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를 여전히 먹여 살리는 것처럼, 죽어도죽지 않는 문화적 아이콘들이 떠받치고 있는 도시들이 세계 여기저기 적지 않을 것이다. 한가할 때 한번 그렇게 유령 시장이 된 사람들과 그들의 도시를 쭉 짝지어 리스트로 만들어보고 싶다. 게으른 여행자라 다 가보지는 못한다 해도 말이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실존하지 않았던 가상의 인물들도 좀 껴 있어서, 흥미가 더해지지 않을까 한다.
돌아오는 기차에선 호엔잘츠부르크성에서 재미 삼아 쏘아본 석궁 과녁 종이를 꺼내보았다. 화살이 뚫어 일어선 가장자리가 촉감이좋았다. 가운데를 두 번이나 맞힌 것이 아직까지도 자랑이다. - P168

영어로 치면 스리 랜드 포인트인 것 같았다. B와 S가 나를 끌고경계석으로 향했다. 무엇의 경계인가 했더니 독일과 네덜란드, 벨기에 세 나라의 국경이 한 점에서 만나는 꼭짓점을 표시하고 있었다. 나는 흥분하고 말았다. 그 전날, 유연한 국경이 재밌다고 말한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그야말로 가장 유연한 곳에 데려다준 것이었다. 네 살, 여섯 살쯤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경계석 근처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한 걸음 딛을 때마다 발밑의 나라가 바뀌었다. 뒤로 국기가 셋 꽂혀 있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았다. 군인이 없었다. 어느 나라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공원이었다. 나도 모르게 평소보다 높은ㅅ 목소리로 신이 난 채 어린이들과 경계석을 빙빙 돌았다. 내 격한 반응에 B 자매는 만족한 듯했다. 한 걸음마다 벨기에였다가 네덜란드, 네덜란드였다가 독일, 독일이었다가 벨기에……. 뭐라 할 수 없이 멋진 경험이었다. - P184

브뤼셀 왕립 미술관이 벨기에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 왕립 미술관을 향해 따뜻하고 달콤해진 배를 안고 걷기 시작했다. 거리 곳곳에서 땡땡과 스머프가 튀어나왔다. 땡땡의 모험은 1929년부터 연재되었던 작품이라 이제 와서 보면 아시아인으로서 큰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그런 인종차별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시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손이 가지는 않는 편이다. 그보다 더 전에 쓰였어도 지금의 우리를 상처 주지 않는 좋은고전을 탐색하거나 동시대의 작품들을 성실하게 찾아보는 게 폭력적인 작품을 견디며 계속 읽는 것보다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게 어떤 작품은 잊히고 어떤 작품은 계속 살아남는 것일 테다. 오래 살아남는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당대의 인식보다 더 멀리 나아가야 하는 것 같다. 설령 곧바로 이해받지 못하고 비난만 돌아온다 해도……………. 우리가 지금 사랑하는 작품들 중 많은 수가 감내해야 할 것들을 감내하며 멀리 밀고 나갔던 작품들인 것이다.  - P197

각났세상은 망가져 있다. 어떻게 고쳐야 할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무참히・・・・・・・ 그것을 알면서 여행하는 것은 묘한 일이다. 여행지에 이르러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사실은 아름답지 않다니‘ 중얼거릴때 반대 방향으로 미끄러지는 마음은 현기증을 일으키고 만다.
브뤼셀에서 묵은 숙소는 맨해튼 거리에 있었다. 브뤼셀을 떠나던 7월 21일은 벨기에의 국경일이어서 오줌싸개 동상은 전날과는달리 옷을 잘 차려입고 있었다. 동상의 옷을 갈아입히는 사람들을보고 싶었는데 보지 못했다. - P203

브뤼헤의 정취에 발목까지만 담근 다음, 해가 지기 전에 숙소로돌아왔다. 숙소 근처를 산책하며 전날 본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을다시금 이해했다. 밤도 낮도 아닌 그 그림 속 시간은 개념적인 것일뿐만 아니라 벨기에 북부엔 실제로 존재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가로등이 켜지고도 해가 어찌나 천천히 지는지 영원히 지지 않을 것같았다. 10시가 넘어서야 해가 지는 서늘한 여름이었고 잡음 없이조용했다. 빛의 제국이란 소리가 없어야 성립될 수 있는 것이구나,
아마추어 감상가로서 가슴 두근거리며 생각했다. 사람들은 일찍 귀가해 발걸음 소리도 자동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풀벌레도 날개를떨지 않는 깨끗한 무음 속을 걸었다. 직접 감각하고서야 이해할 수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예민한 몸을 끌고 다니는게 싫어 여행을 망설이는 사람도 계속 여행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요소들에 대해서.
- P207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긴 의자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등받이가 거의 누워 있어서 거기 앉는 사람도 눕게 되었다. 그 의자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도 있긴 있었지만 어째선지 잠든 이들이 많았다. 코를 골기까지 했다. 깨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약간 해양 포유류가 된 기분으로 나란히 누워 있거나, 아트 북 코너에서 트렁크에 몇 권이 들어가려나 탐욕스럽게 계산을 해보곤 했다. 아트 북들이 그렇게 크고 무겁지만 않았더라면 많이 사 왔을 것이다. 가격도국내 가격의 3분의 2밖에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때 그 책들에서알게 된 아티스트들의 작업을 지금껏 열심히 따라 살펴왔다. 해외예술가들의 동향을 이처럼 쉽게 알 수 있다니, 인터넷은 대부분의경우에 끔찍하지만 가끔 정말 멋지다. - P225

여자들의 삶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세계 곳곳의 여자들의 삶에 대해, 여자 이름으로 된 제목의 소설들을 많이 쓴 것은 그래서인것 같다. 하루는 처음으로 부르카를 입은 여자를 보기도 했다. 여자는 혼자 걷고 있지 않았다. 다른 가족들은 모두 평범한 랄프 로렌 셔츠와 나이키 운동화 차림이었다. 색색의 평상복 사이에서 혼자 눈만 남기고 검은 천으로 휘감은 모습은 둔중하게 다가왔다. 어디까지가 당사자의 선택이고 어디서부터가 집단적 압력의 결과일지, 존중에서 비롯된 문화상대주의가 폭력에 대한 방관으로 변질되기 시작하는 지점을 어떻게 짚어낼지 항상 어렵게 느껴진다. 세계가 이렇게망가지고 무너져가는 것은, 이 세계를 복원하고 개선할 가능성을 가진 여성들이 교육과 사회활동의 기회를 얻지 못해서가 아닐까 두려워하며 추측하기도 한다. 그 여성들이 잃은 가능성은 결국 인류가잃은 가능성이 될 확률이 높아 조급해지지만, 여성이 극도로 억압받는 지역에서도 의미 있는 움직임들이 보이고 먼 곳에서도 지지를 보내기 예전보다 쉬워진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희망이다. 모여서강해지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인권 단체에 기부를 하고 오지은의 작은 자유를 들으며 마음을 다진다. - P227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단 걸 깨닫고도 끝까지 가야 하는 경우였다. 인생에 대한 비유처럼 들리네, 하고 그와중에도 웃었다. 문제는 뒤셀도르프 숙소의 체크인 시간이었다. 아무리 시간 계산을 해봐도 뒤셀도르프에 도착하면 자정을 넘길 게 분명했다. 숙소에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했다.
"아아, 그런 일도 종종 일어나죠. 체크인 시간 안에 못 온단 말이군요? 그럼 와서 현관에 붙은 인터폰을 눌러요. 내가 열어드릴게요."
숙소 사장님은 흔쾌히 대답했다. 스트레스를 한참 받은 와중에도 안심이 되었다. 차가워진 손을 주무르며 샌드위치로 저녁을 때우고 어찌어찌 상황을 해결했다고 스스로를 다독거렸는데…………사장님은 호언장담을 저버리셨다. 숙면을 취해버리신 것이다.
그 밤만큼 난감했던 적이 또 없었다. 뒤셀도르프역에 도착했을때는 12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고 숙소 근처까지 가자 1시였다. 가는 길엔 지하도를 건너야 했으며 벽에는 위협적인 늑대 그래피티가그려져 있었다. 인적이 없는 게 무서웠는지 있었으면 더 무서웠을지모르겠다. - P233

장르가 달라도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린 다음 힘든 중간 단계를거쳐 끝까지 밀어붙이는 과정은 비슷하니 다 통할 거라고 대답했다.
효과를 믿기보다는 강렬하게 바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되새기는 것자체가 의미 있었다. 한편, 모차르트 초콜릿은 있는데 베토벤 초콜릿은 없는 게 의아했다. 피너츠』의 슈로더가 알면 서운하겠네, 하고웃었다. 슈로더가 베토벤을 생각하듯이, 자주 박완서 선생님을 생각한다. 편집자로 일할 때 멀리서 딱 한 번 뵌 적이 있다. 그것도 뒷모습이었지만. 돌아가셨을 때 슬펐는데, 곧 「박완서 소설 전집이 스마트폰 앱으로 나와 색다른 위로가 되었다. 그렇구나, 선생님은 돌아가셨지만 전집 앱으로 오래오래 머무시겠구나, 그럴 수 있는 작가가정말 적은데 대단한 탁월함이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이름과 실루엣을 딴 초콜릿들을 잠시 상상해보았다. - P240

미완결성은 물리적으로도 들어맞아, 도시 한가운데공동들이 산재했고 온통 새로 지어지고 있어 어느 방향으로 사진을찍어도 크레인이 찍혔다.
짧게 머문 것이 아쉬웠는데 다행히 언제나 책이 있고, 한은형의베를린에 없던 사람에게도』와 박민정의 서독 이모』를 읽으며 베를린만의 질감을 즐길 수 있었다. 다시 베를린에 갈 수 있게 될 때까지, 베를린에 대한 책을 잔뜩 읽고 싶다. 베를린에 다녀와서 베를린에 대한 책을 끝없이 읽는 것과 베를린에 대한 책을 모조리 읽은 다음 베를린에 가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베를린을 이해하는 데 적합할까? 알게 된다면 그것에 대해 쓰고 싶다. - P259

 트럭 운전사의 보조를 하며 생크림을 배달하셨다고 한다. 생크림을 배달하는 젊은 할아버지를 상상해보았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막막했을 것이고, 또 어떤 날은 막막하면서도 햇빛이 좋아 작은 즐거움을 느끼시지 않았을까? 그렇게 유학한 후 초등학교 교사가 된할아버지가 엄마를 포함해 딸들을 다 대학에 보내셨고, 손녀들에게도 언제나 큰 기대를 걸어주셔서 힘을 얻었다. 문학 애호가답게 헨리크 입센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추천해주신 데다, 책을 쓰고 드라마를 쓰라고 격려해주신 적도 있는데 뭘 어떻게 미리 아셨던 걸까싶다. 돌아가시기 전에 데뷔했으면 기뻐하셨을 텐데 1년 반쯤 어긋나고 말았다. 내 소설 속 좋은 어른들은 할아버지를 닮았다. 누군가를 동등하게 대해주는 것, 북돋아주는 것, 가능성을 알아봐주는 것은교육자의 자질이기도 하고 어른의 자질이기도 한 것 같다. 내가 받은 응원과 지지를 이야기로 감싸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다. - P272

