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에 문인들이 들어와 살게 된 것은 1930년대에 들어서이다. 서울 인구가 폭증하면서 한양도성 외곽을 택지로 개발하는 신흥 주택 붐이 일어난 때였다. 서울의 인구는 1900년대에서 1930년대 사이에 2배늘어났다. 이에 일제는 국유림을 주택지로 개발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여1931년 1차로 서울 남산 뒤쪽(남쪽) 이태원 일대의 방대한 국유림을 불하했다. 이 택지 불하 사업은 정부의 심각한 재정 결핍을 해결하는 데도큰 도움이 되었다(『동아일보』 1931년 2월 22일자). 그러자 1933년엔 우리에공동묘지를 조성해 서울 근교에 있던 이태원·노고산 · 미아리 등의 공동묘지를 이장시키고 빈 공간을 택지로 개발했다. - P53
성북동은 시내와 가까울 뿐 아니라 1928년에 혜화문(동소문)을 헐어큰길을 냈고, 또 종로4가에서 돈암동까지 다니는 전차가 혜화동과 삼선교에 정거장이 있어 변두리 치고는 교통도 크게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조용한 전원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문인 묵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1933년에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과 상허 이태준의 수연산방이 먼저자리 잡았고 1934년에 간송 전형필은 성북초등학교 옆에 북단장을 마련했다. 뒤이어 1935년엔 근원 김용준의 노시산방이 들어왔다. 1936년에는 그때까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里)였던 것 이곳이 마침내경성부(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성북정(町)이 되었다. 이후에도 백양당 출판사 사장인 인곡 배정국의 승설암, 구보 박태원의 싸리울타리 초가집등이 속속 모여들었다. - P54
방유룡 신부는 1930년 서품(品)을 받고 강원도 춘천성당과 황해도장연, 재령, 해주, 개성 성당을 거쳐 서울 가회동,제기동 성당에서 본당사목자를 지냈으며 김대건 사제 순교 100주년이 되는 1946년, 동양적이며 한국적 영성을 바탕으로 한국 순교자들을 현양하기 위해 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창설했다. 그리고 1953년 한국 최초의 남자 수도회인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를 세우고 이 건물을 지은 것이다. 1955년 무렵이 건물과 주위의 지붕 낮은 집들이 함께 찍힌 사진은 당시 성북천변의그윽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이 쌍다리께의 문인촌 중 지금도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의 ‘수연산방(壽硯山房)‘이다. 이태준은 1933년에 초가집을 사서 들어와 이듬해에 이를 헐고 아담한 한옥을 지었다. 이후 1946년 7월 무렵 월북할 때까지 12년간 그의 문학을 꽃피우고 잡지 - P56
『문장(文章)』을 주관하며 생의 전성기를 여기서 보냈다. 특히 이곳은 근원 김용준, 인곡 배정국 등 자칭 ‘호고일당(好古一黨 옛것을 사랑하는 사람들)‘들의 사랑방 구실을 했다. 그래서 이태준의 수연산방은 성북동 근현대 문화예술인 거리의 랜드마크가 되었고 집 앞으로 난 길에는 ‘이태준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수연산방 앞에 이르면 화강암 마름모꼴 석축 위의 콩떡 담장에 반듯한 일각대문이 있다. 그 너머로 엇비스듬히 팔작지붕이 보이는데 대문안으로 들어서면 아담한 마당의 오른쪽에 본채, 왼쪽에 별채가 있다. 담장 높이, 마당 넓이, 집 크기의 비례가 아주 쾌적하다. - P57
이태준의 수연산방] 이태준은 1935년에 이 집을간 생의 전성기를 여기서 보냈다. 이곳은 근원 김용준, 인곡 배정국 등 자칭두벌대 축대 위에 올라앉은 본채는 기역자 집으로 돌계단 위로 대청마루가 넓게 열려 있고 그 오른쪽으로는 사각 돌기둥 위에 번듯한 누마루가 서 있어 이 집의 기품을 자랑한다. 집안 구조를 보면 대청마루 오른쪽으로는 안방과 부엌의 살림 공간이 있고 왼쪽으로 서재를 겸한 건넌방이 있는데 건넌방 툇마루는 방보다 약간 높고 멋스러운 아자(亞)난간을 두르고 있다. 이태준은 이 집을 지을 때 고미술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 있던 자신의 안목을 유감없이 구현했다. 이태준은 목재부터 생목을 쓰지 않고 자신의 고향인 철원의 고가를 해체한 것을 옮겨왔다고 한다. 목수도 고급인력을 썼다며 목수들」이라는 수필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노인들은 왕십리 어디서 산다는데 성북동 구석에를 해뜨기 - P58
전에 대어 온다. (…) 그들의 연장 자국은 무디나 미덥고 자연스럽다. 이들의 손에서 제작되는 우리 집은 ・・・) 날림기는 적을 것을 은근히기뻐하며 바란다.(문장』 1권 8호)
그래서 이 집은 1930년대에 유행한 집장사의 개량 한옥과는 격을 달리한다. 눈 있는 사람은 이 집의 세심한 아름다움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1939년 어느 날 치과의사이자 고미술 애호가인 함석태(咸錫泰)는 이 집을 방문한 인상을 청복반일(淸福田)이라는 수필에서 이렇게 말했다.
