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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의 토토 - 개정판
구로야나기 테츠코 지음, 김난주 옮김,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 / 프로메테우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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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인간의 조화가 하얀 도화지 위에 사뿐히 그려져 있다. 그것은 신뢰와 믿음을 바탕으로 한 인간적인 애정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 순수하고 깨끗한 아이의 눈을 통해 그려진 풍경이다. 그 안에 빠져들면 나도 모르게 하얀 도화지에 마음이 물들어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가슴에 물든 하얀 도화지 속의 풍경을 두세 번 반복하여 걸러낸 것들이 나의 뇌 속으로 옮겨지는 느낌을 받았을 때, 나는 비로소 나의 감정과 나의 이성이 하나 됨을 느낄 수 있었다.

도화지 속에 들어가 아이들과 함께 수다를 떨고 있는 나의 자아의 모습은 그것들의 아름다움의 동경의 표현이었고, 현실 속에서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내기 위한 저항의 표현이었다. 함께 느끼고 싶었고, 함께 생각하고 싶었고, 함께 알아가고 싶었다. 이제는 무뎌지고 무감각해진 나의 자이는 제법 어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꽤 많은 것을 공감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전제로 하였기에 하얀 도화지가 하나, 둘, 셋..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와 함께 새롭게 그려질 수 있었다.

호기심이 많고 천진난만하고 모든 것이 즐겁기만 한 토토는 도모에 학원에 입학하여 새로운 눈을 가지고 새로운 것들을 배워간다. 제법 독특한 면을 지니고 있었기에 일반 학교에서 획일화된 교육에 적응 하지 못했지만 도모에 학원의 교장선생님은 그런 토토에게 기존의 교육환경과는 다른, 자유롭고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환경을 조성해주신다. 뿐만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체험하는 것을 통해 토토와 친구들과 자연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그런 과정 속에서 토토는 더 밝고 더 신선하고 더 씩씩한 아이로 성장하게 된다.


도모에 학원의 교육에서 중요시 생각되는 것은 무엇보다 서로를 향한 믿음이었다. 전학을 온 토토의 이야기를 3시간이 넘도록 경청하며 들어준 교장 선생님의 모습은 교육자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덕목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했으며 토토에게 생기는 많은 문제 상황에서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알아갈 수 있도록 가만히 지켜봐주는 모습은 그 믿음의 깊이가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 국적이 다르거나 신체적으로 결함이 있는 친구를 모두 소중한 친구로 인식하도록 유도해 줌으로써 아이들을 향한 믿음이 다른 타인에게 주입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된다.


선생님과 친구들 사이에서 돈독한 믿음을 쌓아가는 토토는 그런 환경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그 노력이라는 것이 어떤 고뇌를 전제로 하고 있지는 않지만 주어진 상황 속에 만족하며 자신의 능력을 표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그런 과정 속에서 자신의 꿈을 만들어간다. 결국 도모에 학원은 전쟁으로 사라졌지만 토토의 내면에 는 그것이 남겨준 많은 흔적과 자취가 있었기에 도모에의 선생님이 되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학 권의 책 안에 또 다른 도모에가 존재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더 큰 꿈을 이루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꿈은, 나의 가슴속에서 소외되었던 꿈의 영상에 숨결을 불어넣어 주기에 충분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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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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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배경은 체코의 프라하, 러시아군 점령 이후 러시아의 군용기들은 밤마다 프라하 상공을 날았다. 그토록 아름다운 곳에 군용기의 침략은 별로 상상이 되지 않는다. 2년전 겨울 유럽 배낭여행 때 난 그 도시의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었다. 그때의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동화속 세상에 와있는 기분이라고 해야할까? 마치 내가 알고 있는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런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 공간과 그 느낌을 떠올렸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결코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공산주의니, 자유주의니, 체코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는 나에게 소설 속 상황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역사적인 상황과 지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 이 소설은 영화 '프라하의 봄'의 원작인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프라하의 봄'이 공산주의에서 민주주의로 변화되어 가는 것을 의미하고, 그 과정 속에서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어야 했으며 많은 청년들은 이데로올기라는 대명제 앞에 좌절감과 비극을 맞봐야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것은 저자 쿤데라가 청년 시절에 아무런 예행 연습도 없이 공산주의자로서의 삶을 선택했다가 좌절한 채 ‘생은 다른 곳에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고향을 떠나야 했던 체험의 산물이다. 그는 한 번의 리허설도 없이 무대에 서야 하는 인생의 무의미와 무용한 열정을 괴롭게 곱씹는다. 우연히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스스로 기획하고 준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실수를 교정할 수 없고, 인간은 전적으로 자신의 삶에 책임질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책임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난,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가 아닌가? ' 라고 묻는다.