어느 나라나 위험한 일부가 있고, 상식적인 나머지가 그 위험한일부에 휘둘리고 끌려가고 동조해버릴 때 모든 게 나빠지는 것 아닐까 추측한다. 나는 그즈음 베를린에서 묵었던 티어가르텐이 히틀러시기엔 정신질환자와 장애인, 외국인들을 강제로 불임시키고 각종생체 실험을 하던 지역인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참이었다. 21세기의국가들은 20세기 국가들로부터 멀리 왔지만, 조금만 경계를 낮추면악의는 습기 높은 계절의 곰팡이처럼 기세를 떨치며 확산하고 지우기 어려운 얼룩을 남긴다. 이를테면 일본에는 나와 내 책을 극진히사랑해주는 다정한 독자들이 계시지만, 서점에서 내 책은 혐한 서적들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놓일 것이다.  - P273

오사카 국제미술관에서는 엘 그레코 특별전이 한창이었다. 처음에는 왜 현대미술관에서 16세기 그림을 전시하는지 의아했지만 그림을 보자마자 모던함이 느껴져 이해할 수 있었다. 본인은 스스로 뭘하는지 인식하지 못했을지 몰라도 엄청 다른 걸 그리고 만 듯했다.
정신은 시대에 속해 있지만 몸이 먼저 앞서 나가는 예술가들이 재밌는 것 같다. 특히 「사도 성요한」의 독배를 든 초록빛 옆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뭐라 말할 수 없이 사람을 슬프게 만드는 기다란 손가락들이 16세기를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나 있었다. 시대와 묘하게 불화하는 느낌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이만큼 가까이에 그 작품을 신나게 등장시켰다. 여행의 조각들이 소설에 석영처럼 박혀 있는 것을발견할 때마다, 좀처럼 여행하지 않는 나의 등을 떠밀어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느낀다. - P276

존재하지 않는 괴물도 존재하는 괴물도 이겨낼 수있을 것이다. 일부러 통과하기 쉬운 의례를 만들고, 삶과 기억에 분기를 두어 다음 세대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겠구나, 짐작했다.
결국 해가 질 무렵, E씨와역앞에서 헤어지게 되었고 아쉬운 마음에 주소를 주고받았다. E씨와의 여섯 시간은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서 얻은 빛을 오랫동안 에너지원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보답을바라지 않는 친절을 곱씹을수록 나도 E씨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감사 인사 삼아 홍삼과 여러 가지를 담은 소포를 보냈고, E씨도 교토의 해조류 절임과 아름다운 찻잔을 보내주시는 등 몇 번의 교류가 더 있었다. 너무 귀찮게 해드리고 싶지는 않아서 자제하지만, 언제나 E씨의 안녕과 건강을 바란다. 특히 여름마다아라시야마의 홍수 뉴스가 보도되는데 그럴 때마다 걱정이다. 또 편지를 쓰고 싶다. 함께 걸었던 길을 자주 생각합니다, 저는 뒤에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잘 올라가고 있습니다, 하고 번역기가잘 번역해줄지 모르겠다. - P284

생몰년이 정확하지 않아 970년 즈음 태어나 1025년 즈음 사망한걸로 추정되는 무라사키 시키부의 삶이 궁금하다. 보수적인 전근대아시아에서 가장 사랑받은 여성 소설가가 아닐까? 지금 시대를 여성 소설가로 사는 것도 여러 가지 소설 외적인 것에 시달려 지치고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앞선 작가들을 생각한다.
20세기의 작가들, 19세기의 작가들을 거쳐 자꾸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10세기 사람도 언니처럼 느껴지고 만다. 비슷한 괴로움을 가졌었나요? 외로울 때가 있었나요? 이야기를 미끄러지듯이 쓸 때와 쓰다가 멈췄을 때 어떤 표정을 지었나요? 한 시간쯤 만나서 물어보고 싶은 것을 잔뜩 물어볼 수 있다면 좋겠다.
"나도 죽고 나서 작은도서관 같은 게 되고 싶다."
신이 나서 엄마에게 말했더니 엄마가 당황해하던 게 기억난다.
부모는 아무래도 자식의 죽음을 그다지 떠올리지 않는 것이다. 자식의 경우는 그러지 못해 수많은 동화책들이 부모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아이들을 위해 쓰였는데 말이다. 부모는 자식을 더 속 편하게 사랑하며, 동시에 더한 무방비에 놓이고 만다. - P287

이틀 연달아 너무 많이 걸어 발톱이 빠지려 하는 상태여서, 엄마는 숙소로 먼저 올라가고 C와 둘이 도토루에 갔다. 둘 다 동절기 한정 메뉴인 밤 맛이 나는 커피를 골랐다. 마지막 밤, 카페인 때문에 잠들지 못한다 해도 그렇게 친구와 이야기하는 게 좋았다. 사람마다맞는 장소가 따로 있다는 이야기를 했고, 내 경우엔 그게 서울이었지만 C는 다시 찾아야 했다는 걸 한층 이해할 수 있었다. 걷다 보면거리에 녹아들 수 있는 도시가 꼭 태어난 도시는 아닐 수도 있고 그런 경우 그곳을 찾기 위해 떠나봐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친구와 일상적으로 만나지 못하는 게 슬퍼도 걸음걸음을 응원한다.
C와 사흘 연달아 만나서 좋았는데, 그날 밤 마음이 헛헛해지고말았다. 역시 초능력을 얻는다면 순간 이동이 좋겠다. 친구들이 있는도시의 커피 체인점에서 한 시간씩만 만나고 올 수 있도록. 그래도며칠에 한 번씩 서로 잘 자라는 인사를 할 수 있어 행복하다. 서로의안녕을 바라고 감미로운 잠과 이어질 다음 날을 기원해주는 사이인것만으로도 계속해나갈 수 있다. - P290

사랑 아닌 다른 부분이 인생의 중요한 선택에 명확히 관여했는데 스스로가 그걸 보지 못했다는 것이 기묘했다.
여러모로 공적인 문제를 공적으로 파악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행이다. 모두가 안전하다고 느낄 때까지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을도저히 거둘 수 없을 것이다. 여성들이 마땅히 안전을 누리게 되면,
삶의 선택들이 크게 바뀔까? 외부의 폭력이란 불순물이 제거된 사랑과 시민 결합은 어떤 형상일까? 바뀌어갈 사회가 궁금해서 오래살고 싶어진다. - P304

SF 작가라서 믿는 건 과학밖에 없지만,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언제나 한껏 이끌리고 만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한 사람이 어떤 것을 강렬히 염원하는지 존중으로 멀리서 나누고 싶어진다. 룽산사와 바오안궁을 가보기로 한 것은 그래서였다.
룽산사는 들어서자마자 건축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었다. 물론 타이베이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사찰이니 아름다운 게 당연하지만, 분명 여러 차례 파괴되었다가 복원되었다고 했는데 그런 흔적을찾아볼 수 없는 화려함이 대단했다. 기둥만 두 시간쯤, 지붕만 한 시간쯤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 P315

하지만 결국 누구나 아프기 마련이니, 이야기 매체에 잔잔하게아픈 사람들이 드물지 않게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프지 않은사람이 잘 없는데 이야기 속 세계에는 완벽하게 건강한 사람과 중병에 걸린 사람만 존재하는 것 같다. 중병을 다루는 방식에도 문제가없지 않고, 안고 사는 병은 아예 생략되고 있는 게 아닌지 싶다. 얼마전 또 한 번의 위로는 블랙핑크 다큐멘터리 「세상을 밝혀라」에서 제니 씨가 "온몸이 아파"라고 말한 것이었다. 무대 위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아이돌이 솔직하게 온몸이 아프다고 말하는 걸 보자뭉클했다. 세븐틴 다큐멘터리 ‘히트 더 로드」에서도 투어 중에 멤버분들이 돌아가며 아프던데, 편집하지 않고 보여주어서 좋았다. 우리사회는 지나치게 항상 건강함을 연기하고 있지 않은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 P317

이기존의 통로들이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길들이 아닌지 늘은근히 의심하고 있다. 문학계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서구의 문학상들을 그렇게 선망할 필요가 있나? 권위를 너무 바깥에서 찾고 있는게 아닐까? 국제 문학상이 연결의 매개체인 것은 확실하니, 차라리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함께 문학상을 만드는 게 낫지 않을지? 영미권이나 서유럽의 인정을 받아야 작품을 재평가하는 분위기도 좀아리송하다. 그 전에도 그 작품들은 좋은 작품이었는데 무관심과 냉대 속에 있지 않았나? 반면에 1세계 작가들이 아시아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그것으로 본국에서 호응을 얻는 일은 잘 없는 것 같아기울어진 지형에 마음이 좀 꼬이고 만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해하기어려운 우회 경로들이 많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작가가 내한했을 때 릿터」인터뷰를 통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아프리카작가들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의ME작가를 만나기 위해 유럽을 통해야 하는 기이함에 대해 깊이 공감하며 대화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직접 항로들이다. 그리고 그 굴절되지 않은 길들을 아끼고 우선시하는 일이다. 아시아인으로서 아시아를 더 열렬히 사랑하고 싶다. - P335

런던아이를 해 지는 시간을 계산하여 예약했는데, 비가 오지 않아 노을과 야경을 모두 볼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탔을 때 마지막으로 하얗게 빛나던 하늘이 내릴 때는 완전히 어두워졌다. 클래식영화 속 런던의 건물들이 그대로여서, 우리의 시대가 지나고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이 다 사라져도 그대로겠구나, 우리가 건물들을 방문하는 게 아니고 건물들이 잠깐 지나가는 우리를 보고 있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었다. 언제나 거기 있을 것과 잠깐 거기 있는 것들 사이를 누빌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행운이었다. 사람들이 다시 여행할수 있는 시기가 오면, 행운들이 고르고 넓게 주어졌으면 좋겠다. - P377

무형의 콘텐츠가 가지는부가가치는 무시할 게 못 되었다. 이전 시대의 창작자들과 그들을계승한 동시대의 창작자들이 이뤄내고 있는 풍부한 문화적 축적과그것을 즐기고자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도시가 가지는 저력이 탐나는 목표가 되었다.
뮤지컬을 보고 나서 더더욱 자주 로알드 달의 말을 떠올린다.
"친절함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한다. 용기나 대담함이나 너그러움이나 다른 무엇보다도 친절함이 말이다. 당신이친절한 사람이라면, 그걸로 됐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달의 말을 어설프게 번역해보았다. 어른이되고 나서야, 세상의 보고 싶지 않았던 면들을 보고 나서야 이 말이의미 있게 와닿았다. 아동문학을 쓰고 싶었는데 다른 방향으로 와버렸지만, 세계에 대한 태도를 다시 다잡고 싶을 때는 역시 아동문학을 찾게 된다. - P382

여행 전에는 기대감으로 즐겁고 여행 중에는 충만감이 차오르는데여행 후에는 상실감이 찾아오는 것 같다. 어떤 여행이든 그렇지만런던에 다녀왔을 때 유독 심해서, 집에 돌아온 밤 카메라의 메모리를 살펴보다가 이상한 착각을 하고 말았다. 찍은 사진의 절반이 날아가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분명히 찍었던 것 같은 사진들이 없었다. 당황해서 메모리 복원 프로그램으로 몇 번 복원도 시도해보았는데, 그러다가 깨달았다. 머릿속에 남은 강렬한 이미지들을 사진으로착각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 사진으로 착각할 만큼 생생했던 이미지들도 이내 희미해지고 잊히게 된다. 안쪽에서 그렇게 빛을 잃고 사라져가는것들을 느낄 때 안타까움이 깊어진다. - P389

