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니즘의 동물학
비투스 B. 드뢰셔 지음, 이영희 옮김 / 이마고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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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인간의 눈높이에서 동물세계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여겨져왔던 사실을 뒤집는 책들이 출판되고 있다. 이 책도 그런 책 중의 하나다. 다만, 이 책은 인간이 동물세계를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가에서 한발 더 나아가 각 글의 마무리 부분에 인간세계에 던지는 저자의 비판과 교훈이 인상적이다.

동물세계는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것만이 법칙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책은 동물은 암컷과 수컷이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이기도 하고, 무리 전체가 협력하고 공존하며 평화를 이루는 체제이기도 하다는 걸 말해준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동물세계에 대해 그렇게 오해해왔을까? 이는 남성적 지배가 확고한 남존여비의 가부장적 선입견이 투사되었기 때문이다. 사오십년 전에는 동물행동학자들이 모두가 남성이었다. 저자는 단기적인 현장관찰로 인해 수컷에게만 배타적인 관심을 쏟았으며 수컷의 행동에 자신들의 남성적 세계상을 투사하여 해석했고, 그런 해석이 생각이 비슷한 다른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가부장적 이론은 동물들을 자연적 생활공간에서 벌써 수십 년씩 직접 관찰하는 많은 현장연구가들에 의해 오해가 벗겨지고 있다. 특이하게도 그 연구자들은 대개가 여성들이었다. 남성 동물행동학 연구자들은 그동안 연구소의 담장 안에서 학자로서 출세하기에 바빴단다.

가부장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학문적 이론에까지 시대적 상황에 따라 정치적 힘이 미쳤다는 사실에 맥이 빠진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많은 이론들, 유명한 인물들의 사상이 여기에서 벗어난다는 걸 뭘로 보장할 수 있을까... 누가 얼마동안 관찰하느냐에 따라 동물의 세계가 다르게 보인다는 걸 감안한다면 TV에서 보여주는 동물의 왕국은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역시 단기 관찰로 순간의 포착을 통해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수컷이 암컷을 지배한다는 의식을 여전히 인간에게 심어주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의심마저 든다. 동물을 다시 보게 해준 책이었지만 결국 인간을 다시 보게 해준 책이다.

책을 읽으며 한가지 아쉬웠던 점이 있었다.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입장에서 읽었더라면 좀 더 공감할 수 있지 않았을까...


5부로 나뉘어 30개의 글로 구성된 모든 내용들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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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차별과 억압
최봉영 지음 / 지식산업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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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한국말이 존비어체계로 인해 서로를 어떻게 옭아매는지, 한국말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피곤하게 살아가는 지 보여준다.

한국말은 개인을 개인으로 인식할 수 없는 언어이다. 오로지 상대방 나이나 직위를 기준으로 나와 상대방이 어떤 ‘관계’이냐에 입각해 내가 쓸 언어가 정해진다. 내가 쓰는 언어의 자유를 누리자면 상대방이 쓰는 언어의 자유까지 보장되어야 하는데 한국말은 상대방의 언어에 희생을 요구하며 내 언어의 자유만을 고집한다. 나와 상대방의 언어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범위는 오로지 동갑을 만날 때이다. 나이를 알고나면 내가 사용해야할 언어의 범위가 정해지기 때문에 한국 사람은 사람을 만나면 상대방의 나이에 예민하다.

한국말은 이미 언어 자체가 인간관계를 좌우해 버리는 희한한 언어이다. 나이가 많거나 적으면 나와 대등한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 일찍 태어나고 늦게 태어남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인데, 한국사람들은 이런 태생적 문제에 의미를 부여해 인간을 상하로 구분해 놓고 스스로를 들들볶으며 살아간다. 똑같은 인간이라는 코드로 접근하자면 내가 늦게 태어났다고 해서 상대방에게 나를 낮출 이유가 없다. 나이가 많으면 소중한 존재이고, 나이가 적으면 덜 소중한 존재이기라도 한 건 지 사람들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일단 한 수 먹고 들어가려고 한다. 나이가 많지 않아 존대를 해야하는 사람들은 존비어체계에 이의를 제기하기보다 자신도 언젠가는 나이 어린 사람으로부터 존대를 받을만큼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에 희망을 갖는다. 저자의 말처럼 오히려 존대를 해야만이 예의를 지킬 수 있다고까지 생각한다.

