서 더욱 더 이부분에 대한 새로운 공감대와 행동을 해낼 개인이 늘어나야 한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한 명씩 한 명씩이라도 개인의 선택의 변화가 이어지고, 그 수가 어느 순간 무시할 수 없는 수가 된 다음에는 결국 상식의 전환이라는 거대한 위상 전위를 맞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다행히 분위기는 무르익었다고 봐요. 중산층이 어려워지면서 더 이상 이 게임에 넣을 판돈이 모자란다는 현실과, 인풋 대비 아웃풋이 턱없이 맞지 않을 정도로 인풋 요구량이 현실적으로 감당할 수준을 넘어섰고, 아웃풋마저 매우 미비한 확률 게임이 되어버렸다는 점에서요. 그래서 이 게임 내지는 이 게임을 바라보는 인식 자체가 잘못되었고 여기서 벗어나야 살 수 있겠다는 인식의 대전환이 일어날 그날이 꽤 가까이 다가와 있다고 봅니다.

 

P159. 하지현. 완전히 새로운 영역의 공부가 필요해요.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가 아니라 뭔가를 알고 싶다라는 욕구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공부. 이 친구들에게 이전까지의 공부는 불쾌한 기억이거든요.

 

P163. 공부라는 것, 알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 데에는 동기가 필요하거든요. 동기는 크게 세 가지라고 생각해요. 하나는 절박감이에요. ‘이거 모르면 나 죽어’, ‘어떻게든 알아내야 해이런 것이죠. 두 번째는 경쟁심이에요. ‘쟤보다는 나았으면 좋겠어하는 욕구, 세 번째는 그냥 하고 싶어’, ‘알고 싶어이런 이상적인 목표가 있는 거예요. 저는 이 세 가지가 인간을 움직이는 추동력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문제는 이 세 가지가 전부 다 없는 친구들이 있어요.

 

P166. 하지현. ‘그렇다면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뭘까에 대해서 생각해봤어요. 첫 번째는 핵심, 맥락을 잘 잡아내는 거죠. 둘째는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많은 정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셋째가 진짜 공부를 잘 하는 것일 텐데, 이치를 깨닫는 것이죠. 큰 흐름 안에서 이게 뭘 의미하고 있고,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 나아가서는 나하고 어떤 관계가 있는가까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이겠죠.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공부는 둘째가 90퍼센트예요. 성적이 아주 잘 나오는 아이는 첫째 덕목인 맥락을 잡 잡아내서 요령이 좋죠. 정작 중요한 것은 셋째인데 거기에까지 마음이 미칠 여유가 없어요. 또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게 비극입니다. 저는 순서로 볼 때 셋째를 목표로 하면서 첫째를 중심으로 흐름을 잡고, 그리고 둘째는 필요에 의해서 노력하면 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P181.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학력간 임금 격차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거예요. 대졸자와 고졸자 간의 임금 격차가 너무 큽니다. 이 경제적 격차가 사회적, 문화적 격차로 이어지는 한 결코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요.

 

P184. 엄기호. 한국의 가장 큰 문제는 계급이 구조화가 되면서 동시에 경제적 격차도 구조화가 된다는 점이에요. 경제적 격차가 줄어드는 방식으로 또는 경제적 격차를 완충하는 방식, 이를테면 복지 제도잖아요, 그런 방식으로 계급의 구조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요.

 

P193. 공부의 블랙홀에 빠진 부모는 공부에 중독된 아이를 만들고, 그 아이들이 사회에 나온다. 공부 백 퍼센트짜리 순도 높은 존재일 뿐, 사회성, 공감능력, 유연성 같은 요소는 상대적으로 결핍된 상태다. 공부로 승부하는 나이는 20대 중반까지이고 그 후에는 다른 요소들이 더 중요할 수 있는데, 이 요소들이 모자라다고 느끼면 역시 공부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며 책과 학원을 찾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이런 악순환에 빠져 있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다. 공부라는 블랙홀이 학교를 넘어서 사회와 인생을 빨아들이고 있다.

 

P194. 더 중요한 것은 공부에 중독된 한국인이 그 독 때문에 내 인생뿐 아니라 자식의 인생도 망가뜨리고, 더 나아가 사회구조까지도 동력을 잃어버리게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그 길로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성실하게 열심히 한다고 해도 끝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올 것이라 믿고 싶지만, 이 대담에서 누누이 반복했듯이 그럴 확률은 급격히 작아진 것이 현재 우리 사회다.

 

모두가 미쳤어, ”이건 아니야를 외치면서도 그 트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아는 도둑질이 이것뿐이라는 점도 있고, 나만 혼자 빠져나갔다가 혼자서만 불리해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강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이슈로 비판을 하면서도 정작 내 아이라는 개인의 문제가 되는 순간 이전의 합리적 상식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멈춘 채 하던 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P195. 이 대담을 시작으로 한 명이라도 더 이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생각의 전환과 용기의 불씨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공부 중독에서 벗어나 다른 트랙에 선 사람이 늘어날수록 공부라는 블랙홀의 중력장은 힘을 잃을 것이다. 차곡차곡 쌓여서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어설 정도의 참여자가 모이고 나면, 블랙홀은 그 위력을 잃고 사라져버릴 것이라 기대하고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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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2. 미국 독립선언문은 이렇게 단언한다.

 

우리는 다음의 진리가 자명하다고 믿는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이들은 창조주에게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를 포함하는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부여받았다.”

 

P166. 볼테르는 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하인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는 마라. 그가 밤에 날 죽일지 모르니까.”

