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을 만나던 날부터 생각이 날 듯, 날 듯했다. 목련에 대해 연정을 품게 만든 구절을 만난 적이 있는데 뭐였지? 뭐였지? 그렇게 박완서 선생님을 다시 만난다. 마침 묵혀두고 있는 기나긴 하루도 있겠다. 그래, 이 아픈 사월, 박완서 선생님과 함께하자고 마음먹었다. 당신이 떠난 지 십 년, 멀리 두고 있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기나긴 하루,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 친절한 복희씨까지 읽었다. 분명 다 읽은 책들을 다시 읽는 것인데, 처음 읽는 새로움을 만난다. 특히 친절한 복희씨속 작품들은 완전히 처음 읽는 것처럼 새롭고 놀라웠다. 어떻게 10년을 멀리하고 있었던 건지 스스로에게 화가 날 지경이다.

   그리고 오늘 4월 16일. 벌써 7주기다.

   여전히 진상 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퇴근길에 걸으면서 생각했다. 그래도 선생님, 이 꼴은 안 보셔서 다행이라고. 그날 아침 뒤집힌 배를 보셨더라면 '천 불은 불도 아니라는'라는 것을, 다시 전쟁을 겪은 것처럼 참혹하셨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라고.

   우리 세 몸뚱이 추위를 가리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해서 온전한 마을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특히 국도 연변 마을의 파괴상은 참담했다. 꽤 큰 마을이 장독만 남겨 놓고 잿더미만 남은 데도 있었다. 초가집이 불타, 가볍고 고운 잿더미로 폭삭 내려앉은 집터를 지키고 있는 장독대의 아름다움은 너무 천연덕스럽고 기품이 있어서 혼령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 마을의 고요는 묘지의 그것처럼 유구해 보였다. 평화로운 농촌을 이렇게 철저하게 파괴한 게 미군의 폭격이든 인민군의 방화이든 잊거나 용서한다면 인간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평화의 이름으로도 용서할 수 없는 이런 정당한 분노가 바로 인간다움일진대 어찌 이 땅의 평화를 바라겠는가 싶은 것도 우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기저귀를 구들장에 말리는 것보다는 밖에다 내 너는 게 훨씬 더 잘 마르게 생긴 햇살이 도타운 날이었다. 모조리 불탄 마을에서 좀 떨어진 외딴 집에서 무료한 낮 시간을 보내다가 그 마을에 감도는 고요에 홀려서 그 고운 잿더미 사이를 거닐 때였다. 장독대 옆에 서있는 바짝 마른 나뭇가지에서 꽃망울이 부푸는 것을 보았다. 목련나무였다. 아직은 단단한 겉껍질이 부드러워 보일 정도의 변화였지만 이 나무가 봄기운만 느꼈다 하면 얼마나 걷잡을 수없이 부풀어 오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미친 듯한 개화를 보지 않으면서도 본 듯하면서 나도 모르게 어머, 얘가 미쳤나 봐, 하는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실은 나무를 의인화한 게 아니라 내가 나무가 된 거였다. 내가 나무가 되어 긴긴 겨울잠에서 눈뜨면서 눈뜨면서 바라본, 너무나 참혹한 인간이 저지를 미친 짓에 대한 경악의 소리였다. p98,99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그해 5월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그때는 지금처럼 시도 때도 없이 아무 꽃이나 피어나는 시대가 아니었다. 오직 5월만이 잎도 꽃처럼 피어날 때였고, 라일락과 모란과 장미와 등꽃의 계절이었다. 교정에 꽃내음이 그득했고, 벌들이 윙윙댔다. p258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1950년 5월이다. 다가올 불행을 알고 읽는 화사함은 전혀 화사하지 않다. 아니, 라일락과 모란과 장미와 등꽃의 화사함이 불행을 더욱 극대화하는 장치가 된다. 지금은 오월이 되기도 전에 라일락이 지는 고온의 시절에 살고 있지만, 1950년 5월은 6월의 무게에 눌려 없는 시절인 줄 알았다. 2014년 4월 이후 도 없는 시절이다. 수돗가에 앉아서 재재거리며 상추를 씻다가 그 소식을 들었던 날로부터 7년, "숨 쉴 때마다 가슴 한쪽이 시리고 찔리고 아리고 결국은 찢어질" 가족들은 어떨지 나로선 상상조차 안 된다.

