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들 속에서
조 월튼 지음, 김민혜 옮김 / 아작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타인들 속에서 - 조 월튼/김민혜/아작

책을 통해, 책으로 연결된 만남을 통해, 다시 일어서는 소녀의 이야기
특히 SF를 통해서... 특이한 설정이지만, 맘이 많이 와 닿는 것은... 
저도 SF/환타지 애독자여서 일 겁니다. 


마법과 요정.. 마치 정말 있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난 꽃들이 녹아서 없어지고 잔물결들이 퍼져나가고, 공장은 무너져 폐허가 되고,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무들과 담쟁이덩굴이 거길 뒤덮고, 웅덩이는 진짜 물로 변하고,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웅덩이 물을 마시고, 이윽고 요정들이 나타나 우리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거길 궁전으로 삼을 줄 알았어.” 


아래는 너무나 동의가 되는 문장이네요. 전 책 쓰는 건 포기지만.. 그런 책은 여전히 읽고 싶습니다.

세상엔 끔찍한 일들이 있고, 그게 사실이다. 하지만 세상엔 위대한 책들도 있다. 어른이 되면, 너무 따뜻하진 않은 날 긴 의자에 앉아 읽을 수 있는 책, 읽으면서 여기가 어딘지 몇 시인지 완전히 잊고 자기 머릿속 생각보단 책 속에 더 빠지게 되는 그런 책을 쓰고 싶다. 딜레이니나 하인라인이나 르 귄의 작품 같은 책을 쓰고 싶다. 


아래의 문장.. 너무 확 들어옵니다. SF뿐 아니라, 모든 문학이 다 그렇지만, SF는 특히나 더 상상력을 자극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들을 더 생각하게 합니다.

내가 SF에 대해 항상 좋아해 온 점들 중 하나는, SF를 보면 여러 일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들을 여러 각도에서 보게 된다는 거다. 


소녀는 희망을 놓지 않으려 합니다. 꿋꿋하게 이겨내려 합니다. 그래서 

장미 그림에 둠 스피로 스페로Dum spiro spero란 교훈이 적혀 있다. 사실 난 이 말이 꽤 맘에 든다. 숨 쉬는 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톨킨의 책들에 대해서도 얘기합니다.

《반지의 제왕》을 읽는다는 것은 그곳에 있는 것과 비슷하다. 사막에서 마법의 샘을 발견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 안엔 모든 것이 있다. (‘욕망만 빼고’라고 다니엘은 말했다. 하지만 ‘뱀 혓바닥’이 있다.) 《반지의 제왕》은 영혼을 위한 오아시스이다. 지금도 난 언제라도 가운데 땅으로 물러나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책에 어찌 감히 무언가를 비교할 수 있겠는가? 


70년대에 영국 시골에서는 어른들도 포함된 북클럽에서 15세 소년이 모임도 인도합니다. 그것도 '잘'

휴는 모임을 굉장히 잘 이끌었고, 화제가 빗나가면 부드럽게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실제로 소녀는 자신의 전제를 때론 재검토하고 다른 각도로 보려고 하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고모들이 사악하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지? 왜 난 그렇게 가정하지? 어쩌면 약간의 마법만 뺀다면 고모들은 딱 보이는 그대로일 수도 있고, 나에 대해서도 빤한 것들만 빼곤 아무것도 모를 수도 있다. 어쩌면 고모들이 원하는 건 날 착한 조카로 만드는 게 다일지도 모른다. 


프랭크 허버트도 얘기합니다.
특히 《듄》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했다. 아라키스는 정말 굉장한 세계이다. 마치 여러 문화가 섞여 있는 진짜 세계 같다. SF에서는 흔히 볼 수 없지만, 문화 충돌은 아주 흥미롭다. 프레멘을 만나러 사막에 가는 폴은 다른 문화 속으로 뛰어드는 셈이며, 양쪽 모두 비밀이 있다. 다니엘은 이 부분에 관해 얘기하며 아주 생기가 넘쳤고, 위스키를 한 잔 따르긴 했지만 술은 조금 홀짝이기만 했다. 물론 담배는 내내 피워댔다. 


중간중간 픽픽 웃게 만드는 유머가 가득합니다.
하지만 그건 헛된 게 아니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건 미래의 언젠가를 위한 준비로서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도 할 가치가 있어야 한다. 이제 난 절대로 윔블던 테니스 대회에서 이기거나 올림픽에서 달리지 못하겠지만 (“윔블던엔 한 번도 쌍둥이가 나온 적이 없었어….” 외할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새로운 책, 기대하던 그 책을 가만히 가지고만 있는 기분이 이런 거였습니다. 
글자도 읽지 않은 완전 두꺼운 하인라인 신간을 가지고 있으니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정말 뿌듯하다. 가만히 날 기다리는 저 책을 생각할 때마다 날아오를 것 같고 행복하다. 