일상에서 “내가 나이 더 많으니까 말 놔도 되지?” 주로 이런 말을 듣다가 언제부터인가 “저보다 나이 많으니까 말 놓으세요.” 이런 말을 더 많이 듣게 되었다. 이런 말은 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아니, 불편한 것보다 서글프다. 나이라는 장벽 앞에서 나와 상대방이 대등한 눈높이의 대화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무리 친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나이가 무기인 언어의 장벽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한 나라의 언어는 그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쓰는 언어이다. 그런 언어가 왜 나이가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을 가르고 나이가 많은 사람만에게만 유리하게 작용할까? 이런 점에 주목할 때마다 난 한국말이 조폭언어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한국 사람들이 ‘친구’를 비롯해 조폭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한국말 자체가 조폭의 발상을 담은 언어라 사람들에게 그런 영화가 호소력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일상이, 한국말이 조폭문화, 조폭언어가 아니라면 그런 영화에 거부감이 들었을 것이다. 또, 유난히 또래 문화가 발달하고, 끼리끼리 패거리주의가 유난히 발달한 이유도 한국말이 가지는 폐쇄성 때문이라고 본다.


“비록 강력한 차별과 억압이 존재할지라도 일상화되면, 그것을 의식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 이런 까닭에 오늘날 한국인은 차별과 억압의 일상화로 갖은 괴로움을 겪고 있지만, 그것의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1장 첫머리에 쓰여있는 말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수도없이 한국말이 가진 모순을 지적했지만 사람들은 나를 이단아 취급했고, 내가 건드리지 말아야할 부분을 건드린 신성구역 침범자로 여겼다. 한 예로, 한국말은 나이를 기준으로 자기가 사용해야할 말의 범위가 결정되는 언어라 너무 답답하다고 누군가에게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의 말이 자신은 회사에서 인정을 받는 자리에 오르고 보니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한테 존대말을 써준다며 존대말이 꼭 나쁜 것도 아니며, 존대말이 꼭 나이 기준으로 쓰인다고만 볼 수도 없다며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식으로 얘기를 했다.

대학 때 영국 친구가 한국말을 배우는데 너무 어렵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래서 한국말을 빨리 배우는 비결 중의 하나가 나이를 기준으로 어투가 어떻게 달라지는 지를 익히면 빨리 배울 수 있다고 가르쳐주었다. 몇 년 후 그 친구가 하는 말이 “한국말은 비인간적이다. 똑같은 인간인데 어떻게 나이를 기준으로 자기가 쓰는 말이 달라질 수 있냐?” 고 했다. 주변 사람들한테 이 얘기를 해주었다. 그 영국친구는 한글이 얼마나 과학적인 글자인 지도 모르냐, 어른을 공경하는 문화랑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구랑 같냐... 별의별 반박이 다 나왔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정말 한국말의 차별 문제이기만 할까?

나이차별이든 성차별이든 결국 차별문제는 파고보면 개인을 개인으로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가정에서부터 개인을 개인으로 인식해 위냐 아래냐를 구분해 ‘관계’에 의한 호칭으로 부르는 일이 없이 서로가 서로를 대등한 주체로 인식한다면 가정을 넘어선 밖에서도 개인을 개인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가정에서부터 형, 누나, 언니, 오빠, 동생... 이렇게 줄을 세우는데 학교에서, 직장에서라고 다를까? 

앞에서 한국말은 개인을 개인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언어라고 했지만, 개인을 개인으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존비어가 발달한 걸까? 존비어가 발달해서 개인을 개인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서로를 ‘관계’에 의한 호칭으로 부르는 걸까?


저자 역시 너무 존비어에만 비중을 두다보니 호칭문제를 간과해 버렸다. 232페이지에 “또한 형이 재혼을 한 경우에, 새로 들어온 형의 처가 시동생이나 시누이보다 나이가 훨씬 적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시동생이나 시누이는 형의 처를 형수님이나 언니로 부르면서 높임말을 써야 한다.” 이런 내용이 보인다.

