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들어간 사람들 - 인물화 속 사람들에 얽힌 흥미진진한 역사적 이야기들
이여신 지음 / 예문당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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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재미없어

 

요즘 주변에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 많다. 교육부에서 한국사를 필수로 하겠다는 이야기도 하고, 이에 따라 한국사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의 가치도 높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를 공부하는 게 재미있냐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재미없다는 말이 나온다.

 

역사를 아는 것이 재미없는 이유는 시간 순, 사건 순으로 배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교에서도 사회문화적인 역사보다 정치적 역사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하나의 흐름이다. 역사를 하나의 흐름으로 파악하지 않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단절된 사건으로만 배운다면 당연히 재미가 없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역사에 대해 이야기로 배우면 어떨까.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흥미와 재미를 주는 힘이 있다. 한 인물에 대한, 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이야기 속에 나타난 역사를 간접적으로 배운다면 그 지루함은 예전보다 덜 할 것이다. 그림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이야기를 통해 재미있게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책 중 하나다.

 




명화를 통해 역사를 알다

 

과거에는 사진기가 없어 눈으로 당시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다. 과거를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시대의 화가가 남긴 그림뿐이다. 그렇다면 그림을 통해서 역사를 배운다면 어떤 사실감이 더해질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착안한 것이 그림으로 들어간 사람들이다.

 

그림 속의 인물들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럼의 주인공이 된 데는 아무래도 사연이 있었을 테니까요. 가령 한 시대를 풍미했던 왕이나 왕비, 혹은 위대한 장군이나 미인들은 그림 뿐 아니라 역사 속에서도 유명한 인물들이죠. 이런 이야기를 아이에게 들려주다 보니 꽤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다는 사실과 많은 인문 지식을 깨우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무엇보다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배울 수 있어서 좋았고요. 그림 속 인물들의 이야기가 곧 살아있는 역사 이야기였으니까요.”

- 머리말 중에서

 

저자의 말처럼 그림 속 인물들의 이야기가 곧 살아있는 역사다. 또한 그림은 그 그림에 얽힌 역사를 배우는 사람에게 사실감을 더해준다. 과거의 역사를 글로만 배운다는 것은 따분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림 속 인물에 얽힌 이야기를 접하면 기억하기도 쉽고, 그 역사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다시 전하기도 쉽다.

 




역사를 재밌게 공부할 수 있는 자료


이 책에 대해 하나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문체다. 엄마가 아이에게 이야기를 전달해주듯 구어체로 되어있기 때문에 나 같은 성인이라면 글로 읽었을 때 조금의 불편함이 느껴질 수도 있다. 저자가 이 책의 독자를 청소년으로 정해 글을 쓴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전달해주는 식의 문체보다는 존댓말을 썼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럼에도 이 책이 의미 있는 것은 역사를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는 자료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이라는 점이다. 학교에서 그림으로 들어간 사람들속에 있는 그림이 나온 시대를 가르칠 때 이 책을 예로 든다면 좋은 수업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 역사를 연대기 중심, 사건 중심, 정치 중심으로 가르칠 것이 아니라 이야기 중심으로 재미있게 가르칠 수 있다면 모두가 역사를 재미있어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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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식품첨가물 이야기 -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최낙언 지음 / 예문당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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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긴 MSG 많이 쓰더라. 다른 데 가자

 

일을 하다보면 밖에서 식사를 해결해야 할 때가 많다. 그럴 때면 항상 듣는 것이 MSG 많이 쓰는 식당은 가지 말자는 말이다. 그 이유는 MSG, 즉 화학조미료를 쓰는 식당이나 음식은 몸에 좋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주변뿐만 아니라 TV프로그램에서도 화학조미료는 몸에 좋지 않다는 말을 하고 있었고, 사방에서 그런 말들이 쏟아지니 나도 그렇게만 믿고 있었다.

 

알고있었던 것이 아니라 믿고있었던 것이다. 나는 주변 사람들이나 TV프로그램에서 하는 말을 믿고 있었던 것이지 MSG와 같은 화학조미료가 몸에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믿고 있었던 것에 대한 것을 알게 됐고, 그래서 그 믿음을 바꾸게 됐다. 내 믿음을 바꾸게 한 책은 바로 진짜 식품첨가물 이야기란 책이다.

