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류사회 - 새로운 계층집단의 출현
미우라 아츠시 지음, 이화성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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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역사가 짧은 상류의 불안함이 상류의 천박한 속물근성을 하류의 게으름으로 치부해버리는 책이다. 하류에게 모범을 보일 수 있는 상류의 삶이 아니고 헝그리 정신에서 출발해서 결핍을 채워가는 상류라면 상류라는 가치를 제대로 굳히기까지 거쳐야 할 시행착오의 역사가 길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의 저자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저자의 할아버지가 땅을 팔아 자신을 비롯한 손자들에게 교육을 시켰다고 했다.


누가, 어떤 삶을 두고 ‘하류’라 정의하느냐에 따라 ‘하류’의 모습은 가지각색이다. 이 책은 하류로 ‘규정하는’ 자와 하류로 ‘규정되는’ 자 중 ‘규정하는’ 자의 언어만 반영되었다. 상류가 보는 상류와 하류의 기준은 제시되어 있지만 하류가 보는 상류와 하류의 기준은 제시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이 책은 물질적 기준으로만 상류와 하류를 말한다.


출세라는 야망의 찌꺼기를 던져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의 눈에는 자기다움을 추구하고, 자아실현을 가치로 삼는 삶이 하류로 보이나 보다. 저자가 하류인생이라고 딱지를 붙인 사람들이 보기엔 돈 밖에 모르는, 오로지 위로 위로 상승만을 꿈꾸는 경제동물들이 하류로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못하나 보다. 사생활까지 포기해가며, 자기 욕구를 죽이며 상류로 올라간 사람일수록 자아실현에 의미를 두고 사는 사람들을 비하하고 끌어내려 하류로 딱지를 붙여야 자기들 삶이 빛나 보일 것 아닌가! 물질적 안락을 위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꾹꾹 참아가며 하는 미련한 사람들이야말로 수단이 되어야 할 게 목표가 되고, 목적이 된 삶은 아닌가? 내 생각엔 인간의 본질, 존재에 대한 고민을 해본 사람은 상류, 하류 이런 딱지 붙이기에 별 관심을 두지 않을 것 같다. 내 눈엔 돈과 일만 아는 경제동물들이 하류로 보이는구만.


저자는 하류란 가난이 문제가 아니라 의식의 문제라고 말한다. 노력과 의지가 없는 삶이 하류인생이란다. 그런데, 이 책은 상류와 하류에게 ‘왜?’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동기가 부여되어 있다면 하류로 찍힌 사람들이 왜 일을 안 할까? 상류는 무엇을 위해 죽어라 일을 하는가? 그 답이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옷... 이런 물질적 안락에 있다면 그런 삶이야말로 하류일 수도 있다. 상류 하류를 떠나 그런 물질적 풍족을 누리기 위해 일을 하느라 자기 인생에 포기해야 할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비행기 타고 바다 건너간 사람이 배 타고 건너가는 사람 보고 왜 그렇게 천천히 오냐고 꾸짖는 꼴이라니! 뉘라서 남의 인생을 두고 하류라 딱지를 붙이는가!


동생이 그런다. 사람들은 도대체 뭘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일만 하는지 모르겠다고. 이 책은 노동의 ‘의미’를 찾는 사람에게 ‘열심히’를 주문한다.


역사란 어차피 강자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강자의 논리로 무장한 하류 타령이 천박해 보일 뿐이다. 도와주지 못할 거면 그들을 좀 가만히나 두지.


이 빌어먹을 땅덩이만 하더라도 뭐 좀 해보겠다고 의욕을 보이는 사람들을 ‘나이’라는 희한한 잣대로 기회를 차단해 버린다. 일본이라면 모를까 한국이라는 나라는 하류 인생들이 의지가 없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비난할 자격이 없다. 거기다, 사생활과 직장생활을 구분할 줄 모르는 모호한 경계개념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땅에서 의지 부족, 노력 부족 타령을 한들 그게 설득력을 가지나! 물질적 안락을 위해 정신적 삶은 치워두고 상류만 노래하는 불쌍한 개미의 자기 위안으로 들리지. 꾸물거려 일을 한 댓가가 먹고 살 비용, 자기 계발 비용은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죽어라 일해봤자 기본적인 삶을 돌리기 바쁜 돈에, 집에 가서 책 한 줄 볼 시간도 주지 않고 사람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만이 요청되나? 사생활을 포기해야 누릴 수 있는 상류의 삶은 진정 추구할 가치가 있긴 있나? 누굴 위해서?