그리고 그런 물음을 이 소설의 주인공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토마스, 프란츠, 사비나, 테레사 이 네명의 주인공들은 각자 다른 삶을 살아가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무거움과 가벼움이 공존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 네 주인공 모두 가벼움을 추구했다. 그것은 그들의 의지라기 보다는 저자 쿤데라가 의도, 인간은 모두 참을 수 없을만큼 가벼운 존재들이기에 그들이 가진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으리라.

그들은 나름대로 자신에게 익숙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 토마스는 한 여자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바람둥이 었으며 테레사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다른 여자들과 정사를 나눴다. 그는 사랑과 육체적인 관계는 별개라고 주장했으며 그런 그의 모습이 테레사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가져다 주는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반복' 그것은 반복이었다. 그 반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조금 의문스럽지만 난 그의 반복은 무거움이 아닌 가벼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에게 부여되는 많은 책임들을 회피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테레사에게 자신을 이해시키려고 시도한다. 그는 강했고, 테레사는 약했다. 그들은 애초부터 맞지 않았으면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었다. 왜냐하면 테레사는 무거움을 가진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정절과 그를 향한 사랑과 질투심은 토마스에게는 삶의 무게였으며 책임이었으며 억압이었다. 토마스는 끊임없이 그 무거움에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결국은 그녀에게 죽음마저도 강요한다.

테레사는 토마스의 가벼움을 이해할 수 없으며 토마스의 성적 가치관을 수용하지 못했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육체를 허락하는 것을 시도해보았지만 그런 행위는 결국 그녀에게 더 큰 상처와 고통을 남겼다. 그녀는 토마스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깨부수고 싶어했다. 토마스가 그녀에게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시도했던 것 만큼 그녀도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결국 그녀도 자신에게 부여된 모든 책임과 무게를 혼자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벼움을 찾으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토마스에게 테레사가 무거움이었다면 사비나는 가벼움이었다. 그녀의 삶의 자세는 토마스와 비슷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부여된 많은 것들로부터의 배반을 시도하며 살아왔다. 양친을, 남편을, 사랑도, 고향도.. 모든것을 배반했다. 그녀의 그 모든 배반의 목적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자신의 주위가 텅 빈 것을 느껴야 했다. 그녀의 배반의 목적은 그 '텅빈' 가벼움 이었다. 우리들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것은 언제나 전혀 미지의 것이다.사바나 또한 어떤 목적이 배반에 대한 그녀의 욕구 뒤에 숨어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가 추구한 것은 결국 가벼움이었다.

그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삶은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은 아무런 무게도 없는 하찮은 것이며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알게해 주었다. 이런 비슷한 생각을 영화 <나비효과> 에서 옆볼 수 있었다. 영화 <나비효과>의 주인공은 보통사람과는 다른 초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삶의 모습을 만들어간다. 그것은 시간의 다층성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A라는 시점에서 a,b,c,d,e... 등의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선택은 오직 하나이며 그 선택에 따라 다른 시간의 길로 들어선다. 그것은 미리 앞서 연습도 해보지 않고 무대에 등장하는 배우와 같다. 그것을 쿤데라는 최초의 시연(詩演)이라고 표현했다. 우리에게는 영화 <나비효과>의 주인공처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단 하나의 삶이 있고, 이것을 이전의 삶과 비교 할 수도 없거니와 이후의 삶에서 교정 할 수도 없다. 결국 우리는 모두 가볍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운 존재다.