이 말은 이상하다. 일단, 이말대로라면 남편의 남동생은 ‘시동생’인데, 여동생은 ‘시동생’이 아니라는 얘기다. 동생이라는 말은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쓰는 말인데 남편의 여동생은 시동생이 아니라 ‘시누이’라는 호칭이 따로 있다. 더 웃긴 건 남편의 남동생은 시동생이고, 남편의 형은 시아주버니이고, 남편의 누나는 ‘형님’이고, 남편의 여동생은 ‘시누이’다. 그리고, ‘시동생이나 시누이는 형의 처를 형수님이나 언니로 부르면서 높임말을 써야 한다’는 부분에서 남편의 남동생 입장에서는 형의 처가 되겠지만 남편의 여동생 입장에서는 오빠의 처가 된다. 이런 호칭 문제가 바로 개인을 ‘개인’으로 부르지 못하고 나이에다 성별까지 대입한 ‘관계’를 파악한 호칭으로 부르다 보니 생기는 문제다.

사정이 이런데, 이땅의 여성운동은 서구이론만 열심히 쏟아내고, 제도적 차별 제거에만 급급하다. 언어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한국의 여성운동은 엘리트 여성들만의 잔치라는 게 확연해진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말이 가정에서 어떻게 차별되는 지 주목했어야 했다. 제도적 차별이 제거된다한들 언어적 차별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그게 평등인가?


옛날엔 생활에 필요한 모든 정보가 어른의 경험에서 나왔기에 나이는 곧 생활의 지혜와 정보가 쌓임을 말했다. 오늘날은 정보가 발달함에 따라 굳이 어른들의 경험을 빌지 않더라도 삶에 필요한 생활의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어른이라는 이유만으로 존대를 해야만 하는가?

존대어는 ‘상하존중’이 아닌 ‘상호존중’일 때 의미를 가져야 한다. 상하존중은 조폭집단에서나 가능한 발상이다. 민주사회는 상호존중이 요구되는 체제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나라에서 언어가 민주적이지 않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걸 보면 한국사람들은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면서 민주주의 타령을 하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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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3-31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저도 대체로 동의를 합니다만 한꺼번에 바꿀 수 있다거나 논쟁을 통해서 바꿀 문젠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에요. 논쟁보다는 토의를 통해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사람이 차츰 더 많아지면 그리고 지금 세대가 좀 더 나이가 많아졌을 때 그걸 잊지 않고 실천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는 인생을 한 반은 산 사람에게 사는 방식을 너무 많이 바꾸기를 요구하는 건 새로운 세대의 폭력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고뭉치 2005-04-04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언어에 대한 고민을 하는 개인들이 늘어날수록 공감대가 형성될테고, 그렇게 된다면 바뀌고 안 바뀌고의 문제는 굳이 걱정을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저처럼 언어에 대한 고민으로 내가 쓰는 언어에 대한 한계를 느끼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방법이 있겠습니다. 조율해서 타협을 보던가, 아니면 부딪히던가요.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끼리라면 조율이 가능할테고, 고민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저항하면서 부딪혀야겠죠. 저는 인생을 한 반은 산 사람에게 사는 방식을 너무 많이 바꾸기를 요구하는 건 새로운 세대의 폭력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라고 하셨는데 전 이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일방적 충성을 요구하는 언어를 그대로 두는 건 젊은 세대에게도 역시 폭력이니까요. 바뀌고 안 바뀌고는 개인의 선택 문제이니까 조율해서 타협을 보느냐, 부딪히면서 저항하느냐의 문제가 있을 뿐입니다. 저항하는 개인들이 늘어날 때 어떻게든 변화가 일어나겠죠.

젊은 세대와 나이든 세대 간에 피차 어느 한쪽은 폭력을 감수해야되는데 왜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고민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양보를 해야하는 거죠? 나이를 먹는다는 게 뭘까요? 인생을 한 반은 산 사람이라고 표현을 하셨는데, 인생을 한 반은 살았다면 그만큼 지혜가 늘어나는 게 어른이죠. 그런데, 나이든 사람들의 정체된 삶을 젊은세대가 감수해야된다는 거 전 납득할 수 없군요.

부모 세대때는 그렇게 살았으니까, 나이 먹은 어른들이니까 언제나 이런 이유로 덮어두려고만 했지 문제를 드러내놓고 공론화해서 도마위에 올리는 걸 꺼려 했기에 사태가 지금까지 온 것이라는 생각은 혹시 안 해보셨나요?

