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폰 잔폰 짬뽕 (동아시아 음식 문화의 역사와 현재) / 주영하 / 2009년 10월 15일


 
위 : 나가사키 시카이로의 잔폰 / 가운데 : 한국에서 화상이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의 짬뽕 / 아래 : 나가사키 시후 중국음식점의 자장멘
 


경계를 넘나드는 음식(나가사키 잔폰과 화교 음식의 확산) 

 

최근, 한국의 짬뽕이 나가사키의 시카이로라는 중국식당에서 유래했다는 정보를 알고 있는 한국인들이 제법 늘었다. 인터넷 웹사이트를 검색해 보면, 직접 그 현장에 다녀와서 사진과 감상의 글을 올려놓은 사람들도 있다. 아마도 지금의 ‘시카이로’식당 2층에 마련된 ‘잔폰박물관’ 때문에 그 역사성이 널리 퍼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중략
 
‘잔폰’이란 이름이 개업 초기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에는 ‘잔폰’이 아니라, ‘시나우동’ 이었다. 여기에서 ‘시나’은 중국을 가리키는 말로, ‘차이나’의 일본식 한자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1910년대에 들어와서 어느 순간 ‘시나우동’이란 이름과 함께 ‘잔폰’이란 이름으로도 불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왜 이런 변화가 생겼을까?
사실 ‘잔폰’이란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그중 하나가 일본어 ‘잔폰’에서 나왔다는 주장이다. (잔폰 : 뒤섞이거나 번갈아 하는 일을 가리키는 형용사) 또 다른 주장은 푸젠(福建)의 발음으로 ‘츠판(밥을 먹다)’이 ‘차폰’혹은 ‘소폰’으로 발음되는데, 그것이 ‘잔폰’의 발음과 거의 유사하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이 음식을 즐겨 먹자, 중국인을 대표하는 음식이라고 여긴 일본인들이 그들의 인사말인 ‘차폰’을 흉내 내어 음식 이름으로 파용했다는 주장이다.
 
중략
 
1910년 조선이 일제에 강제로 병합된 이후, 조선에 살던 화교들은 일본 본국에 살고 있던 화교들과 같은 정치경제적 영역에 포섭되었다. 더욱이 일제가 조선을 교두보로 중국을 침략할 준비를 하는 동안, 조차지였던 상하이는 나가사키를 통해서 일본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렇게 조선의 화교와 일본의 화교는 1945년까지 일제라는 동일한 정치경제적 영향권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한국의 중국식당에서도 다쿠앙이 무료로 나온다. 심지어 한국식 자장면이 나가사키의 중국식당에서 판매된다. 자장면은 분명히 일제강점기에 한국의 화교들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이들이 나가사키의 화교들과 연결되면서 한국식 자장면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그 대신에 잔폰이 한국으로 들어왔다. 이 모두가 일제 아래에서 한반도와 일본의 화교가 공생을 길을 걸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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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평양까지 55년