그래서 읽지도 않는 책을 시쩍하면 지르나 봅니다. 단지 그 기분 때문에..ㅎㅎ


<높은 성의 사나이>와 <희년을 선포하라>는 대체 역사 관련한 리스트에서는 늘 등장하네요.
《파반》뿐 아니라 브루너의 걸작 《무수한 시간들》과 딕의 《높은 성의 사나이》(난 아직 읽지 않았다)와 워드 무어의 《희년을 선포하라》와 평행 역사란 개념 자체에 대해 토론했다. 또한 《과거 속으로》와 《타임 패트롤》과 윔이 극찬한 크리스토퍼 프리스트의 《웨섹스의 꿈》(반드시 주문!)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책을 통해 소녀의 주변 사람들도 서로 연결됩니다.
우린 중국 식당으로 갔고, 지난번과 거의 똑같은 메뉴를 시켜 먹었다. 윔과 나는 서투르게 젓가락질을 하며 주로 실버버그에 대해 얘기했고, 이야기는 화요일 밤 《파반》 토론 때 얘기했던 모든 것으로 하염없이 탈선했다. 다니엘은 《웨섹스의 꿈》만 빼고 안 읽은 책이 없었다. 나는 다니엘과 윔이 서로에게 감명받았다는 걸 알았고, 이 점에 아주 즐거우면서 또 아주 기분이 묘했다. 다니엘이 화장실에 갔을 때 윔이 내 손을 잡았다. “난 네 아버지가 맘에 들어.” 윔은 말했다. 


소녀가 줄곧 맘에 가지고 있던 그 뭔가의 실체는 사실 '죽음'이었습니다.

죽는 문제는, 음, 정말로 죽음에 관해선, 자기가 언제라도 정말 죽을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간에는 차이가 있다. 난 알고, 윔은 모른다. 그게 다다. 난 우리에게 다가오는 헤드라이트들이 진짜라는 걸 깨달았던 그 끔찍한 순간을 그 누구도 겪지 않길 바란다. 하지만 그런 깨달음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에 자길 죽일 수 있는 위험한 것들이 있긴 해도 나머지는 모두 안전하다고 생각하며 산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죽을 수도 있었음을 아는 그 위험한 순간은 지나쳤지만, 아직도 길을 건너고 있다 


책을 통해 길러진 사고의 힘.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을 여러 각도로 보는 힘.삶의 복잡한 층위를 모호함 보다는 풍성함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안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힘.책을 통해 연결되어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제자리에 자리잡은 self-esteem 의 단단함.

차근 차근 형성되어 온 소녀의 이른 강점들이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폭발적으로 드러납니다.

마지막 장은 아름답고, 처연하지만, 저자는 그동안 비축해 온 힘을 다 풀어 놓아 강력하게 휘몰아 칩니다. 중반부의 유사한 상황에서 제대로 지탱하지도 못했던 소녀는 이제 당당하고 차분합니다. 

(이 장면의 묘사는 <앰버 연대기>의 느낌이 물씬 납니다. )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어지는 이 선언.... 

내가 상상도 못 할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나는 바뀔 것이고 상상도 안 될 만큼 과거와는 다른 미래를 살 것이다. 난 살아있을 것이다. 난 내가 될 것이다. 난 내 책을 읽을 것이다. 절대로 내 책들을 물속에 버리거나 내 지팡이를 꺾지 않을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은 계속 배울 것이다. 결국 나는 죽음에 이를 것이고, 죽을 것이고,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 혹은 천국, 혹은 그게 뭐든 사람이 죽으면 겪게 되어 있는 알 수 없는 일을 맞을 것이다. 난 죽을 것이고 썩어서 내 세포들을 다시 패턴 속에서 생명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그 순간 내가 어떤 행성에 있든지 간에. 

삶은 그런 것이고, 난 그렇게 살 것이다. 


마음에 쿵 하고 울려옵니다. 다 읽고 난 뒤에도 여운이 오래 남습니다. 
단순한 SF/환타지 쟝르소설이 아니라, 상당한 수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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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2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지음, 안영옥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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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2는 돈키호테1 만큼의 폭발력은 부족한 것 같다. 


돈키호테1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돈키호테1의 속편이 세르반테스가 아닌 다른 작가에 의해 씌어졌고, 이 작품도 나름 당시 스페인에서 많이 읽혔던 것 같다.


이에 화가난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2를 직접 쓰면서 ‘사이비’ 돈키호테2를 비난하는 내용을 많이 넣었다. 그러다 보니 뭔가 자유롭지 못하고 폭발력도 아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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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
김근주 지음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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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김근주 교수님의 이 간결한 책은 성경을 읽는 목적은 무엇인지(하나님을 아는 것) , 성경은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사람의 글), 성경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비판적 읽기, 신학적 읽기, 공동체적 읽기), 성경에 나타난 역사와 오늘의 현실은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지, 구약과 신학은 어떤 관계인지, 구약의 관점에서 신약은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고수하는 보수적 신앙인인 김근주 교수님의 결론: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는 성경이야말로 끔찍하고 힘겨운 현실의 유일한 대답임을 믿는 데서 출발한다.”


