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국 속의 여자들 - 문화과학 분석신서
이득재 지음 / 문화과학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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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이책의 저자가 쓴 ‘가족주의는 야만이다’라는 책을 읽다가 어려운 이론이 계속 등장하는 데에 질려서 읽다가 손을 놓아버린 적이 있다. 이 책 역시 전작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가족 현실을 얘기하면서 남의 나라 이론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론 적용을 하지 않고 우리 사회 현실을 풀어낼 때는 쏙쏙 이해가 되었지만, 들어보지도 못한 서구 학자들 이름과 어려운 이론이 수시로 등장해서 머리에 쥐가 나는 줄 알았다. 왜 우리 현실을 우리언어, 우리이론으로 풀어내지 못하고 그 들어보지도 못했던 서양 학자들이 생산해 놓은 이론으로 풀어내야 할까. 사람의 머릿속까지 어떻게든 하나하나 분석해 증명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서양철학으로 문제를 풀어가다 보니 책이 더 어렵게 읽힌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 저자들의 이름은 주로 문학 작품을 인용할 때 등장했고, 그 작품들을 설명하는 이론은 불행하게도 우리가 창조해낸 이론이 아니었다. 이런 불만을 누군가에게 얘기했더니 인간사를 접근하는 문제는 다 똑같은 거라나... 내가 보기엔 ‘자기창조’가 없는 학문 풍토이기에 남이 만들어 놓은 이론을 끌어다 쓰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더 먼저 든다. 서구는 이론을 창출해내고, 한국은 그걸 가져다 쓰고... 한국은 언제쯤 한국 사람들 시각으로 현실을 들여다보며 한국 현실에 맞게 한국 걸 창출해서 써먹을 수 있을까... 이 점만 빼고 보면, 이 책은 정말 굉장한 책이다.

구성애 씨의 성교육을 비판한 내용이 와닿았고(굳이 서구 학자들 이론을 개입시키지 않아도 구성애 씨의 성교육내용은 허점투성이다.), 정신분석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프로이트에 관한 해석 역시 기존의 시각과 달라서 좋았고(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남성학문으로 만들어놓은 사람이다. 우리의 시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언어에 대한 접근시도 또한 흥미로웠다. 나 역시 한국말 호칭체계 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고민하다 보니 언어 문제가 시급하다는 생각을 해왔었다. 그런데, 한국말은 여성 언어의 부재 문제 이전에 타언어가 가지고 있지 않은 핸디캡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 바로, 자기가 사용해야할 언어가 ‘나이’를 기준으로 규정된다는 사실. 한나라의 말은 그 나라 국민 모두가 쓰는 말인데 그런 말이 특정부류(연장자)에게 유리하도록 특권이 부여되어 있다. 한국 사람들은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문자라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내눈엔, 한글은 훌륭한 문자일지 모르지만, 나이 개입으로 나이가 어린 사람의 언어를 제한하는 한국말은 인간적인 말이 아니다. ‘나이’가 개입되는 말이다보니 한국말은 자연히 상하를 구별하는 호칭체계가 발달했고 그 와중에 여성언어의 부재까지 얽혀 문제가 더 심각하다. 한국말을 정의하는 데는 ‘나이’를 빼놓을 수 없지만, 만약 한국말에서 이 나이를 거두어낸다면 개인을 개인으로 규정하는 말로 바뀔 수밖에 없을테고, 그 과정에서 여성 언어 부재 문제 또한 손을 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말 호칭체계를 들여다보면 ‘관계’는 있는데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 정체불투명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언제나 ‘나이’가 개입되어 개인을 개인으로 만나지 못하고, ‘(상하)관계’로만 파악하다 보니 끊임없이 쪼개고, 찢고해서 더 이상 쪼개지지 않을 때까지 쪼개서 관계를 드러내는 호칭만이 발달했다. 이렇게 ‘개인’이 없는 데다 성차별 언어까지 감수해야하는 여자들은 이중의 차별을 겪고 있다. 그런데, 개인도 정의되어 있지 않은데, 성차별 언어가 개선되길 바라는 건 순서가 잘못된 거 아닐까? 이런 뒤죽박죽 현실을 잘 드러내주는 현상이 하나 있다. 연상연하 커플이라고 할 때 연상연하는 왜 남자보다 여자가 나이가 더 많은 경우에만 사용될까라는 의문은 차라리 초딩버젼이다. 이보다 더 코미디는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서는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는 말이 먹힌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남자가 더 어린 연인 사이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너’라고 부르기도 하고 이름을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연장자와 연소자 사이에서는 나이가 무시되면 왜 불쾌해할까? 우리는 우리의 시각이 아닌 서구의 이론으로 우리 현실을 보기에 모두를 총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성차별’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는 게 아닐까?