오랜 세월 먼 길 돌아 열린 남북정상회담…세계의 톱뉴스

근현대사신문 19호 2면 "서울에서 평양까지 55년"에 실린 사진

[2000년6월15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첫 남북정상회담이 성공리에 끝났다. 2박 3일의 평양 방문을 마친 김 대통령은 ‘6․15남북공동선언’이라는 큰 선물을 안고 순안공항을 떠나 김포공항으로 돌아왔다. 북한의 취재 허락을 받지 못해 서울의 프레스센터에 진을 치고 방북한 한국 언론의 보도를 지켜보던 1,000여 명의 외국 기자들은 ‘지구상의 마지막 정치적 장벽’이 무너지는 순간을 잇따라 본국에 타전했다.
김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위해 공군 1호기 편으로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것은 지난 13일 오전 10시 27분. 비행기 앞문이 열리자 김 대통령은 트랩 아래 자리한 김 위원장과 눈인사를 나누며 함께 손벽을 쳤고, 잠시 후 승강구를 내려가 두 손을 맞잡고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나눴다. 약 20분에 걸친 공항 환영 행사를 마친 두 정상은 포드사의 링컨 컨티넨탈 리무진을 타고 백화원 영빈관으로 이동하는 도중 차 안에서 사실상 최초의 정상회담을 열었다. 길가에는 60만 명의 평양 시민이 몰려나와 꽃술을 흔들며 두 정상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날 만찬 때 김 위원장은 “망국의 분열로 이어진 20세기 민족사는 외세의 간섭과 그에 영합한 뿌리 깊은 사대주의의 후과”라며 자주 평화통일을 다짐했고, 김 대통령은 답사에서 “21세기는 무한 경쟁의 시대”라면서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우리 민족도 남북이 하나 되어 힘을 합쳐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기존의 적십자회담 등 남북 접촉과 달리 양측 최고 책임자가 통일 의지를 한목소리로 밝혔다는 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불과 1년 전 서해교전으로 충돌했던 남북 관계가 화해의 길로 들어선 것이 무엇보다 큰 성과지만, 실질 협력의 분야에서는 특히 경제 협력에 거는 재계의 기대가 크다. 김 대통령 자신이 햇볕정책(대북 화해 협력 정책)은 일방적 퍼주기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이익이 되는 일이라고 밝혔듯이 기업인들은 이번 정상회담으로 한국 자본이 북한의 값싸고 질 좋은 노동력과 결합해 시장을 넓히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라고 있다. …중략… 구본무 LG회장,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의 이원호 부회장,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는 조만간 대북 사업을 구체화해나갈 뜻을 밝혔다.
한반도 주변 4강의 주요 언론도 이번 회담을 대서특필해 남북 관계가 세계정세에 끼치는 영향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줬다. 『워싱턴포스트』는 “남북 화해는 장기적으로 아시아 주둔 미군과 국가 미사일 방위 체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라고 분석했고, 중국의 『런민르바오』는 “평화와 발전이라는 세계적 주류에서 한민족의 자주와 평화통일을 위한 새로운 길을 열었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중략… 2000년 6월, 세계의 톱뉴스는 ‘한반도’였다.

근현대사신문 현대 19호 2면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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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헌 철폐, 독재 타도…종철이·한열이를 살려내라  

6월민주항쟁, 한국의 정치를 바꾸고 역사를 바꾸다.
  

 
 민주화를 열망하며 명동성당으로 구름처럼 몰려가는 시민들
 


[1987년 6월]
역사에 길이 남을 한달이었다. 부당한 방법으로 집권을 연장하려던 군부정권의 뜻이 시민들의 민주 항쟁에 의해 꺾였다.
정부는 본래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4월 13일 “현행 헌법대로 대통령을 선출하겠다.” 라고 발표하며(4·13호헌조치) 민주화 염원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체육관 대통령’ 제도를 유지하고, 후임자를 자기 뜻대로 지명하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곧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계기는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23)을 연행한 경찰이 10시간이 넘는 물고문을 가해 박씨를 숨지게 만든 사건이었다. “책상을 탁 치자 박씨가 억 하고 죽었다.” 라고 변명하던 경찰은 1월 19일 마지못해 고문 사실을 인정하고 말단 경관 2명을 구속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하려 했다. 그러나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정권 차원에서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축소·조작하려 했음을 폭로했다. ‘물고문 중 질식사’ 소견을 낸 부검의에게 사인을 심장마비로 하라고 협박하고, 증거 인멸을 위해 시신을 화장하려 한 사실 등이 드러난 것.
국민은 부도덕한 정권에 치를 떨었고,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거리 시위가 확산됐다.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면서 시위는 조직적으로 변해갔다. 그런데 경찰 진압 과정에서 또 한 명의 젊은이가 희생됐다. 이달 9일 연세대생 이한열(21)이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을 맞아 중태에 빠진 것. 이것이 불씨가 돼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며 전 국민적 민주 항쟁으로 발전했다. 10일 전국 22개 도시에서 열린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각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에는 24만여 명이 모였다. 그런데 이날 전두환 정권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다음 ‘체육관 대통령’후보로 지명하며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음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했다. 이에 항쟁은 들불처럼 번졌다. 최루탄 추방 대회(18일), 평화 대행진(26일)으로 이어지며 시위대는 100만 명 이상으로 늘었다. ‘넥타이 부대’로 불리는 회사원들과 중산층까지 동참하면서 “호헌 철폐, 독재 타도”, “직선제 쟁취하여 군부독재 타도하자”, “종철이를 살려내라, 한열이를 살려내라.” 라는 함성을 경찰력만으로 막아 내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머뭇거리던 야당도 24일 여야 회담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지, 평화 대행진에 합류하겠다고 밝히며 정권을 압박했다.
시위대를 “불순 폭력 세력”으로 몰아가던 정부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정권 내부에서는 1980년 5월 광주에서처럼 다시 군대를 투입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했으나, 미국의 반대와 내년 올림픽 개최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 등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29일 노태우 대표가 돌연 직선제 개헌을 청화대에 건의하겠다고 밝히면서 국면이 전환되고 있다(6·29선언).
많은 국민은 이를 ‘항복 선언’으로 받아들이며 환호하고 있지만, 6·29선언은 계산된 책략이라는 비판도 많다. 항쟁에 밀려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자 노 대표가 역사적 결단을 내린 것처럼 청와대에서 연출한 쇼라는 것. 그러나 어떤 시도도 거대한 민주화 흐름을 막지는 못할 전망이다.
  

