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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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장편소설

박경희 옮김

문학동네 출판



 

21세기 베케트, 서사기법의 신비주의자로 불리는 2023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욘 포세 Jon Fosse'의 대표작 『아침 그리고 저녁』을 독파챌린지로 읽었다. 152쪽이라 금방 읽혔다.

1부는 요한네스가 태어나고, 2부는 갑자기 노인의 이야기다. 아침 그리고 저녁의 제목처럼 점심 없이 바로 삶의 처음과 끝을 본다. 왜 중간 없이 건너뛰었을까 한참 고민했는데, 엉뚱하게도 내 주변 노인들이 최근 기억보다 오래 전의 기억을 자주 떠올리고 이야기하던 모습이 생각났고 노인의 특징들이 담겨 있는 건 아닐까 생각들었다.

요한네스는 늙은 지금보다 힘 좋던 젊은 시절을 떠올린다. 페테르는 풍족했던 꽃게를 노처녀 안나 페테르센이 가져가지 않았다며 주고 싶어했고, 요한네스는 죽은 부인 에르나와 일곱 명의 아이를 낳을 만큼 사이가 좋았던 일을 회상했다. 이렇게 느닷없이 갑자기 흐리기만 했던 옛날이 눈앞에 펼쳐지기도 한다.

2부의 중반 쯤 읽으니 이 끝나지 않는 쉼표들이 뭔가 이어지기를 바라는 요한네스의 마음 같기도 했다. 1부의 그 둥둥 떠다니는 소리들 사이의 글들이 느껴졌다면, 2부는 아련한 기억 속에서 글들이 있는 느낌 같았다.

정신 줄을 놓은 사람이 아니라 기억 속의 무언가를 계속 꺼내려는 듯한 말들. 그래서 온점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쉼표로 문장들이 계속 이어지는 듯하다(1부만 읽었을 때는 완전 막막했는데 2부 중반부터는 노인 요한네스를 조금 이해가 되는 듯하다) 왜 이해가 된 걸까..

특별할 것 없던 일상적인 하루가 반복되고, 결국 일상은 삶이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읽어서일까.

노인이 된다면. 죽음을 마주한다면 이런 모습일 수도 있겠다. 두렵기도 하면서도 또 떠나보내고 떠나는 모습이 나도 저럴테지, 상상하게 된다.

삶도 죽음도 왠지 이 책의 속도와 같을 것 같아서 무섭기도 하다. 죽음 속에서 삶을 보고 또 요한네스는 그 죽음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는 듯하다. 소리 없는 고요한 삶. 아니 죽음이겠지만

❤️여담인데요…

출판사 직원분들은 발표 전날부터 야근하며 수상작품에 대한 자료를 수정하고 준비한다는데 촌각을 다투는 기자들이 떠올랐어요. 열정이 대단하게 느껴지는 현장감을, 밤에 불켜진 출판사의 사무실 사진으로도 알 수 있었구요. 이번 첵첵레터💌는 직원분들의 노고가 느껴져서 짠했지만 😅 또 그만큼 좋았어요👍

 

 

🔖책 속 밑줄긋기

확실한 것은, 그가 올라이이고 어부이며 마르타와 결혼했고 요한네스의 아들이며 이제, 언제라도, 조그만 사내아이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 아이가 할아버지처럼 요한네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리라는 것이다. P17

그리고 페테르가 팔을 꽉 붙잡아주는 동안 요한네스는 다른 발도 페테르의 고깃배 난간 위로 올리며 생각한다, 여기서 한 발만 헛디디면 물속으로 풍덩 가라앉는 거군,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에르나도 죽었고 아이들은 다 컸으니, 물고기밥이 된다 한들 대수로울까, 아무래도 좋다, 요한네스는 생각한다 그리고 요한네스는 두 다리로 갑판 위에 안전하게 서 있다 P72-73

하지만 그것들은 마치 소리처럼, 그렇다 그 안의 소리처럼 그의 일부로 그 안에 머물 것이었다, 요한네스는 손을 들어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본다, 모든 것이 아스라이 멀어져가는 것을, 하늘 저 뒤편에서, 사방에서, 돌 하나하나가, 보트 한 척 한 척이 그에게서 희미하게 멀어져가고 그는 이제 더이상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P74

에르나가 살아 있다면 더없이 좋을 텐데, 에르나가 가고 없는 것이 슬프다, 그래도 집이 따뜻하기는 하겠지, 먹을 것도 조금 있고, 하지만 에르나 일은 너무나 안타깝다. 그녀가 떠나야 했던 것은, P101

