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런 생각을 한다 해도, 분별 있는 사람은 일반의 옷입는 방식을 거부하지 않는다. 반대로 내가 보기엔 상궤에서 벗어나 특이하게 차려입는 것이야말로 참된 이치에서가 아니라 야심과 객기가 어우러진 겉멋에서 나온 듯싶다. 지혜로운 인간은 자기영혼을 세상의 소란으로부터 빼어내어 자기 안으로 돌이켜, 만상을 거침없이 판단할 수 있는 자유와 권능 안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외적인 것들은 기왕에 받아들여진 방식과 관례를 온전히 따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공적인 사회가 우리 생각까지 간섭할 권리는 가질 수 없다. 하지만 생각 이외의 것들, 즉 우리의 행동, 우리의일, 우리 재산과 우리 생명까지도, 우리는 사회가 쓰도록 빌려줘야 하며, 공통된 견해가 요구한다면 포기까지 해야 한다. 위대•하고 선한 소크라테스가 판관에게, 그것도 몹시 불공정하고 사악•한 판관에게 불복종함으로써 자기 생명을 구하는 것을 거부했듯이 말이다. 규칙 중의 규칙, 법 중의 보편적인 법은 누구나 자기 사는 땅의 법과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 P227

그러고도 한참을 말한 뒤 (두 시간이 넘도록 내내 말했으니) "물러가라."라며 말했다. "킨나, 전에 적이었던 너를 살려 주었던 것처럼 배반자요 시역자인 너를 살려 준다. 오늘부터 우리 사이에 우정이 시작되길 바란다. 우리 둘 중 누가 신의 있게 행동하는지보자. 목숨을 돌려준 나인지, 돌려받은 너인지." 이 말과 함께 그는 킨나를 두고 자리를 떠났다. 얼마 후 그는 킨나에게 집정관자리를 주었다. 감히 그 자리를 청하지 못한 것을 나무라면서 말이다. 이후 킨나는 그의 굳건한 친구가 되었고, 그의 유일한 상속자로 지명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나이 마흔에 일어난 이 사건 이래 그를 노린 음모나 공격이 한 번도 없었으니, 그가 베푼 관용은 정당한 보상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의 기즈 공작에게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관대한 처사는 차후에 같은 배신의 올가미에 빠지지 않도록 보장해 주지 못했던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지혜란 허망하고 변덕스럽다. 우리의 모든 계획, 우리의 결심이나 방비들을 가로질러 항상 사태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운수이다.
우리는 어떤 의사가 좋은 결과를 내면 운 좋은 의사라고 부른다. 마치 그들의 기술만으로는 장담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제 힘에만 의지하기에는 그 기반이 너무 약하다는 듯이. 또한 마치 운수의 손을 빌려야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 의술뿐이라는 듯이. 의사의 기술을 극찬하건 헐뜯건 나는 다 믿는다. 왜냐하면 고 - P240

랍게도 우리는 서로간에 아무런 거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이들과는 반대여서, 항상 의술을 대단찮게 여겨 왔다. 그러다 병이 들면, 의술과 타협 관계에 들어가기는커녕 그것을 더욱 미워하고 무서워하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약을 먹으라고 강요하는 사람들에게, 기운을 차리고 건강을 회복해서 그들이 주는 약의 작용이나 위험을 좀 더 잘 견딜 수 있게 될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려 달라고 대답한다. 나는 자연에 맡겨 둔다. 자연이 자기에게 가해진 공격을 방어하고, 해체하고 싶지 않은 이 몸의 골격을 유지시키는데 필요한 이빨과 발톱을 갖추고 있겠거니 생각한다. 몸이 병과빈틈없이 찰싹 붙어 싸우고 있는 만큼, 몸을 구하러 달려든다는게 행여 몸이 아니라 몸의 적수를 돕고 몸에 다른 과제를 얹어 주게 되지나 않을까 겁내는 것이다. - P241

그런데 나는 의술뿐 아니라 보다 확실한 여러 기술 분야에서도운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하련다. 시인을 사로잡아 무아지경에 이르게 하는 시적 영감, 왜 그것은 운으로 돌리지 않겠는가? 시인 스스로 시적 영감이 자기 소질이나 능력을 훨씬 능가한다고고백하며,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온 것이요. 자기 능력에속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고 인정하는데 말이다. 웅변가들도 자기가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자신을 밀어붙이는 그 비상한 충동과 동요가 자기 능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림도 마찬가지여서 때로 화가의 손놀림에서 벗어나 화가 자신의 구상이나 재능을 능가해 버림으로써 화가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든다. 하지만그런 모든 작품들에서 운의 작용이 특히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은, 작업자가 의도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지각하지도 못했을 때 나오는 우아함과 아름다움에 의해서이다.  - P241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택한 길, 나는 그것이 우리가 택할 수있는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그는 관용과 온화함으로 적들조차 자기를 사랑하게 하려고 애썼다. 음모가 발각되어도 그저 자기가 알고 있었다고 선언했을 뿐이다. 그렇게 한 뒤 신들과 운수의 가호에 자기를 맡긴 채, 두려움도 근심도 없이 자기에게 닥칠 일을 기다린다는 너무도 고매한 결심을 한 것이다. 살해될 때의 그의 상태가 분명 그러했다. - P248

물을 너무 많이 주면 식물이 죽고 기름을 너무 많이 넣으면등불이 꺼지듯이 정신의 활동도 너무 많이 공부하고 너무 많은 재료를 채워 넣으면 둔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기도 하다. 생각할거리가 너무 다양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우적거리는 정신이 뚫고 나올 힘을 잃은 채 그 짐에 눌려 허리가 굽고 웅크리게된 형국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 것이 우리 영혼은가득 채워질수록 더 확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의 예를 보건대, 오히려 공공 영역을 담당한 유능한 사람들이나 위대한 장수들,
국사에 관여한 탁월한 조언자들은 대단한 지식인이기도 했다.
모든 공직에서 발을 빼고 있는 철학자들로 말하자면, 그들 역시 자기 시대의 거침없는 풍자 정신에 의해 이따금 조롱거리가 되곤 했다. 그들의 견해나 행동거지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우스꽝스러워 보인 것이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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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는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백년 동안의 고독을 지은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그 책은 보기 드물게 문학적가치를 지닌 베스트셀러다. 가족 이야기를 다룬 소설로 사랑과 폭력과 광기가 가득하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사실만을 가지고 글을 쓴다. 그의 인물들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한없이 고독한데,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그들의 생각을 글로 옮기지 않는다. 작가 역시 "시와 유머, 고귀하고 마법 같은 언어로, 행위의 리듬을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광인, 시인, 혁명가, 망나니들, 예쁜 여자들, 이 모든 족속들에게서 " 넘어설 수 없는 고독감을 느꼈다. 시인 엘리아니 자구리가 훌륭한 번역을 해냈다. (포르투갈어에서 어떤 이국적 언어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책을 번역하는 동안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매순간 놀라운 책으로 366쪽에 예기치 못한 요소가 담겨 있다. 사비아 출판사에서 출간됐으며, 훌륭한 일러스트는 카리베의 작품이다.  - P397