 

P170.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상상의 질서가 정확히 어떻게 삶이라는 직물 속에 짜 넣어졌는지를 설명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조직화하는 질서가 자신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만드는 주요 요인은 세 가지이다.

1. 상상의 질서는 물질세계에 단단히 뿌리 내리고 있다.

2. 상상의 질서는 우리 욕망의 형태를 결정한다.

3. 상상의 질서는 상호 주관적이다.

 

P173. 낭만주의는 우리에게 인간으로서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하려면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고 속삭인다..... 이 모두를 실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반복되는 일상과 친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먼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다양성을 권하는 낭만주의는 소비지상주의와 꼭 들어맞는다.

 

P211. 부당한 차별은 시간이 흐르면서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심해질 수 있다. 돈은 돈 있는 자에게 들어오고, 가난은 가난뱅이를 방문하는 법이다. 교육은 교육받은 자에게, 무지는 무지한 자에게 돌아가게 마련이다. 역사에 한번 희생자가 된 이들은 또다시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사회정치적 차별에는 논리적, 생물학적 근거가 없으며, 우연한 사건이 신화의 뒷받침을 받아 영속화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훌륭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P246. 기원전 첫 밀레니엄 동안, 보편적 질서가 될 잠재력이 있는 후보 세 가지가 출현했다.


1. 경제적인 것, 화폐 질서

2. 정치적인 것, 제국의 질서

3. 종교적인 것,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P308. 우리에게 알려진 최초의 일신교는 기원전 1350년 경 이집트에서 나타났다. 파라오 아케나텐은 이전까지 이집트 만신전에서 그저 그런 위치를 차지하던 아텐신이 사실은 우주를 지배하는 최고 권력이라고 선언했다.

 

P313. 이신교는 이른바 악의 문제에 간명한 해답을 주기 때문에 매우 매력적인 세계관이다. 이 유명한 문제는 인간의 사상에서 가장 근본적 관심사 중 하나다.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할까? 왜 고통이 존재할까?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일신론자들은 이런 물음에 대답하려면 지적인 곡예를 부려야만 했다.

 

널리 알려진 하나의 설명에 따르면, 이것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는 신의 방식이라고 했다. 악이 없다면 인간은 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할 필요가 없으므로 자유의지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직관에 반하는 답으로서, 즉각 수많은 새로운 의문을 낳는다.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악을 선택하도록 허락한다. 많은 사람이 실제로 악을 택하며, 일신교의 정통적 설명에 따르면 이런 선택은 반드시 신의 벌을 부른다. 그러나 만일 그 인물이 자유의지로써 악을 선택하고, 그 결과로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신이 미리 알았다면, 신은 왜 그를 창조했을까? .....아무튼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일신론자들이 악의 문제에 쩔쩔매고 있다는 것이다.

 

P314. 요약하면, 일신론은 질서를 설명하지만 악 앞에서 쩔쩔맨다. 이신론은 악을 설명하지만 질서 앞에서 당황한다.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논리적 방법이 하나 있다. 온 우주를 창조한 전능한 유일신이 있는데 그 신이 악한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신앙을 가질 배짱이 있는 사람은 역사상 아무도 없었다.

 

P321. 고타마는 집착 없이 실체를 있는 그대로 느끼게끔 훈련하는 일련의 명상기법을 개발했다. 이 방법은 우리 마음이 지금과 다른 어떤 경험을 하고 싶은가?”보다 지금 나는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온 관심을 쏟도록 훈련시킨다.

 

P327. 인본주의


1.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2. 사회주의적 인본주의

3. 진화론적 인본주의


오늘날 가장 중요한 인본주의 분파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의 주된 계명들은 이런 내면의 목소리가 지닌 자유를 침입이나 손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계명들을 통칭하여 인권이라고 부른다.

 

P328. 그런데 영원한 영혼과 창조주 하나님에 의지하지 않을 경우, 자유주의자로서 사피엔스 개개인이 뭐 그리 특별한지를 설명하기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어려워진다.

 

또 다른 중요한 분파는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다.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성이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것이라고 믿는다....자유주의적 인본주의가 개개인의 최대한의 자유를 추구하는 데 반해,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모든 인간의 평등을 추구한다. 사회주의자에 따르면 불평등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최악의 모독이다.

 

P329. 전통적 일신론의 속박에서 벗어난 유일한 인본주의는 진화론적 인본주의로, 가장 유명한 예는 국가사회주의, 즉 나치다. ...인류를 보편적이고 영원한 무엇이 아니라 진화하거나 퇴화할 수 있는, 변하기 쉬운 종으로 보았다. 인간은 초인으로 진화할 수도, 인간 이하로 퇴화할 수도 있었다.

 

P332. 나치는 인간을 혐오하지 않았다. 나치가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인권, 공산주의와 싸운 것은 그들이 오히려 인간을 찬양하며 인류의 위대한 잠재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사사키 아타루의 책에 따르면 유발 하라리의 관점은 반 쯤 진실이다. 인류의 위대한 잠재력을 믿었다기보다는 오로지 히틀러 자신만을 위버멘쉬로 믿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이는 예컨대 미셀 푸코도 강의에서 극명하게 지적하고 있고, 피에르 르장드르도 분명히 독일 국가의 절대적 자살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실제로 히틀러는 총통명령 전문 71호에서 이 세상의 다른 모든 민족을 멸망시키라는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독일인의 생존 조건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역시 자신의 죽음의 순간과 모든 타자, 모든 세계의 죽음의 순간과 일치시키는 것을 절대적 향락으로 꿈꾸었던 것입니다.

 

-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P173.

