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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여지도 - 두 발과 땀으로 써내려간 21세기 대한민국 노동의 풍경
박점규 지음 / 알마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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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혹자는 노동을 신성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과연 신성한가. 시궁창에 처박혀 있는 것은 아닌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노동은 신성한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동을 수행하는 노동자가 노동의 신성함만큼 대우받고 있는지 묻고 싶다. 언론에 심심찮게 보도되는, 저 높은 곳에 스스로를 유폐하는 노동자의 모습이 정말 신성한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노동에 붙는 수식어를 살펴보면 신성한보다는 고된이 더 익숙하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은 고된 것이다. 누구도 노동을 신성시 하지 않는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일 뿐, 생활이 보장된다면 때려 칠 사람이 부지기수다. 노동하지 않는 자본가를 부러워하며, 고된 노동을 일종의 굴레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하다.

 

이 같은 사회 분위기에서 타인의 노동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신 삼성이나 현대와 같은 대기업의 속사정 또는 유명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쏠려 있다. 대중의 관심이 부재한 자리에 울리는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는 외침은 당연히 공허할 수밖에 없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모두가 노동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인식의 대전환이다.

 

이와 관련해 의미 있는 책이 최근 나왔다. 바로 박점규 작가의 <노동여지도>. <노동여지도>는 김정호가 조선 땅을 일일이 밟으며 대동여지도를 그린 것처럼, 저자가 대한민국 땅을 밟으며 전국의 노동현장을 그려낸 결과물이다. 이 책은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고 함께 하려는 이들에게 믿음직한 동반자가 될 만하다.

 

노동, 삶의 다른 이름

 

노동은 속칭 금수저로 불리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우리네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노동은 삶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부분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노동을 족쇄로 여기고, 언젠가는 결코 끊어내고 말리라 다짐한다. 우리나라의 비정상적인 교육열은 내 자식은 이 족쇄를 끊어주리라는 믿음의 징후일 것이다.

 

하지만 2015년인 지금 노동의 족쇄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는 끊겼다. 남은 방법은 하나다.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여기는 현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시작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를 28개 도시 속 노동현장으로 이끈다.

 

수원, 울산, 평택 등 노동문제와 관련해 언론에서 여러 차례 보도된 탓에 우리가 익숙한 곳에서부터 광주, 경주 등 노동문제와는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곳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전국의 노동현장을 생생히 그려낸다. 이를 통해 우리 삶과 노동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지적한다.

 

저자가 전국의 노동현장을 종횡무진 한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그저 취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세상에 내놓은 노동여지도의 주제는 비정규직 문제다. 비정규직 문제는 우리 사회가 처한 노동문제 중 가장 해결하기 힘든 난제다. 같은 일을 함에도 임금과 복지에 차등이 있다. 이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간극을 만들고, 분열에 이르게 한다.

 

"2013년 기아자동차와 정규직노조가 장기근속자녀를 우선 채용하는 데 합의하자 사내하청 우선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던 김 부장은 시너를 뿌리고 분신으로 항거했다. 세 딸아이의 아빠가 아이들에게 비정규직을 물려줄 수 없다고 외친 날은 우연히도 세월호 침몰일인 416일이었다."(139)

 

공장 앞 선술집에 모인 비정규직 대의원들이 분노를 쏟아낸다. 정규직과 하나의 노조를 이루다보니 비정규직이 정규직노조에 기대려고만 한다는 것이다. 동료가 분신했는데도 가만히 있고, 비정규직보다 더 열악한 알바노동자들을 외면한다고 대의원들은 열 받아 한다. 최근 사내하청 130명을 뽑았는데 정규직 조합원들이 사내하청에라도 자녀를 넣으려고 했단다. 그런데 비정규직들이 우리 자녀도 해달라고 했단다. 정규직노조의 나쁜 점만 배우고 있다고 한탄한다.“(140~141)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이 서로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바로 노동현장의 모습이다. 자신의 안위에 천착하다보면 자신이 이러한 아귀다툼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 <노동여지도>가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나와 내 가정의 안위를 지켜야 한다는 본능적인 투쟁에서 한 걸음 물러나 노동현실 전반을 조망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항상 스스로를 객관화 하지 않으면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냉혹한 현실이다. 노동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아귀다툼을 자신만의 콜로세움에서 낄낄거리며 지켜보고 있는 자본가의 모습을 올려다봐야 한다. 하지만 모두가 싸움을 멈추지 않으면 올려다볼 수 없다. 눈앞에 칼을 휘두르는 적이 있는데 어느 누가 싸움을 멈출 수 있을까.

