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가 밤 12시를 넘겼는데, 느닷없이 전화 벨이 울렸다. 누군가 하고 수화기를 들었더니 중학생인 조카녀석이었다.

“이모, 혹시 고양이 키울 생각 없어?”

다짜고짜 고양이 타령을 하는 그 녀석을 추궁한 결과, 듣게 된 경위는…….

 

  학교를 마치고 아파트로 돌아오는 길에 경비실 앞에서 손바닥만한 새끼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경비아저씨께 자초지정을 물었더니, 동네 아이들이 집 없는 고양이가 낳은 새끼 한 마리를 데리고 와서 놀다가 버려 두고 가버렸다고 한다. 비실비실거리며 걸음도 제대로 못 떼는 고양이를 보다가 집으로 올라가서 언니에게 얘기를 했단다. 언니와 조카는 우유를 접시에 부어 담아 내려가서 고양이를 먹이고는 다시 올라왔다. 그런데 저녁이 되자 비가 오기 시작해서, 베란다로 내려다 보니 새끼고양이가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뛰어내려가서 일단 데리고 올라왔단다. 고양이를 씻겨서 박스에 담아 재워놓고 보니, 대책이 서지 않아서 고민하다가 키울 사람이 없을까 하고 이 밤에 전화를 돌리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대책도 없이 덜컥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해? 뒷 일은 생각도 안 해 보고…….”

  전화를 바꿔 든 언니를 향해서 투덜거리고 말았다.

  “그럼 우째? 산 생명을 그냥 죽게 두냐? 똑똑하단 게 어째 하나마 알고 둘은 모르냐?”

  그만 할 말이 없었다.

 

  참 그렇다. 생명 앞에서 이성적이건 그렇지 않건 중요한 건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나는 아무래도 쓸데없는 이성주의 교육을 너무 많이 받은 것 같았다. 때로는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의 행동이 전혀 이성적이지 않을 때가 있다.

 

  생활고에 지쳐 자식을 먼저 죽이고 따라 죽은 어머니의 비정함을 탓하는 사람들, 카드빚에 시달려 목숨을 끊은 가장의 무능함을 비난하는 사람들, 굶어죽고 있는 북한어린이들을 보면서도 정치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을 먼저 들먹이는 사람들……. 그들과 다를 바가 없는 행동을 하고 말았다는 생각에 내내 죄책감이 들었다. 늘 덤벙대서 사고 잘 치는 언니와 조카 녀석이 나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들이란 걸 이제야 깨닫다니.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전화기를 들어 친구들을 깨웠다.

 “야, 너 고양이 한 마리 키울 생각 없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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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묻는 것 가운데, 가장 흔한 질문이 ‘너 커서 뭐 될래?’라고 하네요. 우리가 자랄 때도 숱하게 들어왔던 이 질문은 시대를 넘어서 변치 않는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아이들의 대답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아이들은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을 꿈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의사, 교수, 판사, 피아니스트 따위로 직업의 종류는 가지가지였지만 그에 따라붙는 말은 늘,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훌륭한 사람’을 좀 더 자세히 얘기하면 다른 사람을 도와 주고,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의 꿈은 늘 ‘돈 많이 버는 사람’으로 끝이 납니다. ‘축구 선수가 될래요. 돈 많이 벌 수 있잖아요.’ , ‘변호사 될거에요. 돈 많이 벌 수 있대요.’, ‘의사 하면 돈 많이 번다면서요? 나도 성형외과 의사 할래요.’

 

  요즘 아이들의 꿈은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는가 보다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돈만 많이 벌면 된다는 것으로 변해 있습니다. 위인전에서 읽었던 슈바이처 박사의 숭고한 인류애를 보면서 그것이 내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이젠 찾아보기 힘듭니다. 마리퀴리의 이야기를 읽고 순수과학의 열정을 지피는 아이들도 거의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꿈이 왜 이렇게 변했을까요?

 

  아마, 아이들에게 위인전 속의 세상은 멀지만, 현실은 가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 어른들에게 과거 어린이였을 때 들었던 것처럼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요?’라고 한다면 뭐라고 대답할까요? 아마 우리 아이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대답을 하지 않았을까요? 아이들만 특별히 문제가 되는 세상이 아니란 겁니다. 우리 아이들은 부모와 사회가 가르쳐 주는 대로 행동하고, 꿈꾸고 있을 뿐입니다.