장원(長, 긴 담장을 앞으로 남서(南西) 정을 널리 이고 남향대청을 동으로 꺾은 누간(樓)의 기역자 형 윤환미(輪奐美, 빛나는 아름다움)는 틀림없이 아담한 이조사기(조선백자) 연적을 확대한 감이다. - P59
이태준은 1946년에 월북하면서 이 집을 두 누이에게 넘겨주었다. 월북문인이라는 ‘빨간딱지‘ 때문에 한동안 ‘이태현‘ 의 집으로 이름을 감추었다가1988년에 해금되면서 이름을 되찾아 1998년부터 누님의 외손녀인 조상명 씨가 수연산방"이라는 이름의 전통찻집을 운영하고 있다. 수연산방 왼쪽에는 행랑채 ‘상심루(賞心樓)‘가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전소되었고 그 자리엔 새로 지은 건물에 이태준이 만든 문학동인의 이름을 딴 ‘구인회(九人會)라는 이름의 북카페가 운영되고 있다. - P60
이태준은 「고완」에서 조선백자의 미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의 그릇들은 일본 것들처럼 상품으로 발달되지 않은 것이어서도공들의 손은 숙련되었으나 마음들은 어린아이처럼 천진하였다. 손은 익고 마음은 무심하고 거기서 빚어진 그릇들은 인공이기보다 자연에 가까운 것들이다. 첫눈에 화려하지 않은 대신 얼마를 두고 보든물려지지 않고, 물려지지 않으니 정이 들고, 정이 드니 말은 없되 소란한 눈과 마음이 여기에 이르러선 서로 어루만짐을 받고, 옛날을 생각하게 하고, 그래 영원한 긴 시간 선에 나서 호연(浩然)해 보게 하고, 그러나 저만이 이쪽을 누르는 일 없이 얼마를 바라보는 오직 천진한심경이 남을 뿐이다. - P63
이태준의 이 조선자기 예찬에는 애국적인 정서가 들어 있어 다소 감성적으로 흐른 감이 없지 않으나 고미술을 통해 민족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마음이 역력하다. 이런 시각은 조선도자의 천진성과 무작위성을설파한 우현(又) 고유섭(裕燮)의 ‘조선미술의 특질‘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고유섭은 이태준과 같이 이화여전에 출강했으니 교류가 없었을 리 없고 또 기질상 둘의 민족 정서에 대한 뜻이 통하지 않았을 리없다. - P63
호프, 미국에 오 헨리가 있다면 우리에겐 이태준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의 빛나는 문학적 위업은 이태준 문학을 연구하는 ‘상허학회‘가일찍부터 활동해왔다는 사실이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이태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달밤」 「복덕방」 「가마귀」 「밤길」 「돌다리」 같은 작품을 읽고 나면 그 주인공의 애처롭고 안타까운 모습에 가슴이 아려와 책장을 덮고 한동안 빈 천장을 바라보게 된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모진 세월을 어처구니없는 아픔으로 살아가는 밑바닥 인생들인데 전편에 흐르는 따뜻한 인간애는 가슴이 미어지게 한다. 그리고 그 문장은 얼마나 아름답던가. 「패강랭(江冷)」의 "하늘과 물은 함께 저녁놀에 물들어 아득한 장미꽃밭으로 사라져버렸다" 같은 자연에 대한 묘사라든지, 「해방전후(解放前後)」의 "글쎄요‘ 하고 없는 정을 있는 듯이 웃어 보이니..." 같은 심리 묘사가 나오면 밑줄을 긋게 한다. 특히 이태준의 소설은 맨 마지막 문장에서 그 미문(美文)의 진수를볼수 있다.
