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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사생활 창비시선 270
이병률 지음 / 창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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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늬들

                                  이병률


 그리움을 밀면 한 장의 먼지 낀 내 유리창이 밀리고

 그 밀린 유리창을 조금 더 밀면 닦이지 않던 물자국이 밀리고


 갑자기 불어닥쳐 가슴 쓰리고 이마가 쓰라린 사랑을 밀면

 무겁고 차가워 놀란 감정의 동그란 테두리가 기울어져 나무가 밀리고

 길 아닌 어디쯤에선가 때 아닌 눈사태가 나고


 몇십 갑자를 돌고 도느라 저 중심에서 마른 몸으로 온 우글우글한 미동이며

 그 아름다음에 패한 얼굴, 당신의 얼굴들

 그리하여 제 몸을 향해 깊숙이 꽂은 긴 칼들


 밀리고 밀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이름이 아니라

 그저 무늬처럼 얼룩처럼 덮였다 놓였다 풀어지는 손길임을


 갸륵한 시간임을 여태 내 손끝으로 밀어보지 못한 시간임을

                                                             시집 [바람의 사생활(창비)] 중에서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한다] 여행산문집 [끌림] 이 있고

                                                             제 11회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

 

 

        

 

 

환한 봄날이다.

저 세 모녀는 웃음이 닮았고

볼 빨간 것이 닮았고

또 무엇이 닮았을까?

왜 셋이서만 카메라를 향해 있는 걸까?

어쨌든

스물의 풋풋한 내가 있고

병에 시들기 전의 하얀 얼굴의 김판득여사가 있고

이제 마악 열일곱이된 꽃다운 강막내가 있으니 좋구나!

저런 시절도 있었구나!

웃고있으니

저리 환하게 웃고 있으니 보기 좋구나!

참, 좋구나! 

끄덕끄덕~

저 와랑와랑한 햇빛 속에는

양수장시절의 작별이 있을 것인데.

무늬들로 남은 시간임을.

조금 더 밀면 볼 수 있을까?

밀어볼까?

닦이지 않던 물자국이 밀리고.

여태 내 손 끝으로 밀어보지 못한 시간임을.

 

보.고.싶.소.

김판득여사!!!

오늘은 참말로 징허게 보고싶소.

징허요, 잉.

으쩌까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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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다보면 문득 창비시선 291
정희성 지음 / 창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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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정희성

  

 길가의 코스모스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나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

 선득하니,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그림자가 한층 길어졌다

                                              시집 [돌아다보면 문득 (창비 2008)] -중에서

 

정희성 시인은 1945년 태어나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답청踏靑(1974)] [저문 강에 삽을 씻고 (1978)]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1991)]

[시를 찾아서 (2001)] 등이 있으며 제1회 김수영문학상과 제16회 만해문학상을 수상.

 

 

         

 

 

매일 안개 뿌연 아침을 달리다보면 불과 일주일전의 저 하늘이 아득하게 그리워집니다.

그러다 단풍들기 시작한 길가의 벚나무를 보고 철렁합니다.

시월이 가고있습니다.

너무 쉽게 가을이 지나가고있습니다.

돌아오는 길, 다시 안개가 조금씩 야위어 가는 달을 아슴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내일 아침에도

맑은 하늘은 볼 수 없겠네요.

집에 돌아와 따끈따끈하게 배달된 시집에서 가을날을 만납니다.

가슴이 저릿합니다.

고단한 하루가 가고있습니다.

내일도 고단하겠지요.

그래도

그래도 만나는 사람들의 환한 웃음이 좋습니다.

간혹 짜증섞인 목소리에도 유머로 웃어 넘기는 하루를 기대합니다.

'돌아다보면 문득' 의 첫 시

희망의 희망을 품어봅니다.

 

 

 

 희망

 

                          정희성

 

 

그 별은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별은 어둠속에서 조용히

자기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나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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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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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뭔가를 먹는 게 도움이 된다오. 더 있소. 다 드시오. 먹고 싶은 만큼 드시오. 세상의 모든 롤빵이 다 여기에 있으니."

   그들은 롤빵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앤은 갑자기 허기를 느꼈는데, 그녀는 롤빵을 세 개나 먹어 빵집 주인을 기쁘게 했다. 그리고 그가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주의 깊게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지치고 화가 나 있었지만, 빵집 주인이 하고 싶어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빵집 주인이 외로움에 대해서, 중년을 지나면서 자신에게 찾아온  회한과 무력감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들에게 그런 시절을 아이 없이 보내는 일이 어떤 것인지 말했다. 매일 오븐을 가득 채웠다가 다시 비워내는 일을 반복하면서 보내는 일이 어떤 것인지. 그가 수없이 만들었던 파티를 위한 음식. 축하 케이크. 손가락이 푹 잠길 만큼의 설탕. 케이크에 세워두는 작은 신혼부부 인형들. 몇백, 아니, 지금까지 몇천에 달할 것들. 생일들. 그 많은 촛불들이 타오르는 것을 상상해보라. 그는 반드시 필요한 일을 했다. 그는 빵집 주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꽃장수가 아니라 좋았다. 사람들이 먹을 것을 만드는 게 더 좋았다. 언제라도 빵 냄새는 꽃향기보다 더 좋았다.

