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명한 산책 문학과지성 시인선 281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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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황인숙

 

 

        

 

봄이 오는 날

오랜만에 자전거를 끌고 나선다

자전거보다 다리가 먼저 끼익~ 끽

무겁다 무겁다 비명이다

찬 바람 기름 칠

수줍어 숨어든 모퉁이 나무에

흐린 저녁이 오고 있다

흐르지 못하는 물빛이 출렁

겨울이 깊다

강가에 서고 싶다

바람이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갈

내 서늘한 강가

드들

 

흘러가서 흘러가서

말하지 않는 것들의 교감

시린 계절이 마른 잎 적시고 흘러간다

뚝 길을 걸어 봄 오겠지

소년처럼 맑은 웃음 씨익~

삐이걱~ 삐이걱~

기우뚱

생명 하나 겨울 들판에 두고 간다

 

 

그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고

글쎄,

그러지 뭐

오래 강물이나 들여다보자

바람에 몸 뒤척이는 소리

가만 가만 내려놓는 강물

흘러서 흘러서 따라가보자

드들

드들

자전거로 간다

봄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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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68
정윤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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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정윤천



먼 곳에 두고 왔어도 사랑이다.

눈앞에 당장 보이지 않아도 사랑이다.


어느 길 내내, 제 혼자서 부르며 왔던 그 노래가

온전히 한 사람의 귓전에 가 닿기를 바랐다면

무척은 쓸쓸했을지도 모를 외로운 열망 같은 기원이 사랑이다.


고개를 돌려, 눈길이 머물렀던 그 지점이 사랑이다.

빈 바닷가 곁을 지나치다가 난데없이 파도가 일었거든 사랑이다.


높다란 물너울의 중심 쪽으로 제 눈길의 초점이 맺혔거든...

이 세상을 달려온 모든 시간의 결정만 같은 한 순간이여

이런, 이런, 그렇게는 꼼짝없이 사랑이다.


오래전에 비롯되었을 시작의 도착이 바로 사랑이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휩쓸려, 손가락 빗질인양 쓸어 올려 보다가

목을 꺽고 정지한 아득한 바라봄이 사랑이다.


사랑에는 한사코 긴한 냄새가 배어 있어서,

구름엔 듯 실려 오는 향취만으로도 사랑이다.


제 몸이 꿰어 있어서 갈수가 없어도 사랑이다.

魂인들 그 쪽으로 향하는 그 아픔이 사랑이다.

등 너머에 있어도 사랑이다.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이 시는 지난 1월 3일 지독한 몸살로 앓고 계시던 정윤천 시인님이 직접 읊어주셨다.

아프면서도 시를 읽어 주시던 그분의 음성이 또렷이 기억된다.

변변한 인사도 못 드리고 떠나와서 여태 인사...또

쑥스러워 못 드렸다.

시를 가져오느라 시인님의 카페 '동백아저씨'에 가입하고

인사도 없이 몰래 훔쳐들고 와버렸다.

이 지면을 빌어 인사를 드린다.

넙죽~~ 

감사함으로 시를 열심히 읽겠노라고...^^*

이 말만으로도 용서하실 거다.

"이젠 건강 괜찮으신지요. 괴롭혀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시집이며, 훔쳐 주신 cd^^  정말 고맙습니다."

또 기어이 그곳으로 보내 준 손세실리아 시인님께도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그 분 아니었다면 시인님이 그토록 불편하신 몸으로 우릴 환대했을까 싶고

이 변변찮은 주변머리로는 도저히 찾아뵙지 못했을 테니...^^

"세실리아님 참 많이 고맙습니다."

우리를 편하게 해주셨던 유종화 시인님께도 인사를 드린다.

"다음엔 노래 꼭 들려주세요.^^  고맙습니다."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이 시를 읽으면 슬몃 웃음 지을 얼굴도 있고

마음이 싸아~ 아파 할 얼굴도 있고

여기서는 영 읽지 못할 얼굴도 있다.

난 

어떤가하면

떠나보낸 빈 자리가 너무 커서 먹먹하다.

그립다.

하여,

듣는 순간부터 좋아해 

시집 뒷면에 옮겨 달라던

이 시를

다시 옮겨본다.