 

연대, 상투적인 만큼 진리에 가까운 방법

 

대공장 정규직은 부잣집 마름, 중소기업 노동자는 가난한 집 머슴이에요. 대공장 정규직이 이제 신분이 되어버렸죠. 완성차, 부품사 정규직 노조가 책임감을 가지고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해야 합니다.”(124)

 

모두가 싸움을 멈추는 방법은 딱 하나다. ‘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쉽지 않은 일이다. 차등이 실존하는 사회에서 연대를 실천하려면 누군가의 희생은 필수불가결이다. 희생이란 없는 곳에서보다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게 아름답지 않은가. 그렇다면 연대의 시작은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품는 것에서부터이지 않을까.

 

혁명은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에서 비롯됐다.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해방된 것도, 독재의 서슬퍼런 칼날에서 살아남은 것도 모두 누군가의 희생에서 피어난 것이었다. 몇몇을 제외한 모두가 노동자인 사회에서, 1퍼센트의 자본가가 우리나라 대부분의 과실을 차지하고 있는 비참한 사회에서 비정규직이라는 천민을 만든다는 것은 때린 데 또 때리는 격이 아닌가.

 

처음 들어왔을 때에 비하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어요. 그런데 그보다 더 좋은 건 할 소리를 하고 살 수 있게 됐다는 거예요.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게 뭔지 알 게 됐어요. 우리가 뭉쳐서 싸웠기 때문이죠.”(52)

 

삼성전자서비스 젊은 친구들에게 노동조합이 따낸 것도 없는데 좋은 게 뭐냐고 물으니까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어서 좋다는 거야. 또 같이 일하는 동료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는 거야.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해.”(203~204)

 

“‘사축이라는 말을 아세요? ‘회사의 가축이라고 일본의 직장인들이 스스로 비하해서 하는 말이라고 해요. 지금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어요. 열심히 일하면 인정받을 수 있고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이제는 좀 멈춰야 하지 않을까요?”(383)

 

저자가 <노동여지도>에 담아낸 목소리는 모두 인간답게살고 싶다는 작은 희망을 말하고 있다. 저자가 밟은 노동현장에서는 그 암울함 속에서도 작지만 소중한 연대의 성과들이 있었다. 연대하면 이뤄낼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19604.19혁명에서부터 19876월 항쟁까지. 전례는 충분하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선언은 더 이상 빨갱이나 종북좌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가 노동자로서 살아남기 위한 선언으로 전유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노동자여, 연대하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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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7-09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학생들이 읽어서는 안 되는 ‘종북도서’ 딱지를 붙이는 촌극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서흔(書痕) 2015-07-14 10:39   좋아요 0 | URL
요즘엔 `종북도서`가 안 되니 좌편향도서니 뭐니 딱지를 붙이더라구요. 정말 촌극입니다. 촌극.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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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느 순간에 지금 불행하다.”, “지금 생활에 불만족을 느낀다.”라고 대답하는 것일까? 오사와 마사치에 따르면, 그것은 지금은 불행하지만, 장차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때라고 한다. (중략) 바꿔 말하자면, 이제 자신이 이보다 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됐을 때, “지금 행복하다.” 혹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라고 대답하게 되는 것이다.(133~134)

 

인류의 진보는 더 나은 삶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에서 비롯됐다. 과거 프랑스 대혁명이나 68혁명 등에서부터 현재 페미니즘 운동이나 동성애 합법화 운동 등까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희망이 있는 사회는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다. 현재는 항상 불행할 뿐이다.

