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웰의 아내는 슬픔과 병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아일린은 부부의생계를 위해 풀타임으로 일할 뿐 아니라 집안일을 하고, 집에 먹을것을 마련해 두고, 요리까지 하지만, 오웰은 그 이상을 원한다. 그래서 또 다른 관계를 시작한다.
이네즈 홀든 Inez Holden은 "부서질 듯 섬세한 외모"와 "병약한 매력"을 지닌 "재미있는" 여성으로, 소설가이자 기자다. 오웰의 문학적 영웅 중 한 명인 H. G. 웰스의 친구이기도 한 이네즈는 웰스의차고 위층에 있는 아파트에서 잠시 머무르고 있다. 이네즈와 함께동물원에 다녀온 오웰은 "차나 한잔하자"며 그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간다. 그런 다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비운다. 다시 나타난 오웰은 국방 시민군 군복으로 갈아입고 있다. 다음 순간, 그는 이네즈를 "덮쳤다". 이네즈는 오웰이 섹스에서 내보이는 "강렬함과 다급함"에 "놀란다". - P386

그리고 BBC의 어떤 고위 인사와 관련된, 어느 한 사람에게서 나온불확실한 소문들이 있을 뿐이다. 반면 오웰에게는 거의 셀 수 없을정도로 많은 연애 사건과 누군가를 ‘덮치는‘ 행위, 혹은 강간 미수들이 존재한다.
몇 번 아일린은 오웰의 행동 때문에 심하게 괴로워한다. 그리고 적어도 한 번은 그에게 다른 여자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으면떠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자신의 가장 심오한 자아를 해치는일에도 괜찮다고 느끼게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부장제에서 여성이 길들여지는 방식의 정점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우리를 이용하는 체제에 동조하도록 길들여진다. 그러고는 결국 우리가 동의했다고, 기분 나쁘지 않았다고, 심지어는 우리 스스로 원한 일이라고말하게 된다. 어떤 경우든 우리는 ‘분명 그것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간주되고, 우리가 고통받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일로 남을 것이다. - P390

아일린은 리디아의 표현대로 2년 동안 "가장의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잦은 자궁 출혈로 몸이 좋지 않다. 여전히 가족을 잃은슬픔을 안고 있고, 지금 하는 일도 좋아하지 않는다. 집안일을 하고, 친척들과 폭격으로 집을 잃은 친구들을 챙기고, 그들에게 머무를 곳을 찾아주고, 오웰의 글을 교열하고 타자로 치고, 장을 보고요리를 하고, 그가 아플 때면 간호하는 것까지, 이 모든 것을 계속하기는 쉽지 않다. 1941년 6월, 아일린은 더는 버틸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검열과에서 사직한다.
전기 작가들은 아일린이 오웰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는 사실을언급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아일린을 그 일에서 구해준 건 오웰이라고 언급하기를 좋아한다. 한 전기 작가는 이렇게 쓴다. "이 시점에서 오웰은 아일린이 과로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일을 그만두라고 설득한 것으로 보인다. 6월이 되자 아일린은 다시자유로운 여성이 되어 있다. " 공정하게 말하자면, 이 전기 작가는 자신의 주인공이 남긴 글을 바탕으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그의 주인공은 이렇게 쓴다. "일 때문에 건강이 엉망이 되고 있으니한동안 일을 쉬는 게 좋겠다고 난 아일린을 설득했어요." - P392

오웰은 러시아 혁명을 배반하고 새로운 독재 정권을 도입한 스탈린에게 책임을 묻는 에세이를 쓰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아일린이보기에 그건 끔찍한 생각이다. 영국이 독일과 싸우는 걸 러시아가돕고 있는 상황에서 당장 그 부분을 공격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두 사람은 얼어붙을 듯 추운 침실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한다. 리디아는 이렇게 기록한다. "그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힘겨운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동물농장>의 아이디어가 탄생한 건킬번의 그 집에서였다. " 아일린은 그 이야기를 장편소설로, 자신이 매우 좋아하고 한때는 직접 써보고 싶어 하기도 했던 동물이 나오는 우화로 써보라고 제안한다. 오웰이 집필을 시작하자 아일린은 "그 작품이 성공할 거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보았다고 리디아는 기억한다. 매일 저녁 오웰은 아일린에게 그날 쓴 부분을 읽어주고, 그들은 함께 의견을 주고받는다. 매일 아침 아일린은 식품 - P416