전 이 문제를 대학강사, 기자, 출판사 편집자이자 인터넷 논객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얘기를 꺼내보았는데, 단 한 사람도 제 말에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나이 많은 어른들은 오죽할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한국말은 나이를 차별하는 언어이니 어른들에게 바꿔라마라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또, 그런다고 해서 바뀌는 것도 아니고요. 존비어체계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젊은이들이 많아지면 어른들도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젊은 사람들이 존대를 해주기를 바라는 건 잘못된 거구나 이런 생각을 할 수는 있겠죠.

어른들도 알아야 합니다. 어른공경이라는 이름이 젊은세대에게는 억압이요, 폭력이라는 것을요. 어른이기에 배려해야한다는 건 어른이 지혜가 자라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보호받기만을 바라는 어린아이같은 존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 인터넷상에서 젊은 사람들이 맞춤법을 무시하는 한글파괴 현상을 일으킬 게 아니라 이런 존비어 체계를 무너뜨리는 한글파괴 현상을 일으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릴케 현상 2005-04-06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민의 깊이가 담긴 댓글^^ 잘 읽었습니다.
 
오래 살고 싶으면 우유 절대로 마시지 마라
프랭크 오스키 지음, 이효순 옮김 / 이지북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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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 영업사원한테, TV나 신문 광고에, TV에 등장하는 의사들한테 우리가 얼마나 세뇌가 되었는지,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우유는 거의 보약이다시피 인식되어 있다는 걸 감안한다면 이책은 과히 혁명이다.

18살때인가... 검정고시 준비를 할 때 학원에서 수업 시간에 ‘우유가 영양가는 많아서 좋긴 한데 딱 한 가지 나쁜점이 있다. 우유를 마시면 기억력이 감퇴된다.’고 배운 적은 있지만, 우유의 좋고나쁨을 떠나 한국 사람 자체가 우유에 들어있는 유당을 분해하는 효소인 락타아제가 분비되지 않아 유당에 대한 내성이 없는 비율이 84.7%로 8%인 백인에 비해 월등히 차이가 날만큼 우유와 친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니!!! 이책을 읽기 바로 전에 ‘로버트 S.멘델존’ 의 ‘나는 현대의학을 믿지 않는다’라는 책을 읽었는데 거기에서도 이 락타아제 결핍율이 언급되어 있었다.

우리는 학교에서 우유를 많이 마셔야 칼슘 섭취가 되어 뼈가 튼튼해진다고 배워왔고, 우유광고에서도 그렇게 선전을 하고 있다. 또, 건강을 다루는 방송을 보면 언제나 강조하는 사실 중 하나가 골다공증을 예방하려면 우유를 꼭 마셔야된다는 사실이다보니 우유를 마시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부담을 느낄 지경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우유는 칼슘이 풍부한 식품인 건 사실이지만 우유에 들어있는 칼슘은 체내에 잘 흡수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음식물에 들어 있는 칼슘과 혈액으로 들어가 뼈와 치아로 가는 칼슘 양은 관계가 없다나... 인이라는 성분이 장에서 칼슘과 결합해 칼슘의 흡수를 방해하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우유에는 칼슘 : 인의 비율이 2 : 1에 조금 못 미치게 들어 있다고 한다. 모유에는 우유보다 칼슘이 덜 들어있지만 모유를 먹은 아기와 우유를 먹은 아기를 비교해 보면 모유를 먹는 아기가 칼슘을 더 많이 흡수한다고 한다.

예전에,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 중에 우유가 주식이다시피한 종족에 대한 방송을 본 적이 있다. 애나 어른이나 하루 먹는 게 거의 우유가 전부이다시피한 이 부족사람들은 뼈가 하도 단단해서 교통사고가 나도 뼈가 잘 부러지지 않는다고 했다. 실제로 차와 사람이 부딪힌 현장을 보여준 장면에서 차는 우그러졌는데 사람은 멀쩡한 걸 보면서 어떻게 저럴 수가 있냐고 식구들이 놀라워했던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 부족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해야되는 거지? 저자는 <“하지만 의사 선생님, 우유를 마시지 않으면 치아와 뼈는 어떻게 되나요?” 아무렇지도 않다. 어쨌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이걸 믿어야 되나...


