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


땟물 지문이 드문드문 찍혔다
참고 참았다가
누이가 건네주던
차게 식은 삼립호빵 - P85

멸치똥


똥이라 부르지 말자
그 넓은 바다에서
집채만 한 고래와 상어와
때깔도 좋은 열대어들 사이에서
주눅들어 이리저리 눈치보며
똥 빠지게 피해다녔으니 똥인들 남아 
있겠느냐
게다가 그물에 걸리어 세상 버릴 적에 똥마저 버렸을터이니
못처럼 짧게 야윈 몸속에
박힌 이것을 똥이라 하지 말자
바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늘 잡아먹은 적 없이 잡아먹혀서
어느 목숨에 빚진 적도 없으니
똥이라 해서 구리겠느냐
국물 우려낼 땐 이것을 발라내지도 않고
통째로 물에 넣으면서
멸치도 생선이냐고 - P90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적마다 까맣게 
타들어갔을
목숨 가진 것의 배알이다
배알도 없는 놈이라면
그 똥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들어낸 자리
길고 가느다란 한 줄기 뼈가 있겠느냐
그래도 멸치는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
밸도 없이 배알도 없이 속도 창시도 없이
똥만 그득한 세상을 향하여
등뼈 곧추세우며
누누천년 지켜온 배알이다 - P91

헌신


내 마음이 그대 발에 꼭 맞는 신발 같은 거였으면 좋겠다
거친 길 험한 길 딛고 가는 그대 발을 고이 
받쳐
길 끝에 안착할 수 있다면
나를 신고 찍은 그대의 족적이 그대 삶이고 내 삶이니
네가 누구냐 물으면
그대 발치수와 발가락모양을 말해주리
끝이 없는 사랑이 어디 있으리
다만 그 끝의 자세가 사랑을 규정해주리니
그대 다시 나를 돌아보거나 말거나
먼 길 함께했다는 흔적이라면
이 발 냄새마저도 따스히 보듬고 내가 먼저 낡아서
헌신, 부디 헌신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 P92

마침표에 대하여


문장을 완성하고 마침표를 찍는다
끝이라는 거다
마침표는 씨알을 닮았다
하필이면 네모도 세모도 아니고 둥그런 씨알모양이란말이냐
마침표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란 뜻이다
누구의 마침표냐
반쯤은 땅에 묻히고 반쯤은 하늘 향해 솟은
오늘 새로 생긴 저 무덤
무엇의 씨알이라는 듯 둥글다
또 하나의 시작이라는 거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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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에서


전쟁과 남북의 분단은 우리 문학사를 두 동강이로 잘라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인들의 인생과 문학을 ‘실종‘시켰다. 남북 양측의 독재체제에서 내쫓겼던 그들의 문학과 삶은 다행히도 남한의 민주화 과정이 진전되면서 복원될 수 있었고, 이는 북측에 대한 직간접적인 압력이되기도 하였다. 그런 예로, 분단의 극복이란 ‘좌빨 타령‘이나 ‘북에 가서 살라‘는 폭언과 편향된 생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 - P220

한의 올바른 민주주의의 실현에 의해서 획득될 수 있을 것이다.
이태준에 대하여 쓰면서 서두에 백석의 ‘마지막 시‘를 인용한 것은, 이 시가 어쩌면 월북한 이태준의 말년을 빛바랜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춰주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해방되던 무렵 신의주에 홀로살던 백석의 흔적이 나중에 알려진 이 시로 남아 있다. 시쓰기를 집어치우고 생계를 위해 측량기사가 되었던 백석의 이 시에는, 시를 쓰지않는 기간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냉혹한 현실이 드러나 있다. 이후 월북이 아니라 재북하고 있던 초기에 그가 행사시나 선동시 몇 편을 남겼다고 하여, 백석이 시인으로 되돌아갔다고 나는 인정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의 마지막 간절한 시인의 노래였던 셈이다. 해방 이후 소설가 이태준의 급진적인 변화와 월북한 뒤의 처절한 몰락은 ‘인생파‘ 로서의 그의 소설보다 더욱 소설적인 것이었다. - P221

