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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날들
정지아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2월
평점 :
《나의 아름다운 날들》
정지아 작가
은행나무 출판

11편 단편 중 <봄날 오후 과부 셋>, <천국의 열쇠>, <목욕 가는 날> 은 일상의 이야기들을 그리움과 아련함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되돌려주어 가장 좋았다.
서로 다른 생각, 이방인, 계층 등의 차이로 미묘한 분열도 있고 또 그들이 한편이 되어 연대의식을 가지는 가 하면, 우울한 사람들의 만남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안타까운 시선과 또 반대로 위로를 하며 힘을 내어야 한다는 희망을 보여주기도 한다.
단편소설의 주인공들은 이름이 없이 나, 그, 그녀, 김 여사, 최와 박과 김으로 나온다. 주인공만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가 될 수도 있고 그녀가 내가 될 수도 있듯, 단편들 속에 등장한 다양한 계층과 신체적 차별의 인물들을 보여줌으로 나와 가족 혹은 우리 주변의 보이지 않지만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소설들의 인물들을 만나고 나니 정여울 문학평론가의 해설에서 “평범한 99%의 ‘비범함’을 눈부시게 증명한다”는 말이 이해가 되는 듯 하다.
정지아 작가의 글이 좋은 이유는 후회로 가득할 수 있는 일상을 삶이 다 그런거다 위로해주는 대화들이 많다.
그리고 읽기가 쉽다. 읽으면서 무슨 내용인지 한참을 고민해야하는 책은 덮고도 어려웠다는 기억만 남을 때가 있는데 정지아 작가의 소설은 눈으로 읽으며 감정이 바로 전달되어 자꾸 손이 가게 되는 것 같다.
📖 숲의 대화
첫 문장 ─ 호르르, 바람이 세월을 밀어낸다.
왜 하필 나였소?
젊은이는 아직도 저만의 시간 속을 헤매소 그는 혼잣말인 듯 중얼거린다.
왜 하필 나헌티로 보냈소? 나가 워쩌기를 바랬소?
시선은 동고새를 향한 채 젊은이가 넙죽 말을 받는다.
잘 살기를 바랬제. P24
사랑이 신념인 사람도 시상에는 있어라. P25
✏️따끈한 바위 위 졸고 있는 늙은이의 한낮의 꿈 이야기가 정말 꿈을 꾼듯 순식간에 읽혔다.
바람에 과거가 소환되어 온듯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종이었던 '나'와 도련님의 아이를 가진 '순심이(아내)', 순심이를 나에게 보낸 죽은 '도련님'이 나온다. 사상을 바라보던 도련님과 사랑을 바라보던 아내. 계급과 사상의 차이로 도련인의 아내로 살지 못하고 나에게 온 순심이의 삶이 평탄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에 그리움인지 한탄인지 모를 회상한다. 비록 죽고 기억 속에서만 살아 있는 사람이지만 나(운학)는 순심을, 순심은 도련님을 사랑하며 운명처럼 기억 속에서 함께 살았다. 나를 사랑하지 않은 순심을 원망하지 않고 순심의 마음까지 보듬어주는 운학을 보면 참아내고 바라보는 그런 삶도 살아 내는구나 싶었다.
📖 봄날 오후, 과부 셋
첫 문장 ─ 봄바람이 앙탈하는 아이처럼 마당을 휩쓴다.
반나절 만에 빨래를 말린 성급한 바람처럼 그녀의 80년도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누군가 그녀의 세월 밖에서 그녀의 한 삶을 지켜보고 있다가 빨래를 걷듯 목숨줄을 휙 걷어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이란 것은. P37-38
젊은 날, 그녀의 피부는 건조한 한겨울에도 자르르 기름기가 돌았다. 그 기름진 살결은 세월 속에서 차츰 기름기를 잃어 언젠가부터 푸석푸석 살비듬이 일었다. 매일 아침 방바닥에 떨어진 살비듬을 손으로 쓸면 손바닥이 온통 허옜다. 살비듬이 빠져나간 생명이나 되는 양 그녀는 아침마다 심란하다. P38
✏️여자의 늙어버림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나이가 들어 몸이 아프고 병이 든 것이 아니라 피부가 노화되는 모습을 글로 읽으니 서러움이 더 커보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또 인정 안한다고 나이를 돌릴 수 없으니 삶을 행복하게 살아야하는데 어떻게 사는게 정답인지 죽을 때까지 찾아가는 과정같았다. 사랑받고, 외롭지 않게 누군가와 함께 라는 것은 죽을 때까지 인 듯 하다.