 

P340. 역사는 결정론으로 설명될 수도 예측될 수도 없다. 역사는 카오스적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힘이 작용하고 있으며, 이들 간의 상호작용은 너무 복잡하므로, 힘의 크기나 상호작용 방식이 극히 조금만 달라져도 결과에는 막대한 차이가 생긴다.

 

역사는 이른바 2단계 카오스계다. 카오스계에는 두 종류가 있다. 1단계 카오스는 자신에 대한 예언에 반응을 하지 않는 카오스다. 가령 날씨는 1단계 카오스계다. 날씨는 무수히 많은 요인의 영향을 받지만,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요인을 고려하는 컴퓨터 모델을 만들어 점점 더 정확하게 예보할 수 있다.

 

2단계 카오스는 스스로에 대한 예측에 반응하는 카오스다. 그러므로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시장이 그런 예다. .....정치도 2단계 카오스계다.

 

P342. 그러면 왜 역사를 연구하는가? 물리학이나 경제학과 달리, 역사는 정확한 예측을 하는 수단이 아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미래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다. 우리의 현재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우리 앞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P344. 문화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 위해 일부 사람들이 꾸며낸 음모가 아니다. 그렇다기보다는 우연히 출현해서 자신이 감염시킨 모든 사람을 이용하는 정신의 기생충에 더 가깝다. 이런 접근법은 때로 문화 구성요소학, 혹은 밈 연구라고 불린다.

 

유기체의 진화가 유전자라 불리는 유기체 정보 단위의 복제에 기반을 둔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진화는 이라 불리는 문화적 정보 단위의 복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P356. 하지만 현대과학은 과거의 모든 전통 지식과 다음 세 가지 점에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1. 무지를 기꺼이 인정하기.

현대 과학은 라틴어로 표현하면 이그노라무스Ignoramus 우리는 모른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2. 관찰과 수학이 중심적 위치 차지

3. 새 힘의 획득 .

 

p383. 최근 유전공학자들은 예쁜꼬마선충의 평균 수명을 두 배로 늘리는 데 성공했다. 나노공학자들은 수백만 개의 나노 로봇으로 구성된 생체공학적 면역계를 개발 중이다. 그 로봇들은 우리 몸속에 살면서 막힌 혈관을 뚫고, 바이러스와 세균과 싸우고, 암세포를 제거하며, 심지어 노화과정을 되돌릴 것이다. 몇몇 진지한 학자들은 2050년이 되면 일부 인류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p441. 스미스는 경제를 -윈 상황으로 생각하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스미스의 이론에서, 사람들은 잉이웃의 것을 빼앗아서 부자가 되는 게 아니라 전체 파이의 크기를 늘림으로써 부자가 된다. 파이가 커지면 모두에게 이익이다....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전제가 있다. 부자가 자신의 수익을 비생산적인 활동에 낭비하지 않고 공장을 새로 세우고 사람들을 새로 고용하는 데 쓴다는 전제다. 그래서 스미스는 수익이 늘면 지주나 직공은 더 많은 조수를 고용할 것이다.”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풀이할 뿐.....

 

(알려져 있다시피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들은 좀 더 값싼 노동력을 찾아 국경을 넘는다. 현 시점에 가장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곳은 말리다.)


p457. 1717년 미시시피 하류의 연안 지대는 늪지와 악어를 제외하면 그다지 매력이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미시시피 사는 여기에 엄청난 부와 무한한 기회가 있다고 떠벌렸다. ....애초에 한 주에 50리브르에 발행되었다. 122일이 되자 주식은 한 주당 1만 리브르를 돌파했다.....며칠 지나지 않아 공황이 시작되었다. 매도 물량이 늘어나자 가격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

 

프랑스 중앙은행은 가격을 안정시키키 위해 총재인 존 로의 지시에 따라 미시시피 주식을 구매 했지만, 영원히 매수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존 로는 돈을 더 찍어내도록 인가했다. 중앙은행이 주식을 더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큰손 투기꾼들은 제때 주식을 판 덕분에 대체로 큰 손실 없이 벗어났지만, 개미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p464. 이런 견해에 따르면, 가장 현명한 경제정책은 정치를 경제로부터 분리하고, 과세를 줄이고, 정부 규제를 최소화하며, 시장의 힘이 자유롭게 제 갈 길을 가도록 하는 것이다.

(한국 현 정부와 어용 경제학자들의 논리)

 

시장은 그 자체만으로는 사기, 도둑질,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다. 속임수를 제재하는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집행할, 경찰, 법원, 교도소를 설립하고 지원함으로써 신뢰를 보장하는 것은 정치체제가 할 일이다. 왕이 시장을 적절히 규율하는 업무에 실패하면 신뢰의 상실, 신용의 축소, 경기침체로 이어진다. 우리가 1719년 미시시피 버블에서 배운 교훈이 이것이었다. 혹시 잊은 사람이 있었다면 2007년 미국의 주택시장 버블과 그 결과로 일어난 신용 붕괴와 불황이 상기시켜주었을 것이다.

 

p569. 최근 러시아, 일본, 한국 과학자로 구성된 연구진은 시베리아의 얼음 속에서 발견된 매머드의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는 작업을 완료했다. 이제 이들은 현생 코끼리의 수정란에서 코끼리 DNA를 제거하고 매머드에서 복원한 DNA를 삽입한 뒤 그 수정란을 암코끼리의 자궁에 다시 집어넣는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앞으로 22개월 후에는 지난 5천 년 사이에 처음으로 매머드가 태어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이들은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매머드만으로 끝낼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최근 하버드 대학교의 조지 처치 교수는 이제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프로젝트가 완성되었으니 복원한 DNA를 사피엔스의 난자에 이식할 수 있고, 그러면 지난 3만 년 이래 처음으로 네안데르탈인 아기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P572. 미국의 군사 연구기관인 국방고등연구기획청DARPA은 곤충 사이보그를 개발 중이다.