아래는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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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성경을 읽을 때 주의하지 않으면, 진리를 전달하는 매개를 진리 자체와 혼동해 버리기 쉽고 그때 마다 교회는 세상의 빛은 커녕 세상의 재앙과 화근으로 전락하곤 했다.

  1.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모든 성경읽기의 목적이다

여호와를 아는 : 예레미야 9: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장의 맥락에서 멸망의 원인이 무엇이었으며, 멸망의 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마음을 새롭게 : 롬 12:1 ‘변화 받는 것’은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그러한 변화가 가능하다. ‘마음’은 ‘지적인 능력’과 연관. 지적 영역에서의 변화야 말로 세상의 틀을 극복하고 새로운 틀을 만들어 가게 하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된다.

성경을 읽을 때 가장 근본적이며 토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개인적 적용의 범람우리의 성경 읽기를 가장 방해하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상황과 형편일 것이다. 상황이 다급하다 보니, 우리는 차분하게 성경에 집중하지 못한다.

적용을 강조하는 풍토의 문제. 이제까지의 적용은 지나치게 사적인 영역에만, 개인의 계발에만 치중해 있었다. 온통 적용하고 적용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은 제자리다. 지금 우리의 문제는 복음이 무엇인가에 있다. 우리의 과제는 무엇을 행하기에 앞서 제대로 이해하는 것임.

은혜받고 순종하려고 준비되어 있는 자세의 문제. 성경에서 마주치는 한 단어 한 단어를 자신을 향한 명령으로 받아들임. 이로 인해 정작 성경이 제시하는 내용을 등한시함.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이사야의 소명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

성경을 읽을 때는 자주 멈춰야 한다. 은혜 받으려고 밀어붙이지 말고, 순종하기 위한 원리만 찾지 말고, 걸리는 표현이 나올 때마다 멈춰야 한다. 그래서 그날 적용할 것이 없어도, 아무런 마음의 감동이 없어도, 생각이 복잡해지고 꼬여도, 읽은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우선 이해하고 궁리하고 사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앎이 최우선이다.

 

  1.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사람의 글이다

성경을 묵상하는 삶의 중요성사탄을 대적하는 것은 끊임없이 우리를 분주하게 해서 시간에 쫓겨 성경을 내 삶의 위로와 회복을 주는 책으로만 읽게 만드는 세상을 향한 대적, 성경에서 하나님을 알기 보다 내 삶의 지침을 발견하는 데 몰두하게 만드는 흐름을 향한 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의 신적인 특징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의 의미는, 우리의 성경 읽기가 믿음에 기반을 둔 읽기, 삶을 변화시키는 읽기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성경의 인간적인 특징사람의 글인 성경성경은 각 저자 개인의 모습이 강렬하게 나타난다. 구약 성경 대부분의 책이 긴 세월에 걸쳐 차츰차츰 형성되었다. 성경 각 책이 취하고 있는 글쓰기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누가복음에서 누가가 취했던 자세와 같이 신중하고 철저한 공부와 연구가 필요하다

성경은 사람의 글이지만, 이 성경을 읽을 때 사람들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을 깨닫고, 점점 온전케 되며, 선을 행할 능력이 구비된다. 그러니 믿음으로 읽되, 철저히 공부하자. 문학적 형태를 검토하고, 본문의 배경과 형성에 대해 공부하고 궁리하자.

 

  1. 비판적으로 읽기

불편한 , ‘비판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마7:1) 과 연관되어 무엇인가에 대한 비판 자체에 꽤나 큰 거부감이 있음. 하지만 이 본문은 마 7:5의 ‘외식하는 자들’에 대한 비판이다.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의 편협한 이해의 해악이 크다. 개인의 세부적이고 세밀한 윤리에는 극도로 집착하되, 정작 나와 공동체의 삶 전체를 망가뜨리고 있는 그릇되고 불의한 행동과 그러한 행동을 낳게 하는 구조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과 세상, 공동체에 대해 공의에 근거하여 비판해야 한다

비판적 읽기 – 본문의 배경에 대한 객관적 검토

비판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성경의 진술에 대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따져보는 것. 비판적으로 읽지 않으면 우리는 구약 성경이 사실을 전달하기 위한 책이라는 선입견을 지니게 되고, 그럴 때,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을 비판적으로 읽을 때, 각 책이 지난 성격을 이해하고 그 성격에 맞는 접근을 모색하게 된다.

비판적 읽기 – 탐욕을 넘어서는 읽기

비판적으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의 탐욕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정말 성경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집중하려는 노력이다.

비판적 읽기 – 기품 있는 읽기

행 17:11에서 베뢰아 사람들을 일러 ‘너그럽다’고 평가함. 원어는 ‘가문이 좋다’, ‘존귀하다’, ‘기품 있다’는 의미임. 그들은 바울의 복음을 듣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음. 이 단어는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알아보기 위해 검토하고 조사하고 물어보는 것을 의미함. 이러한 비판적 자세야 말로 참으로 ‘기품 있는’ 모습이라고 사도행전은 말한다.

