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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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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국민 TV프로그램이라고 불리는 무한도전이 최근 <선택 2014>란 프로그램을 방영하면서 주춤거렸던 시청률을 다시 회복하고 있다. <선택 2014>는 무한도전의 멤버 중에서 무한도전의 향후 10년을 이끌 차세대 리더를 뽑는 프로그램이다. 이제 머지않아 있을 6.4 전국동시지방선거를 홍보할 목적으로 진행되는 것이기도 하다.

 

<선택 2014>는 무한도전의 멤버 모두가 후보로 출마했는데, 최근 있었던 중간 여론조사에서 노홍철 후보가 44%의 득표를 얻어 멤버 중 최다득표를 기록했다. 노홍철 후보가 내 건 공약은 성역 없는 투명한 방송으로 요약될 수 있다. 무한도전 멤버들의 사생활이나 가족을 가감 없이 시청자들에게 보여줄 것이라는 노홍철 후보의 유세와 공약을 보면서 최근 출간된 한병철 교수의 <투명사회>가 떠올랐다.

 

투명사회와 포르노사회

 

투명성은 아름다움의 매체가 아니다. 벤야민에 따르면 미는 가리는 것과 가려지는 것 사이의 불가분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것은 베일도 아니고, 가려진 대상 자체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은 베일 속의 대상이다. 하지만 이 대상은 베일이 걷히고 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초라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중략) 오직 아름다움만이 가림과 가려짐 속에서 본질적이고, 아름다움 외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미의 신적인 존재 근거는 비밀에 있다.” 미는 필연적으로 베일과 가림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노출시킬 수 없는 것이다. 가려진 것은 오직 가려져 있을 때만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한다. 폭로는 가려진 것을 없애버린다.(49)

 

한병철 교수는 투명사회를 여러 이름으로 치환해서 부른다. 책에서는 전시사회, 명백사회, 가속사회 등 여러 이름이 나열되는데, 그 중에서도 포르노사회라는 이름이 그 자극성 때문인지 가장 눈에 띈다. 무한도전 <선택2014>의 노홍철 후보를 보면서 <투명사회>가 떠올랐던 이유도 아마 이 포르노사회라는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병철 교수는 포르노사회에 대해 서술하면서 포르노와 에로티즘을 구분한다. 포르노는 아무것도 중단되지 않고 충돌하지 않는 매끄러운 상태이자 의미가 명백한 상태이며, 에로티즘은 의미의 불명확성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선택 2014>에서 노홍철 후보가 공약한 투명한 방송은 포르노적이다.

 

평소 언론이나 방송에 공개되지 않은 무한도전 멤버의 가족들은 현재 베일에 싸인 상태다. 그래서 아름다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혹은 시청자들이 원하는 대상으로 치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노홍철 후보가 당선돼 무한도전 멤버의 가족들을 전시한다면 자극적인 것을 원하는 시청자들에게 일시적인 만족감은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일 뿐 베일이 걷어진 무한도전 멤버들의 가족은 그 순간 가치를 상실해버리고 만다.

 

소위 투명한 방송이 내포하고 있는 이러한 한계에도 노홍철 후보는 시청자들에게 44%라는 의미 있는 득표를 얻었다. 시청자들이 투명한 방송이라는 공약에 호응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이미 포르노화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슈퍼맨이 돌아왔다>, <룸메이트> 등 여러 예능 방송에서 연예인들을 전시하고 있는 것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정치와 투명성

 

앞서 무한도전 <선택 2014>6.4 전국동시지방선거를 홍보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라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치러지는 선거에 재미와 흥미의 요소를 가미해 재현함으로써, 시청자들을 선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독려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방송을 보면서 느낀 것은 웃음이 아니라 안타까움과 슬픔이었다.

 

쇼핑은 토론을 전제하지 않는다. 소비자는 마음에 드는 것을 사면 된다. 그는 개인적 취향을 따른다. 좋아요는 소비자의 구호다. 그는 시민이 아니다.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 시민을 시민으로 만든다면, 소비자에게서는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투표소와 시장, 폴리스와 경제가 하나가 되어버린 디지털 광장에서 유권자는 소비자처럼 행동한다.(208)

 

한병철 교수는 책에서 투명성이 정치에 침투했을 때 정치는 쇼(show)가 된다고 설명한다. 정치인은 이제 대변자가 아니라 납품업자가 되고 유권자는 소비자로 변한다. 어떤 가치관이나 신념으로 어떤 정치인을 자신의 대변자로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후보를 선택하는, 기호를 소비하는 소비자로 바뀐 것이다.