‘삼촌’이라는 호칭을 보자. 아빠나 엄마의 남동생이나 형/오빠는 "삼촌"이라고 부른다. 그것도 엄마의 남동생이나 형/오빠는 삼촌 앞에 ‘외’자가 들어간다. 아빠쪽은 그냥 삼촌이지 ‘내삼촌’이 아니다. 아빠의 여동생이나 누나는 "고모"라고 부른다. 엄마의 여동생이나 언니는 "이모"라고 부른다. 고모랑 이모는 나랑 몇 촌 사이일까? ‘삼촌’은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지 호칭이 아니다. 부를 때 쓰는 말과 관계를 가르킬 때 쓰는 말이 일관되게 자리잡혀 있지 않고 섞여서 쓰이다 보니 생기는 일이다. '누이'라는 말은 남자가 여자를 부르거나 가르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 여자가 여자를 부르거나 가르킬 때 쓰이는 말이 아니다. 결혼한 여자는 남편의 여동생이나 누나를 타인에게 지칭할 때조차도 남자가 정해준 호칭(시누이)을 쓴다. 그런데, 당사자를 부를 때는 ‘아가씨’나 ‘형님’이라고 한다. 왜 ‘시누이들’이라는 말은 성립하는데 남편의 남자형제들을 뭉뚱그려 부르는 말은 없는걸까? ‘누이’가 나이를 개입시켜 언니나 여동생 가리지 않고 부를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일 거다. ‘시누이’에 해당하는 남편이 아내의 언니와 여동생을 부르는 말은 뭘까? 처형, 처제는 시누이에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아가씨’, ‘형님’에 해당하는 말이다. 사정이 이런데 왜 여자들은 ‘아가씨’, ‘형님’, ‘시누이’라는 말을 정리하지 못할까? 난 이런 호칭만 생각하면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쏙 들어간다.(새언니가 나를 '아가씨'라고 부를 때 지금이 양반상놈하는 시대도 아닌데 내가 졸지에 아가씨가 되는 게 못마땅하다. 거기다 작은 올케가 '형님'이라고 불러제끼면 난 그저 “엽기”라는 생각만 든다. 나 역시 결혼으로 이 대열에 끼일 걸 생각하면 소름만 끼친다. 아직은 내가 수행하는 상황이 아니고 당하는, 그래서 반만 몸담고 있는 현실이지만, 가끔 남자들 앞에서 이런 문제를 지적하면 무슨 또라이 취급하며 굉장히 피곤한 여자라는 반응이 되돌아온다. 그래서 말인데... 한국어학자들이야 거의가 남자들이라서 그렇다지만, 여성단체들은 왜 이런 문제는 안 건드리는 거냐고요오. )

동생의 아내는 시누이에게 ‘형님’이라고 부르고, 오빠의 아내는 시누이에게 ‘아가씨’라고 부른다. 왜 동생의 아내는 시누이에게 ‘아가씨’라고 부르지 않고 ‘형님’이라고 불러야할까? 동생의 아내는 시누이에게도 ‘형님’이라고 부르지만, 오빠의 아내(동생의 아내 입장에서 볼 때 시아주버니의 아내)에게도 ‘형님’이라고 부른다. 시누이와 오빠의 아내는 동생의 아내한테 왜 같은 호칭으로 불릴까? 동생의 아내, 나, 오빠의 아내 이 세 여자의 정체성은 도무지 정리가 되질 않는다. 오빠의 아내는 ‘새언니’라고 부른다. 오빠와 새언니가 부부 사이가 아닌 남매 사이가 된 건가? 오빠의 아내는 새언니이면서 왜 동생의 아내는 ‘새동생’이라고 안 할까? 무엇보다, 왜 여자끼리인데도 남자들 호칭인 ‘형님’이라는 말을 써야할까?

