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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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의 내면을 말로 설명하겠다는 생각을 접어라. 굳이 말해야 한다면, 아름답게 말하려 하지 말고 정확하게 말해라. 아름답게 쓰려는 욕망은 중언부언을 낳는다. 중언부언의 진실은 하나다.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을 장악하고 있지 못 하다는 것.

장악한 것을 향해 최단거리로 가라. 특히 내면에 대해서라면 문장을 만들지 말고 상황을 만들어라." 그러고는 덧붙인다. "카버를 읽어라."  -P285

 

  '느낌의 공동체'는 작가가 규정한대로 두 번째 평론집이 아니라 첫 번째 산문집으로 읽혔다. 그동안 내게 평론은 무조건 무겁고, 본문 중의 책을 읽지 않았을 때는 글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전작 '몰락의 에티카'는 꽤 들고 다녔지만 여전히 마치지 못하고 군데군데 밑줄만 무성한 상태이다. 그런데 이 ‘느낌의 공동체’는 많은 작가들을 다루고도 다양한 주제와 다양한 책들을 그만의 문체로 쉽게 읽을 수 있었기에 감히 산문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전작에서도 느꼈지만 시와 시인들을 향한 그의 애정이 이 산문집에서는 더욱 간절한 문장들로 채워져서 읽는 내내 내가 당사자 시인이라도 되는 양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그의 글이 주는 미덕은 거기 있지 않을까 싶다. 또 위에 인용한 부분처럼 베끼고 싶은 부분은 또 어찌나 많던지 옮겨 적은 분량도 꽤 된다. 옮겨 적다보면 내게 취약한 부분, 띄어쓰기의 감이 잡히고 읽었던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손가락이 아프게 몰두하는 것으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슬며시 스스로를 위안해준다.

  

  "아마추어는 말줄임표를 마치 통행 허가증처럼 사용한다. 경찰의 허가를 받고 혁명을 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말줄임표는 겸손함이 아니라 소심함의 기호다. 마침표에 대해서는 긴 말이 필요 없다. 담배는 백해무익이요, 마침표는 다다익선이다. 많이 찍을수록 경쾌한 단문이 생산된다. 이사크 바벨은 이렇게 썼다. "어떠한 무쇠라 할지라도 제자리에 찍힌 마침표만큼이나 강력한 힘으로 사람의 심장을 관통할 수는 없다." 이 글에서는 서른다섯 번 찍었다.  -P254

 

  어찌 이런 단락들을 옮겨 적지 않을 수가 있을까? 구두점 하나하나에 저토록 명쾌하고 간결한 결론이라니.

  그렇게 시작한 옮겨 적기 내용이 수첩이 빼곡하다. 또한 읽어야 할 책 목록이 가득하다. 그 사실이 행복하기도하고 불행하기도하다. 

  그는 문학평론이라는 것이 꼭 무겁고 두려운 장르만은 아니라는 것을 거듭거듭 일러주는 작가다. 모두가 입을 모아 진정성을 이야기하는데 비평가로서 그의 진정성은 비평을 위한 비평이 아닌 문학으로서 비평인 이유를 알게 한다. 일개 독자인 내게도 비수처럼 날카롭게.

  이제는 책꽂이 장식중인 두꺼운 평론집들의 먼지를 이제는 털어주어야 할 때다. 그런 생각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동안에 가슴에서 절로 우러나게 해주는 문학평론가이다. 고마워요. 

 

  " 삶이라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 이라고  그러기위해서는 모든 종류의 "선(先) 해석의 커튼"을 찢는 것이 소설의 존재이유라고 말할 때 이 말은 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의 나이 이제 팔순이다. 자신이 평생을 바친 일의 가치에 대한 변함없는 이 확신과 애정! 그러고 보면 이 해박하고 우아하고 유쾌한 할아버지는 지금껏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P312  

 

  이렇게 노골적으로 애정을 드러낸 '밀란 쿤데라'와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 '손택수' '이병률' '문태준' '김선우' 김경주' '박정대' '허수경' '김기택' '안현미' ‘김소연’ ‘이영광’ ‘황인숙’ ‘등등의 시와 시집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에서는 질책까지도 따뜻함으로 읽혀서 뭉클했다. 문학을 향한 근본적인 애정 없이는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겠지만 어느 부분은 그와 기호가 많이 비슷하다는 뿌듯함에서 비롯되었음을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치명적인 시, 용산’ - 신경민 앵커의 클로징 멘트와 경찰교신-P163, 시가 아니지만 시를 읽어내는 그의 시선 속에서 용산은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압도였고 장엄한 서사시였다. ‘그 화인火因이 진실로 불명확하다면, 그건 그 불이 목숨을 걸고 씌어진 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덧붙이자. 화염병은 시가 될 수 있지만 시는 화염병이 될 수 없다. 이 긴장을 포기하면 시는 사라지고 만다.’

