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굶어죽을 판인데 조직확대고 교란투쟁이고 가능할 리가 없었다.
전남도당에서는 쌀 한 줌이 한 사람 목숨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돌았다. 하루 두 끼가 한 끼로, 이삼 일에 한 끼로, 그나마 죽으로 점점 줄어들었다. 죽이라고 해야 반 되도 안 되는 쌀을 털어 넣고 가마솥 가득히 물을부어 끓여 칠팔십 명이 먹어야 했으니 죽이 아니라 죽물인 셈이었다. 산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정보는 점점 어두워지고 토벌대의 공격은 날이 갈수록 거세지고 몇 년간 식민지 조국의 해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바쳤던 아까운 동지들의 목숨을 쌀 한 줌과 맞바꾸는 날들이 계속됐다.
이불홑청 하나만으로도 어떻게든 겨울은 갔고 참담한 굶주림 속에서도 기어이 봄은 왔다. 봄이 되면 나물이라도 뜯어먹을 수 있어 겨울보다는 사정이 훨씬 좋았다. 백운산 아래서부터 겨우내 굶주린 나무들이 제법푸근한 봄빛으로 물이 오르고, 아직 나물을 캐기에는 이른 4월 초순이었다. - P191

도당 전원이 계속되는 보급투쟁의 실패로 사흘간 죽 한 모금 넘기지 못한 채 물로 연명할 지경이 되었다. 지금까지 잘 먹었더라면 그깟 사흘 굶은 것쯤 문제도 아니겠지만, 두어 달을 어쩌다 죽 한 모금씩 먹고 버티다사흘 내내 멀건 죽 한 모금 못 먹었으니 다들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목숨을 걸고 대대적인 보급투쟁을 시도하든지 앉아서 굶어 죽든지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만 할 고비였다. 드디어 도당에서는 마지막 운명을 걸고 마지막 전투를 결정했다.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도당을 유지할수 있는 핵심간부일고여덟 명만 남기고 전원이 전투에 참가하기로 했다.
전원이라고 해봤자 무장한 유격대원 마흔여섯 명에 비무장 기관원 서른명이 전부였다. - P191

주는 사람도 받아먹는 사람도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미래가 확실히 보장되어 있을 때는 누구나 원칙에 충실할 수 있다. 그러나 내일 당장 자신의 생명조차 보장할 수 없을 때, 낙관보다는 좌절이 압도적인 상황에서까지 원칙을 지키고 동지애를 지킨다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 역사와 개인을 일치시키는 철저한 신념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세계역사상 유일무이할 만큼 처참하고 탁월한 빨치산의 투쟁은 그런 사람들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고, 훗날 그 수많은 좌익수들이 언제 감옥에서 나간다는 기약도 없이, 또 이 나라의 역사가 자신들이 살아있는 동안 변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이 수십 년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아침에 일어나는 문제에서부터 모든 생활을 철저하게 조직하고 투쟁할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역사발전에 대한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제기암골에서는 그렇게 콩 한 말로 최후의 만찬이 벌어지고있었다. - P193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뭔가가 입 안으로 흘러내렸다. 무슨 액체가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흘러드는 것이 느껴진 순간 도저히 떠질 것 같지않게 무겁던 눈꺼풀이 번쩍 치켜졌다. 낯익은 동지가 귀한 날계란을 깨뜨려 그에게 먹이고 있었다. 잠시 후에는 식은 밥 덩어리가 씹을 새도 없이꾸역꾸역 밀려들었다. 하기는 씹을 힘도 없었다. 밥을 그냥 삼켰는지 씹어 먹었는지 기억도 없는데 잠시 후에는 신기하게도 발가락이 움직이고손도 들어올려지고 몸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희한한 일이었다.
사람의 몸이란 게 태엽을 감아주면 그만큼만 움직이는 시계 같기도 하고저울 같기도 했다. 먹은 밥이 소화가 됐을 무렵에는 혼자 힘으로 걸을 수도 있었다. - P194

이게 끝인가? 이게 몇 년간 몸 바쳐 싸워왔던 혁명사업의 끝이란 말인가? 동지들은, 소중한 우리 동지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슬픔보다도 고독이 뼛속까지 사무쳐왔다. 이제 혼자라는 고독감에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갑자기 못 견디게 목이 말랐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산 전체는 저녁 그림자에 싸여 어둡고, 그 어둠의 저편에서 박정숙이 땅바닥에 쓰러져 울고 있었다. 박정숙의 숨죽인 울음소리가터질 듯이 그의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어디선가 소쩍새가 울었다. 박정술을 위로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이 그는 그저 갈증을 달랠 생각뿐이었다. - P202

우물에 엎드려 정신없이 물을 들이마셨다. 미친 듯이 실컷 물을 먹고 고개를 드는데 우물 속에 뭔가 하얀 것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허리를숙여 건졌더니 물에 불은 콩이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콩을 입으로 가져갔다. 비록 날콩이었지만 이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소하고 맛있었다. 박정숙도 달려와 울음을 그치고 열심히 콩을 건져 먹었다.
목 잘린 동지의 시체가 달빛에 시커멓게 드러난 모습을 보면서도 그들은콩 먹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콩을 먹다 공포와 고통을 잊은 건지, 아니그 엄청난 두려움을 이기 위해 콩이라도 먹어야 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산등성이에서 휘영청 달이 떠올랐다. 두 사람은 열심히 콩을 씹어 먹고 있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당도, 전남 유격대도 전멸되었다.
자, 어디로 갈 것인가!
건너편 산 능선에서는 국군이 순찰을 하며 보초를 불러내고 있었다. - P202

누가 먹으려고 했던 콩이었을까? 결국 그것조차 먹지 못한 채 남겨두고간 동지 대신 배를 채운 유혁운과 박정숙은 남은 콩을 죄다 건져 유엔잠바의 호주머니 양쪽이 불룩하도록 담아 넣은 채 곡성군당을 향해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한때 자신이 속해 있던 곡성군당 외에 달리 선을 댈 방법이 없었다. 적에게 투항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가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할 수 있는 한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살아남은 자로서, 그리고 이 땅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자로서 마땅한 도리였다. - P203

이 날만을 위해 살았던 것처럼 사람들은 미친 듯이 노래 부르고 춤을추며 해방의 첫 밤을 보냈다. 희미한 어둠 속에 드러난 동지들의 흥겨운모습을 보면서 핑 눈물이 돌았다. 이 밤의 감동을 즐기는 백여 명 중에 구대원은 서른 명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전쟁 이후 한 달 사이에 새로 규합한 동지들이었다. 그 어려운 날들을 버티며 이날을 위해 싸워온 수천명의 진짜 투사들은 곳곳의 산기슭에서 썩어가고 있거나 이미 한 줌의 흙으로 변했을 것이었다. - P220

작년 초봄, 백운산 특각에서의 첫 오락회가 떠올랐다. 그때 우리를 그렇게 웃겨주던 만담가 박동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혁명의 열정에 떨며 그 밤을 함께 즐겼던 동지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쇠고기 굽는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감미로운데………. 목울대를 타고 올라오는 울음덩이를 꿀꺽 삼키며 그는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오늘을위해 싸우다 오늘이 오기 전에 가버린 동지들, 동지들은 가고 나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미 우리에게 ‘나 혼자‘ 란 없다. 박정하가 죽고 김지희가 죽고 박정숙이 죽고 유혁운이 살아남은 게 아니다. 우리 중의 많은 사람이 죽고 우리 중의 일부가 살아남았을 뿐이다. 동지들! 그대들이 흘린피로 오늘은 왔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들의 피로 오늘의 해방을 이어갈것이다. 그는 동지들의 피로 찾은 해방의 감격을 가슴속에 꼭꼭 눌러 담으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 P220

날이 새기 바쁘게 광주를 향하여 백여 명의 대열이 백아산을 떠났다.
조금씩 멀어지는 백아산을 유혁운은 자꾸 뒤돌아보았다. 그 고생을 하고백아산으로 오다 죽어버린 박정숙, 백아산에서 백운산에서 온 산을 피로물들이며 쓰러진 동지들! 목이 잘린 채 굴러다니는 동지의 시체를 보면서날콩을 주워 먹던 그 밤엔 달도 참 밝았었다. 백운산에서 도당과 유격대가 박살나던 날, 그는 눈물도 없이 동지들의 시체를 그러모아 돌무덤을만들면서 눈물보다 더 뼈아픈 맹세를 했었다. 살아남은 우리가 당신들의못 다한 꿈을 이루겠노라고, 당신들의 원수를 갚겠노라고, 그리고 이제 해방은 왔다. - P221

