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전문성으로 부 축적 피나는 노력으로 수성
[뉴스메이커] 2003년 07월 04일 (금) 15:27
말단 월급쟁이에서 백만장자 대열 오른 ㄱ씨 이야기
해외 자본 유치 전문가인 ㄱ씨는 전형적인 자수성가 스타일의 백만장자다. 한 증권사 말단사원으로 입사, 회사가 부도나 실업자 신세로 전락하기도 했던 그는 현재 수백억원의 재산가이자 모금융회사의 오너, 재벌2세 모임 리더를 맡고 있는 재계의 숨은 실력자가 돼 있다. ㄱ씨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언론에 공개되는 것을 꺼리고 자신이 소유한 회사에서도 대표이사직은 맡지 않는다. 몇몇 기자가 그와 꾸준히 접촉하고 있지만 그에 관한 기사는 나오지 않는다. 기자들은 그가 둘러친 장막을 걷어내지 않는 대가로 재계의 뒷얘기를 얻는다.
▲거액 해외자본 유치 ㄷ그룹 회생
말단 월급쟁이였던 ㄱ씨가 백만장자로, 또 재계의 실력자로 성장하는 과정은 책으로 써도 소설 한 권 분량이 될 정도로 파란만장하지만 간단히 소개하자면 이렇다. 증권사에서 해외 투자자를 담당하던 그는 외국어에 능통하게 됐고, 자연스럽게 그들과 친분을 쌓아가고 있었 다. 그러던 중 ‘금융계의 기린아’로 통하던 ㄴ씨의 눈에 띄게 된 그는 회사를 옮겨 본격적인 해외투자 전문가로서 수업을 쌓아갔다. 하지만 ㄴ씨가 불미스런 사건에 휘말려 해외로 도피하고, 외환 위기까지 닥치면서 회사는 부도가 나고 말았다. 그는 하루아침에 빈털터리 실업자로 길거리에 내쫓기는 신세가 됐다.
40을 바라보는 나이에 실업자가 된 ㄱ씨에게 남은 것은 외국어 구사 능력과 해외 인맥이 전부였지만 그를 실업자로 만든 외환 위기는 ㄱ 씨에게 예상치 못한 기회를 제공했다. 어디 할 것 없이 해외자본 유치가 급했던 기업들은 전문가를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ㄱ씨의 존재를 찾아냈다. 1달러가 아쉬웠던 시기였던 만큼 그의 과거를 묻는 기업은 없었다.
ㄱ씨는 벼랑끝에서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 외자유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1998년 유동성 부족으로 부도설까지 떠돌았던 ㄷ그룹이 3천억원의 해외자본 유치에 성공함으로써 극적으로 회생한 것이 바로 ㄱ씨의 작품이다. ㄷ그룹이 거의 ㄱ씨 한 사람의 힘에 의해 살아났다는 것이 재계에 알려지자 이제 그는 더 이상 실업자가 아니었다. 국내 대표적인 기업의 오너들이 그를 찾기 시작했고, 연배가 비슷하거나 어린 후손들은 교분을 쌓기를 원했다. 이들과 자주 접촉하던 그는 아예 재벌2세 모임을 만들어 리더를 맡았다. 재계는 그를 통해 한 번에 수천억원씩을 움직이더라도 외부의 주목을 끌 우려가 없다는 점에서 더욱 신뢰를 보냈다.
자기 자본 한푼 없이 전문성과 노력만으로 수백억원, 어쩌면 수천억 원에 이를지도 모를 부를 쌓은 그의 축재 과정과 하루 일과는 백만 장자를 ‘부모 잘 만나 호강하는 존재’나 ‘벼락부자’쯤으로 폄하 하는 일부의 시각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ㄱ씨는 양 손목에 2개씩, 모두 4개의 시계를 차고 다닌다. 더구나 이 시계들은 모두 2개의 시간대를 표시하는 ‘듀얼 타임’ 제품이다. 결국 8개의 시계를 갖고 다니는 셈이다. 그에게 이처럼 많은 시계가 필요한 까닭은 그의 고객이 전 세계에 퍼져있기 때문이다.
이러다보니 ㄱ씨의 하루는 시작과 끝이 따로 없다. 국내에서 업무가 끝나도 해외 고객과의 전화회의·화상회의 등이 이어진다. 특히 각 나라별로 시간대가 다르다 보니 ㄱ씨는 남들의 하루 일과가 끝난 밤 시간에도 계속 업무가 이어진다.
이 때문에 ㄱ씨는 입술이 늘 부르터 있다. 누적된 피로를 이기지 못해 병원 신세를 진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하루 일과 시작과 끝이 따로 없어
하지만 ㄱ씨의 실제 생활을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은 그의 화려한 외양에 부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ㄱ씨의 모습을 자주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한 특급호텔 야외 수영장이다. 이 호텔 VIP클럽 회원인 그는 주로 호텔 뷔페에서 점심을 먹은 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야외 수영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짙은 선글라스와 호텔에서 제공하는 하늘색 가운을 걸치고 누워 있는 그의 모습은 백만장자의 여유로움 그 자체다. 하지만 이 시간이 그에게는 거의 유일한 수면이자 휴식이라는 점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시간 동안 그가 잠이 들면 비서가 몰래 다가가 휴대전화를 한쪽으로 치운다. 수행비서인 ㅂ씨는 전화가 걸려오면 “회의중”이라며 길어야 2시간인 ㄱ씨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애쓴다.
ㄱ씨는 저장 용량이 무려 30GB(기가 바이트)나 되는 MP3플레이어를 항상 휴대하고 다닌다. ㄱ씨는 이 기종을 국내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어 유럽까지 날아가 구해왔다고 한다. 40대 중반인 ㄱ씨가 MP3를 지니고 다니는 이유는 무료할 때 음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세계를 무대로 뛰는 그에게는 전세계의 소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ㄱ씨는 매일세계 5대 통신사의 음성뉴스 서비스와 블룸버그 등 경제뉴스를 MP3로 전송받아 틈날 때마다 듣는다.
“한 번 들어보라”며 건네준 이어폰을 귀에 꽂자 어느 나라 말인지조차 알 수 없는 뉴스가 쉴새없이 쏟아졌다. “도대체 몇 개 국어를 구사하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그는 “고객이 구사하는 언어 수만 큼”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한다. “브리핑 수준인 국내 신문이나 방송 등의 국제뉴스로는 그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ㄱ씨의 휴대전화는 24시간 응답한다. 그렇다고 그에게 “오늘 시간 어떠시냐”고 무턱대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늘 약속이 많기 도 하거니와 그의 전화는 자동로밍을 통해 전 세계 어디서나 연결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ㄱ씨에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으로는 “한국에 계시느냐”가 적당하다.
혹시라도 서울시내 호텔 야외 수영장에서 팔자 좋게 늘어진 중년신사를 목격하게 된다면 그가 밤새 외자유치 협상에 지친 ㄱ씨는 아닐지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세월 좋구나”라며 혀를 차기 전에 말이다.
정일환 기자 wha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