자매(姉妹)는 여자 입장에서 여자를 가르키는 말이 아니다. 자는 한자로 ‘윗누이자’를 쓰고 매는 ‘아랫누이매’를 쓴다. 여자가 여자를 가르킬 때 ‘누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이걸 보면 한국어에서는 ‘여성’은 아직 정의되지 않은, 생명력이 없는, 언어를 가지지 못한 정체불명의 존재다.

남편쪽 식구들, 그 중에서도 아들과 관계된 식구들은 큰아빠, 큰엄마, 작은아빠, 작은엄마라는 족보를 낳지만, 아내쪽 식구들은 외삼촌, 외숙모, 이모, 이모부라는 족보를 낳는다. 엄마의 남자형제들과 그 아내들은 나에겐 큰아빠, 작은아빠, 큰엄마, 작은엄마가 되지 않는다. 오로지 아버지쪽 형제들과 그 아내들만 큰아빠, 작은아빠, 큰엄마, 작은엄마가 된다. 왜 아빠쪽에만 이런 호칭이 성립할까? 남자의 가족은 아직 확대가족이라는 반증 아닐까? 호주제가 폐지되면 이런 호칭들이 어떻게 정리될 것이며 서로를 어떻게 부를지 무척 궁금하다. 그런데, 아직 여성단체에서 이에 관한 소식은 감감무소식이다.

여자들은 이런 가족 안에서의 호칭문제도 풀지 못하면서 왜 직업과 관련된 성차별 언어만을 건드릴까?

형은, 언니는, 오빠는, 누나는 동생을 이름으로 부를 수 있지만, 동생은 형, 언니, 오빠, 누나의 이름을 부를 수 없다. 똑같은 인간이라는 코드로 접근하자면, 이것만큼 비인간적인 잣대가 없다. 개인을 개인으로 보지 못하다 보니 가족밖을 넘어서도 모두가 형이 되고, 언니가 되고, 오빠가 되고, 누나가 된다. 상하구분으로 집안에서부터 개인의 존재가 부정당하다보니 집안을 넘어 밖에서도 개인이 부정되는 상황까지 낳은 것이다. 집안에서부터 형, 언니, 오빠, 누나 이런 ‘관계’를 접고 개인 대 개인으로 파악해 같은 눈높이의 호칭으로 부를 수 있을 때 밖에서도 개인과 개인이 만날 수 있고, 나아가 의사/여의사, 기자/여기자... 이런 직업적 성차별 언어문제까지 건드릴 수 있을 거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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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된 학교 - 한 사회학자의 한국교육의 패러다임에 대한 지적 성찰
김덕영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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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이 바뀌고 교육에 관한 정책이 새로 나올 때나, 언론이 교육개혁 좀 하자고 교육의 방향을 제시할 때나 거기에 귀가 솔직해지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건드리지도 못하고 입시제도만 이리 뜯어고쳤다 저리 뜯어고쳤다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책 역시 제목에 홀려 목록을 살펴보았으나 내 기대에 부응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나라 교육 제도는 어떻게 돌아가는 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책속에서’란에 소개된 ‘개인주의’에 관한 언급에서 약간의 희망을 갖고, 주문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우리 교육이 살 수 있는 길은 '개인주의' 실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개인주의를 어떻게 실현시켜야 되는가에 대한 얘기는 없다. 이 책은 하나하나의 사실을 놓고 볼 때는 알찬 내용을 담고 있지만 개인주의 교육이라는 대안제시에 비해 그 실현과정에 대한 고찰이 깊지 못해 아쉽다. 개인주의는 우리 스스로 얻어낸 개념이기보다 서구 나라들을 들여다보면서 힌트를 얻은 정답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개인주의를 어떻게 정착시켰는 지 그 과정까지 고찰해봐야 하는데 우리는 개인주의라는 ‘결과’만 얘기하고 개인주의를 정착시켜간 그 ‘정신’, ‘과정’까지는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에 더 시행착오를 겪는 건 아닐까? 지금쯤은 ‘개인주의가 필요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개인주의를 어떻게 실현시켜야할까’ 이런 얘기가 나와야할 때다. 어차피 이 책에서도 다른나라들 교육방식이 개인주의라는 얘기만 있고 그 나라들은 어떻게 개인주의 교육제도를 이루어냈냐는 얘기까지는 없으니, 우리는 왜 개인주의가 구현되지 못하고 가족주의에 집착하는 지 그걸 진단해 가는 과정이 해결책에 다가가는 일이 될 수 있겠다.