이태준에 대한 최후의 기록은 ‘남파공작원‘으로 남한에서 체포되어장기수로 살아남은 김진계의 조국이라는 구술자료에 나온다. 그는 이남에 내려와 생존할 수 있는 현장훈련을 위하여 땜장이가 되어 원산에서 평양으로 이동하던 중 마천령산맥 기슭에 있는 강원도 장동탄광지역에서 열흘간 머물렀다. 마을 사람들이 뚫어진 냄비나 솥단지 등을들고 나오면 김진계가 능숙한 솜씨로 땜질을 해주었는데, 어느 노인이구멍난 솥을 들고 나타났다. 노인은 키가 훤칠하고 나이에 비해 건장한체구였다. 젊었을 때에는 꽤 미남이었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게다가남한 말씨를 써서 궁금증이 더했다. 김진계는 노인을 어디선가 본 적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땜질하면서 그는 노인의 얼굴을 곰곰이 뜯어보았다. 혹시 글쓰시는 분이 아니냐고 그가 묻자, 무슨 충격이나 받은 것처럼 노인은 먼 곳을 바라보는 표정이더니 빙긋이 웃고는 조용히 대답했다. - P226

"이태준이라고 합니다."
김진계는 그를 사진에서 보았을 뿐 직접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평북 안주군에서 선전실장을 할 때 도서실을 정리하면서 이태준의 소설집 『달밤』이나 단편소설 「가마귀」를 읽어본 적이 있었다. 『문장강화라는 책이 좋다는 말을 여러 번 들어본 적도 있었다. 그때 이태준의 글을 읽은 느낌은 우리말을 자유롭게 쓰면서 아름답게 표현해 상당히 민족적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소시민적이고 뭔가 약하다는 느낌도들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4년 어느 날 그의 책들이 도서실에서 사라졌다. 작업을 하면서 김진계는 궁금한 것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헌데 아직도 글쓰십니까?"
"쓰고는 싶소만......"
노인의 표정이 무척 쓸쓸해 보였다. 이태준의 나이 예순여섯이던1969년의 일이다. 장동탄광 노동자지구에서 사회보장으로 두 부부가이름도 잊고 살고 있었다. 뒤에 또 어느 탈북 여성작가는 이태준이 숙청된 뒤에 그의 아들딸들이 각처로 뿔뿔이 흩어져 남편들과도 헤어졌다고 증언했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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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동사형


동사 ‘서다‘의 명사형은 ‘섬‘ 이다
그러니까 섬은 서 있는 것이다
큰 나무가 그러하듯이
옳게 서 있는 것의 뿌리,
그 끝 모를 깊이
하물며 해저에 뿌리를 둔 섬이라니
그 아득함이여
그대를 향한 발기도 섰다 이르거늘
곡진하면 그것을 사랑이라 하지
그 깊이가 섬과 같지 않으면
어찌 사랑이라 하겠는가
태풍이 훑고 가도
해일이 넘쳐나도 섬은 꿈쩍도 않으니
섬을 생각하자면
내 모든 꼴림의 뿌리를 가늠해보지 않을 수 없어
그래, 명사 ‘섬‘의 동사형은
‘사랑하다‘가 아니겠는가 - P39




파도가 섬의 옆구리를 자꾸 때려친 흔적이
절벽으로 남았는데
그것을 절경이라 말한다
거기에 풍란이 꽃을 피우고
괭이갈매기가 새끼를 기른다
사람마다의 옆구리께엔 절벽이 있다
파도가 할퀴고 간 상처의 흔적이 가파를수록
풍란 매운 향기가 난다
너와 내가 섬이다
아득한 거리에서 상처의 향기로 서로를 부르는, - P52

직립


취기가 덜 풀린 내 출근길
앞차, 트럭에 실려
황소 한 마리
굽이굽이 여원재 넘고 있다

차가 커브를 돌 때마다
아차, 균형을 놓치고 무릎을 꿇는가 싶더니
애써 일어서 버팅긴다
평소 풀밭에서 그러하듯이 차라리
네 무릎 꺾고 앉으면 편할 텐데
한사코 일어서 버팅긴다

때론 긴장을 놓아버리려 술을 마시고
마신 김에 균형마저 놓아버리려
함부로 무릎을 꺾던 내 중년에게
보라는 듯 일어서
살아있음의 위의威義를 묻는다 - P56

저승이 가까워오면 사람이 그렇듯이
항문이 열려 된똥 한무더기 쏟고
그 큰 눈망울에 물기 훙그렁한 걸 보니
이 길 끝에 무릎을 놓는 그곳이
저승임을 아는 모양이다

다만 실려가긴 하지만
제한 몸은 제가 끌고 가겠다는 듯
더운 김 푹푹 뿜는 동안은 고깃덩이는 아니지 않느냐고
곧은 뿔 앞세우고
소는 버틴다 - P57

명작


지리산 자락에
백로 한 마리 가로질러 날아간다

산이 푸르니
새 더욱 희다*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
저 필생의 한 획

누구의 그림인가, 시인가
내가 그만 낙관을 눌러버리고도 싶었으나

낙관이 없어서, 서명이 없어서
더욱 명작인,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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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효근卜孝根

1962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1991년 계간 시전문지 <시와 시학》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첫 시집 『당신이 슬플때 나는 사랑한다. 이후, 『버마재비 사랑」, 「새에 대한반성문』,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 『목련꽃 브라자』등을 냈다. 시선집으로 『어느 대나무의 고백이 있다.
지리산 아래 살면서 산처럼 푸르고 깊은 시를 꿈꾸고있다.