동지들이여 들리는가! 백주대낮에 대로를 걷는 우리의 힘찬 발소리가,
가슴 터지는 감동의 함성이 들리는가. 우리의 피로 찾은 이 해방을 영원히 인민의 것으로 하기 위해 먼저 간 당신들이 죽으면서도 꿈꾸던 세상,
그 무산계급의 평등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우리도 기꺼이 당신들의 뒤를따르겠노라.
그의 눈가에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을 꿈벅이며 그는 오래도록백아산을 보았다. 문득 한여름의 땡볕에 푸르다 못해 검게 타오르는 나무들이 하나씩 동지들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백아산 능선마다 봉우리마다힘차게 버티고 선 동지들은 열심히 손을 흔들어댔다. 그제야 그는 미련없이 되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간다. 발전하는 역사와 더불어 지나간 슬픈 역사를 묻고 우리는 전진한다.
태양은 머리 위에서 이글거리고, 해방 광주는 조금씩 가까워졌다. - P221

해방의 감격에 들떠 해방조국을 건설하겠다는 기쁨 하나로 자기를 따라나섰던 그 150여 명의 탄광노동자들 가운데 다시 가족의 품에 안긴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유혁운은 알지 못한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지난 후 탄광촌 부근을 지나면서 유혁운은 문득 그날 입은 옷 그대로 그를 따라나섰던 노동자와 가족들이 두고두고 흘렸을 눈물을 떠올렸고, 자신을 심판한 사람들의 말대로 수많은 죽음과 한이 과연 자신의 책임이어야 하는지 씁쓸한 생각에 잠긴 적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물론 자기 앞에엄청난 고통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한 채 그저 해방의 감격에들떠 따라나선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나중에 자신의 죽음에 직면해서 누군가를 원망하며 죽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원망한 건 분명 그를 그런 일로 몰아넣은 일개인이 아니라 이 땅의 서러운반동의 역사였을 것이다. - P226

해방 이후 빨치산 출신들을 중앙당학교나 모스크바에 유학시키는 정책이 추진되고 있었다. 실무에 어둡고 이론이 약한 빨치산 출신들을 사상적으로 무장, 단련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 전남도당에서는 1차로 도 여맹조직부장 유일남 등 세 명이 8월 15일자로 중앙당학교로 떠났고, 모스크바 유학은 그들 셋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꿈에 부풀었던 모스크바 유학도 결국 헛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몇 번 공부할 기회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철도학교 대신 농림학교나 일반 중학에 갔더라면, 조용식과 서울에 갔을때 어떻게든 서울에 남아 고학을 했더라면, 모스크바 유학 결정이 조금만더 빨랐더라면 그의 삶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개인의 삶이건역사건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추측은 환상일 뿐이다. 누구에게나 가지않은 길이 있지만 선택한 길만이 유일한 현실이기에. - P239

두 사람 모두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엉거주춤 고개를 숙였다. 같이 일하는 동지를 여자로 느껴보긴 처음이었다. 그동안 김병억에게 얘기를 많이 들었던 탓일까, 아니면 김춘옥의 다부진 모습에 마음이 끌린 것일까. 사랑하는 여자와 마주선 것처럼 그의 가슴은 흥분으로 방망이질치고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어디서나 배짱좋고 농담 잘하던 그가 웬일인지 말 한마디 꺼낼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인채 서로의 발끝만 바라보다 그들은 곧 헤어졌다. 그리고 전쟁의 와중에난생 처음 사랑이 꽃피기 시작했다.
8.15가 지나면서 적기의 공습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23일에는 수십 대의 대편대가 나타나 광주를 온통 불바다로 만들었다. 비행기 공습은 날이갈수록 심해졌다. 전선은 한 달째 낙동강에서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어쩐지 불안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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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때로 운명이란 묘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일본인 교장을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양심적인 교육자라고는 하지만 뼛속까지 일본인인 교장이 전세의 불리함까지 솔직하게 얘기하면서 중학 진학을 말리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다고 그가운명론자인 것은 아니지만 순간의 선택이 운명을 완전히 뒤바뀌게 하는것을 그는 수없이 보았고 경험했다. 그만 해도 징용을 피해 간 철도에서또 다른 운명을 만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었다 해도 징용에 끌려가 죽지 않은 한 철도에서 그가 택한 길은 당시의유일한 선택이었고 어디에서 만나는가가 달라졌을 뿐일 터였다.
190어쨌든 그는 자신의 앞길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는지도 알지 못한 채1945년 4월 3일 구례구 철도역에 부임했다. - P79

새 관청에는 일제시대부터 그 자리를 지켜왔던 사람들이 해방조국의 관리로 다시 임명되었다. 45년 10월 미군정의 아놀드 군정장관의 선언대로 "남한에서 유일 합법적인 정부는 오직 미군정일 뿐이며, 미군정은 행정부의 모든 영역에서포괄적인 통제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민중의 요구는미군정에게 고려해야 할 하등의 이유도 없는 것이었다. 남한 전역에서 혁명적 민중의 자발적 참여와 공산주의자를 중심으로 민족주의자와 일부우익까지 참여하여 건설되었던 인민위원회는 미군정의 군홧발에 산산이짓밟혔다. 인민위원회가 주장했던 토지개혁과 일제의 적산 처리 문제도당연히 미군정의 손으로 넘어갔다. 남한 자산의 80퍼센트, 주식회사 총자본의 90퍼센트, 토지의 70퍼센트, 경지의 30퍼센트가 미군정에 넘어간 것이다. 조선 인민의 뼈와 땀으로 축적된 적산은 미군정에 의해 친일 민족반역자와 매판자본가, 반봉건 지주에게 불하되어 한국화약이나 동양맥주, 해태제과, 동양시멘트, 선경 등등 내로라는 독점재벌로 성장하거나 몰락해갔다.  - P85

줄만 잘 잡으면 귀속업체를 몇 개씩 차지하기도 했던 대부분의 귀속재산 관리자들은 "생산의 유지 · 부흥보다 원료자재, 반제품, 기계 및 부속품, 심지어는 공장 건설시설의 부속품까지 암매하여 생산시설의 파괴와 생산력 쇠퇴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물론 이런 현상은 미국내의 과잉생산물을 남한에 떠안기고자 했던 미군정의 공업생산 정체조장정책과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미군정은 남한을 미국의 잉여농산물 시장으로 편성하기 위한농업정책을 실시해, 인민들이 그렇게도 부르짖던 "토지를 인민위원회로넘기라"는 요구를 묵살하고 직접 일본인의 토지를 접수하여 남한 최고의지주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4퍼센트의 지주가 전체 경지면적의 6퍼센트를 소유하고, 67퍼센트의 농가가 1 정보 미만의 영세빈농이었던 반봉건 - P85

적 소작관계를 지속시켰으며, 이같이 영락하는 빈농에게 생산량의 50퍼센트를 소작료로 징수하는가 하면 생산량의 40~60퍼센트를 시가의 25센트로 강제 출케 하고 팔십여 종의 각종 세금을 부과했다. 친일 민족반역자들은 해방으로 친일의 딱지를 벗어던지고 공개적인 도둑질을 할수 있게 된 것이고, 대다수의 인민들은 해방으로 눈 버젓이 뜬 채 강도질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도둑들에게 친일의 표지를 벗겨주고 합법이라는전가의 보도를 쥐어준 것은 바로 미군정이었다.
그러나 일개 노동자였던 그는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신문 볼 새도 없이 꼬박 스물네 시간을 일하고 나면 죽음 같은 피로가몰려왔다. 기차표를 타기 위해 주먹밥을 싸가지고 와서 밤을 새며 기다리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런저런 말들이 그가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세상소식이었다. - P86

당 가입과 동시에 그는 새 이름을 부여받았다. 경찰의 눈을 피해 비밀활동을 하자면 당연히 새 이름이 필요했다. 유혁이라는 이름이었다.
조국도 없는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의 흐름대로 흘러가기만 했던 정운창은 이 땅에 인민의 국가, 한쪽에서는 쌀이 썩어나고 한쪽에서는 굶어죽게만드는 외세의 간섭 없는 인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하여 유일한 인민의 당에 가입하면서 새롭게 태어난 것이었다. 당과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각오를 했지만, 그는 자신의 새 이름으로 겪어야 할 고난과 고통을 가히짐작하지도 못했고, 이 민족의 역사와 운명을 알 수도 없었다. 그러나 단하나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의 선택은 유일하고 정당한 것이었고선택한다는 것은 그에 따르는 고통까지도 선택하는 것임을. - P96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설이 외전으로 전해졌을 때 물의가 분분하더니 이번에는 지방 순회 중인 이 박사가 남조선 정부설을 강연했다 하여 파문이 컸다.
남조선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조선의 영구불행인 것쯤은 아동주졸도 다 아는 일이어든 이것을 가지고 떠든다는것은 조선의 수치요, 독립을 지연시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온건 중립지인 <조선일보>의 1946년 6월 14일 사설 - P97

죽은 사람들은 전남도당 선전부장 박석우(담양 출신으로 일본 명치대 졸업) 일행이 분명했다. 얼마 전 그들이 지리산으로 이현상을 만나러 갈 때선전부장 수행원의 옷차림이 너무 초라하기에 유혁운은 자기 속옷과 철도국 정복을 입혀 보냈다. 그의 옷에 그만한 체격이라면 그 선전부장 일행이 틀림없었다. 비밀활동으로 단련된 간부가 어떻게 족적을 남기고 다닐 만큼 소홀했는지, 당사자들이야 그 부주의의 대가로 목숨을 버렸지만남은 사람들은 흐린 겨울 하늘만큼 답답했다.
어머니는 그가 집을 나올 때까지 따라나오며 그의 몸을 만져보고 몇 번씩 똑같은 말을 물어보았다.
"아이, 니가 참말 사람이지야?" - P128