  그런 글이 바로 그가 서문에서 쓰고 있는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런 줄을 알면서도 그 어떤 공동체를 향해 노를 젓는 일이다" 의 노를 젓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는 나에게 덧붙인다. '몰락의 에티카'를 마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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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 [잘 표현된 불행]과 더불어 기대, 기대 하고 있는 선생의 칼럼들. “내가 생각하는 바의 좋은 서사는 승리의 서사이다. 세상을 턱없이 낙관하자는 말은 물론 아니다. 우리의 삶에서 행복과 불행은 늘 균형이 맞지 않는다. 유쾌한 일이 하나면 답답한 일이 아홉이고, 승리가 하나면 패배가 아홉이다. 그래서 유쾌한 승리에만 눈을 돌리자는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어떤 승리도 패배의 순간과 연결돼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 역도 사실이다. 우리의 드라마가 증명하듯 작은 승리 속에 큰 것의 패배가 숨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큰 승리의 약속이 없는 작은 패배는 없다.” [출처] 황현산의 부정문 (신형철 문학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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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나무
호시노 미치오 지음, 김욱 옮김 / 갈라파고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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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어디로

     여행하는 나무-호시노 미치오지음, 김욱 옮김, 갈라파고스.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호시노 미치오 글.사진 이규원 옮김

                                           청어람미디어

  다큐 지구의눈물 시리즈3탄인 [아프리카의 눈물]을 보다가 [여행하는 나무]가 생각났다. 생각난 부분의 기억이 맞는 건지 안달이 났다. 결국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펴든 책에는 툰드라에서 야영을 하던 중에 잔뜩 찌푸린 하늘을 보며 비가 올까 걱정하는 미치오에게 인디언 알이 웃으면서 했다는 한 마디.
  “미치오, 그런 걱정하지 마. 비가 올 때는 다 이유가 있어서 오는 거야. 그칠 때가 되면 자연히 그쳐.” 자연의 일부인 알은 자연이 만들어주는 세계에서 안달하지 않는다. 우리가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걸 잊어버리는 우리만 작은 변화에도 기다리지 못하고 안달할 뿐. 작은 일에도 전전긍긍하고 조바심 내는 내 자신이 가여워져서 책을 다시 읽는다. 처음인 듯 새롭다. 거친 숨결 또한 어느덧 고요해진다. 
  지금의 세계 곳곳 모든 환경변화들은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 논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이 땅에서 파헤쳐지고 있는 강들은, 흐르고 싶은 곳으로 흐르지 못 할 물들은, 그 강과함께 사는 우리는 어디로 흘러가게 될까? 생각하면 우울하지만 우리는 머잖아서 우리 강 때문에 흘려야할 눈물을 다큐로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로 호시노 미치오라는 일본의 야생사진작가를 처음 만났다. 책속에는 역시 처음 만나는 알래스카의 경이로운 사진들과 영화 같은 모험과 놀라운 경험들로 가득했다. 그는 알래스카의 장대함과 그 장대함을 구성하는 연약한 것들을 사랑하고 그 생명에 대한 연민의 시선을 사진에 담아냈던 것이다.  
  그를 알래스카로 이끈 것도 헌책방에서 만난 한 장의 사진, 조지 모블리가 찍은 쉬스마레프마을의 전경이 담긴 사진을 보고 알래스카를 향한 동경어린 편지를 띄우게 된다. 운명처럼 6개월이 지나서 촌장이 보낸 답장을 받고 그는 알래스카와 마침내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여행하는 나무 본문 중에 ‘알래스카에서 온 편지’ (p170)에 그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돌이켜보면 한 줄의 문장이, 한 권의 책이, 한 장의 사진이, 한 소절의 노래가, 한 사람의 영향력이, 찰나에 가까운 어떤 한 순간이, 우리를 얼마나 다른 삶으로 이끌어주는지 놀랍게도 자주 만나게 된다. 
  [여행하는 나무]는 사진이 거의 없다. 먼저 읽은 책이 준 감동을 생각해서 주문했던 기분은 살짝 당황되면서 실망스럽다. 그러나 담담하면서도 생생한 그의 글들이 또 다른 매력의 경이로운 알래스카를 만나게 해준다. 아끼면서, 아끼면서 읽어도 책은 결국 마지막 페이지를 향하고 이제 어떤 책이 더 나았다는 비교는 스스로에게도 무색하다. 책은 시작을 여는 작가의 말부터 멋지게 읽는 이를 알래스카로 초대한다. 관광지 알래스카가 아니라 생활로서의 알래스카, 사진 속의 알래스카가 아니라 삶으로서의 알래스카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오는 이야기를 조근, 조근한 속삭임으로 듣게 된다. 