 

생존하기가 한 해의 목표인 시대다. 갈수록 삶은 팍팍해진다. ‘내일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라고 자문해보지만 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삶을 살아낼 수 있는 동력은 희망이다. 하지만 도처는 절망으로 점철돼 있다. 미래에도 삶이 더 낫다고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희망 대신 행복을 찾는다.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은 절망의 바다에서 더 나은 삶이라는 희망찾기를 멈추고 현재에 만족하는 삶을 선택한 일본 젊은이들을 다룬 연구서다. 저자는 독자에게 불행 없음이 어떻게 행복 추구로 귀결되는지 보여준다.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자료를 근거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불행한 사회, 행복한 젊은이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연구는 일본 청년을 대상으로 했다. 하지만 이 연구는 우리나라 청년에게도 충분히 의미심장하다. 우리나라는 일본의 전철(前轍)을 그대로 밟고 있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일본의 모습이 현재 우리나라의 모습과 아주 유사한 것은 공공연하다. 이러한 한일 간의 유사성은 일본 사회현상을 유심히 살펴봐야 하는 근거가 된다.

 

요즘 젊은이들이 품고 있는 생각은 바로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 및 작은 행복을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관이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일본 경제의 회생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혁명 역시 그리 원하지 않는다.(34)

 

저자는 일본 청년이 지금의 삶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분명 사회는 절망이 가득한데, 어떻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인간은 현재가 불행 혹은 불합리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끊임없이 진보를 위해 투쟁해왔다. 방법은 다양했다. 과학기술의 발전일 수도, 정치적인 혁명일 수도 있었다.

 

방법이 무엇이든 목적은 같았다. 더 나은 삶이라는 지향은 인류의 진보로 이끌었다. 하지만 현재 일본 청년은 진보에 관한 문제에 관심이 없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관심이 없다기보다 관심을 둘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개인의 생존이 담보되지 않는 상황에서 보편적인 진보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관련 교육이 부재한 것도 한몫을 차지하고 있다.

 

한일 청년의 삶은 생존이라는 절대명제 앞에 무력하기만 하다. 생존의 문제에서 타인의 삶이란 논외일 수밖에 없다. 정치나 사회문제에 관심을 두기보다 자기계발을 하거나 주변 사람을 돌보는 게 남는 장사다. ‘더 나은 삶을 위한 투쟁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이 편해 보인다. 사회적 연대보다 개인의 행복 추구가 더 나은 삶이라 믿는다.

 

경험의 부재, 행복의 맹신

 

트위터나 소셜 미디어가 사회를 바꾸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이 개인의 승인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쉬운 매체라는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 기능은 사회 변혁과 반대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트위터에 마치 사회의식이 있는 것처럼 적당히 글을 올려 팔로워들의 칭찬을 유도하고, 많은 수의 리트윗에 만족한다.(298~299)

 

혹자는 각종 커뮤니티나 SNS에 난무하는, 진보성 짙은 글의 향연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반문할지도 모른다. 온라인 공간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지금 쓰고 있는 리뷰조차도 같은 처지다. 행동하지 않는 진보가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일본 청년은 더 이상 진보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 덧없는 희망을 좇기보다는 눈앞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산다. 다시 말하면 지금이 행복하다고 믿는것이다. 분명 행복한 것이 아님에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믿음의 영역에 있다. 일종의 인지부조화다. 우리는 인지부조화를 해결하기보다 스스로 인지부조화의 길로 걸어들어 간 것이다.

 

기성세대는 아마 이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성세대와 청년은 분명 다르다. 경험의 차이다. 현재 기성세대는 인류의 진보를 목격한 세대다. 그들은 청년 시절 진보의 흐름에 참여했다.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걸 체험했다. 하지만 지금의 청년세대는 아니다. 진보가 아니라 인류의 절망을 목격한 것이다.

 

진보가 불가능한 시대다. 여기서 살아남는 것은 능동적으로 현재에 순응하는 것이다. 현재에서 아주 작은 행복에 만족하는 것이다. 행복하지 않은데도 어떻게든 행복할 지점을 찾아내 스스로 행복하다고 믿는 것이다. 지금의 청년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프리터족이나 니트족보다 더한 종족이 나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절망적인 사회, 불행한 청년

 

이제껏 일본은 경제 성장만 하면 어떻게든 된다는 생각으로 계속 달려왔는데, 돌연 경제 성장이 멈춰 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 전통이 없는 일본은 모두가 망연자실한 상태로,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게 된 것이다.(307)

 

사실 일본의 사례는 양반이다. 최저시급도 높을뿐더러 여러 복지제도도 상대적으로 잘 갖춰져 있다. 일본 청년은 아르바이트만 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니다. 일본 청년은 절망의 나라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나라 청년은 불가능하다.