 

  1. 본문을 신학적으로 읽는다는 

어떤 개론서를 읽을 것인가?

비평적 입장의 책: 성경 본문에 제시하는 내용에 대해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접근하려 함

보수적 입장의 책: 성경 본문에 제시된 바를 가능한 문자 그대로 수용하려고 함

결국 비평적이든 보수적이든, 개론서들은 성경 본문이 말하려는 바를 발견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함. 비평적 개론서들이 지닌 때로 불편한 주장으로 인해 책 자체를 포기하기 보다, 각 책의 특징을 감안한 채 두루 다양한 입장을 읽어 가는 것이 훨씬 유익한 접근 방법임

신학적 읽기

본문의 다양성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만, 하나의 본문, 하나의 구절을 가지고 절대적으로 옳은 것으로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다른 본문과의 비교 가운데 본문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신학을 공부하는 의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러한 상대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의 다양성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우리로 심사숙고하게 하며, 삶의 다양한 양상을 성찰하게 만든다. 신앙의 삶이 깊어질 수록 정답만을 외치는 삶이 아니라, 삶의 다양성 앞에서 겸손해지며,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질곡 앞에서 함부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지 않게 한다.

공동체적 읽기

개인이 공동체 안에서 존재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해석은 반드시 공동체적이어야 하며, 우리 해석의 타당성 역시 반드시 공동체 안에서 확인되어야 한다. 우리의 성경해석은 뛰어난 한 사람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생활인들이 자신의 삶의 터전 위에서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한 것을 피차 나누는 가운데 확립되어 가는 것이라야 한다.

 

  1.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본문의 시대와 오늘의 시대 이해하기

주석과 해석

성경 자체가 무얼 말하는지 제시하려는 노력성경 본문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대해 무엇을 말하려는지 제시하려는 노력
본문의 원래 의미본문이 오늘에 주는 의미
본문의 과거 의미본문의 현재 의미
성경연구, biblical study성경공부, Bible study
주석, exegesis해석, interpretation

기초가 되는 것은 본문의 과거 의미. 성경의 배경이 되는 시대와 상황 속에서 각각의 본문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이 본문이 오늘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말하기 불가능함.

예레미야와 독립운동

주석: 예레미야는 유다가 바벨론에 저항하지 말고 항복하라고 함.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이 바벨론을 들어서 쓰셨으니, 예루살렘의 멸망은 하나님의 뜻이고, 바벨론은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라고 함.

해석: 일본 식민지 시절이 하나님의 뜻? 일본이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

이러한 해석은 성경을 주석하고 해석하면서 그 배경이 되는 시대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데서 기인한 잘못된 이해임

예레미야 시대 백성의 죄악은 정의를 행하지 않고,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고, 다른 신들의 뒤를 따른 것(렘 7:5~6).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잘못. 하나님의 도구라는 바벨론에 대해서 예레미야는 그 교만에 대해 영원한 심판을 선포함

역사 안에 놓인 과거의 본문과 오늘의 현실

본문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주석에 있어서 필수적인가 하면, 본문을 오늘의 현실에 적용하려는 해석 작업에서 필수적인 것은 오늘 우리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임. 일제 강점기를 하나님의 뜻으로 뭉뚱그려 말할 경우, 고난 받은 이들과 친일하여 부귀영화를 누린 이들을 나란히 놓아 버리는 결정적인 잘못을 저지르게 됨.,

 

  1. 성경 본문의 역사 본문의 배열과 편집이 본문 이해에 주는 의미

성경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되는 또 하나의 역사는 우리 앞에 놓인 본문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는지에 관한 역사다.

시편의 형성

주전 3~2세기 경에 이르면서 거의 현재와 같은 다섯 권으로 이루어진 150개의 시편으로 완성되었음. 현재의 시편 형태는 그 시대 유대인 신앙 공동체의 신앙을 반영. 시편을 살펴보면 시편 1, 2편이 표제가 없는 유일한 시로 맨 앞에 위치함. 율법을 묵상하는 삶에 대한 1편과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담은 2편은 시편 전체의 주제를 보여줌. 시편 5권 중 1~3권은 하나님에 대한 질문, 왜 다윗 왕조가 무너졌는가. 4권의 핵심은 ‘여호와가 다스리신다’ 곧 하나님 나라다. 시편의 마지막 5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할렐루야’시편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주된 내용은 모든 약한 자와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를 지키시는 하나님이라는 점. (시 145:14) 시편의 배열과 편집에서 핵심 메시지를 알 수 있음. 결국 예수께서 이 땅에서 외친 선포의 핵심임

구약 성경의 배열

유대교기독교
율법서 (창, 출, 레. 민, 신)오경
예언서 (수, 삿, 삼, 왕, 사,
렘, 겔, 12소예언서)
역사서 (수, 삿, 룻, 삼, 왕, 대,
에스라-느헤미야, 에스더)
성문서 (시, 욥, 잠, 룻, 아, 전,
애가, 에스더, 에스라-느헤미야, 단, 대)
시가서 (욥, 시, 잠, 전, 아가)
예언서
(사, 렘, 애가, 겔, 단, 12 소예언서).