부에 출근해 새로 추가된 부분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친구들을 즐겁게 해준다. "커피를 마실 때면 아일린은 그 이야기의 일부를 인용하곤했어요. 굉장히 흥미진진했죠. 
《동물농장은 3개월 만에 완성된다. 그 작품은 스탈린 수하에서 새로운 지배계급 엘리트들로 무장하고 극악무도한 독재 정권으로 굳어져 버린 러시아 혁명에 대한 알레고리를 담은 걸작이다. 동시에 아일린이 톨킨 밑에서 배웠던 동화와 우화들처럼 그 자체로 완결성을 지닌 한 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칼 마르크스를 상징하는 늙은 돼지 ‘메이저‘에겐 꿈이 하나 있다. 언젠가 농장 동물들이자신들을 착취하는 인간들로부터 자신들의 삶에 관한 통제권을 빼앗은 다음, 동물들끼리만 평등하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꿈이다. 메이저가 죽자, 트로츠키와 스탈린을 상징하는 다른 돼지들은 동물들을 이끌고 그들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하기 위한 혁명을 일으킨다. - P417

‘네 다리 좋음 두 다리 나쁨‘ 같은 구호 아래 결집한 동물들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돼지들이 얻은 권력이 굳어지면서 그들은 서서히 자신들이 쫓아낸 인간들의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구호들이 바뀐다. 역사가 다시 쓰인다. 돼지들은 인간의 옷을 입고, 두 다리로 걸어 다니며, 파이프 담배를 피운다. 권력이 유지되도록 돕는 건 사나운 비밀경찰개들이다. 그 개들은 강아지 때 어미와 떨어졌고, 남을 돕는 자신들의 본성을 부정하도록 훈련받았다. 결국 옛 권력 관계가 복원된다.
다만 인간 엘리트 대신 돼지가 그 자리를 차지했을 뿐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모든 동물은 동등하지만,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동등하다.‘
- P417

아일린의 친구들은 진실을 알지만 오웰의 업적을 깎아내리지않기 위해 조심스러운 표현을 고른다. 레티스는 이렇게 말했다. "아일련을 알던 어떤 사람들은 《동물농장>의 소박함과 우아함이 부분적으로는 아일린의 영향 덕분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요. 리디아는 이렇게 썼다. "나는 그 소설의 몇몇 장면에서 아일린 특유의유머 감각이 엿보이는 걸 알아보았다. 아일린이 직접 그런 제안들을 한 것인지, 혹은 조지가 자기 아내의 기발한 말하기 방식과 사물을 보는 시선 일부를 자신도 모르게 흡수한 것인지는 이 맥락에서크게 중요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나는 아일린이 미묘하고도 간접적인 방식으로 <동물농장>의 창작에 협력했다고 확신한다.
"얼어붙을 것 같이 추운 1층 침실에서 《동물농장》을 쓰는 일은 아일린에게는 기쁨이다. 하지만 겨울이 지나 봄이 오고, 다시여름이 되면서 거절 편지는 점점 쌓여간다. 아무리 알레고리라 해도 그토록 스탈린을 비판하는 소설을 다루려는 출판사는 한 군데도 없다. - P420

