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실린 글들은 자전적인 것들로서 서너 편을 빼면 모두 최근 한두 해 사이에 쓴 것들이다. 나는 최근 한 신문에...... 문득 고향 생각이 나서 무작정 찾아간 일이 있다.
산허리를 타고 올라와 고개로 사라지던 언덕길을 넘어가는 해를 등지고 거꾸로 걸었다. 길게 아스팔트 위로 뻗은그림자를 앞세우고 걸어가는 길가 숲에는 유난히 까치가많았다. 까치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잊었던 일들, 잊었던 얼굴들을 생각해냈다. 길이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기도 한다는 평범한사실에 생각이 미친 것도 그때였다. 이로부터 나는 일부러안으로 났다고 여겨지는 길을 찾아 걸었다. 잊었던 마을과마주치기도 했으며, 사라졌다고 여겨지던 감정이 찾아오기도 했다. 나는 어쩐지 그 안 제일 구석진 곳에서 늙고 초라한 나 자신의 모습과 마주칠 것 같아 두렵기도 했지만, 어

쩔 수 없는 일이었다라고 쓴 일이 있지만, 이것이 최근 내가 이런 글을 꽤 여러 편 쓴 이유에 대한 부분적인 변명은 될 것 같다. 나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자, 말하자면 이런생각이 이런 글을 쓰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문학이 자기 존재의 전방위적 확인이라고 할 때 시 외에이 산문들도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그 한 방법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히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가로 쓴 것들은 아니라는 뜻이다. 독자에게 즐거운 읽을 거리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분에 넘치는 욕심을 가져본다.


새 천년의 첫 정월에
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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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발이


늘 떠나면서 살았다.
집을 떠나고 마을을 떠나면서,
늘 잊으면서 살았다,
싸리꽃 하얀 언덕을 잊고
느티나무에 소복하던 별들을 잊으면서.
늘 찾으면서 살았다,
낯선 것에 신명을 내고
처음 보는 것에서 힘을 얻으면서,
진흙길 가시밭길 마구 밟으면서.


나의 신발은,


어느 때부턴가는
그리워하면서 살았다,
떠난 것을 그리워하고 잊은 것을 그리워하면서.
마침내 되찾아 나서면서 살았다.
두엄더미 퀴퀴한 냄새를 되찾아 나서면서

싸리문 흔들던 바람을 되찾아 나서면서.
그러는 사이 나의 신발은 너덜너덜 해지고
비바람과 흙먼지와 매연으로
누렇게 퇴색했지만.
나는 안다, 그것이
아직도 세상 사는 물리를 터득하지 못했다는 것을.
퀴퀴하게 썩은 냄새 속에서.


이제 나한테서도 완전히 버려져
폐기물 처리장 한구석에 나뒹굴고 있을 나의 신발이.
다른 사람들한테서 버려진 신발짝들에 뒤섞여
나와 함께 나뒹굴고 있을 나의 신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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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본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고목을 보며


그 많던 꿈이 다 상처가 되었을 게다
여름 겨울 없이 가지를 흔들던 세찬 바람도
밤이면 찾아와 온몸을 간질이던 자디잔 별들도
세월이 가면서 다 상처로 남았을 게다
뒤틀린 가지와 갈라진 몸통이
꽃보다도 또 열매보다도 더 향기롭고 아름다운 것은
그래서인데


내 몸의 상처들은
왜 이렇게 흉하고 추하기만 할까
잠시도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게 하던
감미로운 눈발이며
밤새 함께 새소리에 젖어 강가를 돌던
애달픈 달빛도 있었고
찬란한 꿈 또한 있었건만
내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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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클레의 <노란 새들이 있는 풍경>을 너무 오래 본다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 용기와 비겁함은 매 순간 행해지는 하나의게임이다. 우리는 어쩌면 자유를 얼핏 엿보는 숙명적인 시각을겁내는지도 모르겠다. 감옥 창살 사이로 쳐다봐야만 하는 습관, 차가운 철창을 양손으로 붙잡는 것이 주는 편안함. 비겁함은 우리를 죽인다. 감옥을 안전으로, 철창을 손이 쉴 곳으로 여기는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나는 자유인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나는 <풍경>을 다시 보고, 비겁함과 자유의 이야기임을 다시알아본다. 부르주아는 <노란 새들이 있는 풍경>을 볼 때 통째로무너진다. 내 자유가 전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두렵다. 나는 미친 사람들 중에 미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가능성은 보통의 부르주아 순응주의자들에겐 도저히 설명이 안 된다. 설명을 해줄라치면 그들은 단어에 발목이 붙들려용기를 잃고 자유를 잃을 것이다. <노란 새>는 우리에게 이해조차 요구하지 않는다.  - P355

자기비판은 너그러워야 한다. 너무 날카로우면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언젠가는 글을 쓰고 싶다. 어쨌든 내가글을 다시 쓴다면, 이전에 썼던 글과 다른 방식이 될 것이다. 뭐가 다르냐고? 그런 것에는 관심 없다.
나의 자기비판은 예를 들어 내가 쓰는 글에 관한 것일 때 그 글이 좋은지 나쁜지 말하는 것을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나 글이 고통과 깊은 환희가 뒤섞이는, 기쁨이 결국 고통이 되는 지점까지이르지 못하는 것에는 고민한다. 그 지점이 인생의 가시이니까.
나는 우리가 놀라서 "아!"라고 외치는 순간에, 하나의 존재가자기 자신과 최대한으로 만나는 일에 자주 실패한다. 때때로 자신과의 만남은 다른 존재와의 만남 덕분에 이뤄지기도 한다. - P361

내 직관은 글로 옮기려 할 때 더 명확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글쓰기는 필수다. 한편으로 글 쓰는 일은 감정을 감추지 않는 방법이고(상상의 비의도적 변신은 다만 그것에 이르는 방식이다), 또 한편으로 나는 글 쓰는 과정 없이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쓴다. 내가 만약 신비로운 태도를 취한다면 그것은 감정을 감추는 게 주목적도 아닐뿐더러 감정을 감추지 않고는 그걸 명확하게 옮길 능력도 안 되기 때문이다 생각을 감추는 것은 글쓰기의 한 가지 기쁨을 없애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나는 내가 타인에게서 매우 고루하다고 생각했던 신비로운 태도를 자주 취한다. 일단 글로 쓰면, 나는 냉정하게 그것을조금 더 명확히 밝힐 수 있을까?  - P382

어쩌면 내가 고집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나는 자연의 신비가 가진, 다른 명료함으로 대체될 수 없는 어떤 고유한 명료함을 존중한다. 또 흙탕물이가라앉으면 물이 맑아지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명확해지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물이 맑아지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위험을 감수한다. 터무니없는 자유나무분별함 또는 교만으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아니다. 매일 아침에 눈을 떠서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 내게는 습관이 됐다. 나는늘 모험을 깊이 지각해왔는데, 여기서 ‘깊이‘라는 말은 ‘핵심적으로‘란 뜻을 의미한다. 모험의 그런 의미가 나를 무질서한 삶과 글쓰기에 대해 더 넓게, 더 현실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 P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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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이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 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을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히게도 한다
그것을 알고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쓰러질 것은 쓰러져야 한다
무너질 것은 무너지고 뽑힐 것을 뽑혀야 한
그리하며 빈 들판을 어둠만이 덮을 때
몇 날이고 몇 밤이고 죽음만이 머무를 때
비로소 보게 되리라 들판 끝을 붉게 물들이는 빛을
절망의 끝에서 불끈 솟는 높고 큰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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