 겨울에도 유유히 물 위를 미끄러지는 물새들 가운데 가끔 다른 종이 하나 천연덕스럽게 섞여 있는 경우가 많던데 혼자 다른 종류라는 걸 알고 다니는지 모르고 다니는 건지……….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새를 보러 자발적으로 여행을 다니게 되었다. 순천만에도 가고 연천에도 가고 강원도에도 가고 제주도에도 갔다. 새들이 많고 보호에도 힘쓴다는 싱가포르에도 갔었다. 매번 누군가의 부추김에만 여행을 떠났는데 몇 안 되는 자발적 여행을 한 셈이다.
새의 사진을 찍어볼까도 했는데, 그것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내수준으로는 도저히 움직임을 쫓을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이상하게도새들의 이미지는 내 안에서 덜 유실되는 것 같다. 물총새의 움직임처럼 강렬한 것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어서, 상실감 없는 취미를찾은 것이 기쁠 뿐이다. -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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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을 향유하는 것은, 그러나 어쩌면 매우 환경과 훈련의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지구에서 한아뿐』의 헌사에 ‘아무리 해도 로또가 되지 않는 건 이미 엄마 아빠 딸로 태어났기 때문이에요‘라고쓴 것은 아부나 효도가 아니라 사실 진술에 가까웠다. 나의 부모님은 1950년대 중반에 태어나 가난과 싸우며 고학했고, 결국 교육을통해 가난에서 벗어났다. 경영대 캠퍼스 커플이었는데, 엄마는 과의유일한 여성이었다니 1970년대 중반은 대체 어떤 세상이었는지……….
두 분은 경제성장기에 사회인이 되어 여유가 생기자 억눌렸던 것을해소하려는 듯, 책 음악 공연 영화 전시 여행 등 문화적 경험에 탐닉했다. IMF 때를 비롯해 주춤거린 시기야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내내멈추지 않았다. 먹는 것에도 입는 것에도 집을 가꾸는 데에도 심드렁한 채, 신발은 길에서 만 원짜리를 사더라도 책은 매주 사들여 탑을 쌓았다. 그런 부모님 곁에서 자라는 동안 나 역시 예술을 사랑하고 즐길 수밖에 없도록 빚어진 것이다. 믿을 수 없이 큰 혜택을 받고컸다. 무형의 것을 받아서 뒤늦게 깨달았지만, 복권 당첨이었다.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거저 주어진 것이니 살면서 세상에 갚아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p39,40


 많은 사람들이 문단의 폐해에 대해서는 자주 말하지만 장르 문학계의 비틀림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데 괴롭힘 문화로 치면 한 수 위다. 거의 매년 악플러를 잡아보았더니 비슷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업계 사람으로 밝혀지거나 하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얼마 전에도 개인적으로 비슷한 경험을 하고 안쪽의온도가 조금 떨어져버렸다. 이대로 방치하면 모두가 진저리 치는 문단보다도 더한 유독함을 뿜어낼지도 모른다. 바로 곁에서 일어나고있는 일만은 아니다. 「스타워즈」 시리즈 7, 8, 9편을 만든 제작진과배우들이 전 세계적으로 공격을 받는 것을 보며, 「에반게리온」시리즈의 안노 히데아키가 오랫동안 상처를 받아왔다는 것을 들으며 서브컬처계의 가학성에 대한 고민이 깊어져간다.
겪어본바, 대부분의 서브컬처 향유자들은 다정하고 기발한데, - P106

가끔 몇 년 전에 읽은 책 한권이 마음에 안 들었다고 집요할 정도로따라붙으며 잔인한 말들을 하는 이를 맞닥뜨리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정말 어렵다. 마음속의 저울이 잘 작동하는 사람들과만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것 같다. 마음속의 저울은 옳고 그름, 유해함과 무해함, 폭력과 존중을 가늠한다. 그것이 망가진 사람들은 끝없이 다른사람들을 상처 입힌다. 사실 이미 고장 난 타인의 저울에 대해서 할수 있는 일들은 별로 없는 듯하다. 그저 내 저울의 눈금 위로 바늘이잘 작동하는지 공들여 점검할 수밖에. - P107

다. 거기엔 개인이라는, 실체를 가진 존재가 아예 고려되지 않는다.
그날 살해된 사람들은 모두 개인이었다. 각자의 이야기를 갖고 있었을 비행기 승객들, 매일매일 출근하던 직장인들, 전망대에 올라 희열에 찼을 관광객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던 구조대원들이었다. 메모리얼파크 바깥에는 그날 순직한 구조대원들을 기리는 기념물이있었다. 먼지 한 톨 내려앉지 않도록 닦는 사람은 사실 먼지보다 망각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나아가지 못한다. 공동체가 죽음을 똑바로 애도하고 기억하고 전하지 않으면….…….
죽은 자들을 모욕하지 않는 방향으로 기억을 단단히 굳히지 못하는공동체는 결국 망가지고 만다. 역사교육을 전공하며 공부한 자세한내용들은 많이 잊었지만 그것 하나는 배운 것 같다. 배운 것을 자꾸현실과 비교해보며 다급함에 종종거릴 때가 있다. - P116

쌍둥이 빌딩이 있던 자리에는 아래로 끊임없이 물이 떨어지는분수대가 있었다. 분수대를 둘러서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정확한 사망자 추산이 불가능했으니 누락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거기 모르는 사람의 이름 위에 손을 얹고 잠시 서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를 부정하는 이들을 언제까지고 두려워할 것이다. "그놈들 머리에 폭탄이 떨어지면 좋겠어!"라든가 "그놈들 발밑에지진이 나면 좋겠어!"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을 말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가장 순정한 사람들이 희생된다는 것을 외면하는 - P116

독선은 얼마나 독한가? 붕괴에서 살아남은 기적의 나무 한 그루도있었는데, 다들 그 아래에서 소원 같은 걸 비는 듯했다. 사랑하는 이들의 세상이 갑자기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이들이 가장 많았을 것이다.
배터리파크까지 걷는데 비가 왔다. 비가 왔을뿐더러 바람이며파도가 걷기 힘들 정도였다. 멀리 자유의 여신상이 보였다. 어릴 적엄마와 이모와 페리를 타고 자유의 여신상 가까이 갔었던 기억이 났다. 그때 내가 본 뉴욕은 테러를 겪기 전의 뉴욕, 쌍둥이 빌딩이 서있던 시절의 뉴욕이었다. 2001년 전에 촬영된 영화들에 그때의 스카이라인이 남아 있는 걸 보면 무지근한 충격이 온다. 변하지 않을 것같은 세계가 얼마나 크게 변하는지, 나쁜 쪽으로 변할 수 있다면 좋은 쪽으로도 변할 수 있기를 늘 바랄 뿐이다. - P117

어느 정도까지 공격적으로 말해도 될 것인가가 오래 하고 있는고민이다. ‘조신하게, 예쁘게 말해‘ 하는 식의 강요는 지긋지긋해서굴절 없이 똑바로 말하고 싶은데 또 어느 선을 지나치면 따가운 공격성밖에 남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하면서도 부정적감정의 발산으로 그치지 않도록 적정 수준을 찾는 것⋯⋯⋯⋯⋯ 고민은 하는데 매번 실패하는 느낌이다. 언어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정교함을잃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면 깎아낸 부분이 남긴 부분보다 많아 심지없는 완곡어법을 쓰게 되고, 세게 밀어붙이는 글을 쓰다 보면 꼭 엉뚱한 사람이 다치게 되어 후회스럽다. - P119

뚱한일단은 조롱과 비아냥, 일반화를 피하려고 노력한다. 복잡하게얽힌 세계에서 한 사람을 덩어리로부터 떼어내 개별적으로 보고 싶다. 내가 ‘섹시 아시안 걸‘로 요약되었을 때 상처 받았던 것처럼, 남부에서 온 아저씨도 상처 받았을 수 있다. 그 아저씨가 ‘남부‘에서 연상되는 전형적인 인종 차별주의자였더라면 그 공연을 보고 있지 않았을 확률이 높으니까. 공연자의 갑자기 드러난 날카로운 면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일반화해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평생 차별 속에 느 - P119

껴왔을 스트레스가 왈칵 터져나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사회적 맥락과 개인을 동시에 온전히 이해하는 것, 내가 쓰는 언어의 요철을 없애면서도 예각을 잃지 않는 것. 그 지난한 두 가지가 포기할 수 없는 목표인 것 같다. 실패하면 그다음 번에 다이얼을 더 잘돌릴 수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계속한다. - P120

가까워질수록 W는 불안해했고, 나는 의기양양해져갔다. 역시나백남준의 작품이었다. 커뮤니케이션 뮤지엄 앞에 서 있는 1990년 작「프리벨맨(Pre-Bell-Man)」이었다. 다시 한번 고유의 표지가 있는 작가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험이었다. 손톱만 하게 보여도 아우라를 뿜어낸다는 뜻이니 말이다. 소설가들 중에도 분명 비슷한 이들이 있다. 한 문단만 읽어도 아, 이거 그 사람이 쓴 거잖아, 하고 바로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작가가 되는 게 그때도 지금도 꿈이다. 감각적이고 즉각적이면서도 쉬이 잊히지 않는 어떤 것, 궁극적으로 만들어내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에서 놓칠 수 없는 괴테 하우스를 방문하기도 했다. 관람한 후에는 괴테 하우스의 외벽에 두 손을 대고 기복 신앙처럼 문운을 나눠 받길 소망했다. 이때의 여행 사진들을 보면 벽을 짚은 손등 사진이 띄엄띄엄 이어진다. - P147

 토마스 만이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을 썼다는 하숙집 건물은 작고 가지런했고 거미가 인사하듯이 실을타고 내려왔다. 죽고 없는 사람들이 한때 머물렀던 장소에 찾아가는마음이란 지도 위를 투명한 점선으로 뒤덮는 것과 비슷하지 않나 싶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쌓여서 천천히 그려지는 것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완벽하지 않은, 지나간 사람들의 바통을 건네받아 나도 쓰고 싶다고 중얼거렸던 듯도 하다. 그 방문이 만족스러웠으므로, 기왕 거기까지 간 김에 근처의 영국 정원을 걸어보기로했다. 멀리서 본 영국 정원은 도심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크고 풍성해 보였다. 어떻게 그렇게 커다란 녹지를 남겨두었을까 감탄했는데, 18세기에 그때까지 늪지였던 것을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만든 것이라고 한다. - P156

인간의 몸이 아주 복잡한 유기체라는 점을 종종 곱씹는다. 하나의 통일된, 완벽한 시스템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온갖 부분과 요소들이 저 나름의 목표를 가지고 있고 그 목표는 가끔 서로 상충하거나 갈등 관계에 놓이기까지 한다는 것에 대해서. 뇌가 원하는것과 위가 원하는 것이 다르고, 이 호르몬의 목표와 저 호르몬의 목표가 다른 식인데 성(性)과 관계된 파트들이 유난히 저 혼자 가지런할 리 없다. 끝없이 업데이트되는 과학과 의학의 연구 결과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몸이 이토록 복잡하고 다층적일 때, 이분법적 정체성과 모두에게 똑같은 사랑의 방식은 실제에 대한 지나치게거친 요약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안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한사람인 어슐러 르 귄은 ‘안다‘고 말해야 할 자리에 ‘믿는다‘는 말이 끼 - P160