유대인의 성경 배열에서 역대기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백성들의 이상적인 회복의 모습을 담고 있어서 유대인들의 성경 전체는 안정적인 구도를 취함

기독교의 마지막의 예언서는 말씀을 떠난 현실에 대한 강력한 심판 선포와 더불어 다가올 새롭고도 참된 회복에 대한 기대로 마무리되면서 불안정한 구조를 취함.

예수께서 구약의 성취임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구약의 마지막에 놓인 예언서들이 전하는 기대와 소망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이해해야 함.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예수를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분으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는 분으로 표현한다는 점은 틀리지는 않지만, 너무 미흡함. 구약 예언자들의 기대와 소망이 거의 담겨 있지 않음.

특정한 시편이나 구약의 책이 왜 특정한 부분에 배치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구약 성경의 편집과 형성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며,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본질적인 부분이다.

 

  1. 구약과 신약의 관계(1): 구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구약 시대는 ‘행위를 통해 구원 받으려던 시대’가 아님. 하나님이 먼저 베푸신 은혜가 있음. 구약을 ‘율법’이라 여기며 지나간 시절의 법으로만 여긴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오늘 우리 현실에 지킬 필요가 없고 지킬 수도 없는 말씀으로 격하시킴. 값싼 은혜와 연관된 이런 이해는 지금도 교회를 타락시키며, 하나님이 주신 영광의 율법을 따르는 복된 삶의 길을, 온통 탐욕을 종교적으로 치장하는 위선 가득한 흙탕물로 만들어 버렸다. 구약에 대한 오해와 그로 인한 구약 경시는 우리 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임.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은 구약. 신약은 구약 성경을 기본으로 하여 1세기 교회의 상황과 문제를 다루는 실질적인 글이기에 모든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국가에 대한 이해다. 신약 시대는 로마의 식민지 시대로, 1세기 전도자들이 생각하는 국가의 기능은 치안을 유지하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안전한 삶을 보장하는 것. 로마서는 이렇게 약한 이들을 징벌함으로써 선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와 그 세워진 권세의 기능임을 분명히 말한다. (롬 13:1-7). 반면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어겼을 경우 그들을 향해 심판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렘 22:1~5) 느부갓네살 왕에게도 다니엘은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라고 한다. (단 4:27)

이를 생각하면 오늘 한국 교회가 부당하고 폭력적인 정권임에도 아무런 가치판단 없이 하나님이 세우셨다 하여 순종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 판단들은 구약에 대한 경시에서 비롯된다. 구약 경시의 폐해 가운데 하나가 나라와 민족, 공동체로 존재하는 하나님 백성의 차원을 잃어버린 것이다. 남은 것은 오로지 개인이다. 나 한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신앙의 내용이 되고, 나 한 사람 착하게 살아가고 열심히 전도하고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 인의 삶에서 거의 전부가 되어 버렸다.

 

  1. 구약과 신약의 관계(2): 사랑으로 성취된 율법

율법을 셋으로 구분하는 것이 정당한가?

칼뱅의 <기독교 강요>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같은 글들은 구약의 율법을 제의법, 시민법, 도덕법으로 구분한다. 제의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폐지되었고, 시민법은 이스라엘 나라가 사라지면서 효력이 없어졌으며, 도덕법만 여전히 보편타당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 자체는 매우 주관적임. 구약 5대 제사에 관한 규례는 제의법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십일조, 안식일 등에 관한 부분은 쉽게 판정할 수 없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시민법’. ‘시민법’이 더 이상 효력이 없는 법이라 여기기에 면제년과 희년을 비롯하여 구약의 재판 제도라든지 올바른 왕정에 관한 말씀들이 전부 본질적인 의미를 잃게 되었다. 사회적, 구조적 측면이 사라지니 남는 것은 이 말씀들을 사사롭고 개인적인 측면에 적용하는 것 뿐이라 할 수 있다. 땅은 하나님의 것임을 선포하는 희년 본문, 이웃을 향한 빚 탕감을 다루는 면제년 본문을 보면서도 우리는 도무지 이 시대의 현실 빚에 허덕여 목숨을 끊는 이들을 돌아보지 못하고, 오직 내 죄를 탕감하신 주님만 묵상하게 되어 버렸다.

구약을 성취하시는 주님.

구약 율법에 대한 주님의 입장은 지극히 명료하며 단호하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7~18)

여기서 ‘완전하게 하다’로 번역한 표현은 ‘이루다’, ‘성취하다’로 옮기는 것이 낫다. 명령되고 약속되고 제시된 것을 이루고 성취하여 실체의 현실로 만들어 냈다는 의미. 예수는 구약이 공상이거나 비현실이 아니라 현실이요 실제임을 드러내시고 증거하시는 분이다. 구약의 말씀이 예수 안에서 참으로 현실이며 실제임을 드러내는 것이 신약 시대다.

