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관제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유럽 왕조들의 ‘귀화‘ 많은 경우 어떤 흥겨운 곡예가 필요했던 작전들 •는 이윽고 시턴-왓슨이 신랄하게 ‘관제 민족주의‘ (officialnationalism)‘라고 불렀던 것으로 이어졌으며, 차르식 러시아화는 이것의 가장 잘 알려진 사례일 뿐이다. 이러한 ‘관제 민족주의‘들은 특히 중세로부터 축적되어 온 거대한 다언어 영지에 대한 왕조 권력의 유지를귀화와 결합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짧고 꽉 끼는민족의 피부를 제국의 거인 같은 몸통에 늘여 씌우기 위한 수단으로서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차르의 이질적인 신민 집단에 대한 ‘러시아화‘
는 그리하여 고래의 것 하나와 꽤 새로운 것 하나, 이렇게 두 가지 대립되는 정치적 질서를 폭력적. 의식적으로 용접하는 과정을 표상했다. - P139

관제 민족주의들은 반동적이지는 않을지라도 보수적인 정책으로서, 대개 자연발생적으로 선행했던 인민 민족주의 모델을 각색한 것이었다. 이들은 궁극적으로 유럽과레반트 지역에만 국한되어 있지도 않았다. 제국주의의 이름으로 매우유사한 정책들이 같은 부류의 집단들에 의해 19세기 동안 예속된 광대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영토들에서 추진되었다. 마지막으로, 비유럽 문화 - P170

와 역사로 굴절해 들어간 관제 민족주의는 직접 예속을 피한 얼마 안 되는 지구(그중 일본과 시암)에서 토착 지배 집단에 의해 선택, 모방되었다.
거의 모든 경우, 관제 민족주의는 민족과 왕조의 영지 간의 불일치를은폐했다. 그리하여 나타난 범세계적 모순에 의하면, 슬로바키아인들은마자르화되고, 인도인들은 잉글랜드화되고, 한국인들은 일본화되겠지만, 그들은 마자르인들, 잉글랜드인들, 일본인들을 통치할 수 있는 순례에 참가할 허가를 받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들이 초대받은 연회는 늘 알고 보면 먹을 것이 없는 잔치였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이유는 단순히 인종주의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의 핵심에서 민족들- 헝가리 민족,
잉글랜드 민족, 일본 민족- 도 출현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민족들은 ‘외국‘의 지배에 본능적으로 저항적이기도 했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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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영국의 베일 논쟁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영국은 이민정책으로 ‘문화적 동화(cultural as-Similation)‘ 정책을 실시해 이민자들을 영국의 주류 문화로 흡수하고, 다인 - P205

종·다문화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동화만을 고집해온 프랑스와 달리 영국은 통합 대상의 규모가 적정선을 넘어서면 동화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판단하에 실용주의 노선을 취했다(Weil and Crowley, 1994:117).

1960년대 중반부터는 다문화주의 통합 정책이 기저를 이루고 있다. 1966년 노동당 정부의 내무장관 로이 젱킨스(Roy Jenkins)는 "통합이란 동화라는 획일적 균등화의 과정이 아니라 상호 관용의 분위기 속에서 문화적 다양성이 수반되는 동등한 기회"라고 정의함으로써 영국 이민자 통합의 방향을 제시했다(Jenkins, 1967: 267). - P206

영국 사회 무슬림 집단의 가장 큰 불만은 인종차별을 다루는 인종관계법이 그들의 차별 문제를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재 영국의 이민자 집단은 다양한 문화 · 종교 · 만족. 인종에 기초하고 있음에도 인종관계법은 피부색에 따른 인종만을 기준으로 삼는다. 예컨대 피부색을 문제 삼아 흑인을 차별하면 법적으로 처벌받지만, 종교적 이유로 무슬림을 차별하는 것에 대해서는 법적 처벌 기준이 마련되지 않았다(정희라, 2007: 19).
게다가 무슬림과 같이 종교적 성향으로 구분되는 이민자 집단들은 인종관계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 반면, 시크교도와 유대인은 인종으로 구분되었다. 그 결과 유대인 남성의 모자와 시크교도의 터번은 종교적 상징이 아니라 인종적 정체성의 상징으로 인정된 반면, 이슬람 여성의 베일은 순수하게 종교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되었다(염운옥, 2010: 16; Abbas, 2005:52). - P211

1990년대 말, 수전 몰러 오킨(Susan Moller Okin)은 소수 이민자 집단의문화적 다양성을 보호하기 위한 다문화주의 정책이 집단 내부의 차이를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여성의 권리와 이익을 훼손할 수 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Okin, 1999).