어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했고, 이에 깊이 동의한다. 과학의 자리에 과학이 아닌 것이 들어와서는 곤란하다. - P161

그날 나는 앤서니와 헤어져 유리창을 찾아보았다. 추모관은아주 넓었지만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창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잠시 머물렀다. 나도 유리창 앞에 서보았다. 그 유리창 앞에 서 있었을 성호 아버지생각이 제일 먼저 났다. 성호 생각도 났다. 아이들 생각도났다. 그리고 그날 어느 창가에 서 있었을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날 죽었던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우리가 ‘삶‘이라 부르는 그것이 유리창 너머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공간에서 내 눈앞에 있던 것은 9·11의 어두운 건물 파편들이었다. 지금 존재하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경고처럼. 그 파편너머, 삶이 어때야 하는지를 상상하지 못하면 우리는 계속 폐허만을 보게 되리라는경고처럼.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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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8-15 23: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타워즈 7 8 9 제작진이 왜 공격을 받는지, 영화평을 찾아봐야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 제목은 몇 번 눈여겨 보아 기억하는데 옮겨주신 문단들을 보니 생각보다 천천히 소화시키며 읽어야 할 책으로 보이네요^^

2022-08-23 12:20   좋아요 2 | URL
헐~ 이런 여기에 댓글이 숨어있었군요. 덧글이 거의 전무한 서재라 덧글에 둔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정세랑작가가 SF작가로 분류된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여성 작가들이 장르분야에서는 독자들의 공격을 더 심하게 받는다더군요. 본인도 오래 시달렸고. 스타워즈 제작진도 그런 케이스에 해당되고... 제게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겨준 책이었어요. 가볍게 시작했는데 많이 무거운~ ^^
 

‘모든 것이 아주 창백했다. 강도 창백했고, 들판은 풀이 무성하고 분명 붉은 빛일 꽃들이 우거져 있는데도 아무 빛깔 없이 술렁이며 펼쳐진 채, 빛깔 없는 농가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윽고 한 농가의 문이 열리더니 농부와 그의 가족이 마치 언덕 위 교회에라도 가려는 듯이 말끔한 차림으로 말없이나타나, 엄숙한 태도로 행렬에 끼어들었다. 때로는 2층 창턱에 기대선 여자들이 재미있다는 듯 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잠자코 내려다보기도 했다. <이 사람들은 대체 뭘 보려고 수백마일씩 온 걸까?> 그녀들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우리는마치 어느 배우와 약속이라도 지키러 온 듯한 기묘한 느낌이들었다. 그는 너무나 스케일이 커서 소리 없이 사방에서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 P152

우리는 아주아주옛날 새벽에 경의를 표하러 온 원시 세계의 남녀들이었다.
스톤헨지의 경배자들이 더부룩한 풀숲과 비바람에 씻긴 바위들 사이에서 필시 그런 모습이었을 터였다. 갑자기 어느요크셔 향사의 자동차로부터 네 마리의 크고 여윈 붉은 개들, 고대 세계로부터 온 듯한 사냥개들이 뛰쳐나와 코를 땅에 처박는 것이 마치 멧돼지나 사슴의 자취라도 찾는 듯이보였다. 그러는 사이 해가 뜨고 있었다. 구름 한 송이가 마치하얀등갓 뒤에서 천천히 불이 켜지는 것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금빛 쐐기 모양의 빛줄기가 구름에서 쏟아져나와 골짜기의 나무들을 녹색으로, 마을을 청갈색으로 물들였다. 우리 등 뒤 하늘은 연청색 호수에 하얀 섬들이 떠다니는 듯했다. 하늘은 활짝 열리고 개었지만, 우리 눈앞에는 희고 부드러운 눈의 둔덕이 쌓여 있었다.  - P153

태양은 구름들 사이로 달려 나가 그 신성한 몇 초가 끝나기 전에 결승점에 도달해야만 했다. 결승점이란 오른쪽에 있는 엷은 투명함이었다. 태양은 출발했다. 구름들이 그가 가는 길에 온갖 장애물을 던져 놓았다. 들러붙고 가로막았다.
그는 그것들을 뚫고 질주했다. 그가 보이지 않을 때도 번개처럼 날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굉장한 속도였다. 잠깐 나와밝게 빛나는가 하면, 다음 순간 구름 뒤로 없어져 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결승점을 향해 그 먹장을 헤치고 나아가는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순간 그는 나타나서 우리의 안경을통해텅빈 태양, 반월형 태양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그가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증거일 터였다. 이제 그가 마지막 힘을 쓸 때였다. 그는 완전히 지워져 버렸다. 순간들이 지나갔다. 저마다 손에 시계를 들고 있었다. 신성한24초가 시작되었다. 마지막 1초가 지나기 전에 이기고 나오지 못한다면 그는 지고 마는 것이었다. 여전히 그가 구름 뒤에서 몸부림치며 달려 나가는 것이 느껴졌지만, 구름들이 그 - P154

를 붙들고 있었다. 구름장들이 퍼져 나가며 두꺼워지고 느슨해져서 그의 속력에 제동을 걸었다. 24초 중에 5초밖에 남지않았건만, 그는 여전히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치명적인순간들이 지나고 <태양이 지고 있구나, 정말로 경주에서 졌구나 하고 실감했을 때, 황야에서 모든 빛깔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푸른빛은 보랏빛이 되었고, 흰빛은 격렬하지만 바람없는 폭풍이 다가올 때처럼 납빛이 되었다. 분홍빛 얼굴들이녹색이 되었고, 갑자기 더 추워졌다. 그러니까 이것이 태양의 패배로군, 이게 다군> 하고 우리는 실망해서 우리 앞쪽의 음울한 구름 담요로부터 등 뒤의 황야를 향해 돌아섰다.
황야는 납빛이었고, 보랏빛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뭔가가 더일어나려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예기치 않았던 무섭고피할 수 없는 것이 닥쳐 오고 있었다. 황야를 뒤덮은 그늘이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이, 마치 배가 위기의 순간에 균형을되찾는 대신 조금씩 더 기울다가 돌연 전복되고 마는 것과도같았다. 그렇게 빛이 차츰 기울다가 완전히 나가 버렸다. 그것이 끝이었다. 세상의 피와 살이 죽고 해골만 남겨졌다.  - P155

다. 물고기들도 의도적으로 그런 모양을 띠고서 오직 자기자신이 되기 위하여 세상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듯하다. 그들은 일하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는다. 그들의 형태에 그들의존재 이유가 있다. 완벽한 실존이라는 충분한 목적 외에 다른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졌겠는가? 어떤 것은 통통하게, 어떤 것은 얄팍하게, 어떤 것은 등성이에 지느러미를활짝 펼치고, 어떤 것은 전기를 띤 빨간 줄무늬를 하고, 어떤것은 프라이팬 위의 새하얀 팬케이크처럼 너울거리고, 또 어떤 것은 푸른 갑옷을 입고, 어떤 것은 엄청난 집게발을 달고,
어떤 것은 거대한 구레나룻을 잔뜩 달게끔 말이다. 인류 전체보다도 대여섯 마리 물고기에게 더 많은 정성이 쏟아진 것만 같다. 우리의 트위드와 실크 밑에는 단조로운 분홍빛 맨살밖에 없다. 시인들도 이 물고기들만큼 뼛속까지 투명하지는 않다. 은행가들도 집게발은 갖지 못했으며, 왕과 왕비들도 주름 목깃이나 프릴장식을 달고 태어나지는 않았다. 요컨대 만일 우리가 맨몸으로 수족관에 넣어진다면 - 아니,
이쯤 해두자. 이제 눈이 감긴다. 눈은 우리에게 죽은 세계와불멸의 물고기를 보여 주었다. - P158

나방의 죽음

낮에 날아다니는 나방은 나방이라 불리는 것이 어울리지않는다. 그것들은 커튼 그늘에 잠들어 있는 흔하디흔한 노랑뒷날개나방이 어김없이 환기하는 어두운 가을밤과 담쟁이꽃의 기분 좋은 느낌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것들은 잡종으로 나비처럼 화사하지도 않고 자신의 동류인 나방답게 칙칙하지도 않다. 하여간 좁다란 건초 빛깔 날개와 같은 빛깔 술이 둘린 이 나방은 살아 있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 듯했다. 9월중순의 기분 좋은 아침, 공기는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여름날보다는 선득한 바람결이 느껴졌다. 창문 저편 들판에서는 이미 쟁기가 자국을 내고 있었고, 보습이 지나간 땅은 평평하게골라져 습기를 머금은 채 빛나고 있었다. 들판과 그 너머 언덕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활기 때문에 눈은 가만히 책만 들여 - P159

다보고 있기 어려웠다. 떼까마귀들도 연례행사를 벌이는지,
나무들의 우듬지 주위로 날아오르는 것이 마치 수천 개의 검은 매듭이 있는 커다란 그물이 공중에 던져지는 듯했다. 그러다 잠시 후에는 천천히 나무 위로 내려앉아, 나뭇가지 끝마다검은 매듭이 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또 갑자기 이번에는더 큰 원을 그리며 그물이 펼쳐지고 일제히 퍼덕거리며 깍깍대는 것이, 그렇게 공중에 던져졌다가 천천히 나무 꼭대기에내려앉는 것이 엄청나게 신나는 경험이기나 한 것 같았다. - P160

떼까마귀들과 쟁기질하는 사람들과 말들, 그리고 심지어풀이 말라 민둥한 언덕에까지 활기를 불어넣는 동일한 에너지가 나방을 네모난 유리창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파닥여 가게 했다.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묘한 동정심이 드는 것이었다. 그날 아침에는 즐거움의 가능성들이 너무나 크고 다양해 보였으므로, 고작 한 마리 나방, 그것도 낮에 다니는 나방 몫의 생명을 가졌다는 것이 가혹한 운명이라생각되었다. 그런데도 그 오죽잖은 기회를 최대한 즐기려는그의 열의가 비장하게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갇힌 유리창의한쪽 구석으로 힘차게 날아가, 거기서 잠시 기다렸다가 또다른 구석을 향해 가로질러 날아갔다. 세번째, 네번째 구석으로 날아가는 것 말고는 그에게 달리 무슨 수가 있었겠는가? 언덕들이 아무리 크고, 하늘이 아무리 넓고, 집들의 연기가 아무리 멀리까지 올라가고, 바다에 나가 있는 증기선들이 - P160

이따금 아무리 로맨틱한 소리를 낸다 해도, 그가 할 수 있는것은 그게 전부였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그를 지켜보노라니, 마치 세계가 지닌 거대한 에너지의 아주가늘지만 순수한 한 가닥이 그 작고 연약한 몸속에 밀어 넣어진 듯했다. 그가 유리창을 이리저리 가로지를 때마다, 내게는 활기 찬 빛 가닥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는 거의 생명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는 그토록 작고 그토록 단순한 형태의 에너지로서 열린 창문 안으로 들어와 나나 다른 인간들의 두뇌 속에 있는 그토록 많은 좁고 복잡한 복도들을 지나왔으므로,
그에게는 비장한 동시에 경이로운 무엇인가가 있었다. 마치누군가가 순수한 생명의 작은 구슬을 가지고 솜털과 깃털로
"가능한 한 가볍게 꾸며서, 우리에게 생명의 진정한 본질을보여 주기 위해 춤추거나 지그재그로 움직이게 한 것만 같았다. 그렇게 제시된 것의 낯설음을 극복하기 어려웠다.  - P161