 

이는 무한도전 <선택 2014>와 매우 닮았다. 무한도전에서 현재 진행하고 있는 투표는 무한도전 멤버 간의 인기투표와 다름없다. 작금의 대한민국 선거 역시 각 정당의 인기투표 혹은 여러 연(학연·지연·혈연 등)에 의해 좌우되는 투표에 지나지 않는다. 정당이나 인물이 걸어왔던 정치적 인생이나 공약 등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어떤 정당이 좋아서 혹은 어떤 정당이 싫어서 해당 정당에 투표하거나 대척점에 있는 정당에 투표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도 이는 여실히 드러난다. 정치인들은 혹여 자신들의 인기에 상처가 날까 두려워 세월호 참사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택했다. 납작 엎드려 이 사건이 빨리 잊히길 기도했을 것이다. 대통령 역시 장악한 언론을 통해 세월호 참사가 잘 해결되고 있는 것처럼 꾸몄고, 모든 책임을 해당 선사와 선장에 뒤집어씌웠다. 안산합동분향소에서 대통령이 유가족을 위로하는 연출을 벌인 것이 국민들에 대한 쇼의 정점이었다.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선결과제

 

신뢰 위에 세워진 사회에서는 투명성에 대한 집요한 요구가 생겨나지 않는다. 투명사회는 불신과 의심의 사회, 신뢰가 줄어들기에 통제에 기대려는 사회다.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사회의 도덕적 기반이 취약해졌다는 것, 진실성이나 정직성과 같은 도덕적 가치가 점점 더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98)

 

국민들이 선거를 통해 뽑은 자신들의 대표를 뒤로하고 거리로 나선 것은 결국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정치권에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신뢰를 요구하는 것의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 사건사고가 터질 때 마다 정치권은 감추기 급급했고, 이는 국민들의 신뢰를 상실케 하는 큰 요인이었다.

 

대한민국 국민의 사랑을 받는 무한도전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선택 2014>란 프로그램을 통해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아마도 지금까지 자신들이 잃게 했던 시청자들의 신뢰를 되찾기 위한 몸부림이 아닐까 한다. 시청률의 하락, 물의를 일으킨 멤버의 하차 등의 문제를 되짚어보고, 철저한 반성을 통해 시청자들의 신뢰를 되찾자는 의미일 것이다. 유재석이 진짜 위기는 그것이 위기인지 모르는 것이라고 언급한 것에서 느낄 수 있다.

 

일개 예능 프로그램에 이러할진대 한 국가는 이보다 더 철저한 반성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수십 년간 쌓여온 적폐를 없애고 국민들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서는, 현재의 위기를 인정하고 철저한 반성과 대안의 모색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투명사회의 문제점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일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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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도시 - 건축으로 목격한 대한민국
서현 지음 / 효형출판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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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덧칠해나가면서 발전해야 한다 

[서평] 빨간 도시


 

나는 유럽의 건축물을 매우 좋아한다. 역사의 흔적을 고스라니 담고 있는 유럽 건축물의 기품과 고상함을 좋아한다. 수천 수백 년의 역사를 머금고 있는 건축물을 사진으로만 감상해야 하는 것이 아쉬울 정도다. 

 

반면 대한민국의 건축물에는 전혀 감흥이 없다. 기품이나 고상함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대한민국에 내가 감탄했던 기품이나 고상함을 가진 건축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건축물은 나의 일상엔 존재하지 않는다. 유적·사적지에서나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런 나의 생각들이 대한민국 건축물에 대한 혐오까지 이어질 즈음, <빨간 도시>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내가 대한민국 건축물에서 느꼈던 바를 명확하게 글로 표현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건축물에 담긴 역사, 그곳에 담긴 의미, 대한민국이 홀대하는 건축물에 대한 역사성 등 다양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는 책이었다. 왜 대한민국의 건축물이 이럴 수밖에 없었는지 알려주는 책이었다.