아직은 텅 빈 아지트를 지키며 혁운은 지리산과 달리 벌써 싱싱하게 피어오는 백운산의 봄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용지동 계곡을 연둣빛물들이며 하루가 다르게 푸른 잎사귀를 살랑거리는 도토리나무며 떡갈나무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그는 문득 무릎을 쳤다.
아! 저게 바로 혁명이구나. 헐벗은 인민대중의 가슴을 녹음으로 뒤덮어오는 것. 어린 등짝이 휘어지게 나뭇짐을 지고 산을 내려올 때나,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친구들을 눈물로 바라볼 때나, 느닷없이 합환주를 마셔야 했을 때나, 언제나 그의 가슴에서 불어대던 스산한 바람이 어느 사이엔가 멈춰 있었다. 대신 그 가슴엔 촉촉하게 물오른 사월의 신록이 넘실대고 있었다. - P142

9.16결투 승리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빨치산 최대의 적인 겨울이 닥쳐왔다. 산에서의 겨울은 유난히도 일찍 찾아왔고 서둘러 온 만큼이나 미적거리다가 봄을 뒤쫓아온 여름에 채여서야 때 아닌 눈보라까지 쏟아 부으며 간신히 뒤돌아서는 것이었다. 애절한 그리움도 시간이 흐르면 익숙해지고 아무리 미운 사람도 자주 보면 정이 붙는 법이니 벌써 세 번째 맞는 겨울이면 면역이 생길 법도 하련만, 두려울 것 하나 없는 빨치산에게도 이 겨울만은 여전히 두렵고 무서운 존재였다. 게다가 9.16 결투 이래대대적인 토벌작전이 개시되어 어디 한군데 진득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산에서 겨울을 나는 동안은 추위와 토벌대의 추적에 전멸이나 당하지않으면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다. - P171

소성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푹 쉴수 있었다. 조 영감 집안일이나 도와주려고 해도 한겨울이라 쇠죽 쑤는일 외에 별다른 일거리도 없었다. 뜨듯한 아랫목에서 비록 보리밥이나마끼니마다 밥 한 그릇을 비우면 등 따시고 배부르고 세상 부러울게 없었다. 몸이 편해지니 가족들 생각이 났다. 아버지도 없는 구차한 살림을 어머니 혼자 어떻게 꾸려가고 있을까. 혼례식만 올린 채 버려두고 떠나온그 여자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 여자에 대한 사랑이 생겼다거나 세월이 그만치 흘렀으니 웬만하면 포기하고 내 여자로 받아들이겠다거나하는 감정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대한 그리움 탓일까, 기억조차 희미한 여자의 얼굴이 아슴푸레 떠올랐다. 남녘으로 향한 툇마루에 나와 앉아 서서히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태양빛을 쬐고 앉아 있으면 엊그제산에서 있었던 일들이 모두 꿈만 같았다. 해방된 지 벌써 사 년이 지났다. - P178

비합으로 쫓겨 입산한 지도 만 이 년이 지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남로당에 입당한 이래로 그는 계속 앞만 쳐다보며 달려왔다. 어떻게 여기까지달려왔는지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삼 년을 한걸음에 휙 지나쳐온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이전의 전 생애를 다 합친 것보다도더 중요한 사건들이 너무나 많아 그 삼 년이 까마득한 옛날 같기도 했다.
혁명이란 어쩌면 삶의 농축액이나 엑기스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1950년의 새해가 밝았다. 이제 그도 스물세 살이었다. 비록 갓 스물을넘긴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기억도 할 수 없을 만큼 짧고 길었던 지난 삼년간 역사라는 거대한 물결의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격렬하고 풍부한 삶의 체험을 했으며 그 체험을 통해 나이와는 관계없이 성숙한 인간으로 변해 있었다. - P178

그는 긴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때 그렇게 짓궂게 자신을 놀려대던 동지들의 장난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자신이 보통의 상식으로는이상하리만치 순수했음도, 한창 나이에 젊은 여자와 며칠 밤을 보내면서도 여자 때문에 가슴 졸이기보다는 맡은 임무에 가슴 졸이던 그 시절은얼마나 인간적이고 아름다웠는지…...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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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간판을 내며


출간 몇 달 만에 국가보안법으로 판매금지 당했던 <빨치산의 딸》을 다시내자는 제의를 받고 오래 망설였다. 스물다섯의 어린 나이에 쓴 글을 다시 본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망설이게 한 건 그 뒤로 흘러간 15년의 세월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누가 이런 묵은 이야기에관심을 가질까 싶었던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관심을 가질 것이고 그런이들은 서점에서 책을 구할 수 있어야 된다는 필맥 출판사 이주명 대표의설득에 결국은 책을 복간하기로 했다.
복 과정에서 약간의 내용 수정을 했지만 그리 많이 고친 것은 아니다. 초판에 관심을 갖고 오류를 지적해준 여러 분들의 도움으로 인명과지명, 날짜 등의 구체적인 사실을 몇 가지 바로 잡았다. 시대를 잘못 예측한 부분도 있고,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혁명적 감상주의에 빠진 부분도있었지만 대개는 손을 대지 않았다. <빨치산의 딸>은 내 소설이라기보다소설적 형식을 띤 역사서다.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빨치산이나 90년 당시 변혁세력의 현실인식이 잘못된 측면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충실하게 기록돼야 하고, 그렇다면 <빨치산의 딸>은 기록의 충실성을 미덕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래전에 쓴 글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다시 한번 역사라는 것을 돌아보게 된다. 한국 현대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하고 목숨까지걸게 했던 ‘사회주의‘ 는 이미 역사의 뒷장으로 사라지고 있다. 중국이나베트남, 쿠바 정도가 사회주의의 명맥을 이어가ㅡ고 있지만, 사람들은 더이상 사회주의를 현실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와 생각하니 ‘사회주의‘ 란 소련이나 중국으로 대표되는 어떤 제도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었다. 우리에게 사회주의는 ‘지금보다 더 나은 무엇‘을 가리키는추상명사였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사람은 언제나 지금보다 더 나은 무엇을 추구하는 동물이므로, 사회주의가 사멸했다고 하는 지금 이 시간에도 더 나은 어떤 세상, 인간이 인간답게 살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었던 옛 사람들의 기록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위안에 불과한 것일까.
부족한 데가 너무 많아서 다시 읽는 동안 내내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빨치산의 딸》은 내 삶과 문학의 토대임을 부정할 수 없다. 나의 지리산혹은 남부군과 전남도당의 거점이었던 지리산과 백아산을 의미하는 내이름 정지아에서부터 나는 역사를 천형으로 짊어진 것이다. 버리고 싶었던 그 짐이 나이 들수록 고맙고 반갑다. 뭐가 뭔지 구분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천둥벌거숭이에게 역사와 인간이라는 화두가 있어 삶과 역사에 굳건히 발붙이고 서 있으니 고마울밖에.
<빨치산의 딸>을 쓰고 난 뒤, 평생 캐내야할 문학의 금광을 어린 나이에 미흡한 상태로 다 쏟아 붓고 나서 이제 무얼 쓸 거냐고 걱정해주신 분들이 많았다. 깊고 따스해지겠다는 말씀밖에 드릴 게 없다. 하나의 생명을 부여받고 이 땅에 태어나 단 한 번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채 쓸쓸히 소멸해가는 무수한 존재에게 불멸의 한 순간을 부여하는 것이 문학일 것이라고 요즘에야 깨닫고 있다. 그때는 몰랐지만 <빨치산의 딸> 역시그런 보잘것없는 존재들의 빛나는 한 순간의 기록이다. 《빨치산의 딸》에는 늙은 내 부모의, 부모님 세대의 빛나는 청춘의 시기가 담겨 있다. 그리고 누군가의 따스한 시선이 쓸쓸하게 늙어가는 그분들의 노년을 잠시나마 빛나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역사를 위해 목숨을 걸었고, 독재정권하에서 죽음보다 더한 모멸과 시련을 견뎌온 그분들이 역사에 바라는 것은그 따스한 시선 정도일 것이다. 이 책이 그분들의 쓸쓸한 노년을 비추는몇 줌의 따스한 시선이라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2005년 5월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단숨에 읽고 나니 [빨치산의 딸]이 읽고 싶어지는 건 당연하다. 세상에~ 처음 읽는 듯, 완전 새롭다.