쿤데라는 자신의 소설에 철학을 담았다. 내가 그 철학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의문스럽지만 그의 글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짜릿함'을  맛볼 수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복잡한 심정과 고민과 맞아 떨어져서 일 수도 있으며 내 자신이 느끼고 있었던 '존재의 가벼움' 이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통쾌함이며 위안감 이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믿는다. 가벼움이 인간의 본질이라고해도 실존은 본질을 우선할 수 있다는 것을.  또 소망한다. 나의 실존은 결코 가벼움이 아닌 실제적이고 참된 것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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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5-11-22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도 한번 찾아봐요~
프라하의 봄...줄리엣 비노슈의 풋풋한 모습 ^^

가시장미 2005-11-22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안그래도 영화로도 봐야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요?

국경을넘어 2005-11-23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은 저렇게 구속받지 않고 살면 월매나 좋을까 생각해봅니다.

가시장미 2005-11-23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마스를 말씀 하시는 건가요? 구속이라.. 흠.. 가벼움을 구속받지 않음으로 해석하신 건가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
 
11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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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유명하지 않은 저자의 책이었다면 내가 그 수많은 책들 중에서 이 책을 선택했을 이유는 없었을 것 같다. 대략적인 내용은 짐작하고 있었으나 파울로 코엘료만의 철학으로 내가 예상하는 이야기가 아닌, 즉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방향에서 접근하고, 내가 가지지 못한 안목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여 어떤 희열감을 전해줄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이 책은 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기대가 컸기에 실망감이 생긴 것인지, 아니면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 性을 통해 자아를 발견한다는 것이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과 많이 대립되기 때문에 실망을 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은 정신분석학을 배우면서 프로이트 리비도(libido)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그의 이론에 비판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던 이유와 같은 맥락을 이룬다고 생각된다.

이 책의 주인공 마리아는 창녀다. 그녀는 평범한 여성이었으며 누구나 그렇듯이 자신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누구나 그렇듯이 내면에는 자신의 성공과 행복을 갈망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지나 性에 눈을 뜨게 되고, 자신의 내면에 성욕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은 몸소 체험하게 된다. 그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겪는 성장과정을 지나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육체가 어른이 되었을 뿐 그녀의 자아는 정체성을 찾지 못했으므로 그녀에게 다가오는 남들과는 다른 환경에 직면해야 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욕구에 이끌려 창녀의 길을 택하게 된다. 자신의 性을 매매하는 것은 자유이며, 그것이 사회적으로 옳지 못한 행동이라는 지탄을 받았을 때 자신에게 돌아올 대가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性행위를 하는 동안 그녀가 상대에게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제공하는 위안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여 받는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창녀의 길을 택했을 때 마치 운명의 힘에 의존하듯,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운명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에는 유감을 표하고 싶다. 그것은 그녀에게 표하는 유감이 아닌 저자에게 표하는 유감일 수도 있다. 즉, 자신의 선택을 자신의 성향에 귀인 시켜 이해하려 하는 것보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상황에 귀인 시켜 이해하려고 했다는 점에 유감을 표하고 싶다. 그것을 환경에 적응하면 살아가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방어기제라고 이해한다면 그 유감도 별로 대수롭지 않는 것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그런 방식으로 절박한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지는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내면에 꿈틀거리는 욕망과 性추동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자신을 이끈 운명의 힘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무의식이 의식화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스스로의 선택을 합리화 시키면서 행동과 의식사이에서 모순을 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저자는 프로이트의  리비도(libido)설과 같은 맥락에서 인간을 이해하고 있다. 리비도는 성욕보다는 넓은 개념으로 인간의 내면에 있는 무의식에서 비롯된 일종의 에너지이다. 그 에너지가 어느 곳에 고착되느냐에 따라서 인간을 이해하는 것으로 그것은 자신의 신체에 고착되기도 하고, 타인에게 고착되기도 한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대부분의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감정의 원인이 리비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부모와 자식의 사랑과 친구들 사이의 우정과 자기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는 감정에도 性추동을 바탕으로 한 에너지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대부분의 이론이 그렇듯이 알 수 없는 무의식의 영역에 의해 어떤 에너지가 발생된다는 것은 의식적으로 확인이 불가능 하므로 인과오판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수많은 감정은 여러 변수에 의해서 조작될 수 있으므로 그것의 원인을 단지 본능적인 性추동에 의해서 설명하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마리아 역시 性추동을 바탕으로 발생된 감정과 에너지에 의존하여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많은 사람들을 이해한다. 마치 그녀의 머릿속은 性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과 자긍심으로 가득차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삶과 자아에게 던지는 수많은 상념을 단지 性을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면서 해소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자신이 속하는 인간이라는 개체와 그 인간들을 둘러싼 환경이 만들어낸 세계를 잘 모른다. 하지만 모른다고 해도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아주 복잡 미묘한 정신활동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정신활동에는 분명 무의식의 영역이라 불리는 性추동도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파울로 코엘료가 그런 발상을 가지고 이 책을 썼다고 단정 짓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의 글에 등장한 마리아는 그런 발상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묘사되었고, 그것이 나에게 불편함을 느끼게 했다.