충동, 그 이상은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그저 충동이었으나 하나의 충동은 아니다. 충동이 그 여자를 유지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유지한다는 것은 어떤 ‘상태‘임을 암시하는데, 충동이 계속해서 그녀를 움직이니 ‘상태‘를 이야기하는 건불가능한 것이다. 물론 그녀는 어딘가 도달하려는 버릇이 있으므로 그 충동에 힘입어 어느 곳 또는 어느 행동에 다다를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충동의 자동사적 성질에 반하는 아주 작은 불편함을 일으킨다. 그러나 자동사적 성질을 말했다고 해서 충동의 무상성을 말하고자 함은 절대 아니다. ‘매매‘의 습성, 결론에도달해야 안도의 숨을 쉬는 행위에 익숙한 우리는 결론이 나지않는 것, 끝나지 않는 것, 흩어진 채로 있는 것, 중단된 것을 생각하기에 이른다. 사실상 충동은 늘 ‘어딘가로 향하게‘ 하는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다시 한번 거리에 대한 문제, 그러니까멀리 가려는 것인가 가까운 곳에 가려는 것인가, 또 어디로 가려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숙고하게 만들 수 있는데, 이때 우리는 조금 전에 말했던 충동의 실행과 충동 그 자체를 혼동할 때 생기는아주 작은 불편함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 P401

우리는 글쓰기에서 형식과 내용의 대립을 말한다. 우리는 내용은 좋지만 형식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럴 수가! 그러나문제는 한쪽에 내용이 있고 다른 한쪽에 형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랬다면 쉬웠을 것이다. 그것은 형식을 이용하여이미 자유롭게 존재하는 것, 내용을 말하는 것일 테니까. 그러나형식과 내용의 대립은 본래 생각 안에 있다. 내용은 형식을 갖기위해 투쟁한다. 사실상 형식 없이는 어떤 내용을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오직 직관만이 내용도 형식도 필요로 하지 않고 진실에 이른다. 직관은 형체 없이 이뤄지는 가장 깊고 무의식적인성찰인 데 비해 형식은 나타나기 전에 애쓴다. 생각이나 글을 꼭두 국면으로 나눠야 한다면, 내가 보기에 형식은 내용이 준비된뒤에야 나오는 듯하다. 형식의 어려움은 내용을 구성하는 방식에서, 실제로 생각을 하거나 느끼는 데서 나온다-생각도 느낌도 때로는 독창적인 적절한 형식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 P417

무언의 소통

고독으로부터 우리를 구하는 것은 서로가 가진 고독이다. 때때로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무슨 말을 하든 그들이 서로 나누는 것은 고독의 감정이다. - P421

더구나 제가 첫 책을 낸이후로 사람들은 제 ‘문장들‘에 대해서 말하지요. 그렇지만 의심하지 마십시오. 저는 신의 보살핌으로 문장 자체를 바란 게 아니라 문장을 통한 무언가를 바랐고 또 얻어냈으니까요.
‘언어 편중주의‘라 불리는 것은 감정의 언어에 가능한 한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고통스러운 의지입니다그것이 저를 놀라게 하는 부분이고요. 그리고 그것은 저에게 주는 것과 받는 것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거리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제가 준 것과 사람들이 받은 것이 무엇인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상치아구단타스는 처음 이 책을 읽고 놀랐었지요. 그는 저에게 실력이 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고 난 후 그는 잠이 오지 않는 밤에 한번 더 그 책을 읽기로 했습니다. 그러고 저에게 경악하며 말했지요. "이건 당신이 쓴 최고의 책이잖아요." 그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루크레시아 네비스와 상제라우두의 말들을 깊이 이해했다는 점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아니요, 당신은 그 책을 ‘묻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당신도 역시 그 책을 ‘지었지요‘. 죄송하지만 상제라우두의 말들 중 한 마리처럼요. - P428

나는 어릴 적부터 개미들의 행렬을 책임졌다. 개미들은 인디언들처럼 줄을 서서 작은 나뭇잎을 들고 걷는데, 반대 방향에서오는 행렬이나 다른 개미들에게 뭔가를 말하기 위해 멈추는 행렬을 만나도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
벌을, 특히 여왕벌을 책임진 이후로 벌에 관한 유명한 책을 읽었다. 벌들은 날아다니고 꽃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개미들은 크기가 매우 작은데, 어떤 개미든 매우 작으며, 개미 안에는 하나의 세계가 있다. 그것을 주의 깊게 살피지않으면 놓치고 만다. 그러니까 조직에 대한 본능적 감각, 인간의귀가 감지하지 못하고 자애심이라는 본능적 감정이 감지하지 못하는 초음파 언어가 개미들에게는 있다. 나는 어릴 때 개미를 책임졌다. 그리고 지금은 그 개미들을 너무도 다시 보고 싶은데 단 한 마리도 만난 적이 없다. 누군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랬다면 내가 알았을 테니까. 세상을 책임진다는 것은 커다란 인내심 역시 요구한다. 나를 위해 개미 한 마리가 나타나는 날을 기다려야만 하니까. 인내란 지각할 수 없을 만큼미세하게, 천천히 피는 꽃을 관찰하는 것이다.
나는 그저 아직 그것을 깨달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 P434

어디서부터 시작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아는 것은 시작부터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은 동시에 써졌다. 모든 것은 거기 있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뚜껑이 열린 피아노의 시공간처럼, 동시에 울리는 피아노 건반처럼.
나는 커다란 주의를 기울이며 내 안에서 결성되고 있는 것을찾아 글을 썼고, 원고를 다섯 번째 본 이후로 그것을 지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말해지길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이해하게 됐다.
내가 두려웠던 건, 내가 나를 이해하는 것이 느리다는 이유로일어나는 짜증 때문에 때가 되기 전에 서둘러 어떤 의미를 찾으려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시간을 더 들일수록 해야 하는 이야기를 혼란 없이 할 수 있으리라고 느꼈다. 아니 확신했다.
매번 모든 것은 인내심의 문제이고, 사랑이 인내를 만들며 인내가 사랑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 P456

자라나는 일그러진 영혼은 부피가 커지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무언가의 기다림이 형성되어 세상에 나오는 것임을 전혀 알지 못한다.
힘든 기다림과 더불어 즉흥적이었던 최초의 시선을 조금씩글로 재구성하는 인내도 있다. 시선을 되찾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나는 글을 쓰지 못한다. 생각을 설명하지 못하고, 하나의 생각에 단어의옷을 입히지 못한다. 내가 쓰는 것은 과거에 했던 생각을 참조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의 생각이다. 적합한 단어, 대체할 수 없는 단어 또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로 이미 표면 위로 올라온 것 말이다. - P457

글을 쓰면서 나는 다시 한번 역설적이고 명백한 한 가지 확신을 느낀다. 글쓰기를 방해하는 것은 단어로 써야 한다는 것. 불편한 일이다. 그것은 내가 마치 더 직접적인 소통, 사람들 사이에서 때때로 일어나는 말 없는 이해를 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가 나무 위에 그린 그림이나 어린아이의 머리를 만지는 손길또는 시골길 산책 같은 중간 단계를 통해 글을 쓸 수 있었다면,
나는 절대 단어의 길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글을 쓰지않는 모든 이가 하는 것처럼 했을 것이고, 글을 쓰는 사람이 느끼 - P457

세상의는 것과 정확히 같은 기쁨과 고통을 느꼈을 것이며, 달랠 수 없는깊은 실망을 똑같이 느꼈을 것이다. 나는 살았을 것이다. 단어를이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환영한다.