 




MSG식품첨가물이다

 

MSG와 같은 화학조미료 등을 통틀어 식품첨가물이라고 한다. 식품첨가물이라는 단어를 축자적으로 해석하면 식품에 첨가하는 물질이란 뜻이다. 그런데 식품에 첨가하는 물질이 몸에 해롭다면, 왜 식품첨가물을 정해놓은 것일까. 해로우면 아예 식품첨가물 자체를 금지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이상한 일이다.

 

식품첨가물이 해롭다는 편견이 생긴 것은 아마 첨가물이란 단어의 부정적 뉘앙스 때문일 것이다. 식품에 무언가 첨가한다는 것을 성급하게 생각하면 좋지 않게 느낄 수 있다. 화학조미료 역시 화학이란 단어 때문에 부정적인 느낌을 준다. 화학 물질이라면 인공적인 것이고, 인공적인 것은 좋지 않다는 인식이 보편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뜻을 가진 언어는 그 언어로 명명된 물질마저도 부정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 물질이 모든 검사에서 통과하고, 안전성이 검증됐음에도 언어 때문에 유해한 것으로 몰린다면 그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TV가 바보상자였던 것도, 게임이 중독성을 가진다는 것도 모두 언어에서 오는 것이다.

 

미래학자 칼 하인츠 슈타인뮬러는 식품이 오늘날처럼 안전했던 적은 없었다. 또 소비자가 지금보다 더 불안했던 적도 없었다. 그 이유는 불신이다라고 말했다. 식품첨가물은 말 그대로 식품이다. 그런데 식품첨가물이 이렇게 부정적으로 여겨지게 된 것은 슈타인뮬러의 말대로 불신 때문이다. 이 불신은 알지 못함에서 온다.

 




모든 식품은 많이 먹을수록 해롭다

 

식품첨가물은 마법의 물질이 아니다. 나쁜 맛을 가리고, 썩은 음식을 되살리는 기적의 물질이 아니란 뜻이다. 식품첨가물은 식품의 맛을 돋우고, 음식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는 물질일 뿐이다. 우리 몸에 필수적인 소금이나 비타민, 미네랄 등은 모두 식품첨가물로 분류하고 있다. 단지 화학조미료라고 해서 몸에 해로운 것이 아니다.

 

모든 식품은 많이 먹을수록 몸에 해롭다. 예전에 <허준>이라는 TV드라마에서 비상이라는 독이 등장한 적이 있다. 비상은 독으로 비상에 중독되면 사망에 이른다. 그런데 허준은 비상을 약으로 처방한다. 식품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음식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

 

완전식품이라는 우유에도 유해성이 있다고 하는 시대다. 그만큼 안전에 대한 불안감이 심하다는 이야기다. 모든 식품은 약과 독이라는 양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 몸은 그 양면을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안전성만 찾다가 우리 몸이 가진 능력, 즉 면역을 계발하지 못해 아토피나 알레르기 등에 고생하는 사람을 우리는 많이 본다.

 

앎과 신뢰의 문제다

 

첨가물이 무작정 안전하다고 하는 것은 사자가 위험하지 않다고 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안전하게 관리되는 동물원의 사자가 위험하니 아예 구경도 하지 말라면 그것도 이상한 것이다. 첨가물은 위험해 보이지만 동물원에 갇힌 사자보다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다.”

(260-261)

 

식품첨가물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가 없고, 부정적인 수사만 난무하는 시대다. 그럼에도 식품은 대부분 잘 관리되고 있는 것 같다. 이전의 광우병 파동이나 구제역 등으로 시끄러웠지만 그것들의 이유로 피해가 발생한 사례가 없는 것을 보니 아직 우리나라는 안전한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식품이나 식품첨가물에 대한 지식을 쉽게 소비자들에게 전달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믿으라고 하거나, 제대로 소통하지 않는다면 이런 문제는 계속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에게 음식은 가장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식품에 대한 신뢰는 앎과 소통을 통해 쌓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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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진 교수의 소리로 읽는 세상
배명진.김명숙 지음 / 김영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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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주변에는 수많은 소리가 있다. 그것은 아름다운 음악 소리이기도 하고, 시끄러운 소음이기도 하고, 싱그러운 자연의 소리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수많은 형식으로 발화되는 소리가 세상에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런 소리들은 대부분 스쳐지나가는 것들이다. 하지만 세상의 수많은 소리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소리로 읽는 세상』은 소리를 통해 보이는 신기한 세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배명진 교수라는 분이 쓴 책인데, 저자는 소리공학자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소리공학자? 소리공학자란 말을 입에서 되뇌어보니 어떤 한 사람이 떠올랐다. TV프로그램에서 소리와 관련된 콘텐츠가 나오면 항상 등장하던 사람 말이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 책의 저자와 내가 떠올렸던 사람이 동일 인물이었다.