그러면 게망은 뭐하러 걷어올렸나, 요한네스가 묻는다

자네 삶과의 연결을 끊어야 하니 뭔가는 해야 했지, 페테르가 말한다

그런 거로군, 요한네스가 말한다

그런 거라네, 페테르가 말한다 P130

모든 것이 하나이며 서로 다르고, 하나이면서 정확히 바로, 그 자신이기도 하다, 저마다 다르면서 차이가 없고 모든 것이 고요하다 P134

#아침그리고저녁 #욘포세 #장편소설 #노벨문학상 #문학동네 #북클럽문학동네 #독파 #독파챌린지 #신간도서 #책추천 #서평 #내돈내산

하지만 그것들은 마치 소리처럼, 그렇다 그 안의 소리처럼 그의 일부로 그 안에 머물 것이었다, 요한네스는 손을 들어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본다, 모든 것이 아스라이 멀어져가는 것을, 하늘 저 뒤편에서, 사방에서, 돌 하나하나가, 보트 한 척 한 척이 그에게서 희미하게 멀어져가고 그는 이제 더이상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 P74

그러면 게망은 뭐하러 걷어올렸나, 요한네스가 묻는다

자네 삶과의 연결을 끊어야 하니 뭔가는 해야 했지, 페테르가 말한다

그런 거로군, 요한네스가 말한다

그런 거라네, 페테르가 말한다 - P130

모든 것이 하나이며 서로 다르고, 하나이면서 정확히 바로, 그 자신이기도 하다, 저마다 다르면서 차이가 없고 모든 것이 고요하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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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은 미치고 반은 행복했으면
강혜정 저자 / 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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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은 미치고 반은 행복했으면』

강혜정 산문

달 출판

 

 

 

 

 

 

배우 강혜정 에세이에 50편의 짧은 산문과 사진들이 있다.

예전만큼 작품활동도 많이 하지 않아 궁금했는데 에세이 출간 소식이 반갑게 느껴졌다.

작품을 하지 않는 시간동안 배우가 아니 사람 강혜정으로 어둠에 사로잡히기보다 글을 쓰며 자신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성, 감정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흔적들도 가득하고. 오랜 기억과 상처받은 마음, 자신의 믿음으로 인해 생긴 일에 대해 자책하기도 하며.

돈벌이를 해야하나. 시간만 축내는 것은 아닌가. 회의감과 막연한 생각들로 시간들을 채워간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은 배우라는 직업때문이라기보다 완벽함을 추구하고 싶은 욕망때문에 더 외롭게 자신을 몰아부치는 듯해서 외줄타기 하는 사람을 보는 듯 불안 불안했다.

스스로는 스무 살의 봄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완벽한 혼자가 되었고 실패까지 덤으로 안았다는 생각과 함께.

술에 취한 모습조차 즐거워야하는 스무 살이지만 세상 잃은 듯 소리를 듣는 것도 힘들어했다.

밝고 활기찬 느낌보다 지금껏 달려온 것에 모두를 소진시켜 멈춘 상태처럼 상실감, 공허함이 많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힘을 내야한다고 움직이고 준비해야하는 마음이 억지로 움직이게도 했고.

(왜이리도 어두운지ㅠㅠ)

아름다움을 드러내 보이기 바빴던 젊은 날은 뒤로하고, 쓸쓸할 수 밖에 없었던 넓은 마음을 이제는 행복으로 채워갔으면 좋겠다. 삶에서 미치도록 열심히 했던 시간들은 나를 소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이었다고 기억을 한다면 그 시간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도 생기지 않을까.

ㅡㅡㅡㅡ

 

​▦ 책 속 밑줄긋기

 

후회가 배부른 트림처럼 깊은 한숨으로 쏟아진다. 애써 분위기를 전환하려 가볍게 뱉은 말로 어색함을 배로 만드는 아둔함이란 고치려 해봐도 고쳐지지 않는 착한 질병이겠지. 타인을 위한다는 자만심은 결국 잘못된 선택을 하게끔 만든다. 이럴 때 우리는 조용히 침묵하고 듣고 끄덕이며 안아주기만을 바라면서도, 이내 내뜻을 밝히는 오류를 범할 때가 있다.

P15 <착한 질병>

내 삶에 대한 책임감과 열망의 끝에는 한 뼘짜리 지문으로 통하는 세상에서 자멸하는 엄지손가락의 고뇌만 춤출 뿐이다.

P17 <인피니트 스크롤>

 


 

몸을 단련시키듯 고통의 과정을 반복해야만 그나마 방어구가 생겨나는 것처럼 나는 벌써 이런 이들을 제법 겪은 듯하다. 부디 더이상 결핍에 흔들리는 미련을 범하지 않길 되새김질 해댈 뿐이다.

P20 <그 사람 믿지 마>

상처를 기회로 펴낸 이 작은 책 역시도 아름다움을 표방한 포장지로 서술될 것이다. 그리고 곧 짧은 감탄의 시간이 주어지고 이내 파헤쳐질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고 갈 것이다. 또다시 숨어들 곳을 찾을 준비릉 하면서 말이다.

