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 - 말의 가치를 일깨우는 철학 동화
위베르 니생 지음, 크리스틴 르 뵈프 그림, 유정애 옮김 / 현암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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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글이 줄 수 있는 해악 점을 극대화 시킨 한편의 짧은 철학동화를 읽으면서 나는 ‘언어’가 인간에게 부여한 많은 것들을 떠올린다. ‘언어’라는 것은 동물과 차별화되는 고차원적인 사고가 가능한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솔직히 ‘언어’라는 광범위한 단어는 동물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까지 포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부분을 고려하여 이 책에서는 ‘언어’라는 표현을 쓰기보다 ‘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로 그 의미를 축소화 시키고 있는 듯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초록개미와 파란개미는 마법에 의해 인간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기 전에는 비교적 평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그들만의 언어로 서로의 의사를 표현했으며 서로의 영역에 대한 구분을 명확하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말’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이 후로 그들 사이에서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의 속사정을 정확하게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을 하지 않으면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일도 정확하게 어떤 ‘단어’를 사용하여 내 뱉게 되면 그것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칼로 무 자라듯이 명확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모든 ‘언어’는 인간의 사유와 심상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그 아무리 정확한 표현법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인지구조가 내포하고 있는 수많은 것들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떤 ‘말’을 내 뱉고 나면 그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와 뜻을 생각하게 되고, 그것에 모든 것을 한정짓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는 분명 온전히 표현되지 못하는 것들이 있으며 왜곡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고 때때로 그런 어려움이 큰 불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 불화로 파란개미와 초록개미처럼 ‘말’의 희생자가 되기도 한다.


이 책은 파란개미와 초록개미처럼 ‘말’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를 불신하는 마음으로 의사소통을 하게 된다면 파멸이 올 것이라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나는 그 경고를 들으면서 지난날의 나의 과오를 떠올리면서 많은 고민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말’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화를 하는 사람과 신뢰를 쌓아야 한다는 것과 신뢰를 잃은 사람과 대화를 할 때는 최대한 정중하고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정확한 표현을 쓰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후자는 여전히 나에게 어려운 과제이므로 ‘말’을 조심하고, 아끼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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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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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깍재깍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를 내지 않는 시계를 바라보면서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분명나지 않았지만 나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고 있었다. 초침이 한 바퀴 돌고 나서 분침이 한 칸 움직인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이 生을 만든다는 것을 한 권을 책을 통해서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生이라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며 그 자연의 법칙 안에서 무기력한 인간은 어떤 저항도 할 수 없다. 지구에 있는 수십억이 넘는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그것이다.


그 生의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다는 것 뿐, 그 외에 많은 것들을 나는 모른다. 내가 그 마지막 순간을 향하고 있다는 것도 때때로 망각해버리고, 내가 그 生이라는 공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때때로 잊는다. 그것은 시계바늘의 끝에 매달려 그것들을 움직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계바늘의 흐름에 나의 몸을 맡기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로자 아줌마의 모습을 통해 확인하게 되었다. 나는 그녀와 같이 언젠가는 다가올 마지막 순간을 향하고 있으며 그녀를 바라보는 모모의 시각에서 그 움직임을 자연의 법칙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生의 흔적은 기억을 만든다. 그래서 기억이라는 것에 많은 것을 의존한다. 하지만 나는 치매에 걸린 로자 아줌마와 달리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많은 것을 잊었다. 망각이라는 것은 때때로 삶에 적응하기 위해서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그런 판단을 했기 때문에 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망각을 하는 것도 자연의 법칙에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위안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은 때로는 生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生의 소멸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그것은 生의 소멸과 生의 생성이 맞물려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를 망각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녀의 몸뚱이가 악취를 내며 썩어갔다고 할지라도 그녀와 함께 유태인 동굴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를 향한 모모의 사랑을 쉽게 소멸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인간들은 生은 통해 지독하고 쉽게 소멸하지 않는 흔적을 남기기를 바라는 것일까? 자신의 육체가 소멸되어 사라진다 할지라도 자신의 흔적이 오랜 시간 남아있기를 바라는 로자 아줌마의 모습을 통해 나의 내면에 꿈틀거리는 본능적인 소망을 엿보았다. 그것은 ‘사랑’을 향한 욕망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랑이 없이도 살수 있다는 하밀 할아버지의 말에 울음을 터트렸던 모모는 마지막에 사랑에 대한 강한 집념을 남긴다. 창녀의 자식으로 태어나 ‘사랑’이 결핍된 유년생활을 보내왔던 모모는 유일하게 자신을 돌봐주는 로자 아줌마에게 적절한 보호를 받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행한 그녀의 ‘사랑’과 그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서 生이 남겨주는 가장 지독한 흔적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로자 아줌마가 치매에 걸려서 자신과 생의 많은 기억을 망각하게 되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남아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生은 소멸되고 기억은 망각된다. 하지만 사랑은 지독하고 강한 흔적을 남기고 쉽게 소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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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19 0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시장미 2005-12-19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 아 그랬어? 말하지 그랬어. ^-^ 나두 이 책을 생각했었는데.....
불어로 그렇게 쓰는구나. 원문을 읽어본적이 없어서 말야. ㅋㅋ 이제는 조금 달라진 시간들을 보낼 수 있겠지? 그럴 수 있는 한 주가 되었으면 좋겠어~~