근현대사신문(현대 15호)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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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사이에 삶의 길이 있고 

 

(인생을 알게 하는 우리 수필 21선) (사계절1318문고 3번째)

전우익 도종환 강은교 석지현 백기완 장준하 권정생 김정한 노무현 
최성수 김형석 윤명혜 장기표 정진홍 최정현 이상석 김영현 신영복 최현배 김명수 루쉰
강혜원 엮음



나의 인생, 나의 분노(노무현)


우리 또래의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나의 어린 시절도 무척이나 가난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상고3학년 시절의 초겨울, 잠잘 곳이 없어 학교 교실에서 이틀 밤을 잤던 일이다. 밤새 이를 악물고 얼마나 떨었던지 아듬 날, 이가 아파서 온종일 밥을 한 숟가락도 먹을 수 없었다. 그런 고생과 설움 속에서 나는 이 담에 커서 출세를 하면, 그 지긋지긋한 고생을 벗어나 설움도 갚고, 나처럼 고생하며 사는 사람을 도와 주리라 다짐하곤 했다. 

(중략)

막상 판사가 되고 보니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돈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되고, 알아 주는 사람 많고, 굽신거리는 사람도 많아 편한대로 생각하면 정말 살판나는 세상이었다. 1981년, 소위 부림 사건이란 시국 사건의 재판을 밭고서부터 나의 이기적인 삶의 껍질은 깨지기 시작했다. 부산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청년 20여명이 「역사란 무엇인가」, 「전환 시대의 논리」등 사회 과학 책을 읽었다 하여 최고 57일간 대공분실에 불법으로 갇혀서 고문에 의해 좌경용공으로 조작된 사건이었다. 

(중략)

모진 고통 속에서도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던 청년들, 어느 한 사람 예외 없이 학교 성적이 우수하고, 부모님에게는 효성이 지극했던 성실한 청년들, 도대체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가? 오로지 죄가 있다면, 순수하게 불타던 이상이 죄였고, 순수한 이상을 가진만큼 남달리 이웃을 사랑하고, 조국의 장래를 누구보다 걱정하며 뜨겁게 사랑했고, 불의에 대해 용감히 항거한 것이 죄였다. 

그 때부터 나는 학생, 노동자 등의 무료 변론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일을 내 일처럼 도맡아하게 되었다. 권력을 쥔 사람들과 재벌이 한통속이 되어 법을 맘대로 주무르는 것을 보면, 나 혼자 이 때위 무료 변호 몇 건 해봤자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깊은 절망에 빠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양심을 지키기 위해 고민하는 순수한 사람들의 모습이 나의 망설임을 확고한 신념으로 바꾸어 주었다. 

(중략)

그 이후 나는 암울한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 인권 변호사를 지냈고, 국회 의원으로 당선이 되어 이른바 청문회 스타가 되기도 했다. 내가 국회 의원이 되었던 것은 잘못되어 가는 정치에 대한 위기 의식도 있었고, 나를 죄인으로 기소한 검찰에 맞서 국민의 심판을 받고자 함이었으며, 민주주의를 위해 기꺼이 한 몸 던지고자 함이었다. 


사계절지기 曰.