 

아직 우리나라 청년은 아비규환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더 나은 직장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취업준비에 매진하고 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분투하고 있다. 불행은 잠시뿐이라 믿으며 장밋빛 미래를 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회는 점점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다.

 

끝은 정해져 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정해진 끝으로 달려갈 뿐이다. 행복한 청년을 생산하는 사회구조를 깨뜨려야 모두가 살 수 있다. 8년 전 우석훈과 박권일이 <88만원 세대>에서 짱돌을 들어라고 외친 것처럼, 이제 정말 저항과 연대가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모두 망연자실한 상태로, 그렇게 우두커니 서있을 뿐이다. 과연 우리나라 청년은 생존할 수 있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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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6-17 1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페이스북 접속을 줄인 이유가 세상에 대한 불만을 짧게 토해내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서흔님 말씀대로 알라딘 블로그에 쓴 글, 그리고 지금 제가 남기는 댓글 또한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페이스북에 비하면 알라딘은 글을 읽거나 댓글을 주고 받으면서 배울 게 많고, 반성할 기회도 많다고 생각해요.

서흔(書痕) 2015-06-17 11:38   좋아요 0 | URL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에서 소비되는 글보다는 알라딘의 글이 훨씬 나은 건 명백하죠. 댓글로 양질의 소통을 할 수 있는 것도 좋구요. cyrus님 같은 분이 계서서 더 좋은 것일 수도. ㅎㅎ

Soul_Play 2015-06-16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가는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서흔(書痕) 2015-06-17 11:39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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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죽기 위한 삶을 살아가는 남자가 있다. 무언가 모순적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 삶을 살고 있지만 그 삶은 죽음을 지향한다. 615분 전에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마을 주변을 시찰한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커피를 마신다. 이후 수도꼭지를 수리하고 새 나사를 박고 도구들을 정리한다. 그는 명확하게 죽음을 원하고 있지만 행동은 그와 정 반대다.


이 남자는 프레드릭 베크만의 소설 <오베라는 남자>의 주인공이다. 오베라는 이름의 남자는 색깔이 없는 사람이다. 인생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조연으로 삶을 살아가는 남자다.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는 사진 속 배경처럼, 그저 자신이 부여받았다고 믿는 삶을 묵묵히 살아내는 남자다. 그래서 그는 변화에 저항하고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색깔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변화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오베라는 남자의 이야기를 더듬다보니 영화 <플레전트 빌>이 떠올랐다. 영화 속 배경인 플레전트 빌은 완전무결한 불변의 세계이다. 사람이 모여 살면 으레 일어날법한 갈등도 없고, 오로지 기쁨만 존재하는 마을이다. 플레전트 빌은 오베라는 남자처럼 색깔이 없다. 그들은 흑백의 삶을 산다. 하지만 흑백의 세상에 <플레전트 빌>의 주인공 데이빗과 제니퍼가 떨어지면서 완전무결함에 균열이 일어나고, 종래에는 플레전트 빌에 사는 사람들 모두 색깔을 얻는다.


오베라는 남자도 색깔이 무엇인지 느꼈던 적이 있었다. 소냐라는 여자를 만나면서부터다. 소냐는 모든 색깔의 물감을 담은 파레트였다. 그는 우연히 야간 기차 청소부를 하면서 그녀를 만났고, 그녀의 곁에 있으면서 그녀의 색깔에 물들기 시작했다. 소냐는 세상의 배경처럼 살아왔던 오베를 발견해낸 것이다. 오베는 그렇게 세상의 배경이 아니라 제 인생을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소냐와 함께 있었다고 해서 오베라는 남자가 색깔을 완전히 얻은 것은 아니었다. 소냐 곁에 있었기 때문에 색깔이 있었던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소냐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오베라는 남자는 다시 색깔을 잃었다. 그는 소냐의 죽음 이후에도 변함없이 오전 615분 전에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마을을 시찰했다. 하지만 그가 매일 같은 삶을 반복하는 동안 세상은 급격하게 변했다.