가시장미 2005-12-21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네.. 감사드립니다. ^-^; 저의 부족한 리뷰에 관심을 가져주시니.. 부끄럽네요. 으흐흐

2005-12-26 1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시장미 2005-12-27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시님- 네네 감사합니다! 으흐흐흐 ^-^;
 
창가의 토토 - 개정판
구로야나기 테츠코 지음, 김난주 옮김,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 / 프로메테우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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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인간의 조화가 하얀 도화지 위에 사뿐히 그려져 있다. 그것은 신뢰와 믿음을 바탕으로 한 인간적인 애정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 순수하고 깨끗한 아이의 눈을 통해 그려진 풍경이다. 그 안에 빠져들면 나도 모르게 하얀 도화지에 마음이 물들어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가슴에 물든 하얀 도화지 속의 풍경을 두세 번 반복하여 걸러낸 것들이 나의 뇌 속으로 옮겨지는 느낌을 받았을 때, 나는 비로소 나의 감정과 나의 이성이 하나 됨을 느낄 수 있었다.

도화지 속에 들어가 아이들과 함께 수다를 떨고 있는 나의 자아의 모습은 그것들의 아름다움의 동경의 표현이었고, 현실 속에서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내기 위한 저항의 표현이었다. 함께 느끼고 싶었고, 함께 생각하고 싶었고, 함께 알아가고 싶었다. 이제는 무뎌지고 무감각해진 나의 자이는 제법 어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꽤 많은 것을 공감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전제로 하였기에 하얀 도화지가 하나, 둘, 셋..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와 함께 새롭게 그려질 수 있었다.

호기심이 많고 천진난만하고 모든 것이 즐겁기만 한 토토는 도모에 학원에 입학하여 새로운 눈을 가지고 새로운 것들을 배워간다. 제법 독특한 면을 지니고 있었기에 일반 학교에서 획일화된 교육에 적응 하지 못했지만 도모에 학원의 교장선생님은 그런 토토에게 기존의 교육환경과는 다른, 자유롭고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환경을 조성해주신다. 뿐만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체험하는 것을 통해 토토와 친구들과 자연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그런 과정 속에서 토토는 더 밝고 더 신선하고 더 씩씩한 아이로 성장하게 된다.


도모에 학원의 교육에서 중요시 생각되는 것은 무엇보다 서로를 향한 믿음이었다. 전학을 온 토토의 이야기를 3시간이 넘도록 경청하며 들어준 교장 선생님의 모습은 교육자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덕목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했으며 토토에게 생기는 많은 문제 상황에서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알아갈 수 있도록 가만히 지켜봐주는 모습은 그 믿음의 깊이가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 국적이 다르거나 신체적으로 결함이 있는 친구를 모두 소중한 친구로 인식하도록 유도해 줌으로써 아이들을 향한 믿음이 다른 타인에게 주입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된다.