P68 <흉터>

제발 나서지 말라며 내 허리춤을 붙들고 있던, 냉소를 품은 절제력이 힘에 부쳐 엉덩방아를 찧는 순간, 정으로 빚은 살점을 조금씩 떼어 나눈다. 때론 서슬 퍼런 날에 베여 피가 줄줄 흐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P158 <당신의 라임오렌지나무>

여전히 칭찬은 나를 어렵게 한다.

그렇지만 처절하게 고독하게 순간을 양분삼아 괴로워하고 기뻐하며 세상에 내어놓은 것들이 여전히 관심 있게 보이고 좋게 평가받는 것에는 감사함과 감격이 차오른다.

P221 <강아지풀>

불이 났다.

다 죽었는데 시간만 살아남았다. 다 멈추었는데 저 녀석 혼자 흐르고 있다. 모든 것을 검게 녹인 역동적인 화마를 비웃기라도 하듯 유난히 시간만 차갑게 흐른다.

P231 <魔(마)>

 

 

#반은미치고반은행복했으면 #강혜정 #에세이 #달 #외로움 #북클럽문학동네 #문학동네 #독파 #독파챌린지 #신간도서 #앰배서더 #서평

❤︎ 독파 앰버서더 3기로 ‘문학동네’로부터 도서지원 받았습니다.


후회가 배부른 트림처럼 깊은 한숨으로 쏟아진다. 애써 분위기를 전환하려 가볍게 뱉은 말로 어색함을 배로 만드는 아둔함이란 고치려 해봐도 고쳐지지 않는 착한 질병이겠지. 타인을 위한다는 자만심은 결국 잘못된 선택을 하게끔 만든다. 이럴 때 우리는 조용히 침묵하고 듣고 끄덕이며 안아주기만을 바라면서도, 이내 내뜻을 밝히는 오류를 범할 때가 있다. - P15

내 삶에 대한 책임감과 열망의 끝에는 한 뼘짜리 지문으로 통하는 세상에서 자멸하는 엄지손가락의 고뇌만 춤출 뿐이다. - P17

몸을 단련시키듯 고통의 과정을 반복해야만 그나마 방어구가 생겨나는 것처럼 나는 벌써 이런 이들을 제법 겪은 듯하다. 부디 더이상 결핍에 흔들리는 미련을 범하지 않길 되새김질 해댈 뿐이다. - P20

상처를 기회로 펴낸 이 작은 책 역시도 아름다움을 표방한 포장지로 서술될 것이다. 그리고 곧 짧은 감탄의 시간이 주어지고 이내 파헤쳐질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고 갈 것이다. 또다시 숨어들 곳을 찾을 준비릉 하면서 말이다. - P68

제발 나서지 말라며 내 허리춤을 붙들고 있던, 냉소를 품은 절제력이 힘에 부쳐 엉덩방아를 찧는 순간, 정으로 빚은 살점을 조금씩 떼어 나눈다. 때론 서슬 퍼런 날에 베여 피가 줄줄 흐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 P158

여전히 칭찬은 나를 어렵게 한다.
그렇지만 처절하게 고독하게 순간을 양분삼아 괴로워하고 기뻐하며 세상에 내어놓은 것들이 여전히 관심 있게 보이고 좋게 평가받는 것에는 감사함과 감격이 차오른다. - P221

불이 났다.
다 죽었는데 시간만 살아남았다. 다 멈추었는데 저 녀석 혼자 흐르고 있다. 모든 것을 검게 녹인 역동적인 화마를 비웃기라도 하듯 유난히 시간만 차갑게 흐른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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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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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세계문학전집 0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문학동네 출판

 


 

소설 시작부터 유부남과의 사랑, 일상의 주부에서 불륜을 저지르는 여자의 불안감이 보였다. 그 남자를 생각하며 행복을 느끼지만 그 행복이 사그라질까 걱정했다. 하지만 또 어떤 날은 그는 떠날 것이므로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언젠가 나를 떠나는 순간이 올 거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고통스러운 미래의 쾌락 속에 살고 있다는 표현을 쓰며 이 열정적인 연애를 유지하는 동안 극심한 불안감에 지낸다. 나는 이 모습이 흡사 짝사랑하는, 권태기의 연인을 떠올리게 했다. 


독파 미션 질문 중 A의 손목시계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의 질문에 화자인 '나'는 시계를 보지 않고 존재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싶지만 A는 나와의 시간을 정해두고 자신의 삶과 분리 시킨다는 의미 같았다. 계획적으로. 마음이 아닌 개념으로. 