변산바람꽃을 보러간다고, 앉은부채꽃 군락지를 발견했다고 꽃소식을 따라 발길을 재촉하는 그의 소년처럼 상기된 얼굴을 떠올린다. 그의 전언을 더듬어 춘설이 분분한 낯선 산속을 찾아갔다. 그때 내 앞에 펼쳐진 눈 속에서 피어난 앉은부채꽃의 경이로움이라니, 복효근의 시가 왜 그렇게 서늘하도록 아름다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가를 슬쩍 엿볼 수 있었다. 서정의 빼어남을 굳이 말해 무엇하리. 절창의 수사를 덧붙여서 무엇하리.
무릇 시를 쓰는 이라면 살아서 꼭 한번은 이르고 싶은 곳이 있다. 마침표를 찍고 싶은 한 편의 시가 있다. 이 시집의 한 편, 한 편의 시들이 꿈틀거리며 살아나서 막무가내로 밀려오며 울리는 도저한 파문이라니, 걷잡을 수 없는 질투심에 치를 떤다. 복효근은 분명 시의 한끝을 보았음에 틀림없다.
박남준(시인)

□시인의 말


숫눈 위를 고양이가 지나갔나보다.
그 자리에 얼음이 얼었다.
고스란히 꽃이다.
세상에, 발자국이 꽃이라니!
서늘하고 투명하다.

내 시와 삶은 무엇을 닮아있을 건가.
조심스레 여섯 번째 발자국을 내려놓는다.

2009 새봄
지리산 아래 범실에서

명편名篇


채석강 암벽 한구석에
종석♡진영 왔다 간다
비뚤비뚤 새겨져 있다

옳다 눈이 참 밝구나
만 권의 서책이라 할지라도 이 한 문장이면 족하다

사내가 맥가이버칼 끝으로 글자를 새기는 
동안
그녀의 두 눈엔 바다가 가득 넘쳐났으리라

왔다갔다는 것
자명한 것이 이밖에 더 있을까
한 생애 요약하면 이 한 문장이다

설령 그것이 마지막 묘비명이라 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이미 그 생애는 명편인 것이다 - P11

마늘촛불


삼겹살 함께 싸 먹으라고
얇게 저며 내 놓은 마늘쪽
초록색 심지 같은 것이 뾰족하니 박혀 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마늘어미의 태 안에 앉아 있는 마늘아기와 같은 것인데
알을 잔뜩 품은 굴비를 구워 먹을 때처럼
속이 짜안하니 코끝을 울린다
무심코 된장에 찍어
씹어 삼키는데
들이킨 소주 때문인지
그 초록색 심지에 불이 붙었는지
그 무슨 비애 같은 것이 뉘우침 같은 것이
촛불처럼
내 안의 어둠을 살짝 걷어내면서
헛헛한 속을 밝히는 것 같아서
나도 누구에겐가
싹이 막 돋기 시작한 마늘처럼
조금은 매콤하게
조금은 아릿하면서
그리고 조금은 환하게 불 밝히는 사랑이고 싶은 것이다 - P12

자벌레


오체투지, 일보일배一步一拜다

걸음걸음이 절명의 순간일러니
세상에 경전 아닌 것은 없다

제가 걸어온 만큼만 제 일생이어서
몸으로 읽는 경전

한 자도 건너뛸 수 없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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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첨지는 화증을 내며 확신 있게 소리를 질렀으되 그 소리엔 안 죽은것을 믿으려고 애쓰는 가락이 있었다. 기어이 일원어치를 채워서 곱빼기 한 잔씩 더 먹고 나왔다. 궂은비는 의연히 추적추적 내린다.