   해가 더디 지는 봄날이었다. 밤 벚꽃 놀이는 중단된 채였지만, 전차가 창경원 앞을 지날 때는 모두 그쪽으로 시선을 돌릴 정도로 무르익은 화사함이 고궁 담을 넘쳐 전차 속까지 투영되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나도 석간신문을 보다 말고,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비틀어 미친 듯이 만개한 벚꽃을 내다보았다. 왜 만개한 꽃만 보면 미쳤단 느낌이 드는지 몰랐다. 밤도 아닌 낮도 아닌 시간의 벚꽃이 풍기는 밝음은 화사하다기보다는 숨을 틀어막을 듯이 요기로워서 그런지도 몰랐다. p318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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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첼 카슨은 어려서부터 글을 쓰고 싶어 했다. 그녀에게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생명이었다. 레이첼은 열아홉 살 때 실험실 동료에게 이런 말을 했다. "생물학을 공부하면서 쓸 거리가 생겼어." 생명은 그녀에게 단어를 줬다. 그녀만의 목소리를 줬다. 그녀는 과학을 시처럼 쓸 줄 알았고 그녀의 글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어떤 부분에서인가는 숨을 죽였다. 글을 읽는 동안 아름다움의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녀의 글에는 마치 죽은 뒤 하늘로 높이높이 떠오르는 인어공주의 영혼을 닮은 수정 같은 아름다움이 있다.

  레이첼 카슨의 사적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53년에 일어났다. 레이첼은 오랫동안 비슷한 정신세계를 가진, 자신의 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진정한 친구를 만나길 고대했다. 1953년에 7월에 그 일이 일어났다. 『우리를 둘러싼 바다』로 성공을 거둔 카슨은 어머니와 함께 살 별장을 마련하게 된다. 그 별장에선 해변에 물개와 바다표범이 출몰하고 강어귀에서 고래가 뒹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창은 거대한 세계로 향하는 열린 문이었다. 레이첼은 별장으로 이사 오면서 도로시 프리먼과 스탠리 프리먼 부부를 만나게 된다. 프리먼 부부는 『우리를 둘러싼 바다』를 번갈아가면서 큰 목소리로 낭독할 정도로 좋아했고 레이첼이 이웃으로 온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레이첼과 프리먼 부부가 처음 만난 날, 초저녁의 햇살은 늦게까지 빛나고 달은 부지런히 썰물을 당겨 올렸다. 그날 그들은 여섯 시간을 함께 보냈을 뿐인데 헤어지자마자 두 번째 만남을 고대하게 되었다.

  레이첼과 도로시는 같은 것을 사랑했다. 자연, 바다, 고양이, 레이첼은 다시 만나면 도로시를 조수 웅덩이, 즉 썰물의 세계에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했다. 썰물 때 드러난 조수 웅덩이를 지켜보는 것은 레이첼이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그녀가 우정을 나누는 방식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세계로 사람들을 초대하곤 했다.

 

   ……(중략)

 

 

  수술 후 그녀는 방사선 치료로 인한 고열, 통증, 메스꺼움 때문에 누워 지내야만 했다. 생태계를 교란할 수 있는 살충제의 위험성을 강력하게 경고하는 글을 쓰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신체 세포의 생태를 교란할지도 모를 처치를 무리하게 시도하지 않으려는 신중함을 가진 의사"를 찾아야 했다. 방사선 치료는 종양은 작아지게 했지만 궤양은 악화시켰다. 이제 도로시와 레이첼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전에 도로시는 레이첼의 베개 밑에 레이첼에게 늘 위안을 주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적은 쪽지를 넣어두었다.

 

    모래 가루에서 세상을 보고

    야생화에서 하늘을 보네

    우리의 손바닥에서 영원을 보고

    한 시간 속에서 영원을 보네

  썰물 때 드러나는 작은 따개비와 조개껍질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생명 전체의 위대함을 배웠던 카슨을 이만큼 잘 설명할 수 있는 시도 드물 것이다.

  레이첼은 자신에게 죽음을 포함한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덜 집착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제부터 그녀의 삶은 죽음 일보 직전의 초연함과 지혜가 될 터였다. 그녀는 하기로 계획했던 일을 계속했다.

그녀는 매일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도 "아주 가끔씩 아픔을 모두 이기고 정신이 살아나 생각이라도 할 수 있게 되면" 책 생각을 했다. 이제 그 좋아하던 조수 웅덩이에 내려가는 일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 되었다. 책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녀를 공격한 것은 홍채염이었다. 홍채염은 그녀에게 책을 읽을 수도 빛을 견딜 수도 없는 끔찍한 통증을 안겨줬다. 대략 2주간은 실명 상태에 있었다.