 

ⓒ 소리공학자 배명진 교수


신기했다. 배명진 교수는 내가 즐겨 봤던 TV프로그램인 <스펀지>, <호기심천국>에서 소리와 관련된 실험을 하면 항상 등장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소리 이야기만 나오면 배명진 교수가 나오겠구나 할만큼 내게 익숙한 사람이었다. 항상 TV화면에서 보던 사람의 책이라고 생각하니 『소리로 읽는 세상』이 갑자기 익숙해졌다.


『소리로 읽는 세상』은 소리가 발생시키는 다양한 현상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과 동물이 내는 소리, 동물이 감지하는 위험의 소리, 악기 소리, 자연이 내는 소리 등 다양한 소리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소리를 활용한 사건 해결, 공부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소리, 소리와 건강의 연관성 등 소리를 활용할 수 있는 여러 방법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소리로 읽는 세상』에 담긴 다양한 사례를 소개할 수 있지만 책에서 직접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여기서는 글을 아낀다.


소리에 미친 남자


배명진 교수는 스스로를 "소리에 미친 남자"라고 말한다. 그가 소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그의 아버지였다. 그의 아버지는 여러 기계를 고치는데 능했는데, 배명진 교수는 아버지가 다루던 기계 중에 소리나는 기계에 마음이 끌렸다고 했다. 그는 라디오와 축음기 등 다양한 소리를 내는 기계들에게 마음을 뺏긴 것이다. 



ⓒ 소리공학자 배명진 교수



그렇게 소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명진 교수는 이제 가장 유명하고 권위 있는 소리공학자가 되었다. 소리공학자란 말도 배명진 교수가 만든 말이다. 배명진 교수는 자신이 연구하는 소리가 단지 학술적인 것에서 벗어나길 원했다. 창의적으로 소리를 활용하길 원한 것이다. 배명진 교수는 자신의 신념대로 창의적인 소리활용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공부 잘 되는 소리기술, 낙동강 물풍금 기술, 소리건강 기술 등이다. 


배명진 교수가 지은의 『소리로 읽는 세상』은 배명진 교수가 가고자 하는 창의적 소리활용에 대한 팸플릿이다. 소리공학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소리가 얼마나 재미있고 의미있는 것인지 알리는 역할을, 소리공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것이 소리공학이고 소리공학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개론서 역할을 할 것이다. 창의적인 소리활용, 배명진 교수의 앞날을 응원하고 또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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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서 마음으로 - 생각하지 말고 느끼기, 알려하지 말고 깨닫기
이외수 지음, 하창수 엮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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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 작가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바로 '트위터 대통령'이다. 사실 이외수 작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아는 것이라고는 『글쓰기의 공중부양』을 쓴 작가이고, 트위터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작가라는 것 뿐이다. 따로 이외수 작가가 쓴 소설을 읽어 본 것도 아니고, 이외수 작가가 저술한 책 중에서 읽어본 것은 글쓰기 방법론을 다룬 책 『글쓰기의 공중부양』뿐이다. 


언론이나 인터넷에서 들리는 소식 외에는 이외수 작가에 대해 큰 관심도 없었다. 이외수 작가에게 혼외자식이 있고, 그것을 조선일보에서 악의적으로 보도를 했다는 사실. 화천에서 이외수 작가에게 지원한 감성마을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들.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이외수 작가의 기이한 모습들. 이런 것들은 잠시간의 가십거리일 뿐 이외수 작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기 힘들었다. 그만큼 나는 이외수라는 사람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마음에서 마음으로』란 책을 접하게 됐다. 『마음에서 마음으로』는 이외수 작가가 가지고 있는 예술, 인생, 세상, 우주에 대한 가치관을 담은 책이다. 책은 이외수 작가와 하창수 작가의 대담으로 이뤄져 있다. 대담의 형식을 가진 책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이외수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알 수 있다는 사실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예술은 감성과 직관이다


『마음에서 마음으로』는 예술, 인생, 세상, 우주 등 총 네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각 부분마다 이외수 작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잘 나타나 있다. 아직 이외수 작가의 소설을 읽어보지 못한 터라 그의 작품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대한 평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있다. 그의 예술관이다. 이외수 작가의 예술관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바로 감성이다. 철저한 감성, 그것이 내가 느낀 이외수 작가의 예술관이다. 


