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리 시편 - 심호택 유고시집
심호택 지음 / 창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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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미새

 

                심호택

 

 

쌀 떨어진 딸네 집

양식 물어다 주고

쉬엄쉬엄 돌아가는 길인가

우리 할머니

부엌 창문 콕콕 두드리다

알은체해주니 오히려 날아간다

레덤불 속인지

외딴 절인지

간 곳은 알 수 없어도

까마종이 두 알

글썽한 눈매

남기고 가셨다

 

                     

 

 

 

 

물봉선이

 

 

 

싸가지 없는 아무개놈

속으로 욕하며 걷는 산길

바보여뀌 널려 있고

물봉선이 피어 있네

나밖에 볼 사람도 없는

시월이면 지고 말걸

빨간 물봉선이는, 아니

보라색 물봉선이는 뭐하러

저리도 곱게 피어 있나

여뀌는 또 무엇이 즐거워

저리도 깨가 쏟아지나

 

 

 

 

 

겨울 편지

 

 

 

아픈 건 그럭저럭 나았소

올해도 김장 몇포기 담갔소

 

사랑이여

당신이 사준 고동색 파카는

시골집 수도펌프가 입게 되었소

 

 

 

 

 

장화

 

 

 

형은 장화를 샀을까

물건이 떨어진 것은 아닐까

두 짝 모두 챙겼을까

 

낮 한시를 못 기다려 

십리 밖 옥구역에 마중 갔으나

군산에서 기차가 오고

형도 왔건만 보따리 속에는

장화가 없었다

 

눈도 눈도 많이는 와서

세상이 발 시린 날들뿐일 것만 같던

내 생애의 몇번째 겨울이었나

 

장화를 신고 산꿩마냥

눈밭을 헤집고 쏘다니고 싶었던

내 어린 꿈이 그 거뭇한

철둑길에 주저앉던 그날은

 

 

 

                      유고시집 [원수리 시편] 중에서(창비)

                     

                      심호택 시인은 1947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91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빈자의 개] 등

                      8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하늘밥도둑] [최대의 풍경] [미주리의 봄]

                      [자몽의 추억]이 있다.

                      원광대 불문과 교수를 지냈으며

                      2010년 1월 교통사고로 타계했다.

 

 

그의 시는 어쩐지 아리다

그의 부재 탓일까

왜 부재중인 시인들의 시는 가슴에 담기는 건지.......

'아픈 건 그럭저럭 나았소'

하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지는 밤이다

그의 시집은 가끔

가끔

읽고 싶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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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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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는 결코 익숙해 질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따돌림과 고의적 시비를

 무시하는 일, 몰매를 맞으면서도 대항하지 않는 일, 침묵 속을 걷는 일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교실을 나오는 동안 내 몸은 새파란 화염에 휩싸여 있

 었다. 차갑고도 끈질긴 불길이었다.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교문을 통과해

 아르바이트를 하던 동네 편의점에 다다를 때까지, 쉼없이 나를 태웠다."

 

   "나는 카메라플래시를 받으며 서 있었던 열두 살 이래로 허둥댄 적이

 없다. 소년분류심사원에 다녀온 후부턴 분노하지도 않는다. 누군가 호감

 을 표해와도 관계에 대한 기대를 품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다. 안다. 놀라면 허둥대야 정상이다. 모욕당하면 분노 하는

 게 건강한 반응이다, 호감을 받으면 돌려 주는게 인간적 도리다. 내 또래

 아이들은 대부분 그렇게 산다. 아저씨는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

 다. 나는 그 문장에서 '그렇게'를 떼어내라고 대꾸한다.

  나도 살아야 한다, 그러러면 당황하고, 분노하고, 수치심을 느끼고 누군

 가에게 곁을 내줘서는 안된다. 거지처럼 문간에 서서, 몇 시간씩 기다려서

 라도 일한 대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을 사는 나의 힘이다.

 아니, 자살하지 않는 비결이다."

 

  그렇게 어떤 문장들은 새겨지고 있었다.

  정유정의 "7년의 밤" 이다.

  오랜만이다.

  얼마만일까?

  읽던 책을 덮지 못해서 밤을 새운 일이.......

  500페이지도 넘는 짧지 않은 분량의 소설이 나를 놓아 주지 않았다.

  재미있다.

  그리고 엄청난 몰입이다.

  책을 덮고도 오래 세령호의 물 소리를 듣고 있는 듯하다.

  어느 사이 소설 읽기 좋은 가을 인 것이다.

  단단한 작가를 새로이 만났다.

  '정유정 '

  덕분에 졸리운 밤,

  자야겠다.

  꿈도 없이 깊이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어디선가의 당신도 그러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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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창비시선 326
천양희 지음 / 창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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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보아라

 

                 천양희

 

 

자식들에게 바치느라

생의 받침도 놓쳐버린

어머니 밤늦도록

편지 한장 쓰신다

'바다 보아라'

받아보다가 바라보다가

 

바닥 없는 바다이신

받침 없는 바다이신

 

어머니 고개를 숙이고 밤늦도록

편지 한장 보내신다

'바다 보아라'

정말 바다가 보고 싶다

 

 

 

 

참 좋은 말

 

                천양희

 

 

내 몸에서 가장 강한 것은 혀

한 잎의 혀로

참, 좋은 말을 쓴다

 

미소가 한 육백개나 가지고 싶다는 말

네가 웃는 것으로 세상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

오늘 죽을 사람처럼 사랑하라는 말

 

내 마음에서 가장 강한 것은 슬픔

한줄기의 슬픔으로

참, 좋은 말의 힘이 된다

 