신문을 위한 글쓰기가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런 글은 가볍다. 가벼워야 하며 피상적이어야 한다. 신문을 읽는 독자들은 깊게 읽고 싶어 하지 않고 깊이 읽을 시간도 없다. 그러나 책을 위한 글쓰기는 분명히 우리가 가진 것보다 더 커다란 힘을 요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도 그렇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우리가 자신만의 작업 방식을 창조해야 할 때가 그렇다.  - P458

내가 열세 살에 의식적으로 글을 쓰고자 하는 의지를 인정했을 때 나는 어릴 적에 글을 썼지만 이 운명을 인정하진 않았다쓰기 의지를 인정했을 때, 갑자기 나 자신이 텅 빈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텅 빈 곳에서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아무도 없었다.
나는 스스로 무無에서 일어서야 했다. 스스로 자신을 이해해야 했다. 결국 내 진실을 말하기 위해 스스로를 꾸며내야 했다.
나는 시작했지만 시작부터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종이는 저희끼리 서로 부닥쳤다- 의미는 서로 반박했고, 할 수 없다는 절망은 실질적으로 할 수 없게 하는 부수적인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나는 끝없는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헤르만 헤세의 「황야 - P458

의 늑대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 그걸 간직하지 않은 게 얼마나 안타까운지. 나는 입문자의 거의 초인적인, 자신을 알아가려는 노력을 외면해 그것을 찢어버렸다. 모든 것은 비밀리에 이뤄졌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고통 속에서 혼자 살았다. 나는 일찌감치 한 가지를 짐작했다. 언제나 글쓰기를 시도해야 한다는 것. 글을 쓰기에 제일 좋은 순간을 기다리지 말 것, 그런 순간은 오지 않으니까. 내가 흔히 말하는 소명을 가졌다고 해도 내게 글쓰기는 늘 어려운 일이었다. 소명은 재능과는 다르다. 소명은 있어도 재능은 없을 수 있다. 그러니까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부름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 P459

우주에 대해 산발적이면서 당황스러운 생각을 해본 끝에 몇 가지 명백한 결론에 이르게 됐다.(명백함은 매우 중요하다, 명백함이 어떤 진실성을 보장해주니까.) 나는 일단 무한함이 있다는 결톤에 이르렀다. 수학적인 추상적 관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무한함 말이다.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유한을 바탕으로 고찰하는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다음으로 만약 우주가 유한하다면 다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유한함 다음에는 무엇이시작된다는 말인가? 그러다가 신은 무한하다는, 나로서는 매우 겸손한 결론을 내리게 됐다.  - P476

나의 횡설수설을 따라가다 보니 내가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나는 그런 점이 기뻤다. 그것은 희망의 기쁨이었다. 나는 내가 아는 얼마 안 되는 지식으로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러니까 내가 모르는 것에설명이 있을 수 있고, 나는 그것을 희망하며, 그 설명을 얻게 된다면 조금 더 알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무한함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정의하는 데 쓸 수 있는 형용사가 하나도 없다는 데 있다. 무한함은 존재한다. 그게 전부다. 그저 존재한다. 우리는 무의식으로 무한함과 연결된다. 우리의 무의식은 무한하다.
무한함은 억누르지 않는다. 무한함에 대해서라면 ‘규모‘나 ‘약 - P476

분 불가능‘을 말할 수 없으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한함에 동조하는 것뿐이다. 나는 절대적인 것이 무엇인지 안다. 나는존재하고, 또 나는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나의 무지는 진정으로나의 희망이다. 나는 형용사화할 줄 모르고, 거기에 안전함이 있다. 형용사화는 질이다. 그리고 무의식은 무한함처럼 질도 양도아니다. 나는 무한함을 들이마신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는 자신에게 취한다.
절대적인 것은 인간의 정신으로는 표현할 수도, 상상할 수도없는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열망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은 무한함과 우리가 맺는 관계이며, 우리가 무한함에 동조하는 방식이다.  - P477

분명 흔치 않은 일이겠지만, 무한함의 존재가 너무도 강렬하게 느껴지는 순간에 우리는 현기증을 느낀다. 무한함은 다가오는 것이다. 무한함은 시간에 의해 불가분한 현재다. 무한함은 시간이다. 공간과 시간은 같은 것이다. 내가 물리와 수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일인가. 그것들을 이해했더라면 이 의미 없는 횡설수설 대신에제대로 숙고하고 내가 느낀 것을 전달하는 데 적합한 어휘력을가졌을 텐데.
나는 우리가 누리는 풍요에 놀란다. 인간은 몇 세기에 걸쳐 시간을 계절로 나누게 됐다. 무한함을 날과 달, 해로 나눠보기도한다. 무한함이라는 것이 매우 숨 막히게 하고 심장을 옥죌 수 있으니까. 불안 앞에서 우리는 무한함을 의식의 영역으로 데려가고 인간적 형태로 단순화하여 조직한다. 그 형태 또는 조직된 모 - P477

든 다른 형태 없이도 우리의 의식은 광기만큼 위험한 현기증을느낀다. 동시에 인간의 정신에 무한성의 영원함은 쾌락의 근원이고, 우리는 그 점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해한다. 동의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살아간다. 우리 인생은 고작 무한함의 하나의 양식이다. 아니, 무한함은 양식이 없다. 의식이 무한함을 독식하는데 있어서 가장 적합한 형식은 무엇인가? 이미 말했듯이 무의식은 저와 무한함과 같다는 간단한 이유로 무한함을 인정한다. 우리가 원을 그린다면 우리는 무한함을 더 잘 이해하게 될까? 내가 틀렸다. 원은 완벽한 형태이지만 우리 인간의 정신에 속해 있어 인간의 본성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사실상 무한함에 형용사는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연스러운 실수 중 하나는 무한함이 우리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로부터 보는 관점을 취하지 않고서는 ‘나는 존재한다‘라는 생각에 이르지 못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길을 잃었고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맞다, 무한함에 대해 바보 같은 소리를 적는 것 말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지금은 점심시간이고가정부가 식사가 준비되어 있다고 이미 알렸다는 것. 내가 정말 멈춰야 할 순간이다. - P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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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다른 날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오늘 일어날 수도 있다."라고 노래를 부른다. 사실 재난과 위험이 우리를 종말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가장 위협하는 것 같은 사고가 아니라도 우리 머리로 떨어질 수 있는 오만 가지 것들중에 그런 위험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 보면, 우리가 건강하열병에 걸렸건, 항해 중이건 집에 있건, 전투 중이건 쉬는 중이건, 죽음은 똑같이 곁에 있음을 알게 된다. "누구도 옆 사람보다 약하지 않다. 아무도 내일을 더 장담할 수 없다."(세네카)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는데 한 시간 정도면 되는 일이라해도, 내게는 그 일을 마칠 여유가 충분할 것 같지 않다. - P173

너희가 영위하는 삶 전부가 생명에서 앗아 온 것이다. 생명은 생명의 희생으로 유지된다. 너희 생명의 끊임없는 작업은 죽음을 짓는 것이다. 생명 안에 있는 동안 너희는 죽음 안에 있다. 너희가 더 이상 생명 중에 있지 않을 때라면, 너희는 죽음 이후에 있는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좋다면, 삶이 끝나면 너희는 죽은 자이다. 하지만 사는 중에 너희는 죽어 가고 있고, 죽음은 죽은자보다 죽어 가는 자를 훨씬 더 거칠게 건드린다. 훨씬 더 생생하게, 훨씬 더 본질적으로,
삶을 잘 이용했다면, 너희 몫을 충분히 누린 것이니, 만족하며 떠나라.