  이 시련 끝에 1962년 1월, 마침내 레이첼은 『침묵의 봄』을 출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고양이 제피를 끌어안고 웅크리고 앉아 눈물을 터뜨렸다. 제피는 작지만 따뜻한 몸과 혀로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지난여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지 않고는 지빠귀의 노랫소리를 다시는 행복한 기분으로 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어젯밤 모든 새와 모든 생물과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스러운 것들에 대한 생각이 깊은 행복감과 함께 물밀듯이 찾아왔어요. 지금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으니까요. 나는 그 책을 완성할 수 있었어요. 그 책은 이제 자신만의 생명을 갖게 되었어요.

  그녀는 거의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해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만족감을 표현하는 서사가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무엇이 그녀에게 만족감을 줬나 찬찬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레이첼 카슨은 암의 위험을 경고하는 글을 쓰는 동안 정작 자신은 암을 앓게 되었다. 그런데도 "지금껏 어떤 것도 제가 포기하도록 심지어 포기할까 하고 한 번쯤 생각해 보도록 만들지는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백 번쯤 포기할까 생각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고 해도 인간적으로 감동할 마당에 말이다.

  첫 번째 이유는 양심일 것이다("해야 할 일이 뭔지 알면서도 손을 놓고 있다면 제게 미래의 평화는 없을 겁니다"). 그녀는 자신(자신의 양심)을 저버리는 일을 결코 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가 있다. 1957년 최초의 살충제 소송을 제기한 사람들은 워싱턴에 살면서 도움을 줄 누군가를 찾아달라고 청했다. 카슨은 그들에게 도움이 될 누군가를 찾는 과정에서 그 '누군가'가 바로 자신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누군가가 되어가는 과정이 『침묵의 봄』을 쓰는 과정이다. 『침묵의 봄』을 쓰는 일은 그녀의 거의 모든 시간과 전적인 헌신을 요구했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다' 혹은 '어떤 사람으로 보인다'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어간다'의 삶을 살았다.

    정혜윤의 [앞으로 올 사랑] 중에서 『그녀는 그녀 삶의 예언자가 되었다』 p85~96

 

    이 책을 읽다가 지난해 봄에 쓰다 말고 팽겨쳐둔 글이 생각났다.

 

    코로나의 시절에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읽고

  봄이다.

  봄이면 당연하다는 듯

    봄 편지

                    박남준

    밤새 더듬더듬 엎드려

    어쩌면 그렇게도 곱게 썼을까

    아장아장 걸어 나온

    아침 아기 이파리

    우표도 붙이지 않고

    나무들이 띄운

    연둣빛 봄 편지

​         시집[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중에서​

 

 

  나무들이 물이 오르는 것이 보이고 꽃봉오리들이 맺히는 것을 감탄하면서 들여다보는 시절인데 설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우리 곁에 실체를 드러낸 코로나 바이러스는 봄처럼 슬금슬금 다가오는가 싶더니 봄꽃처럼 폭발적으로 피어나 우리를 겨울 속으로 이끌었다. 이제쯤은 사라지겠지, 이젠 괜찮을 거야, 하는 조바심과 간절함들이 교차하는 동안 삼월이 와버렸고 마음도 몸도 여전히 추웠다. 그쯤에 펴든 책, 오랜 기간 책꽂이에 장식처럼 자리한 [침묵의 봄]이다. 언젠가 읽기는 해야 할 텐데 어렵지 싶어 미뤄두고 미뤄두었는데 얼마 전에 읽기를 마친 호프 자런의 [랩걸]의 재미가 그런 선입견을 버리게 했고 '이런 시절엔 이런 책이지' 했다.

이미 어떤 내용인지는 익히 알고 있었고 그동안의 독서 편력을 감안할 때 쉬운 접근은 아닐 거라는 생각으로 시작했으나 결과는 이렇다.

 

 

 

 

  읽는 동안 점점 몰입했고 무심한 행동, 무심한 일상들이 결국 우리의 일상을 얼마나 망치는 결과를 가져오는지 뼈아픈 자각이 왔다. 결국은 이 코로나의 시절, 즉 바이러스의 계절도 이미 예견된 [침묵의 봄]은 아닐까 하는 결론을 얻었다.