건축물에 담긴 의미

"연병장, 사열대, 막사. 병영은 이렇게 이루어져 있다. 둘러쳐진 담장은 자발적이지 않은 체류자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군대를 유지하는 도구는 규율, 복종, 감시, 처벌이다. 간판만 바꿔 달면 병영은 학교가 된다. 운동장, 구령대, 교사.(33쪽)"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일 때까지. 총 12년을 학생으로 있었지만 내가 학생으로 속해 있을 때는 학교가 병영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하지만 군대를 다녀오고 사회에 관한 여러 이론을 접하면서 대한민국의 학교가 대부분 군대문화에 젖어 있고, 학교라는 건축물 역시 병영을 모방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렇듯 건축물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져 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다는 이승복의 동상은 당시 군사정권이 국민들에게 반공주의를 어릴 때부터 교육시키려 했던 의도가 담겨져 있고, 양 옆에 나란히 서 있는 검찰청과 법원은 그 두 기관 사이의 힘 싸움을 암시한다. 건축물을 유심히 살펴보면 이렇게 다양한 의미들이 숨겨져 있다. 

건축의 역사성

앞서 내가 유럽의 건축물을 좋아하는 이유가 그 건축물에 고스라니 담긴 역사적 흔적 때문이라고 말했다. 건축물에는 그 건축물이 지어진 당대부터 시작해 여러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것은 그 건축물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숭고함을 준다. 이처럼 오랫동안 남아있는 건축물은 하나의 역사서나 다름없다.

최근 내가 생활하고 있는 부산에서 개인적으로 경악할 만한 소식을 들었다. 부산 서면에 있는 부전도서관을 허물고 복합문화공간으로 재개발한다는 안이 통과됐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이 옛 것을 '낡은' 것으로 치부하고 무조건 새 건물을 짓는 것을 선호한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드나들었던 흔적이 그대로 소멸한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느끼니 이 앎이 분노로 변했다.

부전도서관은 부산 최초의 공공도서관으로 상당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낡은 것은 무조건 새 것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는 논리는 이 역사성을 하찮은 것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부전도서관 재개발 안이 통과된 일은 건축물에 담긴 역사성을 무시하는 처사다. 이 상황은 역사가 재미없고 지루하다며 천대받는 현 대한민국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국가의 문화적 수준을 보여주는 건축물

"부서진 정동진이 서러운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문화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부서진 한계령 휴게소가 서러운 이유는 건물에 배어든 건축가의 꼼꼼함도 일거에 묻어버리는 우리 사회의 집단적 폭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가을의 여행에서도 먹고 마시고 사진 찍고 돌아가면 그만인 서글픈 우리의 여행 문화를 보여주기 때문이다.(73쪽)"

"음악은 시작되었어도 더 좋은 자리를 찾아 우르르 몰려다니는 모습, 아무리 연주회 전에 당부를 해도 기어이 전화 벨소리를 울리고 카메라를 꺼내드는 모습, 연주자의 팬 사인회가 있다고 하면 음악이 끝나기도 전에 로비에 줄 서러 나가는 모습, 그런 것들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런 문화는 꼭 그 정도의 건물을 요구하고 얻어낼 따름이다. 그래서 건축은 그 시대를 담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88~89쪽)"

책에서 주요하게 언급하는 것 중 하나는 건축물에 담긴 국가의 문화적 수준이다. 저자는 산발적인 건축물들이 표현하는 부서진 정동진, 건축가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지어진 한계령 휴게소의 모습, 문화를 제대로 누리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 등은 한 국가의 문화 수준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고 말한다. 나 역시 서울의 새빛둥둥섬, 서울시청 신청사 등 최근에 지어진 많은 건축물이 문화적인 고려 없이  지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건축도 하나의 문화예술이다. 그것은 한 도시의 랜드마크가 되기도 하고, 오랫동안 남아 있다면 역사성이 담긴 건축물로써 관광지가 되기도 한다. 대한민국처럼 문화적인 고려 없이 새로운 건축물을 난발한다면 아무런 특색 없는 국가, 아무런 역사성을 가지지 못한 국가가 될 지도 모른다. 건축은 그만큼 중요하다.