 

  [알래스카의 강변을 거닐다 보면 이 땅의 상징적인 풍경들과 마주칩니다. 강가 제방에서 수평으로 길게 누운 채 자라 있는 등피나무, 기나긴 세월 동안 조금씩 대지를 침식한 물줄기가 어느새 그 흐름을 바꿔 숲으로 향합니다. 나무들은 하나둘씩 강물에 휩싸이고, 저마다의 생을 마감합니다. 유속이 빠르고 경사가 심한 강일수록 더 많은 대지를 침식하고, 더 많은 나무들을 휩쓸어버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강물에 휩쓸린 나무들은 길고 긴 여행을 시작합니다. 이 거칠 것 없는 혼돈된 풍경을 나는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모든 존재가 늘 같은 장소에 멈춰 있지 않다는 진리를 내게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벌써 꽤 오래전 일인데, 처음 북극해 해안에 당도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나는 그때 커다란 유목 위에 앉아 있는 한 마리 티티새를 사진에 담고자 풀숲에 숨어 있었습니다. 나무가 자랄 수 없는 북극권의 툰드라에서 어떻게 이토록 근 유목이 해안까지 떠내려 올 수 있었는지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이 나무는 강물의 침식 작용에 휩쓸려 바다로 흘러나갔고, 그 후 다시 긴긴 여행 끝에 머나먼 북쪽의 해안에 당도한 등피나무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곳이 여행의 종착지였던 것입니다. 가지는 모두 떨어지고, 껍질도 완전히 벗겨진 채였습니다. 하늘을 향해 솟구치던 옛 시절은 간 데 없고, 이제 뿌리가 흉물스럽게 드러난 벌거벗은 유목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작은 티티새에겐 날개를 유지 할 수 있는 아주 요긴한 장소였겠지요. 또 이곳을 드나드는 북극여우에겐 영역표시를 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었을 겁니다. 근처에 있는 대지는 천천히 부패하는 유목을 흡수해 꽃들에게 전해줄 것이고, 그래서 완전히 썩어버린 다음에는 이곳에 꽃들이 만발할지도 모릅니다. 먼 바다에서 떠내려 온 유목이 아름다운 유목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생과 사의 관계가 마치 여행처럼 느껴졌습니다. 
  알래스카에 도착한 후로 어느덧 17년이 흘렀습니다. 한때는 뿌리 없는 풀처럼 여행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곳에 집과 가정이 있습니다. 관광객의 입장이었던 내가 이곳 주민이 된 것입니다. 그 후로는 알래스카의 풍경이 모두 새롭게 보입니다. 이 책은 그런 심정을 담아 오랫동안 기록해온 결과물입니다. 저 등피나무처럼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어쩌면 등피나무를 툰드라벌판까지 인도해준 강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곳에 버들난초가 피기 시작했습니다. 이 꽃이 만발하면 알래스카의 여름도 끝이 날 것입니다. 앞으로 한 달쯤 지나면 오로라가 밤하늘을 가득 메우겠지요. 그리고 또다시 극북의 아름다운 가을이 시작될 것입니다.] 작가의 말.

  [무한한 세께 저편으로 흘러가는 시간들은 계절을 통해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자연이란 얼마나 멋진 생명인지 매일같이 감탄할 뿐입니다. 일 년에 단 한 번뿐인 오늘의 풍광은 내년에나 다시 볼 수 있다는 기약 때문에 더 많은 그리움을 남깁니다. 오늘과 같은 그리움들이 우리들의 인생에서 과연 몇 번이나 찾아오는 것일까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생명을 품고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알래스카의 대지처럼 인간의 삶을 작고 나약하게 만드는 힘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알래스카의 가을이야말로 나에겐 그런 힘을 절감케 하는 계절입니다. ] p38, 39 
  

  이 페이지들은 내가 꼭 알래스카에서 보내 온 편지를 한 통 받은 것 같았다. 생각지도 않았던 지인이 보내 온, 아름답고도 짧은 알래스카의 가을이 담담하게 담긴 편지를 설레면서 읽고 있는 나를 볼 수 있었다.