포식한 손님처럼 삶을 뜨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루크레티우스


삶을 이용할 줄 몰랐다면, 생명이 너희에게 쓸모가 없었다면, 그것을 잃은들 어떠하며, 그것을 더 원해 무엇할 것인가? - P182

삶은 그 자체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너희가 무엇에 내어 주느냐에 따라 삶은 선의 자리도 되고 악의 자리도 된다.
너희가 하루를 살았다면 모든 것을 본 것이다. 하루는 모든날과 똑같다. 다른 빛도 없고 다른 어둠도 없다. 저해, 저달, 저별들, 그것들의 배치, 그것은 너희 조상들이 즐겼던 그대로요, 또지금 있는 그대로 너희 자손들을 기껍게 할 것이다.


그대의 조상도 다른 것을 보지 않았고, 그대의 자손도 다른 것을 보지 않으리라.
마닐리우스


최악의 경우라도, 내 연극의 모든 막들의 분배와 변화는 일년이면 완성된다. 너희가 나의 사계절의 변화에 유의해 봤다면, 세상의 유년, 청소년, 장년, 노년이 다 그 사계절 안에 들어 있다. 공연은 완료된 것이다. 다시 시작하는 것 외에 다른 재주란 없다.
언제나 그와 같을 것이니,


"우리는 똑같은 쳇바퀴를 돌며, 벗어나지 못하고,
루크테리우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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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나이우스에게는 이 모든 게 얼마나 가당찮게 보였을까. 생명의 질서에 담긴 진실을 캐내기 위해서 그 어떤 동물이나 식물도, 헤엄치거나 숨 쉬거나 날아다니는 그 어떤 존재도,
싹을 틔우거나 꽃을 피우는 그 어떤 존재도, 생명의 세계에 관한 그무엇도 알 필요가 없다는 것. 분자들, DNA만 알면 된다는 것. 심지어분류학마저, 생명 분류의 과학마저 생명 자체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과학자들은 철저히 현대적인 과학에 전념하는 단계로 넘어가는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것은 인간이 감각할 수 있는 것, 자연의 질서는 어떠하리라는 직관에 대한 전념이 아니라, 전에는 눈에 보이지않던 것을 다루는 과학이 밝혀낼 새로운 과학적 자연 질서에 대한 전념이었다. 이제 움벨트를 완전히 저버리기까지 딱 한 가지 일만 남았는데, 그 일은 이미 여러 해 동안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바로 물고기의 죽음이다. - P330

수리분류학자들은 분류학 전반을 폭풍처럼 휩쓸지는못했지만 그래도 자기들이 주장하는 객관성과 점점 더 복잡해지는통계학에 대한 집요한 숭배를 품은 채 계속 그 일을 하고 있었다. 분자생물학자들 쪽에서는 만만찮은 추진력을 얻으며 무서운 속도로 세 불려갔다. 바로 이 괴로운 시절에, 젊은 무뢰한들 가운데서도 가장 경악스러운 자들이 나타나 자기들 특유의 새로운 대혼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수리분류학이 현대 과학으로서 분류학의 유아기였다면, 그리고 분자분류학이 생명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향해 비틀비틀첫걸음을 내디디며 신기함과 놀라움을 채워가던 유년기였다면, 가장최근에 등장한 이 불행은 분류학의 청소년기였을 것이다. 누구나 알듯이 청소년기는 항상 어여쁘지만은 않다. 이 시기는 분류학이 삐딱함을 장착하고 모히칸 스타일로 머리를 밀고 군데군데 피어싱도 하고는 엄마 아빠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이던 시절이었다. 이들은 분기학자라고 불리게 될 이들, 아니 그보다는 사납게 날뛰는 분기학자나 횡설수설하는 분기학자라고 불리게 될 이들, 그리고 혹시 남부캘리포니아 출신이라면 때로 ‘온탕hot-tub 분기학자‘라 불리게 될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뭐라고 불렸건, 누가 그들을 좋아했건 싫어했건, 그들은 다가오고 있었다. - P332

그런데 일단 실제 유기체들과 실제 분류 작업에 헤니히의 규칙등을 적용하기 시작하자 그 규칙들이 순한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 새로운 유형의 분류학자들은 우리가 미처 그들을 ‘날뛰는 분기학자들‘이라고 부르기도 전부터, 황당한 변화들을 요구하며 말도 안 돼 보이는 분류의 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들은자신들의 논리를 맹렬히 내세우며 이른바 인위적 분류군이라는 것들을 폭발시켜 흔적도 남지 않게 없애버리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나방부터 무척추동물, 파충류, 물고기, 얼룩말(누가 얼룩말을 부인할 수 있•단 말인가?)까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심지어 그들은 새가 사실은 공룡이라는 헛소리까지 함부로 지껄여대면서, 자신들의 방식이계몽된 방식이며, 따라서 유일한 방식이라 주장했다. - P347

나는 물고기를 좋아한다. 그건 어쩌면 나의 어머니가 일본계여서 우리가 생선을, 어떤 날은 아침, 점심, 저녁까지, 회로, 튀김으로,
구이로 먹고, 설탕을 넣고 조려서 먹고, 훈제하거나 절여서 먹고, 국을 끓여 먹고, 덴푸라 tempura로 튀겨 먹고, 어쨌든 거의 모든 생선을,
아무 생선이나 다 먹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물고기가 원래억누를 수 없이 정이 가는 존재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내가 키웠던 모든 물고기를 애정 어린 (그리고 이제는 오래전에 땅밑으로 들어갔으니 슬픔도 어린) 마음으로 기억한다. 금붕어, 네온테트라, 앤젤피시도 있었고, 수줍은 클라운로치도 있었다. 아마도 내가 물고기를 좋아 - P347

하는 진짜 이유는 그것들이 그냥 너무나 견고하게 물고기로서 존재하기 때문인 것 같다. 물고기라는 개념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건 공기를 좋아하지 않거나 하늘을 좋아하지 않는 것과 비슷할것이다. 당최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래서 물고기들이 죽어가는것을 보는 일, 아니 사실 내가 여리고 젊은 대학원생 시절부터 강의실에서, 세미나실에서, 연구실에서, 과학 학회에서, 조용한 복도에서 계속 반복해서 목격했듯이 물고기들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일은 내게 각별히 고통스러웠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타당하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그건 내게 언제나 얼마간 아픔을 안겼다. 지금 나는 그것이 바로 내 움벨트에서 느껴지는 아픔이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분기학자들은 그 일을 아주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한 분류군 또 한 분류군 차례로 죽여 없애느라 바빴지만, 그중에서도 물고기를 죽이는 의식을 유난히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모든 관중에게 물고기의 희생제의를 치르는 광경을 보여주는 일에서 특별한 회열을 느꼈고, 그걸 본 관중은 당연히 하나같이 놀라서 멍해지고 분노했고 화를 냈고 믿지 않으려 했다 - P348

이렇게 된 사정이었다. 물고기들의 죽음은 다윈이 분류학은 생명의 계통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천명하며 시동을 건 일의 필연적인 결과. 그가 우리에게 감지된 자연의 질서 저변에 거대한 생명의 나무가 있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생명은 정말로 진화한다는 것을 목격한 순간부터 과학이 피할 수 없이 달려온 지점. 다윈이 방향을 알려주었고, 이제 마침내 종착역에 도달했다. 마침내 분기학자들이 순수하게 진화적 관계의 계통수에만, 그 관계에 따라 이름 붙인 바로그 가지들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물고기들은 죽었고 헤니히는 아직도 연기를 뿜고 있는 분기학이라는 권총을 손에 쥔 채 물고기들 위에(이 내성적인 파리 분류학자는 1976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영혼으로라도)서 있었다. - P355