  나는 모기가 싫다. 아니 무섭다. 어려서부터 물것을 심하게 타는 내 종아리와 팔뚝은 여름 내내 성한 곳이 없었다. 모기가 물리면 성이 나서 부어오르고 가렵다가 급기야 상처를 남기고 그 흉터는 다음 해까지 이어지다가 사라질 즈음이면 다시 여름을 맞는 반복이니 이쯤 되면 모기와의 관계는 천적이다. 여름 필수품으로 벌레 물린 데니, 기피제 등은 가방 안에 항상 준비되어 있다. 혹여 들이나 산에 나서려면 큼직한 에어로졸 흔히 모기약이라고 불리는 스프레이는 필수다. 그렇게 살충제를 가까이하고 사는 내게 DDT로 시작하는 책의 내용은 반성과 충격의 연속이었다. 이 상황이 5~60년대라지만 지금, 바로 지금이라고 읽혀서 더욱 충격이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 멈춰있다.

   [앞으로 올 사랑]도, [침묵의 봄]도 마무리는 아니다. [침묵의 봄]을 이렇게 마무리 짓는 건 정혜윤의 글에서처럼 '어떤 사람이 되어간다'의 삶을 살아 간 레이첼 카슨에 대한 예우가 아니다. 어떻게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 책의 완결을 마칠 수 있었는지 절로 경외감과 존경심이 우러러 나오는 그녀가 보내 준 경고를 무시하면 나는 대표로 벌받을 것이다.

  그리고 '정혜윤'. 책으로 만날 때마다 거듭 찬탄한다. 내 전작 읽기의 도전은 그녀의 열정적인 독서와 쓰기 앞에서 읽는 것만도 따라잡기가 벅차다. 오죽하면 정혜윤 [퇴사는 여행]이라는 책도 저자의 이름만으로 사들였을까? '정혜윤 피디'가 기어이 cbs 라디오를 그만두고 여행자의 삶을 시작했나 보다고, 더 이상 살펴보지도 않고 덜컥 사들였으나 동명이인의 책이었다는 웃픈 일도 내게 일어나게 만든 그녀다. [앞으로 올 사랑]을 아직 다 읽지 않았지만 책 속에 담긴 자신의 작업의 긍지로 보아 그녀가 라디오를 그만 둘 일은 거의 없을 듯하다. '마술적 저널리즘'을 꿈꾸는 라디오 피디, 정혜윤의 [앞으로 올 사랑]은 지금이라는 시대에 보내는 희망적인 사랑 이야기가 가득하다.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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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마이카상

 

 

                    김태정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네가 낡아서가 아니야

싫증 나서는 더더욱 아니야

이십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해온

네가 이젠 무서워졌다

무서워졌다 나의 무표정까지도 거뜬히

읽어낼 줄 아는 네가,

반질반질 닮아버린 귀퉁이만큼 노련해진 네가.

너를 펼쳐놓는 순간부터

시를 쓸지 책을 읽을지

아니면 밥을 차려 먹을지

내 행동을 점칠 줄 아는 네가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네 앞에선 거짓말을 못한다는 것이 무서워졌다

이십년 전이나 이십년 후나

변함없이 궁핍한 끼니를 네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

불편해졌다

책상도 되고 밥상도 되는 네 앞에서

시도 되지 못하고 밥도 되지 못하는

나의 현재가 문득 초라해졌다

시가 밥을 속이는지

밥이 시를 속이는지

죽도 밥도 아닌 세월이 문득 쓸쓸해졌다

이 초라함이,

이 쓸쓸함이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발바닥이 되어버린 자존심

아무래도 이 시시한 자존심 때문에

너를 버려야 할까보다

그래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중에서

 

 

 

 

  

 

 

   

 

 

 

 

 

 

 

 

 

 

 

 

  호마이카상과 트렁크 하나를 들고 방에서 방으로 전전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재영 작가의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를 읽는 데, 결코 친애할 수 없었던 그 시절들이 생각난다. 집에서 올라올 때 옷가지 등을 담은 은색 트렁크를 가져왔다. 지금의 수하물용 캐리어보다 크고 바퀴도 없던 트렁크를 어떻게 끌고 다녔는지 기억이 없다. 비키니 옷장을 장만하기 전까지는 내 소유물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트렁크다. 그리고 맨 먼저 장만한 다리가 접히는 작은 호마이카상 한 개. 시인처럼 밥상도 되고 책상도 되어주었다. 손바닥만 한 트랜지스터라디오와 함께 호마이카상은 그 시절의 나를 지탱해 준 친구였다. 저 시를 처음 만났을 때, 김태정 시인이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졌다. 그의 다른 시들에서도 나는 동질감과 소속감으로 결속되었다. 시인의 지난한 생애와 살아온 시간들이 같다. 시인은 겸손하게 가난해서 맑은 이마를 가진 시인으로 남았고, 욕심의 곳간을 가진 나는 지금의 내가 된 것이다.