달밤은 그에게도 유감한 듯하였다.(「달밤」) 밤 강물은 시체와 같이 차고 고요하다. (「패강랭」) - P68
이태준의 문학세계를 말할 때면 으레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대립해김기림·정지용·박태원·이상 등과 순수예술을 추구한 ‘구인회(九人會)‘ 의 핵심 멤버였다가, 8·15해방이 되자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 즉 카프와 함께하는 조선문학가동맹의 부위원장을 맡은 것을 두고 뜻밖의 사상의 전환처럼 회자되곤한다. 그러나 이태준의 지향은 ‘예술을 위한 예술‘의 순수문학이 아니라, 문 - P68
학을 사회변혁의 ‘도구‘로 보는 경향이 강한 카프 방식에 반대하면서도민중적 삶의 운명을 ‘진짜‘ 문학으로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시대 상황이 돌변하면서 이를 적극 실현할 의지를 굳혔을 뿐이다. 최원식 교수의 표현대로 ‘평지돌출‘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당시 이태준의 마음과 결심은 무엇보다도 「해방전후에 명확히 드러나있다. 그러나 이태준이 1946년 여름 벽초(初) 홍명희(洪)와 월북한 것은 그의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실족이었다. 그의 문학이 망가진 것은말할 것도 없고 인생 자체가 비극으로 끝나고 마는 안타까운 선택이었다. - P69
나는 이태준의 「만주기행」에서 특별히 크게 감동받은 대목이 있다. 이는 순전히 나의 답사 취향 때문에 눈에 띤것이다. 이태준은 기차가마침내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넘어 단둥을 지나자 불현듯 생각나는 것이있었다고 한다.
차는 다시 떠난다. 객은 모두 다시 눕는다. 이곳을 누워서 지나거니!‘ 깨달으니 문득 나의 머리엔 성삼문의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세종께서 지금 내가 쓰는 이 한글을 만드실 때 삼문을 시켜 명(明)의한림학사 황찬(黃, 음운학자)에게 음운을 물으러 다니게 하였는데 황학사의 요동적소(所)에를 범왕반십삼도운(凡往返十三度云)으로 전하는 것이다.… (그것도 걸어서) 1. 2 왕반도 아니요 범 13도라 하였으니성삼문의 봉사도 끔직한 것이려니와 세종의 그 억세신 경륜에는 오직 머리가 숙여질 뿐이다. - P71
이따금 나는 문장 수업은 어디에서 받았으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아이디어를 어디에서 얻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럴 때면 특별히수업받은 것은 없고 있다면 『문장강화(文章講話)』에서는 아름다운 문체가 무엇인지를 배웠고, 「만주기행」에서는 기행(답사)이란 목적지 못지않게 그곳까지 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상념도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고대답한다. - P71
이태준의 수연산방에서 나와 대로변으로 들어서면 바로 인곡(배정국(裵正國)의 ‘승설암(勝雪庵)‘이 나온다. 생몰년 미상의, 우리에게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 배정국은 해방공간에서 백양당(白楊堂)이라는출판사를 경영한 출판인으로 그 자신이 서예가이고 고미술 애호가였다. 승설암은 3칸 팔작지붕에 얇은 눈썹지붕의 문간이 붙어 있는 아담한한옥으로 현재는 ‘국화정원‘이라는 게장백반집이 되어 있다. 본래 이집은 건물보다도 현재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정원이 일품이었다고 하는데 마침 서예가로 문인화에도 능했던 소전 손재형이 그린 <승설암도>가 있어 옛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감나무를 중앙에 두고 기역자로 돌아간 기와돌담의 모서리에 괴석 - P72
이하나 놓여 있다. 그림에 어려 있는 조용한 문기(文氣)가 그 옛날이집 정원의 아취를 말해주는데 그림 상단에는 이 그림의 내력을 알려주는 화제(畵題)가 쓰여 있다.