또한 그것은 정확히 분기학자들이 이 살해 의식에서 아무 분류군이나 해체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우리의 보편적 비전에서 우리가 가장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분류군을, 더할 수 없이 실제적으로 보이는 분류군을 선택한 바로 그 이유이기도 하다. 물고기의 죽음은 시연될 때마다 특별한 순간이었는데, 이는 더없이 신경에거슬리고 더없이 착잡하며 더없이 움벨트를 모욕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그것은 분류학자들의 케케묵은 본능에 대한 충성심에서 아직 남아 있던 한 조각을 직통으로 때리는 공격이었다. 요점을한 방에 각인시키는 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생명의 세계가 어떻게 보이는지,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는 단한 톨도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더 의미 없는 것도 없다. 의미 있는 것은 오직 진정한 진화적 질서뿐이다. - P357

우리아이들이 멸종한 공룡들에 집착했다가 이내 너무 금방 잊어버릴 때, 첼탈족 아이들은 진짜 삶을 배우고 있다. 이 아이들의 부모가 "이러저러한 이파리가 하나 필요한데, 네가 가서 하나만 따다 줄래?" 하고 말하면, 아이는 곧장 야생의 벌판으로 종종거리며 들어가 필요한 그 잎을 정확히 찾아서 돌아온다. 이 사람들은 아주 쉽게 자기 주변 생명의 세계를 주인처럼 누린다. 진화론 같은 것 없이도 그 세계를 잘 볼수 있고, 살아 있는 모든 것과 여러 면으로 연결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이렇게 버티고 있는 이들의 존재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할것이다. 이들은 하루하루 자기네 야생의 땅과 언어와 문화와 지식을잃어가고 있는 부족들이다.
그런가 하면 사무직 관리자, 교사, 트럭 운전사 등 수렵과 채집외에 다른 방법으로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움벨트를,
대개는 그 움벨트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이나마 보살피고 가꿔가는 이들도 있다. 여기에는 하이킹하는 사람, 탐조인, 정원 가꾸는 사람, 토착 식물 덕후, 나비 채집자와 관찰자, 사냥꾼, 그리고 낚시꾼 등이 있다. 이들은 존경스럽지만 여전히 너무 소수다. - P374

하지만 기억하자 움벨트는 생명의 세계에 대한 시각만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를 둘러싼 현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이해하게 해주는 맥락에 대한 시각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우리는 의식하지도 못한채, 생명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생물로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을 상품들의 풍경에서 살아가는 소비자로 바라보는 관점으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무의식중에 우리는 생물들을 익숙히 알아보는 능력을브랜드에 대한 서번트 같은 전문 지식과 맞바꿨고, 생명 세계의 언어(진짜 식물과 진짜 동물의 이름들)를 토니 더 타이거와 가이코 도마뱀붙이의 어휘와 맞바꿨다. 우리가 사는 세계, 우리의 단순한 현실은 구매 가능한 것들의 세계다. 별 노력을 하지 않아도 돈을 지불하면 그것은 완전한 우리 것이 된다. 당신이 사는 지역의 숲을 거닐 때는 보이는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숲해설가가 필요할지 모르지만, 쇼핑몰안을 돌아다닐 때는 그런 도움이 전혀 필요치 않을 것이다.
놀랄 일도 아니지만, 동시에 우리는 생물들의 실제 세계를, 생물대신 인공 상품들로 가득한 세계, 그것들을 만들 공장과 판매할 상점과 채워둘 집이 있는 세계와 맞바꿨다. 우리가 분주히 쇼핑하고 이세상 인공물들의 다양성을 불려가는 동안, 이 세상 생물들의 풍부함은 줄어들고 있다. - P388

생명은 모든 곳에서 끈질기게 버티고, 존재하고, 침입하고, 발산하고, 살금살금 다니고, 튀어나온다. 그리고 움벨트는 (우리가 가격표와 상표가 붙은 물건들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마음껏 쓸 수 있으며, 생명의 세계에 대한 움벨트의 전체적이고 풍성한 시각을 한껏 흡수할수 있는 우리의 것이다. 우리가 구찌와 베르사체에서, 맥과 피씨에서, 에디 바우어와 바나나 리퍼블릭, 허머와 포드와 폭스바겐에서 벗어나 생명 있는 존재들에게 돌아가려면 약간의 재훈련은 필요할 것이다. 아기들에게 더 잘 가르칠 수 있을 만큼 우리가 먼저 충분히 배워야겠지만, 희망은 영원히 솟아나며 또 그래야 한다. 한결같이 어서 생명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 세계의 굶주린 움벨트의 허기를 채워주고 싶어 하는 작은 사람이 새로 한 명씩 태어날 때마다 우리에게는또 한 번의 기회가, 생물에 대해 열렬히 배우고자 하는 또 한 명의 존재가 생겨난다. - P393

이 책을 쓰는 작업에 착수하기 전, 나는 생명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유일한 방법이 과학이라고 확신했다. 이치에 맞는 다른 그 어떤방법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 사실 확신 이상이었다. 그것은 그대로 명백한 진실이었다. 진화의 질서는 올바로 판독하기만 하면 정말로 소중한 지식이며, 모든 생물의 진짜 역사를 흘깃 볼 수 있게 해준다. 나는 이것을 생명의 세계를 분류하고 명명하는 최선의 방법일뿐 아니라 유일하게 맞는 방법으로 알았다. 아무리 독특하고 재미있더라도 다른 모든 분류법은 틀린 것이었다. 아무리 기이한 일 같더라도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알았다.
과학은 생명 분류의 접근법에서 유일무이한 힘을 지니고 있다. 분류학자들은 체계적으로 증거를 찾고, 한 유기체의 DNA 속 문자들을 수집하며, 모든 비늘, 모든 깃털, 모든 꽃잎, 모든 이파리를 뚫어지 - P394

게 들여다본다. 그런 다음 다른 것은 다 배제하고 오직 진화의 역사만을 근거로 그 유기체들을 정리하고 분류한다. 그것은 의식적으로제한된 시각이며, 무의미한 부풀림과 공기는 거의 모조리 빼낸 엄밀하고 잘 정의된 시각이다. 진화적 분류는 과학자들이 이 세상 유기체들의 생물학을 다른 무엇으로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해준다. 그것은 그들이 거둔 쾌거다.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던 내 생각은 틀렸다. 생명의 분류에는 과학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존재했다. 나는 근시안 때문에 하마터면 생명의 분류와 명명이, 그리고 생명의 세계 자체도 과학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속하며 언제나그래 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움벨트를 완전히 놓칠 뻔한 것이다. - P395

나는 분류학이 평범한 과학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과학적 생중분류와 명명의 역사도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만약옴펠트가 내가 믿는 것처럼 실제적이고 강력하다면, 만약 하나의 종으로서 우리가 지구상 생명의 질서에 대한 특정한 비전을 정말로 공유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분류학의 역사는 어느 한 학문 분야의 개념과 기술이 지속적으로 다듬어지는 이야기로 이해하면 안 된다. 린나이우스의 최초의 뛰어난 짐작에서 출발해 점점 더 정확한 생명 분류의 체계화로 나아가는 합리적인 진보로 이해하면 안 된다. 만약 우리모두가 태고부터 진화해온 움벨트의 렌즈로 생명의 세계를 본다면, 분류학의 역사는 오히려 길고도 철저히 비과학적인 인간의 전통으로부터 실질적 과학이 등장한 이야기로 보아야 한다. - P395