내 인생 최초의 싸움은 아버지 때문에 시작되었다. 1974년 국민학교 4학년 때였다. 그날 별로 친하지 않던 그 아이와 무엇 때문에 해거름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 아이가 그 엄청난 말을 꺼낸 순간부터가 소 엉덩이에 찍힌 낙인처럼 선명하게 새겨져 있을 뿐이다.
"느그 아부지가 빨갱이람서?"
무슨 말다툼 끝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아이의 말 속에는 네까짓게 빨갱이 딸 주제에, 하는 경멸과 떳떳한 자기 자신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역력히 배어 있었다.
"아니야."
아버지가 빨갱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으므로조금 당황하면서도 나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내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그 아이의 얼굴색이 새파랗게 겁에 질려갔다. 사람이 그런 표정을 짓는 건 말하지 말 것을 말했거나 뭔가 나쁜 일을 하다 들켰을 때뿐임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 P13

머리를 빡빡 깎고 수인복을 입었달 뿐 아버지는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 아궁이 앞에 쭈그려 앉아 번데기나 메뚜기를 구워주고, 내 말이 되어온 방안을 기어 다니던 바로 그 아버지였다. 굶주린 사람들을 채찍으로후려 패는 괴물이 아니었다. 몇 년간 사무쳤던 그리움이 한꺼번에 솟구쳐오르기 시작했다.
"아빠!"
어머니 아버지가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막상 아빠라고 부르고 나자머쓱했다. 할 말이 없었다. 말 잇기 놀이를 하며 장난치던 아버지였는데,
술자리마다 나를 안고 다니던 아버지였는데도 서먹했다. 무슨 말을 해야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냥 아버지를 만져보고 싶었다. 까슬까슬한 턱에 입 맞추고 싶었다. 나를 잠재워주던 아버지의 넉넉한 등에 업히면 다시 옛날처럼 아버지가 내 곁으로 돌아올 것 같았다. 빨갱이가 아니라 내 친구였던 다정한 아버지로…...
그러나 손을 내밀어도 아버지는 잡히지 않았다. 바로 코앞에 있는 아버지를 나는 만질 수가 없었다. 면회시간 오분은 금세 지나갔다. 공부 잘하라며 돌아서는 아버지의 눈이 눈물로 젖어드는 걸 나는 보았다. 아버지의 눈물은 처음이었다. 허탈했다. 빨갱이를 본 것도 아니고 아버지를 본것도 아니고 단지 아버지의 그림자를 잠깐 스쳐간 기분이었다. - P18

나는 가난한 게 부끄럽지는 않았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빨갱이 자식이라는 놀림보다는 견디기 쉬웠다. 입학 때부터 입어서 무릎이 툭 튀어나오고 껑충하게 짧은 바지가 창피하게 느껴질 때면 시골이 그리웠다. 여름이면 멱 감던 섬진강, 여름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던 섬진강가의포플러나무와 하얀 삐비꽃, 오징어마질을 하다 옷이 뜯어져 울먹이던 아이들.…… 내 우상이 산산이 부서지기 전까지 참으로 좋은 시절이었다.
그때는 나보다 예쁘고 옷 잘 입은 애를 봐도 아무렇지 않았었다. 언젠가아버지가 외항선원이어서 예쁜 옷을 잘 입던 영희가 분홍빛 원피스를 입고 왔을 때,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 속에서 분홍빛 치마를 나풀거리며 팔짝이던 모습이 얼마나 예쁘던지 넋을 잃고 바라보았던 적이 있다. 그때는부끄럽지 않던 내 모습이 이제는 왜 창피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나는 알수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고향으로 달려가는 내 마음은 민방위훈련 날의 처참했던 기억의 벽에 부딪쳐 다시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 P26

아무도 나를 눈여겨 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시골애답게 새까맣고 깡마른 나는 무엇 하나 내세울 게 없어서 학기 초부터 기가 죽었다. 단발머리가 잘 어울려서 새침하게 예쁜데다 공부까지 잘하는 애들이 자꾸 나를 주눅 들게 했다. 가정조사란 걸 했을 때는 학교를 그만두고 싶을 정도였다.
가정조사란 건 결국 학생들의 빈부를 파악하자는 의도였다. 한창 민감한 나이의 여자애들 가슴에 지워지지 않을 못을 박아도 좋을 만큼 더 큰어른들의 뜻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자기 집이 있는 사람 손들어요, 자기 공부방이 있는 사람, 자가용, 냉장고, 세탁기, 카메라, 오디오가있는 사람, 수십 개의 항목 중에서 내가 손을 올린 것은 단 하나였다.
"텔레비전은 거의 다 있을 테니까 없는 사람이 손을 들지"
고개를 푹 수그린 채 간신히 머리 위로 손을 올린 사람은 나까지 네 명이었다. 손을 들기까지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텔레비전이 있고 없고 따위로 창피해 한다는 사실이 더 부끄러워서 나는 후끈거리는 얼굴을 꽂꽂이 쳐들고 손을 들었다. - P28

내 자존심을 회복할 계기를 만들어준 사람은 국어선생님이었다. 국어시간에 ‘오 분 스피치‘ 란 게 있었다. 번호순대로 하루에 한 명씩 주제를정해 오 분간 발표를 하는 것이었다. 내 차례가 왔다. 대충대충 시간이나때우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나는 며칠간 꼼꼼하게 원고를 준비하고 달달월 만큼 연습을 했다. 주제는 안락사였다. 발표가 끝나고 나자 선생님은나의 자세와 발표내용에 대해 극찬을 했다. 서울로 올라온 뒤 그렇게 칭찬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국어선생님에게 그날은 기억조차 희미한 대수롭지 않은 추억 중의 하나로 묻혀졌을 것이 분명하다. 당시 선생님은 자기의 칭찬이 한 아이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지 상상할수 없었을 테지만 그 칭찬 한마디는 내 인생에 새로운 역전의 계기가 되었다. - P30

내가 알고 싶은 건 공산주의에 대한 것이었지만 어머니는 당황하고 난감한 얼굴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한참 후에야 엉뚱하게 다른 사람얘기를 꺼냈다. 나도 아는 사람에 대한 얘기였다. 구례에서 중학교 수학선생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우리 집과 무슨 관계인지는 몰라도 삼촌이라고 부르며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가 지금 감옥에 있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그가 잡혀간 것은 수업시간에 북한 얘기를 잠깐 꺼낸 지 며칠 후의일이었다. 북한을 고무 찬양했던 것도 아니었다. 북한이 정말 그렇게 못사느냐는 학생의 질문에 아니라고, 거기도 우리와 똑같이 사람 사는 데라고, 평양에는 지하철도 있다고 대답한 것이 전부였다. - P33

나는 부모의 과거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들어보지 못했다. 누구에게나과거가 있기 마련이라는 생각조차 가지지 못했을 만큼 나는 부모의 과거에 대해 무지했다. 자식에게도 말하지 못할 과거를 가진 부모, 나보다 한발 앞서가는 어머니의 여윈 어깨가 모든 것을 거부하는 듯 완고하고 고집스러워 보인 것은 잠시의 착각인지도 몰랐다. 나는 어머니에게 끌리는 마음을 애써 눌렀다. 내 미래를 빼앗아간 자가 내 부모가 아니라면, 내 부모역시 나와 똑같이 과거와 미래를 차압당한 사람이라면, 내 분노를 어디로쏟아부어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었다. 부모를 적으로 생각하는 편이 훨씬 간단하고 편했다. - P40

제, 금매,
나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늙은 눈에는 눈물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할머니와 길을 걸으면 흡사 과거의 터널을 지나는 기분이었다. 나는 할머니를 통해 이전에 그렇게 궁금해 하던 부모님의 과거로 향하는 열쇠를 찾은셈이었다. 이를 눈치 챈 부모님이 할머니에게 나 데리고 무슨 말 하지 못하도록 말씀을 드리기도 한 모양이었지만 할머니와 나의 은밀한 여행은멈춰지지 않았다.
역사란 세계사 책 속에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걷는 이 길,
내가 사는 이 반내골에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다는 게 신비로웠다. 구름위로 솟은 지리산을 볼 때면 가슴이 뛰었다. 어머니 아버지의 삶이 비로소 구체적인 형상을 띠고 다가왔다. 할머니의 말대로 공산당이 모두 잘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면, 설령 두 분 때문에 연좌제 정도가 아 - P55

니라 목숨마저 허용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내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가 반쪽짜리 역사였거나 어쩌면 완전히 잘못된 역사인 것만은 분명했다. 영어단어와 수학공식은 배웠지만,
이승만과 박정희의 공적에 대해서는 배웠지만, 학교에서는 내 혼란의 일부분도 해결해주지 않았다. 왜 세상에는 차별이 있는지, 왜 나는 공산당의 딸로 태어나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지, 할머니를 통해서 모든 것을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할머니는 책에 씌어진 역사와는 다른, 보통사람들의 역사가 있다는 것, 내 부모는 그 역사의 와중에서 그것이 옳든 그르든, 없는 사람들의 세상을 건설하겠다는 신념으로 목숨까지 내던졌다는 것을 내게 알려주었다. - P56