선생님과 친구들 사이에서 돈독한 믿음을 쌓아가는 토토는 그런 환경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그 노력이라는 것이 어떤 고뇌를 전제로 하고 있지는 않지만 주어진 상황 속에 만족하며 자신의 능력을 표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그런 과정 속에서 자신의 꿈을 만들어간다. 결국 도모에 학원은 전쟁으로 사라졌지만 토토의 내면에 는 그것이 남겨준 많은 흔적과 자취가 있었기에 도모에의 선생님이 되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학 권의 책 안에 또 다른 도모에가 존재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더 큰 꿈을 이루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꿈은, 나의 가슴속에서 소외되었던 꿈의 영상에 숨결을 불어넣어 주기에 충분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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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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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배경은 체코의 프라하, 러시아군 점령 이후 러시아의 군용기들은 밤마다 프라하 상공을 날았다. 그토록 아름다운 곳에 군용기의 침략은 별로 상상이 되지 않는다. 2년전 겨울 유럽 배낭여행 때 난 그 도시의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었다. 그때의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동화속 세상에 와있는 기분이라고 해야할까? 마치 내가 알고 있는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런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 공간과 그 느낌을 떠올렸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결코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공산주의니, 자유주의니, 체코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는 나에게 소설 속 상황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역사적인 상황과 지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 이 소설은 영화 '프라하의 봄'의 원작인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프라하의 봄'이 공산주의에서 민주주의로 변화되어 가는 것을 의미하고, 그 과정 속에서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어야 했으며 많은 청년들은 이데로올기라는 대명제 앞에 좌절감과 비극을 맞봐야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것은 저자 쿤데라가 청년 시절에 아무런 예행 연습도 없이 공산주의자로서의 삶을 선택했다가 좌절한 채 ‘생은 다른 곳에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고향을 떠나야 했던 체험의 산물이다. 그는 한 번의 리허설도 없이 무대에 서야 하는 인생의 무의미와 무용한 열정을 괴롭게 곱씹는다. 우연히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스스로 기획하고 준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실수를 교정할 수 없고, 인간은 전적으로 자신의 삶에 책임질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책임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난,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가 아닌가? ' 라고 묻는다.

그리고 그런 물음을 이 소설의 주인공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토마스, 프란츠, 사비나, 테레사 이 네명의 주인공들은 각자 다른 삶을 살아가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무거움과 가벼움이 공존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 네 주인공 모두 가벼움을 추구했다. 그것은 그들의 의지라기 보다는 저자 쿤데라가 의도, 인간은 모두 참을 수 없을만큼 가벼운 존재들이기에 그들이 가진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으리라.

그들은 나름대로 자신에게 익숙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 토마스는 한 여자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바람둥이 었으며 테레사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다른 여자들과 정사를 나눴다. 그는 사랑과 육체적인 관계는 별개라고 주장했으며 그런 그의 모습이 테레사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가져다 주는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반복' 그것은 반복이었다. 그 반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조금 의문스럽지만 난 그의 반복은 무거움이 아닌 가벼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에게 부여되는 많은 책임들을 회피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테레사에게 자신을 이해시키려고 시도한다. 그는 강했고, 테레사는 약했다. 그들은 애초부터 맞지 않았으면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었다. 왜냐하면 테레사는 무거움을 가진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정절과 그를 향한 사랑과 질투심은 토마스에게는 삶의 무게였으며 책임이었으며 억압이었다. 토마스는 끊임없이 그 무거움에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결국은 그녀에게 죽음마저도 강요한다.

테레사는 토마스의 가벼움을 이해할 수 없으며 토마스의 성적 가치관을 수용하지 못했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육체를 허락하는 것을 시도해보았지만 그런 행위는 결국 그녀에게 더 큰 상처와 고통을 남겼다. 그녀는 토마스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깨부수고 싶어했다. 토마스가 그녀에게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시도했던 것 만큼 그녀도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결국 그녀도 자신에게 부여된 모든 책임과 무게를 혼자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벼움을 찾으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토마스에게 테레사가 무거움이었다면 사비나는 가벼움이었다. 그녀의 삶의 자세는 토마스와 비슷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부여된 많은 것들로부터의 배반을 시도하며 살아왔다. 양친을, 남편을, 사랑도, 고향도.. 모든것을 배반했다. 그녀의 그 모든 배반의 목적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자신의 주위가 텅 빈 것을 느껴야 했다. 그녀의 배반의 목적은 그 '텅빈' 가벼움 이었다. 우리들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것은 언제나 전혀 미지의 것이다.사바나 또한 어떤 목적이 배반에 대한 그녀의 욕구 뒤에 숨어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가 추구한 것은 결국 가벼움이었다.