이 모든 것이 과학자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한 이유는 단순히 과학자들이 그것이 옳다고 배웠기 때문은 아니다. 그것들이 지배력을 발휘하고 그토록 강력하게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는 것은 오랫동안 모든 인류의 전통, 태고부터 이어진 인간의 움벨트가 준 선물들이기 때문이다.
움벨트의 이러한 힘은, 과학이 점점 더 엄격히 진화만을 근거로한 생명의 비전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에도 우리 모두가 이 최신의 비전을 쉽고 단순하게 채택하지 못한 이유이다. 또한 그 힘은 우리가아직도(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얼룩말이나 물고기나 나방의 죽음을, 새가 공룡이라는 생각을 편안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진화적으로 타당한 새 용어들만을 항상 듣고 본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생명의 비전은 지금 우리가 그렇게 느끼듯 여전히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과학은 계속 전환하고 변화하겠지만, 움벨트와 움벨트의 비전이 지닌 근본적인 요소들은 늘 똑같이 남을 것이다. - P399

그러나 나머지 우리로 말하자면, 우리는 그렇게 엄격한 시각을진지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니 사실은 그러지 않는 편이 더 낫다. 오※ 세월 과학을 이해의 다른 모든 방법 위에 두고, 과학자들만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다고 믿어온 결과, 우리는생명의 세계를 우리 자신의 시각으로 볼 수 없게 되고 생명의 언어를말할 수 없게 되었으며, 생명이 있는 존재들과 단절되고 그들에게서관심을 거둔 채 쇼핑몰만 헤매다니고 있다. 다들 뭔가에 너무 정신이팔려 있어서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멸종조차 알아차리지못하는 지경이 됐다. 우리에겐 우리 스스로 해야 할 일이 있다. 죽어가는 우리의 세계를 되살리고 구하기를, 그 세계와 우리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바란다면, 그 세계에 대한 우리의 비전에 작은 생명을 다시불어넣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일은 물고기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 P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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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드 몽테뉴Michel de Montaigne, 
1538~1592

16세기 프랑스 르네상스 최고의 교양인, 사상가, 철학자, 때로는 정치인으로 부각되기도 하는 몽테뉴 그러나 곧 덧붙여 말해야 한다. 그는 당대 인문학자들과 달리 라틴어가 아닌 속어(프랑스어)로 글을 썼고, 나아가 장바닥의 생생한 말로만 쓰고싶다고 한 교양인이요 어려운 개념도 체계도 교화적 목적도 없이 누구나 부딪히는 실존적 문제들에 대한 인간적이고 온당한 답, 주어진 삶을 풍요롭고 만족스럽게 사는 길을 찾고자 하는 보통 사람의 ˝자기 탐구˝로 사상가, 철학자가 된 최초의 사람이다. 내란으로 분열된 나라에서 중재자로, 보르도의 시장으로 일했지만, 공격 생활에 염증을 느껴 서른여덟 살에 은퇴하여‘자기만의 방‘으로 물러났고, 왕이 하사하는 은전을 거절하고, 억지로 시장직을 맡았으며, 사적 삶의 문제로도 벅찬 사람으로서, 공적인 일에 ‘손‘과 ‘어깨‘까지는 빌려줄 수 있어도 그일을 ‘간과 폐‘에 담지는 않겠다고 공언한 사람이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면서, 유대인 핍박과 신대륙에서 저지른 유럽인들의 잔인한 행위를 큰 소리로 비판한 유일한 문인이요, 농부를 비롯한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삶의 교훈을 얻은 사람, 그가 읽고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여기 20여 년 동안 써 내려간 『에세에서 그의 시대만큼 혼란스런 시대를 사는 21세기 독자에게 들려준다.


독자에게

독자여, 여기 이 책은 진솔하게 쓴 것이다. 처음부터 내 집안에만 관련된 사적인 목적 이외에 다른 어떤 목적도 없었음을 밝혀둔다. 그대를 위해서나 내 영광을 위해서 쓰겠다는 생각은 추호도없었다. 내 역량은 그런 계획을 세울 만하지 못하다. 나는 그저 내 집안 사람들과 친구들을 위해, 내가 세상을 떠난 뒤 (머지않아 그렇게 될 것이니) 내 처신이나 성격의 특징들을 여기서 찾아보며 그렇게 해서 그들이 나에 대해 알고 있는 바를 더 온전하고 생생하게 간직할 수 있게 하려 했던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호의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면, 나는 나를 더잘 장식하고 공들여 제시했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여기서 꾸 - P35

밈없이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보통 때의 내 모습을 봐 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내가 그려 보이는 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공공에 대한 예의가 내게 허락했던 한에서, 내 결점이며 생긴 그대로의 내모양이 여기서 읽힐 것이다. 여전히 대자연의 원초적인 규범 아래아늑한 자유를 누리며 산다는 저쪽 나라들에서 태어났다면 장담컨대 나는 정녕 기꺼이 나를 통째로 적나라하게 그렸을 것이다.
그러니 독자여, 나 자신이 내 책의 재료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경박하고 헛된 주제에 그대의 한가한 시간을 쓰는 것은 당치않다.

그럼 안녕, 몽테뉴로부터,
1580년 3월 1일3 - P36

이 이야기는 우리가 최근에 본 프랑스 왕공들 중 한 분의 이야기와 쌍벽을 이룰 만하다. 그분은 체류 중인 트렌토에서, 온집안의 지주요, 영광이었던 맏형‘의 사망에 연이어 두번째 희망이던 아우의 사망 소식까지 듣게 되었다. 이 두 번의 애사를 감탄스러우리만큼 의연하게 견딘 그가 며칠 뒤 자기 수하 중 하나가 죽게 되자 이 마지막 참사에는 완전히 넋을 잃고 말았다. 이전의 꿋꿋함은 간데없이 어찌나 슬퍼하고 원통해하던지, 어떤 이들은 이 마지막 충격만이 그의 급소를 찌를 수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사실인즉 이미 슬픔으로 꽉 차서 넘칠 지경이었기 때문에 별것 아닌 일 하나라도 더 얹히자 인내의 방벽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 P46

닥쳐올 일에 대해 우리는 전혀 힘을 쓸 수 없고, 심지어지난 일에 대해서보다 더 속수무책이니, 사람들이 늘 미래의 일에만급급한 것을 나무라며, 현재의 복을 붙들어 그것에 만족하라고 가르치는 이들은 인간의 과오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자연 자체가 자기 작품이 지속되게 하는데 우리의 지혜보다행동이 더 절실하다 보니 다른 많은 그릇된 생각들처럼 그런 그릇된 생각을 주입하여 우리를 그쪽으로 이끈 것인데, 그것을 감히콰오라고 부르겠다면 말이다. 우리는 편안하게 제 집에 머무는 적이 없고 늘 저 너머로 나가 있다. 두려움, 욕망, 희망은 우리를 미래로 집어던지며, 지금 있는 것을 느끼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며앞으로 올 일, 심지어 우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의 일에까지 정신을 팔게 한다. "미래를 근심하는 영혼은 불행으로 짓눌린다."(세네카)
플라톤에서 자주 언급되는 위대한 가르침은 네 일을 하고 너우리 시대를 알라는 것이다. 두 부분으로 된 이 가르침은 각각 우리의 의 - P52