그녀는 A를 욕구의 대상이 아니라 진짜 사랑했다. 잊기로 하고 한 모든 행동과 시간의 장소에서 그를 떠올렸고 상상했고 함께 했다. 자신은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뜻대로 안되는 혼란 속에서 더 고통스럽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안고 살 것인데 그 비밀을 텍스트로 꺼내 놓으며 내 비밀이 세상에 드러난 듯한 부끄러움이 느껴졌던 책이다. 솔직하지만 같은 감정이었다고 차마 말할 수 없는 과거형의 그 글들이 현재 다른 시점에 다른 이가 썼었지만 왜 내 글 같았는지. 
나도 그 욕망에 그 부재에 대해 솔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는 것을 에르노의 글을 읽으며 부끄럽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드러내 보일 수 없는 무존재로 부재인 상태로 있고 싶다. ^^

 


ㅡㅡㅡ


 

하나하나 어떤 몸짓이나 순간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그 물건들을, 그것들이 이루는 생생한 무질서를 지금 상태 그대로 보존하고 싶었다. 그것들은 미술관에 소장된 다른 어떤 그림도 내게 주지 못할 힘과 고통을 간직한 하나의 그림을 이루고 있었다. P17

 

🔖우리는 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강렬함 속에서 얻은 것은 시간의 질서 속에 사라져갔다. P17

 


 

 

나는 자주 만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혹시라도 내 속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 없도록 적잖이 노력해야 했다.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P20

 

대화를 나누면서 “맞아요. 나도 그래요. 나도 그런 적이 있어요.“하고 남의 말에 맞장구를 치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이런 말들이 내 열정의 실상과는 아무 상관없는 쓸데없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 알 수 없는 감정 속에서 무언가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P21

 

우리 관계에서 그런 시간적인 개념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그저 존재 혹은 부재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언제나’와 ‘어느 날’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면서 열정의 기호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 기호들을 한데 모으면 나의 열정을 좀더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을 열거하거나 묘사하는 방식으로 쓰인 글에는 모순도 혼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글은 순간순간 겪은 것들을 음미하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일을 겪고 나서 그것들을 돌이켜보며 남들이나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인 것이다. P26

 


 

나는 필사적으로 그 사람의 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떠올려보았다. 그 사람의 푸른 눈, 이마 위에서 물결치던 그 사람의 머리카락, 어깨의 곡선이 자세히 생각났다. 그 사람의 치아와 입 안의 감촉이 느껴졌고, 허벅지의 모양이며 꺼끌꺼끌하던 살갗마저 만져지는 것 같았다. 내가 그 사람을 떠올리는 행위와 환각 사이에,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나의 기억과 광기 사이에는 차이점이 전혀 없는 듯했다. P47

 

🔖주말이면 나는 일부러 집안 청소나 정원 손길 같은 고된 육체노동에 매달렸다. 저녁이 되면 나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A가 내 집에서 오후를 지내고 갔을 때처럼 사지가 마비되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타인의 육체에 대한 기억이 없는,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공허한 피로감이었다. P51

 

나는 과거에 실제로 일어난 일과 허구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가늠해보았다. P55

 

살아 있는 텍스트였던 그것들은 결국은 찌꺼기와 작은 흔적들이 되어 버릴 것이다. 언젠가 그 사람도 다른 사람들처럼 내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겠지. P59

 


 

 

🔖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그 사람은 ”당신, 나에 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하고 말했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 글은 그 사람이 내게 준 무엇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P66

 

#단순한열정 #아니에르노 #문학동네 #독파 #북클럽문학동네 #독파챌린지 #앰배서더 #앰배서더3기 #책추천 #세계문학전집 #꼭읽어봐야할책 #2022노벨문학상수상 #서평 #내돈내산

우리는 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강렬함 속에서 얻은 것은 시간의 질서 속에 사라져갔다. - P17


나는 자주 만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혹시라도 내 속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 없도록 적잖이 노력해야 했다.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 P20

대화를 나누면서 "맞아요. 나도 그래요. 나도 그런 적이 있어요."하고 남의 말에 맞장구를 치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이런 말들이 내 열정의 실상과는 아무 상관없는 쓸데없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 알 수 없는 감정 속에서 무언가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 P21

우리 관계에서 그런 시간적인 개념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그저 존재 혹은 부재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언제나’와 ‘어느 날’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면서 열정의 기호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 기호들을 한데 모으면 나의 열정을 좀더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을 열거하거나 묘사하는 방식으로 쓰인 글에는 모순도 혼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글은 순간순간 겪은 것들을 음미하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일을 겪고 나서 그것들을 돌이켜보며 남들이나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인 것이다. - P26