 

  더 넓은 평수에서 사는 친구에게 기죽고, 더 비싼 힐리스신발을 사는 친구가 부럽고, 더 돈을 잘 벌어 오는 아빠를 둔 친구가 어깨에 힘이 더 들어가는 세상……. 이런 세상에서 아이들이 부자가 되기를 꿈꾸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잃어버린 꿈을 되찾기 위해서, 어른들부터 한번 돌아 봅시다. 내 꿈이 무언가. 더 넓은 아파트, 더 근사한 골프채가 대신 자리잡은 그 곳에 원래 있어야 할 꿈이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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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글쓰기 공부를 하는 중학생 남자아이들이 있다. 키도 덩치도 이미 나보다 훌쩍 커버린 녀석들이지만 하는 짓은 나이를 속일 수 없어서 얼마나 재롱둥이들인지 모른다. 공부하다 보면 늘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그런데 어제는 한 녀석이 가방에서 푸른 색 필통을 꺼내보이면서 ‘선생님, 제가 만든 거예요.’ 한다. 순간, 모양이 너무도 그럴 듯한 그 필통을 흘낏 보면서, ‘에이, 설마.’ 했다. 근데, 미심쩍어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바느질 한 걸 보여 주고, 안을 뒤집어서 재단한 선을 보여주는데, 진짜 손으로 직접 만든 필통이었다. 학교 가사 수업시간에 만든 거라고 한다. 다른 한 녀석은 자기가 필통에다 아주 예쁜 인형까지 달아 놓았다.

 

  내 바느질 솜씨보다 훨씬 정갈해 보이는 바늘땀을 보면서, 다시 물었다.

  “엄마가 다 만들어 주셨지?”

  “아뇨! 학교에서 만든 거라구요. 에이, 왜 선생님은 우리말 왜 자꾸 안 믿어요?”

  펄쩍 뛰는 녀석들을 보니 정말 자기들 솜씨가 틀림없는 모양이다.

 

  아마 그 녀석들이 여자 아이들이었다면 내 반응이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학교 다닐 적에는 여자 아이들은 ‘가사’, 남자 아이들은 ‘기술’이라는 성별분업, 더 정확하게는 성차별이 존재했었다. 그렇게 배워왔기에 나도, 여전히 바느질은 여자들의 역할이라는 성차별에 길들여져있었던 것일까? 여전히 남자아이들이 바느질 하는 모습을 어색하게 떠올릴 수 밖에 없는 나는, 몸도 마음도 차별 없는 사회를 살기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다.

 

  정말 잊을 수 없는 것은 자신들이 직접 만든 그 필통을 너무도 자랑스러워하는 그 애들의 표정이었다. 아주 소중하고 엄청난 일을 해 낸 듯한 그 의기양양한 요정을 보면서 양성평등 사회로 한 발짝씩 나아가는 우리 사회의 앞날을 기쁘게 그려볼 수 있었다.

 

  이 아이들의 모습이 어른들의 관습과 편견에 짓눌리지 않고 십년 뒤, 이십년 뒤에도 여전하길 빌어 본다. 신문 읽는 아내 곁에서 설거지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하는 남편이 되고, 아이들을 업고 장을 보러가는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러워 하는 아빠가 되고, 명절날 음식을 만드는 자신의 모습을 진정으로 자랑스러워 하는 사위가 되길......

 

  이제는 학교가 아닌 일상에서도, 가사 노동의 능력이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갖추어야 할 기본노동임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어야 하겠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좀 더 많이 노력해 보자. 우리 아이들에게 ‘구세대’라는 핀잔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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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년 전에 시내 팬시점에서 시계를 하나 샀다. 금속성 줄은 차가운 느낌이 싫어서 가죽으로 된 줄을 골라서 한해 동안 잘 차고 다녔다. 근데 최근에 줄이 너무 낡아 떨어져 버려 그 팬시점으로 줄을 바꾸러 갔었다. 근데 가게 점원이 하는 말이

  “손님, 이 시계는 너무 오래된 거라서 본사에 이 종류의 줄이 남아 있을 지 모르겠네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날 시계를 맡겨두고 돌아와서 ‘너무 오래된……’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하던 그 말을 계속 되뇌어 보았다. 산 지 일년 된 시계가 너무 오래되었다면 도대체 시계를 몇 달만에 하나씩 갈아야 한다는 걸까? 그 생각을 골똘하게 하고 있자니, 갑자기 내가 ‘도대체 이 노무 세상이 미친기지 시푸다.’고  투덜대시던 칠순의 우리 어머니 심정을 이해할 듯도 하다.