그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삶은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은 아무런 무게도 없는 하찮은 것이며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알게해 주었다. 이런 비슷한 생각을 영화 <나비효과> 에서 옆볼 수 있었다. 영화 <나비효과>의 주인공은 보통사람과는 다른 초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삶의 모습을 만들어간다. 그것은 시간의 다층성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A라는 시점에서 a,b,c,d,e... 등의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선택은 오직 하나이며 그 선택에 따라 다른 시간의 길로 들어선다. 그것은 미리 앞서 연습도 해보지 않고 무대에 등장하는 배우와 같다. 그것을 쿤데라는 최초의 시연(詩演)이라고 표현했다. 우리에게는 영화 <나비효과>의 주인공처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단 하나의 삶이 있고, 이것을 이전의 삶과 비교 할 수도 없거니와 이후의 삶에서 교정 할 수도 없다. 결국 우리는 모두 가볍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운 존재다.

쿤데라는 자신의 소설에 철학을 담았다. 내가 그 철학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의문스럽지만 그의 글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짜릿함'을  맛볼 수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복잡한 심정과 고민과 맞아 떨어져서 일 수도 있으며 내 자신이 느끼고 있었던 '존재의 가벼움' 이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통쾌함이며 위안감 이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믿는다. 가벼움이 인간의 본질이라고해도 실존은 본질을 우선할 수 있다는 것을.  또 소망한다. 나의 실존은 결코 가벼움이 아닌 실제적이고 참된 것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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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5-11-22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도 한번 찾아봐요~
프라하의 봄...줄리엣 비노슈의 풋풋한 모습 ^^

가시장미 2005-11-22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안그래도 영화로도 봐야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요?

국경을넘어 2005-11-23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은 저렇게 구속받지 않고 살면 월매나 좋을까 생각해봅니다.

가시장미 2005-11-23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마스를 말씀 하시는 건가요? 구속이라.. 흠.. 가벼움을 구속받지 않음으로 해석하신 건가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
 
꿈꾸는 간디학교 아이들 - 간디학교 교장 양희규의 '행복한 작은 학교' 이야기
양희규 지음 / 가야넷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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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이 책을 간디학교의 교장 양희규의 자서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물이라는 폴더에 분류하여 글을 쓰려고 한다. 그 이유는 이 책을 통해 간디학교에 대해서 알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저자의 철학과 삶이 녹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간디학교와 간디학교를 다니고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도 많이 담겨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의 바탕이 된 양희규 선생님의 교육철학과 인생관에 더 큰 감동을 느꼈기 때문에 이 책의 리뷰도 그것에 초점을 맞추려한다.