그는 완고했으며,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모든 사람이 트레일러를 후진할 수 있어야 하고, 라디에이터의 증기를 스스로 뺄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것이 그의 원칙이었으며, 그는 평생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는 느긋한 인생을 즐기라는 말과 함께 인생의 3분의 1을 일해 온 곳에서 해고됐고, 주변 사람들에게 구제불능이라고 여김 받았을 뿐이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아내 소냐 곁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그는 죽어야겠다고 결심했으면서도 자신의 일상을 무너뜨리지 않으려 노력한다. 일상의 단절을 요구하는 것이 죽음임에도 그는 자신이 지켜왔던 원칙을 끝까지 고수하면서 자살을 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자신의 원칙을 흩뜨리는 일이 일어나면서 자살하려는 계획은 계속 미뤄진다.


그는 자살하려는 마음을 먹으면서부터 그의 원칙보다는 소냐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떠올린다. 자살 이후 소냐의 곁으로 갔을 때 소냐가 그것을 좋아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을의 이웃을 도와주는 일, 길에서 방황하고 있는 고양이를 데려다 키우는 일, 전에 싸웠던 친구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 등을 계속한다. 이제 그는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며 타인과 단절된 삶을 살지 않는다. 오베라는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타인과 함께하는 삶이 무엇인지 체득해간다.


오베라는 남자는 시간이 흘러 끝내 소냐의 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의 장례식은 그가 원했던 것처럼 조촐하게 끝나지 않는다. 300여 명의 사람이 모여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 그는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삶을 지탱했지만 그의 삶은 어쩌면 자신이 증오했던 하얀 셔츠의 남자들처럼 편협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결국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 색깔을 얻었다. 그의 삶은 대부분 흑백이었을지 모르나 그의 죽음은 오색찬란했다.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란 상당히 지난한 작업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들의 말을 들어달라며 투쟁하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우리 모두는 자신의 삶이 세상의 최우선이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원칙대로 타인을 재단하고 판단한다. 우리의 언어대로 그들의 언어를 마음대로 번역한다. 이러한 세상은 아비규환이며, 오베라는 남자처럼 자살이란 결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오색찬란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오베라는 남자처럼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삶에는 우리의 생각으로만 쉽게 재단할 수 없는 이야기가 녹아있다. 나의 이야기와 타인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하면서 얽히고설킬 때, 오베라는 남자가 깨달은 소통이 일어난다. 우리는 지금 소통이 필요하다. 소통과 연대는 그만큼 힘이 세다. 구제불능이라고 여겼던 오베라는 남자가 결국에는 변화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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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를 베꼈을까]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 명작을 모방한 명작들의 이야기
카롤린 라로슈 지음, 김성희 옮김, 김진희 감수 / 윌컴퍼니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어떤 것을 창작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거나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등의 상투적인 격언을 종종 듣곤 한다. 개인적으로는 수도 없이 들어왔던 말이라 상투적인 것을 넘어서 진부하기까지 하지만, 비틀어 생각해보면 상투적이거나 진부하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 이제 당연까지 이른 것을 의미할는지도 모른다.

 

앞서 언급한 격언들은 선대의 것을 끊임없이 습득해야만 그것을 넘어 새로운 것을 창조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창작 행위는 선대의 것에 빚지고 있다는 말이다. 창작 행위는 어떤 한 개인이 그동안 경험했던 모든 것을 재료로 삼아 자신의 개성이라는 바늘로 기워내 하나의 창작물로 재창조하는 작업인 것이다.

 

즉 대부분의 예술가는 앞서 길을 닦아놓은 선대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성장하고, 또 뛰어넘기도 한다. 이러한 예술계의 메커니즘을 다룬 책이 나왔다. 바로 카롤린 라로슈의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란 책이다. 얼핏 보면 모작에 관한 내용을 다룬 책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은 예술 작품의 혈연관계를 총체적으로 조망해보려는 시도의 결과물이다.

 

발전시키거나 전복(顚覆)하거나

 

창조의 사전적 의미는 전에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다는 것은 인간이 신적 존재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에게 통용되는 창조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기존의 것을 계승하면서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기존의 것을 탈피해 도리어 전복하는 것이다.