아직도 한참은 더 자라야 할 몸에 걸친 양복과 구두가 생소했으며, 아이들이 거칠게 주고받는 말들 또한 내게는 낯설었다. 아마도 내가 하는말들이 내 고민들이 그 아이들 역시 낯설었을 것이며, 낯설 뿐만 아니라한심하고 화가 났을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이들은 내 앞에서 아무 말도하지 않았다. 수줍고 쑥스럽게 안부 인사나 할 뿐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세상 사람들 누구나 나와 별다를 바 없는 고통과 절망을짊어진 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내가 빨갱이 딸이라는 표지를 달고 울부짖을 때 반내골 아이들은 가난이라는 표지를 달고 나처럼미래와 희망을 갈가리 찢기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와는 다른 그아이들의 슬픔을 이해할 것 같았다. 반내골 아이들처럼 미래의 진로가 뒤바뀔 만큼은 아니었지만 나 역시 배고픈 고통은 알고 있었다. - P57

부잣집 애들만큼 돈을 쓰는 것은 결코 황새가 되는 길이 아니었다. 더초라한 뱁새가 될 뿐이었다. 나는 그걸 몰랐다. 그래도 나는 선택받은 사람이었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구로공단이나 부산으로 떠나든가, 남의 집 식모가 되어야 하는 애들이 태반인데 적어도내게는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미래를 한탄하고 고민할 여지라도 남아 있었다. 가난이라는 굴레는 빨갱이라는 낙인보다 더 무서웠다.
일상의 무료, 삶의 권태나 즐기던 내가 부끄러웠다. 삶이라는 것이 알지 못할 힘에 의해서 농락당하는 것이거나, 끝내는 모든 인연을 두고 빈손으로 떠나는 허망한 것일지라도 그저 물러나 있는 것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 속에서 뭔가 내가 할 일이 있을 것 같았다. 세상을너무 성급하게 알려고 덤빌 필요는 없었다. 어른들이 읽는 책을 똑같이다 읽고 아무리 어른인 척해봐야 나는 고작 열여덟이었고, 세상을 다 알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 P58

처음엔 우리에게 닥친 재앙이 알 수 없는 힘 때문이라 믿었다. 분노의화살을 어디로 돌려야 할지 모른 채 덫에 걸린 산짐승처럼 날뛰던 나는그 재앙의 정체를 깨달아갔다. 현재의 쇠고기 소비량도 고려하지 않고 한꺼번에 다량의 소를 도입한 정부, 초지 조성의 가능성이나 도입 비육을위한 일체의 사전점검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초지 조성을 장려하고 도입우 비율을 권장한 정부, 도입부의 병 진단조차 못하는 실정에 병든 소를도입한 정부, 범인은 바로 정부였다. 이 무모한 정책이 독재권력의 장기집권을 위한 정치자금의 필요와 몇몇 특권층의 더 호화로운 생활을 위해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것, 그들에게 수많은 농민의 좌절과 고통쯤은 개똥만도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 P60

"세상엔 두 개의 계급 즉,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남의 노동을 착취해서살찌는 자와 자신의 노동을 팔아서 남까지 살찌우는 자밖에 없다."
나는 두 눈이 확 터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왜 세상을 거대한 덩어리로보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진 개인으로밖에 보지 못했던가. 나는 왜 세상이정체된 채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이 정체된 세상 속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인가. 자본주의가 봉건주의의 낡은 틀을 혁명으로 파괴했듯이, 체제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모순도 있게 마련이었다.
노동자에 대한 착취로 유지되는 자본주의는 우리의 영원한 천국이 아니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던 못 가진 자의 표지는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계급의 표지였고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표지였다. - P63

현실은 짐작할 수 없으리만치 풍부하고 다양했지만 결코 종잡을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의 세포에서 인간으로 진보했듯이 부조리한 모든것에는 반드시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 한때 나를 매료시켰던 카프카나카뮈의 부조리는 진실이 아니라 당시 시대적 상황의 즉자적 반영에 불과했다. 선생님이나 교과서나 고전이라는 문학작품의 대부분은 본질이 겹겹이 감춰진 현상만을 가진 자의 이데올로기를 가르치고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 P63

세상을 이해하는 철학을 공부하고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알게 되면서나는 빨치산의 딸이라는 카인의 표지가 부끄러운 것도 죄스러운 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부모님은 오히려 내게 가장 순결한 이름을 물려준 것이었다. 친일파의 딸도 아니고 제국주의를 등에 업은 매판자본가의 딸도 아니라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여성이 봉건적 인습에 묶여 있을 때 떨쳐 일어나 빨치산이 되었던 어머니의 딸이었다.  - P63

거의 모든 동지들이 죽을 때까지 살려준 목숨이라면, 총알을 비껴가게해서 살려준 목숨이라면 스스로 죽을 때까지 내버려둘 수도 있었을 텐데!
물을 사람이 있다면 묻고 싶었다. 빨갱이라서 자식에게까지 거부당했던어머니, 이제야 겨우 그 자식이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는 마당인데 어머니를 떠나보내야 했다. - P66

그 틈틈이 두분은 돋보기를 끼고 책을 읽었다. 내가 사다드린 이태의 《남부군》이었다.
흐린 불빛 아래 일에 지친 몸으로 책을 읽으며 부모님은 간혹 울고 웃었다. 책에 적혀 있는 옛 동지의 이름을 발견하고 어머니는 몇날며칠 잠을이루지 못했다. 그것은 나와 관련된 일을 제외하고 어떤 일에도 좀처럼흔들리지 않던 부모님의 얼굴에 떠오른 최초의 감정이었다. 산을 내려온이래 가슴을 닫고 살아온 부모님들이 그 굳은 마음의 빗장을 열려는 것일까? 세상은 분명 좋아지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싸웠던 두 분에게는 너무나 느리고 더딘 걸음이었을지 모르지만, 세상에서는 봉인되었던 옛 이야기들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노동자 농민들의 목소리가 힘을 얻어가고 있었다. - P67

"목적이 왜 없었겠냐. 더러 그런 사람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은그렇지 않았다. 조국을 미제의 손에서 해방시키고 노동자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었다. 휴전 무렵에 가서는 지리산을 무대로 한 무장투쟁이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기다리는 건 이름 없는 죽음뿐이라는 걸알았지만 그래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우리가 다 죽으면 다음 세대가, 그리고 전 세계의 노동자가 함께 싸워 주리라고 믿었다. 그런 신념이 없었다면 어떻게 목숨까지 초개처럼 버려가면서 그 악조건을 견딜 수있었겠냐?" - P68

전남도당 조직부부장을 지낸 아버지, 그 유명한 남부군의 정치지도원을 지낸 어머니, 나는 두 분이 자신들의 과거를 두 발로 삼아 당당히 설 수있기를 기도했다. 그것이 사십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사상의 순결을 지켜내며 창살 안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을 위해 나와 있는 사람들이 할 수있는 최소한의 갚음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내 부모와 내 부모 같은 선배어른들의 과거를 복원하는 것, 그것은 바로 내가, 그리고 나와 같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두 분은 부산하게 서두르더니 집을 나섰다. 7시, 반내골 산 위로 막 해가 솟고 있었다. 저 산으로 백운산과 지리산을 넘나들며 부모님은 역사와민족을 위해 젊음을 불태웠으리라. 그 산그림자 아래로 동지였던 아버지는 어머니를 부축하며 걷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두 분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만나고자 하는 사람과 재회하길 빌면서, 그들의 재회가 결국울음바다가 되어 아직도 메마른 이 땅을 넉넉히 적셔주길 빌면서. - P70