어떤 포유류도 생후 1, 2년이 지나면 우유를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은 엄마의 젖도 아닌 소의 젖을 평생마시는 사람도 많다. 이런 사실은 참 아이러니다. ‘송아지만 우유를 마셔야 된다.’ 그러고 보면 이게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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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듣지 않는 남자 지도를 읽지 못하는 여자
앨런 피즈 외 지음, 이종인 옮김 / 가야넷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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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능가하는 책이다. 남녀 사이에 관해 쓰여진 많은 책을 손에 잡았었지만 아류작이 많아 이 책도 그런 책일줄 알고 제쳐놓았었는데 이런 책을 왜 이제야 읽었는지... 난 책 한 권을 잡고 끝까지 읽기보다 동시에 5권, 6권을 놓고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동시다발로 돌아가며 읽을 때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이 책은 두 번째 장 중반부터는 손을 놓지 않고 읽게 되었다.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의 모습에서, 내가 만났던 남자들에게서, 이웃에서,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이 책에 등장하는 내용을 수도없이 확인하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연신 키득거리며 읽었다. 부모님부터 친구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행동이 스쳐갔고, ‘아,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이렇게 이해하게 된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웃음을 자아내는 재미있는 내용도 많았다.


내가 이런 남녀관계에 대한 책을 읽기 시작한 건

1. 만났던 남자들이 같이 자고 싶어하면서도 왜 내게 좋아한다거나, 당신 생각 많이 했다거나 뭐 이런 감정 고백이 없을까 이게 궁금해지면서부터였다.

난 남자들이 “우리 친구할래요?”/“우리 친구하자”, “우리 만날래요?”/“우리 만나자.”, “우리 데이트할래요?”/“우리 데이트하자.” 이렇게 표현하는 언어를 견디지 못한다. 심지어, 대학에서 심리학 강의를 한다는 남자가 “우리 연애할래?”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서 아주 절망을 느꼈던 때도 있다. 거기다 좀 정중하고 싶어서 그러는지 “만나주시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난 정말 돌아버린다. 그런데, 그게 언어주관 기능의 차이때문이라니... 이제 이 부분에 관한 기대는 포기를 하는 게 내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다. 그나마, “우리 섹스할래?” 이렇게 말하지 않은 게 어딘가. ‘템테이션 아일랜드’나, ‘배철러’에서 미국 남자들은 자기 감정 표현을 잘도 하더만...

한국 남자가 사랑고백 언어에 약한 이유는 여자를 자신의 성욕 배설상대로 보거나 여자란 나를 위해 밥하고, 빨래하고, 애낳아주고, 시부모 잘 모셔주면 된다는 역할분담에 고정관념을 가진 남자 즉, 자기 감정을 고백하지 못하는 남자일수록 여자를 ‘사랑’이 아닌 ‘수단’, ‘목적’, ‘대상’으로 보기 때문은 아닐까...

 


2. 왜 남자들은 정치, 경제, 사업... 같은 굵직굵직한 문제는 남자친구들이랑 얘기하고 여자인 나를 만나면 성에 관한 얘기만 하려고 하는 지... 이런 머릿속이 궁금해서였다.

나는 대등한 존재로서 존중받길 바랐는데, 남자들은 내게서 ‘여성’이라는 모습만 읽어내려고 했다. 이 여자는 내부모를 얼마나 잘 모실 수 있을까, 음식은 잘 만들까, 내 눈을 얼마나 즐겁게 해줄까... 이런 것만 관심을 보였다. 아니면, 30도 넘은 남자 입에서 밤에 정말 하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해결하냐는 질문이나 날아오던가. 가만! 그러고 보니, 유난히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와 이 책이 출판된 나라가 같은 선상에서 비교될 수 있을까?