 

르네상스시대의 위대한 예술가 중 하나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의 여러 작품 중 대표 격인 <최후의 만찬>도 그의 완전한 창작물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당시 “15세기 중반에 들어 르네상스 회화의 중심지, 즉 원근법이 탄생한 도시 피렌체에서 수도원 식당을 장식하는 단골 그림으로 등장(13)”했던 일화인 최후의 만찬의 내용을 차용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위대한 것은 기존에 통용되고 있었던 일화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다르게 표현했다는 것에 있다. 당시 통용되던 최후의 만찬그림에서 배신자 유다는 배신하지 않은 다른 제자들과 구별될 수 있도록 식탁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기존의 통념을 답습하지 않았다.

 

그는 주저 없이 유다의 위치를 다른 제자들 사이로 옮겨 놓았다. (중략) 레오나르도가 생각하기에 이 그림의 핵심은 마음의 동요였다. 그래서 그는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동요를 놀라움, 두려움, 사랑, 고뇌, 배신자에 대한 분노 등이 잇달아 표현되는 안무로 연출해냈다. (중략) 가운데서 유다는 멈칫하며 겁을 먹은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16)”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사례처럼 대부분의 창작은 재창작이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말을 빌리자면 어떤 그림도 회화를 완결할 수는 없고, 어떤 작품도 그 자체로만 완결되지는 않는다. 각각의 창작품은 다른 창작품을 변조하거나 개선하거나 재창작하거나 먼저 창작한 것에 해당한다. 창작은 기득권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사라지는 것이며, 정해진 수명 같은 것을 지니고 있다.(7)”

 

Input이 곧 Output이다

 

파블로 피카소는 1934년에 화가란 결국 무엇인가? 남들이 소장하고 있는 마음에 드는 그림을 자기도 갖고 싶어서 직접 그려 소장하는 사람 아니겠는가. 시작은 그러한데 거기서 다른 그림이 나오는 것이다(7)”라는 말을 남겼다. 예술가는 결국 가장 쉬워 보이지만 어려운, 다른 보는것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예술가들이 선대의 것을 끊임없이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존의 것을 토대로 놓지 않으면 결코 새로운 것이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계승하거나 탈피하거나 둘 중 하나다. 이는 기존의 것이 전제돼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창작자에게 있어서 경험이란 Input이 없다면 창작이라는 Output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후대의 예술가들이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일은 지난할 수밖에 없다. 경험해야만 하는 기존의 것이 너무 늘어난 탓이다. 물리적인 한계 때문에 한 사람이 세상의 모든 예술가를 알고 그들의 작품을 보기란 요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도 정진해야 하는 것이 예술가의 삶이다.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에 등장하는 모든 예술가와 예술 작품들도 이러한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앙드레 말로가 <침묵의 소리>에서 주장했듯 예술은 형식으로 다른 형식을 정복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저런 형식을 재량에 따라 끊임없이 재해석하는 작업이 예술인 셈이다.(7)” 정복하기 위해서는 정복하려는 대상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는 예술가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 명심해야할 진리다. 이 진리가 명작을 모방한 명작들의 이야기에서 얻은 달콤하면서도 쓴 수확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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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4-27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끼다`라는 말이 부정적 의미(표절의 의미와 가깝죠)로서 많이 떠올리기 쉬워서 책 제목 선정이 조금 아쉬운 느낌이 들어요. 이 책을 직접 읽어보지 않으면 유명 화가들이 표절했는 줄 오해할 수도 있겠어요. ^^;;
 
좋은 균 나쁜 균 - 세균 세상에서 건강하게 살아남기
제시카 스나이더 색스 지음, 김정은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세균은 미세한 단세포 생활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우리가 세균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것은 불쾌한 감정이다. 이 감정은 자동반사적이다. 다시 말하면 세균이라는 단어에는 미세한 단세포 생활체라는 의미 대신 더럽고, 꼬물거리고, 불결한 생물체라는 의미가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균이라고 해서 모두 다 해로운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우리의 신체에 살면서 우리의 몸 대신 해로운 세균을 저지하는 좋은 세균도 존재한다. 제시카 스나이더 색스가 쓴 <좋은 균 나쁜 균>이란 책은 세균이라는 단어에 기생하는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떨쳐내려는 시도다. 책은 각종 사례와 전문적인 정보를 독자에게 제시하면서 세균에서 느끼는 감정 대신 세균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

 

세균은 정말 나쁜가? 