한국의 학교에서 개인주의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건 입시제도나 교육과정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등록금’ 문제다. 거기다 가정이 아빠는 밥벌이, 엄마는 살림 이런 구조이다 보니 일상에서 개인주의가 자랄 환경이 못 되었다. 이런 걸 간과한 채 교육에 관해서만 개인주의를 얘기하는 게 설득력이 있을까? 등록금 부담 문제와 이런 삶의 형태를 살펴보는 게 한국의 교육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아니, 이 사회에 개인주의가 정착되게 할 수 있는 열쇠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언제나 입시제도만 뜯어고친다. 얘기가 길어지니까 여기선 등록금 문제만 언급하고 싶다. 후자(아빠는 밥벌이, 엄마는 살림하는 가정 구조)에 대해서는 ‘현대 가족 이야기’라는 책 서평 참고요망. 다시 화제로 돌아가서,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들은 국가가 학생에게 등록금을 대출해 주고 졸업후 갚아나가는 방식이거나 거의 전액을 국가가 부담해주는 형태다. 대학은 그 나라의 앞날을 이끌어갈 인재를 키워내는 곳이다. 그런데도 한국은 공적비용이 개입돼 있지 않고 부모 손에만 등록금을 의존한다. 이게 지금의 지독한 입시교육의 병폐를 낳는다. 이게 한국사회에서 개인주의 실현을 발목잡고 있는 주인공이다. 이게 부모의 인생도 없고 자식의 인생도 없는 부모와 자식간의 공생 관계를 낳는 거고, 부모가 꾸준히 자식의 교육을 간섭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든 거다. 이게 사교육에 집착하게 만드는 원인이고, 평생 자식의 인생을 자신의 손안에 움켜쥐려는 부모를 낳는 거다. 이게 공부를 잘하나 못하나 돈으로 대학에 밀어넣으려는 부모를 낳는 거고,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교육이 차이가 나게 하는 거다. 등록금이 부모 손에서 나와야되니까 노후복지문제도 개떡같은 나라 현실에서 자신들의 노후를 준비할 수 있는 여력을 자식교육비에 투자해야한다. 그러니 결국은 자신의 노후보험을 자식한테 드는 셈이 된다. 이게 자신들은 책 한 줄 안 읽으면서도 자식한테는 공부, 공부, 공부를 주문할 수 있는 부모들의 뻔뻔함을 낳는다.

내 등록금이 부모한테서 나오는데 내가 부모에게 대등한 존재로 보여질까? 더구나 장유유서가 강조되는 나라에서, 부모에 대한 효도가 강조되는 나라에서. 부모한테서조차 독립된 존재로 존중을 받지 못하는 현실인데 학교에서는 가능할까?

한국 현실에서 국가가 대학등록금을 전액부담하는 현실은 불가능할 것 같고, 미국처럼 국가가 등록금을 대출해주어서 등록금을 부모가 아닌 학생 자신이 부담을 떠안고 다니게 만든다면 지금의 병폐를 낳고 있는 모든 입시제도의 문제는 해결된다. 국가 예산이 딸려 이것도 어렵다면, 학생이 등록금을 벌어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던가. 어떻게든 등록금이 부모손에서 나오는 걸 학생 자신한테로 부담을 옮겨야 한다. 등록금을 자신이 감당하는데 공부하기 싫은 학생이 대학에 가려고 할까? 가진 부모나 못가진 부모나 등록금은 부모의 부담이 아니라 학생의 몫이라는 인식이 있다면 정작 교육의 주인공들인 청소년의 생각을 배제한 채 사교육에 열올릴까? 등록금이 학생 자신 부담이면 부모가 얼마나 잘 사는 사람이냐에 따라 교육받는 수준이 차이가 날까?