  [카리부의 새끼가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설원에서 태어나는 것도, 한 마리의 검은방울새가 영하 60도의 추위 속에서 즐겁게 지저귀는 것도 단지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도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입니다. 모든 생명에게는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는 강인함이 있습니다. 또 너무나 쉽게 사라지는 연학함도 있습니다. 나는 생명이 가진 그 연약함 때문에 알래스카를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그저 당연한 일상이 아니라 기적입니다. 오늘 나의 심장이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p46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마다 사람의 정성이 묻어났지만, 사람의 정성이 진정한 자연의 생명력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손길을 거부하는 듯한 생명의 약동이야말로 자연의 위대한 힘입니다. ]p74

  [북극성을 볼 때마다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이 별에는 사람의 기억을 되돌리는 외로운 상념이 깃들여 있다. 그러나 수천 년, 혹은 수만 년이 흐른 뒤에는 북극성의 위치가 바뀐다고 한다. 그때쯤이면 지금 내가 바라보는 저 자리에 다른 별의 추억이 깃들 것이다. 모든 생명은 바로 이 순간에도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별도 예외일 수는 없다. 
  손만 뻗으면 곧 닿을 것 같은 하늘이 오늘따라 유난히 가까게 느껴진다. 저 하늘을 가득 메운 별빛은 몇 만 년 내지는 몇 억 년 전의 빛이다. 길고 긴 여행 끝에 바로 오늘 이곳에 당도한 것이다. 저 작은 별빛에 몇 광년의 세월이 숨어 있다니, 매일 밤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는 별빛은 우주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진 페이지인 셈이다. 그러나 말로는 그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p148

  [인생의 기로라고 느껴지는 순간, 먼 옛날의 풍경들이 아른거리면 떠오르는 것이다. 그때마다 알 수 없는 힘이 솟고 위안을 받기도 한다. 이 아이들에게 오로라가 바로 그런 풍경이 되길 바란다.] p154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도 또 하나의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에서 또 하나의 시간을 마음 한 구석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다. 마치 하늘과 땅이 서로의 차이를 좁힐 수 없는 것처럼.] p161

    [오늘 하루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갔지만 우리는 서로를 의식하지 못했다.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근원적인 슬픔은 바로 이런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분명 내 곁에 존재하는 사람들인데, 나는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고 또 아무런 영향도 받지 못한다는 점을 깨달을 때 인생에 감춰진 고독의 베일이 벗겨진다는 것을 나는 조지와의 만남을 통해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p177

  [인간의 삶은 타인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타인은 내 이웃이 될 수도 있고 자연이 될 수도 있다. 한 생명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생명이 사라져야 한다. 이것은 자연의 숙명이다. 인간도 이 같은 숙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모습이 다를 뿐이지 문명사회를 지탱하는 힘 역시 약자의 희생에서 나온다. 어떤 면에서는 알래스카 대지보다 더 춥고, 살벌한 곳이 현대사회인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 살아남은 우리들이 알래스카 대지를 피로 물들인다는 이유만으로 에스키모와 인디언의 생활을 야만적이라고 말한다는 이는 자기 자신의 범죄를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사냥에 성공한 에스키모들은 짐승의 영혼을 달래고, 그 희생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것이 알래스카의 율법이다. 에스키모들은 자신들 또한 늑대와 고래와 곰을 위해 희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곰의 피를 마셨지만, 내일은 곰이 나의 피를 마실 수도 있다. 살아남기 위해 내가 한 생명을 희생시켰듯이 자연은 나를 희생시켜 다른 생명을 살릴 권리가 있다.] p244, 245 
   

  밑줄 그어 인용한 다른 페이지도 그랬지만 특히 이 문단은 감동적이면서 가슴 서늘하다. 그는 이미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내용을 쓴 것은 훨씬 오래 전이었을 텐데, 그는 1996년 8월 8일 러시아 캄차카 반도 쿠릴 호반에서 취침 중 불곰의 습격으로 사망했다. 
  “오늘은 곰의 피를 마셨지만, 내일은 곰이 나의 피를 마실 수도 있다. 살아남기 위해 내가 한 생명을 희생시켰듯이 자연은 나를 희생시켜 다른 생명을 살릴 권리가 있다.”  향년 43세. 그는 그렇게 떠나갔고 그가 생전에 쓴 책들[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가 2005년 7월, [여행하는 나무]는 2006년 5월 우리에게로 왔다. 여행하는 등피나무처럼 그렇게. 