나는 필사적으로 그 사람의 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떠올려보았다. 그 사람의 푸른 눈, 이마 위에서 물결치던 그 사람의 머리카락, 어깨의 곡선이 자세히 생각났다. 그 사람의 치아와 입 안의 감촉이 느껴졌고, 허벅지의 모양이며 꺼끌꺼끌하던 살갗마저 만져지는 것 같았다. 내가 그 사람을 떠올리는 행위와 환각 사이에,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나의 기억과 광기 사이에는 차이점이 전혀 없는 듯했다. - P47

주말이면 나는 일부러 집안 청소나 정원 손길 같은 고된 육체노동에 매달렸다. 저녁이 되면 나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A가 내 집에서 오후를 지내고 갔을 때처럼 사지가 마비되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타인의 육체에 대한 기억이 없는,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공허한 피로감이었다. - P51

나는 과거에 실제로 일어난 일과 허구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가늠해보았다. - P55

살아 있는 텍스트였던 그것들은 결국은 찌꺼기와 작은 흔적들이 되어 버릴 것이다. 언젠가 그 사람도 다른 사람들처럼 내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겠지. - P59

그 사람은 "당신, 나에 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하고 말했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 글은 그 사람이 내게 준 무엇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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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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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소설

문학동네 출판



 

작가는 미성년의 시간이 일곱 소설에 스며있다고 했다. 그 시절의 폭력, 비난 말들로 도망치고 싶었고 내게 무해한 사람이고 싶다고 말했다.

각 소설에서 인물들은 모두 달랐지만 각자 성장 과정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없는 고통들과 싸우고 있었다. 그런 시간들을 읽으면서 과거가 떠오르기도 했고, 어쩌면 현재의 내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같아서 인물들로부터 위로 받기도 하고 숨었던 내 모습을 알아봐주기도 했다. 최은영 작가님의 글을 연이어 읽으면서 폭력과 차별, 우정과 사랑이라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내가 놓인 위치와 나에 대해 조금더 알아볼 수 있고 이해한 것 같아서 너무 좋았다.

다 떠나서.. 글이 넘 좋음 💛

 


📚「그 여름」

 

늘 하루의 한계치만큼 살아내는 것 같이 보였던 수이와 수이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는 이경. 오랜 시간만큼이나 지쳤을테고 성장하는 동안 만나는 관계가 달라지면서 수이와 이경은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점점 더 깨닫는다. 이경은 수이와 헤어지지만 열여덟 뜨거운 여름과 같았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첫사랑이 생각나는 소설.

 

🔖 확신할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말할 수 없는 부분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부분을 저에게 보여줬어요. 저는 그 사람을 위로했고, 그 사람도 저를 위로했죠. 그 사람도 저를 위로했죠. 어떻게 우리가 두 사람일 수 있는지 의아할 때도 있었어요. 네가 아픈 걸 내가 고스란히 느낄 수 있고, 내가 아프면 네가 우는데 어떻게 우리가 다른 사람일 수 있는 거지? 그 착각이 지금의 우리를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들고 만들었는지도 몰라요. P29

 

무너지기 직전의 연애, 겉으로는 누구의 것보다도 견고해 보이던 그 작은 성이 이제 곧 산산조각날 것이라는 예감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최선을 다해서 마지막을 준비했는지도 모른다. P49


수이는 시간과 무관한 곳에, 이경의 마음 가장 낮은 지대에 꼿꼿이 서서 이경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수이야, 불러도 듣지 못한 채로, 이경이 부순 세계의 파편 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곳까지 이경은 손을 뻗을 수 없었다. 은지를 만나지 않았다면 수이와 헤어지지 않았을까. 그 가정에 대해 이경은 자신이 없었다. P59

 


📚「601,602」

 

남아선호사상이 뿌리깊게 자리잡은 우리나라의 70-80년대 이야기 같기도 하다. (어쩌면 지금도 있을..) 여자로 태어난 게 잘못인가 싶을 정도로 가혹했고 살기힘들다는 소리기 나올 차별의 현장이다.

 

에미가 되어서 돈 번다고 애를 방치한다는 말을 듣던 엄마는 막상 직장을 관두고서는 남편 잘 만나 집에서 속 편하게 노는 여자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P77

 


📚「지나가는 밤」

 

친언니가 생각났다. 그렇게 싸웠는데 이제는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한다. 어쩌면 그때도 내 모습같았던 것 때문에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고. 먼 곳에서 다른 환경과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유년기의 기억 때문에 여전히 함께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얼굴만 서로 늙어가는 것은 착각이 아니겠지만^^)

 

어린 시절은 다른 밀도의 시간 같다고 윤희는 생각했다. 같은 십 년이라고 해도 열 살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그 이후 지나게 되는 시간과는 다른 몸을 가졌다고. 어린 시절에 함께 살고 사랑을 나눈 사람과는 그 이후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끝끝내 이어져 있기 마련이었다. 현실적으로 서로 아무 관계없는 사람들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P97

 

어른이 된 이후의 삶이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윤희야, 온 마음으로 기뻐하며 그것을 기다린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고 사랑해주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P99

 

기억나지 않는 시간은 어디로 가는 걸까……P101

 


📚「모래로 지은 집」

 

단편 중 가장 긴 글이었지만 가장 좋았다.