아일린은 두 손으로 배를 감싸고 엄지손가락을 배꼽에 댄다. 푸른 눈을 한 자신의 딸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날 일은 없을것이다. 그 애에 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 애가 당연히 존재하리라 여겼다는 걸 아일린은 이제 깨닫는다.
좋아. 아일린은 밤색 트위드 스커트 속에 다리를 집어넣고 재킷을 걸친다. 떨리는 손가락에 닿은 단추들이 빽빽하게 느껴진다. 가슴속이 텅 빈 것만 같다. 아일린은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음 노란 모자를 쓴다. 자신이 무언가를 닮았다면 여러 가지맛이 섞인 감초 사탕 정도일 것이다. 이제 아일린은 돌아서서여행 가방을 탁 소리가 나게 닫고 아기방으로 걸어간다.
빗줄기가 버스정류장의 검은 아스팔트에 부딪치자 빗방울들이 그대로 위로 튕겨 나오며 춤을 춘다. 마치 기쁨으로 도약하듯이. 자유가 밀려든다. 아일린이 사랑하는 책이 있고, 사내아이가 있고, 아일린이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한 남자가 있다. 다가올 삶이 있다.
아일린은 버스 뒷자리에 앉아 여행 가방을 옆에 놓는다. 스톡턴 온 티즈에서 뉴캐슬까지는 버스로 1시간 45분 거리다. - P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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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일 전 이곳에 처음 짐을 풀었다. 반년 전부터 수시로 숙박 사이트를 드나들다 큰맘 먹고 결제한 데였다. 여행 경험이많진 않지만 전부터 비행기표 알아보는 걸 좋아했다. 앞으로절대 가볼 일 없고, 가보지 못할 나라라도 그랬다. 직장 일로영혼이 어둑해지거나 인간에게 자주 실망할 때면 혼자 이국의낯선 도시를 검색해보곤 했다. 태블릿 피시와 다정히 얼굴을맞댄 채 열대지방 햇볕 쬐듯 전자파를 쐬었다. 세상에는 정말많은 도시와 방이 있었다. 인터넷 덕에 이제 마음만 먹으면 누군가는 유럽의 수백 년 된 성을 빌릴 수 있고, 성공한 현대미술가나 살 법한 대도시의 감각적인 스튜디오도 구할 수 있었다. 극지방의 오두막이나 구 공산권 국가의 아파트도 마찬가지였다. 거주 형태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이었다. 성수기와비수기, 체류 기간에 따른 할인율도 달랐다. 세계 각국의 임대인과 임차인이 직접 거래하는 그 사이트는 어디선가 떠나오고 또 떠나가는 이들로 늘 북적였다. 세상에 자기 좌표를 마음대로 옮길 수 있는 이들이 많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인터넷에 올라온 후기나 사진을 보면 가끔 삶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 인생이 홀씨처럼 가볍고 클릭처럼 쉬운 것으로 여겨졌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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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이 꽃다발을 내밀자 오대표가 "샤베트 튤립이네요?" 하고 차분히 반색했다. 이연은 오대표의 느긋하고 위엄 있는목소리가 단정한 외모와 묘하게 어긋난다 느꼈다. 어쩌면 그런 어긋남이 상대를 집중시키는 힘인지 모르겠다고. 오대표가가슴에 꽃을 안고 천천히 두 사람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기역자로 꺾인 복도 너머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노란 불빛, 달콤한 알코올 냄새가 희미하게 새어나왔다. 이연은 마스크를벗어 코트 호주머니에 넣고 성민을 따라 그 빛 속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 P12

실제로 이 년 넘게 전염병이 이어지며 많은 이들이 관계를실내로 들였다. 더불어 사적 관계도 조금 더 선택적으로 변했는데, 누군가와 숨을 섞고 대화를 나누는 게 어느새 모험이자사치가 된 까닭이었다. 모임을 위해서는 일단 서로 믿을 만한상대를 택해야 했다. 성민은 ‘홈 파티의 그런 내밀하고 폐쇄적인 성격이 우정의 위상을 높여주고, 서로에게 특권을 주는 듯해 싫지 않다‘고 했다. ‘정말 비싼 정보는 온라인에 없고 세상 많은 중요한 일은 식탁에서 이뤄지기 마련‘이라면서 이연 듣기에 ‘최고경영자 과정‘ 밟은 티를 냈다. - P13