레티 볼프(Leti Volpp)는 페미니즘과 다문화주의를 대립항으로 파악하 - P213

면 소수집단의 여성을 해당 문화의 ‘희생자‘로만 보게 될 뿐 ‘행위 주체‘로서 여성을 보지 못한다고 지적하며, 페미니즘과 다문화주의는 상호 보완적이어야 하고 양자 간 건설적 대화가 필요하다고 제안한다(Volpp, 2001).
서구 대 비서구, 현대 대 전통이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조 속에서 제3세계의 소수 문화가 여성 억압적이며 열등하다는 시각이 다문화주의와 페미니즘 간 갈등을 강화한다는 주장도 있다. - P214

실제로 여성 억압적 관행들은 주류 문화와 갈등하는 소수 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가부장제에 의한 ‘젠더폭력‘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다문화주의의 위기 속에 젠더 이슈가 소수 문화와 종교에 대한 비판의 형태로 제기되면서 여성의 인권이 그에 대한 명분으로 이용되고 있다. 여성억압적 젠더 이슈들이 소수 문화의 본질적 특징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경제적·사회적·문화적 · 젠더적 불평등이 교차 · 중첩된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함으로써 주류 문화와 마찬가지로 소수 문화도 내적 다양성과 변화가능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 P215

단순히 소수집단의 수적 증가만으로 다문화주의를 둘러싼 갈등이 증폭되지는 않는다. 스트로를 비롯한 정치인들의 니캅 발언에서 볼 수있듯이, 이러한 갈등들은 문화적 차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집단에 의해 비로소 사회문제화되는데, 특히 경기후퇴기에 이들의 선동은 사회적소수를 둘러싼 갈등을 증폭시키고, 모든 비난을 쏟아부을 희생양으로 이주민을 선택해 공격하도록 유도한다(김남국, 2009: 286). - P220

영국에서 베일에 대한 법적 규제를 할 것인지 여부는 핵심 사안이 아닐 수있다. 오히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베일 논쟁이 그동안 영국이 공식적으로 표방해온 다문화주의 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라는 여론을 조성하는 데 기여한다는 사실이다. 즉, 베일 논쟁이 순수한 젠더 이슈로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통합 정책으로의 여론 조성이라는 다문화 이슈의 방패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 P223

여성은 직접 히잡 착용을 선택할 권리가 있으며, 그 선택이 교육권과 같은 다른 권리를 실행하는 데 어떤 영향도 끼쳐서는 안 된다는 점, 즉 머리카락을 가리는 것은 문화적·종교적 자유이고, 이러한 자유에 사회가 어떤차별이나 위협을 가하면 안 된다는 젠더 평등(여성의 인권·평등)이 전제될때 젠더 이슈는 문화적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다문화주의와 비로소 동등한공존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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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이래 민족 형성을 촉진하기 위해 어떠한 상징적, 물리적 폭력이 필요했는지를 보여 주는 다수의 탁월한 역사 연구가 있다. 이 연구들에 따르면 민족 형성은 이미 존재하는 다양성을 거슬러 성취해야 했던 동질화였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영역, 다양한 수준의 방대한 개입이 필요했다. 물질적, 정서적, 문화적 동질화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비판적 역사학의 진영에서는 민족이 결코 완성된 적이 없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민족은 충족된 적이 없다. 다시 말해 동질 사회가 완전히 동질적인 적은 없다. 그러나 비판적 역사 연구가 전하는 이 모든 통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비판적 역사학자들은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는 본질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민족이 잘 기능하는 허구라는 사실이다.
동질 사회라는 상상은 언제나 허구였다. 그러나 잘 기능하는 허구였다. 민족은 게다가 기능이 대단히 뛰어난 허구였다.

서구의 민주화된 민족 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이중화되어 있다. 우리는 부르주아(Bourgeois)이자 시투아앵(Citoyen)이다. 시민(Burger)이자 동시에 국민(Staatsburger)인 것이다. 시민으로서 우리는 모두 사인(私人)이다. 서로 구별되는 특징이 있는 개인이며, 이 특징이 우리를 분류한다. 우리는 남성이거나 여성이며, 가난하거나 부유하며, 공무원, 농부, 교사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구별된다. 그러나 시투아앵으로서, 다시 말해 국민으로서 우리는 공인(公人)인데, 우리는 모두 동등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민주주의의 본질 요소가 들어 있다. 이것이 우리를 추상적 동등으로 이끈다.

이전의 개인주의는 개인의 다른 유형을 만드는 일이었다. 법권리 주체, 유권자, 국민은 추상화를 통해 생성되기 때문이다. 개별 사인으로서 개인은 언제나 구체적이고 구별된다. 그러나 공인으로서 개인은 구별되는 특성들을 추상화함으로써 동등해진다. 다시 말해 특수한 차이들을 무시할 때에만 각각의 개인은 전체의 동등한 부분이자 주권을 구성하는 동등한 일부가 된다. 이 점에서는 개인 사이를 결합하는 요인이 바로 개인의 특수한 직분에 대한 추상화다. 우리를 구별하는 것들을 무시할 때에만 우리는 전체의 동등한 부분이 된다.