바닥이 없다면 하늘도 없다는 말

물방울 작지만 큰 그릇 채운다는 말

짧은 노래는 후렴이 없다는 말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말

한송이의 말로

참, 좋은 말을 꽃피운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란 말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말

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꾸 온다는 말

 

 

 

 

 

물의 가족

 

                천양희

 

 

물을 거꾸로 쓰면 룸이고

룸을 뒤집으면 물이 된다고 너가 말했을 때

바다는 거대한 물의 룸이라고 다시 너가 말했을 때

 

물소리 높아지면 파도가 된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물길 깊어져 수심이 되었다고 말하고 말았다

 

수평선 바라보다 

수평한 세상에서 살고 싶네, 너가 말했을 때

하늘 쳐다보다 

땅에서 하늘까지 아직도 수직이네, 다시 말했을 때

 

경계 없는 것들이 좋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흘러가는 것들이 눈물겹다고 말하고 말았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 바다는 위대한 것이라고 너가 말했을 때

바다의 모든 소리는 뒤에 여운을 남긴다고 다시 너가 말했을 때

 

마음에도 밀물 썰물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물결에도 들숨 날숨이 있다고 말하고 말았다

 

소리와 의미가 잘 맞아 철썩이는 

우리는 

물의 가족

 

 

                           시집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창비2011)] 중에서

                           

                           천양희 시인은  1942년 부산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5년 대학 3학년 재학중에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너무 많은 입]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시의 숲을 거닐다] [직소포에 들다]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박두진문학상, 공초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문학부문) 등을 수상했다.

 

 

 

            

 

 

 

늦은 휴가를 떠나기 전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를 들고 다녔다.

그리고 떠나있는 내내 저 바다만 '바다 보아라'였다.

나는 단 한번도 '바다 보아라'를 받은 적 없고

'어머니 전상서' 한번도 써보지 못한 바침 없는 생을 살았는데...... 그저 바다는, 바다는 실컷 보았다.

거기 앉아서 맛있는 커피를 홀짝거리고 '장사익'을 듣고 '후지와라 신야'를 읽고 '두근두근 내 인생'이 덩달아 두근두근하게 만들었다.

 

일주일 전의 저 바다가 아득한 한 시절로 그립다.

아니, 거기 앉기만하면 평온해지던 그 마음이 그리운지도 모르겠다.

너무 황홀한 아름다움이라 내 것이 아닌 듯 여겨지던 순간들......

이 새벽,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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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외면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07
복효근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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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 적 없다

 

                             복효근

 

다시 같은 자리에 돋는 새잎이란 없다

이미 새잎이 아니지

낯선 자리 비켜서

옛 흉터를 바라보며 지우며 새잎은 핀다

 

이전의 사랑은 상처이거나 흉터다

이후의 사랑도 그러할 것이므로

사랑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조금 비켜서

덤덤히 바라볼 수 있는 눈빛으로

나무의 새순은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싹튼다

 

제 형체와 빛깔과 향기를

지우고, 지고 부정하고 배반하고

새잎은 비로소 새잎이다

 

내 너를 사랑한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한 적 없다

오늘은 내 어느 부위에 상처를 남겨두랴

 

엄살 피우지 말자

남은 날 가운데 가장 새것이어서

우리 세포는 너무 성하다

흉터 따위를 기억하는 것은 사랑도 아니다

 

지금 네가 마지막 첫사랑이다

 

               시집 [따뜻한 외면 (실천문학2013)] 중에서

                   복효근시인은 1962년 남원에서 태어나, 1991년 [시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버마재비 사랑], [새에 대한 반성문],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목련꽃 브라자], [마늘촛불] 이 있고,

                   시선집 [어느 대나무의 고백] 등이 있다.

                   편운문학상 신인상, 시와시학상 젊은 시인상을 수상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죽을 만큼 사랑한다가 대세인 세상에서

사랑한적 없다고 엄포를 놓고

‘지금 네가 마지막 첫사랑이다’ 라는 시인의 역설은

유쾌하고 명징하게 와 닿네요.

새잎을 틔우는 에너지처럼

생생하게 살아가면서

‘엄살 피우지 말자 남은 날 가운데 가장 새것’으로

사랑하자 합니다.

 

부디 그러하시길.......

그대,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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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공원에서 창비시선 354
고영민 지음 / 창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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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고영민

 

길가 돌멩이 하나를 골라

발로 차면서 왔다

저만치 차놓고 다가가 다시 멀리 차면서 왔다

먼 길을 한달음에 왔다

집에 당도하여

대문을 밀고 들어가려니

그 돌멩이

모난 눈으로

나를 멀끔히 쳐다본다

영문도 모른 채 내 발에 차여

끌려온 돌멩이 하나

책임 못 질 돌멩이를

집 앞까지 데려왔다

                                     출처 [시집 사슴공원에서 (창비2013)] 중에서

 

돌멩이 하나,

그저 세상에 하고 많은 돌멩이들 중에 돌멩이 하나,

사소하고도 사소한 돌멩이 하나,

돌멩이 하나의 동행이 저리 무겁고도 깊은 뜻이 담겨있군요.

무심코 한 행동이,

아무 생각 없이 내 뱉은 말 한마디가,

심심해서 차고 온 돌멩이 하나가,

가슴에 태산보다 더 무거운 돌덩이로 얹힙니다.

연탄재도 돌멩이도 함부로 발로 차지 말아야겠습니다. ^.^

 

그대가 걸어가는 생은 어떠신지요?

그 모두가 소중한 동행이요 인연입니다.

이 풍진 세상을 함께 가는 소소한 인연들,

그 모든 동행들과 인생의 여정을

그대, 행복하게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여기서 머문 시간이 그대 생의 쉼표,

따스한 밥 한 숟가락의 사랑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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