📖천국의 열쇠
첫 문장 ─ 쿵쿵 벽이 울린다.
아가, 병신이면 어떠냐. 네가 젤이다. 사지육신 멀쩡하지 않아 언제든 품어줘야 할 아이로 보이는 것일까. 마흔 가까운 그를 영수 어머니는 ‘아가’라고 불렀다. 웬일이지 눈물이 핑 돌았다. 헛개나무가 첫 꽃을 틔웠을 때처럼 그의 가슴속에서 톡톡, 어여쁜 꽃망울이 터지는 느낌이었다. P83
✏️장애를 가진 남자와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베트남 여자 호아의 이야기. 주정뱅이 아버지에 가난한 집이지만 삶을 놓치지 않는 어머니의 집념을 어릴 때부터 듣고 자라 육신은 비록 정상은 아니더라도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그와 호야의 헛개나무밭에서 바람에 살랑이는 꽃송이 향기를 비록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둘이 갖고 있는 헛개나무밭으로가는 열쇠는 누가 무어라 하지 않는 자신들의 공간으로 가는 천국이 아닐까.
가슴 아픈 이야기인데 꽃송이 향기가 나는 소설. 이 소설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단편이다.
📖 목욕 가는 날
첫 문장 ─ 빌라 입구에 들어서기도 전에 맥이 탁 풀렸다.
내가 도망친다고 세월이 어머니를 비켜가는 것은 아닐 터, 반년 만에 만나면 어머니는 더 늙어 있었고, 그만큼 더 괴로웠으며, 하여 더 빨리 떠날 핑계를 찾았다. P114
✏️K장녀인 언니는 엄마와 늘 티격태격하는 모습도 재미있었고, 엄마와 거리두는 동생을 가까이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려고 하는 것도 좋았다. 다른 지역에 살아 가끔 부모님을 뵐 때 마다 얼굴의 주름과 느릿한 걸음걸이 같은 늙음의 모습을 볼 때면 더 잘해드려야겠다는 마음과 나도 여유롭지 않아 마음처럼 되지 않는 마음으로 모른척한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언니가 있으니 잘 하겠지라는 떠넘기기 식으로 했던 지난 날들이 목욕 가는 날을 읽으면서 함께 떠올라 어른이 된 나는 엄마와 언니 앞에서는 아직도 막내이구나 싶었다. 괜히 엄마한테 안부 문자 남겨보는 날이었다 ^^
📖브라보, 럭키 라이프
첫 문장 ─ 사위는 아직 어둡다.
행운의 사나이답게 아들놈은 다시 일어나 그날처럼 사방천지 팔펄 날아다닐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만들고야 말 것이다. P135
✏️사고로 뇌사 아들을 23년동안 바라지 하다 깨어날 것이라는 한낱 희망에 재산도 모두 병원비와 생활비로 날리고 남은 자식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몫조차 경우에게 가버린 것이라 등 돌려버린다. 경우는 다시 회복될 수 있을까. 희망이 고통으로 삶을 살게 하는 가족 같아서 슬프다.
📖핏줄
첫 문장 ─ 왕시루봉이 구름 한 점 없이 말갛다.
✏️베트남 며느리와 한산 이씨 가문의 이야기. 족보를 중시 여기는 집에서 베트남 며느리가 낳은 손주 얼굴을 보고 굳어 버리는 장면은 핏줄이기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해야하는 현실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 스스로 갇혀 괴로워하는 사람처럼.
📖혜화동 로터리
첫 문장 ─ “얘, 켈로(Korea Liaison Office). 배고프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한국전쟁 발발이후 군부대에서 일한 ‘박’과 빨치산이었던 ‘최’ 그리고 박의 제자이면서 국립대 교수인 ‘김’사이의 반세기에 걸친 우정을 보여준다.
📖인생 한 줌
첫 문장 ─ 땅은 파도 파도 끝이 없다.