우리는 그것이 둥그스름하고 오톨도톨하고 거추장스럽게 꾸며져서 극도의 조심성과 위엄을 가지고 움직여야 하는 것만을보고, 생명에 대해서는 잊기 쉽다. 만일 그가 다른 형태로 태어났더라면 어떤 삶이 되었을지 생각하니, 그의 단순한 움직임을 연민 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잠시 후 그는 춤추기에 지친 듯 양지바른 창턱에 내려앉았고, 그 진기한 구경이 끝났으므로 나는 그에 대해 잊어버렸 - P161

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드니 그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그는다시금춤추려 애쓰고 있었지만, 몸이 굳어져 움직이기가 거북한지 유리창 바닥으로 퍼덕여 가는 게 고작이었고, 창문을가로질러 날아가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나는 다른 일들에 몰두한 채, 잠시 별생각 없이 그 헛된 시도들을 바라보면서, 무의식적으로 그가 다시금 날아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치 기계가 고장 난 원인은 생각지도 않고 다시 작동하기만을 기다리듯이 말이다. 대략 일곱 번쯤 시도한끝에 그는 나무로 된 창틀에서 미끄러져 날개를 퍼덕이며 떨어져 창턱에 널브러졌다. 뒤로 나가떨어진 그의 무력한 자세가 나를 자극했다. 그가 곤경에 처해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다리를 버둥거려 봤자 더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그가 바로 서도록 도우려고 연필을 뻗어 주려다 말고, 나는문득 그렇게 떨어져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이 죽음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연필을 도로 내려놓았다. - P162

다리들이 한차례 더 버둥거렸다. 나는 그가 맞싸우는 적을 찾기라도 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문밖을 내다보았다.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정오경인 듯, 밭일은 멈춰 있었다. 조금 전의 활기 대신 적막과 고요가 자리하고 있었다.
새들도 먹이를 찾아 개울가로 날아가고 없었다. 말들은 조용히 서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거기에는 여전히 힘이, 특별히아무것에도 괘념치 않는 무심하고 비개성적인 힘이 있었다. - P162

그 힘이 작은 건초 빛깔 나방과 맞서고 있었다. 무엇을 하려해도 소용없었다. 그 작은 다리들이 다가오는 숙명에 맞서최대한 노력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 숙명은마음만 먹으면 온 도시를, 도시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라도
‘잠기게 하려면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아무것도 죽음에 맞설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잠시 지쳐 정지했던 발이 또다시 버둥거렸다. 이 최후의 항거는 훌륭했고, 너무나 필사적이라 그는 마침내 바로 서는 데 성공했다. 나는 물론 전적으로 생명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작은 나방의 이거대한 노력, 아무도 돌아보지도 알아주지도 않건만 그처럼엄청난 힘에 맞서서, 다른 아무도 높이 평가하거나 간직하려하지 않는 것을 애써 지키려는 노력은 이상하게 감동적이었다. 다시금 생명이, 그 순수한 구슬이 보이는 듯했다.  - P163

나는다시 연필을 들었다. 소용없을 줄 알면서도. 하지만 바로 그순간 죽음의 틀림없는 징후들이 나타났다. 나방의 몸이 풀어지더니 즉시 뻣뻣해졌다. 싸움은 끝났다. 그 작은 생물이이제 죽음을 맛보았다. 죽은 나방을 바라보노라니, 그토록하찮은 적수에 맞선 그토록 큰 힘의 대수롭잖은 승리가 나를경이감으로 휩쌌다. 조금 전에는 삶이 기이했듯이, 이제 죽음이 기이해 보였다. 나방은 몸을 바로 하여 단정하게, 아무불평 없이 침착하게 누워 있었다. <오, 그렇다>라고 그는 말하는 듯했다. <죽음은 나보다 강하다>라고. - P163

시간은 저녁, 계절은 겨울이라야 한다. 왜냐하면 겨울이라야 샴페인처럼 밝게 빛나는 대기와 길거리의 화기애애함지,
람이 고맙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여름에 그랬던 것처럼 그늘과 고독과 건초 널린 들판에서 불어오는 달콤한 바람에 대한 동경에 도발당하지 않는다. 저녁이라는 시간 또한우리에게 무책임함을 허락하는 것이, 어둠과 가로등 덕분이다. 우리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다. 날씨 좋은 저녁 4시에서 6시 사이에 집을 나서면서, 우리는 친구들이 아는 우리자신을 떨쳐 버리고 익명의 보행자들로 이루어진 저 거대한군중의 일부가 된다. 그들과의 어울림은 자기만의 방에서 누린 고독 끝이라 한층 더 유쾌하다.  - P166

눈에는 이상한 속성이 있다. 눈은 아름다움에만 머문다.
마치 나비와도 같이, 빛깔을 찾아다니며 온기를 다 자연이 스스로 한껏 갈고 닦아 모양을 낸 이런 겨울밤에도, 눈은가장 어여쁜 전리품들을 골라내며, 마치 온 지구가 보석들로이루어지기나 한 것처럼 자잘한 에메랄드와 산호 조각들을떼어낸다. 눈이 할 수 없는 것은(보통의, 비전문적인 눈 말이다)이 전리품들을 배열하여 좀 더 섬세한 각도와 관계를도출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이 소박하고 달콤한 식사를, 순수하고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아름다움을 오래 즐긴 후에 우리는 포만감을 의식하게 된다. - P170

여름이면 자기 뜰에서 키운 꽃이 담긴 화병이 먼지투성이 책 더미 위에서 가게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사방이 책이고, 언제 봐도 한결같은모험심이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운다. 헌책들은 집 없는 책, 야성적인 책들이다. 그것들은 온갖 빛깔의 깃털을 지닌 방대한무리 속에 섞여 왔으며, 길들여진 도서관 책들에는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이 아무렇게나 뒤섞인 무리 가운데서, 우리는 전혀 모르던 이를 만나기도 하고, 운이 좋으면그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벗이 되기도 한다. 위쪽 서가에 꽂힌 회백색 책의 허름하고 버림받은 듯한 태도에 마음이 끌려손을 뻗칠 때면 항상 희망에 부푼다.  - P178

그러나 이런 개별적인 존재의 순간들은 훨씬 더 많은 비존재의 순간들 속에 묻혀 있다. 나는 레너드와점심을 먹으면서, 또 차를 마시면서 했던 이야기를 벌써 다잊어버렸다. 어제는 좋은 하루였는데도 그 좋았던 것이 일종의 솜 같은 두루뭉술한 것 안에 묻혀 버렸다. 언제나 그런 식이다. 하루하루의 상당 부분은 의식적으로 살아지지 않는다.
산책하고, 식사하고, 이런저런 것들을 보고, 해야 할 일들을처리한다. 고장 난 진공청소기, 저녁 식사 지시하기, 메이블에게 지시할 사항을 적어 두기, 빨래, 요리, 책 제본 등. 좋지않은 날이라면 비존재의 비중이 훨씬 더 커진다. 지난주에는약간 열이 있었고, 거의 종일 비존재였다. 진짜 소설가는 그두 가지 존재를 어떻게인가 전달할 수 있다. 제인 오스틴‘이그랬고, 트롤럽도 그랬다고 생각한다. 나로서는 그 두 가지를 다 전달할 수 있었던 적이 아직 없었다. - P206

 그런데 그를 치려고주먹을 드는 순간, 이런 느낌이 스쳤다. <왜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해? 나는 제풀에 손을 떨구고 서서 그가 나를 때리도내버려 두었다. 그 느낌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가망 없는 슬픔의 느낌이었다. 마치 무엇인가 무시무시한 것을, 그리고 나 자신의 무력함을 알아 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끔찍하게 풀이 죽어서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버렸다. 두 번째 예도 세인트아이브스의 정원에서였다. 나는 현관 앞 화단을 바라보고 있다가 <저게 전체야>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널따랗게 잎을 펼친 어떤 식물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 한순간 그 꽃자체가 대지의 일부라는 것, 어떤 고리가 그 꽃을 에워싸고있다는 것, 그 꽃은 진짜 꽃이고 일부는 대지이고 일부는 꽃이라는 것 등이 갑자기 명백해졌다. 나는 그런 생각을 나중에 아주 유용할 것 같아서, 간직해 두었다.  - P207

 어떤 질서의 현현이거나 장차 그 현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말로 표현함으로써 현실로 만든다. 오로지 그것을 말로 표현함으로써 온전하게 만들며, 이때 온전하다는 것은 곧 그것이 나를 아프게 할 힘을 잃었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나뉜 부분들을 하나로 합치는 것은 아마 그렇게 함으로써 고통을 없애기 때문인 듯한데 ㅡ 내게 큰 기쁨을 안겨 준다. 그것은 아마 내가 아는 가장 큰 기쁨일 것이다.
그것은 내가 글을 쓰면서 무엇이 무엇에 속하는지 발견하고,
어떤 장면을 제대로 표현하고, 어떤 인물을 온전히 드러나도록 만들 때 느끼는 황홀경이다.  - P210

이를 통해 도달하게 되는 경지를 철학이라 불러도 될는지. 하여간 그것은 나 자신이 갖고 있는 변함없는 생각이다. 즉, 솜의 이면에는 어떤 패턴이숨어 있고, 우리는 모든 인간 존재는 이 패턴과 연관된다는 생각, 세계 전체는 하나의 예술 작품이고, 우리도 이 예술 작품의 일부라는 생각이다. 『햄릿 Hamlet』이나 베토벤의사중주곡은 우리가 세계라고 부르는 이 거대한 덩어리에 관한 진리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셰익스피어도 없고, 베토벤도없고, 더더구나 신은 없다. 우리가 말이고, 우리가 음악이고,
우리가 물자체(物自體)이다. 나는 충격을 받을 때 이 사실을확인한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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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에 대해 한 일을 음악에 대해 할 기회를 갖게 되는 셈이니 말이다. 그러나 음악이라는 예술의 원리를 노정하기 위해 이루어진 일이 그렇게 적다는 사실은 우리가 새로운 음악을 판단하려 할 때 만나게 되는 어려움을 설명해준다. 전부터 있던 음악에 대해서는 그저 당연히 여기고 프리마돈나가 감기에 걸렸다든가 하는데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 그것은 어느 특정한 날 단 한 시간에대한 평가이며, 내일이면 그런 인상은 잊히고 만다.
그러므로 음악의 본질까지 천착할 생각은 없어도 그렇다고 비평의 부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필자에게는한 가지 길이 있을 뿐이다. 즉, 아마추어로서 자신의 인상을적어 보는 것이다. 바이로이트의 음악회장 좌석들은 그런 아마추어들로 가득 찬다. 그들은 제각기 다른 사람만큼은 음악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은밀한 믿음을 갖고 있지만, 감히 자기생각을 입 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그들이 음악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다.  - P102