고등학교부터 가정폭력을 겪는 공무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의 모래, 나는 통신으로 만나 스물하나의 나이가 되기까지 세트처럼 지낸다. 공무, 모래, 나는 서로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듯 하면서도 함께 공유하는 것들에 대해 자신이 상처입을까봐 한발짝 뒤에 있었다. 그러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서 행복하지만 모래로 지은 집처럼 그 시간은 허물어져 희미하다.

그 시절 미니홈피 사진과 글을 보며 감성에 젖어보려했던 기억도 떠올랐고, 통신이라는 매개로 청춘에 대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서로의 글을 읽으며 알아봐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비록 허물어져 없어져버릴 모래집일지라도 짓는 동안은 행복했었던 그 시간.

 

나는 자신이 겪은 일을 자기 말로 풀어 쓸 수 있는 그애의 능력과 끝까지 자기 연민을 경계하는 태도에 마음이 갔다. P109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사람에게 연연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상하고 망가지고 비뚤어진다고 생각했으니까. 구질구질하고 비뚤어진 인간이 되느니 차라리 초연하고 외로운 인간이 되는 편을 선택하고 싶었다. P112



 


어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금이라도 알아낼 수 있다면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가짜 이유라도 만들어서 믿고 싶었다. P121

 

네가 뭘 알아, 네가 뭘. 그건 마음이 구겨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과시였다. P127



 


📚「고백」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은 신경들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미주, 진희, 주나.

예민하다고 여중학생들만의 아픈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내가 한 고백이 나에게 너에게 우리 모두에게 상처가 되는 건 언제든 될 수 있으니까.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 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P209

 


📚「손길」

 

혜인. 정희.

자신의 꿈을 위해 부인과 자식을 상처로 내 몰았던 아빠를 미워하지도 않는다. 고생하는 엄마에게 티를 내지도 않는 성숙했던 어린 혜인은 스무살 초 젊은 숙모와 함께 있을 때면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배꼽 잡고 깔깔 웃는 딱 그 나이의 아이로 돌아갔다. 시간이 흘러 오랜만에 만난 숙모를 혜인은 그리워했다고 이제 혜인이 숙모에게 다가간다.

 

그들은 삼촌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제대로 바라보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혜인이 아는 한 그런 말을 했던 사람 중에 삼촌보다 더 행복한 이는 없었으니까. 겪어보지 못한 일을 상상할 수 없는 무능력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삶에 기대어 삼촌의 불행을 어림짐작했다. P222

 

그 모든 것들이 혜인에게 위안을 줬다. 사람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행복이 얼마나 위태롭고 위험한 것인지 여자로부터 배운 셈이라고 혜인은 종종 생각하곤 했다. 사람은 그런 식으로 쉽게 행복해질 수 없는 법이라고.P226

 


📚「아치디에서」

 

랄도는 하민이 가족으로부터 상처받은 마음을 통해 자신이 상처준 가족을 떠올린다. 나약한 나였기 때문에 가족이라고 해서 나를 위해 희생하고 무조건 적인 포용해야한다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하민을 보며 깨닫게 하다니. 이 소설을 읽고 이렇게 자신을 변화시키는 사랑도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힘들게 한 사람이 떠오르기 때문일까. 사랑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같은 느낌.

 

그렇지만 마음이 아팠다. 삶이 자기가 원치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 가버리고 말았을 때, 남은 것이라고는 자신에 대한 미움뿐일 때, 자기 마음을 위로조차 하지 못할 때의 속수무책을 나도 알고 있어서. P274

 


 

#내게무해한사람 #최은영 #단편소설 #최은영을읽는물결 #독파 #완독 #책추천 #문학동네 #북클럽문학동네 #앰배서더 #서평 #내돈내산

확신할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말할 수 없는 부분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부분을 저에게 보여줬어요. 저는 그 사람을 위로했고, 그 사람도 저를 위로했죠. 그 사람도 저를 위로했죠. 어떻게 우리가 두 사람일 수 있는지 의아할 때도 있었어요. 네가 아픈 걸 내가 고스란히 느낄 수 있고, 내가 아프면 네가 우는데 어떻게 우리가 다른 사람일 수 있는 거지? 그 착각이 지금의 우리를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들고 만들었는지도 몰라요. - P29