 

2006년 미 해군잠수전센터는 사이보그 상어를 개발하겠다는 의도를 발표했다.

 

P573. 최첨단 보청기는 바이오닉 귀라고도 불린다. 귀에 이식된 이 장치는 귀의 바깥에 장치된 마이크로폰을 통해 소리를 흡수한다. 장치는 소리를 걸러서 인간의 목소리를 식별하고, 이를 전기신호로 번역한다. 신호는 중추 청각신경으로, 다시 뇌로 전달된다.

 

미 정부가 후원하는 독일 회사인 망막 임플란트는 시각장애인이 부분적으로라도 볼 수 있도록 망막에 삽입하는 장치를 개발 중이다.

 

미국의 전기 기술자인 제시 설리반은 2001년 사고를 당해 두 팔을 완전히 잃었다. 오늘날 그는 시카고 재활연구소의 도움 덕분에 두 개의 생체공학 팔을 사용한다.

 

P575. 또 다른 붉은털 원숭이 아이도야는 2008년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의자에 앉아서 일본 쿄토에 있는 생체공학 다리 한 쌍을 생각으로 제어했던 것이다. 두 다리는 아이도야보다 스무 배 무거웠다.

 

P576. 생명의 법칙을 바꾸는 제 3의 방법은 완전히 무생물적 존재를 제작하는 것이다.

 

P576.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완전히 새로운 디지털 마음을 창조한다면 어떨까? 컴퓨터 코드로만 구성된 그 마음이 자아의식, 의식, 기억을 다 갖추고 있다면? 이 프로그램을 컴퓨터에서 실행하면 그것은 인격체일까? 그것을 지우면 살인죄로 기소될까?

 

2005년 시작된 블루브레인 프로젝트는 인간의 뇌 전부를 컴퓨터 안에서 재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만일 성공한다면, 이것은 생명이 비유기물의 영역으로 뛰어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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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가 2016-03-10 08: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님 정리는 핵심을 잘 집어주셔서 책 안사도 님 정리보면 다될듯 얄밉다 님 능력

시이소오 2016-03-10 08:47   좋아요 1 | URL
ㅋㅋ 안그래요. 정리 개념으로 적기보단 인상적인 문구만 적어 놓았습니다. 아마도 민정식님이 책을 읽으셔서 그렇게 느끼실지도 ^^;
 
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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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 줌파 라히리 제임스 설터

 

톰 행크스의 말처럼 <스토너>는 그저 대학에 가서 교수가 된 사람의 연대기다. 그렇지만 분명 매혹적인 이야기다. 이 소설엔 나를 매혹시키는 세 장면이 있다.

 

첫 번째 장면 : 이런 멘토를 만났더라면.

 

스토너는 집안의 농사일을 위해 농과대학에 진학한다. 2학년 1학기 때 누구나 듣는 교양과목인 영문학 개론 강의가 결국엔 그의 인생 행로를 결정지을 줄이야! 스토너는 아처 슬론 교수의 지도에 따라 책을 읽고 또 읽지만 항상 낙제를 겨우 면할 수준이었다.

 

원래 목표로 하던 농과 수업은 뒤로 하고 점점 더 스토너는 영문과 수업을 늘려가더니 아예 전공 자체를 영문학으로 바꿔버린다. 그가 4학년이 되었을 때, 아처 슬론이 그를 교수실로 부른다.

 

모르겠나스토너 군?” 슬론이 물었다. “아직도 자신을 모르겠어?

자네는 교육자가 될 사람일세.”

 

스토너는 아처 슬론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지 묻는다. 슬론은 대답한다.

 

사랑일세. 자네는 사랑에 빠졌어.”

 

슬론은 스토너도 미처 깨닫지 못한 그의 문학에 대한 사랑을 간파한다.

미래에 불안해하고 방황하는 젊은이 앞에 진로를 정해주는 멘토가 나타나는 것만큼

근사한 일이 있을까. ‘넌 이걸 하기 위해 태어났어.’라고 말해주는 멘토가 있었더라면

나의 삶은 지금과 다른 모습이지 않았을까.

 

스토너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강단에 서 학생들에게 40년 간 영문학을 가르친다.

 

두 번째 장면 : 이런 사랑을 했더라면

 

스토너는 첫눈에 사랑에 빠진 이디스에게 청혼을 하고 결혼을 하지만 신혼 첫날부터 불행한 결혼 생활을 이어간다. 그는 젊은 강사인 캐서린 드리스콜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그녀 역시 스토너를 사랑한다. 바야흐로 불륜으로 접어든다.

 

욕망과 공부.” 캐서린이 한 번은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건 그것뿐이죠, 안 그래요?”

스토너가 보기에는 딱 맞는 말 같았다. 이것이 그가 살면서 터득한 것들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욕망과 공부를 달리 표현하면 사랑과 책이다.

스토너는 책꽂이를 들일 정도로 많은 책을 캐서린의 집에 갖다 둔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서 책을 읽거나 논문을 쓴다.

 

스토너는 의자에 널브러지거나 침대에 누운 자세로 역시 그녀처럼 공부에 몰두했다.