식탁 위 다채로운 식기와 소품을 보며 이연은 평소 오대표가색을 얼마나 대범하게 쓰고, 색 쓰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지 알수 있었다. 대학 때 미술을 전공했다는 오대표는 지금은 인테리어 편집숍을 운영한다고 했다. 더불어 그 집에는 그런 개성뿐 아니라 서사적 윤기‘라 부를 만한 것이 곳곳에 포진돼 있었다. 한쪽 바닥에 무심하게 놓인 현대 회화 액자와 아프리카대륙에서 온 걸로 추측되는 나무 조각품들, 은은하게 색이 바랜 진짜 아라비아산 카펫까지…… 오대표가 일일이 설명하지않아도 이연은 물건 하나하나에 깃든 집주인의 시간과 체력,
미감과 여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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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들이 잡혀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조지에게 전한 사람은아일린이었다. 바로 아일린이 밤마다 호텔 로비에서 감수하고있는 위험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아일린은 스페인에서자신이 했던 경험들이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걸 알게된다. 그 경험은 조지의 일반적인 지식, 아일린은 기여한 적도 관련된 바도 없는 지식이 되어 있다. 경찰이 "누구든 손닿는 대로 체포하고 있었다"는 건 아일린의 동료들 이야기였다. 퍼지고 있던 소문, 벨트에 폭탄을 술 장식처럼 매달고 라운지를 성큼성큼 걸어다니던 러시아인 스파이・・・ 모두 아일린이 조지에게 말해 준 것들이다. 아일린 자신도 ‘내 아내‘로 일반화되어 있다. 아일린의 모든 정체성과 행동과 지식이 멋대로 조지의 것이 되어 있다. - P270

이런 상황을 설명하는 언어를 아일린은 사실상 찾아낼 수가 없다. 아일린은 조지의 원고 페이지들을, 여백에 온통 휘갈겨진 자신의 글씨들을 노려본다. 아일린은 누구에게도 보이지않을 방식을 통해서만 이 이야기 속에 존재한다. 마치 발판이나 뼈대처럼, 최종 결과에서는 사라지거나 가려져 버리는 무언가처럼. 아일린이 생각하기에 자기말소 성향이란 오직 그것을지닌 사람이 여전히 존재할 때만 효과가 있다. 자신이 한 역할이 보잘것없다고 주장함으로써 거기에 오히려 주의를 집중시키는 교묘한 방법으로서만 자기말소가 문자 그대로의 의미일리 없는데, 그런데, 여기 그것이 있다.
아일린은 유리 재떨이에 가느다란 담배를 내려놓는다. 누군가가 여기, 타자로 치고 있는 행간에서 날 발견할 일이 있기는 할까. - P271

그것은 자기 자신을 포함해 모든 것을 무의식적으로 남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고방식이다. 리디아는 자신이 오웰을 거절하면 ‘내숭을 떤다‘는 모욕을 듣게 될 거라고 예상한다. 리디아가 ‘그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그건 곧 유머 감각이 없다는 뜻이 될 터였다. 리디아는 명확히 말로표현할 수 없는 상황 속에 갇혀버린다. 그 상황에서는 사랑하는 친구의 병든 남편과 키스하는 것이 그것을 거부하는 것보다 어째선지더 쉬운 일이 되어버린다. 그 키스가 아일린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어쩌면 죽음을 부르는 키스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다. 아일린이 스페인에서 언제든 죽을 수 있었던 조르주 코프에게 자신을 하나의 위안으로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리디아는 자신을 오웰이 누려 마땅한 기쁨으로 여긴다.
키스는, 특히 첫 키스는 그저 키스만은 아니다. 그건 여성이 헤쳐 나가야 하는 하나의 상황이 된다. 여성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내숭 떠는 여자 아니면 걸레, 혹은 유머감각 없는 년 아니면 공범이다. 그 둘을 나누는 경계선은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나아가 충족시키기에는 너무나도 비좁은 공간이다. - P283