멀리 지리산에도 아침햇살이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산에서 땅을뒤흔드는 함성이 들려온다고 생각했다. 결코 패잔병의 함성이 아니었다.
4.19로, 80년 광주로,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져 잠자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소리였다.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지리산을 바라보았다. 산이점점 커지더니 불쑥 내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 산등성이에 내 부모가, 내부모의 얘기 속에서 혹은 역사책 속에서 말로만 듣던 수많은 사람들이 서있었다. 나는 그들을 그 함성을 뒤쫓기 시작했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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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나 잘났다고 뻗대며 살아온 지난 세월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다.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자부했는데 나이 들수록 잘 산 것 같지가 않다. 나는 오만했고 이기적이었으며 그래서 당연히 실수투성이었다. 신이 나를 젊은 날로 돌려보내준다 해도 나는 거부하겠다.
오만했던 청춘의 부끄러움을 감당할 자신이 없으므로.
부끄러움을 견디며 오늘을 살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내가 반성할 줄 아는 인간인 덕분이다. 친구들은 나를 반성주의자(反省主義) 또는 성장애주의자(成長愛主義者)라고 부른다. 반성하고 성장하는 것이 내 특기라나 뭐라나.
잘하는 것이라곤 그 둘뿐이다. 그나마라도 그럭저럭 해내고 있으니 천만다행 아닌가. 그렇게 자위하며 살았다. 돌이켜보니 거기서부터 문제였다.
유년기의 나는 매일같이 동네 초입 팽나무 아래 앉아 읍내로 뻗어 있는 신작로를 보았다. 그 너머의 세상을 상상하며 성장기의 나는 먼 데서 기적이 울릴 때마다 그 기차가 가닿을 서울을 꿈꾸었다. 지금보다 더 멀리 더 높이,
그렇게 동동거리며 조바심치며 살다가 알게 되었다. 빨치산의 딸이므로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나의 비극은 내 부모가 빨치산이라서 시작된 게 아니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내 비극의 출발이었다.
쉰 넘어서야 깨닫고 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행복도 아름다움도 거기 있지 않다는것을 성장하고자 하는 욕망이 오히려 성장을 막았다는것을.
고향에 돌아오니 서울서 보이지 않던 아름다움 천지다.
섬진강변의 벚꽃길, 반야봉의 낙조, 노고단의 운해만 아름다운 게 아니다. 벚꽃은 정 없어 싫고 산수유는 없어싫다는 동네 할매, 필요 없다고 해도 밥을 묵어야 힘이 난다며 기어이 가져다주는 식당 주인, 심지어는 먹도 못할억센 나물을 삶으면 부드럽다고 뻥쳐서 파는 장터 할매,
주방에서 가장 먼 안쪽 테이블에 앉았더니 사람도 없는데 가차이 앉으라고 호통치는 식당 아줌마(알고 보니 그이는 관절염이 심했다)까지, 이곳엔 사람 냄새 넘치는 사람이 그득하다. 오죽하면 할매가 뻥을 치겠는가. 다 먹고살자고 하는 것이다. 급하면 뻥도 치고 호통도 치는 것이 사람 아닌가.
사람이 오죽하면 글겄냐. 아버지 십팔번이었다. 그 말 받아들이고 보니 세상이 이리 아름답다. 진작 아버지 말들을 걸 그랬다.
아버지. 아버지 딸, 참 오래도 잘못 살았습니다. 그래도뭐, 환갑 전에 알기는 했으니 쭉 모르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딸을 대장부의 몸으로 낳아주신 것도, 하의 상의 인물로 낳아주신 것도 다 이해할 터이니 그간의 오만을 무례를, 어리석음을 너그러이 용서하시길……… 감사합니다,
아버지. 애기도 하는 이 쉬운 말을 환갑 목전에 두고 아버지 가고 난 이제야 합니다. 어쩌겠어요? 그게 아버지 딸인걸. 이 못난 딸이 이 책을 아버지께 바칩니다.

정지아


 세상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혁명가였던 내 부모에게는 연애도, 옷도, 화장도, 별의미 없는 사치에 불과했다. 그 틈에 끼어 나는, 혁명가도 아닌 나는, 신념도 없는나는, 일상의 평범한 대화를 맛보지 못한 채 어른이 되고늙어가는 중이었다. 혁명가도 아니고 신념도 없는 주제에진지하지 않은 것은 참지 못하는 꼰대 같은 어른으로, 그러니까 아버지, 나는 억울하다니까요! 그래봤자 아버지는 죽었고, 죽어서도 혁명가인 양 영정사진 속에서 근엄한 얼굴로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 P123

그런 사연이 있는지 몰랐다. 그저 빨갱이 아버지 때문에 집안 망하고 공부 못한 것이 한이라 사사건건 아버지를 원망하는 줄로만 알았다. 아홉살 작은아버지는 잘난형 자랑을 했을 뿐이다.그자랑이 자기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갈 줄 어찌 알았겠는가. 작은아버지는 평생 빨갱이 아버지가 아니라 자랑이었던 아홉살 시절의 형을 원망하고 있는 게 아닐까. 술에 취하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었던 작은아버지의 인생이, 오직 아버지에게만 향했던 그의분노가, 처음으로 애처로웠다. - P129

아버지는 알았을까? 자기보다 한참 어린 막내가 면당위원장인 당신을 그렇게나 자랑스러워했다는 걸, 그 자랑이 당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걸, 그게 평생의 한이 되어 자랑이었던 형을 원수로 삼았다는 걸. 어쩐지 아버지는 알고 있었을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는 수시로 작은아버지의 악다구니를 들으면서도 돌부처처럼 묵묵히 우리 집이나 작은집 마루에 걸터앉아 담배만 뻐끔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는 몰랐을 수도 있다. 아무 - P130

도 보지 않은 그날의 진실을, 그날 작은아버지 홀로 견뎠어야 할 공포와 죄책감을 보지 않은 누군들 안다고 할 수있으랴. 역시 작은아버지에게는 작은아버지만의 사정이있었던 것이다. 독한 소주에 취하지 않고는 한시도 견딜수 없었던 그러한 사정이. - P131

나는 주로 비아냥거렸고, 아버지는 분노에 찬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며 입을 다물었다. 입을 다문 건 현실주의자인 아버지도 알기는 한다는 의미였다. 아버지는 자신의신념을 후회하지 않았지만 사람인데 설마 괴물처럼 확장하는 자본주의의 기세 앞에 절망이든 회한이든 어떠한 서글픈 감정을 잠시나마 느끼기는 했을 터였다. 목숨을 건자신들의 투쟁이 무의미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 P147

그는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자꾸만 아버지의영정을 곁눈질했다. 나도 아버지를 보았다. 고등학생 때따라가지 못했던 두 사람의 대화를 쉰 가까운 지금도 나는 따라갈 수 없었다. 질 게 뻔한 싸움을 하는 이십대의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목숨을 살려주었던 사람을위해 목숨을 걸려 했던 이십대의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영정 속의 아버지가 꿈틀꿈틀 삼차원의 입체감을 갖는 듯했다. 살아서의 아버지는 뜨문뜨문, 클럽의 명멸하는 조명 속에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 P181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빠. 그 뚜렷한 존재를 나도 모르게 소리내어 불렀다. 아버지의 영정을 응시하던 그가, 아직 이름도 모르는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흰자위가붉었다. 나의 눈도 그러할 터였다. 작은 상욱이, 김상욱씨가 가만히 눈물을 훔쳤다. - P181

이 냥반 큰놈이 깡패였는디 자네 아부지가 오야붕하고 담판을 짓고는 빼내 왔다네. 광주 있으면 또 워찌 될랑가 모린다고 강화도 워디 화원에다 취직을 시켜가꼬 지금은 건실하게 잘 산당마."
아버지가 무슨 수로 깡패 두목과 담판을 지었을까? 생각해보니 언젠가 서방파의 일인자라나 이인자라나와 함께 감옥살이를 한 적이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안면이 있으니 찾아갔겠지. 그러고 보면 감옥도 하나의 세상일지 몰랐다. 거기서도 누군가를 만나고 누군가와 사연을 쌓고 누군가를 좋아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할 테니말이다. - P183

아버지가 광주교도소에서 잠깐 만난 무등산 타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가난했던 그의 가족은 무등산 중턱에무허가 집을 지었고, 철거반원들이 그 집을 불태운 뒤 거동조차 불편한 동네 사람들의 집에 불을 지르려 하자 순식간에 장정 넷을 망치로 때려죽였다. 아버지는 그가 사형장으로 향하는 모습도 두 눈으로 봤다. 아버지가 본 사형수 중 유일하게 울지 않고 쫄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가담담하게 죽음을 맞았노라고, 아버지는 담담하게에 방점을 찍어 말했다. 내가 별 반응이 없자 아버지가 덧붙였다. - P183

"사람이 덤덤하게 죽음을 맞이하기가 쉬운 중 아냐! 총소리만 나먼 꿩 새끼마냥 대가리부텀 바우 밑으로 디미는 사람도 있었어야 갸가 김대 출신이었는디 똑똑허그나말그나 죽음 앞에 장사 있가니 대가리만 숨기면 뭐한대?
궁뎅이랑 허벅지랑 벌집이 돼가꼬 즉사했는디, 헥가란놈도 그랬는디 흥숙이 갸는 사형장으로 끌레감시롱도 덤덤하더랑게 하기사 갸는 노상 자개는 사형을 당해도 못갚을 죄를 졌다고 그랬어야. 목에 밧줄을 거는디 시상 펜안한 표정이었단다. 쬐까라도 죄를 갚는다 생각혀서 그랬겄제이. 지는 펜히 갔는디 우리는 갸가 아까와 죽겄드라." - P184

내 부모가 은혜를 갚기란 진작에 튼터, 자칫하면 은혜감기가 내 몫으로 오롯이 남을 판이었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천형에 가난까지 물려받은 것만으로도 지긋지긋한데 빨치산이 입은 세상의 온갖 은혜까지 물려받고 싶지않았다. 그래서 나는 부모의 대화에 자주 등장하여 분명몇번이고 들었을 소선생의 장남 이름을 기어코 기억에 남기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봤자 세상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오늘 그는방명록에 이름을 남길 것이고, 나는 간혹 그 이름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며, 그때마다 내 아버지가 입은 은혜를 나날이 뼛속 깊이 각인시킬 밖에는 도리가 없을 것이었다. - P187