설문 조사 결과 하류 층에서 개성 추구, 자아실현이라는 의견이 많이 나왔다고 이런 게 의미없는 가치가 되나? 오로지 상류가 보는 시각만이 진리다? 정말 단순 무식한 발상에 입이 다 벌어진다.


참 이상하다. 페미니즘은 남자탓, 사회탓이고 상류 하류 이런 계급은 개인의 의지와 노력 부족이 문제인가? 아, 춤추는 일관성, 짜증난다.


오래전 ‘심리학 이야기’라는 책에서 본 문구가 생각 난다.


“하류층의 사람일수록 사람을 높은 등급으로 올리는 것은 돈이라 하고,

중류급의 사람들은 그것을 교육과 직종이라 하며,

상류층의 부류는 그 사람의 개성과 취미와 생각과 언행이라 한다.”


오로지 경제적 풍족만이 최상의 가치인 사회에서 정신적 삶을 갈구하는 사람은 설 자리가 없다. 위로 위로 올라가지 않으면 내가 살고 싶은 삶을 누릴 수 없다는 것, 이게 이 시대 정신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불행이겠다.


이 책은 ‘하류라고 딱지를 붙이는 사람은 누구인가?’, ‘약자의 삶을 왜 강자가 정의하는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 철저히 강자의 논리로 무장한 책이다. 삶에 상류, 하류라고 딱지를 붙일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다. 자신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타인의 삶을 함부로 정의내린다.


남들이 보기에 무난해 보이는 삶이 최선은 아니다. 상류이든 하류이든 이런 가치 기준은 ‘결혼 적령기’, ‘눈이 높다’ 이런 말처럼 당사자가 아닌 개인이 살아가는 스타일, 개성을 놓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눈높이에서 “보는” 시각을 말해 줄 뿐이다. 물질적 삶에 의미를 두어 죽어라 일을 해서 물질적 풍족을 누리고 살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살면 되고, 물질적 삶보다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정신적 삶에 무게를 두고 싶으면 그렇게 살면 되는 거다. 타인도 자기 방식대로 살아야 한다고 우기는 정신병자는 병원에 보내야 한다.


이 책은 ‘일하지 않는 사람들 일할 수 없는 사람들’, ‘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미친 돈 바람을 멈추어라’ 나아가 ‘절대로 일하지 마라’ 이런 책이랑 같이 읽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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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적인 사람이 성공한다
마티 올슨 래니 지음, 박윤정 옮김 / 서돌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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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무래도 이 책은 제목을 잘못 정한 것 같다. 제목에서 ‘내성적인’이란 말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면 그렇고 그런 책쯤으로 여기고 사지 않았을 거다. 이 책을 읽기 전, 평소에도, 존재의 무게를 고민하는 사람이 성공에 의미를 둘까, 도대체 성공이란 게 뭘까,라는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거기다, 책을 읽고 난 지금은 제목과 내용이 따로 국밥이란 점에서도 제목이 거슬린다. 일단, ‘성공’이란 개념부터 손을 보고 가야겠다. 난 모든 사람의 눈높이를 만족시키는 객관적 성공이란 없다고 본다. 성공이란 ‘결핍에의 충족 동기’, ‘열등감’, ‘속물근성’의 다른 이름이라고 본다. 성공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은 타인을 의식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성공으로 이끌고 가는 힘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이기 때문이다(그런 면에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이런 말은 분명 외향적인 사람에게서 나온 말일 거다. 내성적인 사람은 남의 칭찬이나 비난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데 비해 외향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으면 내 눈에 포착되지 않았을 거다.). 이렇게 타인의 칭찬이나 비난, 응원에 힘을 입거나 힘을 잃는 사람은 외향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는 책 내용으로 보자면 제목이 많이 빗나갔다. 어떻게 보면, ‘성공’이란 말은 우열을 가르는 말이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을 성공하지 못한 사람과 비교해 차별성을 두려고 한다. 그런 차별성은 성공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에게 성공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성공하고 싶은 열등감을 갖게 한다. 이런 점을 놓고 볼 때 번역 과정에서 내향성과 외향성의 다름, 차이를 부각시키는 제목을 선택하지 못하고 우열을 가리는, 이래저래 번지수 못 맞춘 제목이 아쉬워서 별표를 한 개 깎았다.