병실로 보내는 꽃바구니에도

"멀리 있어도 사랑"

이라고 적었던 그 사람이 그립다.

 

 

환한 웃음이

통통 튀던 맑은 웃음소리가

광기 같은 열정이

속사포 같이 쏟아지던 질문이

모르는 말이 나오면 나를 향해 자동인형처럼 돌리던 고개

설명하는 나를 빤히 쳐다보던 눈길이

그립다. 



그 많은 말들과

잘 쓰던 말 몇 가지

"절대" "習" "行" "下心" "부탁합니다." "같이 가자."

"고맙습니다." "나 좀 봐 봐요." "금강경" "명현 현상" "여여하다."

"국민이 미쳐 발광할 때^^" "뿌리털^^" "집중^^"

"그러시든지 마시든지...^^" "술 마시면서 얘기해 줄께.^^"

말할 때의 제스츄어

그립다. 

 

 

걸음걸이

절 하던 모습

정근할 때 모습

찻잔을 술잔처럼 내려놓던 모습

밥 먹을 때마다 하던 잔소리

따뜻한 성품과

기대어 울던 눈물도

익숙해진 전화번호와 전화

언제나'산숙이니?'로 시작하던 목소리

그립다. 

 

 

같이 나눈 술잔들

그 속에 담겨졌던 미래를 향한 밑그림

황당할 만큼 무모하고 입을 다물게 만드는 치밀함

틈틈이 농담처럼 진지하게 하던 말들

끝까지 남겨 두고 간 절절한 마음들

그리고

자주 내게 하던 말

단 한마디

"* *"

피할 수 없는 족쇄처럼 감겨온다.

그리웁다. 

(우쒸~

그 말까지도 그립다.

흠냐~!

이기 모냐?

둘이 사귀었냐?

???

우쒸~ 쒸~)

그새 정이...

참 많이 든 모양이다.



어쩐지

바쁜 중에도 많이 아플 것만 같다.

지치고

외롭고

힘들어서

또 그리워서

아플까? 걱정이다.

으이그~~~

내 걱정은 그냥 걱정일 것이다.

진정한 프로는 일을 앞두고 아프지도 못할 것이다.

아니,

간절한 바람이다.

아프지 말기를

잘 견디어 가기를

바란다.

 


 

보고 싶다.

보. 고. 싶. 다.

 

 

그래도, 그래도

약속한대로

우리, 아프지 않기다.

절대루...^^ 


그리고 우리도 헤헤~

제 몸이 꿰어 있어서 갈 수가 없어도 사랑이다.

魂인들 그 쪽으로 향하는 그 아픔이 사랑이다.

등 너머에 있어도 사랑이다.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2005. 1. 27.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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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의 적들
이인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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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그를 가르쳤구나 싶었습니다.”



가슴에 든 찬 바람이 종일 헤집고 다닙니다.

머리가 뻐근하게 아픕니다.

누워서

턱~ 가슴에 안겨주던 손길이 생각나는 책을 폅니다.

바람 속에서 이름을 묻던 작가가 쓴

제 이름 세 글자를 가만히 바라봅니다.

그리고 세 시간

모든 것은 정지되고 그 안에 머물렀습니다.

어느 순간,

안경이 뿌옇게 흐려졌습니다.

저 문장을 만나던 순간부터는 휴지가 필요했습니다.

책을 덮고

머리가 더 아픕니다.

가슴이 벅찹니다.

참 오랜만에 책을 가슴에 안고

가만히 있어봅니다.

책을 건네준 따뜻한 손길과

이름을 적듯 글을 썼을 작가 이인휘님

고맙습니다.

살아있음이 벅찹니다.

가슴에 화인으로 박히는


“내 생의 적들”


삶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의 소중함을 보듬어 안습니다.

"무거울수록 가볍게" 그 말씀의 의미를 이제 비로소 알겠습니다.