덧칠해나가면서 발전하는 도시

"도시는 살아 있어야 하고 새로운 제안을 통해 계속 변화해 나가야 한다. (중략) 그러나 도시는 선택받은 강자에게 맡겨진 스케치북이 아니다. 전당포 노파에게 도끼날을 들이댈 자격을 지닌 시장과 건축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도시는 덧칠해나가면서 발전해야 한다. 들춰보면 과거의 증언이 들려야 한다.(123쪽)"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이 있다. 바로 "도시는 덧칠해나가면서 발전해야 한다"는 문장이다. 내가 봐왔던 대한민국의 도시는 덧칠해나가면서 발전하기 보다는 부수고 새로 짓는, 소위 말하는 재개발의 논리로 발전해나갔다. 그래서 도시의 역사성은 단절되고 끊임없는 새로움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도시의 성취는 몇십 년의 세월로 판단하기 어렵다. 평가는 수백 년 넘는 시간을 요구할 것이다. 그 시간은 로테르담에도, 그리고 우리 도시에도 공평하게 적용될 것(203쪽)"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도시의 진정한 성취는 부수고 새로 짓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덧칠하면서 오랜 시간 동안 유지해오는 데서 나올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대한민국의 한 건축가가 얼마나 건축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이런 건축가가 대한민국에 존재하기에 대한민국 건축의 미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책에서 저자가 인용한 "모든 시대의 건축가들은 그 시대의 모습을 파리에 남겨놓을 책임을 갖고 있다(295쪽)"는 말처럼 저자 스스로도 당대의 모습을 대한민국에 반드시 남겨놓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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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내공 - 내일을 당당하게
이시형.이희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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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서평] 인생 내공



우리나라 나이로 61살이 되면 환갑이라 칭하며 잔치를 벌인다옛날에는 61살까지 산다는 것이 상당한 일이었기 때문에 잔치를 벌일 만큼 큰 경사였다하지만 현 시대는 ‘100세 인생이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오래 살기 때문에 환갑잔치는 그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전통이라는 부분 때문에 환갑잔치를 하기는 하지만.

장수라는 측면에서의 환갑은 의술의 발달로 그 의미가 퇴색하고 있지만인생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환갑은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환갑잔치를 할쯤이면 보통 은퇴를 할 나이이기 때문에 인생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의술이 발달되기 이전이라면 10년 정도의 여생을 보내고 떠나면 될 일이지만이제는 은퇴를 하고도 40년의 인생이 남는다.

 

성인이 되고나서부터 은퇴까지 40년의 인생을 산다많은 사람들이 이 40년의 인생에 모든 열정을 쏟는다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이제 은퇴 이후에도 40년의 인생이 있다지금까지 누구도 은퇴 이후의 인생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현재 은퇴 이후 노인들은 아무런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대부분인걸 보면 알 수 있다.

 

20세부터 60세까지의 인생에 모든 열정을 쏟고은퇴 이후 여생을 보낸다고 생각하기에는 여생이 너무 많이 남는다이제는 그 여생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깊은 고민을 해야 할 시기다이런 고민에 도움을 줄 책이 있다인생내공이라는 책이다인생내공은 후반부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내공을 쌓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산할 때가 더 위험하다

 

사실은 하산할 때가 더 위험하다산행에서 사람들이 다칠 때도 대부분 내려올 때다이 세대 사람들은 하산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이들이 경험한 사회는 줄곧 오르막만 있었지내리막은 없었다.”(p.73)

 

책에서는 60세까지의 인생과 여생으로 나누는 지금의 인생관과는 달리 인생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눈다앞서 말했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20세에서 60세까지인 전반부 인생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전반부 인생에 모든 것을 소진한 사람들은 이후의 인생을 제대로 설계하지 못하고 현재의 모습처럼 보낸다.

 

이 세대 사람들은 하산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저자의 말처럼 지금 세대의 사람들은 후반부 인생을 어떻게 보내는지 전혀 배우지 못했다이제야 중요성을 깨닫고 알아가려고 하는 중이다하산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남은 40년의 인생은 끔찍할지도 모른다고령화 사회가 사회문제의 대표적인 사례가 된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후반부 인생은 또 하나의 기회다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누가 내 잃어버린 20대를 돌려줄 수 있겠는가그러나 뒤늦은 30대에 내게도 청춘이 왔다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어도 인생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인생을 다시 시작하기에 늦은 때는 없다.”(p.102)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대신 만회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전반부 인생에서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후반부 인생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의술의 발달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이제 전반부 인생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후반부 인생을 염두에 두고 삶을 살면 인생이 조금 더 풍성해질 것이다물론 정부나 사회가 도와주지 않으면 힘들지도 모른다현재 후반부 인생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청년들의 일자리도 없는 마당에 노인들의 일자리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스스로의 노력 이전에 고령화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정부와 사회의 노력이 필요하다.