그러나 어찌 됐든 가난한 빨치산의 장례식에는 날고 기는사람들의 장례식에도 없을 전복죽이 있다! 어쩐지 마음이 언니가 뽀땃하게 끓여 온 전복죽처럼 뽀땃해지는 느낌이었다.
어제는 깨죽을 반 넘게 남겼던 어머니가 이모들과 함께여서 그런지 전복죽 한대접을 말끔히 비웠다. 종일 앉아 있는 것만 해도 버거울 어머니였다. 나는 이모들에게부탁해 어머니를 집으로 모시게 했다. 내일 화장장이며장지까지 가려면 몇시간이라도 눈을 붙여야 했다. 줄초상을 치를 수는 없었다. - P191

사진 속의 아버지는 딴 사람인 듯 낯설었다. 아버지는어릴 때의 얼굴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를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낮선 건 본 적 없는 싱싱한 젊음과 정면을 제대로 응시한,
사팔뜨기 아닌 눈이었다. 사진 속 문척 모래사장은 지금과 달리 곱고 넓었고, 빛바랜 흑백사진임에도 불구하고작열하는 태양의 열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 열기마저식힐 듯 아버지의 청춘은 싱그러웠다.  - P195

아직 사회주의를모를 때의 아버지, 열댓의 아버지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질곡의 인생을 알지 못한 채 해맑게 웃고 있었다. 사진 속소년 둘은 입산해 빨치산이 되었고, 그중 한 사람은 산에서 목숨을 잃었다. 형들을 쫓아다니던 동생은 형을 잃고남의 나라에서 제 다리도 잃었다. 사진과 오늘 사이에 놓인 시간이 무겁게 압축되어 가슴을 짓눌렀다. - P195

"나는이 상욱이 성만 보면 성이 나드라고 감옥에 가고고생은 했겄제만 그래도 지는 살아 있응게. 살아서 겔혼도 허고 새끼도 보고 희컨 머리도 남시로 늙어가게. 나는우리 성 늙어가는 것도 못 봤는디, 지는 자꼬 내 앞에서늙어강게.……."
내 부모는 평등한 세상이 곧 다가오리라는 희망을 품고 산에서 기꺼이 죽은 사람들을 늘 부러워했다. 쭉정이들만 남아서 겨우겨우 살고 있노라, 한탄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런 삶이 부러워 미웁기도 했던 것이다. 어느 쪽이 나은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마음을 짐작은 할 것 같았다. - P196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번만 와도 되는데, 한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
술이 불쾌한 상태로도 지팡이를 다리처럼 자유롭게 쓰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미련 없이 잘 가라는 듯 오늘도 날은 화창했고, 도로변에는 핏빛 연산홍이불타오르고 있었고, 허벅지 아래로 끊어진 그의 다리에서새살이 돋아 쑥쑥 자라더니 어느 순간 그는 사진 속 그의형보다 어린 소년이 되어 달음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 P197

시속 180킬로로 고속도로를 달려 병원에 도착했을 때아버지는 시체처럼 창백했다. 몇시간 전 의식을 잃은 아버지는 얼굴의 근육이 완전히 이완되어 편안하디편안한모습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은 어느 근육이든 긴장한 상태인 모양이었다. 세상사의 고통이 근육의 긴장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죽음이란 고통으로부터해방되는 것, 아버지는 보통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 해방의 기쁨 또한 그만큼 크지 않을까, 다시는 눈 뜰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 P198

어느 쪽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차가운 철제 침대에 누워 수의에 싸이고 있는 저 시신과 내가 적어도 한때는 한 몸이나 같았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나의 우주였다. 그런 존재를, 저 육신을, 이제 다시는 볼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하게 시간과 공간의 한 지점을 점령하고 있는 저 육신이 내일이면 몇춤의 먼지로화할 것이다.
마음 저 밑바닥에서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눈물로솟구쳐 나오려는 순간 누군가 나보다 먼저 울음을 터뜨렸다. 학수였다. 타인의 눈물이 가문 날의 태양 볕처럼 내 마음에 가득 차오른 습기를 불태웠다. - P201

참고로 나는 아버지와 달리 싸움에 제법 재주가 있다.
그래봤자 평생 세번 싸웠지만, 어쨌든 그 세명의 상대는처참하게 KO패 당했다. 아버지는 분노한 사람에게 진정을 하라고 다독이지만 나는 분노한 사람의 분노를 끌어올린다. 제 분에 못 이겨 울음을 터트리거나 발광을 할 때까지, 나는 그 울음을, 발광을, 참으로 침착하게 평소보다 더평온한 상태로 응시할 뿐이다. 그 차분한 응시가 보태지면 상대들은 대응할 힘을 잃는다. 그날의 아버지가 나에게 참패한 세명 중 한명이었다. - P205

"저 질이 암만 가도 끝나들 안 해야."
아, 작은아버지도 나처럼 이 길을 따라 떠나고 싶었구나 떠나려고 이 길을 걸어와봤구나. 그런데 왜 떠나지 못했냐고 나는 묻지 못했다,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우리는 가자 못 간다 실랑이도 없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갔다. 작은아버지는 우리 집 사립문 밖에 자전거를 세우고 내가 내리기를 기다렸다. 쉰내 풀풀 나는 작은아버지의 등에서 떨어지는 게 시원섭섭했다. 이 쉰내 같은 게 혈육인가 싶었다.
나를 데리러 오가느라 밴 그 쉰내가 정겨운 듯도 역겨운듯도 했다. - P209

시집 안 간 딸자식에게 언니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비수가 꽂힐 때 알았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아버지자식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가족을 등지고 사회주의에 몸담았을 때,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혈육을 뿌리치고 빨치산이 되었을 때, 이런 마음이겠구나. 첫걸음은 무거웠겠고,
산이 깊어질수록 걸음이 가벼웠겠구나. 아버지는 진짜 냉정한 합리주의자구나. 나는 처음으로 나와 같은 결을 가진 아버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P217

너는 대체 어떤 딸이었냐고.
어떤 딸인지, 어떤 딸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누구의 딸인지가 중요했을 뿐이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는 데 나는 평생을바쳤다. 아직도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빨치산의 딸이라는말에는 ‘빨치산‘이 부모라는 전제가 존재한다. 그 부모에게도 마땅히, 자식이 부모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듯 자식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보지도 못했을 만큼 빨치산의 딸이라는 굴레가 무거웠다고, 나는 - P224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변명을 들을 아버지는 이미 갔고 나에게는 변명의 기회조차 사라졌다. 그 사실이 뼈아파 나는 처음으로 소리 내 울었다. 아버지를 위한 울음이 아니라 나를 위한 울음이었다. 아버지 가는 길에까지 나는 고작 그 정도의 딸인 것이다. 그런 나를 생판남인 주제에 친자식보다 더 자식 같았던 학수가 아버지처럼 무심한 눈으로,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P225

사무치게라는 표현은 내게는 과하다. 감옥에 갇힌 아버지야말로 긴긴밤마다 그런 시간들이 사무치게 그리웠으리라. 그 당연한 사실을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야 겨우 깨닫는 못난 딸인 것이다. 아빠, 나는 들을 리 없는, 유물론자답게 마음 한줌 남기지 않고 사라져, 그저 빛의 장난에 불과한 영정을 향해 소리내불렀다. 당연히 대답도 어떤 파장 따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도하지. 영정 속 아버지가, 이틀 내 봤던, 아까도 봤던 영정속 아버지가 전과 달리 그립던 어떤 날들처럼 친밀하게느껴졌다.  - P231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밤은 깊어가고 정신은 더욱 맑아졌다. 마음은………… 그어느 때보다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나는 냉정한 합리주 - P231

오십년 가까이 살아온 어머니도 아버지의 사정을, 남자의 사정을, 이제야 이해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나 또한 그러했다. 아버지는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전 - P248

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다. 그리고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이었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개의 얼굴을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하자고 졸랐다는 아버지의 젊은 어느 날 밤이 더이상 웃기지 않았다. 그런 남자가내 아버지였다. 누구나의 아버지가 그러할 터이듯. 그저내가 몰랐을 뿐이다. - P249

"그때게 할배 맴이 요상허드래. 아부지라는 거이 이런건갑다, 산에 있을 적보담 더 무섭드래. 겡찰보담 군인보담 미군보담 더 무섭드래."
아버지 유골을 손에 쥔 채 나는 울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한 인연 둘이 말없이 내 곁을 지켰다.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나를 감쌌다.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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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삶을 마감한 것이다.
만우절은 아니었다. 만우절이라 한들 그런 장난이나 유머가 오가는 집안도 아니었다. 유머라니. 유머는 우리 집안에서 일종의 금기였다. 그렇다고 유머가 없었던 것은아니다. 누가 봐도 유머일 수밖에 없고 유머여야 하는 순간에도 내 부모는 혁명을 목전에 둔 혁명가처럼 진지했고, 그게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그러니 우리 집안에유머가 있었다기보다 혁명을 목전에 둔 듯 진지한 그들의어떤 행위나 삶의 방식이 유머일 수밖에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 P7