한 사회의 동질화는 단순히 단일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차이가 부차화된다는 데 가깝다. 더는 차이가 없다고 해서 사회가 동질화되는 것이 아니다. 차이가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때, 공통된 것 앞에서 차이가 부차화될 때 사회는 동질화된다. 민족 유형이 제공하는 이 공통된 것은 유사성의 원칙에 기초한다. 공통된 형상 속에서 민족의 모든 구성원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상상된 공동체’는 이러한 유사성의 사회다.

민족 서사는 민주주의적 개인이 자기 자신을 공인으로 재인식할 외형을 제공한다. 이 외형의 윤곽은 가변적이다.
바로 이 형상이 우리가 같은 민족 구성원을 모두 안다고 믿게 한다. 우리는 같은 유형에 속하는 다른 모든 이들과 동일시한다. 이러한 형상이 존재하기에 민족이라는 환상이 작동했고, 바로 그래서 동질 사회라는 환상은 잘 작동했다.

프로이트 이래 우리는 당연하고 직접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소속이 허구의 속임수임을 알고 있다. "자아는 자기 집의 주인이 아니다."라는 잘 알려진 명제로 프로이트는 자아와 집 양자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자아의 자명함을 문제 삼고, 자기 소유로서의 집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은 바로 이 두 가지 환상을 전 국민이라는 거대한 규모의 집단에게 오랫동안 정당화하는 데 성공했다.

자기 집을 다른 단어로 표현하면 환경이다. 환경이란 주위 환경이다. 하나의 전체를,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환경. 민족의 경우 이 하나의 환경이 전국을 에워싼다.

개인의 정체성에 관련해 지금의 변화는 다음을 의미한다. 동질 사회의 환경이 천천히 해체되면, 우리 모두는 더 이상 온전한 정체성을 갖지 못한다. 우리는 이제 온전하고 당연하며 분명한 정체성을 갖지 못한다. 온전하고 당연하며 분명한 소속도 없다. 더 이상의 허구는 없다.

민족의 귀환은 바로 다원화 사회에서 민족은 사라지는 대신 침식되고 있다는 증거다.
이러한 침식은 민족이라는 세계가 더 이상 유일한 환경도 아니고, 하나의 당연한 세계도 아님을 드러낸다. 민족은 더 이상 완전한 소속과 온전한 정체성에 대한 약속이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환경이 다른 환경에 의해 쉽게 해소되지 않았으며, 민족 유형도 다른 유형에 의해 해소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새로운 주도 권력이 발달했다는 말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단 하나의 유형으로, 단 하나의 환경으로 조직되지 않는다는 점이 변화의 가장 무거운 본질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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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문화적 인종주의‘는 초기 생물학적 인종주의를 대체한 개념으로서 유럽중심의 백인 우월주의를 피부색이 아닌 문화적 차이로 설명한다. 이 용어는 1967년에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이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실제 그개념이 확장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마틴 바커(Martin Barker)에 의해서라고 전해진다(Barker, 1981). 1970~1980년대 영국적 맥락에서 그는 문화적 차이가 적대적 인간관계를 만들어낸다고 보았고, 따라서 문화적 차이때문에 민족국가가 폐쇄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문화적 인종주의가 하나로 경계 지어진 문화 단일체로서의 민족 건설이라는 개념에 토대를 둔다고 보았다. - P164

이슬람 관점에서 일반적으로 여성의 베일 착용은 이슬람을 지킨다는 종교적 의미, 무슬림 공동체에 속한다는 정치적 의미, 가족의 요구를 수렴한다는 사회적 의미, 성적으로 자신을 보호한다는 윤리적 의미가 있다(황병하, 2010: 61). 그뿐만 아니라 앞서 설명한 바처럼 서구 식민 경험이 있는국가에서는 베일 착용이 종교적 정체성 구현의 상징이자 저항의 도구로사용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서구 이민 국가에서 무슬림 여성 이민자의 베일 착용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영국의 무슬림 베일 논쟁을 연구한 염운옥(2010: 23)은 영국 내 무슬림여성 이민자가 안전, 종교적 경건함, 정숙의 표시, 패션 등 다양한 이유로베일을 착용한다고 전한다. 하지만 최근 영국 사회에 이슬람 혐오 정서가높아지면서 무슬림 여성이 무슬림 공동체적 정체성에 귀속해 안정감과 안전을 얻으려는 동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 P169