 

 

  지금의 원룸이나 독립된 공간인 방 하나가 아닌 한 가족의 오롯한 공간을 지나야 들어갈 수 있는 방들의 시절이다. 그것도 꽤 오래 전전했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끼익 소리가 나는 현관문을 열고 자연스럽게 발뒤꿈치를 들고 거실을 통과하면 호마이카상과 트렁크, 이불한 채가 전부인 내 방에 비로소 들어설 수 있었다. 운이 좋으면 차단 효과가 되는 나무 문이 나를 가려주기도 했지만 소위 식모방으로 불리던 주방 뒤쪽의 방일 때는 창호지 문의 미닫이 일 때가 많았다. 가족이 적은 집이거나 생활이 넉넉지 않은 가정은 방 한 칸을 포기하고 세입자를 들여 생활비를 충당하던 세입자나 주인이나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타인이 드나드는 불편함을 서로 감수해야 했으니 집주인이라고 마냥 당당하지만은 않았단 생각이 든다. 그 시절에는 미루어 짐작하지 못했던 상대방의 불편함도 이제서야 생각하게 된다. 집은 누구에게나 하루의 노곤함을 편안한 쉼으로 충전하는 공간이었으니. 그러나 자발적인 눈치 보기는 늦은 튀근 후 욕실을 사용하는 일은 최소한의 시간을 원했으며, 주방을 같이 사용하지 않으려면 끼니는 회사에서 먹는 한 끼나 두 끼가 전부였지만 휴일에는 이도 저도 불가능해서 종일토록 책을 읽거나 뒹굴뒹굴하다 집에 빈 기척을 살피며 삼양라면으로 대신하던 시절이었다. 도서관이나 공원조차도 흔하지 않던 시절, 아마 11개나 12개의 방을 거쳤으리라. 방마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기억의 퇴적층을 이루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중에 단연 최고는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그 동네일 것이다. 집장사가 지은 ​비슷한 집들이 가득한 신흥 주택가의 이층, 타원형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오던 예쁜 창을 가진 집에서 삼 개월인가 살았다. 그것도 동생이랑 둘이서. 부부만 거주한다기에 단출함이 서로 부담 없을 줄 알았던 생각은 이사 하루를 넘기기 전에 깨지고 말았다. 이사 기념으로 저녁에 새집의 환한 방에서 대패삼겹살을 구워 먹고 있는데 소란스러운 소리는 우리를 단번에 주눅 들게 만들었다. 집에서 둘이 같이 살던 시절, 우리는 저녁마다 술을 먹고 들어오는 장남의 패악질에 무방비로 놓였던 주눅의 세월이 있었다. 울면서 매달리고 잘못했다고 비는 엄마 때문에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던 무기력과 고난, 홧증과 속수무책의 절망을 우리는 서로 절대로 내색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잘못된 하루일 거라는 외면은 거기 사는 동안 날마다 이어지는 하루들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데려온 동생은 같은 직장에 입사했다. 둘 다 3교대 근무에다 다른 부서였기에 우리는 어쩌다 만났지만 만나도 말이 없는 하루들이 늘어만 갔다. 자매였지만 많이 다른 성향은 무언의 거리로 간극이 넓어졌고, 그 집 가까이 사는 부부의 어머니는 하루에도 몇 번씩 현관문을 열어 제켰고 문이 열리는 횟수만큼 부부의 싸움도 점점 극을 향해 달려갔다. 세간들은 붕붕 날아다녔고 그런 순간은 우리는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참아야 했고 최대한 방에 없는 것처럼 노력을 해야 했다. 결국 그 부부가 이혼을 결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깊은 부엌이 따로 있는 방을 구해 지옥을 벗어 날 수 있었다. 생의 구비에서 길지도 않을 시절을 지냈던 그 방, 지금도 가끔 얼굴 없는 그 부부가 소리만으로 싸우는 꿈을 꾼다. 그 꿈에는 어김없이 얼굴이 선명한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머리채를 잡고 있는 부분에서 가위에 눌려 숨을 죽이는 내가 있고 햇살이 찬란하게 쏟어져 들어오는 타원형 창문이 있다. 그때 우리는 그 창에 반해서 그 방을 계약했었다. 그 뽀얀 햇살이 가여운 엄마를 공동묘지에 묻고 온 우리의 설움을 뽀송뽀송하게 말려 줄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그 후론 단 한 번도 그때에 대해 우리 자매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그때 우리의 주식은 나온 지 얼마 안 된 통통한 너구리 라면이었는데, 문밖에 귀를 기울이고 조용한지 확인한 뒤 재빨리 끓여오던 너구리 라면과 호마이카상. 오늘 점심은 짜파구리로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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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빙판길