한 인간의 인생을 좌우하는 데 있어 경제문제,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경제개념은 결정적이다. 경제개념이라는 건 입시 공부하듯이 책에 있는 걸 외운다고 생기는 개념이 아니다. 선진국 학생들이 방과후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자기 용돈을 벌어쓰는 것처럼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용돈을 벌어가며 자기가 사고 싶은 것들, 자기가 해보고 싶은 것들을 자기 스스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가며 해결해 보는 과정에서 몸으로 터득해야 생기는 개념이다. 그런데, 한국의 학생들은 그런 시간을 ‘입시’라는 이름으로 박탈당한다. 지금의 입시교육은 이런 관점에서만 얘기해도 엄청나게 청소년들에게 억울한 형태다. 그렇다고, 부모들이 자식들한테 특별히 경제개념을 심어주는 것도 아니다. 한국 부모들의 용돈은 자식을 통제하는 수단이다. 스스로 용돈을 벌어쓰며 훗날 독립된 인생을 살아갈 준비를 미리부터 하는 선진국 청소년들에 비하면 한국의 청소년들은 스스로 용돈을 벌어 손에 든 예산에 맞게 계획을 세워 자신의 꿈을 실현해보는 중요한 인생과정을 압수당한 채 부모의 말에 복종해야하는 기계로 전락해 간다. 그리고, 청소년기에 건너뛴 시행착오를 다 큰 어른이 되어 보상받는다. 해외 나가서 싹쓸이 쇼핑하고, 카드빚에 인생 망치고, 유명상품 추종하는 형태로. 공부만 강요시킨 후유증이 이렇게 나타나는 거라는 걸 한국 사회는 무시한다. 이런 걸 인식한 사회가 입시라는 이름으로 학생을 밤늦게까지 학교에 가두어 놓을 수 있을까?

이밖에, 개인주의를 어렵게 만드는 요소들이 많다. 개인이 존중되는 민주주의와 장유유서가 존중되는 유교는 공존이 힘든 관계다. 개인주의를 정착시키려거든 유교를 포기하고 민주주의를 노래해야하는데, 한국사회는 장유유서를 노래하면서 개인주의를 노래하기 때문에 진도가 더 느린 것 아닐까? 또, 이미 한국말이 개인규정을 흐리멍텅하게 만들고 있는데 한국말을 건드리지 않고 개인주의를 얘기할 수 있을까?

일주일에 책을 몇권씩 읽어야하는 치열한 수업도 아니고, 부모가 등록금과 용돈을 지원해주어서 공부할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는데 정작 학문의 전당이라는 대학에 몸담고 있는 한국 대학생들은 왜 그렇게 공부를 안 할까? 이건 국가적으로 엄청난 낭비인데 한국사회는 여기에 별 개념이 없다. 국가가 교육에 대한 비젼이 있다면 이런 일을 방치할까? 국가의 교육비젼없음을 입시제도에만 집착하고, 부모의 자식에 대한 교육철학없음을 학교에만 투덜대는 현실에서 개인주의라는 말이 먹히긴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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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
윤영무 지음 / 명진출판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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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을 보고 구미가 당겼다. 장남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을까 무척 궁금했다. 서점에서 몇 장 넘겨보니 사고 싶은 책은 아니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빌려보기로 마음먹고 도서관 싸이트에 들어가 검색을 해보니 집에서 가까운 도서관에는 비치가 되어 있지 않았고, 집에서 먼 도서관에는 한 권이 비치되어 있었지만 이미 대출중이라 거의 20일을 기다려 4시간만에 읽었다.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전체적인 코드는 ‘나’라는 개인으로서의 주체적 자아가 아닌 ‘장남’이라는 객체적 자아다. 아직 멀긴 했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집단, 조직의 개념이 점차 무너져가는 시대이고, 개인이 강조되는 시대다. 그런데, 저자는 장남정신 부재에서 현실을 거론한다. 두목/짱은 조폭사회에나 필요하다. 가정과 조직의 대명사, 회사는 개인과 개인이 만나는 장소일 뿐이므로 짱의 정신이 아닌 개인과 개인이 공존 가능한 공간이어야 한다.