지난 달 무료 심리 검사를 실시하는 곳을 알게 되어 이게 웬떡인가 싶어 상담을 받게 되었다. 상담에 들어가기 전 여러 가지 심리 검사를 받았는데 그 중에 MBTI라는 심리검사도 끼어 있었다. 심리에 관심이 많다 보니 이미 이 책 저 책에 나온 MBTI 검사 방법으로 내 성격이나 기질을 대충은 파악하고 있었는데, 그 검사에서 나온 결과도 내가 검사해 본 결과와 같게 나와 있었다. 한 가지 그곳에선 결과 유형도 유형이지만 결과 수치가 의미하는 바도 짚어봐야 한다며 내게 특히 높은 수치로 나온 내향형과 사고형을 지적해 주었다. 상담을 맡은 분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려면 이 두 수치를 좀 줄여야 한다고 해서 그때는 정말 그런가보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평소 내 지론대로 ‘차이’, ‘다름’의 문제인데 왜 내가 나를 죽여야 하나, 나를 죽이며 이루어나가는 인간관계가 의미가 있긴 한가 이런 회의가 많이 들었다. 그러던 중 서점에서 이 책을 접하고, 바로 알라딘에 주문을 해버렸다.

저자는 두뇌를 가리켜 경이 그 자체라고 했지만, 내겐 이 책이 경이 그 자체다. 이 책을 읽기전까지 난 내향성이냐 외향성이냐 이런 기질이 자라온 환경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평생을 그렇게 생각하면서 힘들게 살았을 지도 모른다. 내향성이냐 외향성이냐는 타고난 생리적 문제라고 이책은 말한다. 그건 내향성과 외향성의 두뇌경로가 다르기 때문이란다. 내향성은 두뇌경로가 길고, 외향성은 두뇌경로가 비교적 짧다고 한다. 저자는 내향성과 외향성을 가르는 기준은 에너지를 창조, 즉 충전하는 방식이 어떻게 다른가에 있다고 한다. 이책은 이를 내향성은 충전용 배터리와 같고, 외향성은 태양열판과 같다고 비유한다. 내향성은 재충전을 위해 사용을 멈추고 쉬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외향적인 사람들은 태양열판을 재충전하려면 햇빛이 필요하듯이, 재충전을 위해 밖으로 나가 어울려야 한다.

사람 심리에 관한 이런 책을 읽으며 내게 굳어진, 아니 확신을 가져다 준 철학이 있다. 타인을 이해하는 저울의 눈금은 나를 이해하는 수준과 비례한다는 것. 우리는 웬만한 사람이라면 내향성이든 외향성이든 서로를 자기 기준에서 보고 있지 않을까? 타인을 이해하는 코드가 이렇게 상대적이라면,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내 상식을 의심하는 작업에서 출발한다는 답이 나온다. 흔히, 우리는 외향성을 정상 내지는 지향해야 할 성격으로, 내향적인 사람을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내향성인 사람 자신도 내향적 기질을 외향적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문제가 있는 성격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내향성과 외향성은 ‘다름’의 문제이지 우열, 옳고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다름은 ‘공존’을 모색해야지 우월을 의식한 차별의 눈으로 볼 게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를 억누르던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워짐을 느끼며 나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 정말 행복했다. 나를 이해하면 그만큼 타인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마련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까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서 아 이 사람은 이래서 이렇게 행동하는 거구나, 저 사람은 저래서 저렇게 행동하는 거구나 이런 게 눈에 보인다고나 할까... 외로움, 심심함을 토로하는 사람, 이혼을 했거나 배우자가 죽었을 때 재혼을 빨리 하는 사람일수록 외향성이 아닐까?