나는 비평가를 준비하고 있는 대학원생이다. 그래서인지 이외수 작가가 말하는 감성과 직관에 대한 이야기가 쉽게 와닿지 않았다. 대담에서 감성과 직관에 대해 역설하는 이외수 작가의 말은 무언가 단호했고, 엄정했다. 감성이 아니라면 다른 것은 다 옳지 않다는 그런 느낌까지 받았다. 마음이 불편했다.


그리고 글을 쓰는 데 있어서 '에너지'를 중시하고 있었다. 판타지 소설에서나 볼 법한 '기'와 '에너지' 등을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이외수 작가의 입에서 들으니 엄청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마음에서 마음으로』는 첫 부분부터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글쓰기와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배척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외수 작가는 글을 쓰는 데 있어서 일가를 이룬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경지를 이룬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이유에 대해서 배우고 싶었다. 





이외수의 인생과 그가 사는 세상


강호동이 진행했던 프로그램인 <무릎팍 도사>에서 본 것이나 『마음에서 마음으로』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외수 작가의 인생은 정말 파란만장했다. 아니 파란만장이라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험난한 인생이었다. 자발적으로 선택한 인생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책에 나온대로라면 그가 대중적인 작가로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계기는 가족이었다. 이외수 작가는 자신이 가난하고 배를 곯는 것은 자신이 선택한 일이라 참을 수 있었지만, 그로 인해 자신이 책임져야할 가족이 배를 곯고 아픈 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외수 작가는 자신의 아내가 아프자 자신의 신념을 굽히고 딱 한 번, 돈을 벌기 위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 글이 계기가 되어 이외수 작가는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고,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 이제까지 읽은 책을 보면 각 부분에서 일정한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 큰 역경을 겪는 사람이 많았다. 이외수 작가의 인생을 보면서 나의 인생을 되돌아보니 참 평탄한 인생을 살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외수 작가의 인생은 좀 더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했다.


책에 이외수 작가의 혼외자식 이야기가 짧은 내용으로 언급돼 있었다. 대중에게 자신의 전반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혼외자식 논란에 대해서 쓸 수 있다니, 참 대담한 사람이란 생각도 했다. 이외수 작가의 모든 인생을 알지 못하기에 그의 도덕적인 부분에 무어라 말을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가 감당해야할 몫이기에.





이외수 작가는 우주인?


이외수 작가의 우주에 대한 생각을 글로 접하면서 참 혼란스러웠다. 그는 과연 인간이 맞을까.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물론 나도 개신교를 다니면서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믿음을 가졌었지만 그것은 믿음뿐이었지 실제로 외계인과 교신을 하거나 어떤 행위를 한 것은 아니었다. 이외수 작가는 그것을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채널링, 아카식 레코드, 정령, 육안, 뇌안, 영안 등 중학교 시절에 읽던 판타지소설에서나 나오는 단어들을 유명 작가의 대담집에서 볼 수 있다니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이외수 작가가 외계 지성체나 그와의 채널링, 아카식 레코드를 이야기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더이상 얻을 것이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외수 작가가 감성과 직관을 말하는 것은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을 꺼려하기 때문이고, 자연이 만든 세상을 꺼려하기에 초자연적인 것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초자연적인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천착하기 보다는 '나'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을 파고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외수란 작가가 이렇게 거침없는 것은 인기가 많아서가 아니라 세상에 미련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스스로가 그의 전 재산일 테니까 말이다.


이외수는 이외수다


이외수 작가는 말 그대로 이외수다. 누군가의 잣대로 평가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누가 그를 평가하고 재단할 수 있겠는가. 이외수 작가를 칭송하거나 폄훼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보이는 그대로, 그가 행하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면 그것이 이외수 작가일 것이라 생각한다.