   "이 냄새를 맡아보시오." 검은 빵 덩어리를 잘라내면서 빵집 주인이 말했다. "뜯어먹기 힘든 빵이지만, 맛은 풍부하다오." 빵냄새를 맡은 그들에게 그가 맛을 보게 했다. 당밀과 거칠게 빻은 곡식 맛이 났다. 그들은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더이상 먹지 못할 정도로 먹었다. 그들은 검은 빵을 삼켰다. 그건 형광등 불빛 아래로 들어오는 햇살 같았다. 그들은 새벽이 될 때까지, 창으로 희미한 햇살이 높게 비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는데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집 [대성당] 중에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문학동네-김연수 옮김)

 

 

 

            

 

 

일상이 없다면 '쉼' 이 이리 달콤할 수 없을 것이다. ㅋㅋ

휴일의 유일한 호사는 '방화수류정'에 발을 쭈욱 뻗고 앉아서  

이어폰을 꽂고 책을 읽는 일이다.

카버의 '대성당'을 읽던 날의 하늘이다.

천명관의 '고래'

이기호의 '최순덕 성령충만기'

권정생의 동화 '랑랑별 때때롱'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

대운하 반대와 생명의 강을 모시기 위한 시인 203인의 공동시집

'그냥 놔두라 쓰라린 백년 소원 이것이다'

정민의 '비슷한 것은 가짜다' 등을 읽었다. 

 

덥다.

덥다.

이렇게 여름,

지나간다.

   

책장을 덮고 떠나는 순간 벌써 영원처럼 그리운....... 

그곳.

아직 한참 기다려야 하는구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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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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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 네시의 적막 속에 앉아 당신을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헤어지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달걀처럼 따뜻하고 매끈한 당신의 이마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당신의 이마를 볼 때마다 나는 이상한 안도감에 젖어 있곤 했습니다. 그리고 또 불가해한 당신의 그 뒷모습.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도 만져지지 않던 그 완강한 존재감. 부동의 한 존재를 그처럼 뒤에서 눈여겨보며 나는 어느덧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제 내가 마음에 품고있던 영상들을 대개 다 당신에게 투영된 다음이고 이제 남은 것은 곧 꺼져버릴지도 모를 나에 대한 희미한 존재감뿐입니다. 우리는 서로 익숙해지기 위해 만나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더군다나 안심하기 위하여 만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항상 다투고 있어야만 하고 더이상 싸움을 하고 싶지 않다면 한번쯤 떠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중략)
  세상의 모든 아침이 날마다 그대 이마에 깃들이기를 바라며
  세월 총총
 
                                                                   -윤대녕 산문집 [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 (문학동네)]-중에서
 
 
윤대녕; 1962년 충남 예산 출생. 1990년 [문학사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
소설집 [은어낚시통신] [남쪽 계단을 보라]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 와
장편소설 [옛날 영화를 보러갔다] [추억의 아주 먼 곳] [달의 지평선] [코카콜라 애인] 등이 있으며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수상

 

 

         

 

 

입춘, 보옴이 창밖까지 달려온 듯한 날씨였다.

책을 정리하다가 과감하게 (진짜 눈 딱 감았다) 책꽂이 두 칸쯤 책을 버렸다.

그렇지만 결국 한참 세월이 지난 문예지들만 세 박스다.

윤대녕의 책을 스스르 열어보았더니

저 대목에 밑줄 쫙이다.

오래 전, 저 문장들에 가슴 서늘했을까? 

기억이 없다.

시간이 지나면 담담해지는 것들..... 뭐가 또 있을까?

이별도 그런 것들 중의 하나겠지.

 

가산마을에서 하는 마지막 포스팅이다.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일^^

김장을 마친 밭에 여름 내 우리 입을 즐겁게 해주던 상추들이 오소소 돋아있었다.

연록의 여린 잎들 앞에서 무슨 말이 필요하랴.

생명이란 그런 것임을.

저절로 자란난 것들은 몸으로 보여준다.

용량이 모자란다고 사진이 더 이상 안 올라간다. -,.-

 

잘가라, 한 시절이여.

이제 마흔 다섯의 봄을 맞을 것이다.

 

2007.2.4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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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 창비시선 256
박남준 지음 / 창비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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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

 

                                            박남준

 

 

눈 덮인 숲에 있었다

어쩔 수 없구나 겨울을 건너는 몸이 자꾸 주저앉는다

대체로 눈에 쌓인 겨울 속에서는

땅을 치고도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묵묵히 견뎌내는 것

어쩌자고 나는 쪽문의 창을 다시 내달았을까

오늘도 안으로 밖으로 잠긴 마음이 작은 창에 머문다

딱새 한 마리가 긴 무료를 뚫고 기웃거렸으며

한쪽 발목이 잘린 고양이가 눈을 마주치며 뒤돌아갔다

한쪽으로만 발자국을 찍으며 나 또한 어느 눈길 속을 떠돈다

흰빛에 갇힌 것들

언제나 길은 세상의 모든 곳으로 이어져왔으나

들끓는 길 밖에 몸을 부린 지 오래

쪽문의 창에 비틀거리듯 해가 지고 있다 

                                                                             

                                                                       -시집 [적막 (창비)] 중에서-

 

 

박남준; 전남 법성포출생. 1984년 [시인]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 [풀여치의 노래]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적막]

산문집 [작고 가벼워질 때까지] [꽃이 진다 꽃이 핀다] 등이 있음.


         

 

이만 두고 가기로 한다.
조금 더, 조금 더
미뤄둔
창을 두고 가는 일
더는
욕심부리지 않기로 한다.
기름이 떨어진지 오래인 노숙의 잠깐 잠깐 머뭄도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언제나 길은 세상의 모든 곳으로 이어져 왔으나
들끓는 길에 몸을 부린 지 오래
쪽문의 창에 비틀거리듯 해가 지고 있다'
 
2007, 2, 2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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