그 부부중 남편은 우리 아버지처럼 의학 교수였다. 그런데 대화가 이어지던 도중에 그 교수가 아무런 전조도 없이 몸을 굽히더니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내 손을 자신의 사타구니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가 무슨 말을, 농담 같은 걸 했을 수도 있지만, 주변 사람들이무언가를 알아차렸다는 기억이 내게는 전혀 없다.
나중에 나는 그 일을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어머니도그곳에 있었는데. 나는 어머니가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는 걸 믿을수가 없다. 어딘가에 정신을 팔고 계셨던 걸까? 음식을 챙기느라고? 정신없이 날뛰는 개를 제지하느라고? 나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꼭 자루에 든 버섯들을 만지는 것 같았어요." 어머니는 웃었다. 비유를 좋아하는 분이었으니까. 그리고 흔히들 말하듯, 그게 다였다.
나는 정신적 외상을 입지는 않았다. 그 상황은 너무도 공공연하게벌어졌기에 위협 같은 건 느껴지지도 않았다. 내가 받은 충격은 한남자가 자기 아내와 우리 부모님이 보는 앞에서, 그것도 우리 집에서 그런 행동을 하면서도 그래도 된다고 느꼈거나, 그래야 한다고느꼈거나, 어쩌면 둘 다였을지 모른다는 깨달음에서 왔다. 그리고그는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 보이지않는 존재가 된다는 건 손끝에 버섯들이 와닿고, 귓가에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같은 경험이다. - P288

변소 청소가 그 모든 일의 절정(혹은 밑바닥)이었다. 조지는몸이 좋지 않아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아일린의 머릿속에 깊이새겨진 한순간이 있다. 일을 반쯤 했을 때, 조지가 저 창문을 열고 아일린을 불렀다. 아일린은 조심스럽게 몸을 빼냈다. 변기위로 넘쳐흐른 짙은 색 배설물에서 부츠 신은 발을 꺼냈다. 소용돌이치는 그 오물은 너무도 역겨웠고, 악취에 속이 뒤집힐지경이었다. 아일린은 조지가 뭐라고 하는지 들으려고 창문 쪽으로 네 걸음을 떼었다. 그러고는 거기 서 있었다. 조지의 녹색낚시용 장화를 신고, 장갑 낀 두 손을 옆으로 벌리고, 온몸이 똥투성이가 된 채로,
"차 마실 시간이잖아요. 안 그래요?" 그때 조지는 그렇게 말했다. - P334

아일린의 피가 얼음처럼 차갑게 식었다. 조지가 자신을 위해 차를 끓여주려고 그 말을 했을 거라는 생각은 단 한순간도들지 않았다.
아일린은 딸기가 든 그릇을 창문 아래 싱크대 한쪽에 내려놓는다. 유리병들을 찬물에 씻고 헹구기 시작한다. 팔뚝에 팔꿈치까지 소름이 돋는 순간, 아일린은 깨닫는다. 무언가를 안다는 건 그것이 어떻게 느껴지게 될 지 이해하는 거라고 아일린은 언제나 생각해 왔다. 하지만 아일린은 경험 자체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경험은 일어나고 있는 일을 머리가 채 깨닫기도 전에 피를 얼려버릴 수 있다. 아일린은 그 경험의 세부사항이 그렇듯 끔찍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조지가다른 여자들과 섹스하기 위해 자신에게 ‘허락‘을 구할 거라고는 그에게 강력해진 기분을 선사하는 건 그 여자들과의 섹스일까? 아니면 아일린이 느끼는 모멸감이 그런 효과를 내는 걸까? 모멸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아일린이 겨우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일이 중요하지 않은 척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는 건 (아일린은 마지막으로 헹군 유리병을 마른행주 위다른 병들 옆에 놓는다) 결국 아일린 자신이 중요하지 않은 존재인 척하는 것이다. 아일린은 수도꼭지를 잠근다. 다정한 윌리엄이 필요하다. "흔들리는 마음의 균형을 바로잡는 워즈워스가. - P335

몽상가가 된다는 건 훗날의 작품이라는 꿈에 자신의 인생을 거는 예술가처럼 사고하는 것일까? 그러면서 자신이 남기고 갈 무언가를 위해 살아가는 것일까? 닭들이 있고 폭탄이 터지지만 정해진목적은 없는 삶과는 달리, 이 꿈에는 한 가지 목적이 있다. 오웰이 쓰는 모든 책은 불멸에 대한 착수금이 된다. 오웰은 유명한 작가가되겠다는 목표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는 아일린이 필요하다. 인생이라는 끊임없이 흐르는 혼돈으로부터 원인과 결과를, 인물들과 그들의 운명을풀어내는 이야기꾼으로서 아일린이 지닌 재능이 필요하다. 삶을 변화시킬 수 없을 때는 아이러니로, 조각난 삶을 다시 한데 엮어내고싶을 때는 은유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아일린의 재능이 필요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일깨워줄 수 있는 로런스가 있었을 때, 아일린은 그런 재능 모두를 오웰에게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로런스가 사라졌다. 로런스의 죽음은 아일린에게서 삶에 대한 꿈을 앗아가 버렸다. 그리고 다른 모든 꿈이 그렇듯, 그 꿈 역시 한번 잃어버리면 되찾기 어렵다. - P362