저자의 머리에는 ‘여자’가 입력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이혼 여부를 부부 당사자가 머리를 맞대고 풀어가는 게 아닌 형제들의 의견을 수집해 형제들간의 이해득실을 따져 결정하는 것하며, 형제들한테 신경 쓰는 것처럼 처가에도 신경을 써야한다며 제시한 아내 몰래 아내의 부모님을 찾아가 용돈을 주면 아내가 나와 내 식구들에게 더 잘 할 거라는 얘기에서 인간에 대한 배신마저 들었다. 아내에게도 부모님이 있지만 아내의 부모를 두고 장남인 나한테 시집와서 내 부모를 모시는 거에 대한 감사 차원에서 처가를 챙기는 게 아니라 내가 아내의 부모한테 잘해야 아내가 나한테 잘할 거라는 계산이 담긴 보살핌이다.

결혼 할 때까지는 장남의 아내가 개입되지 않으니까 ‘장남’이라는 말에 시비를 걸 건덕지가 없다. 그런데, 결혼을 한 남자가 ‘장남’을 노래하는 순간 장남의 아내는 장남이 식구들에게 충성을 바치는 데 들러리 역할을 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여기서 ‘장남’이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가 여성의 존재를 배제한 채 어떤 설득력을 가질까를 고민하게 된다. 결혼한 남자의 삶이 왜 ‘장남의 삶’으로만 그려져야 할까? 남편, 아빠, 사위의 삶도 있는데... 이 각각의 삶이 따로 국밥처럼 해체가능한 분리된 삶도 아닌데 말이다. ‘장녀’라는 말도 ‘장남’이라는 말만큼 무게를 가지며, ‘장녀의 삶’도 ‘장남의 삶’만큼 주목을 받는 삶이던가? 장남의 무게를 덜기위해 형제들이 장남의 부담을 나누어갖자는 얘기에도 ‘장남의 아내’, ‘장녀’는 고려되지 않았다.

부부간에 대화를 해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대화를 회피하고, 웬만하면 참고살자주의인 사람이 말하는 장남정신은 아슬아슬해보이기만 하다. 아내의 희생을 담보로 자신의 장남정신을 실현했으니 아내에 대한 얘기는 당연히 결혼, 이혼 얘기 정도밖에 할 얘기가 없지 않았을까... 저자는 부부, 가족간의 소통이 아닌 오로지 장남정신으로만 돌아가는 가정을 그려내고 있다. 저자가 형제들한테 신경을 쓴 것만큼 자신의 아내에게 신경을 쓴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아내가 왜 편지를 써놓고 친정으로 갔었는지에 대한 고찰은 없고, 아내가 편지를 써놓고 친정으로 갔었다는 사실만 부각시킨다. 아내가 친정에서 돌아왔을 때의 어머니의 태도와 이혼 얘기가 나왔을 때 어머니가 취한 이중적 태도에 대한 고찰도 없다. 단지 상황 전달만이 있을 뿐.

이 책은 장남의 삶은 왜 달라야할까에 대한 원인을 찾고 처방을 내려 우리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장남신화를 깨뜨리자가 아니라 장남정신을 더 부각시키고 있다. 아직도 장남이라는 말에 무게를 실어 이 책을 읽고 장남이라는 말 앞에 숙연해질 사람들을 생각하니 씁쓸하다.

장남신화는 장남을 가르쳐 놓아야 줄줄이 딸린 동생들을 책임질 수 있었던 못먹고 살던 시대가 낳은 유산일지도 모른다. 20, 30대에게서도 이런 책이 나올 수 있었을까?

이 책을 읽고 내가 내린 결론은 ‘장남이라는 말은 사전에서 사라져야한다’다. 장남정신, 장남역할 이런 정신, 역할이 강조되는 삶은 주체적 삶을 마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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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샤오링의 한국 리포트
왕 샤오링 지음 / 가람기획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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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한국말을 배우게 된 계기는 한국 역사나 문화에 대한 관심이 아닌 한국 기업에 취업하기 위해서였다. 관심이라는 순수 동기가 아닌 자신의 취업문제를 염두에 두고 시작한 공부였으니 저자가 중국 사람들의 반응에 예민했던 게 이해가 간다. 내 지적 호기심에서 출발한 공부가 아닌 생활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공부였으니 그 만족도도 한국 사정이나 한국 사람들의 행동에 좌지우지되기 더 쉬웠던 게 아닐까.