기억나지 않는 시간은 어디로 가는 걸까…… - P101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사람에게 연연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상하고 망가지고 비뚤어진다고 생각했으니까. 구질구질하고 비뚤어진 인간이 되느니 차라리 초연하고 외로운 인간이 되는 편을 선택하고 싶었다. - P112

네가 뭘 알아, 네가 뭘. 그건 마음이 구겨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과시였다. - P127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 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 P209

그들은 삼촌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제대로 바라보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혜인이 아는 한 그런 말을 했던 사람 중에 삼촌보다 더 행복한 이는 없었으니까. 겪어보지 못한 일을 상상할 수 없는 무능력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삶에 기대어 삼촌의 불행을 어림짐작했다. - P222

그렇지만 마음이 아팠다. 삶이 자기가 원치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 가버리고 말았을 때, 남은 것이라고는 자신에 대한 미움뿐일 때, 자기 마음을 위로조차 하지 못할 때의 속수무책을 나도 알고 있어서.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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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못 버린 물건들 - 은희경 산문집
은희경 지음 / 난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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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_못 버린 물건들』

 

은희경 산문

난다 출판





 

주부로 늙어가는 즐거움과 하소연.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살림살이의 고달픔. 그럼에도 일상이라 할 수 밖에 없는 글이지만 이 산문이 더 와닿은 이유는 물건들이 나라는 것, 나의 시간들이었다는 것. 버리지 못하는 나에게 집착이 무엇이었는지를 들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다 필요해서 샀던 것이고 모아보고 돌이켜보면 나의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주는 물건들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물건들의 색이 바래진다는 것은 낡아지는 것에 대한 쓸쓸함일 수 도 있는데, 어쩌면 그런 물건들은 쓰임이 다 했기에 버려지는 것이지만 정을 주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좀 더 그 시간들을 잡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책 속에 나오는 글처럼 물건과 잘 이별해야하는데 그냥 쓰레기로 버려지는 것이 그 시간을 그렇게 처분해버리는 것을 볼 수 없어서 붙잡고 있었을지도.

 

헌 물건을 버리고 새로운 물건을 사는 일. 그리고 잘 보내주는 일은 아직은 익숙하지 않지만 용기내어 해야 내 과거, 현재, 미래를 잘 정리하는 일은 아닐까 생각한다.

물건 뿐 아니라, 나이가 들어도 새롭게 시작하는 초보자, 마이너가 될 수 있으니 용기를 내라고 말한다. 늘 익숙함에 머물러 있기보다 낡고 헤지면 새로 바꾸어야 하는 것처럼 자연스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우울해할 필요없고 하면 할 수 있는 일이니.

 

유독 <반지> 글을 읽으면서 나도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자라면서는 왜 그렇게 우리에게 소홀했는지 섭섭했고, 다 커서는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알면서도 변화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답답해했다. 그러면서도 엄마의 빈자리가 늘 그리웠고 함께 했던 추억들을 떠올리며 현재의 잠깐 잠깐의 시간을 또 그런 행복으로 채워보기도 한다. 엄마의 인생이라는 것도 있었음을 내가 살아보니 알겠고 또 그 시대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아 속상해 했을 엄마에게 고생많았다고 나도 이제 잘 산다며 포근히 안아주고픈 마음도 든다. 그렇게 못했던 기억을 내가 알면 엄마도 아는 것이겠지. 내가 아이의 표정만 보아도 아는 것처럼.

 

내가 행복을 너무 슬픔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나름의 행복으로 잘 살고 있는 삶인데 내 기준으로 힘들었겠다고 판단하고 미리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많이 바뀌었고 배웠다 생각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부모님께는 왜 적용하지 않았나. 죽은 사람을 기억할 때 슬픈 기억보다 추억하고 행복했던 시절들을 떠올려보듯 살아계실 때에도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고 더 다정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따스함을 전달해드리는 것 남에게도 하면서 엄마 아빠에게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또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투덜대겠지만)

 

 


◈ 책 속 밑줄긋기

 

그 시절의 나에게 음주는 일종의 시간제 타락 체험 같은 것이었다. 그 체험장에 입장하면 생활에 시달리고 타인에게 위축된 나 대신 무책임하고 호탕한 내가 있었다. 취한 눈으로 나를 보니 소심하고 고지식하다고만 알아온 내가 제법 솔직하고 웃기고 패기조차 있고, 무엇보다 좌절된 꿈을 가슴 깊이 숨긴채로 살아가는 게 아닌가. P15

 

급히 쟁반에 잔을 챙기는데, 모여 앉은 사람 수대로 유리잔 다섯 개는 가까스로 갖춰놓았지만 짝이 맞는 게 한 벌도 없었다. 크기조차 다 달라서 맥주를 따르니 술의 양도 제각각이었다. 그 술상이 어쩐지 임시변통으로 살아가는 내 삶의 남루한 모습 같았다. P16