자생 이론이 아닌 수입 이론이었다는 점에서 별표를 또 한 개 깎았다. 왜 이런 책은 꼭 번역본으로 등장할까? 그건, 이땅의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패턴을 발견해 이론을 도출하기보다 기존의 이론을 사람에게 맞추면서 자신들의 공부에 대한 확신을 얻기 때문이 아닐까, 지식을 '창출'하기보다 '습득'하는 데 더 관심을 두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내멋대로 생각해 본다. 호기심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학문을 하는 풍토가 수입이론을 키우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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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빔밥 인간을 만들고 싶다
박태견 지음 / 뷰스(Views)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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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빔밥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재료 저 재료 섞어 놓아서 각 재료 고유의 맛이 묻혀 버리기 때문이다. 심지어 음식점에 가서 고기를 다 먹고 난 후 직원이 와서 비벼주는 비빔밥도 같이 먹는 사람들이 억지로 그릇에 퍼담아 내밀기 전까지는 웬만하면 먹지 않는다. 그런데, 이책에서처럼 오히려 재료 고유의 맛이 사라지는 학문의 ‘통합’을 얘기하는 비빔밥은 흥미롭다.

정운찬 총장이 원하는 서울대생은 ‘통합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입시에 논술고사를 부활시켜 고등학교에서 각 과목을 따로따로 가르치는 일본식 ‘칸막이 교육’을 버리고, 과목간 ‘연계성’을 살려 교육을 하도록 유도해서 학생들을 인문학적 마인드를 가진 자연과학도, 과학과 테크놀로지에 대한 식견을 갖춘 인문사회학도로 키우겠다는 게 정운찬 총장의 계획이다. 물론, 이런 정운찬 총장의 생각은 교육의 앞날을 내다보는 훌륭한 생각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내가 의문이 드는 건 학생들이 ‘통합적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게 왜 학생의 문제이기만 한 것처럼 얘기하느냐다. 학생은 학생 혼자 만들어지는 게 아니잖은가! 교사들이 어떻게 가르쳐야한다는 걸 얘기하지 않으면서 학생들은 어떠어떠해야한다고 주문하는 건 뭔가 촛점이 빗나간 것 같지 않은가? 과연, 이책에 나온 예대로, 독일의 초등학교 선생님들처럼 수학에도 답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개가 나올 수 있다는 걸 이끌어낼 수 있는 선생들이 이땅에도 있기는 하냐 이거다. 그리고, 서울대생들의 실력은 그렇다치고, 서울대 교수님들은 실력이 빵빵하다 이건가? 아니 실력은 차치하고라도 서울대 출신이 아니면 서울대 강단에 세우려고 하지 않는 풍토는 뭐지? 요즘은 좀 나아졌다는 소리도 들리지만. 국제 출판학계에서 서울대학교의 학술논문이 인용되는 경우가 드문건? 하긴 정작 문제는 이런 게 아니지.