고. 맙. 습. 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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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역에서 창비시선 40
곽재구 지음 / 창비 / 198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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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차는 정해진 길로 보성, 능주, 화순....... 이름만으로도 정겨운 지명들을 지나가고 창에 묻은 이마에서는 점점 해가 거두어집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남평역입니다. 곽재구의 시‘사평역에서’의 그곳, 임철우의 소설 ‘사평역’의 그곳이면서도 동시에 그 어느 곳도 아닌 그냥 남평역. 이 곳을 꼭 지나보고 싶었습니다. 가까워질수록 울렁울렁 멀미가 날 것 같은 기분입니다.

 그래요, 남평이 제 고향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제 역사가 남아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여기를 한번인가 두 번, 지나쳐갔을 뿐입니다. 남평에서 역은 멀리 있습니다. 우리들 중 아무도 여기에 와서 막차를 기다리거나 막차를 타보지는 않았습니다. 언제나 막차를 기다리고 타면서 살아왔어도, 여기에 역이 있는지를 아는 사람도 이제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가깝고도 먼 곳입니다.

 사진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뾰족한 양철지붕의 낡은 역사, 두런두런 서있는 나무들, 잘 가꾼 화초들 사이로 배롱나무 꽃이 핀 예쁜 간이역입니다. 아무도 기차를 기다리지 않고 내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남평역’ 이라는 지명이 벗겨져가는 나무 팻말과 근처의 나직한 산들을 눈에 담습니다. 어디쯤 만삭의 한 여인이 볕바른 봄날, 몸을 풀었던 산이 있을 것입니다. 오후 한시 남평역에 도착하는 기차의 기적소리가 그 여인의 아이에게 시간을 주었다는데 지금의 기차는 조용히 역을 떠납니다. 이제는 누구도 기적소리로 시간을 가늠하지 않습니다. 그 아이는 자신을 낳던 여인의 나이를 훌쩍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여기를 지나갑니다.  속은 여전히 울렁울렁합니다. 여인과 아이를 연결한 탯줄이 산자락 어디선가 부르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립니다.

 뜨거운 이마를 차창에 얹자 지나버린 풍경을 감추듯 9월의 저녁이 살포시 내려와 있습니다. 

 

내면 깊숙히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곽재구의 [사평역 에서] 중에서---


 

 소리는 멀어집니다. 사평역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남평역은 사라져도 사평역은 언제까지나 남아있을 것입니다. 여인과 아이의 끈, 탯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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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점 세계사 시인선 128
배한봉 지음 / 세계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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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을 듣다  

                       배한봉


 

햇살이 산길을 넘어오는 아침

탈골하는 억새들, 음성이 청량하다

살과 피 다 버리고 뼈 속까지

텅 비운 한 생애의 여백

여백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연 담고 있는 것이냐

면도날 같은 잎으로 여름

베어 눕히며 언덕 점령하던 때 지나

흰 꽃 속에 허파에 든 바람 실어

허허허허거리던 시절,

간과 쓸개 빼놓던 굽이를 돌아

비로소 세상에 풀어놓는 넉넉한 정신

바람 찬 산을 넘어온 아침이

내 얼굴을 만진다, 이제 겨우 마흔 몇

넘어야할 고개, 보내야할 계절이

돌아오고 또 돌아와서 숨가쁜 나이

산에 올라 억새들 뼈 속에서 울려나오는

깊고 맑은 공명을 듣는다

내 심중에서도 조금씩 여백이 보이고

누가 마음놓고 들어와 앉아

불어도 좋을 젓대 하나

가슴뼈 어딘가에 만들어지고 있었다

 

                          시집 [악기점]에서 

 



 

 

바람이 차다.

호박잎 기침하며 돌아 눕는다.

가을이

깊어간다.

 

그리운 우포늪.......

억새.......

저 홀로 살과 뼈 버리고 있겠지.

바람 찬 세상을 넘어 온

마흔 몇

겨우 마흔 몇.

 

비우고

비우고....... 

아름답게 꽉 채운 여백.

억새 흔들린다.

공명을 듣는다.

버리고

버리고........

마침내 채워라.

늙은 호박이 지붕에서 내려다본다.

툭,

감이 떨어진다.

 

 

가을,

깊어간다.

너는

어디쯤 가고있느냐.

마흔 몇

겨우 마흔 몇.

넘어가고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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