로런스가 세상을 떠난 뒤로, 아일린은 매일 아침 깨어날 때마다 둔탁한 충격과 함께 다시금 쓰러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오늘 아침에는 그렇지 않았다. 아마 내일은 다시 그럴 것 같지만, 오늘은 아니다. 지금, 오빠와 함께 사라져버렸던 아일린의 일부는 되돌아오는 중이다. 눈을 뜨는 순간 아주 짧은 찰나지만 자신이 온전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안다. 오빠를 남겨두고떠나는 순간에는 새로운 슬픔이 가슴을 찔러온다.
아일린은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모두가 누군가를 잃었고, 그 슬픔을 용감하게, 혹은 연극적으로 품고 살아간다. 대부분은 용감하게, 즉 드러내지 않은 채 품고 지낸다.
하지만 하혈과 어지러움, 복부의 통증과 온몸을 짓누르는 불쾌함을 숨기기는 더 어려워졌다. 한 달 전, 그웬은 아일린에게 침대에 누워 있으라고 단호히 말했다. 때로 아일린은 그저 침대시트 아래 놓인 하나의 곡선에 불과한 존재다.  -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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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웰을 만난 찰스는 다음과 같은 인상을 받는다. "그는 키가 크고 여위고 팔다리가 길쭉했는데, 조금 어색해 보일 정도로 그랬다... 말을 잘하지 못하고 더듬었고,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처럼보였다." 찰스가 생각하기에 오웰은 "의심의 여지 없이 사교적이고 외향적인 아내가 필요했다. 세상으로 통하는 창문으로서 말이다. 아일린은 이 말주변 없는 남자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게 도와주었다. 결혼한 지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아일린은 이미 오웰의 대변인이 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아일린은 오웰이 "세상을 향해 뻗은 손"이었다. 
결국 찰스는 오웰을, "내 비서의 남편인 이 
민병대원을, 위아래가 붙은 자루 같은 황갈색 작업복을 입은 그를 존경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 역시 "아일린 때문이었다. 그렇게 훌륭한 여자를 아내로 얻을 수 있었던 남자라면 어딘가 괜찮은 구석이 있을 게 틀림없었다. 아일린이 내게 보여준 남자는 단순히 얼간이 같은 모험가가 아니라 훌륭한 남자, 깊이가 있는 남자였다".
- P179

찰스 오어가 아일린을 흠모하는 유일한 사람은 아니다. 오웰의 지휘관인 조르주 코프가 거대한 참모 차량에 타고 전선을 오가고 있다. 병사들의 소식을 가져오고 보급품과 우편물을 가지고 돌아가는그는 사무실과 참호를, 아일린과 오웰을 잇는 중개자다. 코프는 아일린을 깊이 사랑하게 된다. 삶을 바꿔 놓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이어지는 사랑이다.
찰스는 코프를 이렇게 묘사한다. "덩치가 크고 육중하며 혈색이좋은 금발의 벨기에인으로, 유쾌하고, 아주 세련되진 못했지만 나름대로 배운 남자였다.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아마도 직설적이고 까다로운 성격을 지닌 젊은 로이스만 빼고 그랬을 것이다. 로이스는 코프를 "비대한 인간" "배불뚝이" 라고 부른다. 하지만 아일린은 코프를 좋아한다. 모두에게 줄 꽃다발과 초콜릿을, 그리고 아일린을 위해서는 사랑하는 남자의 소식을 가지고 성큼성큼 사무실로 걸어들어오는 그 남자를. - P180