『마음에서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지만 나이가 들고 많은 경험을 한다면 언젠가 이외수 작가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 이해하기 힘든 것 중에서도 마음에 새길만한 글이 있었다. 불안한 20대를 살고 있어서 그런지 이 글이 참 위안이 됐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이를 통해 위로를 받으셨으면 좋겠다.


"10대는 다몽기다. 꿈이 많은 시기다. 보는 것마다 꿈이 된다. 20대는 선몽기다. 여러 가지 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기다. 딱 하나의 꿈, 나를 온전히 바쳐도 아깝지 않을 꿈을 찾는 것이 20대가 할 일이다. 20대에 출세를 꿈꾸는 건 옳지 않다. 30대는 전심기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10년을 바쳐서 온 생을 불태우겠다는 각오로 전력을 다하면, 40대의 용비기에 다다른다.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다. 인생이란 40대에 비로소 펼처진다. 이것이 정석이다. 이것이 정석이다. 50대부터는 소요기에 접어든다. 노닌다. 40대에 다 펼치고, 50대는 즐기고 노니는 것이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274-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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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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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는 나치가 자행한 유럽유대인의 절멸(이하 절멸)’을 뜻한다. 처음 이 단어를 접했을 때는 단지 절멸을 뜻하는 고유명사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홀로코스트는 본래 번제물이라는 뜻을 가진다. 번제물은 신에게 바치는 희생양이라는 뜻이다. 과연 절멸이 신을 위한 번제물이었나. 지금에 와서야 이런 의문이 들었다. 조르조 아감벤은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에서 홀로코스트를 무의미한 죽음을 정당화하려는, 즉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것에 의미를 되돌려주려는 무의식적인 요구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절멸의 증언자인 프리모 레비도 마찬가지였다.

 

아감벤과 레비의 말처럼 절멸에 의한 유대인의 죽음은 무가치한, 무의미한 죽음이었다. 무가치한 죽음을 목격하고 증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더군다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죽음이 육백 만에 달한다면 그곳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어떤 심경일까. 당시를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인간의 죽음이 그토록 무가치하다는 사실은, 그 시기에 관심을 가지게 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죽음의 수용소를 겪지 못한 자들은 증언자를 통해서만 그때를 구성할 수 있다. 증언자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프리모 레비.

 

프리모 레비는 절멸의 당사자인 유대인의 충실한 대변자였다. 그는 아우슈비츠라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나와 나치가 벌인 유대인 대학살에 대해 증언하려 펜을 들었다. 이것이 인간인가등 여러 책들과 인터뷰를 통해 당시의 참상을 낱낱이 증언했다. 그런데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가 돌연 아파트 3층 난간에서 뛰어내려 죽어버렸다. 자살한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 대다수는 증언하는 것을 꺼렸다. 아마 그때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살아남은 자들 중에서도 레비는 증언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그가 왜 돌연 자살한 것일까.

 

증언할 수 없는 증언자

 

증언한다는 것은, 자신이 겪었던 것을 세상에 토해내는 작업이다. 증언한다는 것은, 증언하려고 하는 사건의 당사자여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그 당사자가 죽었다면 어떻게 할까. 그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을 과연 증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당사자들이 없는 증언에는 메울 수 없는 공백이 있다. 그것은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들의 증언에는 죽은 자들이 없다. 살아남은 자들은 그 공백 때문에, 어떤 상실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것은 증언자나 침묵하는 자나 동일하게 느끼는 것이리라.

 

프리모 레비도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증언자임에도 우리 생존자들은 진정한 증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증언조차 이것은 내가 다른 사람의 회상을 읽고 자신의 회상을 세월이 지나읽는 사이에 조금씩 희석하게 된 이상한 생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증언의 공백에서 온 어떤 상실감 때문에 프리모 레비는 돌연 자살한 것이 아닐까.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증언하면서 처음 그 공백을 느끼고, 그것이 점점 그의 몸을 잠식해가는 느낌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을 것이다. 증언의 공백이 레비의 몸을 집어삼켰을 때쯤 그는 아파트 3층 난간에서 뛰어내려야 한다는 내면의 외침을 외면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인간에 대한 의문

 

과연 증언의 공백만이 그를 자살로 내몰았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프리모 레비는 죽음의 수용소를 경험하면서 인간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그것은 수용소를 경험했다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물음이었을 것이다. 절멸이 과연 인간이 할 수 있는 행위인가. 절멸이 인간적이라는 수사에 포함될 수 있는가. 절멸 이후 인간이라는 것은 그 의미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인간이라는 명제에 금이 간 시대에 그 균열을 메워보려 한 자였다. 그는 수용소에서 해방된 이후 줄곧 그러한 삶을 살아왔다.