 

  [결과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실패라는 단어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경과에 상관없이 지나온 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진정 의미를 갖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그렇게 쌓인 시간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간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인생일 것이다. 
  볼을 스치는 북극 바람의 감촉, 여름철 툰드라에서 풍기는 달콤한 냄새, 백야의 엷은 빛, 못 보고 지나칠 뻔한 작은 물망초…….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그 풍경에 마음을 조금 얹어서 오감의 기억 속에 남겨놓고 싶다. 아무 것도 낳지 않은 채 그냥 흘러가는 시간을 소중하게 누리고 싶다. 경황없는 세상의 삶과 평행을 이루며 또 하나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을 마음 어디에선가 항상 느끼면서 살고 싶다. 그 소중한 시간들을 언젠가 내 아이에게도 전해주고 싶다.] p299

    마지막 장에는 노을을 배경으로 불빛을 응시하고 있는 저자의 사진이 담겨있다. 장엄한 알래스카의 작고 연약한 생명처럼 그는 그렇게 서있는데 여운을 남기는 한 줄로 [여행하는 나무]를 덮는다. 
  더 이상 강이 파헤쳐지지 않길, 그럴 일 없을지 뻔히 알면서도 단지 그것밖에 하지 못하는 무력한 기원을 간절하게 얹어서. 
   [오늘 우리들의 삶은 내일 후손들이 살아갈 미래를 준비하는 여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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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눈 속의 연꽃 문학과지성 시인선 97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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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황지우 
 

 

 원효사 처마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 점,
 돌아보니 동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만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소나무숲을 상봉으로 데려가버린다 

 눈보라여, 오류 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데, 아주아주 추운 데를 나에게 남기고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 가는 바람 소리가 짐승 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어찌하여 광기인가

 뺨 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흩어진 백만 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짓지 않으면 알 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 길이 있었고, 벼랑으로 가는 길도 있음을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출처; [게 눈 속의 연꽃 (문학과지성사 1990)]
황지우시인은 1952년 전남 해남 출생.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게로] [나는 너다]
[게 눈 속의 연꽃]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 등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백석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


  한라산, 영실에서 윗세오름 대피소까지 길은 오롯이 눈길이었다. 
  바람 없이 차고 맑은 기운만 가득한데 구름은 산을 희롱했다. 쏴아아~ 몰려서 산의 모습을 감추는가 싶으면 어느새 드러내놓곤 하였다. 눈으로도 구름으로도 다 감춰지지 않은 기암절벽은 장.엄.했다. 본디 장엄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이러고저러고 아무런 말을 갖다 붙이지 않아도 좋을 장엄함이란 이런 것일 것이다. 그저 오래보아도 혹하는 풍경으로 장.엄. 했다. 
 

  눈으로 폭신폭신한 구상나무 숲길은 너무 짧았다. 
  아, 짧아서 짧은 것이 아니라 끝나는 것이 아쉬워서 짧은 매혹적인 길이었다. 바쁘지 않다. 정상은 아니어도 좋았다. 
  올레에서 배운 것이다. 놀멍놀멍 아름다운 숲길을 왔다갔다 고요를 즐겼다. 늘 달리면서 살아온 지난 시간들은 잊어도 좋다. 와랑와랑한 햇볕속의 열무 밭도, 종아리를 성치않게 만들던 모기도, 빨리 달라고 소리치던 성난 손님들도, 반쪼가리가 되어버린 펀드도, 놀면 야금야금 줄어들 통장의 잔고도, 아무런 대책 없는 멀지않은 노후도 잊었다. 나, 여기에 이르기 위해 먼 길 걸어왔으리. 산은 언제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던 것을. 

  어느 방향으로 시선을 주어도 은빛, 은빛은 황홀했다. 윗세오름에서 만난 눈보라마저도 황홀했다. 차운 의자에 앉아있는 나를 무심한 듯 쳐다보던 까마귀는 눈보라 속에서 더욱 도드라지는 까만색이었다. 우리는 백로더러 까마귀 곁에는 가지도 말라고 배웠다는 것을 녀석은 알까? 제 삶을 불편 없이 충실히 살아가는 까마귀를 검다고, 흉조라고 몰아가는 것은 편견이라고 녀석은 내게 따지러 온 모양이다. 알았다, 까마귀야. 고맙고 고맙구나!