 

노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삶의 질을 높여 가는 노력그게 나이 든 사람의 자신에 대한 예의요 책무다여기에만은 게으르면 안 된다당당하게적극적으로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할 수 없는 건 아무것도 없다.”(p.154) 정부와 사회의 도움이 있더라도 저자의 말처럼 노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나이를 먹는 것에 대한 당당함이 필요하다.

 





읽고 쓰는 후반부 인생

 

저자는 요즘 힐링이 열풍이지만 독서야말로 힐링에 큰 역할을 한다”(p.276)고 말한다독서만큼 인생에 큰 자양분을 주는 것이 흔치 않다직접 경험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간접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고세상의 수많은 지식을 접할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역시 독서다후반부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것도 이것이 아닌가 한다.

 

쓴다는 건 깊은 내면적 사고이며 사유의 산물이다손으로 직접 쓰는 육필은 그 효과가 더욱 크다뇌과학에서는 그래서 손으로 써보길 권한다종이에 펜으로 쓰면 키보드에 문자화하는 것에 비해 훨씬 깊은 사고를 할 수 있다. (중략육필로 써야 거기에 내 체취가 묻어나고 혼이 담길 것 같다.”(p.291)

 

수많은 책들을 읽다보면 자연히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책을 아무리 많이 읽는다고 해도 그 사유들을 글로 쓰지 않는다면 금방 잊어버리고 만다직접 손으로 글을 쓰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도구를 사용한다고 해도 글을 쓴다는 행위는 중요한 것이다전반부 인생의 경험을 글로 남긴다면 한 권의 책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쓰는 건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오랜 시간 내 속에 쌓여 온 번뇌와 고민의 산물이다.”(p.296)는 저자의 말처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능력을 갖추는 것은 모든 인생에 큰 도움이 된다요컨대 인생내공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후반부 인생을 준비하는 것이다그것은 후반부 인생을 사는 자신에게나고령화 사회를 감당하는 사회에게나 중요한 일일 것이다



책 정보



  제목 - 인생 내공

  지은이 - 이시형 & 이희수

  출판사 - 위즈덤하우스

  출간일 - 2014년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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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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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흔적, 그리고 기억의 저장소

[독서에세이] <행복의 건축>

 

 

언젠가 두 남자가 세계여행을 다니는 TV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그 두 남자는 당시 프랑스를 돌아보는 중이었다. 카메라가 비추는 곳은 말 그대로 프랑스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고풍스러움이 도시 곳곳에서 묻어났다. 하나하나의 건축물마다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었고,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라면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었던 것들이 아무나 다니는 길거리에 널려있었다.


내가 이렇게 유럽의 건축물에 찬사를 보내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건축물을 싫어해서다. 물론 지금의 건축물에 한해서다. 우리나라의 거리를 걷다보면 콘크리트로 된 창살이 달린 감옥을 빙빙 도는 기분이다. 콘크리트로 떡칠을 해놓은 상자들은 내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않는다그곳은 단지 길일뿐이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과거를 얻을 수 있는 흔적은 이미 소멸해버리고 없었다.


건축물에는 누군가의 역사가 스며있다


국민학교를 갓 들어갔을 때였나. 가족끼리 서울에 간적이 있었다. 옛 기억을 잘 잊어버리는 나인데도 그 기억은 또렷하다. 지금은 KTX를 타고 세 시간이면 갈 수 있지만 그때는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다섯 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더군다나 표가 없어 입석으로 열차를 탔던 터라 꽤나 고생했던 걸로 기억한다. 서울역에 도착해 열차에서 내리자 꽤 놀랐던 느낌이 있다. 어린 나에게 서울은 얼마나 큰 곳이었을까. 그때의 서울역은 어린 내게 꽤 인상적이었다.