김첨지는 취중에도 설렁탕을 사가지고 집에 다다랐다. 집이라 해도 물론 셋집이요 또 집 전체를 세든 게 아니라 안과 뚝 떨어진 행랑방 한칸을 빌려 든 것인데 물을 길어대고 한 달에 일원씩 내는 터이다. 만일김첨지가 주기를 띠지 않았던들 한 발을 대문 안에 들여놓았을 제 그곳을 지배하는 무시무시한 정적, 폭풍우가 지나간 뒤의 바다 같은 정적에 다리가 떨리었으리라. 쿨룩거리는 기침 소리도 들을 수 없다. 그르렁거리는 숨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 다만 이 무덤 같은 침묵을 깨뜨리는, 깨뜨린다느니보다 한층 더 침묵을 깊게 하고 불길하게 하는, 빡빡 하는 그윽한 소리, 어린애의 젖 빠는 소리가 날 뿐이다. 만일 청각이예민한 이 같으면 그 빡빡 소리는 빨 따름이요. 꿀떡꿀떡 하고 젖 넘어가는 소리가 없으니 빈 젖을 빤다는 것도 짐작할는지 모르리라. - P139

혹은 김첨지도 이 불길한 침묵을 짐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전에 없이
"이 난장맞일 년, 남편이 들어오는데 나와보지도 않아, 이 오라질 년." 이라고 고함을 친 게 수상하다. 이 고함이야말로 제 몸을 엄습해오는무시무시한 증을 쫓아버리려는 허장성세인 까닭이다.
하여간 김첨지는 방문을 왈칵 열었다. 구역을 나게 하는 추기, 떨어진 삿자리 밑에서 올라온 먼짓내 빨지 않은 기저귀에서 나는 똥내와오줌내, 가지각색 때가 켜켜이 앉은 옷내, 병인의 땀 썩은 내가 섞인 추기가 무딘 김첨지의 코를 찔렀다. - P139

방안에 들어서며 설렁탕을 한구석에 놓을 사이도 없이 주정꾼은 목청을 있는 대로 다 내어 호통을 쳤다.
"이런 오라질 년, 주야장천 누워만 있으면 제일이야! 남편이 와도 일어나지를 못해?"
라는 소리와 함께 발길로 누운 이의 다리를 몹시 찼다. 그러나 발길에 차이는 건 사람의 살이 아니고 나뭇등걸과 같은 느낌이 있었다. 이때에 빡빡 소리가 응아 소리로 변하였다. 개똥이가 물었던 젖을 빼어놓고 운다. 운대도 온 얼굴을 찡그려붙여서 운다는 표정을 할 뿐이다. 응아 소리도 입에서 나는 게 아니고 마치 뱃속에서 나는 듯하였다. 울다가 울다가 목도 잠겼고 또 울 기운조차 시진한 것 같다. - P140

등잔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 헤아리니
글 아는 사람 구실 정녕 어려워라


구한말 한일합병에 항거하며 자결한 황현의 절명시 제3수의 일부이다. 요즈음이야 소설가든 기자든 글쓰는 일이 생업이 된 사람들에게 ‘사회적 책임‘에 대해 물으면, 속으로는 이제 그럴싸한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할지라도 겉으로는 말짱하게 시치미를 떼면서 "웬 그런 부담스런 말씀을......" 하면서 계면쩍어할지도 모르겠다.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 같은 문고판도 낡은 책이 되어 내 서가의 구석에 얼룩진 채 숨어 있으니까. 그렇다고는 하여도 우리네 살림처럼 청천 하늘의 별만큼 수심이 가득한 고장에서는 혼자서 붓을 들고 유유자적하기가 마음 편한 노릇은 아니다. - P143

나는 「빈처」와 「술 권하는 사회도 좋아하지만 역시 운수 좋은 날」과 「고향」 같은 작품이 현진건 단편의 정수라고 보았다. 「운수 좋은 날,
은 어쩐지 손님도 잘 걸리고 돈도 다른 날보다 많이 벌리는 한 인력거꾼의 행보와 함께, 집에서 홀로 앓아누운 아내의 이야기가 겹쳐서 진행된다. 그것은 마치 스릴러 영화같이 불길하게 독자를 사로잡는다. 왠지 재수 좋은 주인공의 일거수일투족이 믿음직하지 않고 불안한 까닭이다. 드디어 아내가 그렇게 먹고 싶다던 설렁탕을 신바람나게 사가지고김첨지가 돌아왔을 때, 아내는 허망하게도 안 나오는 젖을 빨며 울다지친 아기를 안은 채 흰자위를 드러내고 절명해 있다.
식민지 사회의 민중은 모두가 노예에 지나지 않음을 우회적으로 그려낸 이 작품은, 오늘 운수 좋은 누군가는 동포에게 자기의 불운을 전가시키거나 결국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유예시키고 있을 뿐임을 암시하고 있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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