                       박성우

   한 여자가 빙판에 미끄러져

   뒤로 떨어졌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어쩌면 좋겠냐는 것이다

   얼음 위에서 버둥거리던 발은

   신발을 치켜들어 허공에

   가위걸음을 떼었을 것이고

   땅을 짚으려던 팔은 채 내려가기도 전에

   겨울하늘을 들어올리며 떨어졌을 것이다

   땅바닥에 바싹 붙어 있었을 미끈미끈한 빙판길은

   일자로 떨어지는 등허리를 우지직 받았을 것이다

   우지직, 금이 갔을 등허리뼈 사이로는

   차가운 공기가 집요하게 파고들었을 것이다

   정신을 놓친 머리는 얼음에 머리를 식히며

   가장 편안한 상태로 한참이나 쉬고 있었을 것이다

   찰나의 순간, 질끈 놀란 눈을 가려주었을 눈꺼풀은

   놀란 눈동자를 깜박깜박 닦아보았을 것이다

   소름끼치는 몸을 일으켜야겠다고

   가까스로 들어온 생각이 생각했을 때

   몸은 어거지를 피우며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소리를 질러도 소리가 나지 않았을 입은

   떨리는 입술을 벌려보았을 것이다

   아앗 하고 소리질러야 할 입 대신

   쿵 하고 소리를 질렀을 뒷머리,

   새소망병원 413호 침대 위에 뉘이고 있다

   일 안하면 안달날 수밖에 없는 늙은 여자

   금가고 벌어진 등허리뼈를 일으키려고

   칠순에 닿은 어머니가 까친 손을 내미신다

                               시집 [가뜬한 잠(창비2007)] 중에서

   쓸쓸한 접촉

     일 갔다가 편도 일차선 도로에서 사고가 났다 상대편 트럭 네 바퀴 모두 중앙선을 넘어와 내 차를 치고는 다시 중앙선을 넘어갔다 번뜩했다

     경찰차가 줄줄이 왔다 상대편 트럭 운전수는 내가 트럭을 치고는 다시 중앙선을 넘어갔다고 우겨댔다 아까부터 보고있던 옆자리 노스님이 운전수 얼굴에 침을 뱉으며 한마디 하신다 야 씨발 개새끼야

    상대편 보험회사에서 입원비도 내주고 차도 고쳐주고는 기십만원을 통장에 넣어주었다 마침, 뒷목과 어깨와 엉치뼈는 결린 안부를 전해오고 월급은 석 달째 깜깜무소식인 터이다 몸 푼 아내와 같이 맡겼던 갓난아이 찾으러 처갓집에 가야 할 터이다

     장모님 이거 안 받으시면 딸도 외손주딸도 안 데려가요, 암것도 알 리 없는 아내와 세이레 된 어린 것을 받아안고 처갓집 나선다 셋이서 살 비비면서 집으로 간다

                                   시집 [자두나무 정류장(창비2011) 중에서

     박성우시인을 읽고 있었다. 함께 있는 라디오가 온통 눈 소식이다. 제시간이면 당연하게 나올 목소리가 바뀌었다. 신년 휴가인가 생각할 찰나, 도로에 묶여서 꼼짝 못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함박눈은 펑펑 내리고 한파경보가 내렸다. 지금 길에 있을 이들 생각에 걱정들이 몽실몽실 피어오른다. 모두, 무탈했으면. 속 없이 눈 오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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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차
                        도종환

오늘도 막차처럼 돌아온다
희미한 불빛으로 발등을 밝히며 돌아온다
내 안에도 기울어진 등받이에 몸 기댄 채
지친 속도에 몸 맡긴 이와
달아올랐던 얼굴 차창에 식히며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는 이 하나
내 안에도 눈꺼풀은 한없이 허물어지는데
가끔씩 눈 들어 어두운 창밖을 응시하는
승객 몇이 함께 실려 돌아온다
오늘도 많이 덜컹거렸다
급제동을 걸어 충돌을 피한 골목도 있었고
아슬아슬하게 넘어온 시간도 있었다
그 하루치의 아슬아슬함 위로
초가을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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