농사만도 못한 게 자식농사였다. 들판 가득 너울거리는 벼 이삭을 보는 뿌듯함도 잠시, 잘 말린 벼를 수매하도 돌아설 때면 빈 들판보다 더한 헛헛함이 밀려와 날밤을 새며 독한 소주로 달래지지 않았다. 자식이란 잠시 내 품에 품었다 때 되면 철새처럼 떠나보내야 하는, 본디 허망하디허망한 존재라고 헛헛한 가슴을 다독여도 그때뿐, 술이 깨고 나면 어느새 그는 동네 어귀 느티나무 밑을 하릴없이 서성이며 목을 늘이고 있었다. P219
📖즐거운 나의 집
첫 문장 ─ 비라도 한 줄금 퍼붓기를 바랐건만 햇볕은 쨍쨍, 바람은 살랑, 일하기에 딱 좋은 날씨다.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오지랖 넓은 것 또한 그는 이해할 수가 없다. 땅을 닮아 넉넉한 품성을 가졌거든 없는 설움을 애먼 남에게 풀지를 말든가, 마누라 동생을 건드리지 말든가. 기본적인 예의도 윤리도 없으면서 웬 돼먹지 않은 훈계란 말인가. 그러면서 그는 뭔가 억울하다. 내 사정은 누가 봐주나. P268
📖나의 아름다운 날들
첫 문장 ─ 반짝, 김 여사는 눈을 뜬다.
사지육신 멀쩡한 자식놈 수발들자고 일터를 사나흘이나 비우겠다는 아주머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비록 남의 집 살림을 산다고 해도 일이란 신성한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든 그 분야의 정상에 오를 수 있다. 그게 인생의 당연한 이치다. P283
✏️김 여사는 입주하여 자신의 집안일을 해주는 아주머니가 자식이 아파 며칠 쉬겠다는데 그 자식의 상태보다 일을 못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선심쓰듯 병원비를 대신 내주는 것을 배려라고 알고 있는 듯하다. 평생을 자신도 편하게 살지 않았다고는 하나 유기농, 균형잡힌 식단 등을 신경써야 하는 힘듦이 있었다고 한다면 최저 생계만으로 생활하고 자신의 삶은 없는 유모와 입주가정부와는 다른 자신만의 삶의 특권을 누리기 위한 부주적인 노력이라 생각한다.
📖절정
첫 문장 ─ 가로수마다 불빛이 환하다.
죽기도 어렵고 살기도 어렵다. 꿈을 꿀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꿈을 버리는 순간 노숙자로 전락할 게 두려울 뿐이다. P328
✏️바로 앞의 추락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들이지만 그냥 떨어져 버리지 않고 안간힘을 다해 살아가려고 한다. 안간힘 속에서도 스스로 떨어져 가버린 김을 떠올리며 자신은 가족을 위해 더 안간힘을 쓴다. 추락하기 싫은 자들의 모임 같다. 늘 술에 절어있고 혼자 있고 제대로 된 식사와 옷과 집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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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나무'로부터 도서지원 받았습니다.
반나절 만에 빨래를 말린 성급한 바람처럼 그녀의 80년도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누군가 그녀의 세월 밖에서 그녀의 한 삶을 지켜보고 있다가 빨래를 걷듯 목숨줄을 휙 걷어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이란 것은. - P37
젊은 날, 그녀의 피부는 건조한 한겨울에도 자르르 기름기가 돌았다. 그 기름진 살결은 세월 속에서 차츰 기름기를 잃어 언젠가부터 푸석푸석 살비듬이 일었다. 매일 아침 방바닥에 떨어진 살비듬을 손으로 쓸면 손바닥이 온통 허옜다. 살비듬이 빠져나간 생명이나 되는 양 그녀는 아침마다 심란하다. - P38
아가, 병신이면 어떠냐. 네가 젤이다. 사지육신 멀쩡하지 않아 언제든 품어줘야 할 아이로 보이는 것일까. 마흔 가까운 그를 영수 어머니는 ‘아가’라고 불렀다. 웬일이지 눈물이 핑 돌았다. 헛개나무가 첫 꽃을 틔웠을 때처럼 그의 가슴속에서 톡톡, 어여쁜 꽃망울이 터지는 느낌이었다. - P83
죽기도 어렵고 살기도 어렵다. 꿈을 꿀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꿈을 버리는 순간 노숙자로 전락할 게 두려울 뿐이다. -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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