그러다가 가끔 두 사람은 시선을 들어 서로를 향해 빙긋 웃은 뒤 다시 읽던 자료로 눈을 돌렸다. 때로 스토너가 책을 읽다가 눈을 들어 항상 머리카락이 덩굴손처럼 덮고 있는 그녀의 가느다란 목과 우아한 곡선을 그린 등을 지긋이 바라볼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느긋한 욕망이 천천히 차분하게 솟아나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등 뒤에 서서 어깨에 가볍게 팔을 올렸다. 그러면 그녀는 등을 똑바로 펴면서 고개를 젖혀 그의 가슴에 기댔다. 그의 양손이 헐렁한 로브 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젖가슴을 부드럽게 만졌다. 그렇게 사랑을 나누고 난 뒤 두 사람은 한동안 조용히 누워 있다가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두 사람의 사랑과 공부가 마치 하나의 과정인 것 같았다.

 

책을 읽다 서로를 바라보다 사랑을 나누다 도로 책을 읽다......

이 장면에서 정신이 약간 혼미해졌던 것 같다. 너무 너무 너무 매혹적이다.

이건 정말이지....... 천국이다. 에로틱하기보단 그저 따스하다.

저 따스함을 표현하기에 나의 언어는 절대적으로 초라하다.

 

세 번째 장면 : 이렇게 죽을 수 있다면

 

스토너는 대학을 은퇴하여 암 판정을 받고 수술대신 그의 집에서 조용히 죽음을 기다린다.

 

그는 고개를 돌린다. 협탁 위에 오랫동안 손도 대지 않은 책들이 쌓여 있었다. 그는 잠시 손으로 책들을 만지작거렸다. 가늘어진 손가락, 관절의 섬세한 움직임이 놀라웠다. 그 안의 힘이 느껴져서 그는 탁자 위에 어지럽게 쌓여 있는 책 더미에서 손가락으로 책 한 권을 뽑아냈다. 그가 찾고 있던 그 자신의 책이었다. 손에 그 책을 쥔 그는 오랫동안 색이 바래고 닳은 친숙한 빨간색 표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이 책이 망각 속에 묻혔다는 사실,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 책의 가치에 대한 의문은 거의 하찮게 보였다. 흐릿하게 바랜 그 활자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될 것이라는 환상은 없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그의 작은 일부가 정말로 그 안에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는 책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그 책은 그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는 손가락을 책장을 펄럭펄럭 넘기며 짜릿함을 느꼈다. 마치 책장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짜릿한 느낌은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그의 살과 뼈를 훑었다. 그는 그것을 어렴풋이 의식했다. ......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자 책이 고요히 정지한 그의 몸 위를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빨리 움직여서 방의 침묵 속으로 떨어졌다.

 

감동적인 죽음이다. 운명의 순간, ‘그의 작은 일부가 앞으로도 있을 책장을 펼치며 그는 짜릿함을 느낀다. 책 쓴 사람들이 어찌나 부럽던지.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필립 로스가 떠올랐다. 대학 사회가 배경이라는 점, 학생과의 불화 때문에 당하는 불이익, 불륜 혹은 섹스라는 소재 등이 로스의 소설과 비슷했다. 특히 주커먼 시리즈 중에서도 <휴먼 스테인>. 콜먼은 출석부를 부르던 중 출석치 않은 두 흑인 학생을 ‘spooks’라 불렀는데, 이 단어 때문에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오해를 산다. 콜먼은 결국 학교와 타협하지 않다 교수직을 사직한다.

스토너는 스토아적인 사람이란 뜻일 것이다. 그는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쟁취하는 성격이라기보단 관조하고 인내한다. 그러나. 스토너 역시 콜먼처럼 자신의 신념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스토너는 곤경에 처할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학과장이 될 로맥스가 추천하는 찰스 워커의 박사 과정을 실력미달이라는 이유로 통과시키지 않는다. 이 일로 그는 은퇴하는 그날까지 로맥스로부터 불이익을 당한다.

 

스토너에게도 매스터스와 고든 리치라는 대학 친구가 있었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매스터스와 리치는 군대에 자원하지만 스토너는 대학에 남기로 결정한다. 고든 리치는 돌아와 그와 마지막까지 학교를 지키지만 매스터스는 입대한 지 1년 만에 사망한다.

 

주요 인물인 듯 보이는 캐릭터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여성 캐릭터 때문에 줌파 라히리의 <저지대>가 떠올랐다. <저지대>가우리도 이상한 캐릭터지만 <스토너>의 이디스만큼 괴상망측한 여성 캐릭터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가우리를 이상하다고 해서 성차별주의자로 낙인찍혔는데, 숙녀님들, 그래도 가우리는 좀 이상하지 않나요? ) 줌파 라히리는 제임스 설터에게 부끄러울 정도로 빚을 졌다고 말했다. 존 윌리엄스는?

 

<스토너>를 여성 화자로 다시 쓴다면 <저지대>와 비슷하지 않을까?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들의 바스락거림, 취기가 도는 문장은 다분히 제임스 설터를 연상시킨다. 설터나 존 윌리엄스의 문장을 읽을 때면 햇빛 찬란한 바닷가, 황금빛 모래알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듯한 느낌? 혹은 어디선가 짙은의 노래가 들려오는 듯하다.

 

설터의 소설이나 <스토너>를 읽고 우는 것은 슬퍼서라기보단 아름다워서다.

이런 아름다움이 결국엔 소멸할 운명이라는 자각 때문에 우는 것이다.