사랑의 율법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구약 율법의 전체가 폐지되었으며 그 전체가 성취되었다 (롬 7:6) 예수는 마 5:21~48에서 구약 율법을 재해석하여 그 온전한 의미를 드러내신다. 주님이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셨다는 것은 율법이 참으로 요구하고 의도하는 의미를 온전히 행하셨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이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5:48)

구약의 모든 말씀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사랑의 빛으로 해석되고 풀이 되어야 한다. 오늘 우리 과제는 구약의 율법과 제도들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진지하게 당시 상황 속에서 검토하고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의미가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 자본주의에 기반을 둔 세속사회 속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으며 적용될 수 있는 지를 사랑의 빛 위에서 모색하는 것이다.

 

  1. 구약과 신약의 관계(3): 신약으로 성취된 구약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

신약 기자들이 구약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기록되었으되’, ‘기록된 바’ 와 같은 어투들은 신약기자들이 자신들이 경험한 예수 사건을 구약이 전하고 선포하는 내용의 성취로 여겼음을 확실히 보여준다. 요한 복음의 여러 구절들은 구약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의 사역이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연속임을 보여 준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신약에서 새롭게 나온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이어진다. 율법 이전이든 이후든, 아브라함과 다윗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된 이들이다.

구약을 성취하신 것의 의미

예수님께서 구약을 성취하셨다는 것이 예수님이 나귀 타신 것, 베들레헴에 나신 것이 구약에 나와 있다는 수준의 성취가 아니다. 누가복음 4:18~19에 따르면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당에서 다음과 같은 이사야 구절을 찾아 읽으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에게 자유를   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18~19)

이 구절을 읽으신 주님은 참여한 회중을 향해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눅 4:21)라고 선언하심. 여기서 ‘응하다’는 앞에서 언급한 ‘성취하다’로 번역해야 마땅함. 이사야 61장의 해당 구절은 희년 선포와 밀접하게 결부된다. 희년은 50년마다 이루어지는 사건이지만, 예수께서 ‘오늘 너희 귀에’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셨다는 점에서 예수께서는 희년을 시간에 매인 것이 아니라 지금 오늘 이 순간의 일로 끌어내신다고 말할 수 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에 관한 잘 정돈된 신앙 고백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주께서 걸어가신 길을 우리도 걸어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의 예언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믿는 믿음은 구약이 선포하는 약속을 오늘의 끔찍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굳게 붙잡고 소망하고 꿈꾸며 한걸음씩 걸어가게 한다.

 

  1. 구약으로 읽는 신약부활과 구원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의미를 지닌 구약을 전제하고 신약의 복음서와 바울서신을 읽을 때에야, 신약성경이 말하려는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게 된다. 이 때 구약과 신약의 내용이 서로 통일되지 않고 연속성이 끊어져 보이는 부분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경우 거의 대부분 근본적인 변화는 신약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에 이루어졌음.

일점일획?

우리가 지닌 구약은 히브리어 성경에 기반을 두었고, 신약 문서들은 대체로 70인역을 사용하는데, 히브리어 성경과 70역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존재함. 이를 생각하면 교회가 금과옥조처럼 여겨오던 ‘일점일획’이라는 것이 결코 말 그대로 자구를 가리키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이르시는 그 본질적인 내용을 간직하고 고수하는 것이 중요함.

진정한 의미의 ‘오직 성경으로’는 해석의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본문에 대한 토론을 수반해야 함. 성경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목회자의 성경해석만이 전부가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본문의 문자 이면의 의미에 대해 토론하고 논의한다는 것을 의미함.

부활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역사로 놀라는 무리를 향해 베드로는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데, 이를 위해 시편 16:8~11을 인용한다. 히브리어 성경은 하나님이 반드시 곤경 가운데서 건지시고 지키실 것을 확신하는 고백이지만, 70인역과 그에 기반을 둔 신약에서는 죽음 이후의 부활에 관한 말씀으로 이해되고 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비롯한 내세에 대한 신앙은 신구약 중간기, 대략적으로 주전 2세기 중반 이후 유대인들 사이에 일반화되었다.

내세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는데 구약의 하나님 백성들은 고통과 괴로움 가득한 현실에서 어떻게 여호와 신앙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시편 73편, 하박국 3장을 볼 때, 불의가 가득한 현실 속에서 여호와를 경배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이를 생각하면 신약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에 대한 기대 역시 그 본질에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구원

구약에서의 ‘구원’은 하나님이 그 백성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곤경과 재난에서 건져내심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구원의 본질은 내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살아가는 삶이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신약 선포의 본질적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주로 고백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왕 되심을 고백하는 것이며,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죽음 이후에 완전히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고 누리며 살아갈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으로 부름받았다.