을유년(1945년) 청명(淸明, 양력 4월 5일 무렵 날에 승설암의 한정한적한 정원)에 놀러갔는데 상허 이태준 인형(仁兄)께서 나에게 이 즉경도(圖)를 그리라 하여 이로써 한때의 성대한 모임을 기록한다. 함께 모인 사람은 토선(禪), 인곡(仁谷), 모암(慕菴), 심원(園), 수화(樹話), 소전(素 )이다.
토선은 미술 애호가 함석태이고, 인곡은 승설암 주인 배정국이고, 모암은 누군지 미상이지만, 심원은 한국화가 조중현이고, 수화는 그 유명 - P73
한 화가 김환기이며, 소전은 손재형 자신이다. 그림을 보면 어딘지 추사김정희의 〈세한도〉 풍이 느껴진다. 실제로 여기 모인 분들은 모두 추사의 ‘광팬‘이다. 이 집 당호인 숭설암은 추사의 여러 아호 중 하나인 승설에서 따온 것이다. - P74
「근원 김용준 전집」에 부쳐근원 김용준을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그의 담박한 예술을 떠올리며흐뭇한 마음이 일어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불우한 말년이 떠올라 가슴이 아려온다. 20년 전 열화당에서 『근원 김용준 전집(전5권, 2007년에 전6권으로 구성된 증보판 출간)이 출간되었을 때 나는 기꺼이 『동아일보』(2002. 11.6)에 다음과 같은 서평을 기고했다.
누군가 했어도 벌써 했어야만 했던 일이다. 근원 김용준 전집(전5권)은 한 사람의 화가, 미술평론가, 미술사가 그리고 당대의 문장가로서 그가 이 세상에 남긴 자취이자, 불행했던 민족사의 아픔과 그 아픔을 넘어서려는 의지가 서려 있는 한 지성의 증언이다. 1988년, 이른바 월북문인들의 저작이 해금되면서 그의 아름다운수필집 『근원수필』이 복간되고, 또 환기미술관에서 ‘수화와 근원‘이라는 이름 아래 그의 작품들이 전시되면서 우리에게 서서히 다가오던 근원이 이제 전인적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 P82
근원 김용준은 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돌아온 우리 근대미술 초기의 화가였다. 그러나 그의 미술활동은 화가보다도 이론가로서의 역할이 더 두드러졌다. 1930년대, 근원은 이제 막 서양화에 눈뜬 우리 화단에서 이른바 모더니즘의 기수로 당시로서는 아방가르드라고 할 정도의 비평활동을 벌였고 민족적 서정을 ‘황토색‘이라는 이름으로 담고자 할 때 그것이 소재주의에 머물지 않고 한 단계 높은 예술로 승화할 수 있는 길을 명석하게 외치고 나섰다. 이때가 아마도 미술평론가로서 근원의 전성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1940년에 들어서면 근원은 『문장』 동인으로서 주옥 같은 수필을 - P82
기고하고 또 이 잡지의 표지 장정을 맡아 지금 보아도 고아(古雅)한북디자인 작업을 해냈다. 당시 김기림, 정지용, 이태준 같은 문사들이아름다운 수필을 많이 발표한 것은 한국 현대문학사의 뚜렷한 자취인데 특히 근원의 수필은 문인화가적 편모와 모더니스트다운 세련미를 유감없이 발휘한 뛰어난 문체로 그가 화가인지 문장가인지 알 수없게 했다. 근원은 미술사에도 조예가 깊고 높은 안목을 갖고 있었다. 8·15광복이 되자 서울미대 교수로 ‘조선미술대요(朝鮮美術大要)』를 저술한것은 단순히 한국미술사 교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한국미에 대한자신의 미학을 집약적으로 기술한 것이었다. - P83
월북 후 근원은 고구려 벽화무덤인 안악3호분 발굴에 동참하며 미술사가로 활동하여 그의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1958)는 북한 과학원이 펴낸 ‘예술사 연구총서‘ 제1집으로 출간될 정도였다. 또 근원은 <승무> 같은 명작을 발표하면서 화가로서도 붓을 놓지않았다. 그러나 1960년대 북한에서 이른바 ‘조선화 논쟁‘이 일어나자근원은 ‘김일성 교시‘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조선화라는 것이 작가적개성과 문인화의 정신을 손상시킬 것이라는 주장을 펴다가 사실상숙청되고 만다. 근원 김용준 연보에 의하면 196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양미술대학 예술학 부교수였던 것으로 되어 있지만 김정일의 전처인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이 쓴 『등나무집』을 보면 근원은 김일성 사진이 실린 신문을 마구 버린 죄로 보위국에 끌려갈 것을 예감하고는 자살로생을 마감한 것으로 되어 있다. - P84