초/중/고등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현장을 들여다보면, 수업방식이 그 옛날 서당식 교육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땅에 대학 교육이 도입된 지는 고작 5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서당에서는 훈장이 주도적으로 제자들의 교육을 이끌어간다. 오늘날의 초/중/고등학교 교실에서 수업이 벌어지는 광경 역시 선생이 압도적으로 이끌어가고 학생은 이끌려간다. 한국의 교육현장에 유난히 ‘교권’이라는 게 강조되는 것도 서당 교육의 역사 때문 아닐까? 역사가 길고 긴 이런 고전적인 수업방식에 익숙해져 있다가 스승과 제자가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통해 소통을 중시하는 최근에 등장한 서양식 대학 교육에 발을 들이는 교육현실을 생각해 보면 나는 이게 꼭 일본식 칸막이 교육의 문제라고만 보긴 어렵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서울대가 소위 세계 몇 위 대학에도 들지 못한다는 사실에 굉장히 예민하다. 국제경쟁력 관점에서만 서울대를 논할 뿐, 우리 자신의 눈으로 들여다 보지 못한다. 내가 보기엔, 몇 백년의 역사를 가진 다른 나라 대학과 고작 50년밖에 되지 않은 한국 대학을 비교하는 것부터가 뱁새가 황새를 따라잡고 싶어하는 현상으로 보인다. 우리는 왜 그렇게 비교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사실 난 혹시 역사가 짧다는 열등감을 이런 순위에서 해소하려는 심리는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든다. 내가 처한 현실을 자각해야 타인과 내가 처한 현실이 어떻게 다른가도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교육의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해 헤매고 있느라 서당식 ‘일방적’ 교육과 서양의 ‘대화식’ 교육의 차이를 파악하지 못한 거고, 그래서 정운찬 총장도 교사의 독백으로 이루어지는 초/중/고등학교의 수업방식과 교사와 학생의 대화로 이루어지는 대학의 수업방식(사실 뭐 대학 강의 역시 고등학교보다 조금 나은 것뿐이지, 교수의 독백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을 어떻게 연계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없이 통합적 인간을 노래한 것 같다.

오늘 우리가 처한 교육 현실은 서당을 버리지 못한 상태에서 대학을 도입했다는 거 여기서부터 반성을 하고 가야할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서당훈장을 버리냐, 대학을 버리냐 이게 한국 교육의 숙제 같다.


첫술에 배부르랴. 이 책을 읽고 나니까 그래도 기존의 서울대 이미지를 조금은 벗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에서 약간의 희망이 보이긴 하나, 왜 한국의 교육문제는 꼭 서울대 문제로 풀어가는 거지?라는 의문이 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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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사로잡는 데이트 심리학
쥬디 윌리암스 외 지음, 김문성 옮김 / 휘닉스드림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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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무리 읽어봐도 번역본이 아니다.
원서를 확인하고 싶어 아마존을 뒤적여봐도 뜨지 않는다.
우롱당한 기분이다.

이책은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이트 심리학'이라고 했어야 했다.
또, 우롱당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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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탄생 - 대한민국에서 딸들은 어떻게 여자다운 여자로 만들어지는가
나임윤경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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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정희진 씨가 쓴 페미니즘의 도전이라는 책과 이 책을 비슷한 시기에 읽게 되었다. 똑같이 여성 문제를 제기하는 두 책이지만 그 느낌은 아주 대조적으로 와 닿았다. 페미니즘의 도전은 사뭇 비장함이 느껴졌던 데 반해 이 책 여자의 탄생은 저자의 여유랄까 그런 게 느껴졌다.

페미니즘의 도전은 전체적으로 분노의 감정이 읽힌다는 점에서, 여자의 탄생은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차이가 보인다. 페미니즘의 도전은 남성 중심적인 법, 제도의 변화에 기대를 거는데 반해 여자의 탄생은 일상 생활과 행동을 고찰하며 여성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여성 자신을 주체적으로 그려내었다. 페미니즘의 도전은 여성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여성을 피해자로만 그려놓았다. 여성을 행동의 주체로 그려내지 못했다. 책을 읽는 내내 느껴졌던 비장함, 무거움의 이유를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나는 여성 문제를 다루는 많은 여성학자, 여성운동가들조차 여성 문제를 ‘남성은 가해자, 여성은 피해자’의 시각으로 그려내는 게 불만이다. 그런데, 이 책은 내가 읽은 책 중에서 ‘남성은 가해자, 여성은 피해자’라는 시각을 벗어난 보기 드문 책이다.

출생에서부터 결혼해 아줌마가 되기까지 여자의 일생을 시기별로 구분해 고찰한 점이 눈에 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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