그렇지만 바이로이트에 모인 청중, 그중 상당수가 멀리서부터 찾아온 순례자들인 이 청중이 온 힘을 다해 경청한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명이 꺼지면 그들은 좌석에서 숨을 죽이고 음악의 마지막 여운이 사라지기까지 꼼짝도 하지않는다. 뭔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라도 날라치면 다들 흠칫하는 반응이 마치 수면의 파문처럼 음악회장 전체로 퍼져 나간다. 막간에 햇볕 속으로 나설 때면, 음악에서 받은 인상을떨어내 버리려는 듯한 기운이 느껴진다. 특히 「파르치팔Parzifal은 너무나 막강한 충격을 주기 때문에, 몇 번이고다시 들은 다음에야 그것을 이리저리 되새겨 볼 수 있다. 처음에는 너무나 낯설어서 그 부분들을 전체로 융합시킬 수가없는 것이다. 우리는 극적인 상황이 대개 남녀 간의 사랑이나 전투 같은 것으로 설명되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막연히 어떤 위기 상황을 기다리게 되는데,  - P103

그리고 아마추어가 전문가의 경멸을 불러일으키는것이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미술의 경우 프라 안젤리코‘가무릎을 꿇고 그림을 그렸다고 해서 선호하는 비평가도 있고,
문학에서는 일찍 일어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책을 좋아하는이들도 있다. 음악회 프로그램에 실린 논평들을 읽다 보면가망 없이 혼란에 빠지고 만다. 음악적 인상을 문학적인 것으로 바꾸는 일의 어려움이나 언어의 환기력 때문에 문학적인 감각에 호소하게 되는 경향 말고도, 음악의 경우에는 다른 예술보다 그 경계가 명확치 않다는 데서 생겨나는 어려움이 있다. 어떤 악구가 아름다울수록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동은 더 풍부해지는데, 우리는 그 형식을 잘 모르기 때문에해석에서도 별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아름다운 음악을자신의 어떤 경험과 연관 짓거나 일반적인 어떤 개념을 상징하게 만들거나 하게 된다. 어쩌면 음악이 우리에게 그처럼놀라운 힘을 행사하는 것은 이처럼 그 효과를 정확히 표명하기 어렵다는 데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음악이 표현하는 것에는 일반화의 모든 장엄함과 동시에 우리 각자의 감정이 담겨 있다.  - P108

그러면서 우리는 말로써 음악을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감하게 된다. 정지의 순간이 지나고 활들이현 위를 실제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우리의 추상적인 사들은 다 흩어지고 말도 달아나 버린다. 그 안도감은 엄청나지만, 마침내 마법이 깨지고 나면, 우리 자신의 도구인 말로 돌아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어떤 예술에 한계를 부여하고우리의 감정을 규정하려는 이 모든 정의들은 실로 자의적이다. 음악이 노천의 공중으로 스러져 가는 여기 바이로이트에서, 에르미타주‘ 정원의 꽃들이 다른 마법의 꽃들처럼 피어나는 곳에서, 음악은 색채가 되고 색채는 언어가 된다. 이곳에서 우리는 일상의 세계를 잠시 벗어나 그저 숨 쉬고 보도록 허락받았을 뿐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어떤 감정과 다른감정을 나누는 격벽들이 얼마나 얇은지, 우리의 인상들에는구분할 수조차 없는 요소들이 얼마나 많이 섞여 있는지 깨닫게 된다.  - P109

집은 그들을 단단하고 독립된 개별적존재로 만들어 주는 껍질과도 같았으니, 이제 집을 떠나 노출된 그들의 뇌 속에는 광범한 일반화의 공식들이 자리 잡는다. 바퀴 소리, 창문에 블라인드가 부딪히는 소리가 인생에대한 그럴싸한 경구들의 리듬으로 바뀌고, 산문의 단편들을되는대로 떠올리게 한다. 그리하여, 멍해진 여행자들은 극도로 울적한 눈길로 풍경을, 지루할 뿐인 프랑스 중부의 풍경을 내다본다. 프랑스인들은 체계적이지, 하지만 인생은 간단해 프랑스인들은 산문적이지, 프랑스인들은 도로를 갖고 있어. 그래, 그들은 저 날씬한 포플러 나무에서부터 빈으로, 모스크바로 뻗어 가는 도로를 가지고 있는 거야. 톨스토이의집을 지나, 산악을 오르고, 그러고도 행진하여 유명한 도시들의 한복판에 있는 화려한 상가들을 지난다. 하지만 영국에서 도로는 절벽에 이르고, 바다 가장자리에서 모래 속으로빠져든다. 영국에서 산다는 것이 위험해 보이기 시작한다. - P115

보르도를 벗어나 점점 더 드넓은 들판이 나타나자,아주 간단하고 사소한 생각을 하는 데 필요한 집중력마저도남아나지 않는다. 마치 장갑이 커다란 손을 쑤셔 넣는 바람에 찢어져 버리는 것과도 같다. 붓과 물감, 캔버스를 가지고작업하는 화가들은 복이 많다. 반면 말 취약하기 짝이은없다.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다가오기만 해도 뒷걸음질 치고만다. 사람을 가장 문자적인 의미에서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운 구렁 속에 빠뜨린다. 그 구렁 속에는 새하얀 소읍들과 외줄로 줄지어 가는 노새들과 외딴 농장들, 거대한 교회들, 저녁이면 창백하게 바스러지는 광대한 들판들, 불어 끈 성냥처럼 삐뚜름히 타오르는 과일나무들, 오렌지들로 불타는 듯한나무들, 구름과 폭풍들이 가득하다. 눈이 이 모든 것을 그 안에 들이붓는다. 아름다움은 우리를 함몰시키고, 우리는 그물속에서 허우적거린다.  - P116

병이라는 것이 얼마나 흔한지, 그것이 가져오는 정신적 변화가 얼마나 엄청난지, 건강이라는 빛이 꺼지고 나면 그제야드러나는 미답의 영역들이 얼마나 놀라운지, 그저 독감‘
가벼운 습격만으로도 영혼의 어떤 황무지와 사막이 눈앞에전개되는지, 조금 체온이 오르기만 해도 어떤 낭떠러지와 꽃떨기 흩뿌려진 풀밭이 드러나는지, 병고라는 것이 우리 안에서 어떤 굳건한 참나무 고목을 뿌리 뽑는지, 이를 한 개 뽑고 - P121

치과 의사의 팔걸이의자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려 그의 입을헹구세요, 입을 헹궈요> 하는 말을 천국 대청에서 몸을 굽혀우리를 맞아 주는 신의 인사말과 혼동할 때면 어떤 사망의 구덩이로 내려가 멸망의 창수(水)가 머리를 덮는 것을 느끼다가 천사와 수금(竪琴) 타는 이들의 면전에서 깨어나는 듯한지,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면 - 그리고 자주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ㅡ 병이 사랑이나 싸움, 질투 등과 함께 문학의 주요 주제로 자리 잡지 못한 것이 이상하게 여겨진다. 독감에대한 소설, 장티푸스에 대한 서사시, 폐렴에 대한 송가, 치통에 대한 서정시 등이 진작 쓰였어야 하지 않나 싶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는 드퀸시가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Confessions of an English Opium-Eater』에서 그 비슷한 일을 시도했고, 프루스트의 작품에도 여기저기 병에 대한 대목이 한두 권 분량은 될 터이지만 ㅡ 문학은그 주요 관심사가 정신임을 견지하는 데 최선을 다해 왔다. - P122

그것들이 모아지면 말로도 표현할 수 없고 이성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마음상태를 환기하게끔 해놓은 것이다. 병석에 있는 우리에게는불가해함이 지대한 힘을, 아마도 멀쩡한 자들이 허용하는 것보다 훨씬 큰 힘을 미친다. 건강할 때는 의미가 소리를 잠식한다. 지성이 감각을 지배하는 것이다. 하지만 병들었을 때는의무의 감시가 해제되므로, 우리는 말라르메나 존던의 난해한 시, 라틴어나 희랍어의 어구들 밑으로 기어들게 되며,
그러면 설령 우리가 마침내 의미를 포착한다 하더라도, 말들은 마치 미묘한 향내처럼 입천장과 콧구멍을 통해 감각적으로 먼저 다가왔기 때문에 한층 더 풍부한 것이 된다. 아직 언어가 서투른 외국인들은 우리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다. 중국인들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Antony and Cleopatra』가 어떻게 들리는지 우리보다 더 잘 알 것이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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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1

 

  몇 년 만에 고향에 다녀왔다. 지난달에 고향으로 이주를 단행한 언니의 생일을 맞아서 이른 휴가를 다녀온 셈이다. 원래는 시끌벅적한 규모의 동행들을 계획했으나 이런저런 사정들로 혼자 다녀오게 되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휴면으로 이전되어버린 코레일 멤버십카드를 살리고 저렴하고 시간이 걸리는 무궁화 왕복표를 사고 나서야 떠나는 실감이 났다. 피를 돌게 하던 역마살이 알코올로 대체된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진 않았던 모양이다.

  기차를 탄다. 바깥의 폭염에서 기차는 비껴있다. 그리고 딱 이 시절에 썼을, 이 방향의 기차에서 시작되었을 시를 생각한다. 지금은 기차에서 김밥을 삼킬 수는 없지만 눈에 즙처럼 괴는 연두이 한 줄로 연두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시다. 그리고 이렇게 하행선, 기차 창에 눈을 두면 저 순연한 벼포기들은 포기, 포기 살아서 추억으로 다가온다.

​​

  연두에 울다

 

  떨리는 손으로 풀 죽은 김밥을

  입에 쑤셔 넣고 있는 동안에도

  기차는 여름 들판을 내 눈에 밀어 넣었다.

  연둣빛 벼들이 눈동자를 찔렀다.

  들판은 왜 저리도 푸른가

  아니다. 푸르다는 말은 적당치 않다.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연두는 내게 좀 다른 종족으로 여겨진다.

  거기엔 아직 고개 숙이지 않은

  출렁거림, 또는 수런거림 같은 게 남아 있다.

  저 순연한 벼포기들.

  그런데 내 안은 왜 이리 어두운가.

  나를 빛바래게 하려고 쏟아지는 저 햇빛도

  결국 어두워지면 빛바랠 거라고 중얼거리며

  김밥을 네 개째 삼키는 순간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마치

  감정이 몸에 돌기 위한 최소 조건이라도 되는 듯.

  눈에 즙처럼 괴는 연두.

  그래. 저 빛에 나도 두고 온 게 있지.

  기차는 여름 들판 사이로 오후를 달린다.


         나희덕 시집 [사라진 손바닥(문학과 지성사 2004)]-중에서

 

















  뜨거움은 창밖으로 향하는 시선을 오래 두지 못하게 한다. 고민하다 챙겨온 책들은 유시민의 [유럽 도시 기행]이다. 이번에 2권이 출간되었는데 1권의 내용들은 까마득하다. 연결되지 않은 여행기이지만 1권부터 읽기로 한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유럽의 도시들, 나는 아마 가지 못할 것이다. 예전에는 언젠가 갈 수 있다는, 언젠가는 가고 말 것이라는 생각으로 책을 읽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아마도 가지 못할 것이다'라는 전제를 깔고 여행서를 읽게 된다. 그것도 자주.

  '아마도 가지 못할 것'이기에 더 애틋하게 그곳을 보는, 그곳을 걷는 필자에게 빠져서 그곳을 같이 보고 그곳을 같이 걷게 된다. 그렇게 '아테네', '로마', '이스탄불', '파리'를 돌아보는 데는 4시간이 걸렸다.