이 아름다움의 덧없음을 극복할 수 없음에

눈물 흘리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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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가 2016-03-03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을 읽고 있는데 너무 사실적인 인간의 욕망과 본능을 들어내는것 같아 왠지 불편한중에 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책장에 꽂혀있는 스토너를 읽으며 마음을 달래볼까 합니다

시이소오 2016-03-03 12:22   좋아요 0 | URL
저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읽으며 멘붕이었어요 ^^;

징가 2016-03-03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긴 한데 좀 기분더럽다는느낌이라 할까요? 저도 전형적인 꼰대가 되어가는건 아닌가 합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벗어난 생각에 이리도 불편해하니

시이소오 2016-03-03 12:35   좋아요 0 | URL
잔혹동화죠. 잔혹하지만 어쩌겠어요. 그게 감히 현실보다 잔혹하다고 말할 순 없으니^^;;
그런 현실을 외면하는 게 더 잔혹한 일인지도 모르죠. ^^;;

2016-03-03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명히 <저지대>를 읽었는데 가우리는 기억이 나질 않네요. <스토너>의 이디스는 결코 인연을 맺고 싶지 않은 여자라는 기억이 생생한데요...

시이소오 2016-03-03 12:39   좋아요 0 | URL
수바시와 우다얀의 여자 가우리요. 여자 주인공. 기억 나실텐데...^^
우다얀이 죽자 다시 수바시와 결혼해 영국으로 가서 딸 벨라를 버리고
철학 교수가 되잖아요.
그럴 수 있다 싶은데도 눈곱만큼의 모성이 없다는 게 도무지 이해불가였어요. ^^

2016-03-03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시이소오님 설명을 들으니까 떠올랐어요. 저는 훗날 가우리의 선택보다도 남편의 형과 재혼하게 되는 상황이 충격이라면 충격이었어요. 시어머니에게도 소박 맞았던 것 같은데 동정도 가고...^^

시이소오 2016-03-03 12:58   좋아요 0 | URL
소설에서 화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는 소설 같습니다.
객관적 화자였다면 가우리는 남편이 죽자 남편 형(시아주버니)을 꼬셔 다시 결혼해 인도를 탈출,
영국으로 가자 딸과 남편을 버리고 도망친 나쁜 년으로 보이지 않았을까요?

가우리를 사랑한 수바시는 `공사`당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해요 ^^;;




2016-03-03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바시가 침착하고 온정적인 화자였던 것 같기는 해요. ^^

시이소오 2016-03-03 15:17   좋아요 0 | URL
수바시나 스토너나 둘 다 스토아적인 캐릭터네요 ^^

2016-03-03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말에 공감이 가요. 스토아적인 캐릭터. 그 분류군에 들어갈 만한 캐릭터예요 정말. ^^

가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보바리즘적 캐릭터 같고.

시이소오 2016-03-03 15:29   좋아요 0 | URL
가우리는 자칫하면 페미니즘 논쟁을 불러일으킬만한 캐릭터죠. 조심하셔야 ㅋ

2016-03-03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페미니즘에 우호적인 입장이지만, 조심은 하겠습니다. ^^

2016-03-03 2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3-03 18:06   좋아요 1 | URL
자신이 살기위해 사랑했던 남편을 떠올리게 하는 딸을
버려야 했던 선택이 안타깝기도 합니다만 수바시와 딸 벨라를 생각해보면 그녀가 자신의 책임감으로부터 도망친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녀의 삶이 단순히 페미니즘적 저항`이라 생각진 않아요. 가우리를 이야기하다보면 그런 논쟁들이 불거질 우려가 있다는거였죠. ^^;

펠릭스 2016-03-05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토너 내용을 잘 구분하여 써 주셨네요.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내용을 읽다보면 지금의 한국의 교수사회의 분위기와도 비슷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어느 조직이나 그 조직내의 문화가 있는데도요.
그것은 그 조직의 임무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시이소오 2016-03-05 09:45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스토너를 읽으면서 대학교수도 꽤 매력적인 직업처럼 보였어요. 좋아하는 문학을 가르친다는 게 부럽더라구요^^

singri 2016-03-05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줌파라히리 ㅡ 제임스셜터 읽는중인데 꼬리로 스토너가 연결됐네요 .언제 이런 긴글에 다 읽었다는 꼬리만이라도 올릴수 있길 바래봅니다ㅋㅋㅋ

시이소오 2016-03-05 09:51   좋아요 0 | URL
줌파 라이리, 설터, 스토너 리뷰 기대할께요^^
 

 

그런데 90년대 들어서면서 사람들이 사회주의는 끝났다고 말하던 시기에 저는 이전과 다른 태도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의 탈구축적인 힘은 노골적으로 전 세계를 신자유주의로 몰아넣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사회주의, 반자본주의를 주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이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생각을 유지하게 위해서 입장이나 말을 바꾸어야 했지요. 왜냐하면 상황이 변하면 같은 말이 다른 의미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비평을 트랜스크리틱이라고 부릅니다. 트랙스크리틱이란 항상 이동을 포함하는 비평입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에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역시 어려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받을 것이 뻔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다른 언어로 이를 표현했는데, 그 한 가지 예가 바로 어소시에이셔니즘associationism입니다. p27

 

실존주의자는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라고 생각하죠. 즉 이것은 정명제입니다. 구조주의자는 자유는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유로운 것처럼 보일 순 있지만 구조에서 벗어나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 이것은 반대명제입니다. 둘 중 어느 쪽이 옳은지를 분명하게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 명제 모두 성립하니까요. 그러니까 둘 다 칸트를 뛰어넘은 것이 아닙니다. p30

 

철학자 가운데 자유는 없다는 생각을 취한 사람은 스피노자입니다. 스피노자는 우리들이 무수히 많은 원인에 의해, 즉 자연적 필연에 따라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원인이 너무나도 복잡한 탓에 사람들은 자유라고 착각할 뿐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자유는 상상물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p31

 

주석10. 스피노자에 따르면 자유의지 혹은 초월은 표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자연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유 따위는 없고, 이는 자기 원인이라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생각하기에 일체는 신=자연 속에 있으며 그 바깥에 전지전능한 신은 없다. 초월적인 신이란 바로 자연을 넘어서는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생각하는 인간이 품는 표상에 불과하다.