무 전체를 담고 있으며 하나가 다른 하나를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자기 일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첫 번째로 알아야 할 것이 자기가누구이고, 자기에게 적합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아는 사람은 자신과 무관한 일을 자기 일로 삼지 않고,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가꾼다. 헛된 일이나 쓸모없는 생각과계획을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어리석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도 만족하는 일이 없는 것처럼, 지혜는 지금 있는 것에 만족하며결코 자신을 불만스럽게 여기지 않는다."(키케로)
에피쿠로스는 현자에게는 미래에 대한 예견이나 염려가 없다고 말한다.
죽은 이들과 관련된 법 중에서 왕들의 행적을 그 사후에 판별하도록 만들어 놓은 법은 내 생각에 아주 마땅해 보인다. 왕이란 법의 주인은 아닐지라도 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들이다.
정의가 그들의 머리를 누를 힘이 별로 없는 만큼 그들의 사후 명성과 그 후손들의 복락에 정의가 행사되도록 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우리는 흔히 사후 명성과 후손의 복을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여기니 말이다. 이 관습은 그것을 지키는 나라들에 특별한 이익을 가져다주며, 자신들이 못된 군주들과 엇비슷하게 기억되는 것을 불평할 선한 군주들에게는 바람직한 일이다. - P53

모든 것을 휘저어 보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무도 죽기 전에는 행복하다는 말을 들을 수 없다고 한 솔론의 말을 따져 보며, 순탄하게 살다 죽었는데 나중에 그 명성이 훼손되고 후손이 비참하다면 그 경우에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본다. 살아 움직이는 동안 우리는 어디든 기대에 차서 마음에 드는 곳으로 옮겨다닌다. 그러나 존재 밖으로 나가면 우리는 여기 이 세상의 것과는 아무런 소통도 할 수 없다. 그러니 솔론에게는 이렇게말하는 것이 좋으리라. 인간은 이 세상에 없고서야 행복할 수 있으니 그렇다면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노라고 말이다.


자기 뿌리를 온전히 들어 내어,
삶 밖으로 자기를 내던지기는 어렵다.
저도 모르게 자기의 무언가가
이승에 존속하리라 상상하는 것이다.
죽음이 쓰러뜨린 육체에서
인간은 완전히 벗어나 해방되지 못한다.
루크레티우스 - P55

크리스푸스는 경주하는 자들은 빨리 달리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지 적수를 손으로 잡아 저지하거나 딴죽을 걸어 넘어뜨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층 더 고결하게, 저 위대한 알렉산드로스는 야음을 틈타 다레이오스를 공격하라고 설득하려는 폴리페르콘에게 말했다. "승리를 훔치는 것은 내게 합당치 않다. 승리를 수치스러워하느니 차라리 운명을 한탄하는 편이 낫다." (퀸투스 쿠르티우스)

그(메젠티우스)는 달아나는 오로데스를 등 뒤에서 공격하여, 상대가 볼 수 없는 화살로 쓰러뜨리는 것은 자기답지 않은일로 여겨, 그에게 달려가 마주 보고 일대일로 맞붙었으니,
기습이 아니라 오로지 무력으로만 이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베르길리우스 - P76

진실로 거짓말하는 것은 못된 악덕이다. 우리가 사람인 것도그렇고 우리 서로가 연결될 수 있는 것도 그렇고, 그 모든 것이 말을 통해 가능해지는 일이다. 거짓말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심각한 일인지 안다면 그 죄를 화형에 처한다 해도 다른 범죄의 경우보다 정당하게 여겨야 할 정도이다. 내 보기에 사람들은 흔히 어린아이들의 죄 없는 실수를 엉뚱하게 처벌하면서 즐거워한다. 그리고 아이에게 무슨 영향이 남는 것도 중대한 결과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그저 무분별한 행동을 한 것을 두고 아이들을 괴롭힌다. 오직 거짓말하는 것, 그리고 그보다는 덜하지만 드세게 고집 피우는 것 정도가 그 씨앗이 보이자마자 더 자라기 전에 즉각 꺾어 놓아야 할 결점들이다. 이런 것들은 아이들과 함께 자라난다. 한번 이 잘못된 궤도에 올라선 혀는 다시는 그 길에서 끌어내릴 수 없을 정도이니 사뭇 경이로울 지경이다. 그런 까닭에 다른 점에서는 그토록 점잖은 사람들이 거짓말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해 그 버릇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내게 재단사 견습공이 하나 있는데나는 그가 참말을 하는 것을 들어 본 일이 없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익한 경우마저 그렇게 못하는 것이다. - P88

나는 나 자신을 잘 제어하여 다루지 못한다. 그 일엔 나 자신보다 우연히 더 많은 권리를 갖고 있다. 주변 상황, 동반자 하다못해 내 목소리의 떨림까지도 내가 나만을 위해 캐내어 사용하려할 때 얻어 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내 정신에서 이끌어 낸다.
그렇기 때문에 내 정신을 드러내는 데는 내 말이 글보다 낫다. 가치라곤 없는 것들 중에서 선택하는 게 가능하다면 말이다.
또한 내가 나 자신을 찾으려 하는 곳에서는 나를 발견하지못하는 수도 있다. 내 생각을 조사하고 검토하는 일을 통해서보다는 우연히 나 자신을 알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쓰다 보면 내가 뭔가 예리한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다른 이들에게는 우둔한말이나 내게는 예리한 뭔가라는 뜻이다. 이런 말치레는 그만두자.
각자 자기 역량에 따라 판단할 일이니.) 시간이 지나면 내 글의 요지를 완전히 잊어버려 내가 말하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때로는 타인이 나보다 먼저 그것을 알아낸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 구절들을 면도칼로 긁어낸다면 내 책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다른 어느 날에는 우연이 내가 말하려 했던 바를 대낮보다 환히 내게 밝혀 주리라. 그리하여 더듬고 망설이던 내 꼴에 내가 놀라게 되리라. - P95

각 나라뿐 아니라 각 도시도 나름의 특별한 예법이 있으며각 직업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어린 시절 우리 프랑스인의 예법이무엇인지 모르지 않을 만큼 세심한 교육을 받았고, 사람들과 잘어울리며 지내 올 수 있었다. 예법 강의라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나는 기꺼이 이 예법을 따르려 하지만 그렇다고 비굴할 정도로 거기에 얽매여 내 삶을 답답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예법에는 이러저런 귀찮은 형식이 담겨 있는데, 실수가 아니라 잘 판단해 그것을 빼놓는 경우라면 그 때문에 품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 P108

너무 예의를 차리다 결례를 범하고 너무 정중해서 남에게 폐가 되는 사람들을 나는 자주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 사이의 예법을 안다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그것은 우아함이나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친숙해지는 과정으로 가는 첫걸음을 마련해 준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예를 보고 우리가 배우고, 또 우리에게 무슨 가르칠 만하고 전할 만한 점이 있으면 우리의 예를 돋보이게제시할 수 있는 문을 열어 준다. - P109