 


  아테네 플라타 지구, 로마의 포로 로마노, 이스탄불 골든 혼, 파리 라탱 지구, 빈의 제체시온, 부다페스트 언드라시 거리, 이르쿠츠크 데카브리스트의 집, 이런 곳에 가고 싶었다. 다른 대륙에도 관심이 없지는 않았지만, 스무 살 무렵부터 내 마음을 설레게 만든 곳은 주로 유럽의 도시들이었다. 그곳 사람들이 훌륭한 사회를 만들어 좋은 삶을 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떻게 더 자유롭고 너그럽고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다가 소설보다 더 극적인 역사의 사건들을 만났고, 그 주인공들이 살고 죽은 도시의 공간을 알게 되었다. 삶의 환희와 슬픔, 인간의 숭고함과 비천함, 열정의 아름다움과 욕망의 맹목성을 깨닫게 해주었던 사람과 사건의 이야기를 그곳에 가서 들어보고 싶었다. - P5

 

  내가 도착한 곳은 '아테네'가 아니라 '나주역'이다. 고향이긴 하지만 '나주'는 여전히 서툴고 낯설다. 나주보다는 광주가 더 가깝고 살뜰한 것은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많아서일 텐데 항상 복잡한 광주보다는 여유롭고 널찍한 나주역을 이용한다. 40여 일 만에 만나는 언니네 부부가 마중 나와 있다. 길가에는 배롱나무들이 첫 꽃을 환하고 선명하게 피우고 환영 인사를 건넨다.

  반갑다.

  이런 풍경들을 기대했다. 남도의 여름은 원색으로 환하고 명쾌하다. 어디서나 기품있게 선 배롱나무들의 꽃 인사를 만날 수 있다. '카이사르'의 흔적과 역사를 만나지는 못하겠지만 이제 늙어가고 같이 낡아가는 가족들과 함께하는 유쾌하고 맛있고 즐거운 시간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것으로 됐다. 충분하다.




  712

 

  한쪽으로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 나지막하게 보이지만 멀리는 아파트가 우뚝우뚝하고, 한쪽으로는 잡목이 우거진 산이 가깝게도 멀게도 중첩되는 풍경 속에 앉아서 [유럽 도시 기행 2] ‘내겐 너무 완벽한 빈을 읽는다. 너무 달라서 닮아있는 풍경이라 그런지 아주 머나먼 곳을 떠도는 기분이다. 바깥에는 이웃집 노부부가 날이 밝자마자 시작한 메밀 작업이 한창이다. 박스마다 여린 메밀 순들이 가지런히 담기고 있고 유시민 부부는 빈을 여행 중이다.

  빈은, 책으로 말하자면, 유명한 인문학 고전과 비슷하다. 명성 높은 인문학 고전은 모르면 교양인이 아닌 것 같아서 읽는 경우가 많다. 대단한 내용이 들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다. 다 읽어도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내게는 플라톤 · 공자 · 단테· 괴테 등의 책이 다 그랬다. 빈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내 심정은 그런 책들을 펴들었던 때와 다르지 않았다.

  빈은 명성만큼 대단해 보였다. 도심의 모든 공간이 영화 속 같았다. 건물은 하나같이 크고 멋졌으며 거리는 넓고 깨끗했다. 상가의 쇼윈도와 사람들의 옷차림에 부티가 흘렀다. 카페와 레스토랑은 실내장식이 화려했고 음식값도 그만큼 비쌌다. 바로크 스타일 건물에 들어선 공공 전시관과 세련미 넘치는 민간 갤러리에는 미술 교과서에서 보았던 거장들의 그림과 조각이 넘쳐났고, 오페라하우스와 음악협회 공연장 등에서는 유럽 최고 수준의 악단이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비롯한 대가의 작품을 공연했다. - P15

 


  우리도 길로 나선다.

  오빠네 와 언니네 중 올케언니만 평균 체격을 밑돌뿐, 우람한 넷을 태운 차의 첫 목적지는 신안으로 가는 천사 대교다. 갑자기 차 노릇에 충실해진 차 입장에서 즐거운 비명일지, 슬픈 비명일지도 모르고 아이스박스 한가득 점심거리를 싸 들고 소풍 간다. 목적지도 풍경도 불편함도 날씨를 포함한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모든 일정과 일상을 내려놓고 왁자하게 떠들고 모두 조금씩은 들떠서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크게 웃는다. 잘못 든 길에서도 흥겹다. 돌아 나와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서로를 탓하고 원망하느라 많은 것들을 놓치고 살아왔다. 누구 때문도 아니다. 모두 자신의 몫을 살아내느라 버겁고 지치고 허덕거렸을 뿐이다.

  우리가 함께하는 이런 소풍, 처음이다.

  어디든 길은 비었고 날씨는 적당히 흐리고 배롱나무들은 살랑살랑 손을 흔드는 가운데 남도의 곡식들은 목마르고 뜨거운 여름을 건너는 중이다. 목포를 지나간다. 목포는 매번 거쳐 가기만 할 뿐 안으로 들어가 보지 못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목포의 변방 어디쯤에선가 녹을 뒤집어쓴 채 점점 더 '세월' 속으로 묻혀가고 있을 '세월호'에 대한 부채감에 살짝 불편하다. 당연하다. 불편하다고 시선을 피한다면 더 무거운 '세월'들이 우리를 잡아먹을 것이다. 불편하고 장이 꼬이게 불편하더라도 마주해야 할 것들은 눈 똑바로 뜨고 대면해야만 한다. 그걸 잊지 말자.

  점점이 흩어진 섬들이 보이고 압해대교를 건넌다. 이제는 고립된 섬이 아닌 압해도는 크고 넉넉하고 기름지고 포실 포실하다. 가끔 나타났다 사라지는 바다는 조금 큰 호수 같다. 이름도 크기도 다른 섬들이 1004개나 된다는 신안군에 놓은 다리 1004 대교는 자은도, 암태도. 팔금도. 안좌도 등을 잇는다. 드디어 천사들이 아닌 우리는 다리를 지난다. 시야가 탁 트인다. 가슴이 뻥 뚫린다. 무엇이든 용서할 수 있고 무엇이든 담아내는 풍경이 이어진다. 차창을 내리고 바람을 빵빵하게 채운다. 마음들은 다리를 건너 서로에게로 다가간다. 악마들에게도 천사의 마음을 돌아보게 만드는 곳, 천사 대교다.



     



  우리들의 최종 목적지는 자애롭고 은혜로운 섬, 자은도(慈恩島)의 무한의 다리다. 무인도 사이를 잇는 1004미터를 바다 위로 걸어보는 것이다. 섬과 섬 사이에는 다리가 있고 할미도 절벽에는 원추리가 엉겅퀴와 나리꽃들과 어우러져 가득하다. 원추리 향이 땀 냄새마저 향기로 만들어준다. 뒤틀리고 휘어지고 꺾인 채로 나무들은 척박함과 바람을 견디며 제 자리를 지키며 어우러져 살고 있다. 우리들의 모습도 다르지 않구나. 각각 몇 번의 수술들을 통과한 몸뚱아리들은 상흔과 뒤틀림을 견디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작정한 것도 아닐 텐데 작은 동산만 한 무인도가 건네는 이야기는 대하소설이다. 바다를 건너고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면 여리고 강한 생명력을 가진 야생의 꽃들이 저마다의 향기로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휘어져도 뽑히지는 않은 채 나무들은 이렇게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며 지키고 있다고 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온 각자의 시절도 그러할 것이다. 사느라고, 살아내느라고 강하고 뚝하게 감추고 있던 감성의 속살들이 이제는 또렷하게 보이기도 한다. 다리는 섬과 섬 사이만 잇는 것은 아니다. 섬의 속살들을 만나게도 한다. 우리 안의 속살도 드러난다.

 


  713

 

  오늘의 목적지는 여수다. 고흥 녹동항, 어판장에서 횟감을 사고 팔영대교를 건너 여수에서 간장게장으로 점심을 먹고 돌아와 저녁은 회에다 ㅋ~ 한 잔의 플랜이다. 어제 마땅한 횟감이 없어 "회 먹자. ~" 노래를 부르던 나는 회 대신 오빠가 숯불에 구워주는 삼겹살을 상추에 싸 먹으면서도 입이 댓 발이나 나온 채 툴툴거렸다.

  "내일 녹동항에 가면 민어를 삽시다."라는 오빠

  "민어, 비싸기만 하고 맛없든 대." 형부

  "요즘 서대 철이고 여수· 녹동 서대는 맛있어요." 올케

  "어쨌든 내일, 녹동항에 가보고 결정하자." 분분한 의견을 단번에 정리한 큰언니는 역시 카리스마 갑이다.

  새벽에는 오늘도 메밀 작업에 분주한 이들의 굽은 등을 일별하고 잠시 빈에 다녀왔다.

 


  오래된 도시들은 저마다 역사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 아테네는 의도와 무관하게 상흔이 드러나고 부다페스트는 일부러 드러내며 파리는 감추었지만 보인다. 그런데 빈에서는 그런 것을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으로 치면 사기 캐릭터였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수재인데 잘생겼고 키도 크다. 손꼽는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가족 기업을 넘겨받아 성공적으로 경영한다. 예술적 감각을 지닌 교양인에다 성격마저 원만해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산다. 약점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빈은 그런 사람 같았다. 부러워하거나 시샘할 수는 있지만 흉보기는 어려웠다.

  여행에도 상대성원리가 적용되는 게 아닌가 싶다. 빈 만큼 또는 비보다 더 대단한 도시에서 온 여행자라면 모든 게 좋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빈틈이라고는 보이지 않아서, 너무 완벽해서, 내게 편하지만은 않았다. 오스트리아는 한국보다 부유하고 빈은 지구 행성에서 가장 호화로운 도시다. 건물도 거리도 사람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노점상이나 거리 음식은 아예 없었고, 치안도 완벽해서 소매치기 걱정 따위는 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비가 내릴 때는 모두 실내에 머무는지 거리가 텅 비었다. 우산을 들고 걷는 이조차 드물어서 우리도 준비한 비옷을 꺼내지 않고 카페와 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빈이라고 상처가 없는 건 아니다. 수많은 역사의 상흔을 덮어버리는 데 완벽하게 성공해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치적 후진성은 시씨 황후의 아름다움과 바로크 궁전의 화려함으로 가렸다. 독일과 합병해 자의 반 타의 반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질러 놓고서도 나치 잔재 청산 작업은 하지 않은 채 영세중립국으로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았다. 유엔 사무총장을 연임한 쿠르트 발트하임은 나치 돌격대 가입과 독일군 중위 복무 사실이 드러나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지만 무난히 대통령에 뽑혔다. 독일은 모든 도시 모든 장소에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되새기는 공간과 시설을 만들어두었지만 빈에서는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으면 볼 수 없다. 그라벤의 삼위일체 상도 페스트의 참극을 모르는 여행자에게는 그저 멋지게 금박을 두른 종교적 조형물일 따름이다. - P92. 93

 

  가는 길에 운전대를 잡은 오빠는 네비를 끄고 우리들의 고향집이 있던 길과 추억이 있을 법한 길들을 달려 능주를 지나간다. 능주에서 사사 당한 정암 조광조의 이야기도 나누고 화순· 보성 쪽으로 가는 중이다. 화순 너릿재에 관한 추억담이 구불구불 이어져 나오고 지석천의 물들도 구불구불 흘러간다. 화순장으로 '두부'를 배우러 다니던 2014년 여름의 길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런 두부(고소하고 달큰하고 감칠맛 가득한)를 다시는 먹지 못할 것이다에 모두 한 표씩을 찍고 조금은 쓸쓸해 한다. 풍경은 우리들의 기분과는 아랑곳없이 옛길들을 지키는 늙은 벚나무와 멀리 논을 지키는 메타세콰이어들 사이에 자태를 뽐내는 배롱나무들이 여름 남도의 상징성으로 완벽하게 어우러져있다. 보성의 조성면에서 커피를 마시려고 잠시 멈춘다. 처음 들르는 곳인데 익숙한 풍경은 고만고만한 건물들과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고만고만한 가게들이 시골 어느 면 소재지나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침 조성 장날이다. 장에 나온 사람들을 구경하고 그들은 난데없는 우리를 구경하면서 정다운 길을 지나간다. 어쩐지 아는 사람들 같다.