호주에서 정교분리는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기독교를 믿는 대다수 백인 호주인의 일상생활에는 기독교 문화나 관행이 자연스럽게 뿌리내려 있다. 아울러 호주 정부나 정치인들도 예나 지금이나 ‘유대-기독교(Judaeo-Christianity)‘적 전통이 호주 사회의 핵심 가치 또는 핵심 문화라는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 P171

호주에서 무슬림 여성의 베일 착용은 종교적 의미, 무슬림공동체에 속한다는 정치적 의미, 가족의 요구를 수렴한다는 사회적 의미,
성적으로 자신을 보호한다는 윤리적 의미 등 다양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있다. 이는 호주 무슬림 인구의 이민 시기, 이민국의 종교와 문화적 특성,
이민 배경, 호주 사회 내 사회적·경제적 배경이 다양한 만큼 베일 착용의의미 또한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점을 알려준다. 하지만 베일 착용을 두고여성 개인의 자발적 선택이라기보다는 무슬림 공동체의 종교적·사회적압박에 의한 자발적 강제라는 시각이 부각되고 있다. 이렇듯 베일에 대한호주 주류 공동체의 부정적 시각은 베일을 착용한 무슬림 여성에 대한 인종적 타자화 현상을 심화시키고 있으며, 그로 인해 무슬림 여성의 안전과무슬림 정체성에 대한 위협이 호주 사회에서 확산되어간다고 볼 수 있다. - P190

무슬림 여성의 베일 착용 문제는 호주 사회 내 무슬림과 비무슬림 인구 간 갈등의 핵심에 놓여 있다. 베일을 둘러싼 논쟁에는 무슬림여성의 권리와 안전과 같은 페미니스트들의 언어가 등장하지만, 실제 두집단 모두 여성의 권리와 안전 향상에 귀결되는 주장을 제시하고 있지는않다. 특히 베일 착용 금지와 호주성을 둘러싼 비무슬림 호주인들의 논의는 그들이 세속주의, 반인종주의, 젠더 평등 수호라는 기치 아래 오히려 호주 사회에 깊이 내재된 백인. 기독교 · 남성 중심적 가치를 더욱 확대·재생산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보여준다.
더욱이 호주 사회에서 무슬림 남성이 비무슬림 여성에게 저지른 성폭력범죄와 공동체 간 인종 분쟁 사건, 부르카를 이용한 범죄 등은 무슬림 공동체에 대한 인종적 타자화 현상과 함께 호주의 민족 정체성 유지·강화현상을 더욱 급속도로 진전시켰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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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언어는 외부의 힘과 인간 화자 간의 연속성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언어 사용자들이그들끼리 창조하고 성취한 내부계가 되었다." 이러한 발견들로부터 언어학(philology)이 나왔고, 비교 문법과 어족으로의 언어 분류, 과학적추론을 통한 망각되어 가는 ‘조어들‘ (proto-languages)의 재구성 등의연구가 출현했다. 홉스봄이 옳게 관찰했듯이, 여기에 ‘진화를 그 핵심으로 여긴 최초의 학문‘이 있었다.
이 시점으로부터, 오래된 신성한 언어들인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는 일상어 경쟁자들이라는 잡동사니 평민 떼거리와 동등한 존재론적지위에서 섞이는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움직임은 일찍이 인쇄자본주의에 의해 시장에서 강등당한 것을 보완했다. - P117

귀족들과 지주 젠트리, 전문직, 관리, 시장의 사람들. 이제 이들이 언어학적 혁명의 잠재적 소비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객층이 완전히현실화된 곳은 거의 없었으며, 실제 소비자들의 조합은 지역에 따라 굉장히 많이 달랐다. 그 이유를 알아보려면 일찍이 이야기했던 유럽과 아메리카들 사이의 기본적 대조점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아메리카에서는 - P126

서로 다른 제국의 범위와 그 제국에서 쓰이는 일상어들의 범위가 거의완벽하게 같은 모양을 이루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이러한 일치가 드물었고, 유럽 내부의 왕조 제국들에는 기본적으로 일상어가 여러 개였다. 즉 권력의 영지와 활자어의 영지가 서로 상이하게 그려졌다. - P127

아메리카의뒤범벅된 덩어리로부터 민족국가들, 공화제들, 공민권들, 인민주권, 국기들과 국가들 등등의 상상된 현실들이 출현하는 한편, 이들의 개념적대립물들인 왕조 제국들, 군주제들, 절대주의들, 신민성(subjecthood)들, 세습귀족제들, 농노제들, 게토들 등은 청산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보면 19세기 미국이라는 ‘양식‘에서 대규모 노예제가, 그리고 남아메리카 공화국이라는 ‘양식‘에서 공유된 언어가 일반적으로 ‘탈락‘하는 현상보다 더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일도 없다.) 게다가 청사진의 유효성과 일반화가능성은 독립 국가들의 다수성(plurality)에 의해 의심의 여지 없이 확증되었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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