페라울라스는 행운과 불운, 두 가지 운수를 다 경험한 뒤, 재물이 늘었다고 먹고 마시고 자고 아내를 안는 욕망까지 커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한편으론 내게도 그랬듯이 성가신 재산 관리까지 어깨를 짓누르는 것을 느끼자, 자기의 충실한 친구로서 부를 열망하는 한 가난한 젊은이를 만족시켜 주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 젊은이에게 과할 정도로 엄청난 그의 재산과 그의 선한 주군 키루스의 관대함과 전쟁이 날마다 불려 주는 것까지 모두 선사하고, 자기를 손님이요 친구로 보살피며 정중히 부양할 임무를 맡겼다. 그들은 이후 매우 행복하게 살았고, 두 사람 모두자기 처지의 변화에 만족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기꺼이 흉내 내고 싶은 방식이다.
나는 또 나이 든 한 고위 성직자의 행운을 높이 칭송한다. 그는 그의 지갑, 그의 수입, 그의 지출을 때로는 자기가 고르 하인에 - P136

게, 때로는 다른 이에게 깨끗이 맡겨 버리고, 긴 세월을 그런 유의 일들에 대해선 마치 남의 일처럼 까맣게 모르고 지냈다. 타인의 선함에 대한 신뢰는 그 자신의 선함에 대한 가볍지 않은 증거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이 기꺼이 그것을 돕는다. 그래서 그 성직자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집안의 질서가 그의 집보다 더 한결같이 위엄 있게 유지되는 집을 보지 못했다. 근심하거나 신경 쓰지 않고 자기 가진 것으로 넉넉히 충당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의 필요를 딱 알맞게 조절한 사람, 지출이나 돈 모으기 따위에 방해받지 않고, 자기에게 더 적합하고 더 편안한 다른 일들을 마음이 원하는 바에 따라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도다. - P137

그러므로 여유와 궁핍은 각자의 견해에 달렸다. 부도 영광도 건강도 그 소유자가 그것들에 부여한 만큼만 아름답고 즐거운것이다. 각자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이다. 행복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행복하다. 바로 그럴 때에만 믿음이 알맹이를 갖게 되고 현실이 된다.
운수는 우리에게 이롭지도 해롭지도 않다.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 재료와 씨앗을 제공할 뿐이다. 운수보다 더 강력한 우리 마음이 운수를 제 맘대로 해석하고 제식으로 써먹는다. 저를 행복하게 만들지 불행하게 만들지를 정하는 유일한 원인이며 주관자로서.
외부에서 오는 것들의 맛과 색은 우리 내부에서 구성된다. 옷을 입으면 더워지는 것이 옷의 열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열 때문인 것과 같다. 옷은 우리 자신의 열을 보호해 키워 줄 뿐이다. 옷을 둘러 추운 몸을 보온하는 사람은 냉기를 보호하기 위해 - P137

서도 같은 방법을 쓸 것이다. 사실 그렇게 해서 눈이나 얼음을 간수한다.
당연히 게으름쟁이에게 학업이, 술꾼에게 금주가 고통인것처럼, 방탕한 자에게 검약은 형벌이요, 허약하고 나태한 사람에게 운동은 고문이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다. 사물 자체가 그토록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허약함과 비겁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위대하고 고매한 것을 가려 내려면 그만큼위대하고 높은 마음을 지녀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그것에 우리 자신의 악덕을 넘겨씌울 것이다. 곧은 노도 물에 잠기면휘어 보인다. 무엇을 보느냐만이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도 문제인것이다. - P138

그런데 참, 죽음을 대수롭게 여기지 말며 고통을 견디라고 제각각으로 설득하는 수많은 논설 중에 왜 우리는 우리에게 딱 들어맞는 것을 찾지 못할까? 남을 설득하는 데 쓴 그 수많은 공상들중에서 왜 각자 자기 기질에 제일 잘맞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을까? 불행을 뿌리 뽑을 강력하고 효과적인 약을 소화해 내지 못한다면, 적어도 불행을 완화하는 약이라도 먹어야 한다.
‘쾌락 가운데에서나 고통 가운데에서나 우리는 경박한 편견, 우리를 나약하게 만드는 어떤 편견에 지배된다. 그것 때문에 마음이 물러져서, 이를테면 물같이 되면, 우리는 벌에 쏘이기만 해도 소리를지르지 않고는 못 배긴다....... 모든 것이 자기를 제어하는 능력에달려 있다." (키케로)
결국 고통의 쓰라림이나 인간의 허약함을 아무리 내세워 봐도, 철학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래 봤자 철학은 이런 난공불락의답변으로 방어할 테니 말이다. 필요에 시달리는 삶이 나쁘다면, 적 - P138

어도 필요에 시달리는 삶, 그것을 반드시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 
자기 탓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오래 고통받지 않는다.
죽음도 삶도 견딜 용기가 없는 사람, 저항할 의지도 도망칠에 대한 가능의지도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을 어쩌겠는가? - P139

 다른 덕성도 그렇지만 용맹에도 한계가 있다. 이 한계를 넘는 순간 우리는 어느덧 악덕의 길 위에 서 있게 된다. 이 한계를 잘알지 못하면 용맹에서 무모함, 고집불통, 어리석음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경계 지대에 가까울수록 어디가 한계인지 아는 것이 참으로 어려워진다. 군사 원칙으로 보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요새를 고집스레 방어한 자들을 극형까지 포함해 중형에 처하는우리의 전시 중 관습은, 이 같은 점을 고려한 끝에 생겨난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처벌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 닭장 하나를 사수하려고 온 군대가 매달려 있는 일도 없으리란 법이 없다.  - P140

남과의 대화를 통해(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학교중 하나이다.) 항상 무엇이든 배워 보려고, 나는 여행 중에 만난이야기 상대를 그들이 제일 잘 아는 것에 관한 화제로 이끄는 방법을 고수한다.


뱃사공은 바람에 대해서만 말하게 하고
농부는 황소에 대해, 병사는 자신의 상처에 대해,
양치기는 양 떼에 대해서만 말하게 하라.
프로페르티우스


사람들은 흔히 이와는 반대로, 자기 직업보다는 남의 직업에대해 이야기하려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새로운 명성을 얻는다고 여긴다. 스파르타 왕 아르키다무스가 페리안데르를 두고, 형편없는 시인이라는 평판을 얻으려고 훌륭한 의사의 영광을 버렸다고 비난한 것이 그 증거이다. - P145

하느님은 당신이 좋은 대로 세상사를 조절하셨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내가 혐오해 마지않았던, 가장 타기할 만하고 수치스러운 인물들 중 세 사람은 모든 상황에서 완벽하리만큼 조절되고 절제된 죽음을 맞이했다.
당당하고 행복한 죽음이 있다. 눈부실 만큼 승승장구하던 자가 그 출세의 한복판에 있을 때 죽음이 돌연 그 실을 끊어 멋진 최후를 마련해 주는 것을 보았다. 내 보기에 그가 세운 열정적이고야심 찬 계획들 중 그 무엇도 이 돌연한 중단만큼 고고한 것은 없는 듯 여겨졌다. 그는 맘먹었던 곳에 가지 않고도 도달한 셈이다.
그가 바라고 원했던 것 이상으로 위대하고 영광스럽게 말이다. 그리고 힘껏 달려서 얻으려던 권위와 명성을, 말에서 떨어짐으로써당겨 얻은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을 판단할 때 나는 항상 그 마지막이 어땠는지를 고려한다. 그리고 나 자신의 삶에 대한 주요한 관심 중 하나는그 마지막이 잘 이루어지는 것, 즉 고요하고 담담하게 죽음을 맞는 것이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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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7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6-08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테뉴씨가 자꾸 째려보는 듯 해서 시작했는데...^^
쓸데없는 기우였는지, 번역탓인지.. 좀 술술~ 하든데요^^ 게으름에 관한 한 유구무언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