암울했던 식민지시대에 태어나 화가와 미술평론가 그리고 문장가로 빛나는 지성과 재주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열심히 살아갔던 근원김용준, 자신의 소신과 기대를 안고 월북하여 학문적 · 예술적 최선을다하지만 끝내는 세상으로부터 배척받은 그의 인생편력이 이렇게 전집 5권에 들어 있는 것이다. 남에서는 월북했다는 이유로, 북에서는 당의 방향에 반대했다는이유로 남과 북 모두에서 금기시했던 그의 저작들이 이제 아름다운장정에 어엿한 전집으로 출간됐다는 사실에서 나는 세월의 고마움과함께 쓸쓸함을 느낀다. - P84
재의 그림을 그렸을 뿐 본격적인 작품을 제작하지 않았다. 『문장』의 수많은 표지화와 이태준의 『무서록(無序錄)』같은 표지화들이 오히려 그가 뛰어난 문인화가였음을 보여준다. 그 점에서 북한에 가서 그린 <승무가 화가로서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 중 근원이 벽초 홍명희 선생 회갑에 바친 <홍명희 선생과 김용준〉(1948, 밀알미술관 소장)은 그가 인물화에 얼마나 뛰어난 기량을 갖고 있었는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명화다. 벽초 선생의 어른스러운 모습과서재의 분위기를 잡아낸 것도 그렇지만 공손히 절을 올리는 자신을 그린 것이 일품이다. 그림 오른편의 화제 또한 얼마나 단아한 글씨인가. 이그림을 보면서 근원이 왜 이런 작품을 많이 그리지 않았는지 한편으론원망스럽기까지 했다. - P88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내가 생각건대 근원은 자신이 살던 시대에 그림을 그릴 기분이 나지않아 편안한 문인화만 그린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창작 의욕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존경하는 벽초 홍명희 선생의 회갑 기념화는잘 그려 바쳐야겠다는 충심이 일어나 이런 명작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그 대신 근원은 수필에서 문장가로서 높은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의근원수필』은 편편이 다 주옥같다. 김용준, 이태준 등 ‘문장‘들은 수필에 대하여 명확한 장르의식이 있었다. 그래서 1941년 『문장』 3권 1호의편집후기인 「여묵(餘墨)」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이번 호부터 종래의 ‘수필(隨筆)‘을 ‘수제(隨題)‘라 고치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실려왔던 수필이 ‘에세이 문학‘의 진수와 얼마간 거리가있는 것을 깨달은 때문이다. 이것을 계기로 『문장』이 새로 ‘수제‘와 ‘에세이‘의 장르를 각각 구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 P88
이들이 생각한 수필과 수제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둘 다 붓 가는대로 편안히 써내려간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수필에는 모름지기 인생이들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싶다. 같은 일상사의 이야기라도 그 속에서 은근히, 또는 알레고리로 인생의 참맛을 느낄 수 있을 때수필의 진가가 나온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근원 김용준의 「노시산방기」는 수필문학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지금 내가 거하는 집을 노시산방이라 한 것은 삼사 년 전에 이군(이태준)이 지어준 이름이다. 마당 앞에 한 칠팔십 년은 묵은 성싶은 늙은감나무 이삼 주(株)가 서 있는데, 늦은 봄이 되면 뾰족뾰족 잎이 돋고, 여름이면 퍼렇다 못해 거의 시꺼떻게 온 집안에 그늘을 지워주고 하는 것이, 이 집에 사는 주인, 나로 하여금 얼마나 마음을 위로하여주 - P89