 

그 불편함은 어쩌면 (프로이트의 말대로) 나의 업압되어있는 性적 추동이 의식화 되는 것이 두려워 부인이라는 방어기제를 쓰면서 발생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드러내는 것이 나의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발생된 괴리감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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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18
헤르만 헤세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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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산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라고 한다.


삶은 모순으로 가득하고, 나의 세계는 그 모순과 맞물려 또 다른 모순을 낳는다. 내가 삶을 이해할 수 없으며, 내가 나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기에 나는 내가 만들어 놓은 알 속에 갇혀있다. 그 딱딱한 껍질은 모순을 거듭할수록 단단해지며 그 딱딱한 껍질을 깨부수는 행위는 모순이 거듭될수록 위험해진다. 하지만 새는 본래 알을 깨고 세상을 향해 비상하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기에 나의 본능도 내가 만들어놓은 세계에 갇혀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모순을 거듭하더라도 언젠가는 비상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소망을 품고,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한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 처절한 몸부림이 나를 비로소 새로 거듭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면, 그 처절한 몸부림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나의 몸뚱이가 찢기고, 뭉개져 앙상한 뼈만 남게 된다고 할지라도…….


소년 싱클레어가 성장하면서 경험하는 사건들이 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많은 것들과 맞물려 수많은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을 간접적으로 바라보면서 그에게 투영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어느 대상에 내 자신을 투영시켜 간접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내 자신과 나를 분리시켜 객관화 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줌과 동시에 나의 인식의 틀 안에서 또 다른 인식의 틀을 내가 이미 만들어 놓은 편협한 세계에 한정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 가능한 것들의 모순 사이에서 나는 삶의 모순을 발견하고, 내 자신의 모순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내가 바라보는 세계와 나를 바라보는 세계가 동시에 공존한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그 공존하는 것들 사이에 하나의 객체로써의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다는 것이 전부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앎이란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추론과정일 뿐이며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나의 감각과 감정을 동반되는 정신세계일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불확실함의 연속이며 모호함과 애매함으로 가득한 허상일 뿐이다.


그것은 알에 갇혀있는 나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자연스러운 현상에 의문을 던지고, 데미안의 존재에 끊임없는 회의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나의 정신세계의 혼돈이 나의 알을 깰 수 있는 아주 작은 시도가 된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며 그런 인정이 모순을 낳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또 다른 모순을 낳을수록 그 시도의 강렬함이 더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이 나의 알에게 아주 작고 미세한 ‘금’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이 모순으로 가득한 글이 나의 가슴을 울린다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문자들의 움직임이 나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것이 의심스러우면서도 끊임없이 나의 뇌리를 스치는 섬광들이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으므로 나의 손가락은 통제력과 자제력을 상실했다. 어쩌면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인지 나의 섬광들이 문자를 타고 움직이는 것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모호함 속에서 내가 이 책의 리뷰를 쓴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알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므로 나의 알이 깨지는 그 날까지 나는 나의 손가락의 움직임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다.