  곳곳에서 현수막으로 '우주'를 만나니 고흥이다. 최근 누리호가 지나갔을 법한 길들을 따라 달려간다. 오래전 뚜벅이로 갔던 팔영산과 나로도의 길들도 이제는 '누리호'의 길이 되었다.

 

  드디어 녹동항. 한센병의 유배지, 소록도가 바로 지척이다. 일반인에게는 금지겠지만, 당사자들한테는 격리와 유배의 섬이던 소록도가 다리 하나로 쉽게 넘나들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다리가 놓였어도, 누구나 왕래가 가능해도, 그 병을 앓는 환자에게는 여전히 심리적인 유배지일지 모른다. '소록도'.

  팔딱팔딱한 생선들을 만나니 덩달아 살아서 펄떡이는 것처럼 걸음이 가붓해진다. 잠시 후면 경매 시간이다. 우리 눈에 들어온 것은 저 줄돔이다. 여수가 고향인 올케의 표현으로는 "샛서방한테 잡아주는 생선"이라는데 우리는 오늘 모두 '샛서방'이고 싶다. 최근에 '우리들의 블루스'에서의 이정은처럼 경매 낙찰을 옆에서 쳐다보며 그들의 제스처와 빠른 손동작을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사이, 발 빠르고 입 빠르고 손까지 빠른 오빠는 무사히 줄돔을 차지했다.



     


  요즘 마땅한 생선이 없다는 말은 사실인 듯 이쪽에서 경매를 기다리는 애들은 빈약했다. 소라나 조기 정도였고 민어가 조금 보였다. 반면에 저쪽은 이제 막 금어기가 풀린 문어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 지금은 낙지가 금어기, 어제 무안에서 갯벌 낙지 '탕탕이'가 먹고 싶었던 나는 졸지에 철딱서니 없는 1인이 되었기에 오늘은 돌문어를 잔뜩 보아도 돌부처처럼 함구한다. 그러나 다음번에는 낙지를 '종류별로 다 먹어야지.' 옴팡지게 다짐한다.


  핏물을 뺀 녀석들과 아이스팩으로 채운 아이스박스를 싣고 희희낙락 고흥을 떠난다. 다리가 놓이기 전이라면 순천 쪽으로 빙빙 돌아서 갔을 여수를 고흥 영남에서 팔영대교를 건너면 여수 적금도에 닿고 '백리섬섬길'이 시작되어, '적금 대교', '낭도 대교', '둔병 대교', '조화 대교'등의 대교를 다섯 개 건너면 여수다. 각각의 다리는 각각의 섬들과 모양을 달리했지만 건너는 일에만 충실한 우리는 그저 다리들을 지나간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이토록 많은 섬들에 감탄하면서. '세계 최고'라고 우리나라의 다리를 놓는 기술에 혀를 내두르면서 각자의 마음속에 자리한 여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렇게 세세한 남도 여행은 처음인 형부의 감탄사가 가장 잦다.

  오빠 내외의 지인이 관리하는 '화양'의 요양병원에 잠시 들른다. 가파른 산 중턱에 자리한 요양병원은 저절로 숨을 깊게 쉬게 만드는 쾌적한 공기와 가까이로는 다도해가 보이고 맨발로 걸을 수 있는 황톳길이 조성되어 있어서 아프지 않아도 머물고 싶은 욕심이 드는 곳이었다. 이런 풍경과 환경이라면 치유되지 않을 병도 없을 것 같고, 내려놓지 못할 생존의 욕심도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찰자의 시선일 뿐, 암 환자 전문 병원이라는데 생이 소멸 중인 사람은 어떠할지를 헤아릴 수가 없다.

  단지 여수에는 '간장 게장'을 먹기 위해 그 먼 길을 달려간 것처럼 '게장 골목'을 찾아, ''라면 종류 불문, 요리 불문하는 '게 마니아'인 큰언니도 인상 쓸 만큼 생각보다 별로인 '게장'과 터무니없는 '갈치조림'을 허겁지겁 먹고, 다리를 건너다니기 위해 길 위에 있는 것처럼 많은 다리를 다시 건너서, 건너서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이다. 이런저런 관광과 여행들로 여수의 곳곳을 다녀보았고 굳이 우리가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없기도 해서 길에서 길로, 다리에서 다리로의 여행이 되고 말았다.

  오는 길의 운전기사는 올케언니, 추억이 가득한 '남평역'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남평역을 이용하지는 않았어도 나의 탯자리가 근처이고 우리에게 자부심을 안겨주는 시가 있어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간이역이다. 2004년 가을에 이곳을 지나갔고 그 흔적은 남았다.

 

 

  가을의 시작에서 --남도(5)

 

  기차는 정해진 길로 보성, 능주, 화순……. 이름만으로도 정겨운 지명들을 지나가고 창에 묻은 이마에서는 점점 해가 거두어집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남평역입니다. 곽재구의 시사평역에서의 그곳, 임철우의 소설 사평역의 그곳이면서도 동시에 그 어느 곳도 아닌, 그냥 남평역. 이곳을 꼭 지나 보고 싶었습니다. 가까워질수록 울렁울렁 멀미가 날 것 같은 기분입니다.

 

  그래요, 남평이 제 고향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제 역사가 남아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여기를 한 번인가 두 번, 지나쳐갔을 뿐입니다. 남평에서 역은 멀리 있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여기에 와서 막차를 기다리거나 막차를 타보지는 않았습니다. 언제나 막차를 기다리고 타면서 살아왔어도, 여기에 역이 있는지를 아는 사람도 이제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가깝고도 먼 곳입니다. 사진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뾰족한 양철지붕의 낡은 역사, 두런두런 서 있는 나무들, 잘 가꾼 화초들 사이로 배롱나무꽃이 핀 예쁜 간이역입니다. 아무도 기차를 기다리지 않고 내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남평역이라는 지명이 벗겨져 가는 나무 팻말과 근처의 나직한 산들을 눈에 담습니다. 어디쯤 만삭의 한 여인이 볕 바른 봄날, 몸을 풀었던 산이 있을 것입니다. 오후 한 시 남평역에 도착하는 기차의 기적소리가 그 여인의 아이에게 시간을 주었다는데 지금의 기차는 조용히 역을 떠납니다. 이제는 누구도 기적소리로 시간을 가늠하지 않습니다. 그 아이는 자신을 낳던 여인의 나이를 훌쩍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여기를 지나갑니다. 속은 여전히 울렁울렁합니다. 여인과 아이를 연결한 탯줄이 산자락 어디선가 부르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립니다. 뜨거운 이마를 차창에 얹자 지나버린 풍경을 감추듯 9월의 저녁이 살포시 내려와 있습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곽재구의 [사평역에서] 중에서---

 

  소리는 멀어집니다. 사평역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남평역은 사라져도 사평역은 언제까지나 남아있을 것입니다. 여인과 아이의 끈, 탯줄처럼.

 

            2004.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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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밤에 야심 차게 준비했던 횟감은 실패했다. 알이 가득 차서 회를 뜰 수 없었다. 겨우 몇 점을 맛보기 하는 걸로 만족하고 숯불에 구워 먹었다. 구웠어도 '샛서방'한테 몰래 주고 싶은 맛이었다. 대신에 입에 쩍쩍 달라붙는 '서대 회 무침'으로 회덮밥을 한 양푼씩 만들어 먹고 복수박으로 입가심한 뒤 수박이 되어버린 배를 통통 두드리며 밤 산책을 했다. 오랜만에 울 집의 대표 카수, 큰언니의 노래를 라이브로 들으며 걷는 길은 좋았다.


 

   


  마지막 여정은 사진 속의 '죽림사'. 지난밤의 살생은 다 잊고, 절집이라니 거시기하긴 하다.

  아버지, 어머니, 둘째 오빠의 영가를 모시고 난 뒤, 나로서는 첫걸음이다. 주지 스님이 바뀐 절집은 고즈넉하고 한층 절집다운 침묵에 놓여있었다. 가만가만 극락전에 들러 아미타불을 만나고 서성서성 둘러보았다. 장한 배롱나무들과 거기 머물러 있을지도 모를 영혼에게 작별을 고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오는 기차에서 창에 머리를 박고 노을을 본다. 손에는 여전히 [유럽 도시 기행2]를 들고 있다.


  부다페스트는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슬픈 건 또 그대로 슬펐다.
  단것을 먹으면 슬픔이 덜어질까 해서 구도심의 유명한 카페에 들렀다. 19세기 부다페스트의 예술가들이 즐겨 찾았고 시씨의 단골집이기도 했다는 그 카페에서 카라멜 프라페와 카푸치노를 마시고 산딸기 요구르트 케이크를 먹었다. 시씨는 그 집을 ‘부다페스트의 보석‘이라고 했다지만 너무 달아 내 취향에는 맞지 않았다. 벽에 창업자로보이는 커다란 남자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는데 독일어로 써놓은 안내문을 보니 이름이 ‘쿠글러 (Kugler)‘였다. 유럽의 성씨는 직업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쿠글러는 공이나 총알을 가리키는 명사 쿠겔(Kugel)에서 파생했다. 총알과 대포알이 아니라 동그란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만든 그 남자는 넥타이까지 맨 양복 차림으로 카페 고객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P145


  프라하는 아름다웠다. 왕궁과 교회, 거리와 강, 카페와 박물관, 모든 것이 아기자기하게 예뻤다. 그 무엇도 대단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 P239


  프라하 자체는 대단했다. 프라하는 역사의 상처를 감추지 않았고, 그상처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았다. 지난날의 상흔은 지난 일로정리하고 오늘은 오늘의 즐거움을 추구한다. 그렇게 하려고 성과 속의 공존을 허락한다. 프라하의 공기는 자유와 관용의 정신을 품고 있는 듯했다. ‘심하게 지나치지만 않다면 뭘 해도 괜찮아. 사람들이 프라하를 좋아하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도시여서가 아닌가 싶었다. - P241



  한때 고향은 환멸이었다. 아픔이었다. 눈감고 싶은, 잊어버리고 도망치고 싶은 지긋지긋한 곳이었다가 늘 그립고 가고 싶은 곳이기도 한 뒤죽박죽 엉망진창의 마음으로 만들어버리는 지명이었다. 지금은 언제나 환대해줄 가족이 있는, 아무런 기대치를 발동하지 않아도 좋은, 굳이 지금의 나를 해명하거나 꾸미거나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곳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점점 푸르게 어둠이 내리는 세상, 나의 시간도 그쯤을 지나간다. 지금 타고 있는 기차의 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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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2 2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13 2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