한국 대학생들은 공부도 안 하고, 땡땡이도 잘 치고, 여학생들이 겉멋 부리는 데... 시간 낭비하더라 이런 시각에서 좀 더 나아가 그들이 왜 그런 지까지는 제시하지 못하는 걸 보아 내 눈에는 저자가 중국에서처럼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생활할 수 없음이 짜증난다는 것이지 한국 학생들을 걱정한 게 아니다. 그런 제시를 하자면 저자가 한국 생활을 좀 더 깊숙이 해봐야할 것 같다.

그러나 한국이나 한국 사람들에 대해 꼬집었던 내용은 굳이 부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나도 평소에 느끼던 것들이었으니까. 한국 비판 뿐만 아니라 중국 사정에 대해서도 들여다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한국 여자들이 중국 여자들의 주체성을 반만이라도 따라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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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 - 새로쓰는 가족이야기 또하나의 문화 17
또하나의문화 편집부 엮음 / 또하나의문화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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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 수상은 어린 시절, 엄마가 여성으로서의 삶 이외에는 가르쳐 준 게 없다는 데에 불만을 품고 성인이 되어 독립을 하고나서는 엄마를 평생 보지 않았다. 그런 대처 수상을 생각하며, 감히 가족을 어떻게 버릴 수 있냐는 내안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나 역시 내용은 없고 관계만 남은 내 정서적 가족은 오래전에 포기했지만, 순전히 내 경제적 무능 때문에 혈연적 가족안에 안주하는 삶을 정의내리지 못하는 숙제를 안고 사는 사람으로서 이 책은 나에게 희망이 아니라 절망으로 다가왔다. 혼돈이었다. 가족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는 점에서의 혼돈이 아니라 내 현실에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사람으로서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나 그런 혼돈. 50대분들의 글을 읽으며 “그래, 그들은 가진 사람들이니까.” 머리 속에서 이 한마디와 함께 낯설게 다가온 책이다. 막강한 이론도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이행할 수 없는 사람에겐 오히려 절망만 안겨 줄 뿐이다. 사실 내 한몸 건사하는 것도 버거운데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건 기본적 생활마저 보장 안 된 사람에겐 남의 나라 얘기같기만하다. 그러나, 나의 실행할 수 있냐없냐의 고민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의 문제이고, 이 책은 우리에게 가족의 정의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해주는 책이다.

‘혈연’이라는 이름으로만 묶기에는 가족의 범위가 너무나 다양해진 요즘이다. 이혼, 재혼, 입양, 맞벌이, 한부모 가족, 독신, 게이/레즈비언... 등의 형태가 늘어나고 있다. 결혼해서 자식이 있고 이혼하지 않은 가정만이 정상가족으로 취급받던 형태에서는 저런 다양한 형태의 삶은 주목받을 수 없었다. 사회적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지 못하다 보니 모든 걸 가족 안에서 해결해야했고 그런 걸 의지하고 해결해 줄 수 있는 내가족을 끌어안다 보니 혈연이 중시되었다. 그러나 이제 먹고 살만큼 생활이 나아지면서 가족의 의미를 핏줄이 아닌 정서적, 철학적 의미에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예전이라면,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걸 감싸안고 운명처럼 떠안고 살아가야했지만 지금은 참는 게 미덕이 아닌 시대다. 자의식이 강한 사람일수록 내 가족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고, 정서적, 철학적인 면에서 보게 된다. 그들은 소통이 없고, 핏줄이라는 껍데기만 남은 가족을 견뎌내지 못한다. 이 책에서 제시되고 있는 핏줄을 넘어선 새로운 가족의 출현(예정)은 이런 면에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소통이라는 '내용'이 없고, 핏줄이라는 '관계'만 남은 가족은 더 이상 가족이 아니다. 가족=혈연집단이라는 가족 신화는 깨져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혈연에 의한 가족 정의에서 벗어나 다양한 각도에서 ‘가족’을 볼 수 있을만큼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내 가족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이제 이 말을 곱씹어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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