 

그는 독일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독일인들은 절멸이란 행위를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모른 체 했다. 절멸에 대한 침묵은 암묵적인 동의였음에도 말이다. 조해진의 단편 빛의 호위에는 이런 독일인을 본 레비의 심정이 그대로 담겨 있는 문장이 있다.

 

사람들이 노먼을 시대의 양심이니 유대인의 마지막 희망이니 하는 수식어로 포장하는 걸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어요. 그런 거창한 수식어 뒤에 숨어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정의의 증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건, 뭐랄까, 나에겐 천진한 기만 같아 보였죠. 알려 했다면 알았을 것들을 모른 척해놓고 나중에야 자신은 몰랐으므로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홀로코스트의 잔인함에 양심적으로 경악하던 그 수많은 비유대인들을 나는 기억하고 있어요. 화가 나진 않았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그저 무기력해졌을 뿐이에요. 무기력한 환멸 같은 거, 그런 거였죠.”

 

무기력, 무기력한 환멸. 프리모 레비는 아마 이와 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홀로코스트의 잔인함에 양심적으로 경악하던 그 수만은 비유대인들을 목격하면서 그는 인간이란 것이 과연 인간인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그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절멸을 은폐하려는 독일 수정주의 학자들의 움직임은 그의 감정을 더 격화시켰을 것이다. 그의 돌연적 죽음은 절멸 이후 인간이라는 명제에 난 균열을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음을 폭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다는 수치

 

모두가 죽었는데, 나만 살아남았다는 사실. 이것은 분명 안도의 감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죽음의 수용소라면 안도의 감정보다는 수치의 감정이 더 클 것이다.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은 자의든 타의든 나치에 일정한 도움을 줬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절멸에 동조했다는 수치로 바뀌게 된다. 남이 그것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위로할지라도 당사자에게는 수치일 수밖에 없다.

 

프리모 레비는 너희는 타자를 대신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수치스러운가? 게다가 자신보다 마음이 넓고 섬세하며 유용하고 현명하며 살아 있을 가치가 있는 누군가를 대신해서…… 이 감정을 억누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절규하는 듯 했다. 또 그는 누구나가 그 형제들에게 카인이라고, 그것이 우리를 좀먹고 초조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레비는 살아남은 자들을 자신의 동생인 아벨을 죽인 카인이라고 칭한다. 그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오로지 수치 때문이다.

 

프리모 레비는 앞서 언급한 것들 외에 수많은 이유 때문에 스스로의 몸을 던졌을 것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살아남은 자들의 처절함에도 그와 같아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를 내는 이도 있다. 한나 아렌트는 망명 유대인들의 돌연한 죽음을 자기본위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들은 누군가 죽으면 이제야 그 사람이 완전히 어깨의 짐을 벗었구나 하고 쾌활하게 생각하곤 했고, 결국에는 자신도 얼마나마 어깨의 짐을 벗을 수 있길 원하게 되고, 그래서 실제로 자살하고 만다는 것이다. 아렌트의 글은 프리모 레비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자기본위적 죽음을 감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그는 자신이 빚진 자들의 무게를 그때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을 완수했다고 여긴 것일까.

 

증언하지 않는다면 공백조차 없다

 

죽은 자들은 증언할 수 없다.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자들도 증언을 그쳐야만 하는가.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증언은 계속 되어야 한다. 증언하지 않는다면 공백조차 생기지 않을 것이다. 프리모 레비의 증언이 의미 있는 것은 죽은 자들이 남긴 공백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이 없다면 죽은 자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증언 속 공백은 죽은 자들이 남긴 흔적이다.

 

나치의 친위대원은 죽음의 수용소의 수인들에게 너희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낄낄댔다고 한다. 이것이 증언이 필요한 이유다. 인간이라는 명제는 이미 균열되었다. 절멸은 다시 한 번 그것이 일어날 가능성을 제시했다. 인간 아닌 인간적 행위를 막기 위해서라도 증언은 계속되어야 한다.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만이 죽은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 증언의 공백을 통해서만 증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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