구약과 신약이 증거하는 것은 특정 지식 체계를 믿으면 내세가 보장된다는 것이 아니다. 구약과 신약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그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갈 때, 신실하신 하나님의 도우심과 건지심을 경험하게 되며, 나아가 영원토록 그 나라를 누리며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증거한다.

 

  1. 시대를 초월하는 성경해석

이 장에서 다룰 것은 문맥 안에서 글을 읽고 본문이 말하려는 바를 파악한다 해도 막상 그 의미가 성경 전체에서 말하는 바와 동떨어질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다

차별(?) 조장하는 성경

창세기 1~11장에서 제시되는 중요한 메시지는 ‘각기 종류대로’ 라고 말할 수 있으며, 각자의 고유함과 존귀함을 이와 연관해 묵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이해로부터 ‘인종차별’이나 ‘인종분리’라는 끔찍한 주장이 도출될 수 있다는 점. 네덜란드 기반의 백인 칼뱅주의자들이 세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노아의 저주로 알려진 창세기 9:20~27이 ‘흑인에 대한 저주’ 본문으로 이해되어 미국과 유럽에서의 흑인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근거가 되었음. 노예 제도를 당연한 사회 질서로 인정하는 본문이 성경에 많음. 쟁점은 주어진 ‘본문’에 대한 올바른 해석.

성경 전체의 사상을 고려하는 해석: ‘사랑의  기초한 해석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시절, 예레미야와 다른 예언자 하나냐는 정반대의 내용을 선포함. 동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상반된 내용이 선포될 때, 우리는 어떻게 ‘맞고 틀림’을 판단할 수 있을까?

하나냐는 자신의 계시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주장하지만, 예레미야는 이전 예언자들의 선포 전체를 합리적으로 검토하여 제시한다. (렘 28:7~9) 예레미야에게서 배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포되더라도 그 말씀들은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검토되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노예 제도 관련해서, 성경 전체는 본질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창세기 1장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선포하며, 사람에게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사명이 부여되었다고 선포한다. 이러한 선포는 사람이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며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거나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신구약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의 법을 생각할 때, 노예 제도가 합당치 않다는 것은 합리적인 결론이다. ‘사랑의 법’에 부합하지 않는 성경읽기와 이해는 본문과 일치하더라도 재고되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 (요일 4:8) 이기 때문임.

시대를 초월하는 신앙

지금은 아니지만, 교회는 그 시대에 노예제도를 인정했다. 이렇게 교회가 시대의 한계를 조금도 넘어서지 못한 채 억압받고 고통당하는 이들의 상황을 사실상 정당화했다면, 그때 그들이 믿은 신앙은 무엇이었을까? 신앙이 시대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면, 그 신앙은 대체 무엇일까?

시대적, 문화적, 역사적 한계를 넘어서는 해석의 원칙은 단연코 ‘사랑의 법’에 기초한 해석이라할 수 있다.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오늘 우리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우리는, 우리 시대에 제기하는 여러 문제 앞에서 과연 우리 시대의 한계를 넘어 ‘사랑의 법’에 따라 행동할 수 있을까?

 

  1. 밭에 감추인 보화

구약과 신약은 지금부터 수천 년 전의 시대와 문화를 배경을 하기에 지금은 더 이상 연관되지 않는 권면들이 허다하다. 이러한 권면과 제도는 엄밀히 말해 폐지된 것이 아니라 그 본질적인 의미를 둘러싼 시대적 관습과 외양이 폐지되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레위기가 강력히 증언하는, 전부 불태우는 번제는 우리 삶으로 드리는 몸의 제사에 생생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몸으로 드러나는 산 제사’를 가리켜 바울은 ‘영적 예배’라고 부른다. ‘영적’으로 번역한 헬라어 단어(‘로기케/로기코스’)의 의미가 ‘논리적인, 합리적인’임. ‘영적 해석’은 본문이 말하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리적이면서 합리적인 해석을 의미한다. 고대의 본문을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으로 읽는다면, 당연히 우리는 그 본문이 지닌 ‘상징적 의미’가 무엇인지, 시대적 외양을 넘어선 ‘본질적 의미’가 무엇인지 모색해야 한다.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

창세기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임을 얘기한다. 이는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 역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세상이며, 사람은 그분의 통치를 수행하는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다스리라’는 명령에서 ‘다스림’의 구체적인 내용은 ‘일’ 혹은 ‘노동’이다. (창 2:15) 다스림은 군림하고 지배하여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경작’과 ‘지킴’, 즉 노동을 통해 구체화되고 현실화된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으로의 부르심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으로,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열방이 구원에 이르고 복 받기를 원하셨음. 아브라함은 홀로 구원받은 사람의 상징이 아니라, 세상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이 명하신 삶을 걸어가는 사람의 상징이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화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창 18:19)

하나님의 통치 내용은 ‘의와 공도’, 즉 ‘정의와 공의’임. (시 97:1~2, 시 33:5) 아브라함을 향한 명령은 아담과 하와 이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며 왕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지를 보여준다. 이후 이스라엘의 존재는 정의와 공의의 삶으로 대표된다. (시 72:1)

정의와 공의의 구체적인 내용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는 것’ (시 72:4),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는 것’ (시 1:17)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않는 것’ (렘 7:6) ‘탈취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무죄한 피를 흘리지 않는 것’ (렘 22:3)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풍성한 제사를 드릴지언정 이러한 정의와 공의의 삶에 대한 요구는 도외시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제사 자체를 전적으로 거부하셨다. (사 1:10~15, 렘 7:1~15, 암 5:21~27) 제사의 본질은 결코 정성이나 풍성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의 올바른 삶에 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몸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일 것이다.