최근 서울에 갈 일이 있어 기차를 탔다. 서울역에 도착했지만 어렸을 때의 그런 감흥은 없었다. 옛 서울역보다 커졌고 편리해진 지금의 서울역은 단지 기차역일 뿐 '나의 서울역'은 아니었다. 군인이었을 때 수없이 서울역을 드나들었어도 아무런 기억이 없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울역을 많이 오고갔지만 그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옛 서울역에 간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순간 어릴적 기억이 떠오른 것일지도 모른다) 서울역에 도착해서 옛 서울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옛 서울역은 이제 기차역으로서의 기능은 잃었지만, 하나의 박물관으로 변모해 있었다. 나는 서 있던 자리에서 뒷걸음질을 쳐 옛 서울역의 모습이 다 보이는 곳에 멈췄다. 순간 어릴 적 서울역에 왔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알랭 드 보통은 행복의 건축에서 어떤 귀중한 것을 잊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깨닫는 순간 마치 우리의 기억들을 눌러놓는 서진(書鎭)처럼 어떤 구조물을 세우고 싶은 소망이 생긴다고 적었다. 옛 서울역은 내가 세운 것은 아니지만, 내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소프트웨어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옛 서울역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나 외에도 이 건축물은 수많은 사람의 기억들을 들춰낼 것이다. 어떤 아이디와 패스워드로 접속하는지에 따라 다른 역사를 보여줄 것이다. 옛 서울역이 1925년에 지어졌으니 지금 87년 동안의 역사를 저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주변의 건축물은 무엇을 저장하고 있을까. 2003년에 신축된 서울역은 고작 10년의 역사를 담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기술이 발명되면 아마 재건축할지도 모른다. 내가 우리나라 건축물을 싫어하는 이유는 여기 있다. 그 건축물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을 무시하는 것 말이다.


내가 유럽의 건축물을 좋아하는 것은 미적 취향이라기보다는 그 건축물에 담긴 역사성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은 우리는 글을 쓰듯이 집을 짓는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건축물은 그것이 가진 기능을 다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아마 프랑스인들은 거리를 지나다니면서 프랑스의 역사를 생각할 것이다. 바스티유 광장을 지나며 프랑스 대혁명을 떠올릴 것이고, 에투알 개선문을 보며 나폴레옹 시대의 옛 영광을 느낄 것이다. 또한 주변의 옛 건축물을 보며 과거의 인물들을 생각할 것이다. 빛바랜 외벽과 문에 난 생채기 옛 사람들의 낙서 등은 건축물의 흠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흔적이며 그들이 남긴 메세지다. 건축물은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조건 새 것만을 찾는 모습에서 벗어나야


우리나라는 낡은 것이라면 부수고 새로 짓기를 원한다. 그것은 건축물을 단지 기능적으로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담은 건축물은 높은 빌딩에 가려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이상 영원히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거리를 거닐며 건축물이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하는 것이 정말 아쉽다. 콘크리트 더미에서 어떤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수십 일도 걸리지 않아 완성되는 건축물에서 뭘 찾아낼 수 있을까. 우리가 역사에 둔감한 것은 아마 이런 것 때문이지 않을까.


폭발물을 설치해 무너뜨리거나 중장비를 동원해 건축물 깨뜨리기 시작할 때 과거의 것들은 소멸한다. 그 건축물이 무너지는 광경은 오래전에 떠난 누군가가 돌아왔을 때 느낄지도 모르는, 기억 한 뭉텅이를 도려내는 아픔일 것이다. 옛 기억을 증언해줄 수 있는 이가 보이지 않는 것은 슬픈 일이다. 더 이상 그때를 떠올리게 해줄 장소가 없다는 것은 아픈 일이다. 이제 내가 옛 서울역에서 멈춰 묻어둔 기억을 꺼냈던 것처럼, 사람들이 잠시 머물러 회상할 수 있는 기억의 저장소가 더 이상 사라지지 않기를, 그것을 바랄 뿐이다.



책 정보


제목 - 행복의 건축

지은이 - 알랭 드 보통(프랑스)

옮긴이 - 정영목

출판사 - 청미래

출간일 - 2011년 8월 10일

원제 - The Architecture of Happiness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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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을 찾아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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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려면 꼭 서울에 가야 하나

[독서에세이] <변방을 찾아서> 




양산천 둔치는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사람이 적어서다. 사람이 드물고 외진 곳은 편안하다. 사람이 빽빽이 들어찬 번화가는 그곳에 들어가는 순간 답답함을 느낀다.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래서 나는 양산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닿을 수 있는 여백이 많기 때문이다. 내가 주로 생활하는 부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요즘 이런 마음을 흔드는 일들이 많다.