아버지의 눈빛은, 누군가 사진으로 그 찰나를 포착했다면, 처형 직전의 독립운동가나 학살당한 동지의 시신을 목도한 혁명가라 해도 믿을 만큼 진지하다못해 비장했다. 내가 풋, 웃음을 터뜨리려는 찰나, 어머니가 꽁무니를 내리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열일곱의 나는, 방물장수하룻밤 재우는 일에 민중을 끌어들이는 아버지나 그 말에냉큼 꼬리를 내리는, 꼬리를 내리다 못해 죄의식에 얼굴을 붉히는 어머니나, 그때 읽고 있던 까뮈의 『이방인』보다 더 낯설었다. - P13

그날 어머니는, 허리가 아파 평소 된장찌개와 김치밖에내놓지 않던 어머니는, 찬장에 고이 모셔둔 새 접시까지총동원하여 당신으로서는 최대한의 극진한 식사와 잠자리를 대접했다. 민중에게.
아버지의 민중이 그날 밤 내게 남긴 것은 벼룩이었다.
대신 가져간 것은 서까래에 매달아놓은 마늘 반점이었다.
나는 한달 가까이 북북 몸을 긁으며 민중을 욕하다가, 혁명가를 탓하다가, 그러다가 불현듯, 낄낄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사라진 마늘 반점이 내 부모의 진지에 대한 통렬한 배신처럼 느껴진 까닭이었다. 그러나 배신당한 당사자들은 나와 달리 배신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 P13

바짓가랑이에 붙은 먼지한톨조차 인간의 시원이라 중히 여겨 함부로 털어내지 않았던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마침내 그 시원으로 돌아갔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참으로 아버지답게 마지막까지 유머러스하게. 물론 본인은전봇대에 머리를 박는 그 순간에도 전봇대가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고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민중의 한걸음 한걸음이 쌓여 인류의 역사를 바꾼다는 진지한 마음으로 아버지는 진지하게 한발을 내디뎠을 것이다. 다만 거기, 전봇대가 서 있었을 뿐이다. 무심하게, 하필이면 거기. 이런 젠장. - P16

"아이고, 우리 아리도 저런 데 나가보먼 쓰겄다."
개 이름 같은 아리는 내 이름이다. 아버지가 활동했던백아산의 아, 어머니가 활동했던 지리산의리를 딴 이름덕분에 나는 숱한 홍역을 치렀다(사실 아버지가 주로 활동한 곳은 백아산보다는 백운산이었다. 그런데도 백아산의 아를 따온 것은 백운산의 백이나 운이 여자아이 이름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그러니까 제 아무리 남녀평등을 주장했다 한들 반봉건시대에 태어나 가부장제의 그늘을 아주 벗어나지는 못한 반봉건적 사유의 발로였던 것이다), 학교에서나 관공서에서나 고아리, 내 이름을 말하면 아유, 이름이 참 예쁘네, 얼굴도 참......하면서 나를 쳐다보았고 이내 말줄임표가 뒤따랐다.  - P29

지리산은 짙은 운무에 잠겨 있었다. 태양이 높아지면운무 속에 치솟은 노고단이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아버지는 언제나 새벽 네시가 되기도 전에 잠에서 깼다. 새벽이 되기 직전, 어둠이 가장 깊은 시각, 아버지는 늘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웠다. 환한 낮이라면 지리산 능선과 노고단이 한눈에 바라보일 테지만 아버지 눈앞에 펼쳐진 것은깊은 어둠뿐이었다. 불도 켜지 않은 베란다에서 하얀 담배 연기를 어둠 속으로 피워 올리던 아버지의 여윈 등이불쑥 떠올랐다. 내게는 아버지의 삶처럼 비장한 풍경으로각인되었지만 기실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덤덤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 P43

을 마치고 아지트로 돌아왔더니 동지들의 시신이 목 잘린채 사방에 나뒹굴고 있었다고, 아버지는 예의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덤덤하게 말했었다. 밀란 쿤데라는 불멸을 꿈꾸는 것이 예술의 숙명이라고 했지만 내아버지에게는 소멸을 담담하게 긍정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고, 개인의 불멸이 아닌 역사의 진보가 소멸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였다.
저를 지켜보던, 저 안에서 청춘을 보냈던 한 사내가 가고 없는 노동절 아침, 새벽녘의 지리산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고요히 장엄했다. - P44

고통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잘 참는 사람은 싸우지 않고 그저 견딘다.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들고일어나 누군가는 쌈꾼이 되고 누군가는 혁명가가 된다. 아버지는 잘못 참는 사람이다.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가 득세하는것도 참지 못했고,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하라는봉건잔재도 참지 못했으며, 가진 자들의 횡포도 참지 못했다. 물론 두시간의 노동도 참지 못했다. 그런데 얼어 죽을 것 같은 고통은, 굶어 죽을 뻔한 고통은, 생사의 고비를함께 넘은 동료들이 바로 곁에서 죽어가는 고통은 어떻게 견뎠을까? 신념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내려와봤자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뿐이라는 지극히 절망적인 현실 인식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 P68

아버지가 평생 당하고만 살지는 않았다. 당하지 않으려고 사회주의에 발을 디뎠고, 선택한 싸움에서 쓸쓸하게패배했을 뿐이다. 아버지는 십대 후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여든둘 된 노동절 새벽,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짊어졌다. 사회가 개인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이렇게까지가혹하게 묻는 게 옳은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수 있다.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빨갱이 새끼들은 다 때려죽여야 한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치렀고, 아직도 휴전중인 데다남북의 이데올로기가 다르니 의견의 합치를 보기는 진작에글러먹은 일, 게다가 나는 옳고 그름을 따질 만한 주제도아니다. - P76

안개가 점령했던 도로에는 오월 첫날답지 않게 이른 아침부터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찍고 있었다. 그 빛 속으로나보다 더 억울하게 당하고 살아온 큰집 길수오빠가 허적허적 걸어오고 있었다. 위암 말기인 오빠는 동식씨 말마따나 낼모레 아버지 뒤를 따른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병색이 완연했다. 지난해 말 위암 말기 판정을 받기직전 오빠는 부군수 승진을 앞두고 있었다. 내놓을 것 하나 없는 우리 집안에서 가장 잘나가는 사람이었다.
오빠는 빨갱이 작은아버지를 둔 덕분에 육사에 합격하고도 신원조회에 걸려 입학하지 못했다. 우리 아버지가오빠 앞길을 막은 게 큰어머니는 세상 떠날 때까지 천추의 한이었다. 오빠는 마음은 어땠을지 모르나 겉으로는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 P77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함박눈 내리던 겨울날이떠올랐다. 오빠의 마음속에도 그날이 사무치게 남아 있을터였다. 그날을 마음에 품은 채로 오빠와 나는 멀어지면서 살아온 것이다. 빨갱이의 딸인 나는 오빠를 생각할 때마다 죄를 지은 느낌이었다. 빨갱이의 딸인 나보다 빨갱이의 조카인 오빠가 견뎌야 했을 인생이 더 억울할 것 같아서였다. 자기 인생을 막아선 게 아버지의 죄도 아니고작은아버지의 죄라니! - P81

곧 죽을 몸으로 죽은 자를 조문하는마음이 어떨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를 일으켜 상주 자리에 앉혔다. 나라면 이런 자리에서 누군가의 위로를 받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나보다 더 야무지고자존심 강한 오빠도 같은 심정일 터였다.
오빠는 무덤덤한 얼굴로 아버지 영정을 향해 두번 절을 올렸다. 그리고 나와 맞절을 했다. 어머니는 절조차 버거워 보이는 오빠를 보며 울기만 했다. - P83

마지막 가는 길,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음식을 맛있게먹는 아버지의 모습이 환영처럼 떠올랐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내가 아는 한 단 한순간도 유물론자가 아닌 적이 없었다. 먼지에서 시작된 생명은 땅을 살찌우는 한줌의 거름으로 돌아가는 법, 이것이 유물론자아버지의 올곧은 철학이었다. 쓸쓸한 철학이었다. 그 쓸쓸함을 견디기 어려워 사람들은 영혼의 존재를, 사후의세계를 창조했는지도 모른다.
조금 전 통곡하던 사촌들은 어느새 자기들끼리 시끌벅적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활기찬 담소와 통곡 사이 어디쯤에서 서성이며, 나는 깨죽이 담긴 쟁반을 든 채 우두커니 그들을 바라보았다. 꿈결처럼 모든 것이 낯설었다. - P98

여공으로 사는 일이, 아이 넷 낳고 사는 일이 적잖이 노곤했으리라. 어린 동생들쳐업고 똥기저귀 빨던 어린 시절처럼 동동거리며 살아왔을 영자의 지난 시간이 눈앞에서 본 듯 환하게 밝아왔다. 그 시간 속에는 우리 아버지손잡고 가슴 졸이며 수술을 기다리던 순간도 존재할 터였다. 그러니 아버지는 갔어도 어떤 순간의 아버지는 누군가의 시간 속에 각인되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생생하게살아날 것이다. 나의 시간 속에 존재할 숱한 순간의 아버지가 문득 그리워졌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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