 

  그러고 보니 조카녀석들이나 주위에 아이들이 가지고 다니는 필통이나, 가방, 바지 따위가 낡은 걸 본 적이 없다. 더 이상 쓸 수 없을 때까지 쓰는 건 이미 옛날 사고 방식이 되어버렸다. 조금이라도 새로운 모양이나, 색깔이 나오면 겨우 몇 달 전에 열광하고 매달렸던 그 물건은 이미 구닥다리가 되어 버리는 세상이다.

 

  권정생 선생의 동화 ‘또야 너구리가 기운바지를 입었어요’에, 엉덩이를 기운 바지를 입기 싫어하는 또야 너구리에게 엄마너구리가 하는 말이 있다.

  “또야가 이 기운 바지를 입으며 산에 들에 꽃들이 더 예쁘게 핀단다. 그리고 시냇물에 고기들도 더 많이 살고, 하늘에 별님들도 더 예쁘게 반짝거린단다.”

 

  우리가 소비하는 모든 것들이 누구로부터 빼앗아오는 것인지 이미 다 알고 있다. 순박한 자연에게서 착취해 오고 있는 것으로 우리는 ‘우리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인간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자라는 아이들에게 소비가 미덕이고 유행을 좇아가는 게 개성이라고 가르치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황금과 물질의 신이 유일신이 되어버렸다. 모두가 소박함과 더불어 인간다운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을 비웃고 이단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아직도 인간임을 완전히 잊지 않았다면 소비하는 즐거움이 누구의 배를 불리고 누구를 억압하는 결과인지 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값비싼 것을 가지고 걸친 사람들의 호사스러움 뒤에 가난한 나라 사람들과 자연들이 어떻게 유린되고 있는 지 한번만 돌아봐 주자. 우리가 광고의 유혹에 사흘이 멀다하고 바꾸어대는 소비재들 너머로 죽어가는 자연을 한번만 떠올려 보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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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별 2007-10-04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을 남긴건 첨인데... 항상 불만이었던 하지만 내주위의 누구하나 의식하지 못해 이런생각하는 내가 미친건가 하고 고민했었는데... 이런생각을 가진분이 있어 반가워 추천 누르고 갑니다

산딸나무 2007-10-04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저 역시 제 생각에 공감하시는 분을 만나서 참말 기쁩니다.
 

   어느날, 아이들과 동화수업을 하다가 ‘학교 생활을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나누어 보게 되었다. 짐작대로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는 ‘내가 싫어하는 것’이 다섯 배는 더 많았다. 급식할 때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에게 맛있는 것을 더 많이 주는 아이, 선도랍시고 마구 이름 적는 형아, 시험 성적이 떨어졌다고 때리는 선생님 …….

 

얘기를 마친 다음에 아이들에게 자기가 쓴 것들 가운데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나누어 보라고 했다. 아이들이 자신이 싫어하는 행동들 가운데 옳지 않은 것을 찾아서 바람직한 가치관을 세우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데, 아이들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없어요!’라고 한다.

 

“선생님이 시험 못 쳤다고 때리는 게 싫다며? 선생님이 성적이 나쁜 아이들을 때리는 게 옳을까? 옳지 않을까? 성적이 나쁘다고 해서 맞을 까닭이 있나?”

“그래도 공부 못 하는 애들은 때려야죠. 안 때리면 더 안 하잖아요.”

“그래도 니가 맞는 건 싫다며?”

“그럼요, 내가 맞는 건 싫죠.”

“…….”

 

싫은 것은 있으나 옳지 않다는 가치 판단은 없는 아이들……. 결국은 어른들의 책임이겠지. 사회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불의도 나한테 피해만 없으면 별 상관 없다는, 그러나 내가 피해를 입으면 싫다는 식의 모습들을 아이들은 그대로 배우고 크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내일이 오늘보다 조금이라도 더 아름다울려면 세상의 모든 일을 ‘옳은 것과 그른 것’으로 나눌 줄 아는 사람들이 더 많아야 하지 않을까? 내가 좋고, 싫고를 넘어서서 정의와 불의가 존재하고, 정의롭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삶이 더 아름답다는 진리.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빈정댄다.

“그런 원칙대로 살면야 좋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나? 현실과 이상은 다른 거라구.”

 현실과 이상이라는 이분법을 누가 가르쳤을까? 누가 현실은 이상과는 다른 거라고 얘기했을까? 이상이 없는 현실이 얼마나 위험스러운 것인지, 현실이 없는 이상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안다면 현실과 이상을 나누는 일은 더 이상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세상이 아무리 어수선해도 옳은 것은 옳은 것으로, 그른 것은 그른 것으로 존재하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옳은 것을 택했을 때 당당하고, 그른 것을 택했을 때 부끄러워할 줄 아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어색하지 않는 사회를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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