최근 프레시안 협동조합이라는 곳에 가입했다. 프레시안은 일종의 인터넷 신문이다. 언론에 관심이 많고 협동조합이라는 것도 궁금해서 가입했다. 그런데 조합원으로 가입해서 받을 수 있는 혜택들은 다 서울이나 수도권에만 있으니 뭘 할 수가 없었다. 지방의 서러움이란, 소외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나라 제2의 도시라는 부산에 살면서도 변방에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큰 박탈감이 들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요즘 서울에서 몇 년간만 이라도 살고 싶다는 생각을 버릇처럼 하고 다닌다. 서울, 단어만 들어도 뭔가 빽빽이 들어찬 느낌을 받는다. 서울은 우리나라의 모든 것이 집중되는 곳이다. 정치, 경제, 문화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도 있을 만큼 사람도 서울로 몰린다. 사람이 모이는 곳이니만큼 사람이 할 수 있는 것도 다 모여 있다. 내가 주로 좋아하는 것들이나 하고 싶은 것들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다 몰려 있으니 말이다. 부산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서울


서울은 친구들과의 관계까지도 침투한다. 지금 부산 소재의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이런 나와는 달리 학부 때 같이 공부를 했던 친구들은 전부 서울에 있는 대학원에서 공부하기를 원한다. 서울에 가야만 제대로 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취업준비를 하는 친구들도 부산에 있기 보다는 서울에 있는 기업에 취직하기를 바랐다. 그것 때문에 남들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하고 더 많은 준비를 한다. 그것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과 서울로 가야하는 것이 옳은가하는 생각이 든다.


서울은 가득 찼다. 그럼에도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은 대한민국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권력이 그곳에 있다. 돈이 그곳에 있다. 일자리도 가장 많고 할 수 있는 것도 모두 그곳에 몰려있다. 하고 싶은 것도 서울 외에는 간헐적이다. 박탈감은 서울로 가야 한다는 욕망으로 바뀐다. ‘서울에 가야만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나라의 서울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서울에 가야만 제대로 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음에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은 가득 찬 것에서 오는 답답함 때문이다. 서울에 대해 생각하면 백제동월륜, 신라여신월(百濟圓月輪, 新羅如新月)’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백제는 보름달이라 이미 가득 차 앞으로 기울고, 신라는 초승달이라 앞으로 가득 찰 것이라는 뜻이다. 가득 찼다는 것은 물론 좋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없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서울에 반해 부산은 아직 채울 것이 많은 도시라고 본다.


또한 서울과 같은 문화의 집결지에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것은 천편일률적이 될까 두려워서다. 우리나라의 모든 것이 집결되는 곳이니 만큼 빠른 것은 당연하다. 서울의 빠름에 휩쓸려 중심을 잃고 흔들릴까 무섭다. 자칫 휩쓸려버리면 빠름을 쫓아가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뱁새가 가랑이 찢어지듯 허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개성은 사라지고 서울에 사는 그저 그런, 아무런 특징이 없는 사람이 될까 두렵다.


역동성의 중심지, 변방


부산은 비었고, 상대적으로 느린 도시다.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고,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신영복의 변방을 찾아서를 보면 중국의 역사에 대한 부분이 나온다. “중국은 황하 유역을 중심부로 삼아 공간적 이동이 없다고 반론하지만 중국역사 역시 고대의 주, 진에서부터 금, , 청에 이르기까지 변방이 차례로 중심부를 장악한 역사였다. 


그러한 변방의 역동성이 주입되지 않았다면 중국 문명은 결코 지속 가능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변방과 중심은 결코 공간적 의미가 아니다. 낡은 것에 대한 냉철한 각성과 그것으로부터의 과감한 결별이 변방성의 핵심이다.” 신영복의 말처럼 부산도 변방의 역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래에 새로운 중심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신영복은 책에서 이런 말도 한다. “변방이 창조 공간이 되기 위한 결정적 전제는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심부에 대한 환상과 콤플렉스가 청산되지 않는 한 변방은 결코 새로운 창조 공간이 될 수 없다. 중심부보다 더욱 완고한 아류로 낙후하게 될 뿐이다.” 부산에 있으면서 서울의 아류로 존재하기는 싫다. 부산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의 의미는 충분히 가지고 있다. 서울 중심의 우리나라 사회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는 변방의 존재가 됐으면 좋겠다.


나 역시 부산에 살고 있기에 변방의 존재다. 변방의 역동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우공이산의 성어와 같은 마음가짐이 있어야할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이 산을 옮기는 것처럼, 우직하게 문학이라는 한 우물을 파는 것이 나중에 큰 성과를 이루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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