오웰은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이 장면을 두 번 묘사한다. 한번은 자신이 노트와 팬레터 및 통을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설명하기 위해서(그리고 답장을 하지 못한 것에 사과하기 위해서)다. 다른 한번은, 오웰은 이 장면을 묘사하면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는 아일린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게 놔둔다(물론 오웰은 그게 아일린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말이다). 오웰은 경찰이 "우리에게 히틀러의 《나의 투쟁》 프랑스어 번역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의심에 들뜬 나머지 황홀경에 빠졌다"고 쓴다. "만약 발견된 유일한 책이 그 책이었다면, 우리는 파멸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들은 스탈린의 팸플릿 한 부를 우연히 발견했다... 그러고는 다소간 안심했다". 그곳에 머무르는 두시간 동안 "그들은 결코 침대는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내 아내가 내내 침대에 누워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리고 여기서, 내 귀에는 다 - P249

시 아일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매트리스 밑에 기관단총 대여섯자루쯤 있을 수도 있었는데, 베개 밑에 도서관 하나 분량의 트로츠키주의 관련 문서들이 있을 수도 있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죠. - 오웰은 아내의 용기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파멸‘을 피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함으로써 그 용기를 가려버리기까지 한다. 위험에 직면했던 건 아일린인데도 말이다. 오웰에게 이 일화의 주인공은 온통 남자들이다. "그럼에도 형사들은 침대에 손을 대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고, 침대 아래를 들여다보지조차 않았다. 나는 이것이 OGPU의 통상적인 절차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경찰이 거의 전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의 통제 아래 있었고, 그 남자들 자신도 공산당원이었을 거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스페인 사람이기도 했고, 여자를 침대에서끌어내는 건 그들로서는 조금 무리였다. 업무의 그 부분은 조용히 생략되었고, 그러면서 수색 전체가 무의미해졌다." 오웰에게 이 일화는 스페인 사람들의 ‘관대함, 그리고 일종의 고결함‘을 보여주는‘
작고 별난 사건‘이 된다.
오웰의 노트들은 사라졌다. 스페인 사람들은 고상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내 아내‘는 그곳에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P250

오웰은 자신들을 본 코프가 "사람들을 밀치고 우리들 만나러 다가왔다. 그의 통통한 살구색 얼굴은 평소와 별로 다름없어 보였고, 그 불결한 장소에서도 그는 제복을 깔끔하게 유지하고용케 면도까지 하고 있었다"고 쓴다. "[코프는] 대단히 활기차 보였다. ‘음, 우리 모두 총살당할 것 같군요.‘ 그는 쾌활하게 말했다."
코프는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대학살이 예상된다고 그들에게말해준다. "하지만 그가 살아날 방법이 한 가지 있기는 하다. 지휘관이 보낸 편지다. 코프가 엔지니어로서 믿을 만한 사람임을 보증하고 그에게 동부 전선으로 돌아오라고 요청하는 편지. 하지만 그편지는 경찰에 압수당한 상태다.
오웰은 그 편지를 되찾으려고 경찰청으로 달려간다. 여러 전기작가들이 이 용기 있는 행동에 감탄을 보낸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아일린이 바로 그 직전에 정확히 같은 장소에 다녀왔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다. - P256

나는 로비 창문 너머로 폴리오라마 극장 건물을 바라본다. 오웰은 그곳의 옥상에 사흘 동안 앉아 있었다. 거기서라면 아일린의 방이 보였을 것이다. 전투가 멈췄을 때, 오웰은 주의를 끌지 않고 소총을 이곳으로 도로 가져와야 했다. 그는 바지의 다리통 속에 그것을 숨기고는 ‘몬티 파이튼 스타일로 걸어왔다. 어쩌면 아일린은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거리를 따라 100미터를 걸어 리볼리 호텔에 도착한다.
여기가 바로 코프의 검은색 참모 차량이 총에 맞았던 곳이다.
그날 아침 한 소년이 쓰러져 숨져 있던 곳.
나는 뒤를 돌아본다. 저 위에는 발코니가 있다. 아일린이 모든것을 내려다볼 수 있었을 발코니다.
저마다 독특한 모습으로 서 있는 플라타너스들이 너무도 아름답다. 가판대의 남자가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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