남자들이 어떻게 하면 한 번 잘 수 있을까 잔머리 굴리는 걸 보면서 짜증도 나고, 친해질 때까지 ‘섹스’는 집에다 놓고 오면 안 되나... 혼자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하고, 내가 얼마나 만만해 보이길래 저런 잔머리를 굴릴까라는 생각에 불쾌했던 적도 있고, 남자들은 도대체 왜 섹스 생각밖에 없는 걸까, 왜 그렇게 단순할까 혼자 이런 불평도 하고, 얼마나 하고 싶으면 그렇게 잔머리를 굴려댈까 싶어 불쌍해 보이기도 했었다. 남자의 성욕구가 강하다는 건 어차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지만, 본능과 순결이라는 극과 극의 사실을 강조하며 여성을 대상화하는 건 남녀의 차이라기보다 한국의 지독한 가부장적인 정서를 고려해야하지 않을까?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름에서 오는 차이를 불평할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언어를 가졌다는 걸 인정하고, 그 다름을 어떻게 조율해갈까가 관건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는데 뒤집어야겠다. 조율이라는 것도 서로 주체적 존재로 자각하고 있을 때 가능한 것이지 우위가 정해진 상하, 수직 관계에서는 의미가 없는 말이겠다. 번역본의 한계를 여기서 보고 말았다. 한국 남녀의 눈높이에서 이런 책이 쓰여진다면 분명 이런 점도 고려해서 더 복잡하게 써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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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뭉치 2005-02-21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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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동영상판이라고나 할까...

 
나 없이 화장품 사러 가지마라
폴라 비가운 지음, 최지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이책을 읽기전까지 난 화장품 장수 말대로 자외선 차단제의 SPF 지수가 높으면 좋은 건줄 알았다. 그런데, SPF 15이면 자외선이 95%정도 차단되고, SPF 30∼50이면 97%정도 된다나... 모이스쳐 라이져는 건성피부가 아니면 바를 필요가 없고, 링클 제품은 주름을 없애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피부노화를 만들고... 기타 등등 화장품에 대한 나의 상식이 많이 깨졌다.

미국 여자들은 화장품을 사면서 어떤 제품에 어떤 성분이 얼마만큼 들었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살 수 있나보다. 저자는 줄곧 참고해야할 성분의 양을 제시하는데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화장품에는 성분의 양이 표시되지 않으니 한국 여자들에게는 그냥 그림의 떡일 뿐이다. 

한국 사람들 눈높이에서 쓰여진 화장품에 관한 책을 몇 권 읽긴 했지만, 이책은 세세한 부분까지 정말 적나라하게 분석해 놓았다. 3분의 2가 제품리뷰이다 보니 책두께가 장난 아니다. 저자는 잘못되고 부풀려진 화장품 광고와 마케팅 전략을 비판하면서 미국 화장품 업계와 홀로 싸워나가는 사람이다. 저자가 제공하는 정보는 화장품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소비자에게는 쉬쉬할 뿐이라고 한다. 화장품 업계는 소비자들에게 정작 필요한 정보는 함구하고 화장품을 팔아먹기 위해 좋은 점만 강조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화장품 회사에 충성하는 돈이 많이 줄어들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화장품 광고에 길들여져가고 있는 지 처절하게 깨달을 것이다.

한국 여자들이 유난히 화장이 두꺼운 이유가 혹시 화장품 정보의 무지에서 오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화장을 해야한다는 자본주의 사회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기보다는 진한 화장과 섹시함이 무식함, 천박함, 가벼움, 부화뇌동의 소치라는 편견에 더 사로잡혀 있는 편이다. 그래서 내가 쓰는 화장품이라고해봐야 고작 스킨과 로션뿐이다. 한때는 화장품 장사한테 속아서 에센스에 영양크림, 마사지크림, 팩, 자외선 차단제까지 사다 썼다. 지금도 팩과 자외선 차단제가 두어가지씩 있고, 이것저것 여러 가지 있지만 딱 스킨과 로션만 바를 뿐이다. 근데 사람들은 내가 무슨 화장품을 쓰길래 그렇게 피부가 좋으냐고 물어본다. 물론 화장품을 사러가면 피부가 많이 상했다느니, 눈가에 주름이 생기기 전에 아이크림을 써주라느니, 데이크림이랑 나이트 크림을 구분해서 써줘야 피부가 좋아진다느니, 색조화장을 하지 않는 걸 두고 아가씨가 가꿀줄도 모른다느니... 일장 연설을 많이 듣는다. 내가 알지 못하면 무수히 쏟아지는 정보를 그대로 신뢰하게 된다. 화장품 장사가 하는 말 역시 내가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화장품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화장품 장수가 얼마나 뻥을 많이 치는지 파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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