 

집안 구석구석 처박혀 있던 오래된 물건들이 그 집에서 살아낸 세월을 하나하나 떠오르게 했고, 버릴 물건과 아닌 물건을 가리다보면 어느샌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추억에 잠겨 있곤 했다. P78



 

엄마가 돌아가신 뒤 엄마를 의식하고 엄마의 범주 안에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 새로운 장소나 여행지에 갈 때마다 그곳에 엄마가 있다면 분명 이랬을 거라고 떠올리게 되는 일. 그것은 엄마가 그 장소를 즐길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혹은 내가 더 잘했더라면 하는 후회와 아쉬움만은 아니었다. 나를 믿어주었던 엄마가 더이상 내 곁에 없다는 상실의 실감이었다. P81

 

의기소침하고 외로웠던 나라는 엔진을 가동시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내 안에 이물질을 집어넣고 그것을 쫓아가도록 자극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나의 삶이라는 건축물에 색다른 블럭을 끼워넣음으로써, 새로운 분야의 초보가 됨으로써, 매너리즘과 헛된 욕심에 빠진 나로 하여금 첫마음을 돌아보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P146-147

 

초보가 된다는 것은 여행자나 수강생처럼 마이너가 되는 일이기도 하다. 익숙하지 않은 낯선 지점에서 나를 바라보게 된다. 나이들어가는 것, 친구와 멀어지는 것, 어떤 변화와 상실, 우리에게는 늘 새롭고 낯선 일이 다가온다. 우리 모두 살아본적 없는 오늘이라는 시간의 초보자이고, 계속되는 한 삶은 늘 초행이다. 그러니 ‘모르는 자’로서의 행보로 다가오는 시간을 맞이하는 훈련 한두 개쯤은 해봐도 좋지 않을까. P147

 

삶은 우리의 정면에만 놓여 있는 게 아니지만, 만약 정면에 놓여 있다면 그 또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뚫고 나가야 할 때라면 그렇게 해야겠지. 언제나 인간의 편으로 같은 자리를 지켜주는, 그래서 실생활에서는 쓸모없어 보이는 예술, 문학의 위로와 함께.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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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히 쟁반에 잔을 챙기는데, 모여 앉은 사람 수대로 유리잔 다섯 개는 가까스로 갖춰놓았지만 짝이 맞는 게 한 벌도 없었다. 크기조차 다 달라서 맥주를 따르니 술의 양도 제각각이었다. 그 술상이 어쩐지 임시변통으로 살아가는 내 삶의 남루한 모습 같았다. - P16

집안 구석구석 처박혀 있던 오래된 물건들이 그 집에서 살아낸 세월을 하나하나 떠오르게 했고, 버릴 물건과 아닌 물건을 가리다보면 어느샌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추억에 잠겨 있곤 했다 - P78

엄마가 돌아가신 뒤 엄마를 의식하고 엄마의 범주 안에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 새로운 장소나 여행지에 갈 때마다 그곳에 엄마가 있다면 분명 이랬을 거라고 떠올리게 되는 일. 그것은 엄마가 그 장소를 즐길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혹은 내가 더 잘했더라면 하는 후회와 아쉬움만은 아니었다. 나를 믿어주었던 엄마가 더이상 내 곁에 없다는 상실의 실감이었다. - P81

의기소침하고 외로웠던 나라는 엔진을 가동시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내 안에 이물질을 집어넣고 그것을 쫓아가도록 자극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나의 삶이라는 건축물에 색다른 블럭을 끼워넣음으로써, 새로운 분야의 초보가 됨으로써, 매너리즘과 헛된 욕심에 빠진 나로 하여금 첫마음을 돌아보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 P146

초보가 된다는 것은 여행자나 수강생처럼 마이너가 되는 일이기도 하다. 익숙하지 않은 낯선 지점에서 나를 바라보게 된다. 나이들어가는 것, 친구와 멀어지는 것, 어떤 변화와 상실, 우리에게는 늘 새롭고 낯선 일이 다가온다. 우리 모두 살아본적 없는 오늘이라는 시간의 초보자이고, 계속되는 한 삶은 늘 초행이다. 그러니 ‘모르는 자’로서의 행보로 다가오는 시간을 맞이하는 훈련 한두 개쯤은 해봐도 좋지 않을까. - P147

삶은 우리의 정면에만 놓여 있는 게 아니지만, 만약 정면에 놓여 있다면 그 또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뚫고 나가야 할 때라면 그렇게 해야겠지. 언제나 인간의 편으로 같은 자리를 지켜주는, 그래서 실생활에서는 쓸모없어 보이는 예술, 문학의 위로와 함께.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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