는지, 지금에 와서는 마치 감나무가 주인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요 주인이 감나무를 위해 사는 것쯤 된지라, 이군이 일러 노시사(老舍)라명명해준 것을 별로 삭여볼 여지도 없이 그대로 행세를 하고 만 것이다. (…)원래 나는 노경(老境)이란 경지를 퍽 좋아한다. (・・・) 수법이 원숙해진 분들이 흔히 노(老)자를 붙여서, 가령 노석도인(道人)이라 한다든지 자하노인(紫霞老人)이라 하는 것을 볼 때는 진실로 무엇으로써도 비유하기 어려운 유장하고 함축있는 맛을 느끼게 된다. 노인이 자칭 왈 노(老)라 하는 데는 조금도 어색해 보이거나 과장해 보이는 법이 없고, 오히려 겸양하고 넉넉한 맛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아무튼나는 내 변변치 않은 이 모옥(茅屋)을 노시산방이라 불러오는 만큼 뜰앞에 선 몇 그루의 감나무는 내 어느 친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나무들이다. - P90
특히 신인 추천제를 두어 소설은 이태준, 시는 정지용, 시조는 이병기가 맡아 시에서 박두진·박목월·조지훈 등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킨 것은너무도 유명한 사실이고, 소설에서는 임옥인·지하련, 시조에서는 김상옥·이호우 등을 배출했다. 또 국어국문학 논문으로는 이희승의 「조선문학연구초(朝鮮文學硏究송석하의 봉산가면극각본(鳳山假面劇本)」, 조윤제의 조선소설사개요(朝鮮小說史槪要)」와 「설화문학고(說話文學考)」, 손진태의 격(巫)의 신가(神歌)」, 양주동의 뇌가석주서설(詞腦歌釋注序說)」, 최현배의 「한글의 비교 연구」와 「춘향전집」, 이병기의 「조선어문학명저해제」 등이 실렸다. 이태준의 그 유명한 『문장강화』 창간호부터 총 9회에 걸쳐 연재한 것이다. - P94
실상이 이러하니 문장 전26호는 우리 근대문학과 국학의 보석이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이 점을 생각할 때 수연산방 별채의 북카페 이름은 ‘구인회‘보다 ‘문장‘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문장』 전26호는 1981년에 영인본이 나왔다. 나는 이를 구입해 이날이때까지 심심하면 한 권씩 꺼내 소설과 수필, 평론을 읽곤 한다. 그런중 각 권의 맨 마지막 면의 편집후기인 여묵」을 보면 매번 책을 펴낼 때마다의 어려움과 보람이 생생하게 실려 있다. - P95
또 근원은 노시산방을 떠난 지 3년째 되던 1947년 봄 수향산방에 들렀다. 그날은 마침 부처님오신날이었는데 수화가 부처님 자세로 앉아있는 것을 보고는 <수화 소노인(老人) 가부좌상>을 그렸다. 당시 불과34세이었던 수화에게서 ‘애늙은이‘ 같은 듬직함을 느꼈던 것이다. 이그림에는 근원의 수화에 대한 미더움과 애틋한 애정이 그렇게 담겨 있다. 수화가 이렇게 근원의 사랑을 받은 것은 그의 인생과 예술의 큰 복이었다. - P100
수화가 『문장』의 문인들과 교류한 것은 그가 우리 근현대미술의 최고가는 거장으로 성장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수화 예술의 모더니즘은 그가 미술대 학생 때부터 추구하던 생래적인 것이었지만 거기에 서려 있는 문학적 서정성은 『문장』 문인들과의 교감에서 나온 것이다. 수화의표지 그림과 장정 들은 ‘문학이 미술을 만났을 때 얻어내는 시너지 효과에 그치지지 않고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나오는 서정적이면서도이지적인 예술세계로 나아가게 했다. 수화가 근원에게서 받은 또 하나의 큰 감화는 우리 고미술의 아름다움에 대한 안목과 사랑이었다. 근원을 비롯한 ‘호고일당들의 상고 취미는 단순한 골동 취미를 넘어 우리 민족혼이 살아 있는 한국미의 발견이었다. 수화는 특히 조선시대 백자항아리에서 서구미술과 미학에서 볼수 없는 새로운 조형세계를 발견했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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