알은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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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5-11-10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드는 생각.
20여년 전에 읽었던 고전들을 지금 다시 읽으면 어떻게 읽힐까?
아들네미 읽으라고 사준 데미안의 첫머리를 얼마전에 조금 읽었는데.....
(요즘애들은 작은 글씨 세로로 박힌 옛날 전집은 보려고도 안하지... )
음... 딱 우리 아들내미 또래 이야길세.......
음..... 다음에 마저 읽어봐야겠다...... 지금 읽으면 어떻게 다가올까?

가시장미 2005-11-10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 언니~ 그 아들내미가 어느 또래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지금봐도 이해하기 어려운 고전이라. 아이들과 수업을 하면서 5번 가까이 읽었는데도 여전히 저의 인식의 틀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편협된 시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 틀을 깨는 발상은 아이들이 제시해줄때면 아주 큰 희열을 느끼지만 그와 동시에 굉장히 초라한 자아를 발견하지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저의 알이 깨어질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그 초라함이 곧 자긍심으로 변하기도 한답니다. ^-^
아마, 지금 읽으시면 그 때의 '알'과 지금의 '알'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시겠죠?!

2005-11-10 0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시장미 2005-11-10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 저도 그 글귀 아주 마음에 와 닿았어요. 찌리리~~~ 했었죠. ^-^
격려해주셔서 감사드려요. 비밀리에 감사해야 하는 글만 써주시는 것 같아요. 으흐흐
 
노인과 바다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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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헤밍웨이의 걸작 중의 하나이며, 그가 1954년 노벨 문학상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인간은 상어로 상징되는 죽음에 의하여 패배하지만, 용기와 자기극복으로 과감하게 죽음과 대결하는 모습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존엄한 존재인지를 실존주의 철학을 담아 표현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간결하고 힘찬 문체는 삶을 향한 인간의 의지를 드러내기에 충분했는데 특히 “인간은 싸움에 패배하려고 태어난 것은 아니야. 죽었으면 죽었지, 패배하는 법은 없어.” 라는 문구에서는 최선을 다한 싸움에서 적에게 쓰러지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단지 파괴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담겨있었고, 이는 강인한 인간의 힘을 믿는 헤밍웨이 작가 정신을 요약한 말이라고 생각되었다. 즉, 그것은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닥치더라도 거기에 굴복하는 것이야말로 패배라 할 수 있고, 그것에 대항해 끝까지 싸우는 것은 진정한 인간의 힘을 보여주는 것일 뿐 결코 패배가 아니라는 것이다.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어부의 생활을 천직으로 여기는 노인이 85일째 되던 날 18척이나 되는 큰 고기를 만나고 사흘간의 힘들고 고단한 시간을 끝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으나 결국 상어 떼를 만나 물고기는 뼈만 남게 된다. 결국 그가 항구에 돌아왔을 때 남은 것이라고는 18척의 물고기가 남겨놓은 흔적뿐 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으로써 우리가 가질 수밖에 없는 삶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즉, 인생은 ‘공수레 공수거’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쳐야 하고 그 순간 자신이 이룩한 성공과 업적이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들이 대단하고 위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없어진 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한 노인은 그 허망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바다로 나가길 꿈꾸면서 사자 꿈을 꾸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그가 인간으로써 가질 수밖에 없는 숙명을 수용하고, 자연의 섭리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인생의 결과물보다는 그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이겨내는 과정에서야 비로소 자신이 살아있음을 재확인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이라는 공통적인 속성을 지니고, 삶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각자 다른 삶을 꿈꾼다. 우리의 모습은 너무도 다르고,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도 너무도 다르다. 하지만 우리 모두의 공통점은 그것에 순응하고 그것에 대항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노인이 보여주는 삶의 자세와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 책이 고전으로 우리에게 널리 읽혀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책에 등장하는 노인의 모습은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이데아’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습은 그 이데아의 속성이 조금 드러나 있는 모습을 하고 있을 뿐 절대적인 이데아의 속성을 지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이데아의 모습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조율해나가고 자신이 추구해야하는 인생의 목표를 수정해가면서 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에 모습에 도달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노인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 해 가는 것이다. 결코, 완벽하지 않지만 완벽을 지향하는 인간의 모습은 아이러니 하지만 아름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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