가라타니 고진, <탐구2>, <윤리학21> p31

 

주석11. 자유에 관한 스피노자의 설명에 대해 가라타니는 아래의 구절을 인용한다. “인간이 자신을 자유롭다고 믿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그러한 의견의 까닭은 그들이 자신의 행동은 의식하지만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원인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신의 행동의 원인을 모른다는 것이 그들의 자유의 관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인간의 행위는 의지에 의존한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그것에 관하여 아무런 관념도 갖지 않은 채 하는 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의지가 무엇인지 그리고 의지가 어떻게 신체를 움직이는지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에티카> [정리 35의 주해] p31

 

마르크스나 프로이트도 이와 같은 스피노자 계통의 사상가입니다.

 

저는 이런 스피노자의 결정론을 바탕에 두고 칸트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칸트의 사유가 가장 근본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칸트는 자유가 도덕적인 영역에만 있다고 말합니다. 의무를 다함으로써 사람은 자유로워진다고 말하죠.

 

일반적으로 사람은 의무를 다하는 일이 어째서 자유인가?’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모두 칸트를 비난합니다. 이에 대해 납득할 만한 해결책을 내놓은 사람은 저뿐입니다. 제 생각에 자유로워라라는 명령에 따를 때에 인간은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자유는 그와 같은 명령에서 오는 것이며 그 외에 자유는 없습니다.

 

칸트에 있어서 도덕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자유는 일반적인 의미의 자유와는 다릅니다. 칸트에게 자유는 순수하게 자기 원인적인 것, 자발적인 것, 주체적인 것과 같은 말입니다. 편의상 도덕과 윤리를 구별해서 설명해보죠. 도덕은 공동체의 규범이고 윤리는 자유와 관련된 것입니다.

 

도덕은 공동체의 규범입니다. 칸트는 이처럼 공동체의 규범을 따르는 것은 타율적인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도덕을 개인의 행복이나 이익의 문제로 여기는 공리주의입니다. 이조차도 칸트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연적 본능에 지배당하는 타율적인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윤리는 이와는 다른 자유에 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유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방금 말했듯이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에 따른다는 것, 그리고 타인 역시 자유로운 존재로 대하는 것,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는 명령에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유는 책임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에 따른다는 것은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나버린 일이 자신의 자유에 의한 것이었다고 받아들이는 것, 즉 책임을 지는 일입니다.

 

자본주의는 단순하게 말하면 상대를 수단으로서만 취급하는시스템입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란 상대를 수단으로서만 취급하는 것을 자유롭게해도 좋다는 생각입니다.

 

칸트는 오히려 공적사적이라는 가치부여 그 자체를 전도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공적이라고 하면 고상하고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사실은 사적인 차원이야말로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 점에 관해서 일본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데모 따위를 해봤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데모가 발생했지요. 이것은 제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이는 젊은 사람들이 일으킨 것이겠죠. 인간은 아무리 설득해도 움직이지 않지만, 구조적인 원인이 명백해지면 급격하게 움직이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주체의 욕망은 무엇일까요? 이를 그 용어 자체로 정의내리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조금 더 말해보자면, 타인의 욕망이 벗겨진 뒤에 드러나는 것, 즉 남겨진 주체의 욕망이라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소비하려는 욕망은 타인의 욕망입니다만, 이것이 사라진다고 해서 주체의 욕망까지 모두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주체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 사라질 때라야 비로소 스스로를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질문에서 언급한 바디우의 사랑 개념도 그렇습니다. 타인의 욕망이 사라진다고 해서 사랑도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가 되어야 진정한 사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교환양식에는 A: 증여 답례 같은 상호부조적 공동체의 호수성의 원리, B : 약탈 재분배 같은 국가의 지배와 보호의 원리, C : 상품 교환이라는 개개인의 자유로운 합의에 기초한 화폐소유자와 상품소유자와의 교환 원리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D는 어떤 의미에서 A를 고차원에서 회복한 것 혹은 상상적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모습을 이루게 된 근대자본제 사회에서는 교환양식 C가 지배적입니다. 그렇지만 앞서와 마찬가지로 교환양식 AB도 각기 변형된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세계 = 경제, 즉 근대세계시스템입니다.

 

저는 특별히 오늘날의 이 시스템을 자본 =네이션=국가라는 접합체로 봅니다. 그리고 저의 과제는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각기 다른 교환양식의 기원까지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자본 =네이션=국가 체제를 넘어선 사회가 있는데 이는 교환양식 D가 지배적인 사회구성체입니다. 칸트도 이런 사회를 생각했는데, 이것이 바로 세계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봉건 노예는 소비자가 아니지만, 프롤레타리아는 소비자입니다.

 

데마고그 :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시민과 민중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데마고고스를 어원으로 하는 데마고그는 그 당시에는 비난의 의미로 쓰이진 않았지만, 현대에 들어 대중의 감정과 편견에 호소하여 권력을 취하려는 선동적인 정치가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사실과 다른 내용을 허위선전하는 행위를 데마고기 혹은 데마라고 한다. 이런 데마고기에 능숙했던 대표적 인 인물이 아돌프 히틀러이다.