   돌아와서 문장에서 배달된 '눈보라'를 듣는데 윗세오름에서 보낸 시간이 고스란히 살아난다. 아니, 더 거친 눈보라에 뺨이 얼얼하게 서있는 느낌이다.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몇 번을 다시 들어도 같은 말을 한다. 시를 듣는 내내 손이 시리다. 발이 시리다.

  다시 처음부터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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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엔 풀밭이 많다 (고급장정본) - 정진규 시선집
정진규 지음 / 도서출판 시월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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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성찬

                        

                                    신달자

                   

 그제는 속초 바다와 저녁 겸상을 했다 밥상에 바닷속 사정 많이도 올라와 있었다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싱싱할수록 쫄깃한 물결이 오래 입안에 메아리쳤다 얼마나 파도쳤는지 한입 가득 들어오는 날것들 쫀득쫀득하게 찰지다 바다는 외곬으로 같은 말만 되풀이하느라 다른 말을 다 잊어버렸나 상 위에서도 이빨 사이에서도 철썩 그 한 마디만 되풀이했다 나는 바다의 속만 파먹었다 파도의 아픈 발자국이 우둘우둘 씹혔다 바다가 무거워 허리가 반으로 접힌 붉은 새우는 내 시선이 포개져 더 오므라진다 냅다 입으로 넣어버렸다

 어제는 설악산과 저녁 겸상을 했다 밥상에는 구구절절한 산속 사연들이 올라와 있었다
 명산의 갈비뼈를 거쳐 여기까지 온 풋것들 저마다 접시 위에서 차분히 고개 숙이고 있다 비닐하우스에서 고속으로 몸을 키우지 않고 서서히 자연의 속도로 하늘의 질서를 잘 견디어온 귀빈들 그 몸속에 폭풍도 천둥도 뙤약볕도 폭설의 수난도 곰삭은 속도로 서서히 안으로 껴안아 온 것 본다 두 번 생을 살더라도 따라갈 수 없는 필요한 잠언들 잎으로 열매로 뿌리로 낱낱이 접시에 싱싱하게 누워 있다 다 견딘 자의 묵묵한 겸손이 산나물 잎 잎에 배어 있다 입에 넣지 않고 바라만 봐도 산 하나 먹은 것 같다

  오늘은 백담사와 저녁 겸상을 했다 상이 비어 있었다


                           신달자 시선집 [바람 멈추다 (도서출판 시월)] 중에서  

 

 

 시집 한 권에 오만 원, 오만 원, 허걱~ 하루 일당에 근접한 돈이다.
 하여 정진규 선생님의 활판시집이 출간되었을 때도 망설이다 망설이다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다시 신달자 시인의 ‘사막의 성찬’에서 결국 수저 들고 만 것이다.
 그동안 거의 모르고 있었던 시인의 언어가 잘 차려진 밥상이다.
 하루쯤 굶어도 좋게 하는 고봉밥이다.
 오만 원, 하면 비싸다 여겨지지만 시 백편인데 한 편에 오백 원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뜨끔하다.
 절제하고 절제하면서, 다듬고 다시 다듬어서 내게로 온 시 '사막의 성찬'이 오백 원이라니.......
 비만 오면 찾아 들어야 하는 삽이 '삽'이 되어 오백 원이라니.......
 이틀 치의 일당이 날아갔지만 석 달은 배부를 것 같은 뜨거운 고봉밥이 내게로 왔다.
 글자들이 살아서 가슴에, 머리에 콕 콕 먹힌다. 꼭꼭 씹어 먹어야겠다.



  

놋수저

             정진규

 어머니가 쓰시던 놋수저 한 벌을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의 고봉밥에 오늘도 놋수저를 꽂는다 제삿날 메 올리는 삽시 (揷匙)가 아니다 어머니의 고봉밥을 어머니의 놋수저로 내가 먹는다 혼령의 밥을 내가 먹는다 어머니는 오늘도 내 밥이시다 죽이 아니라 밥이시다 어머니 가신 뒤 늘 배가 고팠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고봉밥에 놋수저를 꽂았다 

 

           정진규 시선집 [우리나라엔 풀밭이 많다 (도서출판 시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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