 

특정 미생물이 특정 질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코흐와 파스퇴르가 증명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신세대 의학 연구자들은 세균 박멸을 목표로 세균계와 전면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세균에 대한 파스퇴르의 부차적 관점을 간과했다. 파스퇴르는 모든 세균이 해로운 것은 아니며,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많은 세균이 이로울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49~50)” 

 

필자가 어릴 때만 해도 아토피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의 아토피 피부염 때문에 고생하는 부모를 많이 볼 수 있다. 아토피 피부염에 관한 여러 진단과 처방이 난무했지만 아직까지 확실한 처방은 나오지 않고 있다. 저자는 아토피 피부염, 건초열, 천식 등의 유행이 일반적인 감기에서 홍역, 볼거리, 풍진에 이르기까지 유년기에 흔히 나타나는 바이러스성 질환이 줄어든 것에서 직접적으로 기인했다(122)”고 설명한다

 

저자의 주장은 우리 신체에 내재한 면역계가 성장할 수 있는 경험의 수단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필자에게 홍역, 볼거리, 수두 등의 바이러스성 질환은 어린 시절 당연히 겪어야 하는 관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당연히 겪는 것인 줄만 알았던 이러한 바이러스성 질환이 미성숙한 면역계가 탄탄하게 성장할 수 있는 계기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위생이나 청결이 강조되고, 아이들의 놀이터에 흙 대신 우레탄이 깔리기 시작하면서 세균과의 접촉이 원천적으로 차단되기 시작했다. 저자는 세균학자 시어도어 로즈버리의 주장을 동원해 이러한 시도가 위선임을 폭로한다. “균과 오물이 항상 우리의 적이라는 통념은 해롭고 낭비적이다. (중략) 우리 몸속에 살고 있는 고유의 이 오밀조밀 잘 짜인 사회를 이루고 있으면, 이런 균보다 적응을 잘 못해서 병을 일으키는 다른 균의 침입을 막는 가장 튼튼한 방벽이 된다.(59)” 

 

저자는 면역학자인 그레이엄 룩의 주장을 통해 인체의 정상적인 미생물상과 물과 음식을 통해 몸속으로 들어오는 주위의 세균을 기준으로 질병의 원인이 되는 감염과 무해한 세균 정착을 구분(152)”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세균하면 떠오르는 것은 우리 신체에 들어와 위해를 가하는 감염이었다. 감염만을 염두에 두고 세균을 박멸한다면 세균 정착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룩이 주장하는 세균 정착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면역계가 오작동할 수밖에 없다. 면역계가 오작동하기 시작하면 자신의 몸을 이루는 건강한 세포까지 공격한다. “마치 어떤 안전 정지선이 사라진 것처럼 면역계가 민감하게 반응하고 친구인지 적인지 분간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116)” 

 

세균과 인간의 공존 

 

이러한 점을 간과하고 우리 몸에서 세균을 박멸하거나 세균과의 접촉을 차단하면 면역계의 균형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의 주장이 균 이론자체가 가져다준 이로운 점을 배제하거나 공중위생과 항생제로 미생물과의 자연스러운관계가 파괴되기 이전 시대의 인류가 훨씬 나았다는 암시를 내포(229)”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세균과 인간의 공존이다. 저자는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조슈아 레더버그의 주장을 빌어 독자들에게 외친다. “만약 인간을 단순히 하나의 개체 이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지평은 더욱 넓어질 것입니다. 인간은 인체를 구성하는 세포보다 훨씬 많은 미생물을 포함하는 초개체입니다.(356)” 

 

우리의 생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더럽고 불결하게 여기는 세균이라는 아주 작은 존재다. 세균과 인간의 공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세균의 공격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건강과 생존을 지키는 열쇠는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세균계가 쥐고 있을 것이다.(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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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4-24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몸에 이로운 좋은 세균도 많은데, 건강에 해로운 나쁜 세균에 대한 기억이 많다보니 일부 사람들은 세균이라는 단어 자체를 불결하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