 

다중 :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주장한 개념으로 단순히 많은 수의 일반인들을 지칭하는 대중과 다르며, 동일한 목적의식의 상대인 민중과도 구분된다. 다중은 각자의 정체성을 가지며 개별적으로 행동하며, 특정한 사안에 동의할 때 개별성을 유지하면서 공동으로 행동한다. 여기에는 영원성의 관점에서 보는 존재론적 차원과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역사적 차원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존재론 적 차원의 다중은 역사적 힘들의 복합적 상호작용에서 이성과 열정을 통해 자유를 창조하는 존재이다. 두 번째 차원인 역사적 다중은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다중이다. 제국의 출현 조건들을 토대로 해서 다중을 발생시키려면 하나의 정치적 기획이 필요하다.

 

그런데 가라타니 고진은 이러한 다중의 개념에 반대하며, 이에 대한 몇 가지 근거를 들고 있다. 그중 하나가 분열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의 세계적 반란이라는 비전을 내놓았지만 그러한 대항 운동은 세계적인 연대가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다중>, 가라타니 고진, <세계사의 구조>

 

세계공화국은 인간의 이념이나 선의에 의해 실현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반사회적 사회성 즉, 전쟁에 의해 실현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군비를 포기하는 것이 곧 증여입니다.

 

구성적 이념과 규제적 이념 : 구성적 이념은 현실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이념을 말한다. 이는 건물의 설계도와 같다. 반면에 규제적 이념은 현실에서 실현될 수는 없지만 하나의 이상향으로 현실을 비판할 근거가 되는 이념이다. 말하자면 유토피아와 같은 개념이다.

 

저는 세계 전쟁이 임박했다고 생각합니다......확실히 자본주의는 끝을 맞이하게 될 테지만, 엄청난 피해와 희생자들을 수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막는 것이 핵심입니다. 다가오는 전쟁에 대항하는 운동은 앞으로 교환양식 D를 도래하게 될 것입니다.

 

청일전쟁 때 일본에게 패한 이후 강유위라는 사상가가 등장합니다. 그의 사상은 대동사회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즉 대동사회란 유교에서 유래한 것인데, 중국에서는 이를 많이 무시했지요. 하지만 앞으로는 강유위의 이러한 사상이 큰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국과 제국주의는 다른 것입니다. 제국은 근대 이전 광역국가의 형태입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이라는 하나의 제국이 있었고 그 주변의 여러 나라들은 조공을 바치는 관계로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이 조공은 실제로는 중국 왕조 측의 답례가 더 많은 호수적 교환 관계로 이루어졌습니다. 제국은 이러한 교환으로 평화체제를 구축하려 했지요.

 

이에 비해 제국주의는 근대의 네이션 =스테이트가 확장되어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제국주의적 지배의 본질은 상대를 직접적으로 수탈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자유로운 교환을 통해서 수탈하는데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관세권을 빼앗는 것, 혹은 강제적인 자유무역 등이 그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신자유주의라고 부릅니다.

 

제가 봤을 때 각각은 거의 60년 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 세계사는 120년마다 비슷하게 진행된다는 논의가 도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에 일어날 세계 전쟁을 막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일어날 전쟁은 자본과 국가가 생존을 위해 일으키는 것이니까 그것을 막는 것은 곧 자본과 국가의 연명을 저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평화 운동과 혁명 운동은 별개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칸트가 말하는 영구평화와 마찬가지로 국가 간의 적대성이 없어진 상태, 즉 국가가 지양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 바로 세계동시혁명입니다.

 

미국이 물러서지 않으면 동아시아의 재구축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뒤집어 보면 미국은 그 점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중국과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부추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반미 운동을 하는 것만으로는 미국을 아시아에서 내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동아시아에서 미국 이외에 전쟁의 위기를 초래하는 요소는 없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상태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남북의 대립을 해소하는 것은 동아시아 전체로 보았을 때 매우 중요합니다.

 

수니파와 시아파. : 마호메드의 후계자를 누구로 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 대립에서, 마호메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만이 정당한 후계자라고 주장한 분파가 시아파’, 알리 외에도 여러 명을 후계자로 인정한 것이 수니파이다. 수니파가 코란해석과 마호메트의 말을 전적으로 중시한다면, 시아파는 알리와 그 후선들의 코란해석을 신봉한다. 시아파가 다수인 이란과 이라크 등의 국가에서 종교 지도자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세계 무슬림의 85%는 수니파이며, 15%의 시아파 대부분은 이란과 이라크에 집중해 있다.

 

고든 차일드가 주장한 농업혁명입니다. 농업을 시작하고 농업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은 정주하고, 계급이 생겨나며, 국가가 형성되었다는 견해입니다. 저는 이것과 반대로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을 농업혁명이나 신석기혁명이 아니라 정주혁명이라고 부릅니다. 본격적인 농경이나 목축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인간은 정주하고 있었습니다. 농업은 정주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농업에서 국가가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국가로부터 농업을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옳지요.

 

지금의 터키에 해당하는 이오니아라는 지방의 자연철학이 제가 생각하는 철학의 기원입니다. 이 지방의 폴리스에는 그리스의 다수자 지배 원리인 데모크라시와는 다른, ‘이소노미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동등자 지배라고 하기도 하지만,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이는 지배가 없다는 말입니다. 당시 아테네에 있었던 것은 데모크라시입니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이소노미아에서는 자유와 평등이 상반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소노미아에서는 그곳이 싫어지거나 문제가 생기면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토지가 없는 사람도 다른 사람의 땅에서 노예나 노동자로 일하기보다는 다른 곳으로 이동했습니다.....자유와 평등이 부딪치지 않습니다. 이동해버리면 그만이니까요.

 

레베카 솔닛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전쟁이나 재해의 무질서 위에서만 새로운 길로 갈 수 있는 용기가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폐허나 파국에 의해서만 국가에 의한 질서와는 다른 자생적인 질서를 가진 상호부조적 공동체가 등장한다는 말씀을 한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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