2010년 5월 23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서거하신지 1주년 되는 날입니다. 추모 콘서트등 다양한 행사가 열리기도 했는데요.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네요 ; 시간은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더라도 그 분의 살아 생전 정치적 신념과 소탈하셨던 모습은 오랫동안 우리 가슴에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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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눈을 들면 넓은 세상이 보인다

사계절 1318문고 네 번째
윤구병 도종환 백기완 이호철 이이화 신경림 곽재구 
이옥분 김구 장준하 함석헌 김진경 박완서 고재종 김종철
강혜원 엮음

 
이이화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문학에 열중하다가 한국학에 매력을 느껴 중퇴하고 역사분야로 방향을 돌렸다. 이이화는 역사적 인물을 오늘의 관점에서 재평가하고, 재미있고 쉬운 문체로 역사를 대중화하는 등 학벌이나 권위라는 기성질서에 짓눌리지 않고 역사 연구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냈다.
  



 백두산을 뵈옵다
  
매표소 입구 옆에 세워진 ‘장백산 간개(長白山簡介)’라는 안내판에 눈길이 갔다. 그 소개판 앞에는 “우리나라 길림성 남부 중국·조선 양국의 경계선에 웅건위대하고 장건한 높은 산이 있으니 장백산이라고 한다.”고 했다.
이어 하, 주, 진 시대에는 장백산 또는 불함산, 당 시대에는 태백산이라 불렀으며, 명·청 시대에는 장백산이라 부르면서 시조 발상의 땅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중략… 


그런데 이 안내판에는 조선족이 백두산으로 일컬었다는 기록이 없고, 또 조선족이 나라를 연 산 또는 민족의 발상지로 여긴다는 기록도 전혀 없었다. 연변 조선족 인민 정부는 왜 백두산이라는 이름과 조선족 발상지라는 내용을 쓰지 않았을까? …중략…

연길에서 이런 주의를 받은 적이 있다. “간도가 우리 땅이라거니, 백두산이 우리 산이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이런 까닭 때문에 백두산이라는 말이 빠진 것이 아닐까? 이 안내판 앞에서는 새삼스레 백두산 경계 문제를 떠올렸다. …중략…

천지도 동강이 나 있었다. 백암봉과 백운봉을 경계로 하여 중국과 조선이 반절씩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계는 6·25가 끝나고 국경을 확정지을 적에 이루어진 경계라 한다. 백두산, 그리고 간도 일대의 중국과 우리나라 국경은 어떻게 이루어졌던가?
청나라는 백두산에 봉금을 만든 이후, 강희제의 명에 의해 백두산의 경계를 조사했다. 2차에 걸쳐 조사를 끝낸 그들은 1712년, 목근등을 시켜 조선과 함께 국경을 확정짓게 했다. …중략…

이 분쟁은 1883년, 1885년, 1887년에 걸쳐 다시 일어났다. 이때 결정을 보지 못했는데, 1907년 일제는 간도가 조선 땅이라고 하여 조선인 보호를 위해 통감부 간도 파출소를 설치했다. 그 후 1909년, 일제는 간도와 백두산 일부를 포기하고, 도문강으로 국경을 활정 짓는다는 이른바 간도 협약을 체결했다. 그 대신 남만 철도 부설권을 따낸 것이다. 이 철도 부설은 만주 침략의 전초를 위한 음모에서 나온 것이다. 그 후 백두산 천지의 경계는 애매하게 되었다. …하략…




사계절지기 曰
'내 땅을 밟고 백두산을 다시금 올라가겠다" 라는 다짐을 하며 이야기는 끝난다. 총 15개의 수필 중에서 이 수필이 가슴에 남는 이유는 남북이 분단된 지금 서울, 홍콩, 상해, 북경등지를 거쳐 연길에 도착하기까지 비행기로 열두시간을 소모하며 백두산에 오른 지은이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다가 중국과의 영토문제나 간도문제에 관한 현실적인 문제도 언급하면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풀어야 할 숙제를 던져 주어, 읽은 후에 진지한 생각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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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7-04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국의 동북아 공정 때문에 김정일 사후에 한반도 북쪽의 영토가 어찌될지 심란한...
필진에 고재종 시인도 보이네요.
어제 광주방송에서 가사문화권 누정 소개하는 프로에서 담양문화원 사무국장이 고재종 시인이 나와서 방송 후 잠시 통화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