“새로운 학교가 시급하다.” 이것이 그가 이 책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다녔던 모교를 학교가 아닌 “수용소”라고 표현했다. 자유가 억압되고 사랑이 결핍된 곳을 교육의 현장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처럼 학교를 “수용소”라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저자와 마찬가지로 그곳에서 적지 않은 고통을 겪어야 했기에 암울한 곳으로 기억하고 있다. 저자가 생각하는 교육의 가장 큰 속성은 “자발성”“사랑”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나라 공교육 현장에서 가장 결핍되어 있는 부분이다. 내가 저자의 생각에 큰 공감을 표하는 것은 내가 그 현장에 있었을 때 그것의 결핍으로 큰 고통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내가 바라는 교육은 교사가 일방적으로 학생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일방통행적인 의사소통이 바탕이 되는 것이 아니었으며 권위를 앞세워 학생들의 입장을 전혀 존중해주지 않는 교육에서 “사랑”이라는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주입식으로 정보를 전달받고 그것이 단순히 암기하는 것에 그치는 교육은 사고력을 막고 창의력을 말살시키는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학창시절동안 불행하게도 그런 교육을 받아왔으면 그런 교육에서 성과를 올리지 못한다면 성적이 나쁜 문제아 취급을 당해야 했다.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생각을 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교육이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유도해주는 것이 교육이 아닐까? 나의 학창시절 동안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수없이 해야 만했으며 수많은 참고서에서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답’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해야 했다. 그것들은 모든 문제를 편협한 시각으로 해석하도록 유도하고, 획일화된 생각을 유도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선생님들도 그것에서 일탈했을 경우 그것은 엉뚱하고 이상한 생각으로 치부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그 원인이 선생님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제도가 가지고 있는 한계점이라고 해석했으므로 교육제도가 변화되기만을 소망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와 내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큰 위안을 느꼈으며 저자의 철학에 입각한 교육모델이 최선의 교육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현행 교육에서 놓치고 있는 많은 것들을 지적하고 있으므로 충분히 검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교육 모델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는 것은 피하고 싶다. 책의 몇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것이 그것을 모두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간디의 철학에 입각하고 있으므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심도 있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간디는 “그것이 진리인가? 진리이면 가고 진리가 아니면 가지 말아야지!” 라고 말했다고 한다. 진리에 대해서 어떤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괴리감은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다. 하지만 간디는 그런 고통과 갈등을 단순하게 해석한다면 인간의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저자의 삶에도 그 괴리감을 의지로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간디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간디학교는 개인의 능력보다는 공동체의 능력을 키워 함께 더불어 가는 교육을 지향하고 있다. 그것은 사회의 구조 악을 공동체를 만들어 저항했던 간디의 철학을 담고 있으며 개인주의가 팽배한 현실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부분으로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을 경쟁자로 의식하고 그 경쟁에서 승리했을 때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있다. 그런 교육의 속성이 현실성을 잃었다고 해도, 현실과의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소외된 아이들을 대상으로 이뤄진다고 해도 나는 그 교육이 우리나라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것에 큰 기쁨과 위안을 느꼈다.


단지, 머리의 능력을 확인하기 위한 교육보다는 삶의 의미를 모색할 수 있고, 자신만의 철학을 찾아 갈 수 있고, 그 안에서 자신의 꿈과 소신을 지켜갈 수 있는 교육이 되기 위해서는 간디학교가 지향하는 교육모델이 현행교육과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그것이 불가능한 소망이라 할지라도 나는 내가 몸담고 있는 곳에서 간디학교의 교육모델과 상당부분 일치하고 있는 나의 철학을 지켜나가면서 나의 제자들을 만나고 싶다. 그들이 자신의 생각을 자발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것이며 그들이 나의 생각과 나의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받는 것이 아니라 쌍방적인 의시소통을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작은 인식의 틀을 끊임없이 깨나갈 것이며 그 안에서 함께 탐구하는 공동체의식을 찾을 수 있도록 지도하고 싶다. 무엇보다 지식전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의사소통하는 것을 시도하여, 그들이 성장기에 느끼는 두려움과 좌절감을 덜어주고 싶다. 나의 이런 바램이 비록 계란으로 바위치는 행위로 여겨진다고 해도, 내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가는 것이고 내 자신을 기만하지 않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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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싶다 2005-11-14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은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것 같아요. ^^

가시장미 2005-11-14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핫! 그렇죠.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이죠 (물론 모든 공교육의 선생님들께서 그렇다는 말은 아니지만....) 제가 비록 공부는 못했지만서도 호기심이 많고 궁금증이 많았던 학생이었는데....어찌나 저의 생각에 귀기울여 주시지 않던지... 흑! 그래서 저는 학생들의 질문을 언제나 환영한답니다.

로드무비 2005-11-23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다큐로 방영한 적 있는데 선생들도 아이들도 참 매력적이고
좋아보였어요.
그런데 현행교육과 합의점을 찾긴 어렵다고 봅니다.
굉장히 신경 쓰신 리뷰군요.^^

가시장미 2005-11-23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합의점을 찾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겠죠. -_ㅠ 엉엉 신경 쓰고 싶었는데. 맘만큼 안된 리뷰인 것 같아요. 제안으로 너무 많은 주위를 돌려서요. 으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