신약의 마 6:33은 구약의 줄기찬 증언을 핵심적으로 표현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는 구약이 증언하는 바, 하나님이 온 세상을 정의와 공의로 통치하심을 가리킬 것이다. 주님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 (마 28:20)은 하나님의 통치와 그 기초인 정의와 공의를 추구하고 행하는 삶이며, 그것이야말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 (마 6:10)라고 주께서 기도하신 본질적인 의미일 것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살아가는 삶이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로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굳게 믿고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방식인 정의와 공의를 따라 이 땅의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광야 40년동안의 이스라엘을 보면 기적은 그들을 바꾸지 못했다. 기적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대부분 ‘일상의 순종’을 도외시하게 만든다. 하지만 추구할 것은 기적보다 일상이다. 주님은 기적을 행하실 것이다. 우리는 기적에 관한 본문을 보면서 단지 예수를 찬양할 뿐 아니라 기적을 어떻게 일상으로 살아낼 수 있을지, 그 본문이 의미하는 ‘상징적’, ‘영적’ 의미가 무엇일지 고민하고 궁리하며 모색해야 한다.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

우리 스스로 삶의 무게가 무척이나 크고 힘겹다 보니, 우리의 갈망과 욕망을 외부로 투사하여 대신 만족시켜줄 무언가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모세를 기다리던 백성들이 만든 금송아지는 이러한 욕망을 투사한, ‘민들어진 신’, 내 욕망의 형상일 뿐이다. 초자연적 기적에 대한 믿음 역시 그 본질에는 욕망이 있을 수 있다. 이 욕망은 우리가 사는 ‘이 세대’가 끊임없이 자신을 본받도록 우리 안에 조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는 성경이야말로 끔찍하고 힘겨운 현실의 유일한 대답임을 믿는 데서 출발한다. 내 안에 있는, 그리고 이 시대가 조장하는 욕망을 인정하면서 성경을 읽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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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 민족과 인종의 경계를 초월한 공동체 믿음의 글들 353
최종원 지음 / 홍성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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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 기독교세계관대학원의 최종원 교수님은 역사학자로 교회사를 강의하고 계신다. 

저자는 교회가 ‘물질만능주의, 성취지상주의 등과 같은 세속화된 가치관과 세계관에 충실하게 동화되어 기독교 본연의 가치를 상실하고 있다’고 본다. 이는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이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하는가. 

초대교회로 시선을 돌려보면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도시를 중심으로 성장했던 초대 교회는 가장 세속화된 현장 속에서 이 세상을 넘어선 가치와 이상이 존재함’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결국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서 시작된 복음이 고대 역사의 사상적, 종교적 혁명을 일으켰다. 

초대교회라 해도 모든 것이 다 이상적이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짚어봐야할 것은 그들이 어떤 문제, 어떤 도전에 직면했으며, 어떤 관점으로 대응해 나갔는가 이다. 도전과 대응의 관점에서 초대교회에서 제국의 국교화, 그리고 이어진 서로마 제국의 멸망 등의 격변하는 시대에 교회는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중심으로 현실의 역사와 기독교의 교리사를 접목한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초대 교회의 확산이 일어난 것은 당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담고 있던 인종주의를 극복했을 때였다고 한다. 결국 로마 제국 말기의 혼란 상에서 체제의 대안으로서 국교화에 이르게 되지만, 이러한 국교화 제도화는 또한 차별의 제도화를 초래하였다. “어쩌면 초대교회는 이민족의 침입으로 무너진 서로마와 함께 막을 내린 것이 아니다. 그 내부에서 싹튼 다름에 대한 배제와 타자에 대한 편견 때문에 무너진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일본 식민지 지배 하에서 ‘신분과 계급의 차이를 극복하는 인간애를 실현’했고, 놀라운 부흥을 이루어냈으나, ‘성장과 번영으로 비대해진 이후 타자를 관용하지 못하는 반사회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진단한다.   “초대 교회의 성장과 쇠락의 역사는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하는, 묵직해서 버거울 수도 있는,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절체 절명의 숙제를 안겨주고 있다.” 그 숙제는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타자에 대한 배척을 넘어 포용의 자세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저자는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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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1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지음, 안영옥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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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변형 이야기들은 많이 접했으나 원전은 처음 접해봄. 


이후의 변형을 모두 압도하는 예리하고 유쾌한 풍자로 인해 놀라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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